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68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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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형(趙珩)
- 조형의 본관은 풍양(豊壤). 광주(光州)출신. 자는 군헌(君獻)이고 호는 취병(翠屛). 1626년(인조 4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1630년에 명경과(明經科)에 발탁되어 괴원(槐院)에 들었다가 다시 사국(史局)으로 옮겼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인조仁祖(재위: 1623-1649)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가 독전어사督戰御史가 되어 인조를 호위하였으며, 이듬해 환도하여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 1655년(효종 6년)에 대사간(大司諫)으로서 통신상사(通信上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그 후 병조참판(兵曹參判),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 도승지(都承旨)를 역임하고 다시 병조대간(兵曹大諫)이 되었다가 1659년에 예조참판(禮曹參判), 1660년(현종 원년)에 형조판서(刑曹判書), 그리고 대사헌(大司憲)을 제수(除授)하였다.다음 해 다시 공조(工曹)․형조판서(刑曹判書)․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장렬대비(莊烈大妃)의 복(服)을 정하는 문제에 연루되어 양주(楊洲)에 유배(流配)되었다. 익년에 유혁(宥赥)되어 기사(耆社)에 들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였던 공로(功勞)를 추기(追紀)하여 숭록(崇錄)에 진조(進朝)하였으며, 1679년(숙종 5년)에 졸(卒)하였다. 40여 년 동안 관직 생활을 하였으며,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저서로는 일본에 다녀온 과정을 담은 사행록使行錄인 『부상일기扶桑日記』가 있다. 시호(諡號)는 충정(忠貞)이다.
- 2020-03-10 | NO.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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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환 趙環 세종 12년(1430) 12월 15일∼세종 17년(1435) 12월 28일
- 조환 趙環 세종 12년(1430) 12월 15일∼세종 17년(1435) 12월 28일조환(?∼?)의 본관은 배천(⽩川)이며, 5대손이 중봉 조헌(趙憲)이다. 1404년 1월에 형조 도관정랑(刑曹都官正郞)이었다. 1430년 12월 2일 기록에 “나주목사 조환이 사조(辭朝) 하니, 인견하고 말하기를, ‘나주는 지경이 제주(濟州)와 연접하여 있기 때문에 도망치는 사람이 많으니, 너는 가서 그들을 안무하라.’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금성일기』 「경술년 1430년」에 “12월에 신임 목사 통정대부 조환이 도임.”하였으며, 「을묘년 1435년」 에 “전 목사 조환이 상호군이 되어 12월 28일에 상경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금성읍지』에는 “경술(1430년) 12월 25일 도임, 을묘(1435년) 12월 28일 상호군(上護軍)으로 발령받아 상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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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휘진 曺翬振 정조 19년(1795) 5월 22일∼정조 19년(1795) 8월 21일
- 조휘진 曺翬振 정조 19년(1795) 5월 22일∼정조 19년(1795) 8월 21일조휘진(1734∼1804)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휘세(輝世), 아버지는 통훈대부 행 산청현감을 지낸 조윤적(曺允迪)이다. 1777년 증광시 생원에 합격하여 영희전 참봉을 시작으로 1779년 장흥고 주부, 1780년 의령현령·함열현감, 1783년 신천군수, 1787년 밀양부사, 1794년 부사과를 역임하였다. 1795년 5월 10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5월 22일 도임하였다. 1798년 부평부사, 1803년 부호군, 1804년 2월 돈녕도정을 역임하 였다. 『금성읍지』에는 “을묘(1795년) 5월 22일에 도임하였고 동년 8월에 안주목사와 서로 바꾸기로 하여 8월 21일에 이임하였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7 | NO.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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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흡 曺恰 태종 9년(1409) 12월 5일∼태종 12년(1412) 5월 13일
