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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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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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대 앞에서 목격한 5.18
    광주광역시 남구 양과동 지산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이야기. 2018년 4월 12일 광주광역시 남구 양과동 지산마을에 거주하는 주민 윤정이[여, 82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 제보자 윤정이는 동명동에서 하숙을 하고 있는 아들이 무사한지 확인하기 위하여 전라남도청에 갔다가 다음과 같은 상황을 목격하였다. 도청에 시체들을 개처럼 끌어다 줄줄이 놓았고,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관에 담고 태극기로 덮어 분향하였다. 그 당시 윤정이가 아들의 이름이 명단에 없는 것을 확인한 후, 그녀가 진월동으로 걸어가는 도중에 헬리콥터에서 총이 연사되었다. 윤정이는 총을 피하기 위해 여관 골목에 있는 변기에 몸을 수그렸지만 군인에게 잡혀 효천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끌려갔고, 그녀는 그곳에서 계엄군이 어린아이를 총으로 쏜 모습도 목격하였다. 한편, 광주대학교 부근에서 계엄군들이 총을 난사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효천 연탄공장 근처 분뇨처리장에 시신이 가득하였다고 한다. 「광주대 앞에서 목격한 5.18」 이야기의 주요 모티프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목격담'이다. 5.18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 동안 광주 시민들이 독재 정권에 맞선 민주 항쟁이다.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 조사와 진실 규명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윤정이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라남도청과 그 일대에서 벌어진 사건을 목격하였는데,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이 얼마나 심각하였는지 알 수 있다. [참고문헌] 5.18민주화운동기록관(https://www.518archives.go.kr)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1 | NO.7
  • 기우만의 안용환에 대한 답장
    1931년 간행된 기우만(奇宇萬,1846~1916)의《송사집(松沙集)》4권에 죽산안씨 20세 안용환(安龍煥,1857~1911)에게 답장했던 편지글이 남겨져 있다. 경운(慶雲)은 청심당(淸深堂) 안용환(安龍煥)의 자(字)이다. 答安慶雲 龍煥 令胤來。兼奉惠翰。若餠若饌。山廚太侈。貧士支供。想得勞心。旋深不安。犯曛伻發翳眼難於作答。追惟如噎。更請軆候萬裕。弟不病而病。百凡無足言。胤君朴實有餘。竊觀箚記。辭足達意。可知內有所得。爲其大人賀不淺。但賤子無堪啓發。可愧。
    2020-04-08 | NO.6
  • 상무대 비행장
