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68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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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유상 徐有象 철종 8년(1857) 11월 30일∼철종 10년(1859) 5월 1일
- 서유상 徐有象 철종 8년(1857) 11월 30일∼철종 10년(1859) 5월 1일서유상(1797∼1881)의 본관은 대구(⼤丘)이며, 자는 치평(致平)이다. 아버지는 예조참판 서기수(徐淇修)이고 증이조참판 서영수(徐英修)에게 입양되었다. 동생 서유훈(徐有薰) 은 문과 급제 후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37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여 1839년 현륭원 참봉, 1842년 전옥참봉, 1843년 사옹봉사, 1843년 선공봉사, 1844년 활인별제· 금부도사·의령현감, 1848년 김천군수, 1852년 무안현감, 1856년 이천부사를 지냈다.1857년 10월 15일 나주목사를 제수받고 11월 30일 부임하였다. 1859년 5월 1일 상경해 있었는데 신병이 중하여 내려가지 못할 지경이 되자 파출되었다. 1866년 형조참 의, 1867년 공조참의, 1880년 부총관·공조참판, 1902년 자헌대부 내부대신을 역임하 였다. 『금성읍지』에는 “정사(1857년) 10월 15일에 이천부사에서 옮길 것을 제수받고, 11월 13일에 임금을 사조하고, 11월 30일에 부임하였으며 기미(1859년) 5월 1일에 상경 체직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8 | NO.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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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탁수 徐琢修 정조 13년(1789) 4월 24일∼정조 13년(1789) 8월 6일
- 서탁수 徐琢修 정조 13년(1789) 4월 24일∼정조 13년(1789) 8월 6일서탁수(1735∼1794)의 본관 대구(⼤丘)이며, 자는 옥여(⽟汝)이다. 아버지는 통훈대부 행호조정랑 서명유(徐命儒)이다. 1759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1766년 영릉참봉, 1768년 사옹봉사, 1769년 병조참의, 1771년 한성주부, 1776년 호조좌랑, 1777년 호조정랑, 1778년 의성현령, 1780년 호조정랑·재령군수, 1783년 원주판관, 1785년 삼척부사를 거쳤다. 1789년 4월 23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었다. 1790년 호조정랑, 1791 년 남원부사를 마지막으로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 “기유(1789년) 4월 24일 삼척부 사에서 옮겨 왔다. 동년 8월 6일에 대동미를 실은 배 1척이 치패된 일로 서울에서 파직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7 | NO.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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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두산 蘇⽃⼭ 현종 10년(1669) 7월 16일∼현종 13년(1672) 7월
- 소두산 蘇⽃⼭ 현종 10년(1669) 7월 16일∼현종 13년(1672) 7월소두산(1627∼1693)의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망여(望如), 호는 월주(⽉洲), 익산 출신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소동명(蘇東鳴)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52년 사마시 진사에 합격하고, 1660년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감찰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1661년 병조정랑, 1663년 사헌부 지평, 1666년 장령, 1667년 부호군, 1669년 6월 25일 나주목사를 제수받았으나 6월 30일 이조에서 개차할 것을 건의, 승낙하였으나, 비변사에서 이조의 계를 시행하지 말 것을 건의하여 그대로 임명하였다. 7월 16일 부임하여 선정을 펼쳐 1672년 1월에는 자급을 올려 받았다고 한다. 1672년 344년 7월에 병을 핑계로 사직을 하였다. 이후 1675년 제주목사, 1681년에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1683년 동래부사, 1684년 공홍도 관찰사·공홍도 수군절도사, 1685년 북병 사, 1688년 평안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저서로 『월주집』이 전한다. 『금성읍지』에는 “기유(1669년) 7월 16일 도임하였고 임자(1672년) 7월에 어버이 병으로 사직하였 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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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만웅 孫萬雄 숙종 15년(1689) 4월 10일∼숙종 15년(1689) 5월 20일
