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72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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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등산(無等山) - 임하필기 제13권
- 무등산(無等山) - 임하필기 제13권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14~1888) 광주(光州)의 동쪽 10리에 무등산이 있는데 백여 리의 지역을 걸터타고 앉아 있다. 산 위에는 수십 개의 돌기둥이 서 있는데 마치 사람이 일부러 깎아서 세운 듯하며 높이가 거의 백 척이나 되고 모두 여섯 개의 모서리가 나 있다. 또 석벽(石壁)이 있는데 길이가 수십 무(武 반보(半步))가량 되고 높이는 수십 장(丈 10척(尺))이나 되는바, 그 돌 무늬가 마치 물결 같고 구름 같으며 희고 붉은 색들이 마구 뒤섞여 있다. 또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석실(石室)이 있는데 산 이름을 서석산(瑞石山)이라고도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매양 날이 가물다가 비가 오려고 하거나 장마가 지다가 날씨가 개려고 하면 문득 소리를 내어 우는데 그 소리가 수십 리 밖까지 들린다고 한다. 그래서 속악(俗樂)에 무등산곡(無等山曲)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 2020-09-25 | NO.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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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등산곡(無等山曲) - 백제의 음악
- 무등산곡(無等山曲) - 백제의 음악, 임하필기 제12권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14~1888) 지리산가(智異山歌)는, 구례(求禮) 고을 사람의 딸이 지리산 밑에 살고 있었는데 그 자색이 아름답고 여자로서의 도리를 다하였으므로 임금이 그 여자가 이처럼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는 궁중으로 불러들이려고 하였던바, 여인이 이 노래를 지어서 죽기로써 따르지 않을 것을 맹세한 것이라고 한다.선운산곡(禪雲山曲)은, 무장(茂長)에 선운산이 있는데 백제 때에 장사(長沙)에 사는 사람이 정역(征役)을 나갔다가 기한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으므로 그의 아내가 남편을 생각하면서 이 산에 올라가서 남편이 가 있는 곳을 바라보면서 부른 노래라고 한다.또 무등산곡(無等山曲)은, 광주(光州)에 무등산이 있는데 백제 때에 이 산에 성을 쌓아 백성들이 이 때문에 편안히 지낼 수 있었으므로 이것이 즐거워서 노래 부른 것이라고 한다.
- 2020-09-25 | NO.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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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송 유씨 족보 서〔茂松庾氏族譜序〕- 강재집 제5권
- 무송 유씨 족보 서〔茂松庾氏族譜序〕 : 강재집 제5권송치규(宋穉圭, 1759~1838) 《강재집(剛齋集)》 나는 목천(木川) 현감(縣監) 유공(庾公)의 묘표(墓表)를 선조의 글에서 읽어 본 적이 있다. 그 재기(才器)가 보통 사람을 뛰어넘지만 지위가 덕행과 어울리지 않는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또 유씨(庾氏)가 실로 고려 왕조의 명문대가였지만 지금은 우뚝 떨쳐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기도 하였다. 어느 날 목천공(木川公)의 후손 광택(光澤)이 자세하게 조사하고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 일족이 족보를 정리하여 간행하고자 합니다. 한 마디 말을 주시면 책의 권두에 붙이고자 하는 것이 여러 친척들의 소원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글솜씨가 부족하고 병들어 정신이 혼미하다는 말로 사양하였으나 그 요청이 대단히 간절하였다. 생각건대, 유씨(庾氏)는 모두 고려 태사(太師) 충절공(忠節公)을 시조(始祖)로 삼는다. 충절공은 태조 왕건(王建)을 도와 삼한(三韓)을 통합하여 평산(平山 황해도에 있음)에 봉(封)해졌다. 평산에 봉지를 받은 뒤로부터 무송(茂松)으로 본관을 옮긴 사람은 태자소보(太子少保) 안정공(安貞公)이다. 