    광주 항공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은 지금의 상무지가 들어선 치평동이라 할 수 있지요. 1920년대 한반도에는 일본 육군의 항공부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평양 능라도에 있었던 제6항공연대였는데 이 부대는 비상시 항공기의 이착륙을 위해 전국 각지에 임시 활주로를 물색했던 적이 있었어요. 한때 그 후보지 중 하나로 광주 계림동의 경양방죽이 거론되기도 했어요. 그러나 최종적으로 임시 활주로 개설이 이뤄진 곳은 치평동 일대였습니다. 1929년 일본 육군은 이곳을 임시 활주로로 선정하는 동시에 20여대의 항공기를 상주시킬 계획이었는데 실제 이 계획이 실행됐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를 본격적인 민간 비행장으로 개발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 상무대 비행장은 1937년 확장 공사를 시작해 1939년 11월에 정식 비행장으로 개장했습니다. 그에 앞서 1938년 5월 전북 고창 출신의 비행사인 신용욱이 승객 3명을 태우고 서울을 이륙해 4시간 만에 이 비행장에 착륙한 일이 있었지요. 당시 신용욱이 조종한 비행기가 활주로에 착륙하는 것을 보기 위해 1만여 명의 광주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합니다.아울러 이 비행장이 민간 비행장으로 운영되면서 자연스럽게 조선총독부 체신국이 운영하게 됐고, 항공기의 운항에 필요한 기상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인근에 기상관측소가 세워졌는데 이것은 오늘날 광주지방기상청의 기원이 됐을 뿐 아니라 광주에서 근대기상관측의 효시가 되기도 했습니다.이 무렵 신용욱이 만든 항공사를 중심으로 광주와 서울 간에는 일주일에 몇 차례씩 정기적으로 운항을 했다고 합니다. 항공기는 그리 크지 않았고 요즘처럼 실내 객실이 있는 것도 아니었어요. 승객은 3~4명이 타는 정도였고 조종사들처럼 두터운 모자를 쓰고 자켓을 걸쳐야만 했지요. 그래서 승객은 많지 않았고 주로 항공기의 업무는 우편물을 수송하는 정도였습니다. 당시 전남 장흥 출신의 비행사인 이상태도 있습니다. 장흥신문에 실린 박형상 변호사의 글(2018.10.26.)에 따르면 덕천 이상태(李相,1904~1985). 우리나라 둘째 또는 세번째 비행사였다고 합니다. "그 무렵 1903년생으로 장흥읍에는 '최상채,김두헌'이라는 공부 귀재들이, 강진읍에는 '김영랑,김현구'라는 시인 재목들이 있었는데, 회진 바닷가에서 1904년생 비행사가 나왔다니, 대단하다. 일본 지바(千葉)비행학교를 나왔으며, 1923년경 ‘지바~목포’ 방문운항에 성공을 하였고(장흥 하늘도 날았다한다), 몇 년 후 비행업무를 그만 두었는데, 집안 반대가 심했다한다. 해방 후 대한항공협회 이사와 전남지부장으로 일시 일했다고는 하나, 하늘에 남겨진 별다른 흔적은 없다. 오히려 고향 땅에 그 족적이 남았다. 1938년에 돌개포구 간척사업으로 조성한 순흥농장(상태농장) 경작지를 소작인들에게 헐값 분배하였다. ‘순흥농장 경작인 일동’ 명의로 1983년경에 ‘德川 이상태 시혜비’가 세워졌다. 그 시혜비 뒤편에 고향으로 돌아온 이상태 묘소가 있다. 지금의 선학동 세트장으로 가는 길목의 우측 모퉁이, 양지바른 언덕이다. 마지막으로 그 동생, ‘이상민’ 사연을 보태본다. 한창 젊었을 1942년경에 중국 해남도에서 격추되었다. 兄 대신에 하늘을 날던 민간비행사였지만, 군속 신분으로 동원되어 수송업무에 종사하다가 사고를 당했다. 해방 후 반민특위가 생기면서 그런 징용업무에 앞장을 섰던 항공사 사장은 체포되고, 兄 이상태 역시 그를 처벌하라는 서명을 하였는데, 그 피의자 사장은 풀려나고 나중에 국회의원이 되었다."그러나 상무대 비행장이 민간비행장으로 이용된 기간은 오래가지는 않았어요. 1944년 일제는 이곳을 일본 해군에게 넘겼고, 특공特功이라는 이름으로 출전하게 될 가미카제 조종사들을 속성으로 양성하는 곳으로 바뀌었지요. 상무대 비행장이 요카렌[豫科練](구 일본 해군의 소년 항공 요원 지망생)비행장으로 사용됐다는 것은 이 시기부터입니다.한편 상무대 비행장에 주둔한 일본 해군 항공부대는 별도의 독립된 부대로 지칭되지는 않았지요. 이 부대는 10대도 채 되지 않는 훈련기를 보유한 소규모였던 탓에 일반적으로 ‘광주항공대’로 호칭됐습니다.그러나 이 부대가 주둔하면서 길이 1000m의 활주로가 아스팔트 포장의 초기 시공형태인 매카덤 공법으로 닦였는데 활주로는 현재 전남고등학교 자리에서 상무소각장 방향으로 놓여 있었습니다. 아울러 요카렌, 즉 비행연습생의 막사 등을 비롯한 부속시설들이 비행장 인근에 설치됐어요. 