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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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련사 어록〔白蓮社語錄〕 - 손재집
- 백련사 어록〔白蓮社語錄〕 - 손재집 제9권 / 어록(語錄) : 박광일(朴光一, 1655~1723)○ 기사년(1689, 숙종15) 2월에 선생께서 세자(世子) 세우는 일로 상소하였다. 사헌부(司憲府) 관원이 논계하여, 선생을 제주도에 안치(安置)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이달 18일 선생께서 선암(仙巖)에 도착하였다. 광일이 미리 여기서 기다리다가 들어가 절하고 위로하며 말하기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오래전부터 이 걸음이 있을 줄 알았다.”라고 하고, 이어서 묻기를 “요새 무슨 책을 읽는가?”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여러 책을 대강 보느라 전일하게 힘쓰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했다.선생께서 또 말하기를 “부모님 모시기는 어떠한가?”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가친께서 선생님께 인사드리려고 지금 바깥채에 와 있습니다.”라고 했다. 선생께서 바로 심부름하는 동자를 시켜 문안 인사를 전하게 했다.또 일어나서 말하기를 “선생님께서 중도에 부치신 편지는 잘 받았으나 이곳에는 《주자어류》가 없어서 미처 말씀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주자대전(朱子大全)》이 있기에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주자대전》은 이미 행장(行裝)에 가져왔으나 《주자어류》는 짐이 무거워서 멀리 가져오기 어려워 남중(南中 호남 지방)의 친구에게서 빌려 보려고 했네. 배우는 이는 하루도 《주자어류》가 없어서는 안 되는데, 어쩌다 갖고 있지 못했는가?”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가난한 선비이다 보니 미처 장만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했다. 선생께서 말하기를 “가난한 선비라 장만할 재력이 없으면 학궁(學宮 향교)에서 인쇄하여 보면 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또 말하기를 “선생님께서 오실 때 안청촌(安淸村)에 잠깐 들르셨다는데, 안청에서 맞이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중간에서 맞이하는 것은 혹시나 편하기 어려운 꼬투리가 될까 염려되어 곧장 여기로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병든 몸이라 부득이 잠시 길옆의 집에서 쉬었는데, 그 집은 바로 죽은 친구 사술(士述)의 집이어서 슬픈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네. 그 집에 두 분 선생님의 왕복 편지가 있기에 빌려 왔네.”라고 했다.박중회(朴重繪)가 들어와 절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리기를 “오늘의 일을 무어라 말씀드리겠습니까.”라고 하니, 선생이 옛정을 펴고 나서 말하기를 “옛날에 채서산(蔡西山)이 용릉(舂陵)으로 귀양 가게 되었을 때, 이는 죽으러 가는 걸음인데도 주자가 탄식하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지금 무엇을 서로 위로한단 말인가.”라고 했다.선생께서 묻기를 “서석산(瑞石山)은 여기서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30리입니다.”라고 했다.○ 선생께서 광일에게 말하기를 “자네 어르신의 얼굴과 풍채를 살펴보니 병도 없고 강녕하신 듯하네.”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겨울이 끝날 때까지 앓으시다가, 봄과 여름에는 연례로 조금 나아지십니다.”라고 했다.또 묻기를 “오는 길에 동쪽으로 높고 큰 산이 바라다보이던데 전에 가 보지 못한 곳이었네. 그것이 서석산(瑞石山)인가?”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19일, 행차가 금성(錦城 나주(羅州))에 도착하였다. 20일, 이른 아침에 수여(受汝 박중회(朴重繪)의 자)와 함께 들어가 문안을 드리자 선생께서 시 한 수를 지어 수여에게 주시니, 대체로 옛정을 생각하는 뜻을 술회한 것이었다. 이어 판서(判書) 김만중(金萬重)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선생께서 말하기를 “그 사람이 평소에는 신부(新婦)와 같으나 입을 열면 곧 요긴한 말을 하였네. 지난해 윤휴(尹鑴)가 탑전(榻前)에서 아뢰기를 ‘어전(御前)에서는 공자(孔子)도 굳이 휘(諱 이름을 부르지 않음)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김 판서가 면전에서 반박하기를 ‘천자(天子)와 제후(諸侯)도 북쪽으로 향하여 무릎 꿇고 절하며 공경하는데 어찌 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굳이 휘할 것이 없다는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네. 임금께서 윤휴의 말이 옳다고 하였기 때문에 김 판서는 문외출송(門外黜送)이 되었네.”라고 했다.○ 선생께서 왕복 편지를 열람해 보고 말하기를 “두 분 선생의 논설이 거의 부합되었다가 다시 분리되었으니, 애석하도다!”라고 하기에, 광일이 대답하기를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의 견해는 정말로 명백한데, 퇴계(退溪)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은 마음을 답답하게 합니다. 주자는 ‘음양(陰陽)이 뒤섞여 있어도 그 단서(端序)를 잃지 않으니 곧 이것이 천리(天理)의 발현이다.’라고 하였는데, 무슨 까닭에 이런 뜻은 살피지 않고 이기호발설을 강력히 주장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고봉의 ‘사단(四端)도 절도(節度)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한 말도 주자의 말씀입니다.”라고 했다.선생께서 말하기를 “주자가 자네 말처럼 그런 말을 했으니, 이는 이기(理氣)를 겸하여 말한 것으로, 그 말을 제대로 갖추려고 한 것이지. 그러므로 공자가 성(性)을 말할 때 ‘이어 가는 것이 선이고, 이루어지는 것이 성이다.[繼之者善, 成之者性.]’라고 하였고, 또 ‘천도가 변화함에 각각 그 성명을 바르게 한다.[乾道變化, 各正性命]’라고 하였으니, 성(性)을 논할 때는 공자께서 성을 논한 것만 한 것이 없네.”라고 했다. - 기(氣)를 논하면서 성을 논하지 않으면 밝지 못하고, 성을 논하면서 기를 논하지 않으면 갖추어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선생께서 이 말을 하였다. - ○ 이날 영산강(榮山江)을 건너 죽두촌(竹頭村)에서 묵었다. 밤에 선생을 모시고 이야기할 때, 광일이 묻기를 “사계 선생께서, 우계(牛溪 성혼(成渾))가 임진왜란 때 강화(講和)하자고 한 문제에 대해 의심하셨다고 합니다. 우계가 강화를 논의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당시 강화하자는 계책은 무척 부득이한 상황에서 나왔네. 그때 우리나라가 보전을 믿고 있던 것은 오직 천장(天將 명(明)나라 장수)뿐이었는데, 천장이 굳이 강화를 하려고 하니 우리나라가 그 말을 듣지 않으면 천장은 장차 우리를 버리고 돌아갈 것이고, 천장이 돌아가면 우리나라는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부득이하여 강화하자는 의논이 나온 것이네. 그런데 당시 옥대(玉帶)를 뽑아 가거나 의심스런 흔적을 만드는 등 능변(陵變)이 발생한 것 등은 신하로서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이니, 우리나라는 왜노(倭奴)와 하늘을 같이할 수 없는 원수였지. 그러므로 사계 선생의 뜻은, ‘그때 죽기로써 지키는 것은 경도(經道)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권도(權道)이니, 이 경우에 만일 성인(聖人)이 계셨다면 권도를 쓸지 안 쓸지는 알 수 없으나 현인(賢人) 이하는 경도를 지키는 것이 훨씬 나을 터인데, 우계는 무엇 때문에 가벼이 권도를 썼느냐.’라는 것이었네. 사계 선생의 의심은 여기에 지나지 않네. 그 의리가 어떻다는 것을 논했을 뿐, 어찌 다른 것이 있겠는가. 내가 이 때문에 상소하였는데, 임금께서 보류해 두고 내려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남들은 미처 보지 못했지만 초본은 남아 있네. 대체로 그때의 사세가 위급했으므로 유서애(柳西厓)가 강화하자는 의견을 가지고 우계를 찾아와 의논하자, 우계도 그렇다고 생각하여 함께 청대(請對)하였네. 선조(宣祖)께서 그들이 화의(和議)를 주장하기 위하여 청대하는 줄 짐작하고 범할 수 없는 기색이 있었으므로 서애는 두려워 감히 그 말을 꺼내지 못했고 우계께서 꺼내었네. 이에 선조께서 진노하시어 시를 지어 벽에다 써 붙이기까지 하셨는데, 그 시는 지금 다 기억하지 못하겠네.”라고 했다. 중회(重繪)가 말하기를 “‘어찌 간사한 말을 지어내어 의리를 부수고 삼군을 미혹하는가.[如何倡邪說, 破義惑三軍?]’라는 시는 선조의 시인데, 이것이 그때의 시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그것이 그때의 시인 듯하네. 그 뒤에 결국 화의를 받아들였으면서도 선조는 끝내 우계를 배척하였으니, 이는 감히 알 수 없는 일이네. 그 당시에 강화하자는 의논은 실지 서애가 먼저 제의했으나 임금 앞에서는 감히 꺼내지 못했기 때문에 남인(南人)들은 유독 우계에게만 허물을 돌렸으니, 가소로운 일일세.”라고 했다.○ 광일이 묻기를 “지난번 의논한 괘변(卦變)에 대해 망녕되이 저의 좁은 소견으로 도(圖)를 만들어 보내드렸는데, 살펴보셨는지요?”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내가 이미 다 보았네. 그 도(圖)가 아마 행장 가운데 있을 것이네. 다만 《주역》의 괘변은 《역학계몽(易學啓蒙)》의 괘변과 서로 같은 것도 있고 같지 않은 것도 있으니, 이것이 내가 답답한 점이네.”라고 했다.대답하기를 “《역학계몽》의 괘변은 괘(卦)마다 모두 64변(變)이 있다는 뜻이고, 《주역》의 괘변은 다만 강유(剛柔) 2효(爻)가 아래위로 왕래하는 뜻만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순음(純陰 곤괘(坤卦))과 순양(純陽 건괘(乾卦))의 괘에는 모두 어디로부터 왔다는 뜻을 말하지 않았으니, 《주역》과 《역학계몽》이 각각 다른 까닭입니다. 《본의》에서 ‘어떤 괘는 어떤 괘로부터 왔다’라고 말한 것은 각각 저절로 그러한 형세이지, 사람의 힘으로 안배하여 된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선생께서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찌 마음이 후련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송 수찬(宋修撰)이 말하기를 “예전에 탑전에서 괘변을 강론할 때, 권 아무개가 - 그 이름을 잊었다. - 소견을 진달했는데, 그 말이 무척 지리했고 또한 《본의》와 부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곁에서 진달하기를, ‘주자의 《본의》는 이러이러한데, 지금 권 아무개의 말은 《본의》와 전혀 서로 부합하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권 아무개는 이에 두리번거리며 ‘소신이 과연 망발을 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권은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다고 들었는데, 그 소견 또한 이와 같았습니다.”라고 했다.○ 21일, 불수원(不愁院)에 도착하였다. 선생께서 광일에게 말하기를 “어제 강론한 괘변(卦變)을 지금 도(圖)로 만들어 다시 강론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그 도(圖) 하나가 소매 속에 있습니다.”라고 하고, 바로 선생께 드렸더니 선생께서 펴 보셨다. 광일이 강유(剛柔)의 괘(卦)가 서로 왕래하는 뜻을 설명해 드렸다.송서구(宋敍九)가 말하기를 “지금 ‘강유가 서로 왕래한다’고 하였지만, 〈송괘(訟卦)〉 아랫부분의 중효(中爻 제2효(爻))는 〈천화동인괘(天火同人卦)〉에서 왔다고 하여도 될 터인데, 하필 〈돈괘(遯卦)〉에서 왔다고 해야 하는가?”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동인괘〉의 제2효(爻)와 제3효가 왕래하면 〈천택리괘(天澤履卦)〉가 되는데, 어찌 〈송괘〉가 〈동인괘〉에서 왔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서구가 한동안 생각하더니, 말하기를 “정말 그렇다.”라고 하고, 이어 선생께 아뢰기를 “이 도(圖)는 참으로 옳습니다.”라고 했다.선생께서 흔연히 권이진(權以鎭) - 선생의 외손 - 을 돌아보면서 말씀하시기를 “너도 알겠느냐?”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평소 생각할 때에는 그런 까닭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이 그림을 보니 정말 의심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선생께서 말하기를 “이 다음에 너는 이 그림을 보지 않고도 그려낼 수 있겠느냐?”라고 하니, 권생(權生)이 말하기를 “오늘 이후로는 거의 그려낼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선생께서 말하기를 “가슴속에 있는 견해를 분명하게 그려낸 다음에야 비로소 참으로 안다고 할 수 있다.”라고 했다. 광일이 아뢰기를 “이 그림은 제가 창조해 낸 견해가 아니고, 사실 주자의 일기(一奇)와 일우(一耦)가 왕래한다는 설에서 나온 것입니다.”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그렇지.”라고 했다.○ 이날 정오에 어떤 사람이 술과 안주를 내어왔다. 선생께서 어육(魚肉) 등의 음식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사람과 물건은 모두 천지(天地) 사이에서 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 사람이 이런 음식을 먹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하니, 나중기(羅重器)가 경솔하게 대답하기를 “사람이 먹는 물건은 모두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입니다.”라고 했다. 선생께서 웃으며 말하기를 “옛날 정자(程子)의 문인이 그런 말을 했는데, 정자가 ‘그러면 너의 몸은 이[蝨]를 위하여 생겼느냐’라고 하셨다. 정자의 이 말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지. 대저 오행(五行)은 상극(相克)하는 이치가 있기 때문에 만물(萬物)에도 서로 잡아먹는 이치가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22일, 석주원(石柱院) 하촌(下村)에 당도하여 묵었다. 23일, 이른 아침에 들어가 문안을 드리니, 선생께서 박 참봉(朴參奉) - 박태초(朴泰初) -의 집에서 빌려 온 《주자어류》를 보시면서 좌우에 있는 사람을 시켜 분류(分類)를 정리하고 계셨다. 