- 손만웅 孫萬雄 숙종 15년(1689) 4월 10일∼숙종 15년(1689) 5월 20일손만웅(1643∼1712)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적만(敵萬), 호는 야촌(野村)이다. 아버지는 손신의(孫愼儀)이며, 어머니는 이심근(李深根)의 딸이다. 1669년 식년시 생원과 문과 을과에 모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등용되었다. 1669년 사포별제, 1670년 학유·장원별제, 1671년 오수찰방, 1674년 예조좌랑, 1675년 병조좌랑·영광군수, 1677년 정언, 1678년 장령, 1687년 사천현감, 1689년 충청도사, 1689년 윤3월 9일 충홍도 사에서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4월 10일 도임하고 5월 21일 파면당했다. 『숙종실록』에 “국전(國典)에 수령이 갈 때에 승지가 별유를 베풀고, 인하여 칠사(七事)를 강하게 하였 으나, 조사(朝辭)를 제한 경우는 원래 이 예(禮)가 없는데, 이조의 하리가 손만웅을 업신여겨 속였다. 손만웅이 깨닫지 못하고 머리를 굽혀 듣고 받았으니” 백성을 다스리지 못할 것이라 하여 파면하고 추고하자는 사간원의 논의를 윤허앴다는 기록이 있다. 『금 성읍지』는 5월 27일 파직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689년 12월 괴산군수, 1690년 정언, 1691년 청주목사, 1692년 동래부사, 1693년 경주부윤, 1701년 온성부사, 1706년 풍기군수, 1709년 부호군, 1711년 부사과 등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충홍도사에서 이동하여 기사(1689년) 4월 10일 도임하였고 동년 5월 27일(실록은 5 월 20일) 장계에 의해 파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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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래룡(宋來龍)
- 송래룡(1823~1888)의 본관은 홍주, 초휘는 현규(現奎), 자는 운보(雲甫), 호는 서암(瑞菴)이다. 현감 宋駒의 후손이다.存心養性이고 安貧樂義이며 文學篤行이라 孝友慈仁이고 無不飮服이며 有墓碣畏이라 堂高漢住로 묘갈명에는 "繼述先美이고 孝友根天이며 永言孺慕하고 心潛經學이라" 하였다.부 : 宋邦賢조 : 宋守範증조 : 宋益恒외조 : 李仁坤처부1 : 曺箕承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
- 2020-03-06 | NO.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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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래홍(宋來洪)
- 송래홍(1836~1916)의 본관은 홍주, 초위는 宗奎, 자는 경범(敬範) 또는 성범(聖範), 광주 거진(오늘날 북구 용두동)에 살았다. 천성이 강직하며 효도하고 우애함은 물론 선대의 유업을 계승하여 후손의 장래를 보호하는 등 굳은 지조를 가졌다.1889년에 眉巖 柳希春을 기리는 모임에 참여하였다. 宋駒의 후손이다.부 : 宋三賢조 : 宋守大증조 : 宋益佐외조 : 洪基祥처부1 : 金道原
- 2020-03-06 | NO.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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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문중 宋⽂中 우왕 10년(1384) 8월 18일∼우왕 12년(1386) 7월 16일 파직
- 송문중 宋⽂中 우왕 10년(1384) 8월 18일∼우왕 12년(1386) 7월 16일 파직송문종(?∼?)의 본관은 홍주(洪州)이다. 1369년(공민왕 18) 진사시에 합격하고, 1373년 (공민왕 22) 6월 응거시(應擧試)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게 된다. 이색(李穡)의 『목은문 고』 5권(기)의 「축은재기(築隱齋記)」에 “원래 이름은 송문귀(宋⽂貴)이고, 자는 일창(⽇ 彰)이었으나 귀(貴)를 중(中)으로 바꾸어 송문중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금성일기』 1374년 기록을 보면 “사은사 상장군 주의, 부사 우인열, 서장 송문귀 각 행차가 같은날 나주에 왔다.”라고 되어 있음을 볼 때 송문중으로 바꾼 것은 1374년 이후로 보인 다. 1389년 상호군 겸 사헌부집의로 제수되었으나 나주목사 재임 때 청렴하지 못하다는 말이 있었으므로 고신에 서명을 받지 못하였다. 대사성, 보빙사, 판교서감사 등을 거쳤으며, 풍해도관찰사로서 왜구를 물리치는 큰 공을 세웠다. 『금성일기』 「갑자년 1384년」에 “목사 통헌대부 송문중이 8월 18일 도임하였다. 병인(1386년) 7월 16일에 돌아갔다.”라고 기록되었으며, 『금성읍지』에는 “갑자(1384년) 8월 도임, 병인(1386년) 7월 16일에 교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전라감사편 참조.*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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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석경 宋錫慶 광해군 3년(1611) 2월 14일∼광해군 3년(1611) 8월
- 송석경 宋錫慶 광해군 3년(1611) 2월 14일∼광해군 3년(1611) 8월송석경(1570∼1637)의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자는 경수(景受), 호는 졸암(拙庵) 또는 춘호(春湖), 송석범(宋錫範)으로 개명하였다. 할아버지는 황주목사 송응형(宋應泂)이고, 아버지는 직장 송흥조(宋興祚)이다. 1590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7년 직장으로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시강원 설서를 시작으로 1598년 세자시강원 사서·사간원 정언·사헌부 지평, 1599년 사간원 헌납, 1600년 병조정랑, 1601년 신천군수, 1602년 병조정랑·사헌부 지평·홍문관 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603년 사간원 헌납·시강원 필선, 1604년 예조좌랑, 1605년 원손 강학관, 1606년 홍문관 교리, 1607년 광흥창수, 1608년 동부승지, 1610년 12월 25일에 나주목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수령 가운데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자로 거론되어 1611년 8월에 파직을 당했다. 