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68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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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재응 洪在應 철종 11년(1860) 10월 20일∼철종 13년(1862) 1월 19일
- 홍재응 洪在應 철종 11년(1860) 10월 20일∼철종 13년(1862) 1월 19일홍재응(1801∼1860)의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자는 자성(⼦聲)이다. 아버지는 통덕랑 홍기섭(洪箕燮)이다. 1834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여 1835년 온릉참봉, 1837년 사재 봉사, 1838년 평시직장, 1842년 종묘직장, 사복주부, 1843년 영산현감, 1847년 마전 군수·담양부사, 1860년 2월 청풍부사를 역임하였다. 경신(1860년) 10월 21일 청풍부 사에서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1일 사조하고 부임하였다. 임술(1862년) 1월 19일 목사 내아 금학헌에서 이질로 별세하였으며, 2월 20일 발인하였다. 경기도 연천문화원에 「행군수홍재응영세불망비(⾏郡守洪在應永世不忘碑)」가 서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11 | NO.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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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처윤 洪處尹 효종 7년(1656) 2월 29일∼효종 7년(1656) 윤5월 27일
- 홍처윤 洪處尹 효종 7년(1656) 2월 29일∼효종 7년(1656) 윤5월 27일현감 홍처윤(1607∼1663)의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자는 지임(之任), 호는 안분재(安分 齋)이다. 아버지는 광주목사를 지낸 홍명원(洪命元)이며, 어머니는 부호군 윤민준(尹民 俊)의 딸이다. 형 홍처후(洪處厚)는 현종대 전라감사를 역임하였고, 홍처대(洪處⼤)는 전주부윤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아들 홍수주(洪受疇)도 문과 급제자이다. 1639년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가주서에 오르고, 1640년 승문원 정자·예문관 검열, 1641년 봉교·감찰, 1642년 홍산현감, 1646년 병조정랑, 1648년 정언·충청도 시관·전옥봉사, 1649년 홍문관 교리 등을 역임하고, 1650년 응교로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652년 보덕으로 승진되고, 1653년 교리가 되었다. 1654년 다시 보덕에 임명되어 직강·교리를 지냈다. 1656년 1월 16일 금성현감에 제수되어 2월 29일 부임하였다. 1658년 응교·사간·사인, 이듬해 수찬·사간·사예·종 부시정 등을 지냈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사인 겸 빈전도감도청이 되고, 이어 교리 겸 한학교수를 거쳐 통정대부로 승진, 동부승지가 되었다. 1660년 형조참의·황해도 관찰사, 1663년 첨지중추부사·예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병신(1656 년) 2월 29일 도임하였는데 동년 윤5월 2일에 어머니가 별세하자 윤5월 29일에 떠났 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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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암 송타宋柁(1567~1597)
- 송타(宋柁, 1567~1597)의 자는 시정(時正)이고, 호는 화암(禾庵)이다. 본관은 홍주(洪州)이다. 아들 송수(宋燧)가 있다. 조부는 송정황(宋庭篁, 1532~1557)이고, 부친은 해광(海狂) 송제민(宋齊民: 1549∼1601)이며 처부는 성주김씨(星州金氏) 김의백(金義伯)이다. 매형은 석주 권필(權韠)이다.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화암당에서 지낸 송타는 조선중기 의병으로 1597년(선조30)에 왜적이 호남을 도륙하자 피난해 전남 무안현 사포에 살면서 이곳에서도 당堂을 짓고 화암이라 편액하고 백일홍정百日紅亭을 지었다. 선조 때 지평(持平)을 지냈다.송타 집안의 불운은 임진왜란 때 풍지풍파를 겪게 되었다. 송타는 어느 날 밤에 길을 가다가 길을 잃고 적에게 붙들려 바다를 건너게 되었는데 적의 숫자가 10명이 채 되지 않고 한 배에 붙들려 가는 자가 많은 것을 보고 은밀히 한 배에 탄 사람과 모의하여 틈을 노려 적의 칼을 빼앗아 거의 다 찔러 죽였다. 그런데 마침 한 왜적이 물에 뛰어들어 달아나 다른 적에게 고하였으므로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조정의 특명으로 초혼장을 치르게 하였다.송타는 죽음에 임하여 크게 부르짖으며 말하기를, "나는 광주에 사는 송제민의 아들이다. 불행히 적에게 붙들렸고 지금 또 불행히 죽게 되었다. 그대들 여러 배의 포로된 자들은 혹 언젠가는 탈출하여 돌아갈 것이니 나의 부모에게 전해주기 바란다." 