선생이 광일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배우는 사람은 하루라도 《주자어류》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옷을 팔더라도 사야 할 것이네. 판본(板本)이 금산(金山)에 있고 또 그 지방에는 이름난 절이 있으니, 책을 가지고 금산사(金山寺)에 가서 머물러 읽으면서 그 참에 인쇄하여 오면 좋을 것이네.”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선생님께서도 그 절에 다니신 적이 있습니까?”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내가 이 절에서 글을 읽은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라고 했다.선생께서 좌중의 여러 사람에게 《주자어류》 가운데서 괘변(卦變)의 예(例)를 가려내게 하셨는데, 선생께서 주자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한 한 조목을 가리키면서 말씀하시기를 “이렇기 때문에 나도 평소 깨우치지 못한 것이다.”라고 했다.○ 광일이 주자가 논의한 ‘하나의 기와 하나의 구가 변환한다[一奇一耦變換]’라는 곳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것이 시생이 오늘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헤아려 보면 《본의》와 서로 들어맞습니다.”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그런가?”라고 했다.묻기를 “《대학》 혈구장(絜矩章)에서 ‘백성이 배반하지 않는다.[民不背]’라고 말한 것은 ‘효를 일으키고 제를 일으킨다.[興孝興弟]’는 뜻이고, 백성도 자애를 일으킨다는 뜻입니까?”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바로 그렇지.”라고 했다.○ 또 묻기를 “시생의 생각은, 자애[慈]는 사람 누구나 할 수 있으며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린아이를 키우는 일로 밝히기를 ‘자식 기르기를 배운 뒤에 시집가는 사람은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애를 일으킨다[興慈]’고 하지 않고 단지 ‘배반하지 않는다[不背]’라고 했습니다. 시생의 견해는 이렇습니다.”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혹여 견강부회는 하지 말게.”라고 했다.○ 이날 저녁때 강진(康津)에 당도하였다. 성(城)안이 시끄러우므로 포구 마을에 가서 묵었더니, 새로 지은 집으로 깨끗하고 벽 위에 《천자문(千字文)》을 걸어 놓았는데 필법(筆法)이 매우 특이하였다. 선생께서 말하기를 “이것은 취금(醉琴 박팽년(朴彭年))의 글씨로다.”라고 했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정말 취금의 글씨입니까?”라고 했다.아, 취금 박 선생은 회덕(懷德) 사람이고 1백 년이 지난 뒤에 그 글씨가 바닷가 백성의 집에 걸려 있는 것이 대단히 이상한 일인데, 지금 회덕 노선생(老先生)께서도 이곳에 머물게 되셨으니 이것도 이상한 일이다. 아마도 그 사이에 하늘이 정한 운수가 있는 듯하다.○ 24일, 기해의례(己亥議禮)에 대하여 강론하였다. - 앞에 문답한 것이 있기 때문에 생략한다. - 강론을 마치고 나서 선생께서 말하기를 “허목(許穆)은 예가(禮家)의 죄인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 송주석(宋疇錫)이 선생께서 수여(受汝 박중회(朴重繪)의 자)에게 준 시에 차운하여 바쳤다. 선생께서 여러 차례 읊은 다음 좌중에 보여 주면서 말하기를 “자네들도 모두 차운하게.”라고 했다. 물러나 차운하여 올렸다.○ 선생께서 바야흐로 물과 토양을 염려하셨다. 송 서산(宋瑞山)이 - 선생의 아우인 송시걸이다. - 말하기를 “고을 사또가 ‘이 마을은 낮고 가라앉았으며 물맛도 지극히 좋지 않으니, 결코 오래 머물 땅이 아니다. 물맛은 오직 만덕사(晩德寺)가 좋으니, 배를 구하여 수리하는 동안 그 절에서 머무는 것이 옳을 듯하다’고 하는데, 그 말대로 하는 것이 편할 듯합니다.”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나의 뜻도 그렇다.”라고 했다.오후에 만덕사로 향했는데, 당시 바다와 산이 적막하여 전혀 봄기운이 없었는데, 절 아래 장춘동(長春洞)에 이르니 분위기가 물씬 늦봄 기상이 있었다. 대개 한 골짜기에 두루 사철나무이지만, 동백나무가 난만하게 붉은 꽃을 피우고 있으니, 장춘이란 이름이 진실로 허언이 아니었다. 누각에 오르니, 누상에 ‘만덕사백련사(晩德寺白蓮社)’라는 큰 글씨 여섯 글자가 한 현판에 같이 써 있었다. 노승이 말하기를 “이것은 김생(金生)의 글씨인데, 난세에 물속에서 화를 면했다.”라고 했다. 또 ‘만경루(萬景樓)’라는 큰 글씨 세 자가 있었는데 역시 감상할 만하였다.이때 함평(咸平) 안중화(安仲和)가 와서 뵙고 말하기를 “소생은 안여해(安汝諧)입니다.”라고 하니, 선생께서 제명(題名)하는 곳에 적힌 “안여해” 석 자를 가리키며, “내가 이것을 보고 이미 도착했음을 알고 있었네.”라고 했다.누상에 서역(西域) 글자로 된 현판이 있었는데, 선생께서 대략 번역하여 뜻을 설명해 주셨지만 속된 소견으로는 어떻게 표현하지 못하겠다.○ 25일, 일찍 일어나 문안 인사를 올렸다. 이어 아뢰기를 “선생님께서 장성(長城)에 도착하여 참봉 기정익(奇挺翼) 어른을 만나셨습니까?”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만났네.”라고 했다.말하기를 “이 어른이 ‘사람은 모두 미발(未發)의 중(中)이 있다’고 했습니다.”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어찌 그렇겠는가. 사람이 일 없이 고요히 앉아 있을 때는 외면으로 보면 비록 고요한 듯하지만, 그 속은 염려와 움직임의 싹이 없지 않으니 어찌 미말의 중이라고 하겠는가.”라고 했다.○ 식사 후에 선생께서 법당(法堂)에 나와 앉으시어, 바다 위에서 권(權 권이진(權以鎭))ㆍ윤(尹 윤주교(尹周敎)) 두 외손자를 보내는 서(序)를 지으셨는데, 선생께서 입으로 부르고 송주석(宋疇錫)은 받아 적었다. 내가 그 대의(大義)를 보니, 맨 첫머리에는 두 사람이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있으므로 멀리 보낸다는 뜻을 말하였고, 중간에는 두 사람의 세덕(世德)을 진술했고, 끝에는 학문하는 일을 권면하였다. 두 사람이 받들어 읽고는 서글퍼 하는 모습이었다.선생께서 제주를 유람한 적이 있는 노승(老僧)을 불러 제주도의 물정ㆍ풍토와 경치를 물으셨는데, 그중에서도 한라산(漢挐山)을 더욱 자세히 물으셨다. 또 이어 묻기를 “만일 절 뒤의 제일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면 한라산을 바라볼 수 있는가?”라고 하니, 노승이 대답하기를 “하늘이 개고 일기가 맑은 날에는 볼 수 있는데, 마치 바다 구름 한 조각이 아득한 곳에 보일 듯 말 듯 떠 있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했다.선생께서 자리 귀퉁이에 《주자대전(朱子大全)》ㆍ《주자어류(朱子語類)》 및 《격양집(擊壤集)》, 두 선생의 왕복 편지 등의 책을 쌓아 놓고 그지없이 사색에 잠기셨는데, 항상 《격양집》을 주로 보셨다. 그 나머지는 마음 내키는 대로 보셨으며, 길을 가실 적에도 《격양집》 1권은 언제나 손에서 놓지 않았다.○ 선생께서 광일에게 말하기를 “‘초나라가 연나라로 문서를 보낸 이야기[郢書燕說]’에 대해 아는가?”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그 뜻이 대개 ‘동을 물었는데 서를 답한다[問東答西]’는 뜻입니까?”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그렇지 않네. 옛날에 초(楚)나라 재상이 연(燕)나라에 보낼 문서를 지으면서, 한 사람에게 촛불을 들게 하고 한 사람에게는 적도록 했다네. 초나라 재상이 ‘들라[擧]’고 했는데, 그 뜻은 불을 들라는 것이었네. 그런데 적는 사람이 살피지 못하고 바로 ‘거(擧)’ 자를 썼네. 초나라 재상 또한 살피지 못하고 연나라로 보냈다네. 연나라 사람이 ‘거’ 자의 뜻을 깊이 연구하고서, 이윽고 ‘이는 현자를 등용하라는 뜻이다’라고 생각하고 마침내 현자를 등용했더니 연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고 하네. 이것이 ‘영서연설’의 이야기일세. 한 글자의 착오가 남의 나라를 크게 다스려지게 했으니, 재미있는 일일세.”라고 했다.○ 광일이 말하기를 “주자의 《태극도해(太極圖解)》 중에서 논의한 오행(五行) 한 대목은 바로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의 ‘수음(水陰)은 양에 뿌리를 두고 화양(火陽)은 음에 뿌리를 둔다’고 한 설에 근거하여 곧장 도체(圖體)를 풀이한 것입니다. 황면재(黃勉齋)가 의심스럽다고 생각했으면서도 도리어 ‘수가 양의 어린 것이 되고, 화가 음의 어린 것이 된다.[水爲陽稚, 火爲陰稚.]’고 말한 것은 전혀 염계의 본의가 아니고, 나아가 주자가 《태극도(太極圖)》를 풀이한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시생이 망녕되이 좁은 소견으로 논변한 바가 있으나, 초본을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면재의 설은 진실로 알 수 없는 데가 있네.”라고 했다.○ 26일, 박수여(朴受汝)가 묻기를 “《대학장구(大學章句)》에 ‘의성(意誠) 이하는 모두 그칠 곳을 얻은 차례이다[意誠以下, 則皆得所止之序]’라고 한 말은, 삼강령(三綱領)의 차례로 보면 의성에서부터 신수(身修)까지 이른 다음에야 ‘명명덕(明明德)의 지지선(止至善)’이라 말할 수 있고, 가제(家齊)로부터 천하평(天下平)까지 이른 다음에야 ‘신민(新民)의 지지선’이라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럼 ‘그칠 곳을 얻는 차례다[得所止之序]’라고 한 ‘서(序)’ 자로 보면 이와 같을 듯한데,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라고 하였다.선생께서 말하기를 “그렇지 않네. 나누어서 말하면 성의(誠意)에도 지지선이 있고 정심(正心)에도 지지선이 있고 수신(修身)에도 지지선이 있어서, 제가(齊家) 이하가 다 그렇지 않은 것이 없네. 그러므로 ‘의성 이하는 모두 그칠 곳을 얻는 차례다’라고 한 것이네.”라고 했다.어떤 승려 한 사람이 종이 두 장을 올리면서 글씨를 써 달라고 청하였다. 선생께서 한 장에는 ‘서암의 승려가 또렷하도다[瑞巖僧惺惺]’라 쓰고, 한 장에는 ‘그대는 큰 스님이 되지 말고, 큰 도둑이 되라[汝不爲大僧, 爲大盜]’는 여덟 자를 쓰신 다음 붓을 놓고 좌우를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주자어류》의 말이다.”라고 했다.수여(受汝)가 또 장지(壯紙) 몇 장을 올리니, 선생께서 승려의 붓을 자기의 붓에다 합쳐 묶어서 시원스럽게 큰 글씨로 ‘고금의 역사 속에 한가롭고, 하늘과 땅 사이에 취했노라[閒中今古, 醉裏乾坤]’ 여덟 자를 쓰셨다.○ 광일이 이별시 두 수를 써 올렸더니, 선생께서 차운(次韻)하여 주셨다. 이어 말하기를 “괴안국(槐安國)에 관한 고사를 아는가? 옛사람이 꿈에 개미를 따라 괴화나무 속으로 들어가서 40년 간 부귀를 누렸다는 것이 괴안국에 관한 이야기일세. 이것은 대체로 인간 만사가 모두 허사라는 말이네.”라고 했다.○ 광일이 평소 지었던 《호연장문답(浩然章問答)》을 올리며 말하기를 “이는 시생이 《맹자》를 읽을 때의 차기(箚記)입니다.”라고 하고, 이어 “고자가 말하기를, 말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거든 …… 기운에서 구하지 말라[告子曰不得於言, …… 勿求於氣]” 이하 몇 대목을 뽑아내어 내가 읽자 선생께서 들으셨다. 읽기를 마치자 선생께서 말하기를 “논의한 바가 옳다.”라고 했다.○ 또 묻기를 “이과재(李果齋 이방자(李方子))의 ‘오성(五性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에 모두 정(靜)과 동(動)이 있다’고 한 말은 혹 말에 병통이 있는 듯합니다. 오성이 제각기 움직이고 고요하여 혼연한 한 덩어리가 되지 않는다면, 이 어찌 주자께서 말한 괴루(塊壘 응어리)라는 병통에 가깝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니, 선생께서 대답하시기를 “과재의 말은 병통이 되지 않네. 오성(五性)이 마음속에 혼연히 한 덩어리가 되어 있으면서 각각 조리가 있기 때문에 인(仁)이 움직이면 측은(惻隱)한 마음이 되고 의(義)가 움직이면 수오(羞惡)하는 마음이 되고 예(禮)가 움직이면 사양(辭讓)하는 마음이 되고 지(智)가 움직이면 시비(是非)를 가리는 마음이 되는 것이니, 측은한 마음이 감동할 적에 의ㆍ예ㆍ지가 다 같이 움직인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네. 네 가지가 다 그러하네. 그러므로 주자의 ‘조리(條理)와 간가(間架)가 있다’는 설, ‘성(性)과 정(情)이 체(體)와 용(用)이 되며 각기 저절로 분별이 있다’는 설, ‘하나의 이치[理] 속에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이 서로 체(體)와 용(用)이 된다’는 설이 있는 것일세.”라고 하고, 이어 주자의 〈옥산강의(玉山講議)〉를 내어 보이셨다.금오랑(金吾郞 의금부 도사)이 배[船] 구하기를 재촉하여 어렵게 배 1척을 얻었다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내일 작은 배라도 타고 내려가야겠다.”라고 했다.○ 28일 오후, 박수여(朴受汝)와 집에 돌아가겠다고 아뢰었다. 선생께서 말하기를 “《호연장문답》은 내가 장차 가지고 가려고 이미 가동(家僮)에게 맡겼네.”라고 했다. 마침내 절하고 하직한 뒤 돌아왔다. - 위는 기사년(1689, 숙종15) 백련사(白蓮社)의 어록이다. - [주-D001] 기사년 …… 상소하였다 : 숙종이 희빈 장씨 소생을 원자(元子)로 세우자, 봉조하(奉朝賀) 송시열이 위호(位號)가 너무 이르다며 “대개 철종(哲宗)은 열 살인데도, 번왕(藩王)의 지위에 있다가 신종(神宗)이 병이 들자 비로소 책봉하여 태자(太子)로 삼았습니다.”라고 하여 반대하였다. 숙종은 송시열이 산림이므로 귀양은 보내지 않고 삭탈관작하였고, 송시열을 구원하는 상소는 받아들이지 말라고 명하였다. 《국역 숙종실록 15년 1월 11일, 2월 1일》[주-D002] 사헌부(司憲府) …… 내렸다 : 송시열의 상소에 대해, 집의(執義) 박진규(朴鎭圭)ㆍ장령(掌令) 이윤수(李允修)를 필두로 비판이 이어졌고, 곧 제주로 유배되었다. 《국역 숙종실록 15년 2월 7일, 3월 19일》[주-D003] 선암(仙巖) : 전라도 광산현(光山縣)에 있는 역참이다.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전라도(全羅道)》[주-D004] 안청촌(安淸村) : 전라도 광주목(光州牧)에 있던 마을이다.[주-D005] 사술(士述) : 박광후(朴光後, 1637~1678)의 자이다. 호는 살던 마을 이름 안청촌(安淸村)을 따서 안촌(安村)이라 하였다. 1677년(숙종3), 박광일이 박광후와 장기(長鬐)로 귀양 가 있던 송시열을 찾아갔다가 강론하고 돌아간 일이 있는데, 다녀온 이듬해 세상을 떴다. 제주로 귀양 가는 송시열을 배웅할 때 박광일과 같이 간 박중회(朴重繪, 1664~1691)가 박광후의 외아들이다. 《安村集 卷4 行錄》 《性潭集 卷30 安村朴公行狀》[주-D006] 두 분 …… 편지 : 이어지는 대화로 미루어 퇴계 이황(李滉, 1501~1570)과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이 주고받은 편지를 말한다. 