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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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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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효우 韓孝友 선조 5년(1572) 2월 13일∼선조 5년(1572) 3월 16일
    한효우 韓孝友 선조 5년(1572) 2월 13일∼선조 5년(1572) 3월 16일한효우(1531∼1586)의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자는 희중(希仲)이다. 아버지는 통례 한원(韓垣)이다. 1555년 생원·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1558년 식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62년 중종의 능을 옮길 당시 재궁시위집사로 임명되었고, 다음 해 사서를 지냈다. 1564년에는 지평, 다음해 헌납, 1566년 병조정랑에 임명되었다. 1567년 봉상시 첨정을 거쳐 1572년 2월 나주목사가 되었다. 이어 사헌부 장령, 봉상시첨정 등 요직을 거쳤으며, 『명종실록』 편찬 시 직강(直講)으로 춘추관에 관여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임신(1572년) 윤2월 13일 도임하였는데, 선소(船所)에 조졸(漕卒)의 수가 부족했다는 사유로 한 달 만인 3월 16일 파직을 당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5 | NO.21
  • 함우치 咸禹治 세종 30년(1448) 6월 29일∼세종 32년(1450) 2월 27일
    함우치 咸禹治 세종 30년(1448) 6월 29일∼세종 32년(1450) 2월 27일함우치(1408∼1479)의 본관은 강릉(江陵)이며, 개국공신 동원군(東原君) 함부림(咸傅霖) 의 아들이다. 문음(⾨蔭)으로 관직에 들어와 사헌부 감찰, 고부군수, 군기부정을 거쳐 1448년에 나주목사에 부임하였다. 1451년 판사복시사, 1453년 첨지중추원사·동부승 지, 1456년 판공주목사, 1457년 함길도관찰사, 1459년 대사헌, 1460년 중추원부사, 1461년 전라도관찰사, 1462년 사헌부 대사헌, 1463년 개성부 유수, 1465년 형조참 판, 경상도관찰사, 1466년 자헌대부 동원군(東原君)에 올랐고, 1467년 의금부지사, 1468년 의금부 판사, 1469년 동원군 봉조하, 1470년 정헌대부 형조판서, 1471년 좌리4등공신, 자헌대부 좌참찬, 1474년 숭정대부 의정부 좌참찬, 1475년 숭정대부 동원 군, 1479년 숭정대부 동원군 봉조하를 역임하였다. 『금성일기』 「무진년 1448년」에 “신임 목사 봉정대부 군기부정 함우치가 6월 25일에 도임하였다.”는 기록과 아울러 「경오년 1450년」에 “목사 함우치가 진관사(津寬寺)에 지둔(紙屯)을 바치는 일로 중훈대 부로 가자되어 2월 27일에 사무를 그만두고 광주로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 『금성읍 지』에는 “경태 무진(1448년) 6월 29일 도임, 경오(1450년) 2월 27일 중훈대부에 가자 되어 진관사(津寬寺)에 방납하는 지둔(紙屯) 일을 하게 되어 그만두고 상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시호는 평양(平襄)이다. *전라감사편 참조.*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5 | NO.20
  • 해광 송제민(1549~1602)