- 조흡 曺恰 태종 9년(1409) 12월 5일∼태종 12년(1412) 5월 13일 조흡(?∼1429)의 본관 창녕(昌寧)이며 호는 퇴사헌(退思軒), 봉호는 옥천군(⽟川君), 초명은 조흡(曺洽)이다. 할아버지는 문하시중을 지낸 창성부원군 조민수(曺敏修)이다.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에 공신이 되었다. 1405년 동북면경차관 이후 상호군, 우군 첨총제, 가선대부 좌군도총제부 동지총제, 1408년 전라도절도사, 나주목사를 지낸 뒤전라도절제사, 풍해도병마도절제사, 영길도도순문사, 우군 도총제, 중군 도총제를 지냈 다. 1401년(태종 1) 공전과 노비를 내려준 사패왕지와 1406년(태종 6) 좌군도총제부 동지총제 임명, 1409년(태종 9) 중군도총제 임명, 1425년(세종 7) 우군도총제 임명 고신 왕지 3건이 보물이다. 시호는 공희(恭僖)이다. 『금성일기』 「기축년 1409년」에 “병마 도절제사 겸 판목사 조흡이 11월에 나주에 왔다가 임진(1412년)에 중군총제가 되어 돌아갔다.”고 기록되었으며, 『금성읍지』에 “기축(1409년) 12월 5일 도임, 임진(1412 년) 5월 13일 중군총제(中軍摠制)로 승진하여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 그의 졸기에 세종이, “ 안으로는 곧음을 지키고 밖으로는 삼가고 경계하였도다. …… 들어와서는 나라를 지키고 외적을 막는 책임을 맡았고, 나가서는 분주히 다니며 국가의 힘을 선양하는 노고가 있어서 자못 우리 왕가에 공로가 있으매 내 마음 속에 잊히지 않더니, 홀연히 부음이 이르니 마음이 아픔이 실로 깊도다.”라고 치제하였다. 순창 예천사(禮川祠)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공희(恭僖)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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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희 曺禧 중종 37년(1542) 9월∼인종 1년(1545) 윤1월 8일
- 조희 曺禧 중종 37년(1542) 9월∼인종 1년(1545) 윤1월 8일 조희(1490∼1564)의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자는 중경(仲慶) 또는 경원(慶原)이다. 담양 운제에서 대대로 살다 부친을 따라 순창(淳昌)으로 옮겨 살았다. 부친은 조숙덕(曺淑德)이 다. 1513년 계유 식년시 진사 2등 22위로 합격하였으며, 1517년 정축 별시 병과 3등 6위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온성판관, 평안도도사, 병조정랑, 통례원 봉례를 역임한 후 1542년 9월에 나주목사로 부임하였다. 1545년 윤1월 8일 사헌부가 나주목사 조희의 탐욕으로 온 고장 사람들이 원망하고 있다고 탄핵하여 파직 당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임인(1542년) 9월에 도임하였고, 을사(1545년) 윤1월에 체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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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희일(趙希逸, 1575~1638) 광주목사
- 허균(許筠)과도 교유했고, 문장과 서화에 모두 재능이 있었으며, 삼사(三司)에 있을 때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광주목사(使), 예조와 형조의 참판, 승문원 제조, 경상 감사 등을 역임하였다. 창계의 외조부 조석형(趙錫馨)의 부친이다. 1660년(현종1) 진사시에 입격한 뒤 동복 현감(同福縣監), 태인 현감, 호조 정랑, 합천 군수(陜川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기사환국 때 관직을 버리고 파주(坡州)에 은거하다가 호서(湖西)의 덕산(德山)으로 옮겨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丈巖集 卷14 郡守林川趙公墓誌銘, 韓國文集叢刊 157輯》창계(滄溪) 임영(林泳, 1649~1696)의 《창계집(滄溪集)》 제2권 / 시(詩) '마주 앉은 자리에서 외증조부 죽음 선생의 문집을 공손히 읽다가 〈중구일에 과거를 주재하다〉 시를 삼가 보고 문득 그 시운을 써서 외숙부의 영각 아래에 받들어 올리다[坐間敬閱外曾王考竹陰先生集伏覩試圍重九之作輒用其韻奉呈伯舅鈴閣下]'에서