이황은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는 주장을 폈고, 기대승은 “사단 역시 정(情)이고, 따라서 기(氣)가 배제될 수 없다. 칠정 역시 인의예지(仁義禮智)에서 발하는 것이다. 사단과 칠정을 나누어 도식적으로 대거(對擧)하면 마치 두 가지의 대별되는 정이 있는 것 같고, 정에 또 두 가지의 선이 있어 하나는 이에서 발원하고 하나는 기에서 근원하는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라고 이의를 제기하며 8년에 걸친 논쟁을 벌였다. 《이황ㆍ기대승, 김영두 옮김,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소나무, 2003》[주-D007] 옛날에 …… 않았는데 : 서산은 송나라 채원정(蔡元定)의 호이다. 자는 계통(季通)이다. 한탁주(韓侂冑)에 의해 위학(僞學)으로 몰려 주희와 관계된 인물들이 화를 당할 때 호남(湖南) 도주(道州)로 귀양 가 용릉(舂陵)에서 죽었다. 주희와 함께 《서경》을 주석한 채침(蔡沈)의 아버지이다. 《宋史 卷434 蔡元定列傳》[주-D008] 서석산(瑞石山) : 전라도 광주(光州)에 있는 무등산(無等山)의 별칭이다.[주-D009] 지난해 …… 되었네 : 김만중(1637~1692)의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자는 중숙(重淑)이고, 호는 서포(西浦)이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예학(禮學)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이다. 1675년(숙종1) 승지로 있을 때 경연에 입시하여, “윤휴(尹鑴)가 성상께 ‘《논어(論語)》의 주(註)를 읽을 것이 없으며 대문(大文)도 또한 많이 읽을 것이 못되고 다만 수십 번만 읽으면 된다.’고 청하였다 하니, 그 말은 마땅하지 못합니다.……‘글에 임하여 공자의 이름을 휘(諱)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진달했다 합니다. 만일 글에 임하여는 휘하지 않는 규칙을 쓴다면 어휘(御諱) 또한 군부(君父) 앞에서 휘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또 성인의 휘를 〈곧바로〉 읽는다 해서 나랏일에 무슨 유익함이 있겠습니까?”라고 했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었다. 《국역 숙종실록 1년 윤5월 26일》[주-D010] 사계 …… 합니다 : 우계는 성혼(成渾, 1535~1598)의 호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자는 호원(浩源)이며, 호는 우계 또는 묵암(默庵)이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성수침(成守琛)의 아들이다. 1594년(선조27), 임진왜란 중에 있었던 왜와의 화친에 관한 논의에서, 황신(黃愼)은 성혼이 왜와 화친을 도모한다고 생각하여 이를 잘못이라고 지적하였고, 이에 대해 성혼은 화친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시세에 따라 중국과 협력해야 함을 주장한 것이라고 해명하였다. 《牛溪集 卷5 答黃思叔論奏本事第二書》[주-D011] 옥대(玉帶)를 …… 것 : 임진왜란 때 왜적이 성종(成宗)과 중종(中宗)의 능을 파헤치고 왕의 시신을 꺼내어 불태운 흔적이 있었는데, 중종의 능 속에는 의심쩍은 시체 하나가 들어 있어서 그 진위(眞僞)를 알 수 없으므로 의논이 분분하다가 그 시체를 별도로 후장(厚葬)하고 능 옆의 불태운 흔적이 있는 재를 거두어 능 안에 환봉(還奉)한 일을 말한다. 《燃藜室記術 卷16 宣祖朝 二陵之變》[주-D012] 유서애(柳西厓) :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의 호이다. 본관은 풍산(豐山)이며, 자는 이현(而見)이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에 올라 명나라의 참전을 이끌어냈고 평양과 한양 수복에 공을 세웠다. 1598년(선조31) 북인의 탄핵으로 삭탈관직당했다가 복관되었으나 은거하며 세상을 마쳤다. 임진왜란의 교훈을 정리한 《징비록(懲毖錄)》을 남겼다.[주-D013] 선조께서 …… 했다 : 《손재집》 저본에는 별도의 어록인 듯 편집되어 있으나, 문맥으로 보아 송시열의 말이 계속 이어지는 것으로 번역하였다.[주-D014] 어찌 …… 미혹하는가 : 선조의 시에 “한번 죽음은 내가 참을지언정, 강화란 말은 듣기 싫도다. 어찌 간사한 말을 지어내어 의리를 부수고 삼군을 미혹하는가.[一死吾寧忍, 求和願不聞. 如何倡邪說, 敗義惑三軍.]” 하였다. 《국역 연려실기술 제17권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병신년에 왜병이 철환하다》[주-D015] 송 수찬(宋修撰) : 송시열이 1689년(숙종15) 3월 제주(濟州) 북포(北浦)에 도착하여 위리안치되었을 때 수행한 손자 송주석(宋疇錫, 1650~1692)으로 보인다. 《국역 송자대전 부록 권11 연보10》 송주석은 1685년,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었고, 1687년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국역 숙종실록 11년 8월 22일, 13년 9월 9일》[주-D016] 대학 …… 뜻입니까 : 《대학장구》 전문 10장에 “천하를 평안히 하는 것은 그 나라를 다스림에 달려 있다는 말은, 윗사람이 늙은이를 늙은이로 대우함에 백성들이 효를 일으키고, 윗사람이 어른을 어른으로 대우함에 백성들이 제(弟)를 일으키며, 윗사람이 고아(孤兒)를 구휼함에 백성들이 저버리지 않는다. 이러므로 군자는 구(矩)로 재는 도(道)가 있는 것이다.[所謂平天下在治其國者, 上老老而民興孝, 上長長而民興弟, 上恤孤而民不倍, 是以君子有矩之道也.]”라고 했다. ‘배(倍)’ 자는 ‘배(背)’ 자와 같다.[주-D017] 어린아이를 …… 했습니다 : 《대학》 전 9장에 “〈강고(康誥)〉에 ‘적자(赤子)를 보호하듯이 한다.’라고 하였으니, 마음에 진실로 구하면 비록 정확히 맞지는 않으나 멀지 않을 것이다. 자식 기르기를 배운 뒤에 시집가는 사람은 없었다.[《康誥》 曰: ‘如保赤子.’ 心誠求之, 雖不中, 不遠矣, 未有學養子而后嫁者也.]”라고 했다.[주-D018] 기해의례(己亥議禮)에 …… 했다 : 1659년 효종이 세상을 뜬 뒤, 인조 왕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 조씨(趙氏)가 효종에 대해 어떤 상복을 입을 것인가 하는 전례논쟁인 기해예송을 말한다. 정태화, 송시열의 기년복설(期年服說)에 대해, 허목은 효종이 차자로서 장자가 되었다는 차장자설(次長子說)에 따라 삼년복을 주장했고, 윤휴(尹鑴)는 신모설(臣母說)에 따라 삼년복을 주장했다. 《宋子大全 卷26 大王大妃服制議》 《국역 현종실록 7년 3월 25일》[주-D019] 송 서산(宋瑞山) : 송시걸은 송시열의 막내아우인데, 형 송시수(宋時壽)와 함께 송시열의 귀양길에 동행하였다. 《국역 송자대전 부록 권11 연보10》[주-D020] 만덕사(晩德寺) : 강진(康津)에 있는 절이다. 송시열이 1689년(숙종15) 2월 24일에 강진에 도착하고 26일에 백련사(白蓮寺)로 처소를 옮겨 있으면서 바람을 기다리다가 3월 1일에 비로소 제주로 가는 배가 출발했다. 아래 기록을 보면 만덕사는 백련사와 같은 곳에 있었다. 《국역 송자대전 부록 제11권 연보》[주-D021] 안중화(安仲和) : 중화는 안여해(安汝諧)의 자이다. 본관은 죽산(竹山)이며, 호는 이병재(理病齋)이다. 26세에 성균관에 들어갔고, 1689년에 송시열을 만나 사제의 연을 맺었다. 이때 ‘이병재’라는 호를 받았고, ‘조심주일(操心主一)’이라는 글을 받았다. 《손재집(遜齋集)》 권8 〈이병재 안공 묘지명(理病齋安公墓誌銘)〉이 실려 있다.[주-D022] 기정익(奇挺翼) : 1627~1690. 자는 자량이다. 본관은 행주(幸州)이고, 호는 송암(松巖)이다. 기대승(奇大升)의 방5대손이며, 송시열의 문인이다. 제릉 참봉(齊陵參奉), 효릉 참봉(孝陵參奉) 등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호남의 장성(長城), 영광(靈光)에서 평생을 보냈다. 《송암집(松巖集)》이 있다. 《遜齋集 卷8 松巖奇公行狀, 韓國文集叢刊 171輯》[주-D023] 격양집(擊壤集) : 송나라 소옹(邵雍, 1011~1077)의 시집인 《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을 말한다. 소옹의 자는 요부(堯夫), 시호는 강절(康節)이다.[주-D024] 초나라가 …… 이야기 : 초나라 수도가 영(郢)이다. 이 이야기는 《한비자(韓非子)》 〈외저설(外儲說)〉에 나온다.[주-D025] 황면재(黃勉齋)가 …… 것 : 면재는 주희의 사위이자 제자인 황간(黃榦, 1152~1221)이다. 그는 《태극도해》에서 “양이 처음 생(生)해서는 수(水)가 아직 약하다가 목(木)을 생함에 이르러서는 이미 강성해진 것이요, 음이 처음 생해서는 화(火)가 아직 약하다가 금(金)을 생함에 이르러서는 이미 질(質)을 이루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수가 양의 어린 것이 되고 목이 양의 성한 것이 되며, 화가 음의 어린 것이 되고 금이 음의 성한 것이 되는데, 《태극도해》에서 가리킨 것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했다.[주-D026] 괴안국(槐安國)에 관한 고사 : 순우분(淳于棼)이 술을 마시고 홰나무[槐樹] 아래에서 잠이 들었다가, 괴안국에 가서 그곳 왕의 부마가 되어 남가 태수(南柯太守)를 30년 동안 지내며 부귀영화를 누리는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깨어 보니 홰나무 아래에 커다란 개미집이 하나 있었고, 남쪽 가지에는 또 작은 개미집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꿈에서 보았던 괴안국과 남가군(南柯郡)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괴안몽(槐安夢)’, ‘남가일몽(南柯一夢)’이라는 말이 나왔다. 당(唐)나라 이공좌(李公佐)의 전기소설 〈남가태수전(南柯太守傳)〉에 나온다.[주-D027] 호연장문답(浩然章問答) : 이 차기는 《손재집(遜齋集)》 권7 〈호연장문답병서(浩然章問答幷序)〉이다. 송시열은 세상을 뜨기 전 박광일에게 〈호연장문답〉을 읽고 난 뒤 몇 가지 의견을 적어 편지로 보냈다. 《국역 송자대전 제113권 박사원(朴士元)에게 답함 - 기사년 6월 2일》
- 2020-12-28 | NO.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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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마산 장사와 무등산 장사
- 서창동 백마산에는 수련골과 수련재, 차일봉, 장수굴 등 삽봉揷峰 김세근金世斤(1550∼1592) 장군과 관련된 지명들이 유독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백마산에는 임진왜란 때 공신인 삽봉 김세근 장군의 전설이 서려 있지요. 삽봉은 조선 연산군 시절 일어난 무오사화에 김일손金馹孫이 연루돼 참살을 당하자 종6품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경남 함안을 떠나 이곳 서창동 세동마을로 옮겨와 정착을 하게 됩니다. 세동은 70여 가구 200여명의 주민들이 모여 사는 마을로, 백마산을 배산背山으로, 극락강을 임수臨水로 두고 너른 세동들녘이 발달했는데 ‘서창 만드리 풍년제’의 무대가 되는 곳이지요.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병력을 길러야 한다는 양병론養兵論을 율곡 이이와 함께 펼친 삽봉은 낙향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4년 전부터 마을 뒷산인 백마산에서 장정들을 모아 무술을 가르쳤어요. 그 후 실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군은 장정 500여명을 이끌고 의병장으로 출전, 혁혁한 전공을 세우게 되지요. 그러나 고경명 장군과 함께 와평들의 금산대전에서 왜군과 싸우다 순절하고 맙니다. 이런 삽봉은 생전에 힘이 무척이나 셌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조금 더 정밀한 정리를 위해 세동의 한 토박이 어르신의 증언을 참조해 재구성해 보겠습니다. "김 장군의 뛰어난 용력勇力이 엄청났다고 해요. 백마산 장사와 무등산 장사 간에 바위 던지기로 힘을 겨루었다는 것인데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지요. 다름 아닌 백마산 자락 동하마을 김성(김세근 장군의 후손)의 집에 큰 바위 한 개가 끼워져 있는 데 그것이 증거지요."현재도 그 큰 바위는 그 당시의 모습대로 남아 있어요. 백마산에 살던 김장사(김 장군을 지칭함)와 무등산에 사는 김장사가 서로 누가 힘이 센가 하는 힘겨루기를 하게 됩니다. 서로의 산에서 큰 바위를 상대편의 산에 던졌습니다. 백마산 김장사가 백마산에서 던진 바위는 무등산 한 중턱에 떨어졌지만 무등산 김장사가 무등산에서 바위를 던졌는데 백마산에 좀 못 미쳐 이 마을에 떨어지고 말았어요. 바로 그 바위가 김성의 집 담에 박힌 큰 바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겨루기 결과는 무등산 김장사가 지고 백마산 김장사가 이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또 삽봉이 백마산에서 의병 훈련을 했다는 정황들이 여럿 있지요. "여기 백마산은 조선시대 때 김세근 장군이 의병들을 모아 적에 대항하는 훈련을 했다고 해요. 그래서 이 산꼭대기에는 김 장군이 기거했다는 장수굴이 지금도 있고 병사들이 훈련했다는 수련골과 수련재, 차일봉 등의 이름이 남아있지요."백마산 중턱에는 임진왜란 당시 군사훈련을 했던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흔적은 사실 찾아보기 힘들지만 산 정상에 헬리콥터 착륙장이 있어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전해오는 이야기처럼 일부 군사시설이 한때 있었다는 주민들 말의 행간에 집중해보면 아마도 백마산은 군사훈련의 적격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삽봉이 군사를 길러냈던 백마산은 그 모습이 수려하고 골짜기가 깊은 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너른 평지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함께 훈련할 수 있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백마산은 말 그대로 하얀 말이라는 뜻인데 멀리서 보았을 때 산잔등이 하얀 말의 형상을 하고 있어서 그렇지. 특히 겨울에 눈이라도 날리면 그 눈발 속에 갈기를 세운 흰 말의 잔등이 어슴푸레 떠오르는 것처럼 보여요."아마 이런 점들 때문에 삽봉이 머무르던 공간이기도 했지만 병사들을 훈련하는 장소로 선택했던 것입니다. ※김세근은 호는 삽봉, 자는 중빈이며 김해 사람으로 1550년(명종 5년) 4월16일에 출생했다. 28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 등의 벼슬을 지낸 데 이어 35세 때는 종6품 벼슬인 종부시주부宗溥寺主簿의 벼슬을 지냈다. 삽봉의 묘는 서창동 불암마을 팔학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의 거룩한 넋을 추모하는 학산사鶴山祠를 건립, 매년 음력 3월22일에 배향하고 있다.