이로부터 여러 대에 걸쳐 공(公)과 경(卿)이 줄을 잇듯이 나오고 효성과 우애를 실천하며 청백리로 소문난 사람이 대대로 역사책에 끊이지 않고 기록되었다. 특히 시랑공(侍郞公)의 높은 충성이 어찌 우뚝하지 않겠는가. 우리 조선이 천명을 받아 개국하자 시랑공의 후손 유하(庾賀)는 정포은(鄭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도로서 벼슬을 하려 하지 않아 광주(光州 전라도)로 귀양살이를 가게 되었고, 이에 자손들이 남녘땅 사람이 되었다. 이것 또한 다른 족보에서 듣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목천공(木川公) 및 추헌공(楸軒公)과 추봉공(秋峯公) 부자는 그 지절(志節)의 훌륭함이 1백 년 지나서도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만하며, 그것이 유래가 있어서 진실로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아! 영달하고 영달하지 못하는 것은 본래 운명이고, 수양하고 수양하지 못하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 유씨(庾氏)가 비록 대단히 보잘것없이 되었지만 이미 족보가 만들어져서 각각 그 내원을 알게 되었다. 진실로 내외(內外)의 분간을 잘 밝히고 서로 삼가며 힘써서 효도와 공경을 도탑게 행하여 선조들의 업적을 사라지지 않게 할 것을 생각한다면, 어떤 사람들이 그들을 가볍게 여길 수 있겠으며 집안 명성을 다시 크게 떨칠 수 있을 것이다. 유씨는 힘써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견식이 좁은 사람으로, 외람되게도 서문을 써 달라는 부탁을 기회로 하여 공들의 실제 사적을 자세하게 알 수 있었고, 또 유씨가 우리 집안과의 우애가 깊은 것이 목천공 한 계파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서 크게 다행으로 여겼다. 이에 엉성한 글솜씨를 잊고 대략 이 글을 써서 그의 간절한 뜻에 보답한다. [주-D001] 충절공(忠節公) : 유금필(庾黔弼) 장군으로, 황해도 평주 출신이다. 고려 개국 초기 도통대장군(都統大將軍)으로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도와 북번족(北蕃族)을 평정하고 후백제와 신라를 통합하여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워 삼중대광 통합삼한 익찬공신(三重大匡統合三韓翊贊功臣)이 되었다. 시호(諡號)는 충절공(忠節公)이고, 태사(太師)에 추증(追贈)되었다.[주-D002] 안정공(安貞公) : 유녹숭(庾祿崇)으로, 충절공의 5대손이고 시호는 안정공이다. 고려 숙종(肅宗) 때에 무송(茂松) 부원군(府院君)에 봉(封)해짐으로써 후손들이 안정공을 중시조(中始祖)로 모시고 본관을 평산(平山)에서 무송(茂松)으로 옮겼다.[주-D003] 시랑공(侍郞公) : 유방(庾方)으로, 유금필의 손자이다. 고려 성종 때 거란군의 침입을 격퇴하여 전공을 세우고, 현종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 겸 상장군(上將軍)을 거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역임하였으며, 이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 2020-11-03 | NO.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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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곡 김상국에게 보내는 편지〔與文谷金相國書〕 - 서하집
- 문곡 김상국에게 보내는 편지〔與文谷金相國書〕 - 서하집 제17권 / 서독(書牘) : 이민서(李敏敍, 1633~1688). 봄날이 아직도 찬데, 삼가 이 시기에 대감의 조섭이 계절에 맞게 편안하시리라 생각하며, 구구한 마음에 지극히 우러러 사모합니다. 저는 집안의 우환이 잇달았는데, 지난달에 또 서매(庶妹)의 상을 당하였습니다. 지난해 남쪽으로 온 뒤로 잇달아 기공(朞功)에 해당하는 상이 예닐곱 번이나 났으니, 이 어찌 사람의 도리에 차마 감당할 일이겠습니까. 법성(法聖)에 가려던 일을 또한 실행하지 못하였고, 지나는 길에 인사드리려던 계획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삼가 끝없이 탄식할 뿐입니다.근일에 한양 소식을 대감께서 혹 들으신 것이 있는지요? 주상의 환후는 이제 약을 쓰지 않을 정도로 회복되셨는지요?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아뢸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지역에서 바야흐로 김덕령(金德齡) 장군의 사우를 영건하여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과 함께 배향(配享)하고자 합니다. 