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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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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공(朴公, 상현尙玄) 묘갈명 병서 - 한수재선생문집 제28권
    박상현(朴尙玄, 1629~1693) 묘갈명 병서 - 한수재선생문집 제28권 :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 1641~1721) 남쪽 지방에 명망이 유림(儒林)에 막중하고 학문이 정미(精微)한 경지에 도달한 자가 있으니, 우헌 처사(寓軒處士) 박공(朴公)으로 휘는 상현(尙玄)이요 자는 경초(景初)인데, 숭정 기사년(1629, 인조7) 5월 9일에 출생하였다.공은 어려서부터 더럽고 상스러운 말을 들으면 마치 자신을 오염시킬 듯이 여겼으며, 지극한 성품이 있어 15세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3년 동안 채소와 국도 먹지 않고, 제사를 올리고 상식(上食)할 때에 정성과 공경을 지극히 하였다. 여러 삼촌들을 섬김에 공손하고 근신하여 비록 무더운 여름철이라도 나태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스승에게 취학하자,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부지런히 힘썼다. 경전(經傳)을 널리 통달하였는데, 특히 《대학(大學)》에 많은 공부를 하여 학문의 기초를 삼았으며, 회옹 부자(晦翁夫子 주희(朱熹))를 반드시 스승 삼고 본받아야 한다고 여기고, 산림에서 고요히 있으면서 부귀와 화려함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병자년과 정축년에 국가의 치욕을 당한 이후의 일을 언급하게 되면 일찍이 슬퍼하고 크게 한숨짓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집에 보관되어 있는 책력은 반드시 위호(僞號)를 지워 은미한 뜻을 부쳤다. 정미년에 중국 복식을 하고 중국 말을 하는 자 백여 명이 표류하여 우리나라에 도착하였는데, 그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중국의 동남쪽 조그마한 땅에는 황통(皇統)이 아직도 남아 있는바, 우리들이 바로 그 백성이다.” 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사실이 누설될까 두려워하여 이들을 붙잡아 북쪽의 청 나라 조정에 보내니, 공은 이를 통분히 여기고 서글퍼 하며 마침내 당세에 진출할 뜻을 단념하였다.일찍이 승려의 시축(詩軸)에 시(詩)를 쓰기를 “이 몸 뒤따라 바다에 뛰어들지 못하니, 나라를 떠나는 요양(遼陽)의 승려 대하기 부끄럽네.[將身未得追蹈海 羞對遼陽去國僧]” 하였다. 이에 공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지조를 우러러 흠모하였다.공은 한 방에 고요히 앉아 있으며 고명(高明)한 경지에 마음을 두었는데, 태극도설(太極圖說)과 《통서(通書)》ㆍ《정몽(正蒙)》ㆍ《황극경세(皇極經世)》ㆍ《계몽(啓蒙)》 등의 여러 책을 하나하나 정밀하게 연구하였으며, 편찬한 《음양소장도(陰陽消長圖)》는 크게는 일원(一元)의 수(數)와 작게는 1년의 운행으로부터 해의 주야와 달의 차고 기욺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안에 자세히 포함되어 있었다.또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어 배우는 자들에게 밝게 보여 주었는데, 이것을 천상(天象)에 상고해 보면 부합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승려인 운계(雲溪)라는 자는 역법(易法)에 조예가 깊었는데, 이것을 보고 감탄하기를 “우헌(寓軒)의 가슴속에는 온 천지를 포함하고 있다.” 하였으며, 족자(族子)인 승지 광후(光後)도 또한 일찍이 탄복하기를 “우헌의 학식은 자득(自得)한 맛이 있어 사람들이 미치기 어렵다.” 하였다.공은 일찍이 말씀하기를 “궁리(窮理)의 공부는 반드시 붕우의 강습에 의뢰하여야 한다.” 하였다. 그리하여 이른바 도의지교(道義之交) 중에는 유명한 선비와 대학자들이 많이 있었다.전현(前賢) 중에는 퇴계(退溪)와 율곡(栗谷)을 정주(程朱)의 정통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사단칠정(四端七情)의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는 퇴계를 버리고 율곡을 취하였다. 예학(禮學)에 있어서는 사계(沙溪)가, 주자(朱子)께서 미처 이룩하지 못한 것을 마침내 이룩하여 우리나라로 하여금 거룩한 추로지향(鄒魯之鄕)이 되게 하였으니, 그 공로가 크다 하였고, 현재 호걸스러운 재주와 성현의 학문은 또 우암(尤菴)만한 분이 없다 하여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변하기를 거의 30년 가까이하였다. 그리하여 성명 이기(性命理氣)에 대한 말씀과 도기(道器)의 분별과 성기(誠幾)의 뜻을 많이 말씀하고 논란하여 밝게 통달하기를 구하였다.《중용(中庸)》의 미발(未發)의 뜻은 바로 주자께서 추요(樞要)라고 하신 것인데, 공은 이에 대하여 강하게 질문하기를 매우 많이 하여 《옹계일록(翁季一錄)》을 완성하였다. 우암 선생은 공이 마음 쓰기를 부지런히 하고 애쓰는 것을 깊이 아시고는 일찍이 “환히 알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는다.”고 칭찬하셨고, 또 말씀하기를 “늙어서도 학문을 좋아하니, 사문(斯文)이 의탁할 사람이 있다.” 하셨으며, 또 “모년(暮年)의 지기(知己)요, 천리의 신교(神交)이다.” 하셨으니, 공이 사종(師宗)에서 소중하게 여겨짐이 이와 같았다.교리 김만길(金萬吉)이 암행어사로 있으면서 공의 뛰어난 행실을 들어 임금께 아뢰었는데, 공은 갑자기 계유년(1693, 숙종19) 정월 병진일에 집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65세였다. 3월 경신일에 광주(光州)의 북쪽 태산(台山) 유좌묘향(酉坐卯向)의 산에 안장하였으며, 배위인 장택 고씨(長澤高氏)를 부묘하였다.공은 기상과 모습이 장엄하고 후중하였으며, 신채(神采)가 안정되었다. 말씀이 적고 조용하였으며, 걸음걸이가 안정되고 얌전하였다. 부정한 소리와 어지러운 색을 멀리 피하여 화살을 피하듯이 하였으며, 규문 안이 엄숙하고 온화하였고, 친척을 대함에 각기 그 환심을 얻었다.상대방이 횡포를 가해오면 공은 그와 더불어 따지지 않고 매양 옛사람의 “비방을 받으면 더불어 변론하지 말라.”는 말씀을 외었다. 이 때문에 시골과 이웃에서 교화되어 복종하고는 우헌 선생(寓軒先生)이라 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평양 박씨(平陽朴氏)는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휘 가흥(可興)이란 분이 계신데 우의정을 지냈으며, 휘 석명(錫命)을 낳았는데 집현전 대제학을 지냈는바 공의 9대조이다. 증조의 휘는 언심(彦深)이요, 조고의 휘는 진정(震挺)이요, 선고의 휘는 수림(遂林)이며, 선비는 봉산 이씨(鳳山李氏)이다.배위인 고씨(高氏)는 처사(處士) 부민(傅敏)의 따님이며, 군수인 성후(成厚)의 손녀인데 부덕이 있었는바, 공보다 12년 뒤에 별세하였다. 3남 4녀를 두었는데, 장남 광일(光一)은 학행으로 천거되어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으며, 차남인 광원(光元)은 사마시에 급제하여 봉사이고, 다음은 광선(光善)이다. 장녀는 기진성(奇震省)에게 출가하였고, 그 밖의 딸들은 이석필(李碩弼)과 생원 홍운(洪橒)과 기정륜(奇挺倫)에게 출가하였다. 왕자사부는 중휘(重輝)ㆍ중거(重擧) 등 2남을 두었다. 