- 2018-05-28 | NO.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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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마산 장수굴
- 서창동 중앙부에 있는 백마산은 해발고도 162.1m의 나지막한 야산에 불과하지만 수려하면서도 골짜기가 깊어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삽봉에 얽힌 전설이 많이 남아 있지요. 삽봉은 조선조 연산군 때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 당시 문민文愍 김일손金馹孫(1464~1498)이 조의제문사초弔意帝文史草 사건에 연루돼 참살당하는 화를 입자 그의 아버지 김석경이 종6품 벼슬인 종부시주부의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경남 함안군 마륜동을 떠나 이곳 서창 관내 세동마을로 옮겨왔습니다.삽봉은 관직에 있을 때 이이와 같이 외침에 대비한 양병론養兵論을 주장했으나 ‘태평시대에 양병은 부질없는 민심을 소란케 하는 사론邪論’이라는 간신배들의 반대에 의해 묵살되고 말았지요. 늘 외침을 염려한 김 장군은 임진왜란 4년 전부터 마을 뒤 백마산 골짜기에 연병장을 만들어 용력勇力있는 장정들을 규합하여 무술을 연마하기에 힘썼지요. 차츰 그 소문이 퍼지고 김 장군의 애국충정이 널리 알려져서 나주와 화순, 담양 등지에서 수많은 장정이 모여들었습니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정 수 백 명을 이끌고 의병장으로 출전, 금산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인이자 의병장인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1533∼1592) 장군과 함께 장렬히 순절했습니다. 지금도 삽봉이 장정을 훈련시킨 백마산 골짜기를 ‘수련골’이라고 하고, 세동마을에서 절골로 넘는 고개를 ‘수련재’라 하지요. 또 장정들의 숙소와 휴식처로 차일을 쳤다는 차일봉, 그 당시 사용했던 옥동샘, 백마산 상봉에 깊이 3m 가량의 바위굴이 있는데 김 장군이 이 굴에서 기거하면서 심신을 단련했다 하여 ‘장수굴’이라 이르게 됐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팔월 추석이 되면 인근마을 청소년들이 떼를 지어 이 산에 올라 눈앞에 확 트인 서석들을 내려다보고 맑은 가을날의 하루를 보내면서 김 장군의 위업을 되새기고 기리는 것이 연례행사였어요.※백마산은 서구 서창동에 소재한 산으로 군사보호구역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돼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산들보다 때가 타지 않은 곳이었다. 어찌 보면 임진왜란을 앞두고 의병장 삽봉揷峯 김세근金世斤(1550∼1592) 장군이 병사들을 훈련시켰던 훈련지가 있던 곳이어서 그랬는지는 모르나 오늘날까지 군사보호구역이었다고 하니 역사적 교집합 하나를 본 듯한 묘한 감정이 인다.
- 2018-05-28 | NO.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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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벌남의 처가 올린 격쟁 원정을 징계하라
- 정조 11년 정미(1787)2월 6일(갑진) 형조가 격쟁(擊錚)한 사람들의 원정(原情)으로 아뢰었다. “광주(光州)의 고 조이(高召史)의 격쟁 원정에, ‘남편 백벌남(白伐男)이 지난해 9월에 고질적인 폐단 및 경주인(京主人) 김광택(金光澤)이 중간에서 폐단을 일으키는 죄를 대략 진달하였다가 멀리 유배되고 말았습니다. 특별히 풀어 준 뒤 김광택의 죄를 분명하게 캐내어 엄히 다스려 주소서.’ 하였습니다. 백벌남은 역참(驛站)의 폐단이라 일컬으며 관장(官長)을 무고하고 멋대로 격쟁하였기에 판부(判付)로 인하여 본도에 조사를 행하였는데, 무망(誣罔)으로 귀결되어 형률대로 정배되었습니다. 겨우 한 달이 지나자마자 그 처가 외람되이 격쟁하였을 때는 본조에서 깊이 책할 것이 없다는 이유로 시행하지 말게 하라고만 청하였는데, 몇 달이 되지도 않아 다시 호소하였으니, 너무도 통탄스럽고 놀랍습니다. 시행하지 말게 하고, 본조에서 징계하여 다스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여, 그대로 따랐다.
- 2022-05-16 | NO.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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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사(白沙)의 북천록(北遷錄) 서문 - 약천집 제27권
- 백사(白沙)의 북천록(北遷錄) 서문 - 약천집 제27권 :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1629~1711)옛날에 우리 선조(宣祖)께서 중흥(中興)하실 때에 큰 공을 세운 대신(大臣)이 있었으니, 백사 선생 이공 항복(李公恒福)으로 자가 자상(子常)이다. 광해가 임금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모후(母后 인목대비(仁穆大妃) )를 폐위하려 하니, 공은 헌의(獻議)하여 정도(正道)를 지키다가 관북으로 유배 가서 그곳에서 별세하였다. 이때 살아서 유배지에 갔다가 죽어서 돌아오는 즈음에 서로 따른 자는 바로 금남군(錦南君) 정충신 가행(鄭忠信可行)이었다. 그는 발섭(跋涉)하는 노고와 나그네로서 타관에 있는 고통과 질병의 위태로움과 죽음의 두려움을 자세히 기록하여 후인들에게 남겨 주어 보게 하였으니, 아, 지금 그 기록한 내용을 보면 이는 다만 비분강개한 뜻으로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기술했을 뿐이요, 언어의 묘함과 문장의 아름다움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하늘의 떳떳한 이치와 백성들의 윤리의 중함을 증대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선한 마음을 감발(感發)해서 흥기하게 함이 어쩌면 이리도 많단 말인가.모자간의 윤리와 군신 간의 의리는 참으로 중대한 것이며, 인품의 간사하고 바름과 세도(世道)의 오르고 내림, 무상(無常)한 사람들의 태도와 없어지지 않는 공의(公議), 죽어서도 영화로움과 살아서도 치욕스러움, 인륜을 보고 식별하는 지혜와 지우간(知遇間)에 허여하여 보답하는 것들이 한 가지도 이 책에 구비되지 않은 것이 없으니, 후세의 군자가 이 책을 본다면 또한 때를 헤아려 처신하는 방법을 알 것이다. 사람이 서책을 소중하게 여기는 까닭은 이 때문일 뿐이다. 비록 훌륭한 선생과 대인이 세상의 교훈이 될 만한 글을 지었다 하더라도 요컨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니, 어찌 군복을 입은 무신이 경병(競病)의 말을 남긴 것과 같은 종류로 여겨 함께 평할 수 있겠는가.내 들으니 선조대왕(宣祖大王)이 용만(龍灣)으로 파천하였을 때에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내부(內附)하고자 하여 여러 신하들 중에 따라가기를 원하는 자를 물으니, 오직 공만이 몸소 말고삐를 잡고 따라갈 것을 청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공이 북쪽 지방으로 귀양 가자, 오직 금남만이 따르고 떠나가지 아니하여 살아 계실 때와 별세한 뒤를 잘 경영하였으니, 아, 공이 스스로 군부(君父)에게 충성을 다하여 그 보답을 금남에게서 받은 것이다. 《시경(詩經)》에 말하지 않았는가. “선조에게 훌륭한 행실이 있기 때문에, 후손이 그와 같은 것이다.” 하였으니, 참으로 맞는 말이다.또한 나는 여기에서 다시 느끼는 바가 있다. 옛날 보상(輔相)의 직책에 있는 자는 반드시 인재를 알아보는 것을 우선으로 여겼다. 진(晉)나라의 창고 관리하는 자를 오직 조 문자(趙文子)가 알아보고 천거하여 대부로 삼았고, 한(漢)나라로 도망온 병졸을 오직 소 상국(蕭相國)이 알아보고서 천거하여 대장으로 삼았으니, 이처럼 명철한 식감(識鑑)은 본래 천성에서 얻은 것이니, 어찌 전수할 수 있는 방법이 있겠으며 배우고 익혀서 능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금남은 광주(光州)의 한 천한 선비로서 총각 시절에 적군 속을 뚫고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니, 공은 마침내 눈을 들어 한 번 바라보는 사이에 그를 알아보고서 가르치고 성취시켜 끝내 국가의 훌륭한 인물이 되게 하였다. 그리하여 자기 한 몸이 곤궁할 때에 큰 도움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 기세가 하늘을 뒤덮는 역적을 토벌하고 국가를 거듭 회복하는 공렬(功烈)을 이루어서 세상의 간성(干城)이 되어 종묘사직이 이에 의뢰하였다. 지금 이러한 안목이 없으면서 국가의 큰 임무를 담당한 자들은 비록 혹 구구히 충성할 것을 원하는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훌륭한 인물을 선발하여 군주를 섬김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아.[주-D001] 군복을 …… 것 : 경병(競病)은 경(競)과 병(病) 두 험운(險韻)을 달아 지은 시를 말한다. 양(梁)나라 때 조경종(曹景宗)이 개선(凱旋)하자, 무제(武帝)가 화광전(華光殿)에서 잔치를 베풀어 연음(宴飮)하면서 심약(沈約)과 더불어 연구(聯句)를 지었는데, 이때 운자를 모두 사용하고 오직 경병 두 글자만 남았다. 조경종이 붓을 잡고 즉석에서 시를 지어 “떠날 때에는 아녀자들 슬퍼하더니, 돌아올 때에는 피리와 북소리 요란하네. 한 번 길 가는 사람에게 묻노니, 옛날의 곽거병과 어떠한가.〔去時兒女悲 歸來笳鼓競 借問行路人, 何如霍去病〕”라고 하니, 무제가 감탄하였다. 《南史 卷55 曹景宗傳》[주-D002] 진(晉)나라의 …… 삼았고 : 문자(文子)는 춘추 시대 진나라의 명재상인 조최(趙衰)의 시호이다.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 “진나라 사람들이 조 문자(趙文子)를 일러 사람을 잘 아는 자라고 하였다. …… 진나라에서 천거한 사람 중에 관고(管庫)의 선비가 70여 명이었으나 살아서는 그들과 이익을 주고받지 않고 죽어서는 자기 자식을 부탁하지 않았다.” 하였는바, 관고의 선비란 창고를 맡아 관리하는 낮은 벼슬아치를 가리킨다.[주-D003] 한(漢)나라로 …… 삼았으니 : 한나라로 도망온 병졸은 한신(韓信)을 가리킨다. 한신은 회음(淮陰) 사람으로 일찍이 초(楚)나라의 패왕(覇王)인 항우(項羽)를 섬기다가 한나라 고조(高祖)인 유방(劉邦)에게 귀의하였으나 크게 등용되지 못하자 유방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그러나 승상인 소하(蕭何)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도망가지 말도록 설득한 다음 유방에게 대장(大將)으로 크게 등용할 것을 건의하여, 결국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史記 卷93 淮陰侯列傳》
- 2020-09-23 | NO.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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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석골의 유래
