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68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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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복선 鄭復先 숙종 44년(1718) 5월 7일∼숙종 45년(1719) 4월 1일
- 정복선 鄭復先 숙종 44년(1718) 5월 7일∼숙종 45년(1719) 4월 1일정복선(1658∼1719)의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양중(陽仲)이다.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을 지낸 정재해(鄭載海)이며, 1697년 2월에 나주목사를 지낸 정시선(鄭是先)이 형이다. 아들 정석구(鄭錫耉)도 금천군수로 선정을 베풀었으며 손자 정순검(鄭純儉)은 문과에 급제하고 대사간을 지냈다. 1688년 의금도사, 1694년 장원별제, 1695년 호조좌랑, 1696년 호조정랑, 1697년 전주판관, 1700년 대구판관, 1701년 함흥판관, 1702년 합천군수, 1706년 한성서윤, 1707년 여산부사, 1708년 원주목사, 1709년 평양서윤, 1712년 광주(光州)목사, 1717년 공조정랑, 1718년 4월 5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5월 7일 부임하고 1719년 4월 1일 나주에서 재직 중 별세하였다. 나아간 임지마다 선정을 펼쳐 고을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조정에 훌륭한 관리로 이름이 올려졌다. 나주 목사 때 병으로 임지에서 죽자 근처 고을 백성들이 곡을 하며 따랐다고 한다. 『금성읍 지』에는 “무술(1718년) 5월 7일 도임하였고 기해(1719년) 4월 1일에 한질(寒疾)에 걸려 죽었다.”라 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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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설 鄭渫 선조 31년(1598) 1월 22일∼선조 31년(1598) 5월
- 정설 鄭渫 선조 31년(1598) 1월 22일∼선조 31년(1598) 5월정설(1547∼1643)의 본관은 광주(光州)이며, 자는 원결(元潔), 호는 수월정(⽔⽉亭)이다. 남원 출신으로 아버지는 영천군수를 지낸 통훈대부 정인관(鄭仁寬)이다. 1576년 식년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1584년 성균박사, 1591년 군수를 역임했다. 1597년 12월 2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1598년 5월까지 재임하고, 1599년 6월 선산부사로 옮긴다. 광양에 수월정을 세우고 강학 교류하였다. 『금성읍지』에는 “무술(1598년) 1월 22일 도임하였고 동년 5월에 체포되어 갔다.”고 되어 있는데, 체포된 사유는 실록에서도 확인이 안 된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7 | NO.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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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세운(鄭世雲)
- 정세운(鄭世雲, ?~1362)은 고려 말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광주(光州)이고 출신지는 장흥이다.공민왕 때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애쓰면서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을 물리치고 국난의 위기에서 고려를 구해낸 난세의 영웅이었으나 음모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다. 정세운 장군의 본관은 광주이며 광산 출신으로 고려 공명왕 때의 충신이자 뛰어난 장군이다. 강릉대군(江陵大君, 공민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공훈을 세우고 돌아와서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자 그 공적으로 이등공신에 책록되었고 공민왕 5년(1356년)에 역적 기철(奇轍)을 때려죽인 공으로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가 되었다.기철은 원나라 순종황후 기씨의 큰 오빠로 그 당시 기씨 형제들은 고려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무례하고 방자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공민왕이 이를 제거하기 위해 일부러 궁중에서 술잔치를 열어 불러들인 뒤 기철과 그 추종자를 없애고 서울에 계엄령을 내려 그 일당들을 모두 제거했다. 정세운 장군은 이때의 공로로 일등공신의 서열에 끼게 되면서 김용(金鏞)과 왕의 총애를 다투게 되었다.1361년(공민왕 10년) 겨울, 홍건적이 쳐들어와 서울은 함락당하고 만다. 정세운 장군은 왕을 호송하면서 임금에게 민심을 위로 하도록 하고 자신은 여러 고을의 군사를 독려하여 적을 치게 해줄 것을 주청하였다.1362년 1월 공민왕은 정세운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삼고 홍건적을 치도록 명령하였다. 왕명을 받고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나라 안에 침입한 정세운 장군은 홍건적을 압록강 밖으로 몰아내고 서울을 수복하여 1363년(공민왕 12년) 호종 일등공신이 되었다.항상 사이가 좋지 않던 김용의 계략으로 안우·이방실·김득배를 비밀히 꾀어 살해하였다. 뒤에 그 무고함이 밝혀져 그 당시의 최고 통치 기관의 으뜸 벼슬인 첨의정승이 추증 되었다.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일세의 영웅이자 비운의 무장인 정세운 장군은 후세에 남겨진 개인적 기록이 거의 없다. 정세운 장군은 광주 정씨 가문의 시조로 무량에 뛰어나고 문장에도 능하여 많은 유집을 남겼다고 전하나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없다고 한다.
