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72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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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곡집 제8권 / 응제록(應製錄)- 한성우
- 도곡집 제8권 / 응제록(應製錄)전 참판 한성우에게 내린 치제문 신묘년(1711, 숙종37) 〔前參判韓聖佑致祭文 辛卯〕선왕께서 훌륭한 사람들을 등용하시니 / 宣后宅俊충정공이 보필하였고 / 有弼忠靖또한 문원공이 있었으니 / 亦維文元그 학문 성인을 바라는 것이었네 / 其學希聖경은 이 두 대현을 이어서 / 卿承兩大대대로 훌륭함에 걸맞았네 / 克稱世令기개와 도량이 단정하고 / 器度端介풍모가 굳세었네 / 風標剛挺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부터 / 自在儒衿화려한 명성을 떨쳤다네 / 華聞蔚炳일마다 어려움이 없었으니 / 遇事無難오직 강직함을 지켰기 때문이라오 / 惟直是秉현자의 무고를 힘써 변론하니 / 力辨賢誣어찌 화난을 두려워했겠는가 / 奚怵禍穽늦은 나이에 음직으로 굽혀 나아가니 / 晩屈蔭階벼슬길이 막힘을 모두 서글퍼하였네 / 咸嗟蹭蹬문과에 급제한 뒤에는 / 迨其奮翼그 명성 누가 다툴 수 있었겠는가 / 厥聲孰競벼슬길이 열림에 / 旣闢晉塗대간직에 여러 번 등용되었네 / 婁登臺省홀로 깨끗한 지조를 지키니 / 獨持淸裁사람들이 골경의 신하라 추앙하였네 / 人推骨鯁얼굴빛 엄정히 하고 직간을 하니 / 正色讜言보는 자들이 목을 움추렸지 / 觀者縮頸행보가 또 다시 막혔으나 / 跡仍淹閡마음은 절로 고요하였네 / 心自閒靜음과 양이 소장하는 즈음에 / 消長之際그 뜻이 더욱 굳건하였네 / 其志彌勁그러다 마침 갑술경장을 만나 / 屬値更張다시 사명을 도왔네 / 起贊詞命경연에서 좋은 말로 나의 마음 적셔주니 / 經帷沃心경계한 말이 간곡하였다네 / 懇懇箴警승지가 되고 육조의 일 맡음에 / 納言佐部관직에 걸맞지 않은 적 없었네 / 靡不官稱지방관으로 나가서도 / 出涖州鎭훌륭한 정사가 많았다오 / 又多異政병폐를 없애고 폐단을 제거하며 / 剔瘼祛弊자신의 몸가짐은 깨끗하게 하였네 / 自礪則淨외직과 내직이 모두 알맞았으니 / 外內俱宜명망과 실재가 더욱 성대하였네 / 望實愈盛개성 유수에 발탁되고 / 庸擢留筦중간에 관찰사도 맡았었네 / 間寄藩屛해임하고 간 후에도 은택이 흡족하니 / 惠洽去後백성들이 공덕을 칭송하였네 / 民口有詠조정에 있을 때에는 / 當其在朝번번이 대사간을 맡았는데 / 輒都諫諍강개하게 정사를 논하니 / 忼慨論事늙어도 더욱 굳세었네 / 老而益硬상소 또한 있었으니 / 亦有章牘충성스런 마음이 빛나고 빛났도다 / 忠悃耿耿억울한 이를 신원해준 것은 / 伸直幽枉또 핵심을 찌른 것이었다네 / 復中肯綮전형의 일에 참여하게 되자 / 及參銓衡감식안이 더욱 드러났다네 / 尤著藻鏡탁한 것 헤쳐내고 맑은 것 뽑아 올리는 것을 임무로 삼으니 / 激揚是任비방과 중상이 무슨 문제이겠는가 / 謗傷何病머리 숙여 배회하며 자취를 숨겼는데 / 低徊屛跡갑자기 영영 가버렸네 / 奄促頹景쓰임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 其用未究그를 위해 눈물 줄줄 흘리노라 / 涕爲之逬경의 평생을 생각해보면 / 摡卿平生그 아름다움에 누가 짝할 수 있으리오 / 懿美誰並집안에서 효도하고 우애한 것은 / 家庭孝友천성에서 나온 것이었네 / 寔出天性청백하고 고아한 규범은 / 淸規雅範소태나무처럼 쓰고 얼음처럼 맑았다네 / 蘗苦氷瑩인물을 간별하는 것이 분명하였고 / 臧否之晳지조를 지킴이 엄정하였네 / 執守之正시종 명예와 절개를 지켰으니 / 始終名節작은 하자도 볼 수 없네 / 不見瑕眚지금 어찌 다시 살아날 수 있겠는가 / 今何可作끝났으니 갱생하기 어렵도다 / 已矣難更어느덧 장례일에 이르러 / 遠日忽届상여에 이미 멍에를 정돈했도다 / 輀車旣整이에 사관에게 명하여 / 爰命祠官대신 술잔을 권하고 고하도록 하였네 / 侑告是倩내 말이 애처롭고 / 予辭之戚내 술이 깨끗하니 / 予酌之泂신령이 만약 어둡지 않다면 / 靈如不昧흠향하고 들으소 / 尙克歆聽[주-D001] 한성우(韓聖佑) : 1633~1710. 자는 여윤(汝尹),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1669년(현종10)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84년(숙종10)에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조 좌랑이 되었으며, 1689년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다. 이후 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세력이 무너지자 수찬에 재기용된 뒤, 교리ㆍ응교ㆍ집의ㆍ사간 등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699년 대사간에 올라 시무책 3개조를 상소하는 등 활약하였으며, 그 뒤 철원 부사ㆍ광주 목사(光州牧使) 등을 거치면서 선정을 베풀었고, 광주에서는 그의 덕망을 기려 주철(鑄鐵)로 된 송덕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이후 전라도 관찰사ㆍ대사간ㆍ판결사 등을 역임했고, 개성 유수로 나갔다가 1707년 병조 참판에 올랐다. 그 뒤 이조와 공조의 참판, 대사성 등의 벼슬이 내려졌지만 병을 이유로 모두 물리쳤으며, 향리에서 머무르다가 78세로 졸하였다. 주자학(朱子學)에 조예가 깊었으며, 많은 저서를 남겼다고 하나 대부분 흩어져 남아있지 않다.[주-D002] 훌륭한 사람들을 등용하시니 : 원문의 ‘택준(宅俊)’은 삼택(三宅)과 삼준(三俊)을 가리키는 것으로, 《서경》 〈주서(周書) 입정(立政)〉에 “성탕(成湯)이 천자가 되어 상제의 빛나는 명을 크게 다스리신 것은, 등용한 삼유택(三有宅)이 택(宅)의 지위에 나가며, 이른바 삼유준(三有俊)이 준(俊)의 덕에 나아갔기 때문이니, 엄숙히 생각하고 크게 본받으시어 삼택(三宅)ㆍ삼준(三俊)을 잘 쓰셨던 것입니다.〔亦越成湯陟丕釐上帝之耿命, 乃用三有宅克卽宅, 曰三有俊克卽俊, 嚴惟丕式, 克用三宅三俊.〕”라고 보인다. 삼택은 상백(常伯)ㆍ상임(常任)ㆍ준인(準人)의 지위에 거한 자를 이르고, 삼준은 상백(常伯)ㆍ상임(常任)ㆍ준인(準人)의 재주가 있는 자를 이르는바, 택준은 훌륭한 임금이 어진 사람을 잘 쓰고 기름을 의미한다.[주-D003] 충정공(忠靖公) : 한응인(韓應寅, 1554~1614)으로,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졸재(百拙齋)ㆍ유촌(柳村),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한성우의 고조이다.[주-D004] 문원공(文元公) : 김장생(金長生, 1548~1631)으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이다. 이이(李珥)의 문인이며 예학(禮學)을 깊이 연구하여 조선예학의 태두가 되었다. 한응인의 아들 덕급(德及)이 김장생의 사위였으므로, 김장생은 한성우의 외외증조부가 된다.[주-D005] 성인을 바라는 것이었네 : 문원공의 학문이 성인이 되기를 바라는 현인의 학문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주돈이(周敦頤)의 《통서(通書)》에 “성인은 하늘이 되기를 바라고, 현인은 성인이 되기를 바라고, 선비는 현인이 되기를 바란다.〔聖希天, 賢希聖, 士希賢.〕”고 한 말에서 온 것이다.[주-D006] 현자의 …… 변론하니 : 1674년(숙종 즉위년) 인선왕후(仁宣王后)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로 송시열(宋時烈) 등이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되자, 한성우가 180인의 유생들과 함께 소를 올려 부당함을 주장한 일을 말한다. 《肅宗實錄 卽位年 10月 2日》[주-D007] 늦은 …… 나아가니 : 1680년(숙종6)에 경신대출척으로 송시열 등이 다시 등용되었는데, 당시 문과에 급제하기 전이었던 한성우는 숭릉 참봉(崇陵參奉)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봉사ㆍ직장 등을 역임하였다.[주-D008] 문과에 급제한 뒤에는 : 1684년(숙종10)에 성균관 제술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그해 52세의 나이로 전시에 합격하였다.[주-D009] 골경(骨鯁)의 신하 : 골경은 짐승의 잔뼈와 생선의 뼈를 의미하는 말인데, 이것들은 뻣뻣하여 목에 잘 넘어가지 않으므로, 임금이 거북해하는 직간도 꺼리지 않는 강직한 신하를 비유하여 ‘골경의 신하’라고 한다.[주-D010] 행보가 또 다시 막혔으나 : 1689년(숙종15) 기사사화에 송시열이 제주도에 유배되자, 한성우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일을 가리킨다. 《寒水齋集 卷25 參判韓公聖佑神道碑銘并序》[주-D011] 음과 …… 즈음에 : 양이 자라면 음이 사라지고 음이 자라면 양이 사라지는 것이 음양이 소장(消長)하는 이치인데, 여기에서는 음이 자라나 양이 사라짐에 의미를 두고 한 말로서, 당시 당쟁에서 서인이 실권하고 남인이 집권했을 때를 가리킨 것이다.[주-D012] 그러다 …… 도왔네 : 1694년(숙종20)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등용되었으며, 한성우는 소명을 받아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사명(詞命)은 외교문서나 임금의 글을 가리키니, 한성우가 홍문관 관직에 임명되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주-D013] 좋은 …… 적셔주니 : 원문의 ‘옥심(沃心)’은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인도하여 보좌하는 것을 말한다. 고종(高宗)이 재상 부열(傅說)에게 “그대 마음속의 물줄기를 터서 나의 마음속으로 흘려보내 적시도록 하라.〔啓乃心, 沃朕心.〕”고 부탁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書經 商書 說命上》[주-D014] 병폐를 …… 제거하며 : 1701년(숙종40)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궁가에서 점유한 산택이 수십 군데에 이르러 그 폐단이 심하였으므로 장계를 올려 혁파하기를 청한 일 등이 있다.[주-D015] 억울한 …… 것이었다네 : 1708년(숙종34)에 이동언(李東彦)이 불효의 죄를 얻어 옥에 갇혀 있었는데 한성우가 동지의금부사로 상소하여 그를 대변해주었다. 이동언은 대간활동을 활발히 하여 남의 미움을 많이 샀었는데, 당시 조태억의 모함으로 투옥되었던 것이었다. 한성우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석방되지 못해 옥사하였다. 이듬해 이재(李縡)의 상소로 이동언이 신원되자 사람들은 한성우의 상소가 장본이었다고 말하였다. 한성우는 이 일로 1년이 넘도록 벼슬길이 막혔다. 《肅宗實錄 34年 閏3月 19日》 《寒水齋集 卷25 參判韓公聖佑神道碑銘并序》