- 백석골에는 백석사白石寺 석불과 용수의 애절한 이야기가 서려 있습니다. 백석사는 운천동 방죽이 있었고, 그 방죽 일대에 울창한 숲이 있었는데 그 숲 속에 자리 잡았던 아주 작은 사찰이었어요. 그리고 용수는 아주 어릴 적에 어머니를 여의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정을 모르고 자랄 수밖에 없었지요. 용수는 일제 강점기인 1940년대 산골마을에 살았는데 앞서 밝힌 것처럼 어머니는 이미 여의었고, 늙은 아버지와 단둘이 가난하게 오두막집에 살았습니다. 오두막집에는 뽕밭이 있었고, 한 가운데 오래된 석불이 서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사실 반년 전에 네 살의 어린 나이로 죽은 동생 용덕이가 있었지요. 이 용덕이 때문에 용수는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그 석불 앞에 돌멩이를 하나씩 바쳤습니다. 그 앞에 앉아 간절하게 빌었어요. "돌부처님, 제 동생 용덕이는 너무 어려서 제 발로 걷지도 못해요, 그래서 딴 애들처럼 냇물을 건너지 못하고 울고만 있을 겁니다. 그러니 도로 집으로 돌려보내 주시던가, 아니면 돌아가신 엄마 곁으로 데려다 주세요." 이렇게 빌고 난 용수는 눈물어린 얼굴로 석불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날따라 그 석불의 얼굴이 가끔 꿈속에서나 보는 어머니의 얼굴과 너무나 닮아 보인 것이죠. 좀 일그러진 낮은 코까지 그렇게 똑같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부터 용수의 마음에는 한 가지 믿음과 기쁨이 싹텄습니다. 용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 석불 앞에 꿇어앉아 여러 가지 소원을 빌었던 것이죠.그토록 정성들여 바치는 돌멩이는 어느새 석불의 무릎을 덮고 앙상한 뽕나무가지에도 새싹이 움트기 시작한 어느 이른 봄날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용수는 아버지를 따라 풀을 매고 돌아오는 길에 혼자서 그 석불을 찾아갔습니다.그런데 어제 석양 때까지 그곳에 서있던 석불은 온데간데없고, 사람들 발자국과 쌓아둔 돌멩이만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어요. 용수는 한참동안 넋 나간 사람처럼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고추밭에서 거름을 주고 있던 윗마을 아저씨에게 다가가 "저! 아저씨, 저기 뽕나무 밭둑에 있던 돌부처님 어떻게 된지 모르세요?" 하고 물었습니다. 아저씨는 용수의 두 눈에 괴인 눈물을 보고 놀라며 "아까, 읍내 어느 부잣집에서 파서 가지고 갔어. 아마도 자기 집 정원에 세워놓고 볼 모양이지, 나도 차에 실을 때 거들어 줬지만" 하는 것이었습니다.용수는 먼 산을 바라보며 슬프디 슬픈 얼굴을 지었습니다."이젠 동생을 위해 소원을 빌 데가 없어졌으니 걘 저승으로 건너는 냇가에서 자꾸만 허물어지는 돌자갈을 쌓으면서 울고 있을 거예요." 어렵게 수소문해 찾아 나선 용수는 한 아주머니로부터 석불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됩니다. 그 아주머니는 말하기조차 지긋지긋 하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고 "아, 글쎄 그 돌부처를 집에 갖다놓은 그날 밤부터 어떤 낯선 여인이 꿈속에 나타나 머리맡에서 울지를 않나, 우리집 꼬마 녀석이 시름시름 앓지를 않나, 그래서 점을 쳐봤더니 그 돌부처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글쎄" 하고 고개를 내젓는 것이었습니다. 더 좀 자세히 들어보니 얼마 전 시골 밭둑에서 파왔다고 했어요. 그 크기와 생김새가 용수가 찾는 그 석불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이 아주머니는 석불을 옮겨온 뒤 집안에 자꾸 액이 껴서 결국 석불을 절간에 바치게 됐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용수는 그날 땅거미가 드는 석양 무렵 돌부처가 옮겨진 백석사로 갔어요. 그런데 그 절에도 용수가 찾는 돌부처는 없었습니다. 돌부처를 옮겨다놓은 그날부터 주지스님이 앓아눕는 등 흉흉한 일이 생겼기 때문에 절 앞 물 속(운천호수)에 버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용수는 바로 호수로 발길을 옮겨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를 부르면서 방죽 속으로 뛰어들었어요. 그 후 용수는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그 일대의 돌들이 하얀 백석으로 변해 ‘백석골’이 됐다고 전해집니다.※백석골의 유래는 ‘전남의 전설’이나 ‘광산부지’, ‘내 고장 전통가꾸기-광산군’, ‘명소지명유래지’에 부분 부분 발취된 내용이 여러 단행본에 인용, 수록돼 있다. 한 포털의 오픈지식에는 ‘엄마보살이야기’라는 이름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 이야기에는 1946년이라고 하는 시대적 배경과 등장인물인 용수의 성이 방씨이고, 보통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읍내 이발소에 다닌다는 것이 제시된다.
- 2018-05-28 | NO.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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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가 탐라(耽羅)를 치려다가 중도에서 돌아왔다 - 동사강목 제3상
- 동사강목 제3상 갑술 신라 소지왕(炤智王) 16년, 고구려 문자왕(文咨王) 3년, 백제 동성왕(東城王) 16년부터, 무신 신라 진덕 여주(眞德女主) 2년, 고구려 보장왕(寶藏王) 7년, 백제 의자왕(義慈王) 8년까지 155년간 무인년 신라 소지왕 20년, 고구려 문자왕 7년, 백제 동성왕 20년(북위 효문제 태화 22, 498) 춘정월 고구려가 아들 흥안(興安)을 태자로 삼았다. 백제가 웅진교(熊津橋)를 가설하였다.추7월 고구려가 금강사(金剛寺)를 창건하였다.8월 백제가 탐라(耽羅)를 치려다가 중도에서 돌아왔다. 백제 왕이 탐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는다 하여 친히 정벌하려고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광주(光州))에 이르니, 탐라가 이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므로 중도에서 회군하였다.
- 2020-09-15 | NO.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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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윤중-양파정(楊波亭)
- 登彼高亭渾忘歸 높다란 저 정자에 올라 전연 돌아갈 것 잊으니公輸遺巧一無違 공이 이룬 遺計 하나도 어긋짐 없음이로다雲從瑞石眼前起 구름은 서석으로부터 眼前에 일어나고 鳥拂華欄脚下飛 새들은 華欄을 떨치고 발밑에서 날도다昔日功名皆夢寐 옛날의 공명은 꿈속이요暮年杖屨好休依 만년의 당신은 쉬기에 좋도다官民行樂知何處 관민의 행락처가 어디인줄 알겠는가城市之南闢板扉 성시의 남쪽에 판자문 열렸도다楊波亭上詠而歸 양파정 위에서 시 읊고 돌아가니賓主會期時不違 빈 주간에 모이는 기약 때 어긋나지 않았도다天垂曠野蒼蒼大 광야에 드리운 하늘은 창창히 크고鳥度華欄點點飛 화란을 지나는 새들은 하나하나 날아가도다性愛烟霞終是癖 천성이 연하를 즐기다가 마침내 이렇게 버릇되고詩留名姓好相依 음시로 성명 남겨 잘 서로 의지하도다萬戶府中成下界 만호나 되는 부중도 하계 이루고曲潭一隅闢山扉 곡담한 모퉁이에는 산문이 열렸도다登亭縱目渾忘歸 정자에 올라 마음대로 조망하다가 돌아갈 것도 아주 잊고爲賀主人世不違 주인의 세업 어긋나지 않음을 축하하도다遠方來士情尤溢 遠方의 來士들은 우정이 더욱 충일하고特地起簷鳥若飛 특히 처들은 簷下는 붕조 나는 것 같도다光府電燈星點點 광주의 전등불은 별처럼 점점거리고錦溪春色草依依 錦溪의 춘색은 화초도 依依하도다輞川別業揚波又 輞川의 別業은 양파에도 또 있으니石路傾斜雲一扉 傾斜진 石路에 구름 덮힌 한 사립문이로다 -취강율동집(翠崗汩董集)범윤중(范潤中, 1883-1951)의 자는 학노(學魯)이며 호는 취강(翠崗)이다.
- 2018-07-10 | NO.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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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진동 거부 탁씨
- 고려 말, 서구 벽진동 산촌 마을에 탁씨卓氏 성을 가진 만석꾼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탁씨에게는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걱정거리가 있었어요. 그것은 바로 대를 이를 아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자여도 뭘 해. 후사가 없으면 재산도 다 필요 없는 법인데."탁씨는 장성 땅에 유명한 ‘점쟁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 점쟁이를 불러들여 점을 치게 했어요. 탁씨 집을 찾아온 이 점쟁이는 집의 형세와 탁씨의 사주를 받아 음양오괘로 풀어보더니 딱하다는 듯 살래살래 고갯짓을 하면서 말했습니다."일 년 후, 아드님 하나를 얻게 되지만 오래 살지는 못할 겁니다. 정말 안됐군요."이 점괘占卦를 들은 탁씨는 고민이 됐지요. 복채도 두둑이 줬지만 점쟁이는 훗날의 불길한 낌새 때문에 복채를 받지 않고 그냥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로부터 일 년 뒤 탁씨는 아들을 낳았지만 점쟁이의 예언대로 그 아들은 세이레(아이가 태어난 후 스무하루 동안)를 넘기지 못했어요. 비탄에 잠긴 탁씨는 그 점쟁이를 다시 불러들여, 한 번 더 점을 쳐달라고 부탁했지요.점쟁이는 고민 끝에 말을 했어요. "앞으로 아들을 낳기는 하지만 그 아들이 오래 살지는 못합니다."또 다시 아들을 잃어버릴 수 없다는 생각에 탁씨는 점쟁이을 붙잡고 "그렇다면 무슨 좋은 방법이 없겠습니까? 제발 부탁입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후사만은 이어야하지 않겠소" 하고 애걸했습니다. 그러자 점쟁이는 조심스럽게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게 말처럼 이행이 될런지…"라며 말끝을 흐리는 것이었다. "그럼, 그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십시오. 꼭 그 방법대로 하겠습니다."그 점쟁이는 아들의 단명을 막을 방도를 알려주었습니다. "이번에 낳은 아들이 요절夭折을 면하려면 그의 나이 열세 살이 된 동짓날 초하루에 집을 나가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서 5년을 지낸 뒤에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야 목숨을 잃지 않고 장수할 수 있을 겁니다."그로부터 1년이 지난 뒤 탁씨의 집에는 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탁씨는 아들을 애지중지 키웠지요. 영리한 신동처럼 사자소학四字小學이며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두루 깨쳐나갔습니다. 그런 아들이 어느덧 시간이 흘러 열세 살이 되었어요.탁씨는 점쟁이의 말을 아들에게 전했어요. 그러자 그 영특한 아들은 그 말을 듣고 세상 구경하며 이런 저런 경험을 하고 5년 후에 돌아오겠노라고 대답을 한 뒤 열세 살 난 동짓날 초하루가 되자 점쟁이의 말대로 노자 한 푼 없이 집을 떠났습니다. 결국 집을 떠난 아들은 거지가 되어 문전걸식을 해가며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보성 땅 어느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게 됐어요. 5년이 되는 날 밤 머슴살이를 하고 있는 그 집에 귀신이 나타나 탁씨의 아들을 잡아가려 하자 그의 사연을 들어 알고 있던 주인집 딸이 그를 안방 뒤주 속에 숨겨놓고는 열쇠를 치마 속에 감추고 내놓지를 않았습니다. 주인집 딸은 그의 아들을 남몰래 사랑했기 때문에 그 귀신이 열쇠를 건네 달라고 했음에도 결국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주인집 딸의 칠대 조 할아버지 되는 그 귀신은 하얀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점잖은 노인으로 변신하면서 "내가 너의 칠대 할아버진데 윗대 선조의 원한을 갚기 위해 하는 일을 네가 막다니…. 그래서야 되겠느냐, 어서 그 열쇠를 내 놓아라"하고 호통을 쳤어요. 그런데도 주인집 딸은 귀신의 말을 무시한 채 열쇠를 끝까지 내놓지 않았습니다. 첫 닭이 울자 귀신은 조상에게 복을 받으려거든 "저 년을 얼른 탁가 놈 집으로 보내버려!"라고 하면서 알쏭달쏭한 분부를 남기고 새벽닭 울음소리가 끝나기 전에 허겁지겁 떠나버렸어요 그 후 탁씨 아들은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 아들 딸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지만 그 부인은 조상님에 대한 죄책감으로 일생동안 한 번도 친정집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벽진동 거부巨富 탁씨卓氏는 사월산獅月山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이 산은 조선 초엽 광주시내 쪽에 살던 탁씨들의 선산이었다. 본디 탁씨들의 선산은 현재 광주공원이 들어선 성거산이었다. 그런데 광주향교가 처음에는 장원봉, 다음에는 광주읍성 안의 북문 쪽에 있다가 결국 성거산(광주공원)에 이전하게 될 처지가 되자 자신들의 선산을 기꺼이 희사하고 그 대체부지로 택한 것이 사월산이었다. 이 설화가 벽진동에서 유래한 근거다.