이로 인해 옛 국정원과 국군통합병원, 대신신학대 일대에 있었던 응세농도학원이나 호남대학교 쌍촌동 캠퍼스 자리에 있었던 임업시험장 등이 1944년을 기점으로 모두 일본해군 군용지로 징발당하기도 했습니다.한편 상무대 비행장은 해방 후 다시 운영을 재개했습니다. 해방 직후인 1949년 이곳에서는 다시 여객기가 취향해 주로 서울을 왕복했어요. 당시 여객기는 2차 대전 중에 미군이 사용했던 군용기를 개조한 것으로 승객은 5명을 태우는 정도였습니다. 아울러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제주와 항로가 열리기도 했어요. 그러나 광주-제주 항로는 승객 4명을 확보하는 것이 어려워 얼마 후에 운항이 중단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상무대 비행장은 워낙 좁고 애초부터 민간공항으로 개발된 것이 아니어서 결국 1964~65년께 비행장을 이설하기에 이르러 현재처럼 광주공항 자리인 광산구 신촌동으로 이전하게 됩니다.※광주 비행의 역사는 광산구 신촌동에 있는 광주공항의 전신이 상무대안 비행장이었다. 그러나 1910년대에 일본해군이 세운 요카렌비행장으로부터 시작됐다는 주장이 오랫동안 계속돼 왔으나 신빙성이 떨어져 보인다. ‘요카렌’이란 용어는 1910년대에는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주 사람들이 비행기를 목격한 것은 1910년대다. 1918년 일본인 조종사 야마카타 도요타로가 복엽기로 광주천(옛 도시제사공장 둔치)에 착륙할 때였다. 1920년대 중반에는 일본 육군 소속의 항공기 1대가 광주상공에서 방향을 잃고 동구 계림동에 있는 경양방죽을 활주로로 착각해 불시착하기도 했다.<2019.5.1. 수정>
    2018-05-28 | NO.5
  • 전평호수 주막 사건
    전평호수 방죽가에 옛날에 주막이 있었지요. 마을에도 주막이 있었지만 한 청년은 엄한 아버지가 두려워서 가까운 주막은 가지 못하고 방죽가 주막을 자주 찾아갔어요. 찾아오는 손님도 당시 그 지역에서는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주 고객이었고, 미인 접대부가 있는, 그럴싸한 곳이었습니다. 어느 해 여름날 그곳에서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대동아전쟁이 한참인 1942년 일본 동경에서 유학 중인 C씨는 한 달이 넘는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날씨가 무더운 날, 광주에 사는 친구가 놀러오게 되자 방죽가 주막을 찾았습니다. 파란 물가, 버드나무 고목 밑 산뜻한 주막집에서 점심 때가 좀 지난 시간이었어요. 대낮에 북소리가 나고 젊은 여자의 노랫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흥에 겨웠지요. 그때 그 집의 풍치에 알맞은 노래로서 주막집의 18번곡인 듯 싶은 일본가요 ‘호반湖畔의 여관’(Kohanno Yado)이 들려 왔구요. 노랫소리가 나는 큰방에는 주재소(지금의 지서)의 수석(지서장)과 면사무소 간부가 함께 있었는데 뇌물성 술대접 자리였던 것입니다. C씨는 친구와 함께 갓 방에 들어갔습니다.윗목에 젊은 여인이 다소곳이 앉아 술시중을 들었고, 막걸리 두 되짜리 주전자로 술잔을 주고받으며 젓가락 장단에 맞춰 노래를 불렀어요. 하필이면 일본인이 가장 싫어하는 ‘울밑에 선 봉선화’와 ‘조선말’이었습니다. 큰방에 있는 일인 순사를 의식한 저항의 몸짓이었죠.얼마가지 않아 조선 노래를 하지 말라는 전갈을 보내 왔어요. C씨와 친구는 아랑곳하지 않고 젓가락으로 술상 두들기는 소리를 더욱 높여가며 노래를 불렀지요. 그러자 남자주인은 혹여 시끄러워질까 걱정이 돼 이들 앞에서 방바닥에 고개를 쳐 박고 조용히 떠나주라고 통사정을 했어요. 그러나 C씨는 사뭇 단호하고 당당하게 말하며 거절했습니다.“못가요. 지금 같은 전시에 경찰관이 백주대낮에 주막에 앉아 여자를 끼고 술타령이라니 그런 비국민이 어디 있소? 그 사람들더러 가라고 하쇼.”집주인의 사정은 거의 비명에 가까웠습니다. 