이들은 모두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인물로, 비록 문무(文武)의 차이는 있지만 그 풍렬(風烈)은 모두 존경받을 만합니다. 회재는 예전에 지은 원사(院祠)가 있기 때문에 조금 수리하고 넓혀서 함께 모시려고 합니다. 공사를 벌이는 날이 정해진 상황에서, 고을 사람들이 상량문(上樑文)을 얻는 데 기어이 대감의 글 한 편을 청하여 사우(祠宇)를 훌륭하게 꾸미고자 하니, 대감께서 유념하시어 아름다운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기문(記文)은 이미 우암(尤菴) 어른께 청하였으니, 대감의 글을 얻는다면 더욱 유감이 없을 것이기에 감히 청합니다. 저 또한 졸렬함을 헤아리지 않고 고을 사람과 자손들의 청에 못 이겨 대략 사실을 기록한 글을 지었으니, 아울러 이번에 보내드리니 같이 고쳐 주시기 바랍니다.《남화경(南華經)》 한 건(件)은, 이곳에 옛날 간행본이 있으나 훼손이 심하여 읽을 수가 없어서 근래 겨우 보완하여 간행하였는데, 비록 모두 새로 간행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읽을 만합니다. 이 책은 비록 외서(外書)이고 명리(名理)에 대한 말이 많지만, 경멸하여 버리기에는 아깝기 때문에 지금 올립니다.[주-D001] 기공(朞功) : 기년복과 대공(大功)ㆍ소공(小功)의 상기(喪期)를 말한다. 상기 1년인 경우를 기복(朞服)이라 하는데 조부모ㆍ백숙부모ㆍ형제자매ㆍ처 등의 상이 이에 해당하고, 9개월인 경우를 대공이라 하는데 사촌 형제자매의 상이 이에 해당하며, 5개월인 경우를 소공이라 하는데 증조부모ㆍ재종형제 등의 상이 이에 해당한다.[주-D002] 김덕령(金德齡) 장군의 사우 : 1567~1596.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수(景樹)이다. 이민서의 아들 이관명(李觀命)이 지은 〈선부군행장(先父君行狀)〉에 “정사년(1677, 숙종3) 봄에 광주 목사에 임명되었다.……고을 안에 예전에 향현사(鄕賢祠)가 있었으니, 바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박광옥(朴光玉)의 사당이었다. 공이 이에 옛 규모를 증수하고 또 김덕령 장군과 함께 배향하였다.” 하였다. 김덕령은 전라도 광주(光州) 석저촌(石底村)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596년(선조29)에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노복을 장살하여 투옥되었으나 유생들의 상소와 정탁(鄭琢)의 변호로 곧 석방되었다. 그해 7월 홍산(鴻山)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충청도 체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과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이 이몽학과 내통했다고 무고하였다. 그리하여 최담년ㆍ곽재우ㆍ고언백(高彦伯)ㆍ홍계남(洪季男) 등과 함께 체포되어, 26일 동안 여섯 차례의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1661년(현종2)에 신원(伸寃)하고 복관(復官)하였다. 1785년(정조9) 시호를 충장(忠壯)이라고 하였다. 《국역 선조실록 29년 8월 4일》 《국역 선조수정실록 29년 8월 1일》 《국역 현종실록 2년 8월 30일》[주-D003]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 : 1526~1593. 본관은 음성(陰城), 자는 경원(景瑗), 회재는 그의 호이다. 전라도 광주에 세거(世居)하였고, 10세 때 정황(丁潢)의 문하에 들어갔다. 1546년(명종1)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나, 광주(광산) 선도면(船道面)에 집을 지어 개산송당(蓋山松堂)이라 이름하고 문하생들과 함께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또 향약을 실시하고, 기대승(奇大升)ㆍ박순(朴淳)ㆍ이이(李珥)ㆍ노사신(盧思愼) 등과 교유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는데, 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고향의 의병도청(義兵都廳)에서 군대의 장비와 양식을 조달하였다. 1602년 광주 벽진촌(碧津村)에 세워진 벽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되었는데, 그 사당은 1678년(숙종4) 이민서가 확장하여 김덕령을 병향하였고, 1681년 의열사(義烈祠)라고 사액받았다. 박광옥은 운봉(雲峰)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도 제향되었다. 저서에 《회재유집(懷齋遺集)》이 있다.