- 2023-12-04 | NO.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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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깨비 둠벙
- 광주광역시 광산구 안청동 안청마을의 둠벙에는 도깨비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물고기가 둠벙에 많이 살아서 마을 사람들이 물을 퍼냈지만, 물고기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고, 밤이 되면 주변에 도깨비불이 자주 나타난다는 이야기이다.광주광역시 광산구 안청동 안청마을에 거주하는 제보자 박열규의 이야기를 1989년에 채록해서, 1990년 광주직할시가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하였다.안청마을에는 도깨비 둠벙이 있는데 농지 정리를 하면서 사라졌다. 도깨비 둠벙에는 물고기가 많았다. 마을 사람들이 물고기를 잡으려고 둠벙의 물을 다 퍼냈는데, 물고기가 한 마리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실망하고 집으로 돌아가다 보면, 들판에 물고기들이 널려 있었다. 도깨비가 마을 사람들에게 물고기를 주지 않으려고 장난을 친 것이었다. 어느 날 낚시꾼들이 도깨비 둠벙에 와서 물고기를 잡았다. 투망을 던지니 큰 붕어며 잉어, 가물치 등이 잡혔다. 욕심이 생긴 낚시꾼들이 발동기를 가져와서 도깨비 둠벙의 물을 퍼내기 시작하였다. 물이 워낙 많아서 퍼내는시간이 오래 걸렸다. 낚시꾼 중의 한 사람이 기다리다 못해 둠벙에 들어가서 고기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물에 들어간 사람은 추운 겨울 얼음물에 죽을 뻔했고, 사람들의 도움으로 겨우 구조되었다. 낚시꾼들은 발동기를 놓아두고 돌아갔다. 저녁이 되니 둠벙 근처에서 밝은 불이 번쩍번쩍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누가 와서 발동기를 훔쳐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마을 사람들은 날이 밝자 발동기를 확인하러 갔다. 그런데 발동기는 그대로 있었고, 사람들이 다녀간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어젯밤에 본 불빛이 도깨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전에 마을 사람들은 도깨비 둠벙에서 물고기를 잡을 때는 백마를 끌고 가서 매어 놓았다. 도깨비가 자주 나와서 마을 사람들에게 장난을 쳐서 물고기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런데 백마는 도깨비와 상극이다. 백마를 매어 놓으면 물고기가 잘 잡혔다고 한다.「도깨비 둠벙」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안청동 안청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도깨비 이야기이다. 도깨비는 물가와 둠벙에 자주 나타난다. 도깨비는 물고기에 욕심이 많아서 간혹 사람들이 물고기를 잡으려면 장난을 친다. 물고기로 장난을 치는 도깨비 이야기는 육지와 해안가 등에서 자주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도깨비 둠벙」도 이러한 도깨비 이야기의 한 종류이다.청마을 사람들은 도깨비가 자주 나타나는 둠벙에서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으며, 과거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도깨비 둠벙’이라는 지명을 붙였다. [참고문헌]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2023-11-10 | NO.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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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깨비 정체
- 광주광역시 여러 곳에서 전해 내려오는 도깨비의 정체에 관한 이야기. 도깨비는 괴이한 재주와 강한 힘으로 사람을 홀리거나 괴롭히기도 하지만, 인간에게 물고기를 몰아 주거나 부자로 만들어 주는 등의 도움을 주기도 한다. 주로 밤에 활동하는 도깨비를 낮에 보면 본래의 정체가 밝혀지는데, 대체로 빗자루 몽둥이나 나무막대기, 부지깽이 등이라는 이야기이다. 2018년 광주광역시 동구 지원동에 거주하는 주민 이정애, 광산구 본덕동에 거주하는 주민 류임, 북구 생용동에 거주하는 주민 서판순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수록되었다.도깨비불은 빗자루처럼 길다. 옛날에 도깨비를 묶어 놓았다가 아침에 가서 보면 대빗자루였다. 도깨비불은 비가 오려고 할 때 사방에 나타나서 왔다갔다한다. 지금은 도깨비불을 볼 수 없다. 어떤 사람이 밤 동안 도깨비에게 홀려 다니다가 나무에 도깨비를 묶어 놓았다. 그다음날 가 보니 나무막대기였다. 막대기 이외에도 부지깽이나 낡은 빗자루가 도깨비의 정체이다. 지금 세대는 도깨비를 보지 못하지만 더 윗세대 사람들은 도깨비를 보았다. 도깨비는 다리가 없고 도깨비불만 왔다갔다한다. 밤에 술을 마시고 집에 오다 보면 도깨비가 씨름을 하자고 한다. 도깨비와 씨름을 하고 나무에 묶어 두고 다음날 가 보면 불에 탄 방앗공이나 빗자루 몽둥이가 있다. 그러한 물건에 도깨비가 붙는다.「도깨비의 정체」의 주요 모티프는 ‘도깨비를 본 경험담’과 ‘도깨비의 정체’이다. 도깨비는 조선시대 야담집 등의 문헌기록에도 등장하지만, 현대 이야기판에서도 여전히 등장하고 있다. 특히 도깨비는 직접 보았다거나 만나서 씨름을 했다거나 혹은 주변의 아는 사람[아버지, 할아버지 등]이 직접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등의 경험담의 형태로 전승되고 있다. 제보자들이 도깨비를 직접 보지 못하였지만, 도깨비의 정체가 무엇이고, 도깨비가 언제 나타나는지 등의 단편적인 이야기를 한다. [참고문헌] 장덕순, 『구비문학개설』(일조각, 1971)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1-2(국립민속박물관, 2012)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2023-11-10 | NO.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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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깨비가 망쳐 놓은 물고기
-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도깨비에 관한 이야기. 바닷가에서 만난 도깨비가 고기를 달라며 쫓아왔다는 경험담이다. 2018년 3월 23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에 거주하는 주민 최정백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수록되었다.제보자 최정백이 전라남도 무안에 살던 총각 시절, 밤에 바다에서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숭어를 한 열 마리 잡아서 집에 돌아오고 있었는데, 갯벌에서 "뻥뻥뻥" 하고 무언가 빠지는 소리가 났다. 제보자는 "뻥뻥뻥" 하는 소리가 계속 따라오자 무서움을 느꼈다. 그 소리는 도깨비가 고기를 달라며 쫓아오며 내는 소리였다. 집에 돌아와서 보니 도깨비가 물고기를 칼로 다 헤집어 망쳐 놓았다. 도깨비에게 물고기 몇 마리를 주었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인데, 물고기를 주지 않으니 다른 곳에 팔지도 못하게 해 놓은 것이다. 「도깨비가 망쳐 놓은 물고기」의 주요 모티프는 ‘도깨비가 쫓아온 경험’이다. 도깨비담은 하위 유형 중 경험담의 비중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해안 지역에서 채록된 경험담에서는 밤에 고기를 잡는 중에 도깨비가 고기를 달라며 쫓아온 경험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다. 도깨비불이 쫓아왔다거나 도깨비가 "뻥뻥뻥" 하고 쫓아왔다는 경험이다. 그리고 도깨비에게 고기를 주면 무사히 돌아올 수 있고, 고기를 주지 않으면 병에 걸리거나 고기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도깨비와의 씨름 등 대결을 하게 된다. 도깨비의 발자국 소리라고 여겼던 "뻥뻥뻥" 하는 소리는 갯벌에서 물이 빠지는 소리를 착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장덕순, 『구비문학개설』(일조각, 1971)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1-2(국립민속박물관, 2012)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2023-11-10 | NO.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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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깨비불