- 2020-03-02 | NO.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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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수홍 鄭守弘 세종 2년(1420) 1월 7일∼세종 2년(1420) 12월 9일
- 정수홍 鄭守弘 세종 2년(1420) 1월 7일∼세종 2년(1420) 12월 9일정수홍(?∼?)은 김제 출신으로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의백(毅伯)이며, 호는 풍천(楓川) 이다. 예의판서 정가종(鄭可宗)의 아들이다. 생원시를 거쳐 1390년 예부시에 합격, 권근·하륜·성석린 등과 교유하였다. 1408년 사헌부집의 때 하륜 관련 사건으로 나주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복직되었다. 1418년 사간원 우사간·좌사간, 예조참의, 1419년 12 월 판나주목사로 부임하여 임기를 마친 뒤 퇴직하였다. 덕행과 문장으로 명망이 있어서 전주의 학천서원과 김제 승방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금성일기』 「경자년 1420년」의 기록에는 “판목사 정수홍이 정월 7일 도임하였다가, 12월 9일 일을 마치고 돌아갔다." 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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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시선 鄭是先 숙종 23년(1697) 2월 22일∼숙종 25년(1699) 4월
- 정시선 鄭是先 숙종 23년(1697) 2월 22일∼숙종 25년(1699) 4월정시선(1650∼1717)의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자는 백초(百初)이다. 할아버지는 전라 감사를 역임한 병조참판 정만화(鄭萬和)이며, 아버지는 증 이조참판 정재해(鄭載海)이다. 처는 광산김씨 정선군수 김자남(⾦⾃南)의 딸이다. 1718년 5월에 나주목사를 지낸 정복선(鄭復先)의 형이다. 음직으로 관직에 나아가 1682년 돈녕참봉, 1684년 사옹봉사· 의영주부·낭청, 1685년 황주판관, 1687년 부사과·돈녕판관, 1688년 김제군수, 1692 년 선산부사, 1694년 청주목사를 지냈다. 1696년 12월 26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2 월 22일 부임하였다. 1697년(숙종 23) 5월 10일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이 닦여진 이를 천거하도록 했는데 음관의 경우는 정시선을 이세백(李世⽩)과 서종태(徐宗泰)가 추천 하였다. 1699년 부사직·수원부사, 1700년 오위장, 1701년 첨지·밀양부사, 1703년 광주(廣州)부윤, 1706년 부호군, 지사, 1708년 광주부윤, 1710년 황해도관찰사, 1712년 형조참의, 1713년 안동부사, 1715년 여주목사, 1716년 한산군수를 지냈다. 『금성읍 지』에는 “병자(1696년) 11월 26일 제수를 받고 정축(1697년) 2월 22일 도임하였고 기묘(1699년) 4월에 임기가 만료되어 체직되었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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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언충 鄭彦忠 영조 44년(1768) 8월 20일∼영조 44년(1768) 11월
- 정언충 鄭彦忠 영조 44년(1768) 8월 20일∼영조 44년(1768) 11월정언충(1706∼1772)의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자는 국이(國⽿), 호는 구옹(⿔翁)이다. 아버지는 정문서(鄭⽂瑞)이며, 어머니는 소영(蘇瑛)의 딸이다. 1733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였으며, 1740년 증광시 문과 을과 2위로 급제하였다. 1742년 강릉별검을 시작 으로 1745년 전적·감찰, 1746년 종묘령, 1747년 예조정랑, 1748년 지평, 1751년 겸춘추, 1754년 사헌부 장령, 1756년 평택현감, 1757년 연풍현감, 1767년 동부승지를 지냈다. 1768년 7월 30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8월 20일 부임하였다. 1768년 11월 형조참판에 이어 1769년 승지를 지냈다. 1796년(정조 20) 판윤 권엄(權)에 의하여 청백리로 천거되었다. 『금성읍지』에는 “무자(1768년) 8월 20일 부임하였고 같은 해 11월에 형조참판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5 | NO.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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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엄 鄭淹