[주-D004] 고을 …… 바랍니다 : 이때 김수항이 영암에 귀양 와 있었는데, 상량문은 김수항이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의열사의 상량문은 나중에 이민서가 썼다. 《西河集 卷13 義烈祠上樑文》[주-D005] 기문(記文)은 …… 청하였으니 : 송시열이 기문을 썼는지는 미상이지만, 이민서의 편지를 통해 소식은 듣고 있었다. 이민서가 김덕령의 향사(享祀)를 추진한다는 소식을 듣고 송시열은 곽재우(郭再祐)도 함께 제향할 것을 제안하였다. 《국역 송자대전 제75권 이이중(李彝仲)에게 답함 - 정사년(1677) 12월》[주-D006] 남화경(南華經) : 당(唐)나라가 노자(老子) 이담(李聃)을 조상으로 삼아 현원황제(玄元皇帝)로 추존하고 장자(莊子)를 남화진인(南華眞人)으로 높였기 때문에 《장자》를 《남화경》이라고 한다. 박세당(朴世堂)이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를 저술하여 교서관에서 현종실록자로 간행한 적이 있는데, 본문에서 말하는 《남화경》은 박세당의 저술이 아니라 《장자》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주-D007] 외서(外書) : 원래 불교도들이 불교 경전 이외의 책을 일컫던 말이었으나, 차츰 뜻이 넓어져 유가 경전 이외의 책을 외서라고 하기도 하였다.*2023.11.12. 수정 : '나주 선도면'을 '광주(광산) 선도면'으로
- 2020-12-23 | NO.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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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암집 제9권 / 일기(日記)
- 미암집 제9권 / 일기(日記) 축약함 ○임신년(1572) 융경(隆慶) 6년 우리 선조대왕 5년 11월 : 유희춘(柳希春, 1513~1577)【5일】나는 광주 목사(光州牧使) 임회 헌가(林誨獻可)와 제시진사(製詩進士) 백광훈(白光勳)을 초대하여 잠시 술을 주고받았다.【7일】정철(鄭澈)이 소식을 전하여 기대승이 서거했음을 알게 되었다. 놀랍고 슬프기 그지없다. 이 사람은 지기(志氣)가 뛰어나고 강개한 마음으로 일을 행하며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며 학식이 넓고 옛것을 좋아하며 문장에도 능하였으니, 호련(瑚璉) 같은 그릇이라고 할 수 있고 세상에 드문 인재라 할 수 있다. 다만 강단 있고 과감하여 자기 생각대로 행하고 말을 쉽게 하여 기로(耆老)들을 책망함으로서 구신(舊臣)과 정승들에게 크게 미움을 샀다. 이것은 날카로운 기질이 닳아지지 못하여 갑자기 통곡하는 병폐가 있었기 때문이다.【14일】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정철(鄭澈)이 첨지 기명언(奇明彦 기대승)에게 부의를 표하자는 회문(回文)을 보내왔기에 나도 4승목(升木)을 내주었다.[주-D008] 호련(瑚璉) : 주(周)나라의 종묘 제사 때 곡식을 담던 그릇인데, 그 귀중함으로 인하여 재능이 있어 큰 임무를 감당할 만한 사람을 비유하였다.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저는 어떠한 그릇입니까?〔何器也〕” 하고 묻자, 공자가 “자네는 호련이다.〔瑚璉也〕”라고 대답하였다. 《論語 公冶長》[주-D013] 회문(回文) : 여러 사람이 차례로 돌려 보도록 쓴 글로, 회장(回章)과 같은 말이다.미암집 제13권 / 일기(日記) 축약함 ○을해년(1575, 선조8) 만력(萬曆) 3년 우리 선조대왕 8년 11월【1일】공의전이 비망기를 정원에 전하여 이르기를,“주상이 근일에 침수(寢睡)하지 못하고 또 구토를 하며 수라 또한 들지 못하여 내가 종일 간청하니 부득이 권제를 따랐습니다. 지극히 감격스럽습니다.”하였다. 내가 엎드려 읽고 탄식하며 말하기를,“주상의 추모하시는 효성이 너무 지나치고 공의전이 보호하시는 공 또한 극진하시다. 이는 실로 조선의 한없는 복이니 무릇 혈기가 있는 자라면 누가 감동하여 기뻐하지 않겠는가.”하였다.○ 직제학 정철 계함(鄭澈季涵)이 질병의 요양을 위해 광주(光州) 석저리(石底里)로 왔는데 집에 도착한 다음날 편지로 안부를 물었다. 내가 그때에 해남에 가 있다가 어제 비로소 듣고 편지로 사례하였더니 정군이 답장에 말하였다.“사람을 보내 하문해 주시니 간곡히 교시하신 뜻을 잘 살펴 여러 번 읽고 감사하고 송구하여 말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는 병세가 위중하여 전하의 부름에 나아가지 못하고 황공하게 대죄(待罪)하고 있는 중입니다. 한 번 뵙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직 뜻을 이루지 못하니 우러러 그리워하는 마음을 어찌 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굽어살펴주소서. 삼가 백배하고 답장 올립니다.”○ 사시 초에 관찰사 최응용(崔應龍)이 찾아와 인사를 마치자 담양 부사 이중호(李仲虎)도 뒤따라 왔다. 