- 2023-08-09 | NO.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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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희철 趙熙哲 철종 11년(1860) 3월 15일∼철종 11년(1860) 10월 21일
- 조희철 趙熙哲 철종 11년(1860) 3월 15일∼철종 11년(1860) 10월 21일조희철(1815∼?)의 본관은 풍양(豊壤)이며, 자는 성소(聖昭)이다. 할아버지는 한성판윤 조만원(趙萬元), 아버지는 가선대부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조학년(趙鶴年)이다. 1843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고, 1844년 증광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가주서를 시작으로 1845년 종부주부·병조좌랑·부사과, 1846년 정언, 1847년 부수찬·교리·병조정랑·헌납, 1848년 동부승지, 1850년 첨지, 1851년 우부승지, 1856년 동부승지, 1857년 형조참의를 지냈다. 1860년 2월 7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3월 15일 부임하였다. 1860년 8월 5일 전라감 사의 장계에 따라 의금부에서 나수하라는 전교를 내려 상경했다가 10월 21일 신병이 중하여 파직되었다. 1863년 우승지, 1864년 좌승지, 1865년 이조참판, 1866년 병조참판, 1867년 형조참판, 1868년 도승지, 1869년 대사헌, 1883년 호조참판, 1894년 호군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경신(1860년) 2월 7일에 제수되어 2월 26일에 임금을 사조하고, 3월 15일에 부임하였으며 10월에 상경 체직되었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11 | NO.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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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곡(舟谷) 박치화(朴致和)
- 주곡(舟谷) 박치화(朴致和, 1655~1722)는 찬성공(贊成公) 박지흥으로부터는 8세손이요, 하촌공(荷村公) 박정으로부터는 7세손이다. 박태현(朴台鉉)의 둘째 아들로, 1655년 광주 하동(河洞, 현재 세하동 동하마을)에서 태어났다. 주곡(舟谷)은 태어날 때부터 영민(英敏)하고 두뇌가 명석(明晳)하여 어린나이에 이미 오경(五經)과 제자서(諸子書)를 암송했고, 문사부(文詞賦)의 성어(成語)들은 당시 뭇 세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한다. 1681년(숙종 7년), 26세에 주곡(舟谷)은 진사시에 합격하고 태학(太學)에 유학하니 박학(博學)과 문아(文雅)에 있어 성균관(成均館)에서 앞선 이가 없었으며, 문사(文詞)가 웅대하고 화려할 뿐만 아니라 도덕과 인자온유(仁慈溫柔)함을 겸비하여 성명지제(性命之際)와 사물지미(事物之微)를 탐구하지 않음이 없었고, 사람을 겸손으로 대하니 티 없이 깨끗한 대선비라고 칭찬이 자자했다고 전한다.성균관에서 주곡(舟谷)은 당대의 명사들과 교류하며 시와 문장을 겨루고, 대적할 사람 없는 높은 수준에 올랐지만, 패악(悖惡)한 시대를 맞아 세상을 한탄하면서 벼슬에 뜻을 버리고 농고(聾瞽)로 편액(扁額)을 당(堂)에 걸고 칩거(蟄居)하며 일생을 마치게 된다.특히 주곡(舟谷)이 칩거하며 지은 박명사(博命辭)와 망미인사(望美人辭), 두 작품은 분수를 편안히 여기고 천명을 깨달으며, 물러나서도 임금을 잊지 못하는 굳은 지조를 노래한 작품으로 당대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당시 문인들은 이 두 작품을 중국 초나라 대시인 굴원(屈原)의 ‘천문(天問)’이나 ‘이소(離騷)’와 나란히 할 만하다고 평했다고 한다. 그리고 원려삼어부(遠癘三語符) 같은 산문에서는 도를 지키는 굳세고 바른 주곡(舟谷)의 삶에 대한 태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주요 작품집으로는 필사본 주곡집과 정초본 주곡유고가 있다. 소문중 주곡공파의 파시조다.한편, 주곡(舟谷)은 늘그막에 서구 벽진동에 주곡정(舟谷亭)을 짓고 유유자적하며 지냈다. 후손 박하선(朴夏善)이 중건하고 원운을 남겼다.