봉사는 6남을 두었는데, 중린(重麟)ㆍ중귀(重龜)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광선은 1남을 두었는데 어리다. 외손은 남녀가 약간 명이다.아, 상고 시대에는 지위가 반드시 덕에 걸맞았는데, 지금 세상에는 덕이 있으나 지위가 없는 자가 많으니, 공(公)에게 있어 어찌 가감될 것이 있겠는가마는 세도(世道)가 옛날만 같지 못함은 개탄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사부공(師傅公)은 가학(家學)을 전하여 명성이 한 세상에 가득하니, 누가 영지(靈芝)에 씨가 없고, 예천(醴泉)에 근원이 없다 말하겠는가.나는 기사년에 여러 번 장성(長城)에서 공의 훌륭한 모습을 가까이 뵈었으며, 근년에 선사(先師)의 유고(遺稿)를 편집하면서 또 공의 의론이 정밀하고 해박함에 감복하여 평소에 존경하고 우러러 왔다. 이제 사부가 나를 비루하다 여기지 않고 묘문을 부탁하니, 의리상 감히 사양하지 못하여 마침내 가장(家狀)을 뽑아 위와 같이 서하고 명문을 붙인다.종사의 한마디 말씀은 / 宗師片言구정과 대려처럼 소중한데 / 九鼎大呂공의 학문 훌륭하게 여겨 / 多公之學칭찬하고 표창하였네 / 以揚以詡이름이 남쪽 지방에 전하고 / 名流南服유풍이 학자들에게 입혀졌네 / 功被學者이 족히 후세에 없어지지 않을 것이니 / 斯足不朽나머지는 생략해도 괜찮으리 / 餘可略也[주-D001] 위호(僞號) : 청 나라의 연호(年號)를 낮추어 부르던 말. 당시 청 나라를 괴뢰(傀儡) 정권으로 보아, 위조(僞朝)의 연호란 뜻으로 말한 것이다.[주-D002] 일원(一元)의 수(數) : 옛날 역법(曆法)에서는 4617년을 일원이라 하였으며, 강절(康節) 소옹(邵雍)이 지은 《황극경세(皇極經世)》에는 12만 9600년을 일원이라 하였는데, 이는 천지(天地)가 생성되어 없어질 때까지의 기간을 통틀어 말한 것이다. 이외에도 술수가(術數家)에서는 ‘태을일원(太乙一元)’이라 하여 72년을 가리키기도 한다.[주-D003] 추로지향(鄒魯之鄕) : 교화(敎化)가 잘 베풀어지고 문화가 찬란한 지방을 가리키는 말. 주(周) 나라 말기 공자(孔子)는 노(魯) 나라에서 출생하였고, 맹자(孟子)는 추(鄒) 땅에서 출생하여, 이들 지방에 문풍(文風)이 크게 일어났으므로, 이를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주-D004] 도기(道器)의 …… 뜻 : 《주역》 계사전(繫辭傳)에 “형이상(形而上)을 도(道)라 이르고, 형이하(形而下)를 기(器)라 이른다.” 하였는데, 도는 태극(太極)으로 이(理)를 가르키며, 기는 음양(陰陽)으로 기(氣)를 가리킨다.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의 《통서(通書)》에 “성(誠)은 무위(無爲)이고 기(幾)에는 선악(善惡)이 있다.” 하였는데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본성을 잘 보존한 상태를 성(誠)이라 하며, 정이 이미 나오면 선ㆍ악 기미(幾微)로 나누어진다 하여 기(幾)라고 이름한 것이다.[주-D005] 종사(宗師)의 …… 소중한데 : 종사는 훌륭한 스승을 일컫는 말로 우암을 가리킨다. 구정은 하(夏) 나라 우왕(禹王)이 구주(九州)의 쇠를 모아 주조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의 보정(寶鼎)으로, 역대 왕조에서는 수도(首都)를 새로 정할 때마다 반드시 이 구정을 옮겨 가곤 하였다. 대려(大呂)는 주(周) 나라 종묘(宗廟)에 있던 종(鐘)인데, 역시 보물로 알려져 구정과 함께 가장 소중한 것의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담양 창평의 동쪽에 있는 산이 월봉산이고 월봉산에서 무등산으로 이어지는 긴 산줄기가 태산(台山)이다. 이곳에서 김천일 장군이 태어났으며 그가 나주로 이주해 살았던 마을의 이름도 그래서 태산리다. 유천리는 신라시대 태산으로 불렀으며 고려 때 동촌으로 바뀌었다. 조선조에 들어와 유촌(柳村)으로 부르다가 유천(柳川)으로 바뀌었다. 태산이 유촌으로 바뀐 것은 능양군이 인조 임금이 되기 전 고경명-고인후-고부천으로 이어지는 3대에 걸친 충신고을을 세 번이나 찾아왔다가면서 이 마을이 ‘버들의 형국’이라 말한 데서 비롯되었고 전한다. 이후 고부천(高傅川)은 자신의 호를 월봉산에서 따와 월봉으로 지었고 고씨 후손들이 자작일촌으로 살면서 고부천의 이름에서 ‘천(川)’를 따와 유천으로 바뀐 것으로 전해진다.
    2020-09-29 | NO.345
  • 박광옥(朴光玉)-喜慶樓餞牧使柳侯太浩(名景深)
    紅燈爍爍照離筵 활활 타는 붉은 등불 비치는 이별 자리 倚醉高歌與杳然 술 취해 노래하니 흥겹기만 하는구나莫怪黃花簪較晩 국화꽃을 머리에 늦게 꽂음을 괴이하다 말라 使君元是惡金錢 사군(군수)은 원래가 금전을 싫어했으니까(是日席上進花稍晩 이날 송별하는 자리에서 진화가 조금 늦었음)無等秋光入坐筵 무등산 가을빛이 앉은 자리에 찾아드니 巖崖霜葉似花然 바위 비탈 단풍잎이 꽃과 같구나此間定有幽吟處 이 사이에 읊조리고 노릴만한 곳이 있건만欲買還須費萬錢 사려면 아마도 일만 전이 들 것이리라老少扶携趂餞筵 노소간에 손 붙들고 송별연에 참여하니 民情自是有同然 아쉬워하는 백성들의 정 모두가 똑같아贈行却愧無他産 떠나갈제 줄 것 없어 부끄럽기는 하다만 休道詩文不直錢 시문이 돈만 못하다고 말하지 마소 (休一作誰)- 회재유집(懷齋遺集) 권1
    2018-07-26 | NO.344
  • 박광옥-양과정
    杖屢陪村老 마을 어른들 모시고炎蒸避野亭 들정자에서 더위를 피하였네天高飛鳥倦 하늘 높으니 나는 새 게을러지고山近暮煙靑 산 가까우니 저녁 연기 푸르네樂業無逋租 농사에 부지런하니 세금의 포탈없고安身戒守甁 말과 행실을 삼가니 한 몸이 편안하네林居有良貴 산골에 살아도 타고난 존귀함 있는데何慕閣圖形 어찌해 세상의 공명을 원할까 -박광옥(朴光玉, 1526~1593)
    2018-08-02 | NO.343
  • 박광옥ㆍ김덕령의 사우에 대하여 사액하는 건 - 서원등록(書院謄錄)
    박광옥(朴光玉)ㆍ김덕령(金德齡)의 사우(祠宇)에 대하여 대신들에게 논의하게 하여 사액하는 건 - 숙종(肅宗) 6년(1680) : 서원등록(書院謄錄)윤8월 25일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이번 윤8월 24일 주강(晝講)에 입시(入侍)하였을 때, 동지사(同知事) 이민서(李敏敍)가 아뢰기를, ‘신이 광주(光州)에서 직책을 수행하고 있을 때, 광주의 백성들이 전송(傳誦)하는 말을 듣고 또 초야(草野)에 기록되어 있는 글을 참고해 보니, 광주 사람 박광옥(朴光玉)은 바로 명종(明宗)ㆍ선조(宣祖) 때의 사류(士流)입니다. 문과(文科) 출신으로 대관(臺官)과 시종(侍從)을 지냈으며, 언사(言事)를 올리고는 귀국하였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같은 고을 사람인 고경명(高敬命) 등과 더불어 창의(倡義)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노병(老病 늙어 쇠약해져서 생기는 병)이 깊어서 종군하지는 못하고 집에서 응접(應接)하고 모병(募兵)하며 군량(軍糧)을 모으는 등의 일을 하고 규획(規劃)한 바가 많았는데,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덕령(金德齡)도 광주 사람인데, 그의 사적(事蹟)은 더욱 뛰어납니다. 그가 지닌 절륜(絶倫)의 용맹과 해를 꿰뚫을 충성심 그리고 하늘에 닿을 원통함은 온 세상 사람들이 송(宋)나라 때 악비(岳飛)에 견줍니다. 그 당시 원통하게 죽은 상황에 대하여 일찍이 선조(先朝)에서 공조 참판(工曹參判) 이단하(李端夏)가 탑전(榻前)에서 진달하여 대신들과 논의하여 원통한 것을 풀어주고,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습니다.’고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김덕령은 어찌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에 익호장군(翼虎將軍)이라고 칭한 것인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민서가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임금께서 이미 그 기록을 보셨으니, 그 사람의 생애에 대하여서는 상세하게 알고 계실 것입니다. 