일본인 주재소 수석이라면 우는 애도 울음을 뚝 그친다는 절대 권력을 가진 존재인데다 전시를 빙자한 그들의 지배와 간섭은 무소불위로 끝 가는 데가 없었고, 그들에게 미움을 사면 누구도 무사할 수가 없을 정도의 권력이었어요. 흰 머리가 듬성한 주막 집주인은 체면불구 젊은이들 앞에서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방바닥에 고개를 쳐 박은 것이 마음에 걸렸던 지 미안한 생각이 들고 해서 두 사람이 막 일어서려는 참이었는데 성급한 일본인 수석이 패도佩刀를 손에 들고 그 방으로 쳐들어 왔습니다.“거기 앉아. 이 자식들 너희들 반일주의자인 ‘불령 조선인’(일본에 불만을 품고 항일행동을 하는 조선사람)이지? 그 학생복도 가짜고, 홍 순사 저놈들을 묶어서 주재소로 끌고 가.”수석은 눈을 부라리며 곁에 서 있던 홍 순사에게 명령을 했습니다. 뒤따라 온 홍 순사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떨구고 있었죠. 그는 C씨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정도를 가지고 수갑을 채워 끌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죠. C씨의 집안을 무척 존중하는 터였습니다.“홍 차석, 왜 얼른 수갑을 안 채워? 저놈들 자네가 아는 놈들인가?”C씨가 홍순사의 대답이 있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우리도 술손님이고, 당신도 같은 술손님인데 우리는 잡혀가고, 당신은 잡아가고 그런 억지와 모순이 어디 있소? 더구나 댁은 경찰이 아니시오. 이런 평일 날 근무시간에 여잘 끼고 술판을 벌이다니, 그 조선인 여자를 당신은 여자 정신대로나 알고 있는 게 아뇨?”그 자리에 있던 홍순사와 변간부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서로 얼굴을 마주봤어요. 여자정신대라는 말은 일본군부와 일부 특수계통 관리만이 아는 일종의 군사기밀이었기 때문입니다. C씨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을 들은 일본인 수석도 얼굴빛이 달라졌어요.“뭐, 정신대? 너 그 말 어디서 들었어?”수석은 홍순사의 허리에 있는 수갑을 빼들고 물었습니다.“당신의 모국 일본에서 들었소. 그것도 당신과 동족인 일본인 신문기자에게 말이요.”“너 공산주의자지? 너에게 그런 말을 한 신문기자 그놈도 그렇고?”수석의 얼굴이 노기와 경악으로 빨갛게 달아올랐어요.“여자정신대 문제는 일본군부에서 기획하고 실행 중인 특수전략이기 때문에 그 실상은 당신도 잘은 모를 겁니다. 나에게 말한 그 분 말로는 조선여자론 모자랄 테니까 곧 일본인 젊은 여자도 끌려갈 거라고 합디다.”C씨는 오히려 침착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C씨는 사정을 해서 같이 간 친구를 돌려보내고 자기혼자 주재소에 동행을 했어요. 그동안 면간부의 귀띔으로 C씨의 집안이 일본인 고위층 인사들과도 교분을 갖는 권세가로, 그리 만만찮은 상대라는 것을 수석도 알게 된 것입니다. 주재소에 당도하자 수석은 부하에게 시키지 않고 자기 자신이 직접 심문을 했어요.그리고 앞으로는 여자정신대문제는 입 밖에 내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작성한 심문조서를 C씨의 면전에서 박박 찢어버렸습니다.그리고 처음으로 웃는 얼굴이 되어 말했어요.“나는 가난한 시골 농부의 아들로 소학교 고등과 밖에 못나온 무식쟁이라네. 그래서 그 자격지심으로 더러 난 독한 짓도 했지. 알고보니 자네는 좋은 가정에서 공부도 많이 하고 장래가 창창한 사람 아닌가. 앞으로 큰일을 할 사람이 한때의 혈기로 앞날을 그르쳐선 안 되지. 오늘 젊은 자네에게 배운 것이 많네.”그는 C씨의 두 손을 아프도록 꽉 쥐었어요. 일인 수석 그도 역시 사납고 모진, 갈데없는 일본경찰이었지만 그 성질 값을 하는 호쾌한 일면도 있었지요.이 사건으로 인해 C씨는 부친의 엄명을 받아 여름방학을 고향집에서 더 보내지 못하고 동경으로 추방되는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고 합니다.