- 2020-08-04 | NO.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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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림 박경(1559~1616)
- 박경朴璟의 본관은 죽산, 호는 죽림竹林이다.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53대손이며 예빈시 정(禮賓寺正)을 지낸 박응현(朴應鉉)의 아들로, 직장(直長)을 지냈다. 동방 18현 중의 한 사람으로 평하고 있는 스승 사계 김장생金長生(1548~1631)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임진왜란 때 광산구 임곡 광곡마을의 칠송정 주인 기대승의 장자 함재 기효증의 종사관이 되어 의곡義穀을 모아 운반하였다. 병자호란 때도 동생과 함께 의병을 창의하는 등 천성적으로 의리에 강한 인물이었다.임진왜란 때 백의종군 벼슬도 없이 선조임금을 모시고 피난 북행하는 공훈을 세운 죽산박씨의 중시조인 박경은 선조임금이 그 공을 인정하여 벼슬길에 나서기를 소명했다.그가 했던 일은 마음에서 우러난 충성심에서 비롯되었기에 이를 사양하고 여생을 초야에 묻혀 충성할 것을 아뢰었다.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죽림처사(竹林處士)의 시호와 궤장을 내리고 1601년 가을 이곳에 국비로 용진산 북쪽 산허리 협곡이 이루어 물이있는 호적한 곳에 가학정駕鶴亭을 건립하게 하였다. 이후에도 영상 박홍구朴弘耉(1552~1624), 광해군에게 의리를 지킨 정승 좌의정 기자헌奇自獻(1562~1624) 등이 그에게 벼슬을 권했으나 그는 "번거로움을 싫어하고 고요함을 좋아함이 나의 본뜻이다. 쓸데없는 허명에 노예가 되어 나의 즐거움 바를 버릴 수 없다"라며 극구 사양했다. 정도전이 나주에 3년간 유배하며 썩은 조선을 설계하자 하며 개국을 꿈꾸며 산사에서 며칠을 머물고 갔다던 용진산 북쪽 기슭에는 400여 년의 사연을 품고 있는 유서깊은 가학정이 자리하고 있다. 가학정 현판은 1935년 중건 때 오산고보를 설립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하고 한말 마지막 사절이라는 염재 송태화(1872~1940)의 글씨이다. 일제가 당시 한국 국토의 30%에 해당하는 황무지를 아무런 보상도 없이 강점한 데 대해 이건하ㆍ이상설ㆍ안종덕 등과 함께 반대상소를 올리는 등 애국지사였던 노탄 송규현과 후손 박동춘의 중건기 등이 정자 내에 현액되어 있었다. 1979년에 재중수하고 지난 2007년 폭우로 무너져내려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 하는 중에 2012년 5월 광산구에서 남아있는 사진을 참고하여 비슷하게 재건하였다. 이 때문에 다시 중건한 정자에는 현판, 시판 등 아무 것도 없이 사라지고 상징적으로 남아있다.