박광옥은 일찍이 고을 사람들이 사당(祠堂)을 세워서 제향(祭享)하였고, 김덕령은 추후에 병향(並享)하여 그 사우를 의열사(義烈祠)라고 하였는데, 당시에는 사액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비록 문무(文武)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충의(忠義)의 절개는 모두 한 시대에서 나온 것이니, 조정에서 마땅히 포장(褒奬)하여 후세 사람들을 권면해야 합니다. 해조(該曹)에 분부하여 대신들과 의논하게 하여서 특별히 사액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해조에 명하여 대신들과 의논하여 사액(賜額)하라.’고 전교(傳敎)하였습니다. 대신들에게 논의하게 하니,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신이 공무를 본 이래로 장로(長老)가 전하는 말을 들어보니, 모두 김덕령이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운 사적과 원통하게 죽은 사실을 칭송하였습니다. 박광옥 경우에도 일찍이 그의 이름을 듣기는 하였으나, 여태껏 상세한 사행(事行)을 듣지 못하였는데, 지난해에 영남(嶺南)으로 내려가서 영남의 인사들과 만나 듣지 못했던 것을 더 듣게 되었습니다. 박광옥이 삼가고 힘써 실천하여 선배들에게 추중(推重)을 받고, 학도(學徒)를 모아 학문을 강하여 후생들에게 공(功)이 있었습니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또 의병들을 불러 모았으니, 사림들이 존숭하고 흠모하여서 향사(享祀)하는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김덕령의 경우에는 생전에 충효(忠孝)와 대절(大節)이 있었고, 또 아주 뛰어난 용맹을 겸비하여 임진년(壬辰年, 1592, 선조25)의 난리를 당하여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비록 왜적과 싸워 큰 공로를 세우지는 못하였으나, 왜적들이 그의 이름을 듣고서 두려워하여 벌벌 떨면서 감히 기세를 떨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왜적들이 사람을 보내어 몰래 그의 형상을 그려 오게 하여 그가 오는 것을 보고는 왜적들이 갑자기 병사들을 거두어 먼저 도망하였습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모두 날뛰며 서로 기뻐하였으니, 그의 위명(威名)이 대단히 떨쳐졌던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功)을 세우기도 전에 죄 없이 죽자, 나라 안의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면서 송나라의 악비에 견주었습니다. 선조(先朝)에서 원통함을 풀어주고 거듭 관작을 추증하여 호남(湖南)의 인심(人心)을 크게 위로하니, 김덕령의 풍성(風聲)과 의열(義烈)이 사람들에게 칭송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관작을 추증하여 조정에서 숭상하고 장려하는 뜻을 보인 것은 과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고을 사람들이 이미 두 사람을 한 사우에 병향(並享)하였으니, 연신(筵臣)이 진달한 대로 특별히 은액(恩額)을 하사하는 것이 진실로 충절을 드러내고 선(善)을 표창하는 도리에 합당하여 따로 더 의논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삼가 임금께서 재결(裁決)하여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신이 선조(先朝) 때 신축년(辛丑年, 1601, 선조34)에 호남(湖南)에서 염문(廉問)하도록 명령을 받아 오랫동안 광주에 머무르며 유생(儒生)ㆍ부로(父老)들과 만나게 되었는데, 김덕령의 일을 말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팔에 불끈 힘을 주고 매우 슬퍼하며 비탄에 잠겼습니다. 신이 이에 비로소 김덕령의 타고난 효성과 우애, 출중한 지략과 용맹은 진실로 세상에서 흔하지 않으며, 옛날의 열렬(烈烈)한 장부(丈夫)라고 하는 자들과 견주어도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불행하게도 난리를 만나서 몸을 떨쳐 의병을 일으켰으나, 공은 세우지 못하고 명성만 날로 드러났습니다. 마침내 이름은 존숭을 받았으나, 몸은 참화(慘禍)를 당하여 원통함을 품고 저승에서 지낸 지 70년이 되었습니다. 신이 당시에 인심(人心)을 파악하지 못하고 임금께 아뢰었는데, 당시에 아뢴 것을 항상 부끄러워하고 한탄하였습니다. 그 후에 원통한 사정을 아뢰는 자가 있어서 비로소 포증(褒贈)의 은전(恩典)을 시행하게 되어, 한편으로는 인심(人心)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박광옥의 경우에는 신이 비록 그의 인물됨에 대하여 여전히 논하지 못하였으나, 그가 학문을 닦고 자신을 엄격하게 단속한 것은 이미 선배들에게 인정을 받았으며, 그 유풍(遺風)과 여운(餘韻)은 후생(後生)들에게 충분히 모범이 될 만합니다. 이처럼 그가 수립한 경지는 사당에 제사를 드리는 것만으로는 아니 됩니다. 지금 김덕령과 박광옥을 병향한 사우에 의열(義烈)이라는 칭호를 더해 주는 것이 진실로 두 사람의 행적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은액(恩額)을 하사하여 임금께서 숭상하고 장려하는 성덕(盛德)을 보여 주심이 진실로 사리(事理)에 마땅합니다. 삼가 임금께서 재결하여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우의정(右議政)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김덕령이 화를 입은 지 이미 백 년이 되었는데, 오늘날까지도 그의 풍문(風聞)을 들은 자는 비록 어린아이와 아녀자라 할지라도 모두 원통해하니, 영남의 인사들만이 감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충용(忠勇)한 절개는 충분히 후세 사람들을 흥기시킬 수 있으며, 참혹하게 화를 당한 것은 실로 뛰어난 충성심과 용맹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나라 사람들이 그를 송나라의 악비에 견준 것은 매우 안타까워서 슬퍼하는 말이었습니다. 일찍이 선조(先朝)에서 그를 특별히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追贈)하여 저승에 있는 원혼을 위로하고, 매우 원통해하는 인심(人心)을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참혹하게 화를 당한 것은 여전히 씻어내기 어려우니, 그가 나라를 위하여 바친 충성을 숭상하고 장려해야 할 것입니다. 박광옥은 어릴 때부터 자신을 엄격하게 단속하고, 늙기도 전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 선배들에게 인정을 받고, 후생(後生)들에게 존경과 흠모를 받았습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는 죽음을 앞에 두고도 의병을 일으켜서 국가를 위하여 왜적의 침입을 막아냈습니다. 그의 생애를 궁구해 보면, 다만 한 고을만의 훌륭한 선비가 아니니, 제사를 지내는 일은 참으로 과람(過濫 분수에 넘치는 데가 있음)된 것이 아닙니다. 