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681
게시물 검색 폼
  • 신후명 申厚命 숙종 4년(1678) 1월 1일∼숙종 5년(1679) 6월
    신후명 申厚命 숙종 4년(1678) 1월 1일∼숙종 5년(1679) 6월신후명(1638∼1701)의 본관은 평산(平⼭)이며, 자는 천휴(天休), 호는 임하당(林下堂) 이다. 아버지는 용양위 부호군 신형구(申衡耉)이며, 어머니는 참의 성시헌(成時憲)의 딸이다. 1666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67년 승문원 부정자, 1676년 병조좌 랑, 1677년 지평을 지냈다. 1677년 12월 20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1678년 1월 1 일 도임하고 1679년 6월에 홍문관 부수찬으로 이임하였다. 1679년 부수찬·장령, 1680년 사간, 1689년 강춘관찰사, 1693년 사은사, 1697년 형조참판·충청도관찰사, 1698년 해운접반사, 1700년 동지의금부사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무오(1678 년) 1월 1일 도임하였고 기미(1679년) 6월에 홍문관 부수찬으로 이동 이임하였다.”라 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336
  • 심남일
    심남일(沈南一, 1871~1910)의 본명은 심수택(沈守澤), 자가 남일(南一), 호는 덕홍(德弘)이다.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전라남도 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항일 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하였고, 1910년 교수형을 당해 순국하였다.심남일은 1871년 2월 10일[음력] 전남 함평군(咸平郡) 월야면(月也面) 정산리 새터에서 출생하였다. 1907년 11월 1일 함평군 신광면(新光面)에서 의병을 모집·훈련하였꼬 기삼연 의병장이 주도한 ‘호남창의회맹소’의 일원이었다.심남일 의병장이 의병을 일으킬 때 작성한 시, ‘거의유감’(擧義有感)은 다음과 같다.乘風南渡馬如飛 (승풍남도마여비) 바람을 타고 남쪽으로 가니 말도 나는 듯 하구나.林下書生振鐵衣 (임하서생진철의) 초야에 글 읽는 이가 갑옷을 떨쳐입고蠻夷若末掃平盡(만이약미소평진) 내 만약 왜놈들을 쓸어버리지 못하면一死沙場誓不歸(일사사장서불귀) 모래밭에 죽어서 돌아오지 않으리왜 모래밭에 죽으리라고 맹서했을까? 1908년 1월 기삼연 의병장이 총살당한 곳이 광주천의 모래밭이었다.1909년 7월 30일 영암 사촌(沙村) 전투에서 일본군 평금산 대장 등 적 10여 명을 죽이는 등 전라남도 곳곳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며 활발한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1909년 고종 황제의 의병 해산에 대한 조칙이 내려지자, 심남일은 1909년 7월 21일 영암군 금마면(金磨面) 고인동(古引洞)에서 부대를 자진 해산하였다. 이후 능주로 잠행하여 이전 전투지였던 풍치의 바위굴 안에서 신병을 치료하다 1909년 10월 9일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심남일은 체포된 후에도 끝까지 일제에 굴하지 않고 그들의 불의를 질책하였으며, 1910년 7월 23일에 대구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고 39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심남일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1909년 7월 21일, 영암군 금마면 고인동에서 의병 부대를 자진 해산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秋風將卒泣相離 쓸쓸히 장수랑 군사들은 눈물로 이별 짓고古引山前馬去遲 고인산을 떠남에 말조차 더디구나一掃腥塵終有一 왜적을 없앨 날이 언젠가 있으리니草違三載死生期 지난 3년 맹서한 일 부디 잊지 마세
    2020-03-24 | NO.335
  • 심명규 沈明奎 철종 6년(1855) 12월 22일∼철종 7년(1856) 7월 5일