- 2020-05-08 | NO.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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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응현
- 지응현池應鉉(1869~1959)은 농업만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믿고 농업학교 건립, 농업 투자 등 근대 전라도 농업의 좌표를 세운 인물이다.본관은 충주이며 자는 형숙亨淑, 호는 붕남鵬南이다. 기우만奇宇萬(1846~1916)의 항일의거 때 군량을 조달하였고, 병천사를 세웠다. 1934년 응세농도학원을 설립하여 교육에 노력을 기울였다. 응세농민독본應世農民讀本을 간행하였다. 1950년에는 원효사를 중창하였고 호남 각지에 시혜비가 세워졌다.문집인 『붕남실기』는 3권 1책의 석인본으로 1939년 간행했다. 서문은 민병승, 고광렬, 정인찬, 발문은 양효묵이 지었다. 권1은 충주지씨 세계 소개와 지응현이 개인 및 단체와 주고받은 시, 서, 문이다. 권2는 일본 강점기 지응현이 설립한 금석농장, 응세농도학원 설립과 운영에 관한 내용이다. 권3은 유림들이 지응현에 대한 소회와 공덕을 기리는 각 지역 시혜비 내용이다.당시 대부분의 전라도 지주들은 농업 이외의 사업에 투자하여 돈을 벌어들일 궁리만 하고 잇을 때 그는 과감히 농업에 투자했다. 응세농도학교와 응세수의학교를 설립했으며 아들 지창선을 일본으로 유학본어 신문물과 새로운 사상을 접하게 했다. 아들 창선은 덴마크 축산업만이 농업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면서 아버지에게 청년 농군 양성을 제안했다.흔히 옛 사람들이 ‘지참봉’으로 기억하는 지응현은 일제강점기에 광주에서 손꼽히는 땅 부자였다. 전성기에 그가 소유한 땅은 150만평에 달했다고 한다. 당시 광주 시내인 금남로 4~5가도 상당수 그의 땅이었는데 이 때문에 광주를 드나드는 사람치고 그의 땅을 밟지 않고 오가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그의 소유지는 금남로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병천사 앞에는 현재 13개에 달하는 지응현의 시혜비(송덕비)가 늘어서 있다. 지응현의 문집인 『붕남실기』에는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시혜비를 소개하고 있다. 이들 시혜비는 그의 땅을 붙여먹고 살던 소작인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그의 은혜를 기리는 뜻에서 세운 것인데 대개 비문에는 소작인들의 거주지가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지응현이 소유했던 토지의 분포상황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그에 따르면 지응현의 소작지는 당시 광주군 지한면.서방면.석곡면.효천면.우치면.극락면.대촌면.누문동.지금의 첨단지구, 장성군 진원면, 담양군 대전면, 곡성군 옥과, 전라북도 순창군 등이 망라되어 있다. 물론 이들 비석은 원래는 해당지역의 마을 입구나 도로변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처럼 비석들이 병천사 입구에 모인 것은 해방 후의 일이라고 한다.지응현은 단순한 대지주가 아니었다. 1927년 지응현은 금남로5가에 있던 숭명학교에 자기 소유의 땅 150평을 운동장으로 기부한 일이 있었다. 숭명학교는 당시 미국인 선교사 스와인하트Martin L. swinehart(1874~1957, 서로득)가 세운 사립학교였는데 이 선교사는 서구 내방동에 서흥학교를 비롯해 광주시내 곳곳에 여러 사립학교를 세워 운영하고 있었다. 그 대부분의 학교들이 경영난으로 어려움을 겪던 차에 때마침 지응현이 나서 땅을 기부했다.지응현이 개신교 신자였다는 정황은 없는 것으로 보아 그의 기부는 교육에 대한 평소의 관심이 작용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은 1934년 응세농도학원설립으로 이어졌다. 이 학교는 피폐한 농촌상황을 타개할 개혁운동의 일환으로 건립됐다. 기숙생활을 전제로 한 수업기간은 단 1년이었지만 군대식 교육 탓에 수강생들은 1년이 몇 년처럼 느껴질 정도로 혹독한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학교는 예전 가톨릭대학교가 있던 자리에 있었다.그런데 태평양전쟁 말기에 그 부지가 일제에 의해 수용되면서 학교는 사라졌다. 그럼에도 지응현은 조선대학교 근처의 현 살레시오여고 자리에 응세축산고급중학교와 광주수의고등학교 광주중학중학교 등을 열어 그 명맥을 이어나가고자 했다.응세축산학교는 1946년에 개교했고, 광주수의고와 중앙중학교는 1950년에 각각 문을 열었다. 응세축산고는 1951년에, 광주수의고와 중앙중학교는 1958년에 다시 폐교되고 말았다. 참고로 이들 세 학교의 학적부는 지금도 살레시오여고에서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런 인연으로 살레시오여고 자체가 이들 세 학교의 후신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병천사의 건립자이자 응세농도학원 등을 설립한 지응현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원래 담양군 대전면 중옥리 사람이었다. 그가 태어났을 즈음 담양군 대전면은 아직 광주 땅이었다. 대전면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광주에서 분할되어 지금처럼 담양군 관할로 바뀌었다.지응현이 처음부터 부호였던 것 같지는 않다. 그가 담양에 살 때만해도 일찍 부모를 여위고 가진 것이라고는 땅 두마지기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런 지응현이 어떻게 굴지의 부자가 된 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일부에서는 10대 때부터 포목상과 미곡상 등 장사로 재산을 모았다고 하며 일부에서는 조상의 묘 자리가 좋아 그 복으로 자수성가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어느 것도 현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지응현의 아들 가운데는 일제강점기 때 육상선수로 유명했던 지계선이 있다. 지계선은 이른바 씨 없는 수박의 개발자로 알려진 우장춘 박사의 제자이기도 했다. 지응현은 광주를 대표하는 서양화가였던 오지호 화백(작고)의 장인이다.