    송제민의 본관은 홍주, 초명은 제민濟民, 자는 사역士役 또는 이인以仁, 호는 해광海狂이다. 현감 송기손宋麒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청심헌淸心軒 송구宋駒이고, 아버지는 홍문관정자 송정황이다. 1549년 광산구 극락면에서 출생하였다. 훗날 ‘백성을 구제하라’는 제민(濟民)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스스로 제민(齊民)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운암서원 배향록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부터 기개와 도량이 비범하고 총민함과 행동이 남달라 ‘얼굴은 어린이나 행실은 어른과 같다’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가 객지에서 비명횡사했다는 비보를 접한 해광은 말을 타고 가다 말이 지치자, 도보로 여러 날을 먹지 않고 금산 땅에 이르렀다. 이후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이를 드러내어 웃는 일이 없었고 부친의 묘 앞에서 흘린 피눈물로 인해 풀이 말라 자라지 않으니 모두들 천생의 효자라 했다.20세 이전에 성현의 글을 터득하고 양명학에 심취해 빈민구휼과 애민사상을 전파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했다. 천문, 지리, 의술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어 천리(하늘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 역경(易經=주역)을 깊이 탐구해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또 그는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서 학문을 배우는 것은 경세치용(經世致用, 세상을 다스리는 데 실익을 증진)을 위함이라고 여겼다. 사설의료 기관인 의국(醫局)을 개설해 환자를 돌보고 백성을 구휼하는데도 힘썼다.그러나 강직한 성품, 속박되기를 싫어하는 호방한 성격 때문에 벼슬길에 나가기를 단념하고 20세 청년기에 들어서자 명산대천(名山大川)과 어진 선비를 찾아 전국 순방길에 올랐다. 그러던 중 한산에 숨어 살던 토정 이지함 선생을 만나 그의 문하생이 됐다. 해광 송제민이 토정의 정맥이라고도 일컬어진다.1578년 토정 이지함을 따라 호서(湖西)에 갔을 때 중봉重峰 조헌趙憲(1544~1592)과 화천당花遷堂 박춘무朴春茂(1544~1611)를 만나 서로 뜻이 통하자 세한계(歲寒契)를 맺어 국란에 대비할 구국의 결의를 다졌다. 이들은 실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모두 의병장으로 활약했다.1585년 해광이 존경하던 율곡 이이, 송강 정철 등이 탄핵을 당하자 해광은 조헌과 함께 상소를 올리려 했으나 그의 숙부도 탄핵에 연루되자 오해의 소지가 있어 상소를 포기했다. 주역을 깨쳐 하늘의 이치에 밝았던 그는 모리배가 판치는 조정을 보며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것을 알았다.1588년에 조헌이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를 당하자, 해광은 세상과 등지고 산과 바다를 유람한다. 그러다가 아예 무안 땅으로 내려가 배를 타고 이 섬 저 섬 돌아다녔다. 이때 스스로 호를 해광(海狂)이라 지었다.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으는 격문을 각 고을 수령과 유생들에게 보냈고 300여명이 모였다. 해광은 양산숙(1561~1593), 양산룡(1552~?)과 같이 의병을 모집해 구국의 대열에 나섰다. 이때 마침 전 부사 김천일(1537~1593)이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합류해 김천일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스스로 종사관이 됐다. 뒤에 고경명(1533~1592)과 같이 금산전투에도 참여하였다. 이듬해 8월 모친상을 당한 외종 동생 김덕령(1567~1596)을 찾아가 ‘나라 일이 먼저고 집안일은 나중’이라고 설득해 의병장으로 추대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해광은 손수 제주까지 가서 군마 30여필을 구해와 의병장 김덕령의 사기 진작에 힘쓰고 이후 김덕령 의병군에 합류했다.1596년 의병장 곽재우와 함께 왜병을 크게 격파한 김덕령이 이몽학의 난에 연루됐다는 모함을 받고 29세에 옥사하자 해광은 종일토록 통곡했다. 