이어서 임진왜란 때의 일을 생각해 보면, 선조께서 중흥의 업을 이룩할 때, 진실로 호남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선비들에게 힘을 입은 바가 있었으니, 성조(聖祖)께서 인재를 배양하신 효과가 더욱 중흥의 성대한 공업(功業)에 빛이 났던 것입니다. 지금 김덕령과 박광옥 등을 병향한 사우에 직질(職秩)을 더하고 편액(扁額)을 내려주어 여러 대에 미처 행하지 못했던 일을 거행하여, 한 도(道)의 오랜 숙원(宿怨)을 위로해 주시는 것이, 진실로 포숭(褒崇)하고 권면(勸勉)하는 떳떳한 일에 합당할 것입니다. 삼가 임금의 재결을 바랍니다.’고 하였습니다. 좌의정(左議政) 정지화(鄭知和)는 병으로 수의(收議)하지 못하였습니다. 대신들의 뜻이 이와 같으니, 임금께서 재결하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니, 임금이 “특별히 증직(贈職)하고 사액(賜額)하여 포장(褒獎)의 뜻을 보이라.”고 전교(傳敎)하였다.[주-D001] 주강(晝講) : 조선 시대에 경연 특진관(經筵特進官) 이하가 오시(午時)에 임금을 모시고 법강(法講)을 행하던 일로서, 주강 외에도 조강(朝講)과 석강(夕講) 등이 있음.9월 초9일 박광옥(朴光玉)ㆍ김덕령(金德齡)을 병향(並享)한 사우(祠宇)에 사액(賜額)하는 건예조(禮曹)의 단자(單子)에, “광주(光州)의 박광옥(朴光玉)과 김덕령(金德齡)을 합향(合享)한 사우(祠宇)에 사액(賜額)하는 일을 대신들과 논의하여 이미 계하(啓下)를 받았습니다. 교서(敎書)와 액호(額號)를 전례대로 예문관(藝文館)으로 하여금 짓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2020-12-17 | NO.342
  • 박광옥ㆍ김덕령의 사우에 사액하는 데 대한 의〔朴光玉金德齡祠宇賜額議〕 - 노봉집 제5권
    박광옥ㆍ김덕령의 사우에 사액하는 데 대한 의〔朴光玉金德齡祠宇賜額議〕 - 노봉집 제5권 : 노봉 민정중(1628~1692)김덕령(金德齡)이 화를 입은 지 이미 거의 백 년이나 되었지만, 지금도 그의 풍도(風度)를 들은 사람들은 비록 아녀자와 어린아이들일지라도 모두 원통하게 여기니, 단지 호남 지역의 인사들만 감개할 뿐만이 아닙니다. 대개 그의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운 절개는 후세 사람들을 흥기시키기에 충분하고, 참혹하게 화를 받은 것도 실로 충성스러움과 용맹스러움이 세상 사람들보다 뛰어난 때문이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송(宋)나라의 악비(岳飛)에 견주는 것은 모두 애석하게 여기고 매우 비통하게 여긴다는 말입니다.일찍이 선조(先朝)에서 특별히 병조 참의를 추증하여 구천에서 떠도는 그의 영혼을 거의 달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원통해하는 여러 사람들의 마음은 오히려 그가 입은 참혹한 화를 모두 보상하고 그의 순수한 충절을 숭상하여 장려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고 여겼습니다.박광옥(朴光玉)은 젊어서부터 몸가짐을 삼가 아직 늙기도 전에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선배들에게 존중을 받고 후배들에게 존경과 사모를 받았으며, 죽음을 앞둔 나이에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위해 왜적을 막았습니다. 그의 행적을 따져 보면 한 고을의 선량한 선비가 될 뿐만이 아니니, 그의 제사를 받드는 것은 참으로 크게 참람한 일이 아닙니다.이어 삼가 생각하건대, 임진왜란 때 선묘(宣廟)께서 나라를 중흥시킨 업적은 실로 호남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선비들에게 힘입은 바가 있으니, 성조(聖祖)들께서 배양한 공효가 성대한 공렬에서 더욱 빛났던 것입니다. 지금 김덕령ㆍ박광옥 등을 사우(祠宇)에 아울러 배향함을 계기로 그들의 벼슬을 추증하고 편액(扁額)을 내려 주어, 여러 조정에서 미처 못 했던 전례(典禮)를 거행하여 오래된 숙원을 이루어 주신다면, 진실로 표창하고 장려하는 적합한 조치에 합당할 것입니다. 삼가 성상께서 재결하소서. [주-D001] 김덕령(金德齡)이 …… 되었지만 : 김덕령은 광주(光州) 사람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왜적을 격파하자, 선조가 곧장 공조 좌랑에 임명하여 익호 장군(翼虎將軍)이라는 호를 하사했는데, 시기하는 사람이 반란자인 이몽학(李夢鶴)의 패거리라고 모함하여, 하옥된 뒤 장사(杖死)하였다. 《국역 현종실록 2년 8월 30일》[주-D002] 악비(岳飛) : 남송(南宋)의 무장이며 충신으로, 금(金)나라가 침입했을 때 하남 북로 초토사(河南北路招討使)로서 누차 격파하여 용맹을 떨쳤지만, 금과 강화를 주장하는 진회(秦檜)의 모략으로 옥사(獄死)하였다. 뒤에 신원되어 악왕(卾王)에 봉해졌다. 《宋史 卷365 岳飛列傳》[주-D003] 선조(先朝)에서 …… 추증하여 : 1661년(현종2) 8월 30일 그의 원통함을 씻어 주었고, 1668년 4월 13일 그를 당상관(堂上官)에 추증하라고 명하였다. 《국역 현종실록 2년 8월 30일, 9년 4월 13일》[주-D004] 박광옥(朴光玉)은 …… 막았습니다 : 박광옥은 광주 사람으로, 명종ㆍ선조 대의 사류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대관(臺官)과 시종(侍從)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고경명(高敬命)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으나 노병(老兵)으로 종군하지는 못하고 집에서 의병의 활동을 뒷바라지했다. 《국역 숙종실록 6년 윤8월 24일》[주-D005] 삼가 성상께서 재결하소서 : 1680년(숙종6)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이민서(李敏敍)가 김덕령과 박광옥을 포장(襃獎)해야 한다고 하여 논의하게 되었는데, 대신 민정중ㆍ김수항(金壽恒) 등이 모두 두 사람의 벼슬을 추증하고 그들을 배향하는 사당에 편액을 내려야 한다고 아뢰자, 임금이 특별히 그들의 벼슬을 증직하고 사액하여 포장의 뜻을 보이라고 분부하였다. 《국역 숙종실록 6년 윤8월 24일》 《承政院日記 肅宗 6年 9月 9日》
    2020-10-04 | NO.341
  • 박광원이 광주에서 왔다가 돌아갈 적에 절구 두 수를 지어 작별하면서 주다〔朴光元 自光州來其還歸作二絶贈別〕 - 한포재집
    박 도사 광원 가 광주에서 왔다가 돌아갈 적에 절구 두 수를 지어 작별하면서 주다〔朴都事 光元 自光州來其還歸作二絶贈別〕 - 한포재집 제2권 / 시(詩) : 이건명(1663~1722)1.절해고도엔 찾는 발길 없어 / 絶海無人問온종일 사립문 닫혔었는데 / 荊扉盡日關고맙게도 그대가 멀리서 방문하니 / 感君勞遠訪마주 대하곤 얼굴에 근심 사라졌지 / 相對破愁顔2.이 몸은 죽음을 달게 여기나니 / 吾身甘一死세상일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구려 / 世事欲無言무금은 내가 소싯적에 놀던 곳이니 / 武錦童遊地훗날 틀림없이 넋이 있으리라 / 他時定有魂[주-D001] 박 도사가 …… 적 : 박광원(朴光元, 1659~1741)의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사선(士善), 호는 백야당(白野堂)이다. 형인 박광일(朴光一)과 함께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99년(숙종25)에 생원 1등으로 합격하였고 1721년(경종 원년)에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었는데 곧바로 신임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광주(光州)로 내려왔다. 《黎湖集 卷25 僉知中樞府事朴公墓表, 韓國文集叢刊 196輯》 《承政院日記 景宗 元年 5月 29日》[주-D002] 무금(武錦) : 광산(光山)의 고호(古號)인 ‘무주(武州)’와 나주(羅州)의 고호인 ‘금성(錦城)’의 합칭으로 보인다.