- 2018-05-28 | NO.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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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춘상(池春相, 1931~2009)
- 지춘상 전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1931~2009)는 귀중한 남도민속을 발굴하고 지켜낸 남도 민속학의 대부이다. 1931년생인 전남 함평 출신. 광주서중과 광주일고를 졸업하고 1952년 전남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일제가 우리 문화를 짓밟았던 시기가 지나고 나자 유신정권이 민속문화 대신 서구화를 부르짖던 시기를 그는 ‘민속학자’로 살았다.지 교수의 집은 집은 수집해온 자료와 기록한 서류들로 가득 찼다. 슬라이드 필름만 5,000매, 일반 필름이 20,000매, 인화한 사진 8,000매였고, 녹음테이프가 500여개, 릴테이프가 50개, 비디오테이프가 200여 개에 달했다. 개인이 조사 수집한 자료라고 하기엔 너무나 방대한 한국민속학사에서 가장 가치 있는 현장조사 자료들을 일개 개인이 축적해낸 것이다.그가 발굴하고 되살려낸 대표적인 남도민속이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고싸움놀이(제33호)와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강강술래다. 1940년을 마지막으로 단절된 고싸움놀이는 관련 기록이 없이 구술 자료만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칠석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마을의 유래와 풍수를 조사했다. 1969년 그는 마침내 단절된 고싸움놀이를 재구성해서 제10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받는다. 1970년, 고싸움은 중요무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이 된다.죽은 고싸움놀이가 그에 의해 되살아난 것이다.서남해안의 전통놀이 해남강강술래 역시 지춘상 교수가 노랫말을 복원해내고 가무를 재구성해서 1976년 전국민속예술경대회에 출전, 대통령상을 수상한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남아있던 강강술래가 한국을 대표하는 춤이자 놀이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88서울 올림픽에서 개막행사의 메인테마는 바로 고싸움이었다. 또한 폐막식에서는 강강술래가 감동적인 그림을 만들어냈다. 한 나라의 전통문화가 그렇게 한 사람의 믿기지 않는 열정에 힘입어 복원이 되어가고 있었다.광주 북구 건국동 용전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들노래 역시 1960년대를 끝으로 맥이 끊겨있었다. 전남대 지춘상 교수는 광주 북구청과 함께 용전마을 사람들의 증언과 고증을 토대로 들노래를 재현한다. 1999년 6월 북구청소년수련관에서 사라졌던 용전들노래의 재현행사를 가졌다. 그해 열린 제1회 광주광역시 민속예술축제에서 용전들노래는 최우수상을 받는다. 제40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는 종합우수상(국무총리상)을 수상한다. 2014년 용전들노래는 광주시 무형문화재 제22호로 지정이 되었다.뿐만 아니다. 진도씻김굿, 거문도 뱃노래, 가거도 멸치잡이 노래, 수많은 남도의 들노래들을 그는 우리 곁으로 되돌려 주었다. 그가 되돌려준 노래와 민속놀이들로 인해 풍요로운 진 것은 지나간 시간의 문화만이 아니었다. 옛 노래를 되찾은 공동체들은 가난과 결핍을 이겨낼 힘을 얻었다. 뿌리는 그렇게 소중한 것이었다.2009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남도민속학 개설』, 『전남의 농요』, 『전남의 민요』 등 수많은 귀한 책과 논문을 남겼고, 민속학 분야에 후학들을 길러냈다. 또한 남도민속학회를 창립하여 남도민속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 2021-04-09 | NO.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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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만곡