- 2018-05-28 | NO.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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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진서원 의열사 상량문〔義烈祠上梁文〕- 서하집
- 의열사 상량문〔義烈祠上梁文〕- 서하집 제13권 / 상량문(上梁文) : 이민서(李敏敍, 1633~1688).향선생을 사(社)에 향사하여 오래전부터 정성을 바치는 사당이 있는데, 열장부(烈丈夫)가 때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유독 충(忠)을 나타내는 전례(典禮)가 빠졌도다. 이에 옛 사당을 새롭게 하여 영령(英靈)을 함께 향사하도다.회재(懷齋) 박 선생(朴先生)은 재야의 현인이며 방국(邦國)의 큰 선비로다. 복자하(卜子夏)와 단간목(段干木)의 절개로 남주(南州)에서 출중하였고, 진원방(陳元方)과 정강성(鄭康成)의 주선으로 상국(上國)에서 빈흥(賓興)하였네. 조정에서 날릴 때에는 기러기 날개를 함께 쳐다보았지만, 길 잃고는 소 잡는 칼을 누차 시험하였지. 골짜기에서 은거한 세월 오래되었고 조정에 출입하여 덕과 명예가 더욱 높았네. 마침 큰 뱀이 형(荊)을 침범하여 육룡(六龍)이 촉(蜀)에 거둥하였네. 촉지무(燭之武)가 늙음을 고했으나 여전히 임금을 잊지 못하였고, 안고경(顔杲卿)이 군사 일으켜 적을 섬멸하기를 맹세하였네. 이 때문에 집안에 거처하며 의병에게 물자를 공급하였는데 몸이 죽어 중흥을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구나.충용(忠勇) 김 장군(金將軍)은 산악의 밝은 영기를 받고 초야에 자취 감췄네. 충정(精忠)은 해를 꿰뚫어 전쟁을 만나 의리상 마다하지 않았으니, 화란(禍亂)은 천지에 가득하여 뛰어난 호걸이 아니고선 힘으로 구제할 수 없었지. 처음 일어나자 총애하는 명령이 거듭 내렸고 한번 호령하자 군사들이 다투어 모여들었네.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처럼 작은 응원군조차 없이 홀로 외로운 군대를 이끌고, 관우(關羽)와 장비(張飛)처럼 맹수 같은 용맹을 갖고 충절을 자부하였네. 왕언장(王彥章)이 창을 휘두르고 말을 달리며 나는 듯이 출입하였고, 악무목(嶽武穆)이 등에 새기고 마음에 맹세하여 생사를 잊은 듯하였네. 손랑(孫郞)이 이르자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였고 단도제(檀道濟)가 태어나자 나라에 간성(干城)이 있었네. 세상에 드문 특별한 인재는 하늘이 시대를 위해 낸다는 것을 진실로 알겠으니, 옛날의 명장을 보면 누가 수염이 무리에서 특출한 이만 하랴.화의(和議)가 이루어지자 열사들의 마음이 해이해졌고 당화(黨禍)가 기승하자 간신이 계책을 얻었네. ‘막수유(莫須有)’ 3자(字)가 애당초 어떻게 사람을 복종시켰으랴. 만약 속죄할 수 있다면 내 몸을 백 번이라도 주겠다 하였으니 옛날에 진실로 이렇게 지극한 울분이 있었도다.다행히 백 년의 공론(公論)이 정해져서 선조(先朝)의 포증(褒贈)이 통쾌하게 펴졌도다. 내가 누구와 함께 돌아가랴. 돌아가신 분 환생할 수 없어 애통하도다. 선비들 서로 감격하여 백대 만에 오히려 새로워졌도다. 외지고 누추한 곳이라 글 짓는 이 없는 것이 오히려 한스럽고 향사(享祀)가 거행되지 않아 애석하도다. 단 태위(段太尉)의 일사(逸事)를 징험하고 수양(睢陽)의 쌍묘(雙廟)를 모방했도다. 사당을 예전 규모보다 넓히고 충혼을 일실(一室)에서 제사 지내도다. 도(道)는 인의(仁義)에 근원을 함께 두고 사람은 무(武)와 문(文)에 차이를 두지 않았네. 대우전(大羽箭)과 진현관(進賢冠)이 능연각(凌煙閣)에 함께 그려졌고 살벌한 소리와 드문드문한 비파소리가 공문(孔門)에 아울러 있었네. 영렬(英烈)이 외롭지 않아 이웃이 있음을 기뻐하고 천도(天道)가 비록 오래 걸리더라도 반드시 돌아옴을 믿겠노라. 애오라지 찬송하는 붓을 들어 긴 들보 올리는 일을 돕노라.어영차 들보를 동쪽으로 던지니 / 兒郞偉拋梁東서석산이 높이 하늘에 솟구쳤구나 / 瑞石山高聳碧空구름 일으키고 안개 낼 뿐만 아니니 / 不獨興雲兼出霧신령스런 빛과 아름다운 기운이 영웅을 냈도다 / 靈光休氣產英雄어영차 들보를 서쪽으로 던지니 / 兒郞偉拋梁西큰 들이 평평히 펼쳐져 바라보면 가지런하네 / 大野平分一望齊거록의 창칼의 모임을 상상해 보니 / 想看鉅鹿刀槍會천군만마가 소리 없이 북소리를 들었으리라 / 萬馬無聲聽鼓鼙어영차 들보를 남쪽으로 던지니 / 兒郞偉拋梁南백 이랑의 모난 못 쪽보다 더 푸르구나 / 百頃方池綠勝藍서호는 나귀 탄 장군이 정착할 만하니 / 西湖可着騎驢將물빛과 산빛에 한을 견딜 수 없네 / 水色山光恨不堪어영차 들보를 북쪽으로 던지니 / 兒郞偉拋梁北만산의 소나무와 회나무가 푸르름 일색이로다 / 滿山松檜靑一色세상 사람 누가 추워진 뒤의 자태를 알리오 / 世人誰識歲寒姿도끼로 베어 가는 것이 더 이상 애석치 않구나 / 斧斤斬伐不復惜어영차 들보를 위로 던지니 / 兒郞偉拋梁上해와 달 빛나고 은하수도 출렁이네 / 日月照耀星河泳흙 속의 푸른 피 갑 속의 칼날이 / 土中碧血匣中刀밤마다 원통한 기운 하늘을 찌르도다 / 夜夜冤氣衝宸象어영차 들보를 아래로 던지니 / 兒郞偉拋梁下널찍한 산의 돌이 앞들을 굽어보네 / 山石盤陀俯前野청금과 만호영이 가득하니 / 濟濟靑襟及胡纓사방에서 의를 좋아하는 이들 달려오누나 / 奔走四方好義者삼가 원하건대, 상량한 뒤에 많은 선비들 구름처럼 모여들고 온 나라가 감화되며, 봄가을로 향사하는 일에 희생을 마련하여 정성을 바치고 조석으로 강습하는 법규는 〈백록동규(白鹿洞規)〉와 번갈아 아름다우며, 풍성(風聲)이 묘사(廟祀)와 함께 멀리 퍼지고 문교(文敎)가 치화(治化)와 함께 흘러가게 하소서. 전현(前賢)을 저버리지 말기를 바라며, 영원한 세상에 함께 힘쓰기를 기대하도다.[주-D001] 의열사 : 1604년(선조37)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박광옥(朴光玉)의 덕행과 절의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원래 이름은 벽진서원(碧津書院)이었다. 그 뒤 이민서가 광주 목사로 있던 1678년(숙종4)에 김덕령(金德齡)을 추가 배향하는 동시에 중수하였으며, 1681년 ‘의열사(義烈祠)’라고 사액되었다. 광주시 서창에 있다. 그 뒤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의열사는 철거되고, 1975년 2월 이곳에 충장사를 지어 배향하였다.[주-D002] 회재(懷齋) 박 선생(朴先生) : 회재는 박광옥(朴光玉, 1526~1593)의 호이다. 자는 경원(景瑗), 본관은 음성(陰城)이다. 전라도 광주에 세거(世居)하며, 기대승(奇大升)ㆍ박순(朴淳)ㆍ이이(李珥)ㆍ노사신(盧思愼) 등과 교유하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였고, 고향의 의병도청(義兵都廳)에서 군사 장비와 군량을 조달하였다. 의병 활동의 공로로 다시 관직에 올라 나주 목사로 재임하다가 죽었다. 1602년(선조35) 광주 벽진촌(碧津村)에 세워진 의열사(義烈祠)에 제향되었으며, 뒤에 벽진서원으로 고쳐졌다. 운봉(雲峰)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도 제향되었다.[주-D003] 복자하(卜子夏)와 …… 출중하였고 : 박광옥이 벼슬하기 전에 광주(光州)에서 출중한 인사였음을 말한다. 복자하는 공자의 제자 가운데 문학으로 이름난 복상(卜商)으로, 자가 자하(子夏)이다. 단간목(段干木)은 전국 시대 진(晉)나라 사람으로, 위(魏)나라에 살면서 도를 지킨 채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다. 위나라 문후(文侯)가 그가 어진 것을 알고서 찾아가자 문후를 피하여 담을 넘어 도망쳤다. 《孟子 滕文公下》[주-D004] 진원방(陳元方)과 …… 빈흥(賓興)하였네 : 박광옥이 빼어난 학문을 바탕으로 대신의 추천을 받아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된 것을 말한다. 진원방은 후한(後漢)의 진기(陳紀)로, 자가 원방이다. 덕행과 재주로 이름나 그 아우 진계방(陳季方)과 함께 난형난제(難兄難弟)로 일컬어졌다. 정강성(鄭康成)은 후한의 학자 정현(鄭玄)으로, 자가 강성이다. 빈흥(賓興)은 주(周)나라 때 어진 인재를 선발하던 방법의 하나로, 지방의 소학(小學)에서 덕행과 학예(學藝)가 뛰어난 학생을 뽑아서 빈례(賓禮)로 맞이한 뒤에 국학에 입학시키는 방법이다. 《周禮 大司徒》[주-D005] 길 잃고는 …… 시험하였지 : 작은 고을의 수령을 자주 역임하였다는 말이다. 공자가 자신의 제자 자유(子游)가 수령으로 있는 무성(武城)에 가서 현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소리를 듣고는 빙그레 웃으면서,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는가?[割雞焉用牛刀?]” 하였다. 《論語 陽貨》 박광옥은 운봉 현감(雲峯縣監)ㆍ영광 군수(靈光郡守)ㆍ밀양 부사(密陽府使) 등을 지냈다. 《記言 別集 卷25 羅州牧使朴公墓表》[주-D006] 마침 …… 침범하여 : 큰 뱀은 흔히 봉시장사(封豕長蛇)로 쓰인다. 큰 뱀처럼 포학하고 탐욕스러운 부족이라는 말로, 본래 남만(南蠻)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적을 가리킨다. 《춘추좌씨전》 정공(定公) 4년조에 “오나라는 큰 돼지와 뱀이라서 끊임없이 상국을 침범하고 있다.[吳爲封豕長蛇, 以荐食上國.]”라고 하였다. 형(荊)을 침범한 일은 미상이다.[주-D007] 육룡(六龍)이 촉(蜀)에 거둥하였네 : 육룡은 천자(天子)의 수레를 끄는 여섯 마리의 말에 대한 미칭으로, 천자의 수레를 이르기도 하고 천자를 가리키기도 한다. 당 현종(唐玄宗) 천보(天寶) 14년에 안녹산(安祿山)이 낙양(洛陽)을 함락시키고 이듬해 장안(長安)까지 쳐들어오자, 천자가 촉 지방으로 거둥하였다. 여기서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선조(宣祖)가 의주(義州)로 몽진(蒙塵)한 것을 비유하였다.[주-D008] 촉지무(燭之武)가 …… 못하였고 : 촉지무는 춘추 시대 정(鄭)나라 신하로, 진(秦)과 진(晉)이 정나라를 포위했을 때 정나라 임금이 그를 사신으로 보내려 하자, 그가 “나는 젊었을 때에도 남처럼 일을 못했는데, 지금은 늙기까지 했으니 도저히 해낼 수가 없다.”라고 사양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중용하지 못한 것을 임금이 사과하자, 결국 진(秦)나라 군대에 가서 진 목공(秦穆公)을 만나 “만약 정나라를 그대로 놔두어, 진(秦)나라가 동방으로 진출할 적에 길 안내 역할을 맡게 하시고, 사신들이 왕래할 적에 부족한 물자를 공급하게 하신다면, 임금에게도 손해가 없을 것입니다.[若舍鄭以爲東道主 行李之往來 供其乏困 君亦無所害]”라고 설득하여 포위를 풀게 하였다. 《春秋左氏傳 僖公30年》[주-D009] 안고경(顔杲卿)이 …… 맹세하였네 : 안고경은 당(唐)나라의 충신으로 상산 태수(常山太守)로 있을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당했다. 반란군 사사명(史思明)이 상산을 공격하여 성이 함락되고 자신은 사로잡히게 되었는데, 면전에서 준열하게 꾸짖다가 혀가 잘리고 죽었다. 《新唐書 卷192 顔杲卿列傳》[주-D010] 충용(忠勇) 김 장군(金將軍) : 의병장 김덕령(金德齡, 1567~1596)을 말한다. 1593년(선조26) 어머니 상중에 담양 부사 이경린(李景麟), 장성 현감 이귀(李貴) 등의 권유로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세력을 크게 떨치자, 선조로부터 형조 좌랑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받았다.[주-D011] 장순(張巡)과 …… 이끌고 :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의 충신인 장순과 허원(許遠)의 병칭이다. 천보(天寶) 연간에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장순이 진원 영(眞源令)으로 백성들을 인솔하고 당나라의 시조인 현원황제(玄元皇帝)의 묘(廟)에 나아가 통곡한 다음 기병(起兵)하여 반란군을 막았다. 그 뒤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인 수양성을 몇 달 동안 사수하고 있었는데, 구원병이 오지 않아 양식은 다 떨어지고 힘은 다 소진되어 성이 함락되었다. 그러자 태수(太守)로 있던 허원과 함께 사절(死節)하였다. 《舊唐書 卷187 張巡列傳》[주-D012] 관우(關羽)와 …… 갖고 : 관우와 장비(張飛)는 촉한(蜀漢) 유비(劉備)의 휘하 장수로서 무예가 출중하였다.[주-D013] 왕언장(王彥章)이 …… 출입하였고 : 왕언장은 후량(後梁)의 맹장으로 철창(鐵鎗)은 그의 호이다. 그가 행영(行營)의 선봉이 되어 철창을 사용하는 것이 몹시 빨랐으므로 군중(軍中)에서 왕철창(王鐵鎗)이라고 하였다. 후진(後晉)이 운주(鄆州)를 차지하였을 때 후량의 말제(末帝)가 왕언장을 불러 초토사(招討使)로 삼고 적을 격파하는 데 시일이 얼마나 걸리겠느냐고 물었는데 “3일이면 됩니다.” 하고 대답하였으므로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피식 웃었다. 왕언장이 명을 받고 출병하여 이틀 동안 달려 활주(滑州)에 이르러서 적을 격파할 때까지 걸린 날짜가 모두 3일이었다. 《宋子大全隨箚 卷10》[주-D014] 악무목(嶽武穆)이 …… 듯하였네 : 무목은 남송(南宋)의 장군 악비(嶽飛, 1103~ 1142)의 시호이다. 악비가 등에다가 정충보국(精忠報國)이란 네 글자를 새기고 있었으므로 이와 같이 말하였다.[주-D015] 손랑(孫郞)이 …… 혼비백산하였고 : 손랑은 후한(後漢)의 손책(孫策)을 말한다. 후한 말엽에 나라가 어지러워져 군웅이 할거할 때, 당대의 실력자 원술(袁術)이 그에게 강동(江東) 지역을 평정하게 하였는데, 진군하는 곳마다 승승장구하였다. 