하였었는데 4년이 지나 1600(선조33)년에 태초太初 강항姜沆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와 이 사실을 자세히 말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강항의 『간양록』과 문정공 송시열이 지은 송제민의 묘포에 자세하게 나타나 있다.순절 후 조봉대부 사헌부지평에 증직되고 1706(숙종32)년에 광주에 건립된 운암사에 부친인 해광 송제민과 석주 권필, 창랑 고경리, 별제 신필, 도계 신한상 등과 같이 배향하고 있다.정유재란 때 한산도(閑山島)에서 왜적에게 붙잡혔다. 기회를 엿보아 왜검(倭劒)을 탈취하여 일선(一船)의 적을 거의 작살(斫殺)하였는데 적 하나가 몰래 빠져나가 다른 배를 데리고 왔다. 수많은 왜적이 일시에 강박(强迫)하자 창파(滄波)에 투신하여 자진(自盡)하였다. 이 사실을 함께 붙잡혔던 전라도 담양(潭陽) 창평(昌平)의 진사(進士) 이신(李紳)이 수은(睡隱) 강항(姜沆: 1567∼1618)에게 전하여서 알려지게 되었다. 그가 입던 옷만으로 화암(花岩) 아래 장사하였다. 평거(平居)에 정원 앞에 있는 큰 바위의 주위와 그 틈에 백일홍(白日紅)을 많이 심고 화암당(花岩堂)이라 편(扁)하였다. 운암사(雲岩祠)에 배향(配享)하였다.
- 2020-03-19 | NO.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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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유룡 ⿈有⿓ 우왕 8년(1382) 5월 27일∼우왕 8년(1382) 11월 10일
- 황유룡 ⿈有⿓ 우왕 8년(1382) 5월 27일∼우왕 8년(1382) 11월 10일황유룡(?∼?)의 인적사항이나 행적을 기록한 문헌은 확인이 어렵다. 1382년에 품계가 봉익대부였다. 봉익대부는 종2품 문관의 품계이다. 『금성일기』에 “나주목사로 봉익대부 황유룡이 5월 27일에 부임하였다가 동년 11월 3일에 돌아갔다.”고 기록되었고, 『금성 읍지』에는 “임술(1382년) 5월 27일에 부임하여 동년 11월 10일 상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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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호
- 황호黃顥의 본관은 장수이며 자는 사서士瑞, 호는 남제南齊, 풍암동 운리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품이 대범화통하여 글을 잘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많은 의병을 이끌고 전라병마절도사 이복남李福南의 막하에 들어가 각지를 전전하면서 전공을 세웠다. 이복남은 우계羽溪 사람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황호는 남원에서 대군의 적을 만나 분전 중 순절했다. 전쟁이 끝난 후 어모장군禦侮將軍 및 판결사判決事의 증직이 내려졌다.
- 2018-05-28 | N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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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흠 ⿈欽 숙종 1년(1685) 9월 7일∼숙종 12년(1686) 6월 10일
- 황흠 ⿈欽 숙종 1년(1685) 9월 7일∼숙종 12년(1686) 6월 10일황흠(1639∼1730)의 본관은 창원(昌原)이며, 자는 경지(敬之)이다. 아버지는 황신구(⿈ 藎耉)이며, 어머니는 김취겸(⾦就兼)의 딸이다. 그로부터 아들 황계하(⿈啓河), 손자 황재(⿈梓), 증손자 황인검(⿈仁儉)까지 4대까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1663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680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683년 정언, 1684년 지평, 1685 년 7월 19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9월 9일 도임하였다. 1686년 수찬, 1687년 부교 리, 1688년 사간, 1694년 승지, 1698년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 다. 1699년 충청도관찰사, 1702년 대사간, 1705년 도승지, 1706년 이조참판, 1707 년 강화유수, 1708년 좌참찬, 1710년 예조판서, 1711년 형조판서, 1713년 이조판서, 1715년 우참찬, 1717년 판돈녕부사, 1718년 판윤, 1719년 공조판서, 1725년 판돈녕 부사로 재직하다 1730년 사망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을축(1685년) 9월 9일 도임하 였고 병인(1686년) 6월 10일 홍문관 수찬으로 이임하였다.”라 하였다. 『영조실록』 그의 졸기에, “황흠은 조정에선 50년 동안에 팔좌(⼋座, 육조판서)를 거쳤고 나이가 90이 넘었다. 사람들이 청렴하고 근신하며 소탈하고 검소함을 칭찬했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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