해광은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임진왜란 중에 일어난 모든 일과 그 득실을 논술한 '와신기사(臥薪記事)'를 저술했다.정유재란 때에는 남원성 주둔 중인 명장 양원을 도와 이진을 종용하다가 도리어 박해를 받은 바 있었다. 당시에 국내외 정세를 기록한 ‘척왜만언소(斥倭 萬言疏)’를 올려 조야의 주목을 끌었다. 척왜만언소를 지은 뒤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 세상일을 잊고 스스로 호를 해광이라 하였으며, 왜적을 물리칠 여러 방안을 피력하였다.그러나 이 상소문에는 조선의 부패상과 탐관오리에 대한 직언이 많아 중간의 대신에 의해 왕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오히려 이로 인해 감사의 미움을 사게 돼 이후 무등산에 은거하면서 세상을 잊고 살았다.송제민은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과도 관련이 깊다. 거북선은 고려말부터 남해안과 영산강 일대에 창궐하던 왜구의 기습공격에 대비한 공수 전용 전함으로 대굴포에서 처음 제작됐다는 사실이 최근 연구결과를 통해 밝혀졌다.함평문화원이 발표한 ‘대굴포 전라도 수영고찰’ 논문에 따르면 해광 송제민은 곤재 정개청의 문하생으로 대학자이며, 무역산단의 대선주(船主)로 대굴포 서쪽 1km 지점인 사포의 언덕에 백일홍당을 짓고 우거했다.200여년간 왜구의 기습이 없어 건조되지 않던 거북선은 왜적의 침입을 예견한 곤재 정개청과 그의 문도인 송제민, 오익창, 나덕신, 나덕명 등 양명학자와 나대용, 박만천, 나치용, 이설 등 영산강 인근 출신 무관들에 의해 영산강 대굴포(현 함평군 학교면 곡창리 대곡)에서 다시 건조되기 시작했다.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할 기록이 송제민의 '해광집', 오익창吳益昌(1557~1635) 의 '사호집(沙湖集)'과 채제공蔡濟恭(1720~1799)의 번암집樊巖集 등 다수의 문헌에 수록돼 있다.고려말에 제작된 거북선이 200년이 지난 임진왜란 몇 년 전부터 나대용, 송제민 등에 의해 빠르게 재건조될 수 있었던 것은 광산탁씨, 홍주송씨 등에 거북선 설계도 또는 제작 기술이 전승됐기 때문으로 추정되고 있다.‘대굴포 전라도 수영고찰’에 따르면 무역산단의 대선주였던 송제민은 스승인 정개청의 요청에 따라 상선 29척을 이순신 장군에게 주어 이를 병선으로 개조해 사용했다. 난중일기에는 “1592년 2월 8일 거북선에 사용할 돛베 29필을 조달 받았으며, 동년 3월 27일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실험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또 김천일 장군 휘하의 의병이 무려 400척의 전함을 동원해 강화도 양화진 전투를 벌였던 것은 막하 종사관인 송제민, 이광주 등이 선박 제작 기술자였기 때문이었다. 김천일 장군과 송제민, 이광주, 임환, 양산룡 등 가문과는 복합적인 혼인관계였다.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해광 송제민의 선단과 군량미 그리고 의병모병 지원활동 등은 각 문중들의 글에서 확인된다.해광의 공덕은 사후 100년이 지나서야 재평가됐다. 1788년(정조12)에 해광 송제민의 학덕과 충절을 가상히 여겨 증 조봉대부사헌부지평(贈 朝奉大夫司憲府持平)을 내리고 1706년(숙종 32) 호남의 사림 삼백여명의 발의로 운암서원을 창건해 봉향했다. 묘갈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 해광의 사위 석주 권필(1569-1612)은 선조, 광해군 때 최고의 시인으로 충장공 김덕령의 취시가(醉時歌)를 지은 사람이다.해광은 남다른 지략과 탁월한 문장력으로 많은 글을 남겼으나 안타깝게도 전란 중에 대부분이 소실됐다. 소모호남의병문(召募湖南義兵文)과 만언상소문(萬言上疏文) 등을 수록한 해광집(海狂集)을 정조(正祖) 7년(1783)에 해광의 5대손 익중(益中) 등이 편집․간행해 전해지고 있다.