- 정엄 鄭淹 정엄(1530∼1580)의 본관은 광주(光州)이며, 자는 문중(⽂仲), 호는 양촌(陽村)이다. 아버지는 가선대부 예조참판 정만종(鄭萬鍾)이다. 1552년 식년시 생원·진사에 모두 합격 하였으며, 1558년 식년시 을과에 4위로 급제하였다. 1562년 사간원 정언, 1563년 예조좌랑, 병조좌랑, 사간원 정언, 1564년 사헌부 지평, 1566년 병조정랑, 사간원 헌납, 1568년 장령, 1571년 실록 편수관, 장령, 1573년 통정대부 남원부사를 역임했다.1576년 8월에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임기 만기를 채우고 1580년 상반기에 이임했다. 《금성읍지 》에 선정비를 세웠다고 하였는데, 아마 1611년에 세운 정려비가 아닌가 한다. 정엄은 지극한 효성으로 모친이 병이 나자 옷을 벗고 잠자리에 눕는 일 없이 변을 맛보아 가며 지극정성으로 병간호를 하였다. 모친상을 당해서는 장례절차에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예를 다해 모셨지만 슬픔이 지나쳐서 병을 얻어 1580년 사망하였다. 이런 효심이 조정에까지 전해져 1611년(광해군 3) 그의 효성을 기리기 위한 정려가 광주(光州)에 세워졌는데, 세월이 흘러 퇴락하자 1975년에 새로 석조로 건립하였다. 정려 옆에는 평소 정엄이 편지 심부름을 시켰다고 전하는 개 형상의 석상도 함께 있다. 비문에는 「증가선대부사헌부대사헌겸(贈嘉善⼤夫司憲府⼤司憲兼) 홍문관제학예문관제학 동지(弘⽂館提學豫⽂館堤學同知) 경연춘추관의금부사오위도총관(經筵春秋館義禁府事五圍 都總管) 세자좌부변행통정대부승정원동부승지겸(世⼦左副賓⾏通政⼤夫承政院同副承旨兼) 경연춘추관의춘추소선관지제(經筵參贊官春秋條選官知製) 고양촌정선생정려비(敎楊村鄭先 ⽣旌閭碑)」라고 쓰여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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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엄(鄭淹, 1528 ~ 1580)
- 정엄(鄭淹, 1530 ~ 1580), 자는 문중(文中), 호는 양촌(陽村)생원 장원, 진사, 명종13년(1558년) 명경(明經) 문과 을과 4위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한림호당(選 翰林湖堂),검열(檢閱), 사인전랑(舍人銓郞), 삼사아장(三司亞長),동부승지(同副承旨), 수찬(俄陞修撰),1571 여산부사(礪山府使), 1573 남원부사(南原府使), 1574년 나주목사(羅州牧使), 3읍 거사비(三邑去思碑)증대사헌 양관제학(贈大司憲 兩館提學)효성이 출중하여 정려을 명하였다. 「삼강록」에 실렸다김평묵이 묘갈문을 쓰고, 성재 류중교가 묘지를 짓고, 회당 윤응선이 묘표를 썼다. 후종손 규종이 정려중수기를 지었다以孝命旌閭 金平默撰碣銘 事見 「三綱錄」 省齋柳重敎撰墓誌 晦堂 尹應善撰墓表 後從孫圭宗撰旌閭重修記* 정엄(鄭淹, 1530~1580) : 南道 인물(109) 한국매일정엄(1530~1580)은 조선중기의 문신, 자는 문중(文中), 호는 양촌(楊村), 본관은 광주(光州), 팔도관찰사 조계(棗溪) 만종(萬鍾)의 아들이다. 남구 양림동 출신으로 1552년(명종 7)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58년(명종 13)에 문과에 을과 4위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로 임명되어, 호당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1562년(명종 17)에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어 동부승지 허엽을 파직케 하고, 이듬해에 예조정랑, 병조 좌랑, 사간원 정언을 거쳐 1564년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어, 개성부 유생들이 음사를 소각한 일로 청금(靑衿)들이 죄 없이 구류되어 방면하도록 주청하여 방면케 하였다. 1566년(명종 21)에 병조 정랑거처 사간원 헌납이 되어 "대간의 직은 책임이 가볍지 않아서 서정(庶政)의 잘잘못을 일에 따라 모두 말해야 하는 것인데, 신들은 모두 무상한 사람들로 중한 지위에 있으면서 자리만 지키고 녹만 먹을 뿐 직책을 다하지 못하여, 옥당의 비난을 입고 있으니 하루도 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신들을 체직하기를 청하였다. "답하기를, "별로 잘못한 것이 없으니 사퇴하지 말라."