내가 방백(方伯) 최견숙(崔見叔 최응룡)과 재미있게 담화를 나눴는데 방백이 먼저 과일 상을 베풀고 먼저 술을 쳤다. 다음은 이부사(李府使), 다음은 송진(宋震), 다음은 내가 쳤다. 나는 양사형(楊士衡)의 일과, 조유성(趙惟誠)의 처씨(妻氏)가 이계복(李繼福)의 노(奴) 세옥(世玉)을 찾아달라는 일과, 무안 정개청(鄭介淸)에게 와서 사서(四書)의 토석(吐釋)에 참여하여 종사하게 해줄 것과 한응성(韓應星)의 억울함과 안방선(安邦善)의 죄가 아주 무겁지는 않다는 것 등을 부탁하였다. 또 손남(孫男)의 혼서지(婚書紙)와 수서(修書)하고 정서(正書)할 종이와 장지(狀紙)와 광주의 먹을 부탁하였더니 모두 승낙하였다.【21일】광주 목사 성수익(成壽益)이 편지로 《어류(語類)》의 의심나고 어려운 곳 네 곳을 묻기에 내가 곧 답해주었다. 내가 조정에 있을 때에 경대부가 독서하다 어려운 것을 와서 묻는 이가 헤아릴 수 없었다. 김덕용ㆍ김귀영ㆍ박계현ㆍ민기문ㆍ이담ㆍ허엽ㆍ이헌국ㆍ권덕여ㆍ신응시ㆍ윤두수ㆍ윤근수ㆍ심수경ㆍ우성전ㆍ원혼ㆍ박순 및 옥당의 여러 학사가 더욱 부지런하였다.【23일】저녁에 무안에 사는 전 참봉 정개청 인백(鄭介淸仁伯)이 와서 인사하였다. 감사 최공이 친히 말해 보낸 것이다. 감사가 역마를 주었지만 인백이 받지 않고 자기 말을 타고 짐바리 말까지 끌고 왔다. 나는 반가워 나가서 보고 대학의 토석을 의논하였는데 뜻이 맞는 곳이 많았다. 또 한두 군데 구결이 새롭고 합당한 것을 들으니 매우 기쁘다.【24일】광주 목사 성수익이 백력(白曆)을 보내오고 편지로 묻기를,“측천무후(則天武后)를 죽이고 종실을 바꿔 세울 것을 논한 조목에서 ‘후세에서 말한다면 중종은 불료(不了)했다.’라고 했는데 이른바 ‘불료(不了)’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또 ‘담판한(擔板漢)’이란 것이 판을 짊어진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 뜻을 어디에 쓰는 지 알 수가 없습니다.”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요(了)란 일을 아는 것이니 중종이 무삼사(武三思)가 왕후(王后)와 사통하는 것을 방치하고 그의 참소를 들어 5왕을 죽이고 대란(大亂)을 초래했으니 이것이 이른바 일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담판한의 한은 사내를 칭합니다. 호인(胡人)이 중화인을 한이라고 부르니 번한(蕃漢)의 한도 또한 한의 사내를 이릅니다.”하였다.[주-D005] 담판한(擔板漢) : 판자를 짊어진 사내라는 뜻으로 판자를 짊어지면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리석은 사내라는 뜻으로 쓰인다.미암집 제14권 / 일기(日記) 축약함 ○정축년(1577) 만력(萬曆) 5년 우리 선조대왕 10년 4월【16일】 아침에 하서(河西)의 문인으로 광주(光州)에 사는 이각(李恪 자는 원작(元作))이 경렴(景濂)을 전별하려고 술병을 들고 와서 광선(光先)을 통해 나를 뵈었다. 나는 대하여 아침밥을 들고 그 술을 함께 마시며 더불어 말을 해 보니 괜찮은 사람이었다. 나는 붓 한 자루를 주었다.
- 2020-12-14 | NO.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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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경호- 균산정원운
- 녹균(綠筠)속의 이 정자가 호의湖山의에 자리하니이 세상의 속된 티끌 한점없이 깨끗하네높이 솟은 여러 산봉 고개숙여 상읍(相揖)하고 자리위의 맑은 바람 그지 없이 불어오네.그침없는 현송(絃誦)소리 많은 사람 모여들고가득하게 쌓인 도서(圖書) 묘한 경지(境地) 열렸도다.좋은 시절 좋은 때에 서로 함께 회합하여난형매제(蘭兄梅弟) 옆에 끼고 맑은 술잔 들렀도다.청우(聽雨) 민경호(閔京鎬)가 균산정 경치를 보고 읊은 감정이다.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1891년에는 이조참판, 1907년에는 궁내부특진관에 이르렀다.
- 2020-04-25 | NO.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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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제인- 余坐事謫光州。壺山宋汝溫亦以檢察官赴京。
- 입암집(立巖集) 민제인(閔齊仁, 1493~1549)권3是年五月十一日。余坐事謫光州。壺山宋汝溫亦以檢察官赴京。臨別。乃作四韻詩二首以贈余。余因作此詩。用敍別懷云。世事悲歡何足言。人生聚散若雲煙。北京風日千山路。南國炎蒸五月天。病老在堂君更遠。聖明當宁我今遷。思家戀闕情誰最。無限離愁兩惘然。