    2020-05-06 | NO.19
  • 허백련(許百鍊 ; 1891~1977)
    허백련(許百鍊 ; 1891~1977)은 진도 출신으로 한국 근․ 현대 회화사에서 전통적 형식의 남종화풍(南宗畵風)을 전승한 화가이다. 호는 의재이다.  「계산청하」, 「산수 11경」, 「산수춘추」, 「달마 1」, 「하경」 등의 작품이 있다.조선시대 말기 남종화풍을 토착화 시켰던 소치(小癡) 허련(許鍊)(1809~1892년)의 방손(傍孫)이다. 허련의 아들 허영(許瀯)(1850~1931년)에게서 기본적인 필법을 익히고 상경, 도일을 통하여 화업을 쌓았으며 전통 남종화의 화풍과 정신을 고수하는데 전력하였다. 1938년 광주에 정착한 뒤 연진회를 발족시키고 전통 서화의 진작과 후진양성을 목적으로 한 연진회(鍊眞會)를 발족시켰다. 그 후 국전 초대작가와 심사위원을 역임하였으며, 농촌지도자의 육성에 뜻을 두고 삼애학원(三愛學院)을 설립하였다. 민족의 정신적 지주로 확립하기 위하여 단군신전건립위원회를 발족하는 등 지역사회발전에도 공이 컸다. 또한 광복 후에는 농촌지도자 육성에 뜻을 두고 증심사 부근 춘설헌(春雪軒, 지방기념물 제5호) 곁에 삼애학원을 설립하여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곳은 그의 작은 우주이자 화실이었다. 이곳은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잦은 문화의 산실로서 잘 활용되고 있으며, 현재에도 남화의 맥을 잇고자 하는 많은 한국 화가들이 드나들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한편 전통녹차 (춘설차)의 재배 제조에도 힘을 기울였다. 학동삼거리에서 증심사에 이르는 도로를 의재로라 명명하여 기념하고 있다.
    2021-04-08 | NO.18
  • 허지 許墀 숙종 17년(1691) 8월 12일∼숙종 19년(1693) 7월 16일
    허지 許墀 숙종 17년(1691) 8월 12일∼숙종 19년(1693) 7월 16일허지(1646∼1719)의 본관은 양천(陽川)이며, 자는 옥경(⽟卿)이다. 아버지는 매화와 난을 잘 그린 서화가 허징(許徵)이며, 어머니는 박민수(朴敏修)의 딸이다. 1678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83년 지평, 1685년 장령, 1691년 7월 20일에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8월 12일 도임하여 1693년 7월 16일에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이임하였다. 1694년 동래부사, 1699년 승지, 1701년 우부승지, 1706년 황해도관찰사, 1707년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신미(1691년) 8월 12일 도임하였고 계유 (1693년) 7월 16일 광주(廣州)부윤으로 이임하였다.”라 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17
  • 허질 許秩 현종 13년(1672) 10월 10일∼숙종 1년(1675) 8월 4일
    허질 許秩 현종 13년(1672) 10월 10일∼숙종 1년(1675) 8월 4일허질(?∼?)의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아버지는 이천부사 허한(許僩)이다. 1656년 선공 가감역, 1658년 은율현감, 1661년 임피현령, 1664년 마전군수, 1665년 풍덕부사, 1666년 원주목사, 1672년 8월 28일 나주목사 제수되어 근무하다가 1675년 2월 25 일 전라도관찰사로 임용하자 형인 허적이 개차할 것을 건의하자 나주목사를 그대로 재직하게 되었고, 4월 19일에는 가의대부로 가자되었다. 8월 4일까지 만기 재직하고 강화유수가 되어 떠났다. 1677년에 강화산성을 고려 때의 내성 규모로 크게 고쳐 쌓고 만기가 되었으니 사직할 것을 아뢰니 임금이 계속 근무하라 하자 세 번의 상소로 사퇴하고 좌윤으로 이동하다. 1678년 성천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임 자(1672년) 10월 10일 도임하였고 을묘(1675년) 8월 4일 임기가 만료되어 체직되었 다.”는 기록이 있다. 미수 허목(許穆)이 그를 위해 쓴 글 「나주목사(羅州牧使) 허질(許 秩)에게 주다」가 『기언별집(記⾔別集)』에 수록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16