평소 강동의 백성들은 손책이 사나운 줄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왔다는 말을 듣고는 처음에 모두 혼비백산했으나 군령을 엄하게 내려 노략을 금하자,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며 귀의하였다. 《資治通鑑 卷61 漢紀53 孝獻皇帝丙》[주-D016] 단도제(檀道濟)가 …… 있었네 : 대군(大軍)을 지휘하는 중신(重臣)을 비유한 표현이다. 남조(南朝) 송(宋)나라의 명장 단도제(檀道濟)가 누차 전공(戰功)을 세웠으나 시기를 받아 억울하게 죽을 때에 “이제는 또 너희들의 만리장성을 무너뜨리려 하는구나.[乃復壞汝萬里之長城.]”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宋書 卷43 檀道濟列傳》[주-D017] 화의(和議)가 …… 해이해졌고 : 명(明)나라 유격(遊擊) 심유경(沈惟敬)과 왜장 소서행장(小西行長) 사이에 벌어진 강화 협상을 말한다. 계사년(1593, 선조26)부터 이어져 오던 협상은 풍신수길(豐臣秀吉)의 터무니없는 요구 사항으로 인해 결렬되고 결국 정유재란이 발생하였다.[주-D018] 당화(黨禍)가 …… 얻었네 : 김덕령(金德齡)이 당파싸움에 희생된 것을 말한다. 1596년 7월 홍산(鴻山)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김덕령은 도원수 권율의 명을 받아 진주에서 운봉(雲峯)까지 진군했다가, 이미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로 돌아가려 했으나 허락받지 못해 진주로 돌아왔다. 이때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충청도 체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과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무고로 곽재우(郭再祐)ㆍ고언백(高彦伯)ㆍ홍계남(洪季男)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에 정탁(鄭琢)ㆍ김응남(金應南) 등이 그의 무고를 힘써 변명했으나 20일 동안에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으로 옥사하였다.[주-D019] 막수유(莫須有) …… 복종시켰으랴 : 김덕령(金德齡)의 옥사(獄事)가 터무니없는 무고였음을 사람들 누구나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막수유는 ‘그런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말로, 후대에 근거 없이 날조되었다는 의미로 쓰인다. 남송의 악비(嶽飛)가 북송(北宋)을 멸망시킨 금나라와 싸워서 중원(中原)을 회복하려고 하였으나 간신 진회(秦檜) 등 주화파(主和派)에 의해 반역을 꾀한다는 무고를 당하여 ‘막수유’의 죄명(罪名)으로 죽임을 당했다. 충신 악비를 죽이려고 무함하는 진회가, “악비의 아들 악운(嶽雲)이 악비의 장수 장헌(張憲)에게 준 편지가 있는데 사실은 분명치 않지만, 아마 있을 것이다.” 하자, 악비를 편드는 한세충(韓世忠)이 “‘아마 있을 것이다.’라는 세 글자로 어떻게 천하 사람들을 납득시키겠는가.”라고 하였다. 《宋史 卷365 嶽飛列傳》[주-D020] 속죄할 …… 하였으니 : 김덕령을 살릴 수 있다면 자신의 몸을 기꺼이 희생하겠다는 말이다. 진 목공(秦穆公)이 훌륭한 인재들을 순장한 것을 비난한 시에 “저 푸른 하늘이여, 우리의 훌륭한 이들을 죽이는구나. 만약 속죄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제 몸을 백 번이고 내놓으리라.[彼蒼者天, 殲我良人. 如可贖兮, 人百其身.]” 하였다. 《詩經 黃鳥》[주-D021] 다행히 …… 펴졌도다 : 《현종개수실록》 2년 8월 30일조에, 충용장(忠勇將) 김덕령을 신원하고 관작을 회복시킬 것을 명하고, 《현종개수실록》 9년 4월 13일조에, 좌랑 김덕령을 제조(諸曹)의 참의(參議)에 추증하였으며, 《숙종실록》 6년 윤8월 24일조에, 이민서가 경연관으로 입시하여 박광옥(朴光玉)과 김덕령의 포상을 건의하자 사액(賜額)하도록 명한 기사가 보인다.[주-D022] 단 태위(段太尉)의 …… 징험하고 : 단 태위는 당(唐)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수실(秀實), 자는 성공(成公),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주자(朱泚)가 모반하면서 당시 사농경(司農卿)으로 있던 단 태위의 인망이 높은 것을 생각하여 맞아 오게 하자, 단 태위가 거짓 협력하는 체하고서 하루는 일을 논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상홀(象笏)을 빼앗아 내리치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크게 꾸짖으니 주자의 이마에 유혈이 낭자하였다. 결국 주자에게 살해되었다. 《新唐書 卷153》 《舊唐書 卷128》[주-D023] 수양(睢陽)의 쌍묘(雙廟)를 모방했도다 : 당나라 현종(玄宗)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 다른 성들은 모두 함락되었으나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은 수양을 굳게 지켜 2년을 버티었다. 성이 고립되고 원군이 이르지 않아 결국 식량이 떨어지고 사졸이 없어 성이 함락되어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전에 장순이 전투를 독려하면서 눈을 부릅떠서 눈자위가 찢어져 피가 흘렀고, 이를 악물어 이가 부서졌는데, 포로가 된 뒤에 안녹산의 당인 윤자기(尹子奇)가 장순의 입을 칼로 찢어서 보니 남아 있는 이가 서너 개뿐이었다. 장순이 죽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군부(君父)를 위해 의리로 죽지만 너희들은 역적에게 붙었으니 개돼지만 못하다. 어찌 오래 가겠느냐.” 하였다. 《舊唐書 卷187 忠義列傳下》[주-D024] 대우전(大羽箭)과 …… 그려졌고 : 대우전은 무관이 쓰는 화살이고 진현관(進賢冠)은 문관이 쓰는 관이다. 당 태종이 정관(貞觀) 17년(643)에 장손무기(長孫無忌)ㆍ두여회(杜如晦)ㆍ위징(魏徵)ㆍ방현령(房玄齡) 등 훈신(勳臣) 24명의 초상화를 그려서 능연각에 걸어 놓게 하였는데, 문관과 무관의 차등을 두지 않았다.[주-D025] 살벌한 …… 있었네 : 공자(孔子)가 한가로이 거문고를 탈 때 살벌한 소리를 내자, 민자(閔子)가 밖에서 듣고 의아하여 질문하였다. 이에 공자는 고양이가 한창 쥐를 잡는 것을 보고 꼭 잡기를 바란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심리가 반영되어 살벌한 소리를 냈다고 대답하였다. 《山堂肆考 卷162 取鼠》 한가로운 비파소리는 공자가 증점(曾點)에게 자기 뜻을 말해 보라고 했을 때, 증점이 비파를 드문드문 타다가 대답하기 위해 비파를 덜커덩 땅에 놓은 것[鏗爾舍瑟]을 말한다. 증점은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고 읊으며 돌아오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論語 先進》[주-D026] 거록의 …… 보니 : 박광옥이 의병을 일으킨 당시를 상상해 본다는 말이다. 후한 영제(靈帝) 때 장각(張角)이 황노(黃老)의 학설을 받들어 한 왕실이 어지러운 틈을 타 난을 일으켰다. 그 무리들이 모두 누런 두건을 썼으므로 황건적이라 불렀는데, 거록(鉅鹿)에서 유비(劉備)ㆍ관우(關羽)ㆍ장비(張飛)가 도원결의(桃園結義)하고 의병을 일으켜 이들을 소탕하였다.[주-D027] 세상 …… 알리오 : 암울한 시대에 지조를 변치 않은 고인의 풍모를 후인들이 모른다는 말이다. 《논어》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ㆍ잣나무가 시들지 않는 줄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 하였다. 《論語 子罕》[주-D028] 흙 속의 …… 칼날이 : 김덕령이 재능을 펴 보지도 못하고 원통하게 죽었음을 말한다. 원문의 ‘벽혈(碧血)’은 억울하게 죽은 충신의 푸른 피를 말한다. 주(周)나라 경왕(敬王) 때 장홍(萇弘)이 참소를 당해 촉(蜀)으로 쫓겨나 자결했는데, 그 피가 3년 만에 푸르게 변했다고 하며, 일설에는 푸른 옥으로 변했다고도 한다. 《莊子 外物》 갑 속의 칼은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인재를 비유하는 말이다.[주-D029] 청금(靑襟)과 만호영이 가득하니 : 선비와 무인들이 향사하러 가득히 모였다는 말이다. 청금은 푸른 옷깃으로 선비들이 착용하는 옷이고, 만호영(曼胡纓)은 무늬가 없는 갓끈으로 무부들이 착용한다.* 수정 2023.11.12. '나주 벽진촌'을 '광주 벽진촌'으로
- 2020-12-23 | NO.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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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 연려실기술 별집 제8권
-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 연려실기술 별집 제8권 / 관직전고(官職典故) 전라도는 2명인데, 하나는 관찰사가 겸한다. 태종조에 처음 두었는데, 광주(光州)에 영을 개설하였다가, 정유년에 남쪽의 도적을 막기 위하여, 강진(康津)으로 옮겼다. 선조 기해년에 장흥(長興)으로 옮겼다가 갑진년에 지형이 불편하다 하여 도로 강진에 설치하였다.
- 2020-09-25 | NO.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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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사의 징발에 대해 주론한 장문〔奏論抽發兵士狀〕- 계원필경집 제5권 / 주장(奏狀) 10수
- 본도가 이에 앞서서 조지(詔旨)를 받들건대, 여주(廬州)ㆍ수주(壽州)ㆍ저주(滁州)ㆍ화주(和州) 등에서 병마(兵馬) 공히 2만 인을 징발한 뒤에 감군사(監軍使)에게 압령(押領)하게 해서 군전(軍前)으로 보내라는 내용이었으므로, 신이 당시에 여러 주(州)에 각각 공문을 보내 안배하고 점검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음에 또 진주원(進奏院)의 장보를 통해 최근의 조지를 받들건대, 다시 여러 주에서 병사를 뽑아 보내도록 재촉하는 내용이었습니다.신이 삼가 생각건대, 군대를 출동시키는 것은 노여움을 드러내는〔飾怒〕 방법인 만큼 전투하며 정벌할 적에는 용맹을 숭상해야 하겠지만, 군대가 이기는 것은 화합하는 데에 있는〔師克有和〕 만큼 화합을 이루기 위해 정성을 기울여야합니다. 만약 대중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어떻게 공을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신의 본도가 관할하는 여주와 화주는 예전에 원수진 혐의가 있어서 지금까지도 의심하고 꺼리고 있으므로, 오직 원망으로 원망을 갚으려고만〔以怨報怨〕 할 뿐 화합할 줄 알아서 화합하려고는〔知和而和〕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손단(孫端)이 새로 저주(滁州)를 맡으면서부터 진언(秦彦)과 틈이 벌어졌는데, 저주와 화주가 접경하고 있는 만큼 자칫하면 다른 걱정거리가 생길 염려가 있고, 만약 광주(光州)와 채주(蔡州)에서 군대를 회합할 경우에는 반드시 서로들 옛날의 감정을 풀려고 할 것이니, 이와 같이 온편(穩便)하지 못한 일에 대해서는 도리상 주론을 올리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겨집니다.신이 투항한 군사를 받아들이면서부터 다방면으로 제어하였으므로 다소간 무력 사용을 자제하여 동요하는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만, 만약 각자 병력을 출동시키게 한다면 필시 자기들끼리 어육(魚肉)이 되는 일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해관계를 진달드리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신중을 기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삼가 기록하여 주문하며 엎드려 칙지를 기다립니다.[주-D001] 군대를 …… 만큼 : 《예기》 〈악기(樂記)〉에 “음악은 선왕이 기쁨을 드러내는 방법이었으며, 군대와 부월은 선왕이 노여움을 드러내는 방법이었다.〔夫樂者 先王之所以飾喜也 軍旅鈇鉞者 先王所以飾怒也〕”라는 말이 나온다.[주-D002] 군대가 …… 만큼 : 《춘추좌씨전》 환공(桓公) 11년 조에 “군대가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서로 화합하는 데에 있지, 병력의 숫자가 많은 데에 있지 않다. 병력이 많았던 상나라가 병력이 적었던 주나라에 맞서지 못했던 것은 당신도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다.〔師克在和 不在衆 商周之不敵 君之所聞也〕”라는 말이 나온다.[주-D003] 원망으로 …… 뿐 : 《예기》 〈표기(表記)〉에 “덕으로 덕을 갚으면 백성이 권장되고, 원망으로 원망을 갚으면 백성이 징계된다.〔以德報德 則民有所勸 以怨報怨 則民有所懲〕”라는 말이 나온다.[주-D004] 화합할 …… 않습니다 : 《논어》 〈학이(學而)〉에 “화합할 줄 알아서 화합을 위주로 하되, 예로써 절제하지 않는다면 역시 행해질 수 없다.〔知和而和 不以禮節之 亦不可行也〕”라는 말이 나온다.