- 2021-09-07 | NO.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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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제인- 南溪辭 謫在光山時作
- 입암집(立巖集) 민제인(閔齊仁, 1493~1549)권6 辭 南溪辭 謫在光山時作。次友人韻。澹秋空之寥廓。風凄凄而遠揚。野瀰漫而極目。華實爛其盈場。遠水寒兮沙明。群山鬱兮蒼蒼。送將歸兮南澗。臨淸流兮泛羽觴。薦魚蝦以爲羞。酌浮蟻與鵝黃。時憑懷以舒嘯。忽溪谷兮生涼。三友和余以爲詩。浩然如江漢之湯湯。沈冥麴糱若將終。余豈樂爲此顚狂。邈彼空谷。有幽蘭兮馨香。我往從之。爲美人兮薰衣裳。淡相望兮秋水。遠爲贈兮明璫。耿孤懷而獨立。日將晏兮路長。噫人事時命之靡常。固有通塞與閑忙。惟安分而順受。亦何喜而何傷。蘭蕙枯而香烈。松柏茂於雪霜。保晩節以益堅。肯同歸於茫茫。
- 2021-09-07 | NO.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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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제인- 至光州。夜聞笛有感
- 입암집(立巖集) 민제인(閔齊仁, 1493~1549)권1至光州。夜聞笛有感孤臣千里謫來初。籬落蕭條竹影疏。枕畔一聲何處笛。夢殘燈暗夜窓虛
- 2021-09-07 | NO.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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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제인- 謫去光州時。到虎洞留別鄕友
- 입암집(立巖集) 민제인(閔齊仁, 1493~1549)권2謫去光州時。到虎洞留別鄕友湖海爲遷客。鄕村逢故人。開樽酌新釀。藉草展芳茵。鼓響靑山外。歌聲綠水濱。杜鵑如恨別。能遣我傷神。
- 2021-09-07 | NO.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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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제인- 重到樂生驛記懷
- 입암집(立巖集) 민제인(閔齊仁, 1493~1549)권5 立巖集卷之五 / 七言詩 重到樂生驛記懷 憶昔孤臣謫南時。五月漢水澄琉璃。親朋送我到江上。相携不肯成別離。蕭蕭征馬指孤館。薄暮投宿荒山陲。旅榻寥寥夜向深。殘燈明滅窓風吹。飜思往事不可諫。百感纏胸潛涕洟。辭君棄親遠行邁。雖欲自寬能無悲。此心耿耿終不寐。鷄鳴又起將何之。行行路過桑梓鄕。垣廬頹落餘古基。下馬再拜荒墓側。仰見喬木增遐思。嗟我豈敢三宿出。明向光州猶疾馳。光州城南棗水邊。瘴煙炎雨多濕卑。野店溪村十里間。黃橙綠竹爲藩籬。僑居小屋近櫨川。窓外瑞石光參差。麻骨圍庭竹爲扉。種菊數叢松一枝。豈是身閑作娛翫。應爲歲晩同心期。空堂寂寞無與伴。夜長漫漫日苦遲。家君幸爲瓮城宰。聖恩似許生相隨。皇天何奪我所怙。哀呼茫茫終莫追。艱關扶柩返故原。依然丘墓封荒陂。二年日月不知盡。秋草春花榮復衰。草土餘形心已死。豈意生來重歷茲。樓館荒涼儘如舊。人物蕭條應已非。道傍老樹紙牋掛。樓上黃昏群雀飛。沈吟坐久聞馬齕。箇裏孤衷誰得知。西笑明朝拜金闕。南遊故臣淸淚垂。故園梅竹豈忍見。空舍無人應不治。念此展轉何能眠。起視星漢空長噫。
- 2021-09-07 | NO.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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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제인- 권6 (辭) 南溪辭 謫在光山時作
- 입암집(立巖集) 민제인(閔齊仁, 1493~1549)권6 辭 南溪辭 謫在光山時作。次友人韻。澹秋空之寥廓。風凄凄而遠揚。野瀰漫而極目。華實爛其盈場。遠水寒兮沙明。群山鬱兮蒼蒼。送將歸兮南澗。臨淸流兮泛羽觴。薦魚蝦以爲羞。酌浮蟻與鵝黃。時憑懷以舒嘯。忽溪谷兮生涼。三友和余以爲詩。浩然如江漢之湯湯。沈冥麴糱若將終。余豈樂爲此顚狂。邈彼空谷。有幽蘭兮馨香。我往從之。爲美人兮薰衣裳。淡相望兮秋水。遠爲贈兮明璫。耿孤懷而獨立。日將晏兮路長。噫人事時命之靡常。固有通塞與閑忙。惟安分而順受。亦何喜而何傷。蘭蕙枯而香烈。松柏茂於雪霜。保晩節以益堅。肯同歸於茫茫。
- 2021-09-07 | NO.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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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제인-登石犀亭故墟(석서정 옛터에 올라)
- 棗水西頭舊有亭 조수 서편에 옛 정자 있었는데石犀當日謾留名 석서정은 그 옛날부터 부질없이 이름만 났네疏林細草埋幽逕 성긴 수풀가는 풀에 그윽한 길 묻혔고綠竹黃橙繞古城 푸른 대 누른 등자나무는 옛 성에 둘렸네上國煙花重嶺阻 상국의 풍경 중첩된 산에 막혔고南溟瘴氣一望平 남녘바다 장기는 한 눈에 평평하네山河不變千年景 산천은 천년두고 경치 변치 않는데行客紛紛自異情 지나가는 사람 분분하게 저절로 뜻이 다르네-입암집(立巖集) 권3민제인(閔齊仁, 1493-1549)의 자는 희중(希中)이며 호는 입암(立巖) 이다.