  • 현준호(玄俊鎬 ; 1889~1950)
    현준호(玄俊鎬 ; 1889~1950)는 전남 영암군 출신으로  현기봉의 아들로 태어났다. 현기봉은 중추원의 참의를 지내는 등 일제에 적극 협력한 지역 유지로, 그의 집안은 호남 지방에서 유명한 거부 가문이었다. 일제 강점기의 금융인으로 호는 무송(撫松)이다. 호남지역의 대지주로서 간척사업뿐 아니라 상인들과 함께 호남지역 최초의 근대적 은행인 ‘호남은행’을 설립하였다. 해방 이전까지 손꼽히는 갑부로 알려졌다. 어릴 때 한학을 수학하였고 9세에 아버지를 따라 목포로 이주했다. 1906년 6월부터 김성수(金性洙)의 장인 고정주가 설립한 담양의 창평영학숙(昌平英學塾)에서 수학하고 영학숙을 마치고 1907년 3월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했다. 1912년 1월 휘문의숙을 졸업한 뒤 1912년 4월 일본 메이지 대학 예과를 입학해서 1914년 메이지대학 법률학과로 진학했다. 일본에서 송진우가 회장으로 있던 호남다화회(湖南茶話會)에 가입해 김성수, 장덕수(張德秀), 최남선(崔南善), 신익희(申翼熙), 조소앙(趙素昻) 등과 교유했다. 1917년 4월 메이지대학 법률학과를 중퇴하고 귀국하여 1919년 7월 주식회사 호남은행의 발기인이 되어 은행 창립에 힘썼다. 1920년 8월 호남은행을 설립하고 전무취체역에 취임했다. 이와 함께 주식회사 동아일보가 설립되자 이 신문사의 감사에 취임했다. 1924년 4월 전라남도 평의원에 올랐으며 1925년 호남은행의 대표가 되었다. 1926년 5월 전라남도 도시제사(道是製絲) 주식회사 이사, 같은 달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 감사에 취임하였다. 1921년 1월 재단법인 보성전문학교 감사가 되고, 1925년 전라남도 간부였던 고원훈과 토의하여 1926년에 전남육영회(全南育英會)를 조직하였다. 1926년 유지들과 협력하여 여자고등보통학교 설립기성회를 조직하자 대표위원으로 추대되었고 1927년 5월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설립에 참여하였으며, 전남의대의 전신인 ‘광주의학전문학교’를 세울 때는 거액을 내놓는 등, 많은 교육 사업을 실행하였다. 창평영학숙 동창인 김성수, 송진우와 절친했으며 이들과 함께 1923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에 참여하는 등 민족주의적 계몽 운동에도 관심을 보였으나, 1930년 중추원 참의가 되고 큰 잇권이 걸린 지역 간척 사업의 사업권을 따내는 등 일제와 밀착한 행보로 민족주의 운동과는 결별하게 되었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아버지 현기봉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중일 전쟁 발발 후 총독부가 조직한 시국강연반에 참여하여 전남 지역을 돌면서 전쟁 지원을 역설함으로써 본격적인 친일 활동을 시작했다. 1938년 조선총독부 산하에 설치된 시국대책조사위원회에도 조사위원으로 임명되어 참여했다. 1941년에는 윤치호의 흥아보국단에 준비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참가했고, 중추원 고문과 참의들이 결성한 시국강연반 소속으로 태평양 전쟁 말기까지 징병제 홍보와 학병 지원 권유 등에 가담했다. 조선임전보국단에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그 외에도 송정리~담양 간의 조철선(朝鐵線), 광주~여수 간의 남철선(南鐵線) 철도를 유치하였다. 또한 다년간 광주번영회장에 재직하였다. 광복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불구속으로 수사를 받다가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처벌을 받지 않았다. 한국 전쟁 때 조선인민군에게 피살되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그가 설립한 호남은행은 민족자본으로설립되었으며 조선인만 채용하였고 그후 일제의 민족자본 말살정책으로 강제 합병되었다 호남의 대표 금융기업인으로 육영사업에공로가 큰 점 등 공과가 있다. 625 동란중 인민군에 투옥되었고 928서울 수복때 퇴각하는 인민군에게 광주에서 피살되었다.