- 진만곡(陳萬穀), 湖節3下-173-2, 光州, 壬辰, 熊峙殉節 -《호남절의록》(1799)1592년 임진왜란 선무 원종공신록훈
- 2020-04-02 | NO.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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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원서 陳元瑞 공양왕 1년(1389) 12월 8일∼공양왕 2년(1390) 4월 12일
- 진원서 陳元瑞 공양왕 1년(1389) 12월 8일∼공양왕 2년(1390) 4월 12일진원서(?∼?)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문헌은 확인이 어렵다. 그의 행적은 1385년 8월 “전라도해도원수(全羅道海道元帥)로서 왜구 20여 인을 사로잡았다.”는 『고려사』 기록과 1388년 8월 “왜구 토벌을 위한 정지 장군의 남원전투에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참여하여 전과를 세웠다.”는 『고려사절요』의 기록이 있다. 『금성일기』 「기사년 1389년」에 “병마도절제사 겸 목사 진원서 12월 9일 도임하였다가 경오(1390년) 4월 13일에 떠났다.”는 기록이 있고, 『금성읍지』에는 “기사(1389년) 12월 8일 도임, 경오(1390년) 4 월 12일에 교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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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경흥 崔景興 영조 45년(1769) 9월 13일∼영조 45년(1769) 12월
- 최경흥 崔景興 영조 45년(1769) 9월 13일∼영조 45년(1769) 12월최경흥(1710∼?)의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자는 여행(汝⾏)이다. 아버지는 중훈대부 빙고별검을 지낸 최상겸(崔尙謙)이다. 1738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1739년 현릉참봉, 1740년 빙고별검, 1743년 형조좌랑, 1744년 창녕현감, 1749년 고양군수, 1754년 예천군수, 1757년 대구부사, 1759년 사복첨정, 1762년 인천부사에 부임하였는데, 1765 년 5월 재앙을 과장하여 보고한 죄로 파직을 당한다. 1769년 8월 21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8월 27일 하직하고 9월 13일 부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기축(1769년) 9 월 13일 부임하였고 같은 해 12월에 폄하 체직되었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5 | NO.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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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관 崔關 태종 15년(1415) 8월 16일∼태종 18년(1418) 3월 25일
- 최관 崔關 태종 15년(1415) 8월 16일∼태종 18년(1418) 3월 25일최관(?∼1424)의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자는 자고(⼦固), 호는 월파정(⽉波亭)이다. 1377년(우왕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382년(우왕 8)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392 년 예조총랑이 되었으나 정몽주의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다가 조선개국 뒤 풀려났다. 1402년 서북면경차관, 예빈시윤, 지형조사를 지냈다. 1406년 의용순금사대호군, 순금 사, 1418년 좌사간대부, 판안동대도호부사, 이조참의, 한성부윤을 지냈다. 『금성일기』 「을미년 1415년」의 기록에는 “목사 최관이 8월 16일에 도임하였다가 무술(1418년) 3월 25일에 전사판사(典祀判事)로 선환되었다.”라고 되어 있는데, 전사는 봉상시(奉常寺)의 다른 이름이다. 『금성읍지』에는 “을미(1415년) 8월 16일 도임, 임술(1418년) 3월 25일 전사판사로 승진하여 떠났다.”라고 기록되었다. *전라감사편 참조*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