하였다. 1569년(선조 2)에 사헌부 장령과 홍문관 수찬을 거쳐, 외직으로 여산군수에 임명되어 강직한 목민관으로 전라감사의 추천이 있었다. 1571년(선조 4)에 사헌부 장령으로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홍문관 교리를 거쳐 종시부 첨정 지제교로 명종실록 편찬에 편수관으로 참여하였다. 뒤에 남원부사가 되어 따뜻하게 민중들을 돌보고 자상하게 행정을 하되, 문서를 처리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모두를 친히 살펴 집행하고, 민원을 막는 폐단이 없으므로, 백성들이 매우 좋게 여겼다는 전라감사의 보고가 있었고, 전라 순무 어사(全羅巡撫御史) 신응시(辛應時)의 서장(書狀)에, "남원(南原)은 사람이 많고 땅이 넓어서 예전부터 다스리기 어렵다고 하는데, 부사(府使) 정엄(鄭淹)은 목소리와 낯빛을 사납게 하지 않아도 아전이 두려워하고 백성이 따라서 부임한 지 오래지 않아 온 경내가 편안합니다. 몇 해 동안 유임시키고 경관(京官)으로 차출하지 말기를 바라니, 어리석고 천한 백성이 사체(事體)를 모르는 것이기는 하나 그 성심으로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을 이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1574년(선조 7)에 모친 봉양을 위하여 나주목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면서 어머님의 병을 자신의 아픔보다 더 아파하며 정성껏 간병하였으나 돌아가시자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장사를 치른 뒤 죽었다는 갸륵한 효성에 나라에서 모두의 귀감으로 삼고자 1611년(광해 3)에 사헌부 대사헌에 증직하고, 효자정려를 명하여 양림동에 정려를 세웠다. 이 정려는 퇴락 되어 1975년 후손들이 석조(石造)로 다시 세웠다. 이 정려비각에는 주인의 심부름을 사람 이상 잘하였던 충견상(忠犬像)이 있다. 양촌 공이 개의 목에 문서와 전대를 걸어 주며 말하면 밥을 사 먹고, 만약 밥값을 너무 많이 가져가면 떠나지 않는 등 상상을 초월할 만큼 영리한 개였다. 어느 해 급한 일이 있어 임신 2개월로 산기가 있는 이 개를 한양으로 심부름 보냈다. 한양을 갔다 오다가 전주 근교에 새끼 9마리를 낳고 한 마리씩 물어 나르다 마지막 새끼를 물고 오다 지쳐 죽고 말았다. 양촌이 그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석공을 시켜 견상(犬像)을 조각해 집 뜰에 두고 추모했다 한다. 양촌 공이 죽자 그의 후손들은 양촌 공의 정려각을 세우고, 그 견상을 정려각 앞에 세워 양촌 공과 그 개를 기렸다는 것이다. 「사람 몹쓸 것은 개만도 못하다」는 비유도 있는 것처럼 여기에 실린 전설은 어쩌면 인간보다 더 나은 개의 충성심과 의리를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좋은 교훈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2020-09-24 | NO.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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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엽 鄭曄 선조 32년(1599) 10월 7일∼선조 33년(1600) 1월
- 정엽 鄭曄 선조 32년(1599) 10월 7일∼선조 33년(1600) 1월정엽(1563∼1625)의 본관은 초계(草溪)이며, 자는 시회(時晦), 호는 수몽(守夢)이다. 아버지는 진사 정유성(鄭惟誠)이고 아들 정원석(鄭元奭)은 문과에 급제하고 시정(寺正)을 지냈다. 1583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홍문관의 문한직(⽂翰職) 을 맡았다. 1587년 감찰·형조좌랑, 1593년 황주판관, 중화부사가 되었다. 1594년 군자감 첨정, 홍문관 부수찬을 거쳐 서천군수를 역임하였다. 1597년 수원부사가 되었다. 1598년에 응교, 집의로서 시강원 필선을 겸하고, 동부승지, 우부승지, 형조참의를 거쳐 1599년 10월 나주목사로 부임하였지만, 일을 하지 않아 전라도 병마절도사의 장계와 비변사의 추국을 받아 1600년 1월에 나주목사직을 떠났다. 