    2021-04-08 | NO.15
  • 홍감보 洪鑑輔 영조 31년(1755) 3월 5일∼영조 31년(1755) 3월
    홍감보 洪鑑輔 영조 31년(1755) 3월 5일∼영조 31년(1755) 3월홍감보(1701∼1763)의 본관은 풍산(豐⼭)이며, 자는 명원(明遠)이다. 친아버지는 형조 참판을 지낸 홍중주(洪重疇)이고 밀양부사를 지낸 홍중연(洪重衍)에게 입적되었다. 음직 으로 벼슬에 나서 1739년 사산감역, 1740년 사옹주부·사포별제·금성현령, 1742년 사복첨정, 1745년 고양군수, 1747년 파주목사, 1748년 사복주부, 1753년 청주목사를 거쳤다. 1755년 2월 4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1755년 3월 5일 청주에서 출발하여 3 월 27일 청주로부터 전주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병환소식을 접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7월 17일에는 통정대부로 품계가 올라갔다. 1756년 충원현감, 1757년 가의대부로 승진, 경주부윤, 1760년 홍주목사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을해(1755년) 3월 5일 청주목사에서 이배되어 같은 달 27일에 청주에서 출발하여 전주부에서 부친이 병들었음을 알리자 이조에서 돌아가라는 체직을 허용한다.”고 기록되 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9 | NO.14
  • 홍득일 洪得⼀ 인조 11년(1633) 11월 13일∼인조 13년(1635) 4월
    홍득일 洪得⼀ 인조 11년(1633) 11월 13일∼인조 13년(1635) 4월홍득일(1577∼1655)의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자는 형제(亨諸), 호는 만회(晩悔) 또는 후포(後浦)이다. 아버지는 공주목사 홍사효(洪思斅)이며 장인이 예조판서 윤돈(尹暾)이 다. 1609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613년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17년 호조좌랑, 1618년 예조좌랑, 1620년 독운어사, 1623년 봉산군수, 1624년 동래부사, 1628년 동부승지·승지·우승지를 거쳐 1633년 10월 6일 통훈대부 행 나주목사로 제수 되어 11월 부임하여 1635년 4월에 이임하였다. 1640년∼1643년 좌승지, 1646년 강원감사, 1647년 좌승지, 1649년 경주부윤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계유(1631 년) 11월 13일 도임하였고 을해(1635년) 4월에 전라도관찰사의 계에 의하여 파직당하 였다.”고 되어 있는데 관찰사의 장계는 확인할 수 없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7 | NO.13
  • 홍명한 洪名漢 영조 41년(1765) 6월 21일∼영조 42년(1766) 6월 5일
    홍명한 洪名漢 영조 41년(1765) 6월 21일∼영조 42년(1766) 6월 5일홍명한(1724∼1774)의 본관은 풍산(豊⼭)이며, 자는 군평(君平)이다. 할아버지는 숙종대 전라감사 겸 전주부윤을 역임한 홍중하(洪重夏)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홍경보(洪景 輔)이며, 어머니는 심계량(沈季良)의 딸이다. 문음(⾨蔭)으로 입사하여 의금부도사로 재직 중 1754년 증광시 진사시와 문과에 병과 1위로 급제하여 부수찬에 특제되었으며, 1755년 교리, 1758년 우승지·삼척부사, 1761년 동래부사, 1762년 대사간, 1763년 경기도관찰사, 1764년 대사헌·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765년 6월 3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6월 21일 부임하였다. 1766년(영조 42) 5월 29일에 나주목사 홍명한에 대하여 재신(宰⾂)으로 지방에 나간 지 1년이 되었고 또 질병이 있어 구임하기 어려우니, 전조(銓曹)로 하여금 내직(內職)으로 옮기자는 논의를 한다. 1768년 승지·형조참판·도 승지를 거쳐 이듬해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771년 형조판서를 역임한 뒤 개성유 수가 되었다. 영조의 문예진흥책의 하나인 편찬사업에 관여하여 1770년 『동국문헌비 고』의 감인당상(監印堂上)이 되어 이의 간행에 책임을 맡았다. 『금성읍지』에는 “을유 (1765년) 6월 21일 부임하였고 병술(1766년) 6월 5일 형조참판으로 자리를 옮겼다.” 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5 | NO.12
