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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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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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희룡 李喜⿓ 숙종 6년(1680) 7월 20일∼숙종 9년(1683) 8월 7일
    이희룡 李喜⿓ 숙종 6년(1680) 7월 20일∼숙종 9년(1683) 8월 7일이희룡(1639∼?)의 본관은 덕수(德⽔)이며, 자는 군서(君瑞)이다. 아버지는 이륙(李稑)이 다. 1672년 별시 문과에서 병과에 급제하였다. 1673년 사변가주서·부사정, 1674년 현종의 국장도감 감조관, 1675년 안주판관, 1676년 병조정랑, 1677년 영광군수를 지냈 다. 1680년 7월 8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7월 20일 도임하였다. 향약을 시행하기도 했다. 1683년 8월 7일 전라도관찰사의 장계에 의해서 파직되었다. 1684년 사간, 우부 승지, 홍주목사, 1686년 강양감사, 1688년 제주목사, 1694년 동래부사, 1697년 여주 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경신(1680년) 7월 20일 도임하였고 계해 (1683년) 7월에 사직하였다.”라 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141
  • 이희보 李希輔 중종 21년(1526)∼중종 22년(1527) 2월 4일
    이희보 李希輔 중종 21년(1526)∼중종 22년(1527) 2월 4일이희보(1473∼1548)의 본관은 평양(平壤)이며, 자는 백익(伯益), 호는 안분당(安分堂)이 다. 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이극문(李克⽂)이다. 1496년 식년시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1501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 이조정랑, 내수사별제, 부평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506년 직제학에 재직 중 장녹수(張綠⽔)에게 아부하였다는 사헌 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1509년에 다시 기용되어 선산부사, 예빈시 첨정, 돈령 부정, 장례원 판결사, 공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526년에 나주목사에 부임하였으나 1527년에 “정령(政令)을 잘못 시행하고 세금을 끝없이 징수하는데다가 폐단을 일으킨 일이 많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2월 4일 파출된다. 이후에도 1542년 파주목사, 1547년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안분당시집(安分堂詩集)』 2권이 전한다. 『금성읍 지』에는 “병술년(1526년)에 도임하였으나 8개월만에 체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5 | NO.140
  • 이희용
    쌍석(雙石) 이희용(李熙容, 1853∼1931)의 자는 國瑞, 본관은 全義로, 1853년 1월 27일 광주 흑석동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행동거지가 단정했으며, 독실하게 배웠다. 1874년 약관에 장성의 노사 기정진 문하에 들어가, 1875년 莘塢 金祿休와 사귐을 맺고 노사선생 문하에서 동문수학했다.1879년면암 최익현을 만났다. 1879년 12월에 노사선생이 별세한 후로는 老先生을 섬기는 마음으로 송사 기우만을 모셨다. 1884년 어머니 상을 당했으며, 1891년 式年試 進士에 급제했다. 1896년 송사 기우만이 격문을 각 읍에 띄워 의병을 모집할 때 시종 같이 일하다가 해산의 왕명을 받고 통곡하고 귀향하여 자연에 묻혀 낚시로 소일했다. 1898년 경술국치를 분통해 하면서 단발령이 내려지자 “부모가 주신 머리털을 훼손할 수 없다.”고 하면서 죽음을 불사하고 단발을 하지 않았다. 그의 10대조 石灘 李愼儀를 위해 遺愛祠 옛터에 藏閣을 건립했다. 또한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자 城市의 티끌에 발을 들어놓을 수 없다고 하면서 정원 앞에 雙石亭을 세우고 花鳥雲月에 마음을 붙였다. 이 雙石亭에서 弦窩 高光善․石陰 朴魯述․後石 吳駿善․植齋 奇宰․普山 奇宇承 등의 일대 명사들과 道義之交를 맺었다. 스스로 실천궁행의 학문에 힘쓰다 79세의 일기로 1931년 6월 30일에 타계했다. 부인 長興高氏 사이에서 敎一과 敎翼 2남과 2녀를 두었다. 