    2018-05-28 | NO.4
  • 중앙공원 비행장 동굴
    서구 화정동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뒤편중앙공원에 동굴이 있다는 것을 이 일대 거주하는 주민들을 제외하면 아는 시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설령 동굴의 존재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 용도에 대해서 정확하게 인식하는 주민들은 더더욱 많지 않지요. 이 일대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과 광주광역시 청소년수련원, 성진초등학교 등 어린이와 청소년 시설이 집중돼 있는 만큼 교육공간으로 활용하면 그 가치가 배가될 수 있겠지만 굳게 쇠창살로 닫힌 철문이 현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앞을 와봤거나 지나가본 시민이라면 자연동굴이 아니라는 것쯤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밖에서 확인한 결과 시멘트로 마무리된 동굴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동굴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는데 동굴이 조성된 때는 일제강점기 말로 추정됩니다.이 일대에는 3개의 동굴이 있는데 세 번째 안쪽에 있는 동굴은 출구가 보이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세 개의 동굴이 모두 직선형이라는 점도 특이합니다. 아직까지 일본군 유적지 동굴은 반원형이나 그를 변형한 형태가 많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크기는 80m와 70m, 50m 콘크리트 아치형 동굴로 광주 서구 상무지구에 일제가 조성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는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의 ‘본토결전’에 대비한 과정에서 광주비행장의 부속시설물(유류저장소)로 조성된 것으로 보입니다.광주시교육청이 이 동굴들을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시설과 연계, 일제강점기 역사를 이해하는 교육 공간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일고 있으나 예산 부진으로 실제화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후문입니다. 일제강점기 군사시설이 주로 제주도 해안가 등에 남아있지만 이처럼 내륙에 대거 집중돼 있는 경우는 흔치 않아 보존가치가 높은 것으로 풀이됩니다. 다만 이 동굴들 앞에 안내이정표 하나 세워 시민이나 주민들에게 정확하게 역사적 사실을 알릴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정표가 없다보니 동굴의 내용 파악이 어려워서 사람들마다 일제강점기 때 방공호였나, 김장김치 보관을 위한 동굴이었나, 한국전쟁 때 피난 동굴이었나 등등 별별 이야기가 나올 정도입니다. *중앙공원 일제강점기 동굴은 당시 대표적 시설물인 만큼 이에 대한 정밀 검증을 통한 문화유적으로 추진하는 방안도 필요해 보인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의 폭탄고의 경우 광주시 서구 벽진동과 마륵동의 경계지점에 있는 사월산에 있으며 몇 개가 있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최소 1개 이상의 동굴이 있기 때문에 여기도 정밀한 조사가 요구된다. 2014년 8월 광주시교육청에서 이 동굴을 역사교육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한 시민토론회를 연 바 있다.