  • 홍병주 洪秉周 순조 16년(1816) 6월 29일∼순조 20년(1820) 2월
    홍병주 洪秉周 순조 16년(1816) 6월 29일∼순조 20년(1820) 2월홍병주(?∼?)는 1777년 성균관 유생, 1789년 가감역, 1791년 감역, 1792년 종묘 부봉사, 1792년 상서 직장, 종묘령, 1793년 창녕현감, 1796년 온양군수, 1798년 원주 판관, 1811년 선공부정, 1814년 순천군수를 지냈다. 1816년 5월 10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6월 29일 도임하였다. 1611년 월 5일 나수하라는 전지가 계하되었다가 5) 1817년 2월 22일 형추는 그만두고 의처하라고 하였다. 세곡(稅穀)의 운송 지연에 관한 것이었다. 『금성읍지』에는 “병자(1816년) 6월 29일 부임하였고 경진(1820년) 2월에 상경하여 중(中)으로 평가를 받아 4월 7일 파직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7 | NO.11
  • 홍양묵 洪養黙 순조 14년(1814) 6월 7일∼순조 15년(1815) 6월 1일
    홍양묵 洪養黙 순조 14년(1814) 6월 7일∼순조 15년(1815) 6월 1일홍양묵(1764∼?)의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자는 백회(伯晦)이다. 아버지는 부사(府使) 홍술조(洪述祖)이다. 1786년 성균관 유생, 1787년 조경묘 참봉, 1788년 선공 부봉사, 11790년 상서 직장, 1794년 장흥고 주부, 양구현감, 1796년 원주판관, 1801년 금부 도사, 1802년 간성군수, 수원판관, 1804년 온양군수, 1805년 아산군수 겸임, 1807년 사옹첨정, 서원현감, 1809년 밀양부사, 1810년 4월 광주목사를 지냈다. 1814년 5월 23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이 6월 7일 도임하였다. 1815년 4월 11일 나주(拿囚) 논의가 있었고 5월 10일 전지가 내렸다. 5월 30일 “연해의 큰 고을은 거듭 흉년을 만나 백성 들의 사정과 형편을 진념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대동(⼤同)의 일과 환향(還餉)의 법의 뜻이 지극히 중하고 엄하니 고신을 추탈하자.”는 의금부의 계가 윤허된다. 1817년 면천군수, 1819년 성주목사, 1823년 안주목사·강계부사, 1827년 연천현감, 1832년 부사과, 1834년 통정대부 가자, 부호군, 1835년 돈녕 도정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 에는 “갑술(1814년) 6월 7일 부임하였고 을해(1815년) 6월 1일 갑술년의 추환(秋還) 을 거두어들이지 않고 마감한 일로 나포되어 체직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광주 공원 내에 1908년 3월 광주군수 홍양묵의 종증손(從曾孫)인 홍난유(洪蘭裕)가 다시 세운 「목사홍공양묵선정비」가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7 | NO.10
  • 홍역 洪櫟 영조 34년(1758) 10월 18일∼영조 38년(1762) 9월 7일 =
    홍역 洪櫟 영조 34년(1758) 10월 18일∼영조 38년(1762) 9월 7일 =홍역(1708∼1767)의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자는 수옹(壽翁), 호는 의재(毅齋)이다. 아버지는 대사간을 지낸 홍용조(洪⿓祚)이다. 형이 광주부유수를 지낸 지중추부사 홍억(洪 檍)이고, 아들이 실학자 홍대용(洪⼤容)이다. 1744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처음으로 장릉참봉에 보임되었고, 1746년 군자감 봉사, 1748년 금부도사가 되었다. 1749년 상의원 별제, 1750년 문경현감, 1754년 호조정랑, 영천군수, 1755년 봉산군수, 해주목 사, 1758년 9월 17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10월 4일 하직하고 1758년 10월 18일 부임하였다. 1759년(영조 35) 5월 30일 기록에 전문(箋⽂)을 봉과(封裹)한 여러 도구 들이 매우 정교하지 못하다 하여 추고하여 경책하라는 데 대하여 윤허 전교가 내렸다. 