- 2018-07-10 | NO.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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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철명(閔哲命) 고봉 제문 - 고봉별집 부록 제1권 / 제문(祭文)
- 세차 계유년 2월 8일 기미에 광주 목사(光州牧使) 민철명은 맑은 술과 조촐한 제물을 마련하여 삼가 고 부제학 고봉 선생의 영전에 제사 드립니다.산악이 신을 내려 / 維岳降神호걸이 태어났네 / 鍾生豪英호학하긴 안자 같고 / 好學幷顔검속하긴 정자 같아 / 斂束同程조예가 정심하니 / 造詣精深마침내 대성하여 / 終就大成문장은 한구에다 / 文比韓歐도통은 염락일세 / 道傳濂洛우매한 자 거절 않고 / 不拒空空선으로써 인도했네 / 誘掖式穀인정해 준 사람 있어 / 相許有人덕불고를 알았어라 / 知德不孤지방 달라도 한마음 / 地異心同영호남 뉘 나눌쏘냐 / 孰分嶺湖서찰을 주고받으며 / 往來書尺연비어약 다 캐고 / 究極魚鳶오성과 칠정에다 / 五性七情양지와 삼천까지 / 兩地參天철저히 궁구하여 / 直窮到底귀촉마냥 환했어라 / 理若龜燭더구나 조정에 올라서는 / 况登朝堂바른 자만 들어 쓰고 / 措枉擧直진퇴에 정도 지키니 / 進退持正누구나가 존경하여 / 莫不欽服사람들은 사표로 알고 / 人指蓍龜나라는 기둥에 비겼지 / 國擬柱石장차 세도 바로잡고 / 方期扶世임금 보필 하렸더니 / 永輔袞職어인 일로 불행하여 / 云胡不淑이 세상을 떠나셨나 / 曾簀遽易수명은 인에 아니 맞고 / 壽不稱仁벼슬은 덕에 아니 찼네 / 位不滿德선한 사람 돌아가니 / 善人云亡내 아픔 곡한 게 아니요 / 非哭吾私나라의 흥망성쇠 / 國之休戚실로 이에 달렸어라 / 實繫於斯도의 명맥 병이 들고 / 道脉俱瘁선비는 갈 곳 없으니 / 士失依歸명색이 유림이라면 / 凡在儒林그 누가 아니 슬프리 / 孰不含悲교분은 비록 없으나 / 縱無素分슬픔을 가누지 못해 / 難堪痛傷한 잔 술 부어 올리니 / 把奠單杯눈물이 줄줄 흐르네 / 雙淚浪浪아 슬프오이다 / 嗚呼哀哉부디 흠향하소서 / 尙饗[주-D001] 산악이 신을 내려 : 고봉 같은 위대한 인물의 탄생과 죽음은 산천과 하늘이 주관한다는 말이다. 《시경》〈대아(大雅) 숭고(崧高)〉에 “산악이 신을 내려 보후(甫侯)와 신후(申侯)를 내셨도다.〔維嶽降神 生甫及申〕” 하였고, 《장자》〈대종사(大宗師)〉에 “부열(傅說)이 도를 얻어……죽은 뒤에 천상의 별이 되어서 동유성(東維星)과 기미성(箕尾星)을 걸터타고서 뭇별과 나란히 있다.〔傅說得之……乘東維騎箕尾 而比於列星〕” 하였다.[주-D002] 호학(好學)하긴 안자(顔子) 같고 : 안자는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학문하는 즐거움을 버리지 않았다는 안연(顔淵)이다. 노나라 애공(哀公)이 공자에게 학문을 좋아하는 제자가 누구인지 물었다. 이때 공자는 “안회라는 제자가 학문을 좋아하여 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허물을 거듭 범하지 않더니, 불행히도 단명하여 죽었습니다. 지금은 없으니 학문을 좋아하는 이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有顔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라고 대답했다. 《論語 雍也》[주-D003] 검속하긴 정자(程子) 같아 : 정자는 이천(伊川)을 말한다. 그는 단정하게 검속함을 중요시하여 ‘정제엄숙(整齊嚴肅)’을 강조했다. 그래서 마음이 분란한 것을 학자의 공통된 병폐로 지적하며, “마음을 전일하게 하는 것은 다른 방법이 없고 외면을 정제하고 엄숙하게 하면 마음이 전일하게 된다.〔一者無他 只是整齊嚴肅則心便一〕” 하였다. 《近思錄 卷4》[주-D004] 한구(韓歐) : 당송팔가(唐宋八家)의 대표적 인물인 한유(韓愈 : 768~824)와 구양수(歐陽脩 : 1007~1072)를 말한다. 고봉이 이들의 문학을 계승하여 조선의 문단을 일신했다는 말이다. 한유는 당나라의 문장가로, 자는 퇴지(退之), 시호는 문공(文公)이며 회주(懷州) 수무현(修武縣) 출신이다. 대구(對句)를 중심으로 수사에 치중하는 변려문을 반대하고, 친구 유종원(柳宗元) 등과 함께 고문(古文)을 창도하였다. 저서에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이 있다. 구양수는 송나라의 문학가로,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 또는 육일거사(六一居士)이다. 10세 때 한유의 문집을 읽고 매료되어 서곤체(西崑體)가 유행하던 송나라 초기의 문단을 혁신한다. 저서에 《신오대사(新五代史)》, 《신당서(新唐書)》, 《모시본의(毛詩本義)》 등이 있다.[주-D005] 염락(濂洛) : 염락관민(濂洛關閩)의 준말이다.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자(程子),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민중(閩中)의 주자를 통칭한 것으로, 곧 송대의 성리학을 뜻한다. 여기서는 고봉이 도학의 전통을 계승하였다는 말이다.[주-D006] 인정해 준 사람 : 퇴계 이황을 말한다.[주-D007] 덕불고(德不孤) :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는다는 뜻이다. 