    2018-05-28 | NO.3
  • 채국계 採菊契
    채국계는 교유계(交遊契), 풍류계(風流契)로 지금의 전남대학교 뒷편 반룡부락에 거주하던 운파(雲坡) 김진현(金珍鉉)을 위하여 이철종(李哲琮) 등이 1933년 중구일(重九日)에 동료 제자들과 스승의 지우(知友) 등 300여명을 모아 창계하였다. 김진현은 이미 강의계(講誼契)를 만든바 있고 채국계의 창계를 지원하였으며 해방 후 난심계(蘭心契)까지 결성하는 등 시문을 좋아하고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즐겼다. 채국계라는 계명을 붙인 것은 중양절(음력 9월 9일)과 관계가 깊다. 지금은 우리 기억에서 멀어졌지만 구구절, 구일날 또는 귈날이라고도 하는 중양절은 추석 못지 않은 큰 명절이었다. 햇곡식으로 조상께 천신(薦新)하고 누런 국화를 따서 국화전을 부치고 국화주를 빚어 시식(時食)으로 삼았다.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1에서 10까지의 기본수 가운데 기수(奇數)를 양수(陽數)라 하여 1월 1일,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 9월 9일을 명절로 삼았다. 그 가운데에서도 양수의 극이라 믿는 9가 겹치는 날을 중양이라 하여 양기를 존중하는 사상에서 큰 명절로 삼아 왔다. 한.위(漢.魏)시대부터 국화를 감상하고 높은 곳에 올라 시를 읊는 상국등고(賞菊登高)의 습속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이래로 중구절을 숭상하여 군신(君臣)이 설연창화(設宴唱和)하였고 풍류를 아는 선비들은 높은 곳에 올라 시를 쓰고 단풍과 국화를 감상하며 하루를 즐겼다 조선시대 이래 중구절은 일반백성의 명절이라기보다 양반들 특히 남자들의 명절이었다. 중양절의 의미를 살려주는 국화를 계명에 붙인 것은 이와같은 전통에서 기인한 것으로 계절감 및 계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준다. 1968년 운파 사후 채국계는 받드는 대상을 상실하고 소멸하였다. 채국계는 성년이 된 운파의 문인과 친우들로 구성되었는데 거주지는 서방.용봉 지역이었다. 창계시 계원이 300명이 넘었으니 운파를 흠모하고 따르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할 수 있고 그의 높은 학식과 문장의 고매함을 알 수 있다. 한학의 대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조직이므로 단결력이 튼튼하고 스승이 생존해 있는 기간 동안은 별다른 계원의 변동없이 잘 유지되어 왔다. 채국계의 강신일은 매년 음력 9월 10일이었다. 강신일이 되면 20여명의 유사가 200명 이상이 참석하는 계회의 음식물을 각자의 자비로 부담하여 준비하고 가마솥, 땔감, 그릇 등을 터가 넓은 정자나 냇가의 나무숲 아래로 가지고 나가 직접 밥을 지어먹었다. 같은 솥의 밥을 함께 먹음으로써 일문이라는 일체감을 더욱 다진 것이다. 채국계도 강의계와 유사하게 스승을 받들고 교제를 넓히자는 취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국등고(賞菊登高)는 못하였지만 지참한 지필묵으로 운에 맞춰 한편의 싯구를 읊으며 늦가을의 정취를 한껏 표출하는 장을 마련하였으며 이를 본계의 중요한 대목으로 여겼다. 이 자리에서 직강에 의해 한시 짓는 법이 강의되었고 서로 앞다투어 시문을 써내 주고받으며 필력을 향상시키고 우의를 돈독히 하였다. 계비는 창계시 20전, 해방이후 30원씩의 계비를 각출하는 등 최소 운영비용만을 거두었을 따름이며 계원에 대한 상조 기능은 거의 없었고 그때그때 계원 상호간 부조만 있었다. 운파 사후 유족과 그를 따르는 몇몇 제자에 의해 <雲坡遺稿> 文集이 발간되었다. 지금까지 채국계를 통해 선인들의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알 수 있으며, 해방 후 극히 짧은 기간동안 우리의 의식이 급변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2020-05-24 | NO.2
  • 포로수용소 탈출작전