    2020-04-08 | NO.139
  • 이희용(李熙容)
    이희용(李熙容, 1853~1931)의 본관은 전의이며 자는 국서(國瑞), 호는 쌍석(雙石) 이다. 광주 하남면 장자동에 살았다.부 : 李淙植조 : 李達鉉증조 : 李志嶷외조 : 奇師賢처부1 : 高濟喆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1889년에 眉巖 柳希春을 기리는 모임에 참여하였다.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참석하였다.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20냥을 성금으로 내었다.1927년 8월에 吳駿善 柳昌秀 등과 함께 蘆沙 문도들에게 高山祠에 함께 배향할 제자들의 위패를 정하자는 내용의 통문을 보냈다.『雙石遺稿』가 있다.
    2020-08-05 | NO.138
  • 일성록 : 전 광주 목사(光州牧事) 윤명렬(尹命烈)
    일성록, 순조 8년 무진(1808) 8월 27일(경신)[06] 시수 윤광안(尹光顔) 등은 의처(議處)하고 장현택(張鉉宅) 등은 조율(照律)하며 이신경(李身敬) 등은 감방(勘放)하라고 명하였다.의금부가 아뢰기를,“전 광주 목사(光州牧事) 윤명렬(尹命烈)의 원정에 ‘방폐(房嬖)와 간교한 아전이 결탁하고 농간을 부렸다고 한 것은 한마디 말로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1000금(金)의 뇌물을 바치고 창색(倉色)에 차임되려고 꾀하였다는 말은 가장 핵심이 되는 판단 근거이지만, 일의 진행 과정이나 결말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입증하지도 않았고 관련자의 성명(姓名)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지적하지 않았으니 그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이른바 창색은 혹 남몰래 챙기는 이득이 생길 수 있는 자리이지만 1000금이나 되는 뇌물을 사사로운 경로를 통해 보냈다고 한다면, 이득은 적고 쓰는 돈은 많으니 결코 이런 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차임된 창색은 모두 새로 부임할 때 맞이하였던 수고에 대한 보답으로 한결같이 고을의 규례를 준용하였으니 뇌물을 받고 차임했다는 말은 애당초 가당치도 않습니다. 우금(牛禁)을 어긴 데 대한 속전으로 수천 금을 사사로이 징수하였다는 일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부임한 지 수년 동안 도축에 대한 금령을 범한 자를 적발하는 대로 보고하였는데 그 수가 20여 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 16명은 감영에 보고하고 속전을 거두었고 2명은 형신을 가하여 징계하고 풀어 주었으며 1명은 논하여 보고하고 배소(配所)로 보냈고 4명은 마침 공해(公廨)를 짓는 일로 인해 거둔 속전을 감영에서 떼어서 보태도록 허락하였으니, 그동안 거두어들인 속전의 수효가 감영과 본읍의 문안(文案)에 분명히 남아 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민역의 비용을 방납해 주어 백성들의 입을 막았다는 말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본주에서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관리는 으레 돌아가기에 앞서 200금을 출연하여 각 면에 나누어 주고 이것으로 민역을 방납하는 밑천으로 삼게 합니다. 저 또한 규례를 살펴 행한 것이지 어찌 백성들의 입을 막으려는 의도에서 이 일을 하였겠습니까. 본읍의 환정(還政)으로 말하자면 본래부터 곡식이 정실(精實)하였는데 근래 들어 아전들의 농간이 점점 발생하였기 때문에, 제가 부임한 뒤로 과연 아전들의 포흠을 징수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해마다 포흠 낸 것을 바치도록 독촉하여 징수한 것이 3000섬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반대로 아전들의 포흠을 덮어 주었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실상에 가까운 말이겠습니까. 이른바 번질(反作)이란 곧 환곡을 거두어들이지도 않고 이미 거두어들인 것처럼 꾸미고서 다음 해 봄이 되면 그대로 나누어 준 것처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작년의 경우는 풍년이 크게 들었으므로 애당초 1포(包)도 거두어들이지 못한 것이 없었고, 아전들의 포흠도 조사하고 징수하여 역시 조금의 곡식도 남기지 않았으니, 어사가 번질하였다고 운운한 것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킨단 말입니까. 더구나 저는 작년 10월에 말미를 받아 상경하였고 고을로 돌아온 것은 창고를 봉한 뒤였으니, 지레 창고를 봉하였다는 말은 더욱 논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어사는 이미 번고(反庫)하지도 않았고 게다가 문안을 조사하지도 않고서 이처럼 논열하였는데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일찍이 시종을 거쳤으니 의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였다.