다시 1600년 11월 병조참지, 대사간, 1601년 형조참의, 승정원 좌부승지, 1602년 종성부사, 1603년 고령 첨사, 1606년 성주목사, 1607년 홍주목사, 지제교를 역임한다. 1608년 예조참의, 1609년 대사성을 거쳐, 1610년에는 충청감사가 되었다가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1613년에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인조반정 이후에도 대사성, 동지경연, 원자 사부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쳐 대사헌을 다섯 번 겸하기도 하였다. 1625년 63세로 사망하였다.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 『수몽집(守夢集)』,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가 있다. 『금성읍지』에는 “기해(1599년) 10월 7일 도임하였고 경자(1600년) 1월에 사직하고 상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시호는 문숙(⽂肅)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7 | NO.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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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욱선 鄭勗先 숙종 45년(1719) 6월 7일∼숙종 46년(1720) 7월 5일
- 정욱선 鄭勗先 숙종 45년(1719) 6월 7일∼숙종 46년(1720) 7월 5일정욱선(1658∼1741)의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자는 면보(勉甫)이다. 아버지는 통훈대부행 강화부경력 정재대(鄭載岱)이며, 1722년 6월부터 1725년까지 나주목사로 재직한 정각선(鄭覺先)의 형이다. 1682년 증광시 진사에 합격하였으며, 1694년 사포별검, 1696 년 의금부도사·부사용, 1697년 낭천현감, 1704년 빙고별제, 1705년 한성판관·공조정 랑, 1706년 호조정랑, 1707년 사복첨정, 1711년 합천군수, 1712년 장악첨정·의성현 령, 1719년 4월 11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6월 17일 부임하였다. 1722년 광주(光州) 목사, 선공부정, 1724년 호조정랑, 1727년 공조정랑, 1729년 장악원 첨정, 1735년 군자정, 1737년 첨지중추부사, 1739년 돈녕도정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기해 (1719년) 6월 17일 도임하였고 경자(1720년) 7월 5일에 사직하였다.”라 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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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웅
- 정웅(鄭?), 湖節4中-099-1, 光州, 甲子, 樹勳-《호남절의록》(1799)
- 2020-04-02 | NO.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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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원후 鄭元厚 우왕 14년(1388) 9월 4일∼창왕 1년(1389) 2월 2일
- 정원후 鄭元厚 우왕 14년(1388) 9월 4일∼창왕 1년(1389) 2월 2일정원후(?∼?)의 본관은 연일(延⽇), 전공판서를 지낸 정인언(鄭仁彦)의 둘째 아들이며, 형은 공조판서 정광후(鄭光厚)다. 영해부사와 한성부윤을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광주 자운사의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의 복장 유물 가운데 1388년에 쓴 「중수발원문」 끝에 나주목사 정원후(鄭元厚)의 이름이 있다. 또한, 양산 통도사의 청동은입사향완(보물) 의 구연전부(그릇 입구) 밑면에 새겨진 점각 명문[施主嘉善⼤夫呂敬仁彦 尹万晋 鄭元厚 僧房寺 施納 通度寺] 속에 시주자로 그와 아버지의 이름이 있다. 2) 『금성일기』 「무진년 1388년」 “목사 정원후가 9월 4일에 도임하였다가 기사(1389년) 2월 1일에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고, 『금성읍지』에 “무진(1388년) 9월 4일 도임, 기사(1389년) 2월 2일에 교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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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자 송정황(1532~1557)