- 광주광역시에서 전해 오는 도깨비불에 관한 이야기.제보자가 도깨비불을 직접 보았다는 경험담이다. 예전에는 도깨비불이 많이 보였는데, 지금은 안 보인다고 한다.2018년 광주광역시 남구 양과동에 거주하는 제보자 윤정이에게 채록하여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수록하였다.제보자가 시집와서 집 마루에 앉아 산을 보면 시퍼런 불을 많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불을 '호랑이'라고도 하고 '도깨비불'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예전에 지금은 돌아가신 어떤 사람이 밤에 돼지고기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갑자기 앞이 캄캄해져서 돼지고기를 던져 버리고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에 그곳에 가 보니 고기가 그대로 있었다. 「도깨비불」의 주요 모티프는 ‘도깨비불을 본 경험’이다. 도깨비불을 봤다는 이야기는 도깨비를 만난 경험보다 더 많이 채록된다. 그러나 도깨비불 이야기는 서사구조를 갖추고 있기보다는 단편적인 언급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참고문헌] 장덕순, 『구비문학개설』(일조각, 1971)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1-2(국립민속박물관, 2012)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2023-11-10 | NO.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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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깨비와 씨름
- 광주광역시에서 전해 내려오는 도깨비와 씨름한 경험에 관한 이야기.도깨비와의 씨름에서 이겨서 도깨비를 묶어 놓고 집에 왔는데, 다음 날 가 보니 빗자루가 묶여 있었다는 경험담이다.2018년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에 거주하는 최정백, 남구 원산동에 거주하는 최찬, 광산구 본량동에 거주하는 오성교, 광산구 본량동에 거주하는 나종철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채록 당시 제보자들이 구연한 도깨비와 씨름을 한 이야기는 조금씩 다르다. 마을의 할아버지가 시장에 다녀오고 있었다. 술에 많이 취한 채 밤길을 걸어오는데, 도깨비가 나타나 씨름을 하자고 하였다. 도깨비와 씨름을 하였으나 결국 졌다. 씨름에 져서 오도 가도 못하다가 아침에 깨어나 보니 옆에 빗자루 몽둥이가 있었다. 제보자의 조카가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던 중에 도깨비와 씨름을 하였다. 결국은 도깨비를 이겨서 꽉 묶어 놓고 다음 날 아침에 가서 보니 빗자루였다. 젊고 힘이 좋아야 도깨비를 이기고, 도깨비를 못 이기면 죽는다고 한다. 제보자의 외할아버지가 장동에서 당산고개를 술에 취한 채 넘어오던 중에 도깨비와 씨름을 하였다. 어두운 밤이라 도깨비인 줄 몰랐는데, 아침에 일어나 가 보니 빗자루 몽둥이였다. 약 60년 전 제보자의 친구가 송정리 시장에서 돼지고기를 사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어두운 밤에 술에 취해 제방 둑길을 따라 걷고 있는데, 도깨비불이 나타났다. 도깨비불은 제보자의 친구에게 씨름을 하자고 하였다. 술에 취한 와중에 도깨비와 씨름을 할 때 왼다리를 걸면 이긴다는 어른들의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도깨비의 왼다리를 걸어 씨름에서 이겼고, 말밥풀로 도깨비를 감아서 묶어 놓았다. 아침에 가서 보니 들고 오던 돼지고기는 사라지고 빗자루 몽둥이가 길가에 묶여 있었다.「도깨비와 씨름」의 주요 모티프는 ‘도깨비와 씨름하기’이다. 도깨비와 씨름하기에서 주인공은 공통적인 조건을 갖고 있다. 주인공이 밤에 혼자 술에 취해 가던 중에 도깨비를 만나 씨름을 하고 이겨서 도깨비를 묶어 둔다. 그리고 다음 날 도깨비의 정체를 확인하게 된다. 도깨비와 인간의 대결 구도에서 인간은 대체로 승리한다. 그런데 도깨비와의 대결에서 패배를 하면 도깨비에게 홀려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주위를 빙빙 돌고 있거나 얼마 후 병이 들거나 죽게 된다. 주인공인 제보자 혹은 제보자의 지인과 같은 실존 인물과 도깨비라는 허구적 존재의 만남으로 인해 실제와 허구의 경계를 분간하기 어렵게 되면서 서사적 긴장감과 함께 흥미를 끌어내는 이야기이다.[참고문헌] 장덕순, 『구비문학개설』(일조각, 1971)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1-2(국립민속박물관, 2012)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2023-11-10 | NO.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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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래산의 유래
- 광주광역시 광산구 평동의 도래산의 지명전설이다. 비가 오던 날, 산고개를 넘던 오누이 중 남동생이 누이에게 성욕을 느껴 자신의 성기를 때리다가 죽었다. 그걸 본 누이가 "차라리 도라고나[달라고나] 해 보지"라고 해서 도래산이 되었다.2000년 8월 24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평동 용곡마을에 거주하는 황문애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2000년에 광주민속박물관에서 간행한 『광주의 설화』에 수록되었다.광주광역시에서 나주 남평으로 가는 길목에 도래산이라는 작은 산이 있다. 어느 날 인근 마을의 누이와 남동생이 산으로 도라지와 나물을 캐러 갔다. 한참을 캐다가 소나기가 내려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오누이는 비에 옷이 젖은 채 누이가 앞서고 동생이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뒤따라가던 동생이 옷이 젖은 누이를 보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천천히 걸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그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동생은 마음의 갈등을 느끼다가 결국은 자신의 성기를 돌로 때리다가 죽고 말았다. 한참을 지나도 동생이 따라오지 않자, 누이가 동생을 찾기 시작했다. 죽은 동생을 발견한 누이가 "차라리 도라고나[달라고나] 해 보고 죽지"라고 통곡하였다. 이러한 사연 때문에 도래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도래산의 유래」의 주요 모티프는 ‘근친상간의 금기’이다. 모티프를 가진 설화는 「달래강전설」이나 「달래고개전설」 등으로 광포전설이다. 이러한 전설은 ‘남자 형제의 성 충동과 죽음’이라는 사건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이러한 모티프는 누나와 남동생, 오빠와 여동생 등의 변이와 장소의 변이 등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이 벌어진 곳의 지명이 ‘달래강’이나 ‘달래고개’, ‘도래산’ 등으로 동생을 발견한 누이의 말인 "달라고나 해 보지"와 관련하여 생긴다. 누이의 마지막 외침에서 본능적 충동과 윤리적 규범 사이의 갈등과 생명의 중요성을 살펴볼 수 있다.[참고문헌] 『광주의 설화』(광주민속박물관, 2000)『한국민속문학사전』(국립민속박물관, 2017)[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2023-11-10 | NO.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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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적을 잡은 칠석동 당산나무