    심명규 沈明奎 철종 6년(1855) 12월 22일∼철종 7년(1856) 7월 5일심명규(1799∼1878)의 본관은 청송(⾭松)이며, 자는 문보(⽂甫)이다. 아버지는 통덕랑 심영조(沈榮祖)이다. 1834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여 1836년 강릉참봉, 1838년 선공 부봉사, 1839년 상서원 직장, 1842년 금부도사, 1845년 예빈주부·호조좌랑, 1846년 노성현감, 1849년 양근군수, 1851년 음성현감, 1852년 울산부사, 1853년 황주목사, 1855년 4월 평양서윤을 지냈다. 1855년 10월 16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12월 2일 도임하였다. 1856년 충주목사, 1860년 선혜청 낭청, 1861년 첨지, 1862년 동부승지· 경주부윤, 1868년 부호군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을묘(1855년) 10월 16일에 평양서윤에서 옮길 것을 제수 받고, 12월 2일에 임금을 사조하고, 12월 22일에 부임 하였으며 병진(1856년) 7월 5일에 충주목사로 자리를 옮겼다.”고 기록되었다. 그의 묘표는 최익현이 작성하여 『면암집(勉菴集)』에 수록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8 | NO.334
  • 심의복 沈宜復 헌종 6년(1840) 5월 10일∼헌종 8년(1842) 8월 9일
    심의복 沈宜復 헌종 6년(1840) 5월 10일∼헌종 8년(1842) 8월 9일심의복(1788∼?)의 본관은 청송(⾭松)이며, 자는 경심(景⼼), 호는 창북(滄北)이다. 아버 지는 정자(正字) 심능적(沈能迪), 아들은 철종대 전라감사를 지낸 예조판서 심경택(沈敬 澤)이다. 1813년 증광시 진사에 합격하여 1820년 현릉참봉, 1821년 천릉도감 감조관, 1823년 부사과, 1824년 공조좌랑, 1825년 충훈도사, 1826년 창녕현감, 1830년 해주 판관, 1832년 순창군수, 1834년 장성부사, 1836년 호조정랑, 1836년 낭청, 1838년 밀양부사를 지냈다. 1840년 3월 18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5월 10일 부임하였다.1840년 9월 10일과 1841년 8월 1일, 1842년 5월 20일 상경 기록이 있다. 1842년 8월 9일 신병으로 내려갈 수 없다하여 파출되었다. 1845년 장악첨정, 1847년 강릉부 사, 1853년 통정대부에 가자되었으며 동부승지·여주목사를 지내고 1857년 70세가 되어 가선대부 가자, 1858년 동의금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경자(1840년) 5월 10일에 부임하였고 임인(1842년) 8월 8일에 상경하여 체직되었다.”고 기록되었다. 문집 『창북유고』가 일본 오사카[⼤阪] 부립 나카노시마[中之島]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나주객사 금성관 안에 「목사심의복거사비」가 서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7 | NO.333
  • 심의종 沈宜鍾
    심의종沈宜鍾은 천성이 효순孝純하고 경학을 탐구하여 문행文行으로 세상에 알려지고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였던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1811∼1876)의 문인으로 『광주읍지』에 전하고 있다. 지응현池應鉉(1869~1959)의 붕남실기鵬南實記에 실린 29명 가운데 석하石下 심의종沈宜鍾의 글(정미, 1907)이 있다.이재홍과 함께 포목상으로 이름을 날린 심덕선은 충장로 4가에 남창상회南昌商會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심덕선은 광주 북동 출신으로 일찍이 행상부터 시작해 광주장, 송정장, 장성장을 돌며 어느 정도 자본이 모아지자 충장로 점포를 낸 것이다.그는 호남 일대에서 큰 판로를 가진 거상이 되었는데 1927년 1월에는 경영체제를 합명회사의 형태로 바꾸었다. 1936년부터는 광주 임동의 가네보방적鐘淵紡績 공장에서 생산했던 면직물의 총판매를 맡게 되어 남창상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충장로4가에 도매부, 소매부의 넓은 점포와 창고는 물론 수기동에 있었던 3채의 대형창고에도 중국산과 일본산 비단과 옷감, 광목 등이 가득 쌓여 있었다.심덕선은 사회사업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계유구락부癸酉俱樂部의 핵심멤버로 참여하여 민중계몽운동과 빈민구제사업에 앞장서기도 했다.