    2022-03-08 | NO.137
  •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
    정의림鄭義林의 자는 계방季方, 호는 일신재日新齋이며 본관은 광산으로, 綾州 大德에서 鄭濟玄과 珍原朴氏 致聖의 딸 사이에서 1845년(憲宗 11) 11월 출생했다. 그의 선조들은 조선시대 때 纘 이후 나주에 줄곧 거주하였으나, 그의 증조 埰가 영암으로 이주하고 조부 加錫이 다시 능주에 이주하였으며, 정의림의 조부와 부친은 각각 81세를 살아 壽職으로 통정대부를 받았다. 정의림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사색을 좋아하였는데, 이미 서당을 다니기 전에도 華夷에 대해 구분하고, 화이는 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신상에도 華夷가 있는데 아름다운 것은 華이고 악한 것은 夷라고 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그는 10세에 明村 黃綺顯에게서『小學』을 배우고 13세에 觀水齋 朴永柱에게서 四書를 배웠으며, 17세부터는 山寺에 들어가 스스로 三經을 읽었다. 이어 그는 20세 때에 서울을 다녀오는 길에 부여에서 族大父 石塘 鄭龜錫을 배알하고 ‘日新齋’라는 아호를 받고 기정진에게서 수학할 것을 권유받았다. 정의림은 4년 후 1868년에 장성의 하사로 노사 기정진을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에 정진한 결과 기정진으로부터 김석구, 정재규와 함께 노사학파를 이끌어갈 인물로 기대되었다. 동문들로부터 蘆門三子로 불리게 되었다. 기정진은 1875년 10월 자신의 평생의 역작인 『納凉私議』를 김석구, 정의림, 정재규 3인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4일 밤낮을 강론하였으며, 다시 1879년 정월에 「納涼私議」와 「猥筆」을 강론하게 되자 이들은 기정진의 학설을 이해하고 기정진의 학설을 독실하게 믿고 따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정의림은 학문적인 명성이 점점 높아지자 전라감사였던 韓致肇나 능주목사였던 南學熙로부터 강학과 향음례에 초대되어 일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1879년에 스승인 기정진의 별세, 다시 3년 뒤인 1882년에는 부친의 별세로 한동안 강학활동에 전념하지 못하였다가, 부친상을 마친 1884년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강학활동을 시작하였다.그는 大德에서 品村, 墨谷, 星洞, 佳山 등으로 자주 옮겨 다니면서 강학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곳곳마다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이어 정의림의 강학활동은 능주목사에게도 알려져 1886년 학행으로 능주목사가 도백에게 천거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1887년에는 여러 친구들과 문인들을 데리고 무등산 일대를 유람하였는데, 이 때 유람한 인물들과 詠歸會를 조직하고 1891년 겨울에는 평생의 강학처인 詠歸亭을 축조하고 5성 4현을 모시고 춘추로 享祀하고 강론에 힘썼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문인들이 크게 늘어났다. 그는 영남의 기정진 문인과도 활발하게 교유하여 1891년 2월에는 삼가의 정재규를 방문하여 뇌룡정에서 강회를 개최하였으며, 다시 그해 8월에는 지리산 화엄사에서 鄭載圭와 崔琡珉, 金顯玉 등 영남문인과 鄭義林과 鄭時林 등 호남 문인들이 모두 모여 대규모 강회를 실시하였다. 이후 그는 정재규와 함께 기정진의 학설에 대해 토론하는 한편, 金平黙, 柳重敎, 崔益鉉 등 화서학파와의 교류에도 힘썼다. 