- 「도적을 잡은 칠석동 당산나무」는 광주광역시 남구 칠석마을에 있는 당산나무와 그 나무를 지나다가 봉변을 당한 도적에 관한 이야기이다. 광주광역시 남구 칠석마을에서 이인식의 이야기를 채록하였고, 1990년 광주직할시에서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되었다.옷돌[칠석]마을은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소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와우상 형상이어서 터가 거세다고 한다.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그 터의 거센 기운을 누르기 위해서 매년 정월에 당산제를 하고, 마당밟이 굿을 치며 고싸움 놀이를 했다. 칠석마을의 당산제는 마을 위 할아버지당인 소나무와 마을 앞 할머니당인 은행나무에서 지냈다. 할아버지당은 술도 안 마시고 비린 것도 먹지 않아 무나물과 미역국, 냉수로만 제사를 지냈다. 반면에 할머니당은 술과 고기를 다 잘 먹어서 푸짐하게 장만하여 정성껏 지냈다.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당산제를 정성껏 지내고 있다. 어느 해의 당산제에서는 세 사람이 색깔 있는 잉크를 가져와 주변에 뿌렸다고 한다. 그때 붉은 잉크를 뿌린 사람은 집에 불이 나서 망하고, 파란 잉크를 뿌린 사람은 목수가 사용하는 옥자귀에 찍혀 불구가 되었으며, 또 다른 사람은 아버지가 정신이상자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아이들 셋이 당산나무에 올라가 똥을 싸다가 가지가 부러져 두 명이 죽고, 한 명이 상처를 입기도 했다. 옛날에는 마을에서 도적질을 하고 당산나무 앞을 지나가던 도적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날이 밝을 때까지 당산나무에게 붙잡혀 있었다는 전설도 있다「도적을 잡은 칠석동 당산나무」의 주요 모티프는 '당산나무의 영험성'이다. 칠석마을은 죽령산 아래의 평야 지대에 있다. 그러나 풍수지리에 따르면 소가 누워 있는 형국으로 그 터의 기운이 드셌기 때문에 이 소를 잡아두기 위해 은행나무를 심었다는 설이 있다. 마을 사람들은 당산나무인 은행나무에 정월 대보름마다 제를 지냈다. 마을 최대 행사인 고싸움놀이를 하기 전에도 고를 들고 당산나무 둘레를 도는 등 마을 사람들은 당산나무를 신성하게 여긴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화를 당하는 모습을 통해 마을 사람들은 당산나무의 영험성을 믿고 당산나무에 대한 경외심을 가진다. [참고문헌]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2023-11-10 | NO.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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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천동 참샘과 비석등에 대한 지명 전설
- 광주광역시 광산구 도천동 참샘의 전승 이야기와 비석등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이다.광주광역시 광산구 하남동의 제보자 김채균의 이야기를 1989년 채록한 것으로, 1990년 광주직할시가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하였다.광주광역시 광산구 도천동 도촌마을은 광산김씨, 순천박씨, 장흥고씨가 주류를 이루며 살아왔다. 옛날에 박씨들이 몇 집 모여 살고 있는 곳에 풍양조씨 댁 부인이 산고가 들었다. 풍양조씨 댁 부인은 마을에서 제일 덕이 있는 안청공의 집에 가서 아들을 낳았다. 풍양조씨 집안은 아들을 낳은 기념으로 큰 잔치를 베풀었다. 마을 인근의 관리들이 아들 출산을 축하하기 위해서 마을에 모였다. 도촌마을에는 물이 마르지 않은 참샘이 있었는데, 잔치에 온 많은 사람들을 대접하느라 참샘이 말라 버렸다. 풍양조씨 5대손 조군헌이라는 사람이 광주목사가 되었다. 조군헌은 할아버지의 태 자리에 비석을 세웠고, 많은 사람들이 조군헌의 출세를 축하하기 위해서 마을을 찾았다. 이때에도 마을의 참샘이 말라 버렸다. 조군헌 할아버지의 비석이 세워진 곳을 비석등이라고 불렀다. 「도촌동 비석등」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도천동 도촌마을관련항목 보기 비석등의 지명 유래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도촌마을이 형성된 유래를 짧게 소개하고 있으며, 마을에서 출세한 사람이 자신의 가문을 높이기 위해서 세운 비석 때문에 비석등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참고문헌]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2023-11-10 | NO.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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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강유집 제10권 / 서(序)- 《고갑신편》의 서문〔蠱甲新編序〕
- 동강유집 제10권 / 서(序)- 《고갑신편》의 서문〔蠱甲新編序〕신익전《주역》 〈고괘(蠱卦)〉 효사(爻辭)에 ‘선갑삼일 후갑삼일(先甲三日, 後甲三日)’이라고 하였는데, 고(蠱)는 일이고, 갑(甲)은 때이니, 앞의 3일은 시작하는 것이고 뒤의 3일은 마치는 것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번번이 일을 만나는데 일은 천만 가지가 있다. 평상시에나 변화를 만났을 때나 그 중도를 지킬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성현도 어렵게 여기신 것인데 하물며 난세의 끝에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어떠하겠는가. 제갈무후(諸葛武侯 제갈량)는 왕좌(王佐)의 재주를 가진 사람이다. 주군에게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 일입니다.〔難平者事也〕”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선갑삼일 후갑삼일’의 은미한 뜻을 알았던 것이 아니겠는가.내가 태어난 지 겨우 43년인데, 참으로 천지가 뒤바뀐 때를 만나 내우외환(內憂外患)을 겪느라 전후로 근 천년 동안 만나기 어려운 일이 모두 목전에 모여 어떻게 해결할 방도가 없다. 이러한 때 나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야 할 책임이 어떠하겠는가. 하지만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뜻이 약해져 마치 장님에게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으니 큰 길에서도 쉬이 길을 잃을 판인데 태항산(太行山) 험한 길에 수레가 부서진 이러한 상황에서야 어떠하겠는가.이 때문에 우울해서 누구와도 말을 나누지 않고, 그저 옛 책을 가져다 옛사람이 먼저 얻은 것을 찾았다. 그러나 주공(周公) 이후로 더 이상 선정이 없었고 사변이 일어나는 것은 후대로 내려올수록 더욱 심해져서, 무지한 나로서는 늦게 태어났다는 한탄만 더할 뿐이었다. 매번 책에서 위기를 볼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리지 않은 적이 없어서 마치 묵은 병을 가진 사람이 의서(醫書)를 보고 또 보고 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나는 본래 어리석어서 잘 기억하지 못한다. 방금 덮은 책도 읽지 않은 것 같을 정도이니, 마음에 드는 글을 볼 때마다 쪽지에 적어 잊어버릴 것에 대비한 지가 몇 년이나 되었다.아들 정(晸)이 옆에 있다가 깨끗이 써서 책으로 엮을 것을 청하고 또 표제를 써 달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고갑신편(蠱甲新編)’이라고 제목을 달았으니 고괘(蠱卦)의 뜻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기록한 것은 모두 전국 시대 칠웅(七雄) 이후 쇠퇴한 말세의 문헌이니 고(蠱)를 만나 고괘의 도에 어긋나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나 10월은 모두 음효(陰爻)인데 선유들이 도리어 양월(陽月)이라고 부른 것은 양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표제를 지은 의도는 음(陰)을 억제하는 뜻을 담은 것이고 또 일을 다스리기 어려움이 이와 같다는 것을 보여 스스로 힘쓰고자 한 것이다. 뒤에 보는 사람들이 나의 이 뜻을 참람하게 여기지 않고 안타깝게 여겨줄지 모르겠다.정해년(1647, 인조25) 겨울, 일헌도인(一軒道人)은 광산(光山)에서 이 글을 쓴다.[주-D001] 고갑신편의 서문 : 1647년(인조25), 저자 나이 43세에 쓴 글이다. 이때 저자는 광주 목사(光州牧使)를 지내고 있었다.[주-D002] 다스리기 …… 일입니다 : 제갈량(諸葛亮)의 〈출사표(出師表)〉에 나오는 말이다.[주-D003] 태항산(太行山) …… 부서진 : 태항산은 중국 하남성(河南省)에 있는 산으로 매우 험준하기로 유명하다. 백낙천(白樂天)의 〈태항로(太行路)〉란 시에, “태항산 길이 능히 수레를 부수지만 임금의 마음에 비긴다면 평탄한 길이요, 무협의 물이 능히 배를 전복시키지만 임금의 마음에 비긴다면 안온한 흐름이다.〔太行之路能摧車, 若比君心是坦途. 巫峽之水能覆舟, 若比君心是安流.〕” 하였다.