    포로수용소하면 먼저 거제도를 떠올립니다. 대명사처럼 거제도가 언급되지만 사실 광주에도 포로수용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시민도 많지 않습니다. 6.25한국전쟁 중에는 광주에 포로수용소를 두 군데 두었지요. 동구 학동의 전남대병원 뒤편에 있었던 중앙포로수용소와 상무대 일원에 있었던 상무대포로수용소가 그곳입니다. 상무대 일원의 포로수용소에는 세 곳의 막사를 두게 되고 벽진동과 금호동에 있었지요. 두 군데 중 한곳이 서구에 설치된 것이죠. 포로수용소는 엄밀하게 보자면 살았다는 안도감 보다는 우선 좌우이데올로기의 극심한 대립 속에 발생한 비극적인 일이고, 숙명적인 아픔으로 봐야 하겠지요.광주에 포로수용소를 둔 것은 1952년 5월과 6월에 거제도에서 일어난 포로들의 폭동에 따른 영향이 컸어요. 거제도 폭동의 규모가 커진 이유 중 하나가 한곳에 너무 많은 북한군 포로를 집단으로 수용하면서 여러 부작용을 우려한 유엔군이 포로들을 전국에 분산하기로 결정하면서 비롯됐어요. 이에 따라 광주에는 제1포로수용소(일명 제15포로수용소) 산하에 세 군데 막사를 두게 됐습니다.그 중 하나가 비행장 근처에 있었고, 다른 두 곳이 사월산 아래인 벽진동과 금호동에 있었지요. 현재 벽진동 일대의 공군탄약고 자리가 당시 두 개의 포로 막사가 있었던 곳입니다. 이들 세 곳에 분산된 막사 중 상무대 비행장 근처(훗날 군인아파트 자리)의 제1막사에 3700여명이, 벽진동 사월산 아래인 제2막사에 3700여명이, 그리고 금호동의 제3막사에 3100여명 등 모두 1만여 명의 북한군 포로들이 수용돼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 포로는 한국에 잔류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었지요.1만여 명의 포로가 수용되다 보니 역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자취와 움직임이 남았지요. 그런 포로들 가운데는 1931년 황해도 안악군 출신으로 평양사범학교 재학 중에 징집돼 전투 중 포로가 돼 사월산 주변 막사로 이송되어 온 강용준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훗날 다시 국군에 입대해 대위로 예편하게 됩니다. 그는 1970년대에는 소설가로 변신했지요. 그가 낸 작품들 가운데 포로수용소 당시의 체험을 기반으로 쓴 ‘사월산’이 있습니다. 또 광주포로수용소에 머문 사람으로는 ‘진달래꽃’의 시인 김소월(1902∼1934)의 아들인 김정호도 그 중 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런데 포로 탈출과정에서 인명피해가 발생해 슬픔을 더했지요. 1953년 6월18일 새벽 2시에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으로 유엔군을 따돌리고 이들 포로의 탈출을 돕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포로 석방으로 10,432명이 탈출했고, 미탈주자는 165명이었지요. 또 탈출 도중에 안타깝게도 부상자 8명과 사망자 5명이 발생했어요. 사상자들은 이 석방계획이 워낙 은밀하게 진행돼 수용소를 감시하던 국군 초병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데서 발생했다고 합니다. 비밀엄수를 위해 일반 국군들에게도 탈출 소식을 감춰야 했고, 이를 전혀 모르던 병사들이 탈출하려는 포로들에게 총기를 발사하면서 일부 사상자들이 생겼던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중앙포로수용소는 주로 지리산 등 전남지역에서 체포되어 온 빨치산이나 그 가족 혹은 혐의자 등 민간인들이 수용됐으며, 상무대 일원에 있었던 포로수용소는 전쟁 중에 생포된 북한 정규군을 수감했던 곳입니다. 지금은 그 흔적마저 없어졌어요. 안내이정표라도 세워서 잊혀져 가는 역사를 되살리는 작업이 진행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소설가 강용준은 1960년 단편 ‘철조망’이 사상계 제1회 신인문학상에 당선돼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철조망’, ‘설원’, ‘종소리 전쟁’,‘광인일기’, ‘밤으로의 긴 여로’, ‘바람이여 산으로’, ‘광야’, ‘사월산’ 등 다수가 있다. 제4회 한국창작문학상과 제1회 대한민국문학상, 한국문학 작가상과 한무숙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사상계와 한국해외개발공사에 재직했다.
    2018-05-28 | 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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