그 뒤로도 승지, 대사간, 대사성, 개성유수, 접반사, 동지사 등의 벼슬을 지냈다. 『금성읍지』에는 “신해(1611년) 2월 14일 도임하였고, 같은 해 8월에 체직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7 | NO.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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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순 宋純 명종 16년(1561) 9월 12일∼명종 17년(1562) 12월 15일
- 송순 宋純 명종 16년(1561) 9월 12일∼명종 17년(1562) 12월 15일송순(1493∼1582)의 본관은 신평(新平), 담양 출신으로 1542년(중종 37) 전라감사를 지냈다. 1561년 8월 2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9월 12일 부임하여 1562년 12월 15 일까지 재임하였다. 1568년 한성부 좌윤이 되어 1569년에 한성판윤으로 특별 승진하고 의정부 우참찬이 된 뒤 낙향하였다. 문집으로는 『면앙집(俛仰集)』이 있고, 『미암일 기(眉巖⽇記)』를 남겼다. 『금성읍지』에는 “신유(1561년) 9월 12일 도임하였고, 임술 (1562년) 12월 15일에 사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상세이력은 전라감사편 참조.*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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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시길 宋時吉 인조 23년(1645) 12월 12일∼인조 24년(1646) 12월 2일
- 송시길 宋時吉 인조 23년(1645) 12월 12일∼인조 24년(1646) 12월 2일현감(縣監) 송시길(1597∼1656)의 본관은 여산(礪⼭)이며, 자는 중립(仲⽴)이다. 아버지는 1617년 4월에 나주목사로 부임했던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송일(宋馹)이다. 1615 년에 진사가 되고, 1623년 알성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을 거쳐 1626 년 사간원 정언, 1627년 지평, 1633년 장령, 1637년 상의원 정, 1639년 우부승지, 1642년 동부승지, 1643년 경주부윤, 1653년 도승지, 1645년 11월 12일에 금성현감이 되고 12월에 도임하여 토포사(討捕使)를 겸임하였다. 1648년 형조참판 겸 오위도총 부부총관 등을 거쳐 1652년 한성부우윤·도승지·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금성읍지』 에는 “을유(1645년) 12월 12일 도임하였는데 토포사를 겸하였다. 병술(1646년) 봄에 여황면 토적을 잡아 괴수 김방헌 등 20여 인을 체포하여 이 공으로 가선대부가 되었 다. 병술(1646년) 12월 2일에 이임하였다.”라고 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7 | NO.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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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암 조언수(1575~1592)
- 조언수曺彥壽의 본관은 창녕, 자는 일여, 호는 송암松庵이다. 시조는 신라 창성부원군 조계룡을 시조로 증조는 조대진으로 조선왕조 변융 문과 중시에 합격하여 예조 참의를 지냈으며 할아버지 조경덕은 예조좌랑을 지냈다. 아버지 조세랑은 상주영장을 지냈으며 외할아버지는 전주 이학림으로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어려서 완력이 뛰어나고 재주가 빼어나 8세에 사략을 읽고, 10세에 소학에 들어 자경시를 짓기도 하였다. 조언수는 임진왜란 때 제봉 고경명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이다.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량을 모아 광주군고에 바치고 무기 쓰는 법을 익히고 용사들에게 권장하는 시를 지었다. "내 돌아보니 부끄러운 여덟 살 어린이 삼년동안 헛되이 글만 배웠도다. 전국의 흥망사를 논하지 말고 쇄소응대하는 예의와 같이 하리라"이로부터 문장이 성취되었다. 행군이 순창 적성강에 이르러 진을 쳤을 때 적세가 몰아쳐옴에 사졸들이 많이 흩어지려 하니 송암이 충용의가忠勇義歌 삼장을 지어 깊이 깨우치게 하여 사졸들이 흩어지지 않게 하였다.금산전투에 임하여서는 적과 함께 혈전하여 많은 참획을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제봉 고경명이 패하여 순절하고 송암도 화살이 떨어지고 힘이 다하여 제봉의 아들 학봉 인후와 월파 유팽로, 은재 안영과 같은 날 전사하였다. 이로써 송암은 임진왜란 떄 17세로 전사한 최연소 의병이라고 할 수 있다. 송암 조언수의 사적은 '호남절의록'과 '금산순의비'에 실려 있다. 후일 나라에서는 송암을 선무원종훈에 훈록하고 병조참판에 증직하였다.송암을 기리는 조도현의 시가 한 편 있다.북성예원조도현왼쪽에 장등너뫼오른쪽에 모세추리앞쪽으로 동기미테가작은 구릉으로 길게 누워 있는 그곳적량산 자락에 터를 닦으신 향조송암조언수님의 얼이 서린 자리조상에 대한 책임감불의에 항거한 애정이녹아내린 세월만큼숭조상문의 장으로 삼아 정엄한 뜻을 가슴에 새겨 일상에 가두련다.감상>광산구 본량면 북산리 북성부락 북성예원은 좌청룡 우백호로 앞으로는 바람을 모으고 배산 임수까지 갖춘 명당이다.