- 2023-12-04 | NO.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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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강유집 제12권 / 제문(祭文)- 청음 김상헌 선생에 대한 제문〔祭淸陰金先生文〕
- 동강유집 제12권 / 제문(祭文)- 청음 김 선생에 대한 제문〔祭淸陰金先生文〕아, 하늘은 우리 선생을 석과(碩果)로 인정하였건만 어찌하여 선생(金尙憲, 1570~1652)께선 갑자기 이 세상을 헌신짝처럼 버리셨습니까. 선생의 절의와 문장은 이미 온 천하를 진동시키고 역사에 빛나기에 충분하니 지난날 선생을 시기하여 모함하던 자들도 장차 이마에 땀이 흐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는 선생을 조금 안다고 말하는 자들이 필시 적지 않겠지만, 천하를 진동시키고 역사에 빛날 선생의 절의와 문장이 실로 근본이 있음을 살핀 자들이야 얼마나 되겠습니까.제가 비록 보잘것없는 몸이지만 일찍이 선친께서 남기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선친께선 평소 항상 선생을 언급하시면서 꼭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습니다.“그 사람의 뛰어난 절의는 어린 임금을 맡길 만하고, 그의 문장은 나라를 빛내고 훌륭한 문장가의 뒤를 잇기에 충분하다. 이는 본래 빼어난 기운을 타고난 것이지만 학문으로 터득한 것이 많았다.”아직도 귀에 쟁쟁한 그 말씀을 저는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그런 선생께서 이제 끝나고 말았습니다. 선친의 막역지우도 소자가 믿고 의지하던 분도 모두 하루아침에 잃고 말았으니, 갈 길을 잃고 헤매는 이 몸은 장차 누구를 의지한단 말입니까.선생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엔 단지 조정의 석과였을 뿐만 아니라 실로 선친의 벗 가운데서도 석과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헌신짝처럼 세상을 버리고 아득히 날아가는 새를 타고 돌아보지 않으시니, 이제부터 우리 양가 자손들이 아버지와 스승을 사모하는 마음을 붙일 곳은 오직 우리 선친이 선생께 준 서문 두 편, 선생께서 써주신 선친의 행장과 문집 서문, 두 분이 평소 주고받으신 시편 등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아, 슬픕니다.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단련할수록 순정해지는 것은 좋은 금이고, 태울수록 향이 짙어지는 것은 향기로운 난초이다.”그러나 역경을 만날수록 더욱 빛나는 선생의 도는 금이나 난초에 비할 바가 아니니, 천하를 진동시키고 역사에 빛날 선생의 절의와 문장은 마땅히 먼 훗날까지 길이 전해질 것입니다. 아, 슬픕니다.선생께서 심양(瀋陽)에 들어가 계실 때 저도 뒤따르게 되었는데, 그때 본 선생의 안색과 음성은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습니다. 선생께서 고국으로 돌아오신 뒤에 제가 석실(石室)에서 뵈었고, 또 서울 집에서도 뵈었는데, 그때의 안색과 음성이 심양 객관에 계실 때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를 보고난 뒤에야 저는 선생의 절의와 문장이 모두 근본이 있고 괜히 그런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 슬픕니다.을유년(1645, 인조23) 겨울에 제가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나갈 때엔 선생께서 율시 한 수를 지어 주시고, 또 소서(小序)를 지어 아픈 사람 보살피듯 백성을 살피라는 뜻으로 격려하셨습니다. 지난 가을 제가 송도 유수(松都留守)에 제수되어 선생께 하직 인사 올리러 찾아뵈었을 때 선생께선 병석에 계셨습니다. 제 손을 잡고서,“이번에 헤어지는 것이 영원한 이별이겠구나.”라고 슬프게 말씀하시면서 선친과 돈독했던 교분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셨습니다. 아! 슬픕니다. 그 때가 얼마나 지났기에 더 이상 조정과 선친의 벗 사이에서 선생을 볼 수 없단 말입니까. 더구나 지금 내가 온 것이 사(賜)보다 늦어서 선생의 장례에 상엿줄도 잡지 못하여 뒤늦게 궤연(几筵)에 제물을 올리니, 스승을 잃고 헤매는 소자의 슬픔이 어찌 심하지 않겠습니까. 아, 슬픕니다.[주-D001] 청음 …… 제문 : 이 글은 1652년 6월 25일 세상을 떠난 김상헌(金尙憲, 1570~1652)에 대한 제문이다. 김상헌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ㆍ석실산인(石室山人)ㆍ서간노인(西磵老人)이다. 1596년(선조29)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 육조의 판서,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주-D002] 석과(碩果) : 과일 나무 높은 가지 끝에 달려 있어 사람들이 따 먹지 못하는 한 개 남은 큰 과일을 말하는데, 종자가 되어 다시 훗날을 기약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어지러운 세상에서도 큰 덕을 지닌 채 소인들에게 해를 당하지 않고 있는 군자를 지칭한다. 《주역》 〈박괘(剝卦) 상구(上九)〉 효사(爻辭)의 ‘큰 과일은 먹지 않는다.〔碩果不食〕’는 것은 음(陰)이 아무리 치성해도 양(陽)이 없어지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주-D003] 우리 …… 서문 : 한국문집총간 71집에 수록된 《상촌고(象村稿)》에 저자의 부친이 쓴 〈송김교리상헌이안무어사부제주서(送金校理尙憲以按撫御史赴濟州序)〉와 〈송김판관상헌부경성서(送金判官尙憲赴鏡城序)〉 및 청음 김상헌이 쓴 〈상촌선생집서(象村先生集序)〉와 〈행장(行狀)〉이 실려 있다.[주-D004] 선생께서 …… 되었는데 : 김상헌은 청나라의 출병 요구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1940년(인조18)에 청나라에 압송되었고, 저자는 1642년에 명나라를 지지하고 청나라를 배척하였다는 일로 심양으로 압송되었다.[주-D005] 석실(石室) : 양주(楊州) 동쪽에 있는 산 이름인데, 김상헌이 이곳에서 은거하며 석실산인(石室山人)이라는 자호(自號)를 쓰기도 하였다.[주-D006] 사(賜)보다 : 사는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다. 자공은 공자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왔는데, 저자는 청음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에 찾아왔다는 말이다. 공자가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에 아침 일찍 일어나서 뒷짐을 진 채 지팡이를 끌고 문에서 소요하며 위인의 죽음을 노래하자, 자공이 그 노래를 듣고 탄식하면서 달려가니, 공자가 “사야,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더디게 오느냐.”라고 하며 자신이 죽을 것을 예견했다는 고사가 있다. 《禮記 檀弓上》
- 2023-12-04 | NO.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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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강유집 제19권 / 부록 3(附錄三) -만사〔挽詞〕 전 승지 [정두경(鄭斗卿)]
- 동강유집 제19권 / 부록 3(附錄三) -만사〔挽詞〕 전 승지 [정두경(鄭斗卿)]서석산 앞에서 호부를 가르고 / 瑞石山前剖虎符다시 부절 잡고 송도를 다스렸네 / 更持節鉞鎭松都예조 참판은 낮은 벼슬 아니고 / 宗伯亞卿官不賤도승지는 특별한 은총이었네 / 銀臺知事寵仍殊돌아가신 정승 이어 가문 명성을 지켰고 / 家聲已繼先丞相뒷일은 다시 다섯 아들에게 맡겼네 / 後事還傳五丈夫한마을 살던 나는 그대를 아우로 대했는데 / 同里故人曾弟畜무덤으로 전송하니 눈물을 참지 못하겠네 / 不堪垂涕送黃壚[주-D001] 서석산 …… 가르고 : 서석산은 광주에 있는 산 이름이며 호부는 지방관의 부절이다. 이 구절은 저자가 1645년(인조23) 겨울 광주 목사(光州牧使)에 임명된 사실을 말한다.[주-D002] 다시 …… 다스렸네 : 저자가 1651년(효종2)과 1655년에 개성 유수에 임명된 사실을 말한다.