『영조실록』에 “전 나주목사 홍역을 멀리 유배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호남에 큰 기근이 들었는데, 나주는 환곡 4만 곡(斛)을 하나도 저축하여 둔 것이 없어 백성들이 호구 (糊⼝)할 길이 없으므로 온 고을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사람들이 모두 분통하게 여겼 다. ……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엄중히 징계할 것을 다시 청하여 드디어 예천(醴泉) 에 정배하고 금고 5년에 처하였다.”라는 기록을 통해 원망을 사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는 “아전을 다스렸고, 간편함으로써 백성들을 대하였다.”고 전한다. 아들 홍대용은 동복 실학자 석당(⽯堂) 나경적(羅景績)을 나주로 초빙하여 아버 지의 후원 하에 철제(鐵製) 혼천의를 제작하여 자신의 사설 천문대인 농수각(籠⽔閣)에 설치하고 천문을 깊이 있게 연구하였다. 『금성읍지』에는 “무인(1758년) 10월 18일 도임하였고 임오(1762년) 9월 7일에 모친상을 당하여 같은 달 26일에 발인하였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9 | NO.9
  • 홍익필 洪益弼 영조 49년(1773) 9월 15일∼영조 51년(1775) 3월 3일
    홍익필 洪益弼 영조 49년(1773) 9월 15일∼영조 51년(1775) 3월 3일홍익필(1721∼?)의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자직(⼦直), 아버지는 통덕랑 장릉참봉 홍제유(洪濟猷)이다. 음관으로 1741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1752년 내시교관, 1754 년 사축별제, 1755년 공조정랑, 1756년 안음현감, 1758년 사복판관, 1759년 해주판 관, 1764년 배천군수, 1767년 장성부사, 1770년 성주목사를 지냈다. 1773년 8월 5 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9월 15일 부임하고 1774년 6월 11일에 통정대부에 올랐다. 1774년(영조 50) 6월 11일 기록에 기민(飢民)을 뽑은 것이 매우 정밀하였으니 진휼을 잘했음을 알 수 있으니 포상하는 은전이 있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1775년 3월 3일에 이임하였다. 1776년 양주목사, 1777년 광주부윤, 1778년 안동현감, 1780년 상주목사, 1783년 강계부사, 1785년 형조참판, 1786년 승지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 에는 “계사(1773년) 9월 15일 부임하였고 을미(1775년) 3월 3일에 체직 하였다.”고 되어 있다. 1786년에 원정면(元井⾯, 현재 영암군 금정면, 당시 나주)과 세화면(細花⾯,현재 나주시 세지면) 주민들이 함께 세운 「행목사홍공익필휼민영세불망지비」가 나주시 세지면사무소 안에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5 | NO.8
  • 홍재기 洪在祺 융희 1년(1908) 10월 1일∼융희 2년(1909) 11월
    홍재기 洪在祺 융희 1년(1908) 10월 1일∼융희 2년(1909) 11월홍재기(1873∼1950)는 서울 출생으로, 홍정섭(洪正燮)의 아들이다. 1895년(고종 32) 8 월 안동관찰부 주사로 임명되었다가 관비유학생 시험에 합격하여 1899년 일본 도쿄의 백과학교(百科學校), 1902년 도쿄법학원을 졸업하였다. 190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길리중학교(吉利中學校)를 졸업, 1905년 8월부터 보성전문학교 강사가 되었고, 12월 법관양성소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1907년 3월에는 한성재판소 판사로 임명되었다. 1908년 1월에 무안군 궁장정리관(宮庄整理官), 1908년 5월 17일 무안부윤, 5월 21일 에는 무안항재판소 판사를 겸임한다. 1908년 10월 1일자로 나주군수와 해남군수를 겸임하였고, 1909년 11월에는 대심원판사, 1910년 1월부터는 경성공소원(京城控訴院) 판사직도 겸임하였다. 1910년 이후에도 변호사로 활동하였고 1948년 전주지방법원 정읍지원장으로 발령받았으나, 1950년 9월 29일 인민군에 의해 납치, 총살되었다. 저서로 『민사소송법』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11 | NO.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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