《논어》〈이인(里仁)〉에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德不孤 必有隣〕” 하였다.[주-D008] 연비어약(鳶飛魚躍) : 하늘에는 솔개가 날고 못에는 고기가 뛴다는 뜻으로, 현상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다르지만 관통하는 원리는 하나인 자연 만물의 이치를 가리킨다. 《시경》〈대아(大雅) 한록(旱麓)〉에 “솔개 날아 하늘에 이르고, 고기는 못에서 뛰네.〔鳶飛戾天 魚躍于淵〕” 하였다.[주-D009] 오성(五性)과 칠정(七情) : 오성은 사람이 타고난 다섯 가지 선한 본성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을 말하고, 칠정은 사람의 일곱 가지 감정인 희(喜)ㆍ노(怒)ㆍ애(哀)ㆍ구(懼)ㆍ애(愛)ㆍ오(惡)ㆍ욕(欲)을 말한다.[주-D010] 양지(兩地)와 삼천(參天) : 삼천양지(參天兩地)와 같은 말로 하늘의 숫자는 홀수인 3이고 땅의 숫자는 짝수인 2라는 뜻인데, 《주역》 괘(卦)에서 숫자를 설정한 것이다. 여기서는 천지간의 모든 이치를 말한다. 《주역》〈설괘전(說卦傳)〉에 “하늘은 3이고 땅은 2로서 서로 숫자가 어울린다.〔參天兩地而倚數〕” 하였다.[주-D011] 귀촉(龜燭) : 거북과 촛불을 말한다. 거북은 점을 쳐서 알 수 없는 미래의 일을 밝히는 것이고, 촛불은 어두운 곳을 환하게 비추는 것이다. 즉 깊은 이치를 끝까지 연구하여 분명하고 확실히 알았다는 말이다.[주-D012] 수명은……맞고 : 어진 사람은 잡념이나 욕심이 적어 항상 편안하고 조용하기 때문에 흔히 장수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고봉이 마땅히 오래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마쳤다는 말이다. 《논어》〈옹야(雍也)〉에 “지혜로운 자는 즐겁고 어진 자는 장수한다.〔知者樂 仁者壽〕” 하였다.[주-D013] 벼슬은……찼네 : 고봉이 지닌 덕이 높으므로 지위가 높아야 마땅한데, 그렇지 못하고 지위가 낮아 덕에 걸맞지 않았다는 말이다. 맹자가 “천하에 도가 있을 때엔 작은 덕을 지닌 사람이 큰 덕을 지닌 사람에게 부림을 당한다.〔天下有道 小德役大德〕” 하였는데, 주자의 주에 “도가 있는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덕을 닦아 지위가 반드시 덕의 크기에 걸맞았다.〔有道之世 人皆修德 而位必稱其德之大小〕”고 하였다. 《孟子 離婁上》 ‘位’ 자가 원문에는 ‘仁’으로 되어 있는데, 오자로 판단되어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 2022-03-04 | NO.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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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주 사실을 순영(巡營)에 보고하다 -광주목사
- 보첩고(報牒攷) 光州牧使○ 영조(英祖) 39년(1763)8월 초5일 금법(禁法)을 어기고 술을 빚은 자들에 대해 새로 반포한 영(令)에 따라 발각되는 대로 감처(勘處)한 일을 순영(巡營)에 보고하다첩보(牒報)하는 일. 술 빚는 것을 금지하는 일에 대해 잇따라 엄하게 신칙하여 기찰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본부(本府) 남면(南面) 흑성방(黑城坊)에 거주하는 백성 심차중(沈次中)이 기탄하지 않고 금법을 범하였으므로 그 방의 임장(任掌 호적 업무를 담당하는 하급 임시직)이 장물(臟物)을 압수해 바쳤습니다. 금령(禁令)이 더없이 지엄(至嚴)한데도 불구하고 간사한 백성이 두려워하지 않은 채 감히 이렇게 은밀히 술을 빚었으니, 너무나도 통분하였습니다. 그래서 새로 반포한 영에 따라 감처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위의 심차중을 먼저 수금(囚禁)해 놓고 첩보한 다음 회답의 제사(題辭)를 기다려 엄하게 형벌을 가하려고 합니다.차후에도 금법을 법한 자는 사체상 발각되는 대로 보고한 뒤에 회답의 제사를 받아 형벌을 시행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미 특교(特敎)의 정식(定式)이 있으니만큼 초범(初犯)과 재범(再犯)은 정식에 따라 곧바로 엄하게 형벌을 가함으로써 번거롭게 문보(文報)를 왕복하는 폐단을 없애야겠습니다만 마땅히 조율(照律 범죄 사실에 대하여 법조문을 적용함)해야 할 삼범(三犯)은 첩보를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모두 참작하여 지시를 내려 주셨으면 합니다.제사(題辭)간사한 백성이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감히 은밀히 술을 빚었으니 너무나도 놀랍고 통분하다. 심차중에게 한 차례 엄하게 형벌을 가한 뒤에 첩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초범과 재범의 부류는 새로 반포한 영(令)에 따라 본관(本官)이 징계하여 치죄해야 할 것이며, 조율해야 할 삼범은 마땅히 첩보해야 할 것이다.
- 2023-08-17 | NO.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