- 2023-12-04 | NO.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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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강유집 제19권 / 부록 3(附錄三)- 사제문〔賜祭文〕 [이유명(李惟明)]
- 동강유집 제19권 / 부록 3(附錄三)- 사제문〔賜祭文〕 [이유명(李惟明)]경자년(1660, 현종1) 5월 을묘삭(乙卯朔) 28일 임오일, 국왕은 신(臣) 예조 정랑 이유명(李惟明)을 보내 고(故) 상호군 신익전(申翊全)의 영전에 유제(諭祭)한다.경은 / 惟卿교목세가 출신으로 / 喬木世家옥 같은 사람이었네 / 其人如玉집안의 가르침 받아 / 服襲庭訓경학을 깊이 파고들었네 / 沈潛經學의지가 굳고 행실이 순수하여 / 志篤行純몸을 수양하고 덕을 함양하였네 / 澡身浴德여사로 문예에 노닐어 / 餘事游藝글씨로 칭송이 자자했네 / 譽洽文墨명망이 매우 높았는데 / 聲望藹蔚일찍 과거에 급제하여 / 早通桂籍옛적 선조(先朝 효종) 때부터 / 粤自先朝항상 성은을 입었네 / 常垂睿渥처음 예문관에 들어가 / 初登翰苑동호처럼 직필을 잡더니 / 狐筆秉直곧 사간원에 들어가서는 / 俄入薇垣약석 같은 충언을 올렸네 / 忠言藥石홍문관에서 문장을 짓고 / 玉署摛文사헌부에서 직언하며 / 烏臺謇諤원묘의 일을 주관하고 / 董事園墓나라의 책문을 썼네 / 揮翰寶冊그동안 가자받은 것은 / 前後恩資실로 성상의 총애에서 나왔다네 / 實出寵擢영남과 호남의 수령이 되어서는 / 分憂二南모두 명성과 치적이 있었고 / 皆有聲績개성 유수로 재직할 때는 / 居留舊都청백리로 칭송이 자자했네 / 頌騰淸白오조의 참판을 지낼 적에는 / 貳卿五曹문앞에 청탁이 끊어졌네 / 門絶請托한성부 좌윤과 우윤을 지내자 / 亞尹三輔백성이 은택을 구가하였네 / 民歌遺澤몇 번이나 도승지에 올라 / 幾長銀臺출납의 직무를 잘 수행했던가 / 出納稱職왕실과 혼인을 맺어 / 姻聯宮掖기쁨과 슬픔 함께 하였네 / 義同休戚내외의 관직을 두루 거치며 / 歷試外內마음과 힘을 다하였네 / 殫竭心力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 終始如一조심하면서도 편안하였네 / 畏愼恬泊영욕과 희비에 관계 없이 / 榮辱喜戚평소의 지조를 바꾸지 않았네 / 素操不易어진 이는 장수해야 하는데 / 仁宜有壽하늘은 어찌 빨리 빼앗아갔나 / 胡奪之速목가의 재앙이 심하니 / 災深木稼나의 서러움 끝이 있으랴 / 予慟何極경이 죽어 한스럽지만 / 云亡有恨구천에서 살려낼 길 없구나 / 九原難作이에 담당 관원을 보내어 / 茲遣有司변변찮은 제수를 올리노라 / 奠此菲薄아, 애통하다 / 嗚呼痛哉영령은 흠향하기 바라오 / 靈庶歆格[주-D001] 유제(諭祭) : 제왕이 예관(禮官)을 보내어 신하를 제사하는 것으로 치제(致祭)라고도 한다. 유제문(諭祭文)은 제문에 해당하는 문체이다.[주-D002] 교목세가(喬木世家) : 국가의 훈구대신 집안을 가리킨다. 교목은 높고 큰 나무로 고국이나 고리(故里)를 가리키고, 세가는 누대에 걸쳐 덕을 닦은 훈구(勳舊)의 가문을 뜻한다. 《孟子 梁惠王下》[주-D003] 몸을 …… 함양하였네 : 심신을 수양하여 고결하게 하는 것이다. 《예기》에 “선비는 몸을 씻어 정결히 하고 덕에 목욕한다.〔儒有澡身而浴德〕” 하였는데, 공영달(孔穎達)의 소(疏)에 “조신(澡身)은 그 몸을 씻어 깨끗하게 하여 혼탁한 데 물들지 않게 하는 것이고, 욕덕(浴德)은 덕에 목욕하여 덕으로 스스로 맑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禮記 儒行》[주-D004] 동호(董狐)처럼 직필을 잡더니 : 사관으로서 사실을 기록하는 데 꺼리거나 숨김이 없었다는 뜻이다. 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사관 동호가 역사서에 직서하였는데, 공자가 “동호는 옛날의 훌륭한 사관이다. 필법에 숨김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宣公2年》[주-D005] 원묘의 일을 주관하고 : 저자는 1645년(인조23)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서거하자 묘소도감 도청(墓所都監都廳)에 차임되었다. 《東江遺集 卷17 附錄1 家狀》[주-D006] 나라의 책문을 썼네 : 저자는 1649년(인조27)에 세손교명문(世孫敎命文)을 썼고, 인조가 승하하자 시책문(諡冊文)을 썼으며, 1659년(효종10)에 효종이 승하하자 애책문(哀冊文)을 썼다. 《東江遺集 卷17 附錄1 家狀》[주-D007] 영남과 …… 되어서는 : 저자가 광주 목사(光州牧使)와 밀양 부사(密陽府使)를 역임한 일을 가리킨다. 《東江遺集 卷17 附錄1 家狀》[주-D008] 왕실과 혼인을 맺어 : 신익전의 둘째 딸이 왕자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에게 출가했다. 《東江遺集 卷17 附錄1 家狀》[주-D009] 목가(木稼) : 현달한 관원의 죽음을 가리킨다. 목가는 비, 눈, 서리, 안개가 나무에 붙어 있다가 추위에 응결되어 얼어붙는 것으로, 이런 현상이 발생하면 고관이 죽는다는 속설이 있다. 《舊唐書 卷95 睿宗諸子列傳 讓皇帝憲》
- 2023-12-04 | NO.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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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강유집 제19권 / 부록 3(附錄三)- 제문〔祭文〕 [박세채(朴世采)]