    2020-03-10 | NO.332
  • 심이지 沈頤之 정조 10년(1786) 3월 15일∼정조 10년(1786) 6월 29일
    심이지 沈頤之 정조 10년(1786) 3월 15일∼정조 10년(1786) 6월 29일심이지(1735∼1796)는 1786년(정조 10) 전라감사를 역임하였다. 1786년 3월 7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3월 15일 도임하였고 6월 29일 전라도 관찰사로 옮겼다. 『금성읍 지』에는 “병오(1786년) 3월 15일 도임하였으며 6월 29일에 전라도관찰사로 자리를 옮겼다.”고 기록되었다. *상세이력은 전라감사편 참조.*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5 | NO.331
  • 심지명 沈之溟 효종 8년(1657) 7월 2일∼*효종 10년(1659) 상반기
    심지명 沈之溟 효종 8년(1657) 7월 2일∼*효종 10년(1659) 상반기현감 심지명(1599∼1685)의 본관은 청송(⾭松)이며, 자는 자우(⼦⽻), 호는 농암(聾巖) 이다. 아버지는 참봉 심준(沈僔)이다. 1616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18년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등제하여 1627년 연서찰방, 1630년 진위사 서장관, 1633년 어모장군, 1635년 오위장, 1638년 태안군수, 1640년 의주부윤, 1641년 통정대부·남병사, 1643 년 충청수사, 1644년 동래부사, 1645년 판결사, 1648년 평안병사, 1650년 광주부윤, 1651년 가선대부, 1657년 7월에 금성현감을 제수받아 7월 2일 도임하였다. 1661년 부호군, 1662년 도총관, 1664년 연안현감, 1665년 양주목사, 1668년 도총관, 1669 년 광주부윤, 1673년 좌윤, 1675년 개성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정유 (1662년) 7월 2일 도임하였는데 체직일은 기록되지 않았다.”고 되어 있으나 1659년 상반기까지 재임한 것으로 추정한다. 시호는 호안(胡安)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330
  • 심후지 沈厚之 순조 1년(1801) 9월 21일∼순조 6년(1806) 6월 7일
    심후지 沈厚之 순조 1년(1801) 9월 21일∼순조 6년(1806) 6월 7일심후지(1744∼?)의 본관은 청송(⾭松)이며, 자는 자순(⼦順)이다. 아버지는 통훈대부 문화현령을 지낸 심전(沈鋑)이다. 1774년 증광시 생원에 합격하여 1785년 참봉, 1787 년 내섬시 봉사·금부도사, 1789년 감찰, 1790년 문화현령, 1792년 수안군수, 1794년 함안군수, 1797년 연안부사를 지냈다. 1801년 9월 2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9월 21 일 부임하고 1806년 6월 7일 임기가 만료되어 이임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7 | NO.329
  • 안규면(安圭冕)
    안규면(安圭冕, 1880~1958))의 본관은 竹山이고 자는 자용(子用), 호는 삼곡(三谷) 이다.거주지역은 광주 서방면 봉곡리이다.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다. 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喪次司書로 참석하였다.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5냥을 성금으로 내었다.
    2020-08-04 | NO.328
  • 안규일(安圭鎰)
    안규일(安圭鎰, 1888~1965)의 본관은 竹山 자는 공익(公益), 호는 만성(晩惺)이다. 부 : 安正煥조 : 安瑛壽증조 : 安思行외조 : 尹佑鎭처부1 : 曺圭斗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다.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賓次司書로 참석하였다
    2020-08-04 | NO.327
  • 안길환(安吉煥)
    안길환(安吉煥, 1851~1908)의 본관은 竹山 , 자는 성운(成運)이다.부 : 安秀權조 : 安志默증조 : 安起魯외조 : 全幸魯처부1 : 羅相翊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喪次司書로 참석하였다.1927년 8월에 吳駿善 柳昌秀 등과 함께 蘆沙 문도들에게 高山祠에 함께 배향할 제자들의 위패를 정하자는 내용의 통문을 보냈다.
    2020-08-05 | NO.326
  • 안병택(安秉宅)
    안병택(安秉宅, 1861~1936)의 본관은 竹山, 자는 처인(處仁) , 호는 부해(浮海)이다. 하남면 장자동에 거주했다. 《부해유고》가 있다.부 : 安達三조 : 安鍾秀증조 : 安弼蓮외조 : 坡州 尹처부1 : 金海 金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다.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執禮로 참석하였다.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30냥을 성금으로 내었다.