또한 그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招討使 閔種烈에게 편지를 보내 동학이 극성하다고 하여 백성을 죽이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정학을 높여 이단에 물들지 않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1896년 기우만이 나주에서 의병운동을 일으키자 적극 가담하였다. 또한 1902년 스승인 기정진의 문집 간행시, 영남의 노론들로부터 기정진의 「猥筆」이 이이의 학설을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고 문집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정의림은 영남과 호남의 각 읍에 통문을 보내 기정진은 이이의 학설을 篤信하였으며, ‘기틀이 스스로 그럴 뿐이다(機自爾也)’고 한 이이의 주장이 주기로 이해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고 변론하였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고 역적들을 처단하자고 유소를 작성하였으며, 최익현이나 정재규, 기우만의 거의에도 참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의병운동이 실패하게 되자, 정의림은 일체 두문 불출 자정하다가 1910년 10월 10일 별세하였다. 사후에 문인들이 그의 학덕과 절의를 추모하기 위해 화순의 七松祠, 三山祠, 龍山祠와 담양의 金谷祠 등에 제향하였다. 그는 驪興 閔致煥의 딸 사이에서 슬하에 아들 尙默과 光山 李進休, 洪州 宋光壽, 密陽 朴敬東에게 시집간 세 딸을 두었다. 한편 『日新齋集』은 21권 12책으로 문인 朴準基, 洪承渙 등과 族人 鄭炳海 등이 유고를 모아 1927년 간행했으며, 서문과 발문이 없다. 문집에는 정의림이 정재규나 황철원, 양회락 등과 토론한 많은 성리학적 관련 자료, 능주나 화순, 보성 지역과 관련된 많은 인물에 대한 정보, 위정척사운동이나 의병관련 자료를 남기었다.특히 1902년 송병선 문인이나 전우 등에 의해 기정진 학설이 논란되었을 때, 영, 호남 일대에 통문을 보내 기정진이 이이의 학설을 계승하여 주리설을 주장하였음을 밝혔다. 문집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2020-06-06 | NO.136
  • 임구 林球 태조 7년(1398) 10월 22일∼정종 2년(1400) 12월 22일
    임구 林球 태조 7년(1398) 10월 22일∼정종 2년(1400) 12월 22일임구(?∼?)의 본관은 상산(常⼭, 진천)이며, 아버지는 상산군(常⼭君) 임지(林智)이다.『태조실록』 1393년 3월 23일 기록에 삼사좌승에서 경기우도안렴사로 임명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권근의 『양촌선생문집』 15권(서류)에 「교주도 안렴사 임구를 전송하는 서」라는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임구는 진천에 있는 장렬사(莊烈祠)에 고려 무신 집권기의 권신 임연(林衍)과 상산임씨의 시조인 임희(林曦)와 함께 배향되어 있다. 벼슬이 호조참의에 이르렀다. 『금성일기』「계유년 1393년」 “목사 임구가 10월 22일 도임하였 다가 경진(1400년) 12월 22일에 돌아갔다.” 『금성읍지』에는 “무인(1397년) 10월 22 일 도임, 경진(1400년) 12월 22일에 교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135
  • 임대준 任⼤準 고종 28년(1891) 8월 19일∼고종 28년(1891) 11월 13일