- 동강유집 제19권 / 부록 3(附錄三)- 제문〔祭文〕 [박세채(朴世采)]무신년(1668, 현종9) 8월 정묘삭 11일 정축일, 외숙 동강(東江) 신공(申公)을 장차 양주(楊州)에서 충주(忠州)로 이장하게 되었습니다. 조카 반남(潘南) 박세채(朴世采)는 마침 병으로 체류하느라 삼가 아들 태은(泰殷)을 보내어 영전에 술과 과일을 대신 올리게 하고 제문을 지어 흠향하시길 권합니다.아 / 嗚呼고려의 국운이 열리려 하자 / 麗運方始태사가 우뚝 일어났는데 / 太師崛起그 충성스러운 절개는 / 厥有忠烈한나라의 기신 같았네 / 若漢之紀천년 뒤에 나란히 우뚝 솟은 / 千載竝峙문정공이 있었으니 / 曰維文貞재주는 삼대에 견줄 만하고 / 材比三代문장은 양한을 계승하였네 / 辭纂二京당나라에는 장열과 육지가 있고 / 在唐張陸송나라에는 범중엄과 구양수가 있는데 / 在宋范歐이런 쌍벽을 낳았으니 / 乃生聯璧세상에 그 짝이 드물었다오 / 而世寡儔큰외삼촌은 우뚝하게 / 元舅卓卓현명하고 고매한 뜻과 절조 지녔다오 / 志節賢豪자질은 순수하고 소박하며 / 純素之質지조는 편안하고 차분했네 / 恬靜之操옷깃을 여미고 공을 높였으니 / 斂衽推公실제가 그러했다오 / 其實則然그리하여 이른 나이부터 / 爰自早歲아름다운 명성을 드러내었네 / 蓋著令聞집안에서 부친의 가르침을 받고 / 趨庭周召형제가 함께 자며 우애가 돈독했네 / 共床塤篪마침 혼란한 시대를 만나 / 適丁昏亂저 춘천으로 옮겨갔네 / 遷彼貊陲학문에 몸을 맡겼으니 / 委己于學사탕수수보다 좋아하였네 / 其嗜愈蔗문단에 발걸음을 내딛고 / 發軔詞苑방에서 휘장을 드리웠네 / 下帷子舍성상께서 반정하자 / 聖主龍興현신들이 그림자처럼 따랐는데 / 賢臣景隨당시 문정공께서는 / 維時文貞의정부에 들어가 보좌하였네 / 入贊黃扉새벽부터 저녁까지 돕자 / 晨昏之助중론이 기울었네 / 衆論以傾학궁에서 명망을 쌓았고 / 儒宮貯望과장에서 명성을 떨쳤네 / 禮闈蜚英얼마 뒤에 어버이를 여의고 / 俄驚風樹늦게서야 과거에 급제했네 / 晩登桂籍호란이 몹시 급박하여 / 胡塵孔棘천지가 뒤바뀌었네 / 天地辟易강화도에서 돌아와 / 歸來海島사관으로 역사를 기록했으며 / 載筆西廂사간원에서 벼슬하고 / 乃試薇垣옥당에 몸담았네 / 乃盛玉堂출세가도를 달리며 / 雲霄展步규벽이 가치를 인정받았네 / 圭璧滿價세상은 가시밭길 같아 / 世路如枳풍파가 갑자기 일어나서 / 風波忽駕거산도 찰방으로 좌천되니 / 邈爾居山철령의 모퉁이였네 / 鐵嶺之角정도를 잃지 않았는데 / 不失其正어찌 이런 참소를 당했는가 / 何有謠諑임오년(1642, 인조20)에는 / 歲在敦牂오랑캐의 앞잡이가 모함하여 / 羯虜搆禍동회공은 주모자가 되고 / 東淮爲首공도 공모자가 되어 / 公乃在左침침한 심양의 감옥에 / 沈沈燕獄초나라 죄수처럼 갇혔으나 / 纍纍楚囚엄혹한 위협에 떨지 않고 / 淫威罔慴변함없이 지조를 지켰네 / 素履無渝고국으로 돌아오자 / 迨返故國화려한 벼슬을 두루 거쳤네 / 徧歷華銜박태기나무 숲에 슬픔이 감도니 / 荊林纏慟벼슬하기 좋아하지 않았네 / 鵷班非耽서석산에 계실 때 생각하면 / 眷言瑞石실로 남쪽 지방 진무하였네 / 實鎭炎荒수령으로 부임할 때 / 雙旌出守행낭에는 거문고 하나였네 / 一琴行裝옛날에 이은이 있었는데 / 古稱吏隱아, 공을 두고 한 말이네 / 繄公自得조정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 還朝未幾작위가 여러 번 올라 / 王爵屢陟이미 도승지를 지내고 / 旣長銀臺이내 예조 참판에 올랐는데 / 旋貳南宮벌벌 떨며 두려워하여 / 凜然而懼밤낮으로 몸을 아끼지 않았네 / 夙夜匪躬다시 지방관이 되어서 / 再懷州章개성과 밀양으로 부임하였네 / 于崧于密소동파가 귀양 갔을 때와 같고 / 蘇翁類謫백거이처럼 굴하지 않았네 / 白傅非屈위태로운 때를 만나 / 時當臲卼온갖 변고가 일어나니 / 事有萬變형세는 가까워 혐의가 있고 / 勢嫌而邇처지는 장애가 겹쳤는데 / 跡礙而荐공은 일편단심 지켰으니 / 公秉寸心이때부터 더욱 굳건하였네 / 洎茲愈赬오직 삼가고 조심하여 / 惟恪惟愼두려워하거나 놀라지 않았네 / 不震不驚험한 곳도 평지처럼 여기니 / 處險若夷군자들이 훌륭하다 하였네 / 君子曰臧이후로 십 년 동안 / 由來十載비로소 앞길이 평탄하였네 / 始安周行매양 한직을 맡았고 / 每帶閑局여러 업무 도맡기도 했네 / 或綜庶務나아가나 물러가나 충성할 생각뿐 / 進退攸思어찌 궂은 일 마다하리오 / 燥濕寧顧남산에 집을 지었는데 / 築室南岳시내와 골짜기 그윽하였네 / 川谷窈窕이곳에서 읊조리며 / 歎詠於斯노년을 보내려 하였네 / 庶儗終老공은 효성스럽고 우애있으며 / 惟公孝友청렴결백을 겸하였네 / 濟以廉白문장은 진한을 모범 삼아 / 文軌秦漢조예가 해박하였으며 / 所造蓋博학문은 염락을 존숭하여 / 學尊濂洛그 뜻이 탁 트였네 / 其志可疏이밖의 모든 일은 / 是外萬事시덥지 않게 여겼네 / 視猶籧篨세상 사람들은 언변을 숭상했지만 / 時崇利口공은 침묵을 지켰고 / 公乃斂聲세상 사람들은 출세에 분주했지만 / 世奔要途공은 뒤로 물러섰네 / 公乃郤行묵묵히 마음을 보존하고 / 默默內存공손히 몸가짐을 지켰으니 / 恂恂外持벼슬은 설령 막히더라도 / 身名縱閼편안히 복록을 누려야 하니 / 福履宜綏이 미덕에 부응하여 / 謂膺此媺만수무강하리라 여겼네 / 黃髮無疆또한 문정공이 남기신 / 亦惟文貞상서가 끊이지 않았는데 / 不斬厥祥어찌 크게 어긋나서 / 云胡大謬한 번 병들자 위독해졌는가 / 一疾告谻병이 낫기를 기다렸는데 / 方俟勿藥갑자기 부고를 받게 되었네 / 遽傳易簀수명은 겨우 쉰을 넘겼고 / 壽才踰艾지위는 덕에 걸맞지 않았네 / 位不滿德풍류가 길이 묻혔고 / 風流長祕현인은 멀리 떠나셨네 / 文獻已逖아! 애통합니다 / 嗚呼痛哉아, 저 소자는 / 嗟我小子삶이 박복하고 비색하여 / 寔生多吝생전에 선대부를 뵙지 못했네 / 罔逮先故이내 재앙이 모여들어 / 乃鍾凶釁다섯 살에 모친을 여의고 / 五歲失母열네 살에 부친을 여의어 / 未童而孤이 세상 외로이 살며 / 惸惸斯世공의 도움에 의지하였네 / 賴公有扶비록 다시 잠깐 나와 / 雖復簡出공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 間廁門墻비루하다 여기지 않으시어 / 不謂卑鄙다행히 토론에 참여했지요 / 幸與商量시서를 읽으며 / 出入詩書고금을 오르내리고 / 沿泝古今수시로 영향을 받으며 / 時沾賸馥진심으로 감복했지요 / 敬服中心임종하시던 날에 / 啓手之日관 만드는 일을 주관했는데 / 匠事是敦가슴에 사무치는 아픔이 / 痛結于胸마치 어제 일 같습니다 / 怳隔前晨처음에는 병에 걸렸고 / 初遘疾病나중에는 상을 당하여 / 後値喪畏술 한 잔 올리며 영결했을 뿐 / 一觴永訣숙원을 풀지 못했지요 / 莫伸宿志지금 이장하게 되었는데 / 今當移宅훌쩍 십 년이 흘렀습니다 / 倏迫十朞중간에 거듭 화를 당했으니 / 中間荐禍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 熸矣何辭다시 이렇게 영락한 신세라 / 復此留落아들을 시켜 전을 올립니다 / 執奠以使혼백에게 지각이 있다면 / 精爽有知부디 제문을 살펴주소서 / 庶鑑哀誄아, 애통합니다 / 嗚呼痛哉흠향하소서 / 尙饗[주-D001] 태사(太師) : 신익전의 시조 신숭겸(申崇謙, ?~927)을 가리킨다. 994년(고려 성종13) 4월에 태사에 추증되어 태사 개국장절공(太師開國壯節公)으로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주-D002] 한나라의 기신 같았네 : 한 고조(漢高祖)가 형양(滎陽)에서 항우(項羽)에게 포위되자 기신(紀信)이 고조로 위장하고 초(楚)나라 군대에 투항하였는데, 고조는 그 틈을 이용하여 탈출하였다. 