    2020-12-31 | NO.340
  • 박군(朴君) 상현(尙玄) 에게 답함 - 명재유고 제17권
    박군(朴君) 상현(尙玄) 에게 답함 -  명재유고 제17권 윤증(尹拯)미발설(未發說)에 대해서는 주자와 율곡이 논한 바가 있어 아래에다 수록해 놓았으니, 이 두 조목을 자세히 음미해 본다면 기형(奇兄)과 그대가 한 말의 득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대체로 남헌(南軒)은 “중인(衆人)에게는 미발(未發)의 중(中)이 없다.”라고 하였고, 주자는 “혹 이런 때가 있기도 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율곡의 주장은 더욱 분명하였는데, 기형이 여기에서 견해를 취했으나 단지 말을 하는 과정에서 어긋나고 말았으니, - 예를 들어 정(情)을 가리켜 각자 갖추고 있는 태극이라고 하였습니다. - 그대의 말이 합당합니다. 하지만 그대가 남헌의 학설만 받들고 회옹(晦翁)의 학설을 추종하지 않은 것은 단지 중인의 정이 절도에 맞지[中節] 못하는 것을 가지고 말한 것뿐입니다. 이것은 기(氣)에 악(惡)이 있다고 하여 성(性)이 선(善)하지 않다고 의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리고 “중(中)하면 반드시 화(和)하고 화하면 반드시 중하여 두 가지로 나눌 수 없다.”라고 한 말은 더욱 적절치 않은 듯합니다. 정말 이 말대로라면 중을 이루고 화를 이루기[致中致和] 위해 어찌 각각 다른 공부를 하겠습니까.[별지]주자가 호광중(胡廣仲)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흠부(欽夫)의 미발론(未發論)은 진실로 분별(分別)이 너무 지나친 듯합니다만 그가 말한 ‘없다[無]’는 것은 본래 이 이[理]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물욕(物慾)에 이끌려서 맑고 고요한 때가 없다는 것을 말한 것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내 생각에는 이 또한 사람에 따라 부여받은 것이 같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성(性)이 고요한 사람에게 이런 때가 더러 있기는 하지만 경(敬)으로써 주재할 줄 모르면 혼매(昏昧)하고 박잡(駁雜)해져서 스스로 이를 깨닫지 못한 채 끝내는 필시 없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 퇴계(退溪) 선생이, “흠부의 주장에서 중인(衆人)은 미발(未發)할 때가 없다.”라고 항상 말하였으므로 선생이 그 의미를 이렇게 해석한 것입니다. - 율곡 선생이 말하기를, “중(中)이라는 것은 대본(大本)을 의미하니, 어찌 선이니 악이니 말할 수 있겠는가. 중인의 마음은 혼매(昏昧)하지 않으면 반드시 산란(散亂)하여 대본이 서 있지가 않다. 그러므로 중이라 말할 수 없다. 요행히 일순간이나마 미발(未發)할 때도 있는데, 이렇게 미발할 때에는 전체가 맑아져서 성인(聖人)과 다름이 없게 된다. 다만 별안간에 그 본체(本體)를 다시 잃고서 그에 따라 혼매하고 산란해지므로 그 중을 얻지 못할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 이 내용은 《성학집요(聖學輯要)》〈정심장(正心章) 함양조(涵養條)〉에도 보입니다. - [문]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인생이정(人生而靜)’ 이상(以上)에 대해서는 말로 형용할 수가 없으며[不容說], 성(性)을 말하는 순간 이미 성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성을 말할 때는 단지 〈계사전(繫辭傳)〉에 나오는 ‘계지자선야(繼之者善也)’를 말할 뿐이니, 맹자가 ‘성선(性善)’이라고 말한 것이 이에 해당된다. 이른바 ‘계지자선야’라는 것은 마치 물이 아래로 흘러가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정자의 말뜻을 살펴보건대, ‘인생이정’은 곧 ‘미발(未發)한 때’를 나타내고, ‘이상(以上)’은 ‘이전(以前)’을 뜻하니, ‘미발지전(未發之前)’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는 것은 성의 본체가 지극히 고요하여 볼 수 있는 형적이 없기에 이에 대해 말할 수가 없음을 말한 것입니다. ‘성(性)을 말하는 순간 이미 성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성을 말하는 순간 이미 정(情)과 섞여 있어 본래의 성이 아님을 말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성을 말할 때는 단지 〈계사전〉에 나오는 「계지자선야」를 말할 뿐이다.’라고 한 것으로 보건대, ‘성을 말하는 순간’ 운운한 것은 아마도 ‘선(善)으로 성(性)을 말한 것’을 이르는 것이지 ‘성(性)이라 이름 한 것’을 이르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만약에 ‘성이라 이름 하면 성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문의(文義)가 분명해지지 않습니다. 《중용(中庸)》에서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 했고, 《예기(禮記)》에서는 ‘인생이정천지성야(人生而靜天之性也)’라 하였는데, 이 말들은 모두 사람이 태어난 이후[人生以後]에 그 본체를 가리켜 성(性)이라 이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자는 무슨 까닭으로 사람이 태어난 후에도 이기(理氣)를 구분하지 않고 통틀어서 성(性)이 아니라고 말했겠습니까? 대체로 성(性)은 말하기도 어렵고 이름 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맹자는 발현된 선(善)의 단서로 인하여 성(性)이 선하다고 말한 것이니, 이른바 선하다고 하는 것은 이미 발현되었기 때문에 성(性)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정자가 말한 것은 인(人)과 물(物)이 태어나기 전을 말한 것이 아닌 듯합니다. 주 선생(朱先生)이 이 설을 풀이한 것이 앞뒤로 같지 않으니, 부디 정론(定論)을 보여 주십시오.[답] “성(性)을 말하는 순간 이미 성(性)이 아니다.”라는 구절에 쓰인 두 성(性) 자는 서로 차이가 없는 듯합니다. 아랫글에서 또 “모든 사람이 성을 말한다.[凡人說性]”는 말이 있는데, 이는 “성을 말한[說性]” 이 문장의 성과 같은 뜻입니다. 이 때문에 그대가 의심을 가지게 된 것이나 그 실상은 단지 이와 같을 뿐입니다. 《주자어류(朱子語類)》에 나오는 몇몇 말씀들은 여간 친절하지 않아서 모두 잘못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대처럼 의심을 가질까 염려하였으므로 또 “말없이 이해하고 별도로 자기 나름의 기준을 세워서 보라.”는 말씀을 하였던 것이니, 이 말을 버리고 다른 데서 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체로 이 단락은 “생지위성(生之謂性)”을 전반적으로 논하였습니다. 그래서 “성이 바로 기이고, 기가 바로 성이다.[性卽氣 氣卽性]”라고 말했고, 또 “선(善)은 본디 성(性)이니, 어찌 또한 성(性)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는가.”라고 하였고, 또 “생지위성(生之謂性)이니, 성을 말하는 순간 이미 성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들 가운데 성(性)의 본체를 의미하는 마지막의 성(性) 자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형기(形氣)에 떨어진 뒤에 나온 성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의 본체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처럼 평이하게 보아도 이미 그 뜻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대의 설과 같이 “설성(說性)”의 ‘성’ 자를 ‘선(善)’ 자로 본다면 윗글에서 말한 “생지위성(生之謂性)”의 본뜻과 도리어 관계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대 생각은 어떠합니까? 말씀하신 주자의 여러 설들은 단지 “성선(性善)”과 “계선(繼善)”의 뜻을 말한 것뿐으로 아마 서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부디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문] 보내 준 편지에, “‘설성(說性)’의 ‘성(性)’ 자를 ‘선(善)’ 자로 본다면 윗글에서 말한 ‘생지위성’의 본뜻과 도리어 관계가 없어지게 된다.”라고 하였는데, 내가 말한 것은 ‘성(性)’ 자를 ‘선(善)’ 자로 본 것이 아니라, 성(性)의 선(善)함을 말한 것뿐입니다. 아랫글의 “‘모든 사람들이 성을 말할 때는 단지 〈계사전〉에 나오는 「계지자선야(繼之者善也)」를 말할 뿐이다.’라고 한 것으로 보건대, ‘성을 말하는 순간’ 운운한 것은 아마도 ‘선(善)으로 성(性)을 말한 것’을 이르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성을 말하면서 선을 말한 것이니, 이것은 이미 정(情)이지 성(性)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性)을 말하는 순간 이미 성이 아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윗글에서 이미 “선(善)은 본디 성(性)이니, 어찌 또한 성(性)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성(性)이 동(動)하여 감발(感發)한 것을 가지고 말한 것이지 성(性)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곧바로 선악(善惡)을 가지고 성(性)이라 할까 염려되어 또다시 “‘인생이정(人生而靜)’ 이상(以上)에 대해서는 말로 형용할 수가 없으며[不容說], 성(性)을 말하는 순간 이미 성이 아니다.”라고 하였던 것이니, 대체로 성의 본체가 지극히 고요하여 볼 수 있는 형적이 없으므로 이에 대해 말할 수가 없음을 말한 것입니다.그런데 그대가 보내 준 편지에서, “주자(朱子)의 여러 설들은 단지 ‘계선(繼善)’과 ‘성선(性善)’의 뜻을 말한 것뿐이다.”라고 하였으니, 아마도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주자가 이르기를, “성(性)은 성일 뿐이니,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는 “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不容說]”의 뜻을 풀이한 것입니다. 또 “다만 이 성(性)은 본디 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라고 하고, 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곳이 성의 본체이다. 