    임대준 任⼤準 고종 28년(1891) 8월 19일∼고종 28년(1891) 11월 13일임대준(1857∼?)의 본관은 풍천(豊川)이다. 부친은 진사 임백희(任百熙), 동생은 문과에 급제하고 중추원고문을 지낸 친일파 임선준(任善準)이다. 1882년 증광시 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1883년 가주서, 1885년 주서, 1886년 병조정랑, 1890년 장악원정, 승지,1891년 형조참판을 지냈다. 1891년 6월 22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8월 19일 부임하 였다. 1891년 9월 22일 제주목에서 선후 운송한 공마(貢⾺)를 연로(沿路)에서 제대로 호송하지 않아 고실(故失) 된 것이 많다하여 나주목사 등을 나문하라는 사복시 제조의 계에 따라 전교가 내린다. 10월 11일에는 죄를 진채 거행하라 한다. 11월에 안악군 수, 1893년 영변부사, 황해도 재령군 안핵사가 되어 농민봉기 조사, 1894년 부호군, 1895년 한성재판부 판사5등, 1896년 중추원 의원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신 묘(1891년) 6월 22일에 형조참판에서 제수되어 8월 19일 부임하여 재직하다가 신묘 (1891)년 11월 13일 체직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11 | NO.134
  • 임방울(林芳蔚, 1905~1961)
    임방울(林芳蔚, 1905~1961)은 1905년 지금의 광주광역시 도산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임승근(林承根)이나 임방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데는 두 가지의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나는 어려서 울지 않고, 방울방울 잘 놀아서 임방울이라 불렸다는 설과 당대의 명창이 소리를 듣고 탄복해 “너야말로 은방울이다”라고 칭찬하면서 이름으로 굳어졌다는 설이 있다. 협률사를 조직해 활동했던 당대의 국창 김창환이 외숙으로, 어려서부터 외사촌형들에게 틈틈이 소리를 배웠다고 한다. 12살이 되던 해 박재실의 창극단에 들어가 무대에 섰으며, 박재실로부터 춘향가, 흥보가 등을 전수받았다. 이후 공창식 선생과 유성준 선생으로부터 서편제와 동편제의 소리를 배웠다. 임방울은 1929년 25세가 되던 해 상경, 매일신보사 주최 ‘조선명창연주회’에 참가해 그의 불후의 명곡이 된 ‘쑥대머리’를 불러 청중을 사로잡았다. ‘쑥대머리’는 춘향가 가운데 ‘옥중가(獄中歌)’의 한 대목으로 당시 암울한 시대상과 연결되며 관객의 호응을 얻었던 것이다. 그는 특히 ‘우는 소리’를 잘해 ‘쑥대머리’ 외에 홍보가의 ‘가난 타령’도 대중에게 크게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임방울은 1960년 봄 부산에서 공연하다 무대 위에 쓰러진 뒤 급격히 쇠약해졌으며, 그 해 가을 김제 장터에서 소리를 하다가 다시 쓰러졌다. 결국 이듬해인 1961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은 2백여 명의 여류명창들이 소복을 입고 상두꾼이 되어 당대 소리꾼이 가는 마지막 길을 지켰다.배연형, 임방울 흥보가의 바디 연구, 국악교육 제32집, 2011.
    2021-04-09 | NO.133
  • 임식(林植)
    임식(林植, 1539~1589)의 자는 숙무 호는 송파이다. 금호의 종자(從子)로 1539년 출생, 1564년 사마시에 합격, 1572년 문과급제 하여 승문원에 보직하였다. 영남호송관, 승정원주서를 거쳐 공조, 병조좌랑, 성균관 전적, 호남순무어사, 4조정랑(이조, 병조, 예조, 형조), 호서경차관, 홍문관 교리, 평안도사, 해운, 영변판관, 구성, 강계부사 등을 두루 역임했다. 1586년에 충남 결성 용호해구에 부해정을 짓고 은거하다가 1589년 51세로 졸(卒)하였다. 유고 《송파집》 1권이 남아있다.