- 송정황宋庭篁 은 조선중기 문신이며 본관은 홍주洪州, 자는 천경天擎으로 광산구 극락면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사헌부 감찰, 동복 현감(同福縣監) 송구宋駒이며 모친은 여산송씨 숙인이다. 구례 현감(求禮縣監) 송정순(宋庭筍)의 동생이며, 김인후金麟厚의 문인이고 1557년에는 기대승奇大升 밑에서 수학하였다. 1545년 향시에 장원을 하였고 1555년 사마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다. 1556년 별시에 급제하여 괴원에 발탁되었으나 윤원형의 미움을 사서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로 임명되었다. 그는 학문과 경세에 밝아 세상의 그릇됨을 그냥 넘기지 못했다. 당시의 문란한 정치상황 아래에서 교서의 임무를 올바로 수행할 수 없음을 간파하고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이후 송정황은 벼슬의 길을 끊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할 목적으로 기대승을 찾아갔다.1557년에 기대승의 뜻을 받들어 주서 가운데 긴요한 곳만을 초출하여 『주자문록朱子文錄』을 편저하고 이 책의 발문도 직접 썼다. 26세로 금산에서 요절하였다. 그의 아들 송제민의 나이 겨우 아홉 살이었다.비보를 접한 송제민은 말을 타고 가다 말이 지치자, 도보로 여러 날을 먹지 않고 금산 땅에 이르렀다. 이후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이를 드러내어 웃는 일이 없었고 부친의 묘 앞에서 흘린 피눈물로 인해 풀이 말라 자라지 않으니 모두들 천생의 효자라 했다.송정황이 남긴 시나 부 등을 보면 웅장하고 유려한 문장 속에서 깊은 학식과 고매한 인격을 엿볼 수 있다.김인후는 송정황의 학문과 인품을 상나라 명재상인 이윤(伊尹: 상나라 명재상)과 안자(顔子)로 비교하였다. 그의 아들은 해광 송제민이며 송타는 그의 손자이다. 저서로는 『정자송공유고正字宋公遺稿』3권 1책이 있다.
- 2020-05-06 | NO.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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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학(鄭在鶴, 1823~?)
- 정사국(鄭士國) : 정재학(鄭在鶴, 1823~?)으로,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사국, 호는 팔광(八狂)이다. 전라도 광주에서 살았고 정수충(鄭守忠)의 후손이다. 기정진의 문인이다.노사집 제8권 / 서(書) 에 정사국에게 답하다答鄭士國 在鶴〕라는 편지가 있다. 먼 객지에서 편지를 보내주니 갑절이나 정감이 드네. 이 사람은 하늘에 죄를 지었으니 누구에게 하소연하겠는가. 늙어서 죽지 못한 것을 스스로 한탄할 뿐이네.편지가 온 뒤로 해가 바뀌었는데, 여체(旅體 객지에 있는 몸)가 편안한가? 다만 조상을 받드는 예(禮)를 물어주었는데 이미 정리에 부합하니 의리에 맞게 일으켜도 무방하네. 더구나 경전에 참조할 만한 문헌이 있고 선현도 이미 행한 일이 있음에랴. 염려치 말고 행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내 생각은 이와 같을 뿐이네.
- 2021-11-18 | NO.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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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중수 鄭中守 세종 19년(1437) 1월 19일∼?
- 정중수 鄭中守 세종 19년(1437) 1월 19일∼?정중수(?∼?)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문헌은 확인이 어렵다. 1418년 5월에 ‘호군(護軍) 정중수(鄭中守)’라는 기록이 있으며, 1427년 7월에 옥구첨절제사, 1434년 4월에는 첨지중추원사에 임용되었다. 『세종실록』에는 1436년 11월 성주목사로 재직 중인 것은 기재되어 있으나, 그 이후의 기록은 없어 나주목사의 부임 시기는 확인이 안 된다. 『금성일기』 「정사년 1437년」에 “신임 목사 통정대부 정중수가 1월 19일 도임하였다.” 라고 되어 있다. 『금성읍지』에는 “정사(1437년) 1월 19일 도임,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일자는 기록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