이것은 마치 물[水]이 단지 물인 것과 같아서 별도로 한 글자도 덧붙일 것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모두 ‘불용설(不容說)’의 뜻을 풀이한 것이지, ‘계선(繼善)’과 ‘성선(性善)’의 뜻을 설명한 것이 아닙니다. 《주자어류》에서 이른 바 “별도로 자기 나름의 기준을 세워서 보라.”라고 한 것은 주자가 엄시형(嚴時亨)에게 답한 말이며, 구희손(歐希遜)에게 답한 말 또한 이와 같습니다. 대체로 계선과 성선의 설이 가리키는 바가 같지 않은데 정자가 이를 인용하면서 같은 것으로 보았으므로 두 분이 의심이 나 질문을 하게 되었고 주자가 이에 답을 한 것입니다.정자의 생각은 아마도 이러했을 것입니다. 인성(人性)이 발(發)하기 시작할 때는 천리(天理)가 동(動)하기 시작할 때와 그 뜻이 차이가 없으니, 이은[繼] 뒤에 그 선함을 볼 수 있는 것은 천리이고, 발(發)한 뒤에 그 선함을 볼 수 있는 것은 인성인데, 그 형적으로 인하여 그 성을 말하기로는 피차가 한가지이므로 인용하면서 같은 것으로 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따져 들어가면 정자의 취지가 통창(通暢)하고 명백해집니다. 그런데 주자가 두 분의 질문에 답하면서 또한 의심이 없을 수 없다 하면서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답을 하였습니다. 또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에 인용된 주자의 말을 보면, “천도(天道)의 유행(流行)이 이와 같으므로 인성(人性)의 발현(發現)이 또한 이와 같다.”라고 하여, 주자는 이에 대해 전후로 다른 견해를 보였습니다. 한 말씀 해 주시어 이 의혹을 풀어 주시기 바랍니다.미발지설(未發之說)에 대하여 기우(奇友)와 왕복하며 논변하였으므로 그 내용을 그대에게 말씀드렸는데, 그대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 끝내 의혹을 풀어 드리지 못한 듯합니다. 보내 준 편지에 중화(中和)를 둘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 하였는데, 나는 공효(功效)를 가지고 말한 것이지 공부(工夫)를 가지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무릇 중화라고 하는 것은 성정(性情)의 덕(德)을 표현한 것이므로, 이미 중(中)이라 한다면 이는 체(體)가 확립된 뒤를 가리키고 이미 화(和)라고 한다면 이는 용(用)이 행해진 뒤를 가리킵니다. 체와 용은 근원이 하나여서 둘로 나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우에게 준 편지〉에서 말한, “서로가 체용(體用)이 되므로 둘로 나눌 수가 없다.”라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대가 말한 치중(致中)과 치화(致和)는 공부(工夫)를 가지고 말한 것입니다. 공부를 하면 본디 내외의 구별이 생기게 되니, 어찌 둘로 나눌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부디 다시 회답해 주기 바랍니다.보내 준 편지에서 날더러 남헌(南軒)을 학설만 받들고 회옹(晦翁)의 학설을 추종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남헌과 주자가 과연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까? 주자 초년의 소견은 기형(奇兄)의 견해와 같았지만 말년에 와서 그 오류를 깨달아 마침내 연평(延平), 정자(程子) 및 남헌의 설과 다름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경부(張敬夫)에게 준 편지〉에 “이 설은 더욱 이치에 어긋난다.”라고 스스로 주를 달았던 것이다. 또 주자가 쓴 〈중화구설서문(中和舊說序文)〉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주자가 전후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인(衆人)에게는 미발(未發)의 중(中)이 없다.”라고 한 것은 〈임택지(林擇之)에게 답한 편지〉와 《주자어류》 제12편에 유지(劉砥)가 기록한 내용을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내가 말한 “중인(衆人)에게는 미발(未發)의 중(中)이 없다.”라고 한 것은 중인에게 원래 이 이치가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완전하게 하지 못함을 말한 것입니다. 율곡이 이른 바 “일순간이나마 미발할 때가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렇게 미발할 때에는 전체가 맑아져서 성인(聖人)과 다름이 없게 된다.”라고 한 것은, 단지 성(性)의 본체는 본래 선(善)해서 불선(不善)의 싹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한 것일 뿐 중인들이 모두 미발의 중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기질에 구애되어 대본을 세우지 못한다면 될 법한 일이겠는가?”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대체로 기형은 미발의 중을 천명지성(天命之性)으로 보아 “사람들이 모두 가지고 있다.”라고 한 반면에, 나의 생각은 미발의 중이 비록 천명지성이기는 하지만 본디 본체가 확립된 것을 지칭한 것이므로 사람들이 모두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번 편지에서 여쭐 때 내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기에 이와 같이 자세히 말씀드리오니, 부디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주-D001] 박군(朴君) : 박상현(朴尙玄, 1629~1693)을 가리킨다. 자는 경초(景初), 호는 우헌(寓軒),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전라도 광주(光州)의 진곡(眞谷)에서 학문에만 전념한 학자이다. 아들 박광일(朴光一)을 송시열에게 보내 학문을 배우게 하였고, 그의 문집인 《우헌집(寓軒集)》에 송시열과 주고받은 편지가 여러 편 있으며, 송시열은 그를 모년지기(暮年知己)로 허여하였다고 한다. 《우헌집》에는 기정익(奇挺翼)에게 보낸 11편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는데 주로 성리학의 격물, 이기, 태극에 관한 내용들이다. 《韓國文集叢刊解題 4輯 寓軒集, 遜齋集》[주-D002] 기형(奇兄) : 기정익(奇挺翼)을 가리킨다.[주-D003] 남헌(南軒) : 장식(張栻)으로 남헌은 호이며, 자는 흠부(欽夫)이다.
    2020-09-16 | NO.339
  • 박눌재와 고양이
    눌재 박상 하면 고양이 설화가 유명하죠. 이 고양이가 아니었더라면 눌재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지도 모릅니다. 다행히도 고양이를 만나 사약을 모면했다고 하니 눌재에게 고양이는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사연인즉 눌재 박상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지요. 당시 희대의 폭군이자 패륜아로 낙인찍힌 연산군이 전국 각지에 채홍사採紅使를 내려 보내 궁비를 뽑아 궁 안의 일을 돕도록 하던 중 나주에 사는 우부리牛夫里라는 자의 딸이 뽑혀 왔습니다. 우부리의 딸은 대단한 미색이어서 연산군의 눈에 금방 들어 총애를 받는 후궁後宮이 됐는데 이때부터 비극은 시작됐습니다. 후궁이 되자마자 그 아비 우부리는 마치 연산군의 장인이라도 된 것처럼 기세등등해졌지요. 우부리는 나주목사를 함부로 대하고, 토지를 강탈하는가 하면, 세도를 부려 남의 처자를 빼앗아 첩으로 삼는 등 우부리에 대해 일대의 원성이 자자했습니다. 이처럼 우부리의 행패가 극심했지만 나주목사는 그 어떤 손도 쓰지 못했습니다. 나주목사가 우부리 자신의 행패를 막으려 들면 서울 궁성의 딸에게 일러바쳐 목사의 목을 잘랐기 때문이에요. 이로 인해 나주 고을의 민심은 날로 흉흉해졌지요. 이렇듯 목사로 부임하면 직책은 고사하고 목숨부지까지 위태로워지자 그 누구도 나주목사로 가려하지 않았어요. 그러던 중 우부리의 만행을 들어 익히 알고 있던 눌재가 자청해 부임해 왔습니다. 눌재가 부임해 왔을 당시 동료나 예하 이속들이 이구동성으로 우부리에게 ‘부임 인사’를 해야 한다고 했으나 눌재는 그 권유를 듣지 않고 오히려 우부리의 죄상을 밝히기 위해 그를 동헌으로 잡아들였습니다.그는 엄명을 내려 우부리를 잡아들인 뒤 그에게 죄를 묻고 취조한 결과를 조정에 보고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부리도 기세등등해져 "목사, 네 놈의 목을 자르겠다"고 큰소리를 치자 곤장을 쳐 장살杖殺의 형벌로 그를 죽게 하고 말았습니다.이 일이 있은 후 우부리의 집에서는 그의 시체를 치울 생각도 하지 않고, 우선 사람을 서울로 보내 연산군에게 고하자 연산군이 대노大怒한 뒤 금부도사를 보내 놀재에게 사약을 내리도록 명했어요.눌재는 이런 상황을 모른 채 우부리의 죄상을 글로 조정에 낱낱이 밝히는 한편, 당당히 임금에게 대죄待罪를 청하려고 나주목사 사표를 들고 전남 장성 갈재를 넘어 입암산笠岩山 아래 갈림길에 이르렀는데, 난데없이 들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그 들고양이는 "야옹 야옹" 하며 눌재의 바지가랑이를 물어 채면서 끌기에 이상히 여겨 그 고양이가 끄는 대로 따라갔지요. 도착한 곳이 진천사라는 절이었는데 나중에 이곳은 백양사가 되었다는군요. 그동일한 시각에 금부도사가 반대쪽 큰길로 오고 있었기 때문에 고양이가 아니었더라면 눌재의 일행은 금부도사와 마주쳐 사약을 받고 황천에 갈 뻔했지요. 고양이 때문에 서로 길이 엇갈려 절체절명의 위기를 모면한 셈이죠. 얼마 뒤 조선 제10대왕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晉城大君(이역)을 왕으로 추대한 중종반정中宗反正.(1506)이 벌어지고 그로 인해 우부리 사건은 불문에 붙여지게 됐지요. 그 일을 겪고 난 눌재는 벼슬을 그만둔 뒤 낙향하여 고양이에게 제사를 지낼 목적으로 논(묘답苗畓 고양이의 은혜를 갚는 전답)을 만들 정도로 고양이의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눌재訥齋 박상朴祥(1474~1530)은 조선 중기 중종 때의 문신으로 성종 5년인 1474년 광주시 서구 서창동 절골마을 출생으로 훈구파와 사림파가 대립하던 조선 중종 때의 관료로 사림 운동에 전력한 학자이자 정치가였다. 전라도사, 담양군수, 순천부사 등을 역임했으며 그의 학식과 인품에 대해 후배였던 퇴계 이황이 ‘원우元祐의 완인完人(명예와 신분에 전혀 흠이 없는 완전한 인간)’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눌재집訥齋集』을 남겼으며 이조판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추증되어 광주 월봉서원에 제향祭享됐다.