    2020-07-15 | NO.132
  • 임육 任焴 정조 19년(1795) 9월 3일∼정조 24년(1800) 4월 24일
    임육 任焴 정조 19년(1795) 9월 3일∼정조 24년(1800) 4월 24일임육(1736∼?)의 본관은 풍천(豊川)이며, 자는 여휘(汝輝), 호는 서하(西河)이다. 아버지는 유학 임항주(任恒周)이다. 1774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여 1779년 선공봉사, 1781 년 서부도사, 1782년 인제현감, 1788년 고양군수, 1789년 영해부사, 1790년 홍주목 사를 역임하였다. 1795년 8월 22일에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9월 3일 도임하였다. 1796년(정조 20) 5월 25일 『승정원일기』에 나주 군병 신창련(申昌連)은 그 형 수군보 대(⽔軍保⼤)를 대신 보내고 김금이(⾦⾦伊)는 그 형인 청대죽(⾭⼤⽵)의 보명군(保明軍) 을 대신 보내는 등 엄중한 상번군(上番軍)의 점고를 대신하다가 적발되어 붙잡힌 사례에 대해 나문하여 처리하라는 논의가 있다. 5월 28일 나문하라는 전지가 계하되었다. 1801년 통정대부, 동부승지, 1803년 형조참의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을묘 (1795년) 9월 3일에 도임하였고 경신(1800년) 4월 24일에 상경하여 체직 되었다. 나주 월정서원의 강당 중수상량문을 1796년에 지었으며, 남간 나해봉(羅海鳳, 1584∼ 1638)의 『남간유집』의 서문을 짓기도 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7 | NO.131
  • 임장 任章 광해군 10년(1618) 7월 15일∼광해군 11년(1619) 2월 8일
    임장 任章 광해군 10년(1618) 7월 15일∼광해군 11년(1619) 2월 8일임장(1568∼1619)의 본관은 풍천(豊川)이며, 자는 자룡(⼦⿓)이다. 할아버지는 한성부 판윤 임열(任說), 아버지는 종부시정 임영로(任榮⽼)이며, 어머니는 청릉부원군 심강(沈 鋼)의 딸이다. 1591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605년 증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시강원 설서가 되었다. 1606년 승정원 주서·기사관·예문관대교·시강원 설서, 1607 년 형조좌랑·사간원 정언·성균관 전적, 1608년 사간원 정언, 부수찬, 1609년 지평, 수찬, 헌납, 1610년 이조좌랑, 이조정랑 등 요직에 임명되었다. 『선조실록』의 편찬 때편수관(編修官)으로 참여하였으나, 1613년 영창대군(永昌⼤君)을 옹립하려 한 혐의로 발생한 박응서(朴應犀) 옥사 사건에 관련되어 파직되었다. 1618년 6월 8일에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7월 15일에 부임하였다. 『광해군일기』 중초본 권130에 “본주(本州)는 호남의 큰 고을로서 위급한 일이 있을 때 믿고 의지할 만한 곳이니, 군병을 조련하고 성지를 수리하고 군량을 쌓아두고 기계를 갖추는 등의 일을 각별히 마음을 다해 착실히 거행하라고 나주목사 임장(任章)에게 이르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금성읍지』에는 “무 오(1618년) 7월 15일 도임하였고, 기미(1619년) 2월 8일에 별세하여 3월 12일에 발인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를 기리는 시 「만임자룡(挽任⼦⿓)」이 심희수(沈喜壽)의 문집 『일송집(⼀松集)』에 수록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7 | NO.130
  • 임홍망 任弘望 숙종 9년(1683) 9월 24일∼숙종 10년(1684) 1월 22일