항우는 기신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고 그를 불태워 죽였다. 고려 태조가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甄萱)에게 포위당했을 때 신숭겸이 싸우다가 전사한 덕택에 태조가 위기에서 벗어난 일을 비유한 것이다. 《史記 卷7 項羽本紀》 《高麗史節要 卷1 太祖 10年》[주-D003] 문정공(文貞公) : 저자의 부친 신흠(申欽)의 시호이다.[주-D004] 이런 쌍벽(雙璧)을 낳았으니 : 원문의 연벽(聯璧)은 한 쌍의 아름다운 옥으로, 두 가지가 서로 필적할 정도로 훌륭함을 비유하는데, 연벽(連璧)과 같은 말이다. 쌍벽은 형제 또는 두 사람이 서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만큼 나란히 뛰어난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저자와 저자의 형 신익성(申翊聖)을 칭찬한 말이다. 《文心雕龍 時序》 《世說新語 容止》[주-D005] 큰외삼촌 : 신익성을 가리킨다. 신흠의 셋째 딸이 박의(朴漪)에게 출가하여 박세채를 낳았다. 신익성은 상촌의 큰아들이므로 박세채에게는 큰외삼촌이 된다. 《象村稿 附錄2上 神道碑銘》[주-D006] 저 춘천으로 옮겨갔네 : 1617년(광해군9) 1월, 저자의 부친 신흠이 춘천에 부처(付處)된 일을 가리킨다. 신흠은 선조로부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으로 지목되어 방귀전리(放歸田里)되었다가 1616년 9월에 양사(兩司)에서 한응인(韓應寅), 박동량(朴東亮), 서성(徐渻) 등과 함께 사흉(四凶)으로 지목되어 춘천에 부처되었다.[주-D007] 방에서 휘장을 드리웠네 : 학문에 전념하는 것을 말한다. 《사기(史記)》에 “동중서(董仲舒)는 휘장을 드리우고 강송하였는데, 수업할 때 제자들끼리 입문한 순서대로 서로 가르쳤으므로 어떤 제자는 스승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였다. 동중서는 3년 동안 집의 정원을 구경하지 않을 정도로 학문에 정진하였다.”라고 하였다. 《史記 卷121 儒林列傳 董仲舒》[주-D008] 의정부에 들어가 보좌하였네 : 1623년(인조1)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난 뒤 신흠은 이조 판서가 되었으며, 7월에는 우의정이 되었다.[주-D009] 규벽(圭璧)이 가치를 인정받았네 : 규벽은 고대에 제왕이나 제후가 제사를 지내거나 조빙(朝聘)할 때 사용하던 일종의 옥기(玉器)로, 옥으로 만든 귀중한 기물을 널리 가리킨다. 여기서는 저자의 인품과 능력을 인정받은 것을 비유한다. 《詩經 雲漢》[주-D010] 초나라 죄수처럼 갇혔으나 : 《춘추좌씨전》에 “진후(晉侯)가 군부(軍府)를 순시하다가 종의(鍾儀)를 보고 유사(有司)에게 ‘남관(南冠)을 쓴 채 묶여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물으니, 유사가 ‘정(鄭)나라 사람이 잡아서 바친 초나라 죄수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成公9年》[주-D011] 변함없이 지조를 지켰네 : 저자는 1642년(인조20) 겨울에 이계(李烓)의 고변으로 청나라로 압송되었는데, 1640년 사행 때 기자묘(箕子廟)에 제사하고 명나라를 숭상했다는 이유였다. 《東江遺集 卷17 附錄1 家狀》[주-D012] 박태기나무 …… 감도니 : 저자의 형 신익성이 세상을 떠난 것을 비유한다. 박태기나무는 형제를 비유한다. 《續齊諧記 紫荊樹》[주-D013] 서석산(瑞石山) : 서석산은 광주에 있는데, 여기서는 신익전이 1645년(인조23) 광주 목사(光州牧使)에 임명된 일을 가리킨다. 《東江遺集 卷17 附錄1 家狀》[주-D014] 이은(吏隱) : 마음이 이록(利祿)에 얽매이지 않아 비록 관직에 있으나 은자(隱者)와 같은 사람, 또는 낮은 벼슬에 은거한 사람을 가리킨다.[주-D015] 염락(濂洛) : 송학(宋學)의 비조(鼻祖)인 주돈이(周敦頤)가 거주했던 염계(濂溪)와 정호(程顥)ㆍ정이(程頤)가 거주했던 낙양(洛陽)을 합칭한 말인데, 성리학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주-D016] 생전에 …… 못했네 : 박세채(1631~1695)가 태어났을 때는 저자의 부친 신흠(1566~1628)이 작고한 뒤이므로 직접 뵙지 못했다는 말이다.
- 2023-12-04 | NO.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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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강유집 제6권 / 칠언율시(七言律詩)- 성시량 경양찰방
- 동강유집 제6권 / 칠언율시(七言律詩)창평 현령이 보낸 시에 차운하여 경양의 성 찰방 시량 에게 주어 화답을 구하다〔次昌平使君寄韻贈景陽成督郵 時亮 求和〕좋은 봄날을 문서더미 속에서 보내니 / 一春佳節簿書過산수를 찾아 감상함은 남의 일이라네 / 玩水尋山付與他술잔을 잡아보지만 벗을 찾기 어렵고 / 試把酒杯難覓伴억지로 시를 지으나 완성하지 못하네 / 強拈詩句不成哦바람 부는 성곽엔 눈 뿌리듯 꽃이 날리고 / 風回郡郭花如霰햇살 따스한 정자에선 노래하듯 새가 우네 / 日暖亭臺鳥似歌예부터 달관한 삶은 뜻에 맞게 사는 것 / 從古達生唯適意우연히 오는 높은 벼슬 하찮게 여기네 / 倘來軒冕看纖麽[주-D001] 창평 …… 구하다 : 성 찰방은 성시량(成時亮, 1590~?)으로,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1644년(인조22)에 문과에 급제하여 참봉과 정랑을 역임하였다. 이 시는 성시량이 경양 찰방(景陽察訪)으로 재직 중이던 1645년 5월부터 1648년 1월 사이에 지은 것인데, 이때 저자는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재직 중이었다.[주-D002] 우연히 …… 벼슬 : 《장자》 〈선성(繕性)〉에 “헌면이 내 몸에 있는 것은 내가 타고난 성명이 아니요, 외물이 우연히 내 몸에 와서 붙어 있는 것일 뿐이다.〔軒冕在身, 非性命也, 物之儻來寄也.〕”라고 하였다.
- 2023-12-04 | NO.3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