    2018-05-28 | NO.338
  • 박대붕-世幾眞男子
    世幾眞男子  이 세상에 참 남자 몇몇일런고先生獨擅雄  선생이 그중에서 우뚝하여라心存誠正上  마음은 성정 위에 보존하였고氣發浩然中  기운은 호연지기에서 우러나왔네宦海求名倦  환로에선 이름 구하기 멀리하였고書林入道竆  학문에선 도에 들기 깊이 하였네人將問虎語  사람들은 범에게 물은 말을 가지고傳作啓羣蒙  전하여 몽매한 자들 깨우쳤다네- 고봉별집 부록 제2권 박대붕은 광주출신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과 같이 무등산을 유람했다. 만시에 기대승의 덕행을 무등산의 기상을 견주고 있다.
    2018-07-27 | NO.337
  • 박대붕-무등산
    標挺高明域  높고 밝은 하늘에 솟아오르고根蟠廣博陬  넓디넓은 땅속에 뿌리 뻗어서嵯峨超培塿  우뚝할사 언덕마루 뛰어넘었고崔崒軼嵩丘  드높아라 숭구라도 맞먹고말고天作山無等  하늘이 만들어 낸 저 무등산奇峯最上頭  최정상 산봉우리 기묘하구나扶輿二儀氣  천지 음양(二儀) 기운이 감돌아坱圠五行流  오행이라 그 흐름 충만하여라-고봉별집 부록 제2권 만장(挽章)남포(南浦) 박대붕(朴大鵬, 1525 ∼1592 )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본관은 상주이고 순천(順川) 출신이다.  광주의 철인 기대승이 별세하자 쓴 만시로 명산 무등산을 두고 그를 기렸다.박대붕은 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주부 벼슬에 이르렀으나 1589년(선조22) 기축옥사(己丑獄死) 때에 양산룡 등과 연명으로 상소를 올렸다가 투옥된 후 풀려나 낙향하였다.
    2018-07-06 | NO.336
  • 박동춘- 죽림정원운
    죽림으로 내린 그 호 천일처럼 분명하니선조 의적 추모하여 이 정자를 이뤘도다 오랜 성상 견디면서 높은 절개 지키었고우로(雨露) 같은 깊은 은혜 우리 후생 감격하네.강물처럼 맑은 마음 바다처럼 광활하고산봉우리 중첩되니 나는 구름 가벼웁네어진 선조 추모하여 무덤 앞에 참배하니그 모습은 여재(如在)하나 그 소리가 안들리네 *죽림정은 광산동 뒤산 기슭에 죽산박씨의 종손 박동춘(朴東春)에 의해 1926년 그의 집 뒤산 죽림골에 건립되었다.
    2020-04-28 | NO.335
  • 박상 과 박순을 위하여 사액(賜額)을 청하는 상소 사연을 방계(防啓)하는 건 - 서원등록
    박상(朴祥)과 박순(朴淳)을 위하여 광주(光州)에 있는 사우(祠宇)에 사액(賜額)을 청하는 호남(湖南) 선비들의 상소 사연을 방계(防啓)하는 건 - 서원등록(書院謄錄) : 현종(顯宗) 4년(1663) 생원(生員) 송해(宋垓) 등의 상소에 근거하여 예조(禮曹)에서 올린 계목(啓目)에, “계하(啓下) 문건은 점련(粘連)하였습니다. 이 상소의 사연을 보니, 호남(湖南)의 많은 선비들이 고(故) 응교(應敎) 신(臣) 박상(朴祥)과 고 상신(相臣) 박순(朴淳)을 위하여 광주(光州) 지역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병향(並享)한 지 이미 10여 년이 되었는데, 아직까지 액호를 내려주는 은전(恩典)을 입지 못하여서 이렇게 상소를 올려 호소한 것입니다. 박상의 문장과 기절(氣節), 박순의 학문과 덕망이 한 문하에서 이어 나와, 진실로 사림(士林)들이 함께 흠모하고 경앙(景仰)하여, 그들의 마을에 사우를 건립하여 제사를 지내면서 천 리나 되는 먼 곳에서 상소하여 액호를 내려주기를 청하였으니, 한 지방에서 존경하고 흠모하는 진실한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원에 사액하는 것을 반드시 매번 들어줄 필요가 없다고 하신 성명(成命)이 있었으므로, 해조(該曹)에서 감히 마음대로 상소의 사연을 처리할 수 없으니, 지금은 우선 그대로 두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니, 그대로 윤허한다고 계하(啓下)하였다.
    2020-12-17 | NO.334
  • 박상, 박순, 기대승을 합향하는 건- 서원등록
    박상(朴祥)ㆍ박순(朴淳)ㆍ기대승(奇大升)을 합향(合享)하는 것을 점이(粘移)하는 건- 현종(顯宗) 12년(1671) : 서원등록(書院謄錄)예조(禮曹)에서 상고(相考)하는 일. 이전에 접수한 본도(本道)의 관문(關文)에 점련(粘連)한 광주 목사(光州牧使)의 첩문(牒文)에, “본주(本州)에는 예로부터 눌재(訥齋)와 사암(思庵) 두 선생의 사우가 덕산(德山)에 있으며,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선생의 사우가 월봉(月峯)에 있습니다. 한 고을 안에 각기 서원을 건립하였으니, 유생들의 모임이 서로 나누어지고, 향사하는 예 또한 너무 간략하다는 탄식이 있습니다. 고을 안의 많은 선비들이 일찍이 이러한 병통 때문에 월봉의 옛터에 새로 담장을 세우고 재사(齋舍)를 크게 지어서 합향(合享)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월봉서원이 이미 덕산(德山)이라는 은액(恩額)을 받았지만 아직 임금께 아뢰지 않았는데, 갑자기 그 사우〔宮宇〕를 합하는 것은 미안하므로 관문에 덧붙여서 해조(該曹)에 이첩(移牒)합니다. 여러 신하들의 신위를 합쳐 모시는 것은 근례(近例)가 있습니다. 이 서원을 이미 중건하여서 합향하는 예를 지금 차례로 거행하도록 해조에 전보하는 일을 일일이 말하여 많은 선비들이 청원(請願)하는 연유를 갖추고 첨부하여 이첩하였거늘, 많은 선비들이 원하는 바이기 때문에 한 고을에 여러 현인(賢人)들을 합향하는 것입니다. 지세(地勢)와 사리(事理)로 볼 때 어찌 편리하고 좋지 않겠습니까? 다만 아직 사액하지 않은 서원이기 때문에 이미 사액한 곳에 합향하는 것은 사체(事體)로 헤아려 보아 임금께 아뢰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을 회이(回移)하였는데, 지금 본주의 유생들이 올린 정서(呈書)를 보니, 이러한 일은 반드시 본조(本曹)에 먼저 고하여서 제사(題辭)로 허락을 받은 후에 거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회덕(懷德)의 숭현서원(崇賢書院)과 옥천(沃川)의 창주서원(滄洲書院)에 합향할 때도 모두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본조에 있는 문서를 가져다 상고해 보니, 병술년(丙戌年)의 숭현서원(崇賢書院)과 기유년(己酉年)의 창주서원(滄洲書院)에 합향할 때 모두 사유를 첨부하여 이첩해서 임금의 재결을 받아 시행하였는바, 전례가 이미 이와 같았음을 의거할 수 있으니, 지금 이 세 현인(賢人)을 합향하는 일은 다시 논의할 것도 없습니다. 많은 선비들이 원하는 대로 거행하게 하고, 이러한 뜻을 알려서 시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전라 감사(全羅監司)에게
    2020-12-17 | NO.333
  • 박상-遊瑞石山韻 贈鄭萬鍾
    昔年曾謫永平官  지난해 남평에 유배되어서無等山雲借登攀  무등산 구름 속을 등반하였지 念佛庵中成邂逅  염불암 안에서 즐거워하고天王峯上與盤桓  천왕봉 꼭대기에 서성거릴제南州五十彈丸小  남쪽오십 고을 탄환처럼 조그맣고 北闕三千咫尺間  한양 삼천리 길 지척으로 여겼었네衰病日加深閉戶  날로 더한 병마로 문 닫고 있으니 再遊那得到層巒  높은 산봉우리에 어찌 다시 노니랴-눌재집(訥齋集) 권3눌재(訥齋)  박상(朴祥 1474 성종 5∼1530 중종 25)은  남평으로 유배되어 유배자 자격으로 무등산에 올랐다. 천왕봉 까지 올랐음을 시(遊瑞石山韻 贈鄭萬鍾)로 나타내고 있다.