    2020-08-05 | NO.325
  • 안용환
    1931년 간행된 기우만(奇宇萬,1846~1916)의 《송사집松沙集》 48권에 죽산안씨 20세 안용환(安龍煥,1857~1911)의 행장(行狀)이 기록으로 남아있다.淸深堂安君行狀 君諱龍煥字慶雲。淸深其堂顔也。安氏本順興人。文成公晦軒先生諱裕其上祖。有闢異衛正之功。從祀夫子廟。文惠公諱元衡門下侍中。勳封竹城君。子孫分貫竹山。雙淸堂諱勉官判典。封興寧君。竹溪諱魯生。始仕國朝。集賢殿大提學。生員諱孟孫。始居光州。荷谷諱忠達。文章行義。爲世宗仰。官正郞。士林建祠俎豆之。高祖諱斗胤。曾祖諱宅魯。祖諱思孝。考諱載五。下鄕數世後。顯榮雖少替。而世篤文行。爲鄕邦矜式。衣冠古家。妣光山金氏父修儀。德配君子。君生哲宗丁巳(1857)五月戊寅。才晬而孤。不記父顔。爲畢生痛。誠敬事母。出外遄反曰吾母待我。得異味。必以獻。與儕兒遊。口無戲言曰。悖出必悖入。羞辱及於父母。甫上學。自知劬書。不煩提敎。每日授課。歸讀於母側曰。母氏孤踽。須臾不可離也。少長。乃閣書曰。親老不養。徒事文墨。子職有闕。樵山漁水。庋閣常餘。慈夫人常多疾。迎醫合藥。舍置他事。疾革。晝宵涕淚。遭故。擗踊頓絶。水穀不入於口三日。雖甚貧困。而附身附棺。誠信無憾。旣殯。曰吾據禮守廬。則奠獻莫需。行傭樵採。饋食無闕。及葬。展晨昏不廢。當膝成坎。至行所感。有欲妻之者。君卻之曰。雖甚竆厄。禮限不可違越。服闋娶婦。勤儉立家。先置祭田。以永香火。周恤族戚。不計有無。收養族子女。嫁娶資生者亦數人。凡民有喪。貧不能經紀。則出力相助。使無遺憾。族黨墳墓無主頹圮。改築之。使不犯五患。蓋其天性仁厚。見人之急。若癏在己。嘗靑馬邪熾。勒人爲黨。君乃與里人立約曰。凡我同約之人。勿染於邪。否者不可與同閈。有潛誘里子弟者。君招致諭之曰。惑亂黔首。鄕有八刑。人雖可欺。不畏于天。人之異乎禽獸。爲不失其良心。耕田鑿井。庶民常職。左道惑衆。爲獸爲禽。辭氣懇至。其人愧謝。是以一里賴而潔淨。每爲彼輩眼釘。數被侵擾。亂平後皆來請罪。君笑曰。往日之事。否運所使。革心爲貴。何至相謝。聞者皆服其寬弘。平居不見邑宰。或致書願見。輒辭以愚劣。歲丙申。余妄意討復。駐陣在光山館。君仗劒而至。誓以同死。僨事之後。痛哭杜門。敎子課孫。爲日間事業。于後五賊賣國。憤不自勝。卽欲叫閤請斬。沮格莫遂。仰天痛歎。或至廢食。晩構一堂將落。夢有老人大書壁上曰淸深。覺而自解曰。擧世皆濁。反之則淸。擧世皆淺。反之則深。所以爲戒者大矣。因受以爲扁。蓋其平日所守者正。故發於宵寐者如此。所謂老人者。豈靈臺主人歟。辛亥(1911)冬。偶得難醫之祟。臨命。顧謂子圭冕曰。世衰道微。魍魎晝行。世間萬事。無足置胷中。須立心制行。從師取友。謹守世風。則入地之目。庶可瞑矣。以翌年正月二日乙丑(1925)終。得年僅五十五。嗚呼短矣。見今滔滔胥淪。不與俱。所謂千萬人中常知有己。如君者不數數有焉。使久於世。庶可以激濁揚淸。而何天奪之速也。葬再遷於白蓮洞後佳藏洞戌坐之原。夫人河東鄭氏仁默女。有婦德。一男卽圭冕。副室一女適高濟崑。圭冕以父命從余遊。淳謹好學。庶不負君之遺訓矣。草事行爲家狀。以余知君深。請刪潤以示久遠。吾何忍辭。
    2020-04-08 | NO.324
  • 안정환(安正煥)
    안정환(安正煥, 1843~1909)의 본관은 죽산이고 자는 덕유(德有), 호는 명수(明水)이다.부 : 安瑛壽조 : 安思行증조 : 安碩魯외조 : 盧彦鉉처부1 : 尹佑鎭처부2 : 丁奇杓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
    2020-08-05 | NO.323
  • 안종기(安鍾基)
    안종기(安鍾基, 1881~1949)의 본관은 죽산이며 자는 중술(仲述), 호는 술재(述齋)이다.부 : 安圭容조 : 安國煥증조 : 安鳳壽외조 : 李相輝처부1 : 奇春衍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다.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贊引으로 참석하였다.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50냥을 성금으로 내었다.1927년 8월에 吳駿善 柳昌秀 등과 함께 蘆沙 문도들에게 高山祠에 함께 배향할 제자들의 위패를 정하자는 내용의 통문을 보냈다.
    2020-08-05 | NO.322
  • 광주광역시
  • 한국학호남진흥원
  • 사이버광주읍성
  • 광주서구청
  • 광주동구청
  • 광주남구청
  • 광주북구청
  • 광주광산구청
  • 전남대학교
  • 조선대학교
  • 호남대학교
  • 광주대학교
  • 광주여자대학교
  • 남부대학교
  • 송원대학교
  • 동신대학교
  • 문화체육관광부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광주문화예술회관
  • 광주비엔날레
  • 광주시립미술관
  • 광주문화재단
  • 광주국립박물관
  • 광주시립민속박물관
  • 국민권익위원회
  • 국세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