- 2022-04-29 | NO.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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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리 매수의 정산에 관한 건- 광주목사
- 보첩고(報牒攷) - 光州牧使○ 영조(英祖) 41년(1765) 9월 초9일 갑신년(甲申年, 1764, 영조40)에 경청(京廳)에서 지급한 보리 매수의 값을 받은 다음 이를 감하여 각 면(面)에 나누어 주고 남은 돈을 징수하는 사안에 대해 순영(巡營)에 보고하다첩보(牒報)하는 일. 여름에 목사(牧使)가 휴가를 받아 상경(上京)할 때에 본주(本州)에서 작년에 경청(京廳)에서 지급한 보리 매수의 값을 받은 다음 이를 감하여 각 면에 지급한 곡절에 대해 겸관(兼官)인 화순 현감(和順縣監)이 이미 다 조사해 보고하였으나 값을 감한 돈은 미처 다 징수하지 못하고 목사가 돌아왔습니다. 이미 마무리된 사안은 다시 의논할 수 없고 마땅히 징수할 돈도 난처한 바가 있다고 누차 개진하여 주장하였는데, 그때마다 사또(使道)의 회유와 질책을 받았고 심지어 다시 조사하지 않으려면 감영(監營)의 관문에 따라 그 돈을 징수하면 된다는 뜻으로 거듭 신칙하셨으나 한결같이 버티고 있었으니, 너무나도 황송합니다.그런데 겸관의 조사보고서 및 색리(色吏)와 면임(面任 면의 행정 담당자. 권농관(勸農官)ㆍ감고(監考) 등이 있었음) 등의 공초(供招)를 일일이 고찰하며 열람해 보니 대체로 쌀을 돈으로 바꾸는 것부터 보리를 매수하는 것까지 수미(首尾)의 모든 과정은 삼반 관속(三班官屬)이 담당하였습니다. 보리의 매수를 그해에 하지 않고 그 다음 해에 하였기 때문에 2천 석의 본자(本資) 보리에다 이자 보리를 합하면 2천 2백 석이 되는데, 그중 8백 6석 7두 5승은 삼반 관속이 분담하여 마련해 넣었으므로 값을 감하였는지의 여부는 논할 것이 없습니다.그 나머지 보리 1천 3백 93석 7두 5승은 각 면(面)에서 원하여 받아 나누어 주었는데, 그중 4백 24석 7두 5승은 매 석마다 6전(錢)씩 주고 매수하여 본가(本價)에 비해 2전이 감해진 것으로 감해진 값을 합하면 84냥 9전이고, 6백 38석은 매 석마다 6전(錢) 5분(分)씩 주고 매수하여 본가에 비해 1전 5분이 감해진 것으로 감해진 값을 합하면 95냥 7전이며, 3백 31석은 매 석마다 1전씩 주고 매수하여 본가에 비해 1전이 감해진 것으로 감해진 값을 합하면 33냥 1전입니다. 이는 민간에서 보리를 매수할 때 값을 감한 수량인데, 각 문서에 정연하게 기재되어 근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리의 값을 감하여 매수한 이유는 당초 쌀을 돈으로 만들 적에 축이 났기 때문이었는데, 이는 사세상 그럴 수밖에 없었고 값을 감한 실지의 수량은 위에서 개진한 바와 같습니다.위의 3건 값을 감한 액수는 도합 2백 13냥 7전인데, 분부하신 바에 따라 전 이방(吏房) 최종길(崔宗吉), 전 창색(倉色) 최후득(崔厚得) 등이 수량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이상의 연유를 첩보합니다.제사(題辭)경청에서 보리를 매수하는 값을 하리(下吏)가 중간에서 훔쳐 먹은 바람에 실지의 수량이 부족한 것이니, 민간의 한심한 일 중에 이보다 더 심한 경우가 없다. 그런데 지금 이미 추심(推尋)해 냈으니, 사리상 마땅히 민간에 나누어 주어야 할 것이다. 보리의 본값 1석당 8전을 받아가지 못한 자들을 일일이 자세히 조사하여 수량을 계산해 나누어 준 다음에 거행한 상황을 첩보해야 할 것이다.[주-D001] 겸관(兼官) : 수령(守令)이 공석(空席)일 때 이웃 고을의 수령이 임시 겸임하는 것을 말함.[주-D002] 삼반 관속(三班官屬) : 지방 각 부군(府郡)의 향리(鄕吏)ㆍ장교(將校)ㆍ군노(軍奴)와 사령을 통틀어 이르는 말임.
- 2023-08-17 | NO.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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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리종자를 더 나누어 줄 것을 순영(巡營)에 요청한 보고, 1766.9월 12일 -광주목사
- 보첩고(報牒攷)○영조(英祖) / 영조(英祖) 42년(1766)첩보(牒報)하는 일. 본주(本州)의 농사가 거듭 흉년이 든 데다 금년의 농사까지 또 흉년이 든 바람에 여름부터 가을에 이르기까지 민간의 호구지책(糊口之策)이 오로지 보리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누어 주어야 할 겉보리가 모두 7천 9백여 석에 불과합니다. 그 가운데 특히 심한 자만 각별히 정밀하게 뽑아서 조금씩 대여해 주어 황급한 형편을 구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나누어 줄 수량이 원래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남아 있는 것이 단지 2천여 석밖에 되지 않습니다.그런데 지금 가을보리를 파종할 시기가 닥쳤으나 민간의 독이나 항아리에 있는 곡식이 이미 호구하느라 바닥이 나버리고 시장에서 곡물의 매매도 희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바람에 스스로 보리종자를 마련한 자는 열 명 중에 한두 명도 채 되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 보리종자를 나누어 줄 것을 청하는 하소연이 분분하니, 비록 십분 정밀하게 뽑아서 조금씩 나누어 주더라도 이 2천여 석 가지고는 경내에 응당 나누어줘야 가호에게 분배할 수 없습니다.보리종자는 바로 명년 한 해를 이어갈 근본이니만큼 넉넉히 나누어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조정의 금령(禁令)이 지엄하여 목사(牧使)가 임의로 분배할 수 없어서 일이 매우 민망하기에 감히 민정(民情)을 거론하여 이와 같이 첩보하오니, 사또(使道)께서 민정을 참작하고 상량하여 본주의 창고에 유치해있는 겉보리 2천여 석을 특별히 더 분배해 줄 것을 허락해 주어 보리종자에 보태어 제때에 나누어 줄 수 있도록 해 주셨으면 합니다.제사(題辭)더 분배해 주는 것은 본주(本州)만 임의로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영문(營門)도 그러하니, 상고하여 시행해야 할 것이다.호남 암행 어사(湖南暗行御史) 이경옥(李敬玉)의 서계(書啓 임금의 명을 실행한 신하가 결과를 보고하는 문서) 별단(別單 서계(書啓)나 장계(狀啓)와는 별도로 작성하여 올리는 문서)신이 7월 초7일에 호남 6개 고을의 수재와 한재를 살펴본 일로 삼가 성상의 하교(下敎)를 받들고 본도(本道)로 달려가서 방방곡곡(坊坊曲曲)을 출몰하면서 두루 전지를 답사하여 농형(農形)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 도내의 열읍(列邑)이 하나도 빠짐없이 균등하게 한재를 입었는데, 물 근원이 있는 곳을 제외하고 거의 다 황폐해졌습니다.신이 처음 경유한 생읍(栍邑) 남원(南原)ㆍ임실(任實)ㆍ운봉(雲峰)ㆍ동복(同福)ㆍ능주(綾州)ㆍ창평(昌平) 및 연로의 여산(礪山)ㆍ전주(全州)ㆍ곡성(谷城)ㆍ순천(順天)ㆍ화순(和順)ㆍ광주(光州) 등의 고을로 논한다면 재해를 입은 천심(淺深)과 이앙의 다과(多寡)는 비록 저곳이 이곳보다 못하고 이곳이 저곳보다 나은 바가 없지 않았으나 이미 이앙한 것 가운데도 마른땅에 파종한 것과 늦게 이앙한 것의 구별이 있었으며, 한 들판의 안에서도 위에는 풍작이고 아래는 흉작의 다름이 있었습니다. 이를 통틀어 말한다면 이미 이앙한 수는 혹은 3분의 1정도 되기도 하고 혹은 5, 6분의 1, 2정도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호미로 옮겨 심은 곳은 - 이하 약5행 판독 불가 -일로(一路)의 여론이 모두 산협(山峽)의 지대가 연해안 지역보다 형편이 조금 낫다고는 하나 신이 경유하며 본 바로는 비록 협곡의 고을이라도 실농(失農)의 참담함이 이와 같으므로 연해안 여러 고을은 보지 않아도 미루어 알 수 있었습니다. 간혹 출도(出道)할 경우에는 촌락마다 수백 명씩 무리지어 나와 말을 에워싸고 읍소(泣訴)하기를, “금년의 흉년이 지난 신임년(辛壬年)보다 배나 더 심합니다. 지금은 그래도 콩잎이나 채소뿌리를 따서 연명할 길이 있기 때문에 백성이 더러 안도(安堵)하고 있습니다만 서리가 내려 풀이 말라버린 뒤에는 살 길이 막막하여 생활할 형세가 전혀 안됩니다. 그런데 삼세(三稅)와 환자(還上) 및 군포(軍布) 등을 재촉하는 각종의 영(令)이 내려 다시 독촉할 경우에는 사세상 뿔뿔이 흩어져 수렁으로 굴러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바라건대, 돌아가 주상께 주달하여 군포를 견감해 주고 환자를 뒤로 연기해 주어 전부 쓰러져 죽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해 주었으면 합니다.”라고 마지않고 누누이 말하였습니다.가을을 당하여 민정이 이처럼 황급하니, 내년의 상황은 말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으니, 백성을 구제하는 대책을 서둘러 정부로 하여금 속히 강구하여 백성이 수렁으로 굴러떨어지는 환난을 초래하지 않도록 하였으면 합니다.그리고 전주(全州)ㆍ익산(益山)ㆍ금구(金溝)ㆍㆍ만경(萬頃)ㆍ임피(臨陂)ㆍ옥구(沃溝)ㆍ함열(咸悅)ㆍ부안(扶安)ㆍ고부(古阜)ㆍ진도(珍島)ㆍ흥양(興陽)ㆍ용안(龍安) 등의 13개 고을은 신이 이하 판독 불가[주-D001] 생읍(栍邑) : 추첨으로 뽑은 고을이라는 의미임.[주-D002] 삼세(三稅) : 조선 후기 국가의 중요 재정 수입원이었던 3종의 부세(賦稅)로 전세(田稅)ㆍ대동미(大同米)ㆍ삼수미(三手米)를 가리킨다. 1결(結)에 전세미는 6두, 대동미는 12두, 삼수미는 1두 2승이었음.
- 2023-10-16 | NO.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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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민청(補民廳)에서 대용(貸用)한 군작미(軍作米)건- 광주목사
- 보첩고(報牒攷) - 光州牧使○영조(英祖) / 영조(英祖) 39년(1763) 9월 13일 각 방(坊)에 전령(傳令)하다거행할 사안을 통지하는 일. 지난 분기 때 보민청(補民廳)에서 대용(貸用)한 군작미(軍作米) 2백 95석을 상환하지 않아 기부(記付)에다 기록해 놓기까지 하였다. 보민청은 본래 민고(民庫)이므로 그 원입(原入)의 용하(用下 비용으로 쓸 돈이나 물품을 내어줌)에 대해 절목(節目)이 있다. 예전부터 혹시 부채(負債)가 있을 경우에는 민간에서 거두어서 상환하는 사례가 있었는데, 지난 분기에 대용한 군작미를 이리저리 변통하여 처리하지 않고 그냥 중기(重記 관청의 공식 회계 장부)에 기록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 나온 것이다.본관(本官)이 재작년 가을에 부임한 뒤에 담당 감관(監官)과 색리(色吏 일정한 일을 맡아 보던 아전)가 예전처럼 민간에다 나누어 기록하자는 뜻으로 사례에 의거하여 고품(告稟)하였는데, 본관이 새로 부임한 초기에 구채(舊債)를 청산하기 위해 먼저 가렴(加斂)의 정사를 시행할 수 없었으므로 그냥 두라는 뜻으로 지시하였다. 그해 겨울에 특별히 관아의 모미(耗米) 1백 20석으로 우선 상환하고 그 나머지 1백 75석은 미처 다 상환하지 못하였다가 금년 여름에 관아에서 별도로 4백 2전(錢)을 마련하여 보민청에 내주면서 편의에 따라 가을에 쌀로 바꾸어 구채를 상환하도록 하였다.본읍(本邑)의 연호조(煙戶租)는 대호(大戶)ㆍ중호(中戶)ㆍ소호(小戶)ㆍ잔호(殘戶)를 막론하고 모두 3두 8승으로 정하여 납부하도록 책임을 지웠는데, 이는 큰 신발과 작은 신발의 값이 똑같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 가운데 소호와 잔호의 백성은 감당하기 어려운 폐단이 있으므로 변통하여 견감(蠲減 조세 일부를 면제해 줌)해 주려고 하다가 여름에 쌀 40석을 향중(鄕中)에 내주면서 가을을 기다렸다가 보조해 주도록 하였다. 그러자 향중에서 쌀 40석을 40방(坊)에 내줄 적에 돈으로 환산해 나누어 주었다가 가을에 쌀 1백 석을 만들었는데, 전후 두 차례 만든 쌀이 도합 2백 75석이었고 이를 모두 백성을 위하는 데 내주었다.그런데 간사한 백성의 무리가 금년 여름에 순영(巡營)과 통영(統營)의 환곡(還穀)을 팔아 돈으로 마련한 것을 관가(官家)에서 임시변통하여 발매(發賣)한 것이라 하고 위의 두 차례 쌀로 마련한 것을 관가에서 환자(還上)로 입본(立本)한 것이라 하였다. 그러한 말이 감영(監營)에까지 들어가 큰 사단이 벌어지기까지 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조금이라도 이치에 맞는 말이겠는가.일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만큼 보민청의 구채를 수쇄(收殺)하고 연호조를 변통하여 감해 주려고 처음에 설계(設計)한 것이 별로 긴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으므로 그냥 취소하고 마땅히 일체로 환수(還收)해야 할 것이다.두 차례 쌀 2백 75석을 마련하기 위해 발급한 본전(本錢)을 받아간 방명(坊名)ㆍ호명(戶名)ㆍ석수(石數)를 모두 1권의 책자로 작성한 다음 먼저 내보내니, 방내(坊內)의 상하 백성들에게 일일이 펼쳐 보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외에 혹시 1석이라도 입본(立本)하여 쌀로 마련하기 위해 돈을 받았으나 누락된 것이 있을 경우에는 이름을 지적하여 치보(馳報)함으로써 조사하여 조처할 수 있게끔 해야 할 것이다.[주-D001] 군작미(軍作米) : 군포(軍布)를 미곡으로 환산한 것.[주-D002] 기부(記付) : 인계할 때에 기록하는 문서나 장부를 말함.[주-D003] 민고(民庫) : 각 지방에서 정규의 납세가 아닌 갖가지 잡역 및 기타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설치된 것. 지방마다 관행에 의해 설치되었는데, 원래 취지는 백성의 부담도 줄이고 업무를 간편하게 하자는 것이었으나 결국 수탈의 한 방법이 되었음.[주-D004] 가렴(加斂) : 조세(租稅) 따위를 정한 액수보다 더 거두어들이는 것을 말함.[주-D005] 모미(耗米) : 환곡(還穀)을 받을 때 곡식을 쌓아 둘 동안에 축이 날 것을 생각하여 한 섬에 몇 되씩 덧붙여 받는 곡식을 말함.[주-D006] 입본(立本) : 장부상에 올라 있는 원래 전곡(錢穀)의 액수를 채워 놓는 것.
- 2023-08-17 | NO.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