    2018-07-12 | NO.332
  • 박상-광주향안 서문(光州鄕案序), 訥齋先生續集卷第四
    訥齋先生續集卷第四 / 序 金文谷編 吾州之座首金叔讓,別監金敬寶,薛崇。价別監柳子華簡訥齋曰。我朝鮮受命以來。倣周卿大夫之制。州與府與郡與縣與。設留鄕所。以鄕之有職秩名望者補其員。長曰座首。亞曰別監。所所攝之公事。長主之而亞佐之。長不可顓也。亞不可擅也。所以耳目於本官。而司其聞睹焉。又於都下。置之邸。以管各邑之鄕所。而在朝之土姓。或寓居者爲之。隨其品級之崇卑。而有堂上,郞廳殊稱焉。夫所謂邸者。如西京徹侯朝請之邸舍。而文皇帝自代邸。入主劉壐者是已。然則鄕所與京邸。相爲表裏。而鄕所之統京邸。如縣之事大府。京邸之待鄕所。如大府之制小縣。上下相維。輕重相校。其來久矣。是以。求署邸官者。猶夫求辟鄕所也。本州自徐伐國之置都督。歷濟迄麗。遂洎本朝。雖沿革之循環。而世爲文獻之邦。豈不徽哉。雖然。利所在。人必走雜之。故短褐瑣夫。一朝而搦千金之權。則百家之市。無寧居者。利在千金。而不在夫短褐也。今夫爲員於鄕所者。貳邑長而尸一鄕之權柄。里胥之所俯伏而聽命矣。閭井之所輭恧而附威矣。大則賦租傭調之亦罔或搖。其利之茂弘不止是。而人之視之者。若短褐者之千金。此則所謂鄕所者。弄一鄕趨競之別種利權。而行胸臆作威勢於其間。誠非國家樹置之本旨也。是以。馬醫夏畦之族。籧篨戚施之黨。夤緣旁請。猥受差札。則乃比黃麻之拜除。內必誇談於妻孥。外必詡慠於人人。心自語曰。某鄕吏可詰某事。醻我昔素之隙也。某里胥可追某釁。報我造次之嫌也。於是乎交蹀城郭。偵謁君侯。狨瞰顏色。狙若揮使。言瞢淑不。應捷於響。施渾義悖。讚之如流。噓我宿灰而擬焰雲焉。決我濫觴而望襄陵焉。以闚看爲之精神。以向背爲之變通。戚或莫之弔也。喜或莫之慶也。經營溪壑。胚茁兇胞。陰殖鬼蜮。借月朝而恣邑吠。翕鴟翰而鳳咮。或鴒原鬩墻。而加諸人以終鮮之刺。或床裯反目。而責人以綠衣之詩。襲蒸豚於竹林。而嘆棘人之不見。懷伏弩於馬陵。而稱下泉之元伯。鑽核飮羊。而曰彼愧拔葵也。吮癰舐痔。而曰彼甘拂鬚也。以衛靑孱派。而抵王謝之閥。以枚皐分支。而抗崔盧之系。顧顧自得。兩手攫取苞苴曰。我門淡泊如水也。喔咿謀漏徭稅曰。我性慷慨奉公也。至於聞鷄孜孜者。私焉利焉而止。而杯酒之微。潮迅睚眦。錐刀之細。飆激訾訐。首矯癖而後辭裘。淫比黨而笑不同。公共之義財義田。例視靑氈。朘摋無贏。筵必曲而席必密。謔嬲倡優。坡肉河醑。雷殷牙頰。狠伺部長。仇睇薦紳。毒鏃潛發。霜鐔暗飛。有識者之遁避也。若參乎之勝母。翟也之朝歌。誰能景仰而遷喬乎。列城滔滔。而吾邦且甚。朝廷之嘗議革罷者。不亦是之懲也。某俱傖父曹也。際承板蕩。叨具厥位。蠲慮刻志。思出尋常。庶譽叔祀。而未得其方。揚子雲曰。鄭衛調。俾夔因之。不可以致箾韶矣。固宜彗舊摛新。罔或沿籍乎。在昔里胥之怙十惡者。必抵以法。而不用邪㒃。士民之離八刑者。必摘以實。而不小私搆。死喪相赴。疾病相訊。喜吉相慶。患難相恤。送來迎往。鷄豚春秋。又不可闕一。而自我作元綰。名楮板。使後人知某也爲別監。永垂恒式焉。子亦州之裔學。身任翰墨。盍敍之悉乎。訥齋辭曰。吾嘗出位評國。囮孼周行。萬死投荒。幸保聖明。懲羹至矣。敢又撩蛇虺於桑梓耶。再扣之。略不休則曰。匹夫而化鄕人者。蘇老泉有是說矣。夫然後知員鄕所者之殿一鄕也。猶流之有源也。猶影之有表也。猶網之有綱也。猶裘之有領也。源淸則流必淸焉。表正則影必直焉。綱擧則目必張焉。領絜則裘必順焉。理之然也。若夫搥刴所莊之恕。而悶昏蠢之未曉者。譬若溷其源而惡流之濁也。枉其表而怪影之曲也。失其綱而患網之紊也。截其領而疑裘之倒也。天下寧有是哉。昔王彥方。一處士也。而化奸宄爲君子。而不拾道之遺。何蕃。一學士也。而叱六館之士。而不從朱泚之叛。借使王,何之輩。生今之世。居今之俗。而處於鄕大夫之任。則二代偸末之習。不終日遷革。而雖有煽亂如朱泚。而人不或動。不必遺布勸善。而跖膽變爲夷腸。矧且不跖不泚者乎。雖然。問世之治亂。必觀其人。問人之賢不肖。必以世考之。孟子曰。誦其詩讀其書。不知其人可乎。是以。論其世也。蓋惟合抱之木。不生於步仞之丘。千金之子。不出於三家之市也。今也二三子。莫非蟬嫣簪紱之後。而龍拔鰌泥。虎跳狐丘。冀挽回其汚俗。反敝軌於夷庚。其用意則今日之彥方也。今日之何蕃也。是必欲人之廉也。則捐金於虛牝。欲人之恥也。則關口於壺飧。欲人之禮也。則鳲鳩之不忒。欲人之義也。則葛藟之不回。俠窟輕薄。思所以弭之。則處以長者之淵塞。豪臼梗武。思所以戢之。則晴割斯須之機心。爲源以淸之。爲表以正之。爲綱以張之。爲領以絜之。蓼莪白華之撫蹈懿轍。而曾閔之範䦱矣。斗粟尺布之劬勞縫舂。而姜肱之被遍矣。下位分宅。則羊舌郈成之風。斯達焉。夫唱婦隨。則白頭扊扅之歌。孰賡焉。死喪相赴以下之數事。次第力遵。而薄也歸厚。澆也向醇。東陵鉅猾。慕夷叔之抗致。蒲中縱甿。希黔婁之卓軌。號呶登於俎豆。囂訟息於虞芮。刀筆桀黠。自爾馴。桑濮詖蕩。自爾貞。凶悍之區。革爲鄒魯之域。苟婾之習。轉入胥陸之天。居是邦而非大夫者。無復荑也。違彥聖而好不遂者。無復騫也。詩曰。無競維人。四方其訓之。四方且順之。而況於一鄕乎。而況於匹夫乎。古語曰。一夫善射。百人決拾。其此之謂乎。如是而頑不卽者。牒州主而究竟之。謁邸官而評彈之。大或黜異鄕邊。或作遂 小或削損徒籍。斯亦可也。苟或內幽瑕纇。而圖工表襮。則雖日撻里胥之驁逆。而求其齊。衷必不帖也。雖日擊衣冠之囂悖。而要其馴。勢必相掎也。莊周所謂化聲之相待。不在此耶。人將曰。是同浴而譏裸裎。非愚則惑矣。且也謄錄姓字。以傳於世。則後之歷數者。必曰。某也吶。某也詐。某也溫愨。某也奸惎。某也羊質而虎皮。某也言姚而履跖也。豈不凜凜哉。正德丙子仲冬日。訥齋眞逸書。
    2018-07-12 | NO.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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