    임홍망 任弘望 숙종 9년(1683) 9월 24일∼숙종 10년(1684) 1월 22일임홍망(1635∼1715)의 본관은 풍천(豊川)이며, 자는 덕장(德章), 호는 죽실(⽵室)이다. 아버지는 증좌참찬 임환(任喚)이다. 1657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666년 별시 문과에 을과 1위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소속되었다. 1671년 찰방, 1674년 지평·정언, 1682년 승지, 1683년 8월 16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9월 24일 도임하였다. 이후에도 1685 년 승지, 1687년 공흥도관찰사, 1694년 승지, 1696년 광주(光州)목사, 1699년 도승 지를 거쳐 1715년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저서로 『죽실집』 2책이 있다. 『금성읍지』에는 “계해(1683년) 9월 24일 도임하였고 갑자(1684년) 1월 22일 병으로 체직하였다.”라 하였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129
  • 임회 林誨 선조 1년(1568) 7월 27일∼선조 2년(1569) 5월
    임회 林誨 선조 1년(1568) 7월 27일∼선조 2년(1569) 5월임회(1508∼1573)의 본관은 부안(扶安)이며, 자는 헌가(獻可), 호는 죽곡(⽵⾕)이다. 참봉 임경손(林景孫)의 아들이다. 장흥 기산리 출신이다. 처음 이름은 회(薈)라 했는데 회(晦), 회(誨)로 고쳤다. 1534년 진사시에 3등으로 합격하고 1540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하여 호당에 뽑혔다. 공조정랑, 담양군수, 순창군수, 남원부사를 거쳐 1568년 7월에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1569년 5월에 이임하였다. 지방의 여러 고을을 다스릴 때 선정을 베풀었기에 가는 곳마다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다. 서장관으로 북경에 갔을 때 그곳 문인 들과 교유하였는데 모두 선생의 덕행과 문장을 칭찬했다고 한다. 장흥 기양사와 강진 서봉서원에 배향되었다. 형인 임분(林賁, 1501∼1556)의 자료를 함께 모은 『서곡선생사실 (書⾕先⽣事實)』이 전한다. 형 임분과 기봉(岐峰) 백광홍(⽩光弘), 옥봉(⽟峯) 백광훈(⽩光 勳), 남계(南溪) 김윤(⾦胤), 동계(東溪) 백광성(⽩光城), 풍잠(⾵岑) 백광안(⽩光顔), 지천(芷 川) 김공희(⾦公喜)와 더불어 기산팔문장(岐⼭⼋⽂章)으로 불렸다고 한다. 『금성읍지』에는 “무진(1568년) 7월 27일 도임하였고, 기사(1569년) 5월에 파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5 | NO.128
  • 자후 ⿈⼦厚 세종 7년(1425) 7월 6일∼세종 8년(1426) 3월 24일
    자후 ⿈⼦厚 세종 7년(1425) 7월 6일∼세종 8년(1426) 3월 24일황자후(1363∼1440)의 본관은 회덕(懷德)이며, 자는 선양(善養)이다. 태종 초에 성주목 사를 거쳐 1412년 인녕부사윤(仁寧府司尹), 1413년 형조좌참의가 되어 호패법의 제정을 건의하였다. 1414년 호조참의·경기도관찰사·개성유후사 부유후, 1415년 충청도관찰 사를 거친 후 공안부윤이 되어 동전의 사용을 건의하였다. 1416년 전의감제조 때 가짜 약재 구입에 연루되어 귀양 갔다가 두 달 만에 풀려났다. 1421년 좌군총제, 1422년 충청도관찰사, 1423년 나주목사에 임명되었다. 1431년 한성부윤, 1432년 중추원 부사, 1436년 동지중추원사, 1437년 중추원사로 승진하였다. 의약(醫藥)에 정통하여 전의감의 제조를 맡았다. 『금성일기』 「을사년 1425년」의 기록에 “윤7월에 신임 판목사 가정대부 황자후가 같은 달 6일에 도임하였다.”라 되어 있고, 1426년 기록에 “전 판목사 황자후가 정무를 마치고 같은 달 상경하였다.”라 되어 있다. 『금성읍지』에는 “을사(1425년) 7월 6일 도임, 병오(1426년) 3월 24일 상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시호는 혜의(惠懿)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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