- 2020-05-11 | NO.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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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암 최응룡(1537~1592)
- 의병장 松巖 崔應龍(1537~1592) 선생의 행적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錄券)공의 姓貫(성관)은 朔寧崔氏(삭녕최씨)로서, 諱(휘)는 應龍(응룡)이요, 字(자)는 士瑞(사서)이며 號(호)는 松巖(송암)이고, 別號(별호)는 忠節公(충절공)이라고도 불리운다. 公(공)의 始祖(시조)는 高麗前期(고려전기)의 文臣(문신)으로 文下侍郞平章事(문하시랑펑장사)를 歷任(역임)한 諱(휘) 天老(천로)이고, 中始祖(중시조)는 고려 명종조에 參知政事(참지정사)를 거쳐 文下侍郞平章事(문하시랑평장사)에 오른 諱(휘) 瑜價(유가)이며, 一世祖(1세조)는 고려말기 親御侮軍(친어모군) 郎將(낭장)을 歷任(역임)한 諱(휘) 善甫(선보)이다. 朝鮮朝(조선조)에 들어서는 世宗朝(세종조)때 集賢殿(집현전)의 大學者(대학자)이자 名臣(명신)으로 訓民正音(훈민정음)의 創製(창제)에 기여하였고 또한 成宗朝(성종조)에 이르러서는 經國大典(경국대전)을 完成(완성)하는 등 朝鮮前期(조선전기)의 文物(문물)을 整備(정비)하였으며 領議政(영의정)을 歷任(역임)한 寧城府院君(영성부원군) 文靖公(문정공) 諱(휘) 恒(항)은 公(공)의 高祖(고조)가 된다.曾祖(증조)는 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하여 司饔院正(사옹원정)을 歷任(역임)하고 左贊成(좌찬성)에 贈職(증직)된 諱(휘) 永顥(영호)[一諱(일휘)는 處仁(처인)이라고도 한다]이며, 中宗朝(중종조)에 吏曺判書(이조판서)에 오른 諱(휘) 秀彦(수언)[一諱(일휘)는 溫(온)]의 孫子(손자)이고. 明宗祖(명종조)에 通德郞(통덕랑)에 오른 諱(휘) 卿立(경립)은 公(공)의 皇考(황고)가 된다. 公(공)은 어려서부터 總名(총명)하고 才質(재질)이 타고나서 讀書(독서)에 能(능)하여 스스로 證驗(증험)하고 經史(경사)에 밝았으며 性品(성품)이 强直(강직)하였다. 당시 地方(지방) 士類(사류)들과 瑞石山(서석산)의 證心寺(증심사)에 올라 시류를 講論(강론)하고 唱酬(창수)하였으며 이때 지은 詩(시)가 翠栢樓(취백루) 樓橋(누교) 아래 시냇가 바위에 새겨졌다고 전해오나 1950년 6. 25 전란으로 인해 훼손되어 안타깝기만하다. 倭寇(왜구)들이 남해안 일대에 침범하여 노략질을 일삼는 것을 直視(직시)하고 國防(국방)의 중요성을 논했으나 귀를 기울이는 이가 없어 안타까워하였으며 이를 기화로 兵事(병사)에 觀心(관심)을갖고 文靖公(문정공)께서 著述(저술)한 무정보감(武定寶鑑)등 兵書(병서)에도 조예가 깊어 文武(문무)를 兼備(겸비)하게 되었다. 先親(선친)께서 末年(말년)에 머물렀던 湖南(호남) 南平縣(남평현) 頭山面(두산면) 九沼村(구소촌)[이후 光州(광주) 西面(서면) 柒石里(칠석리) 九沼村(구소촌)- 현재는 광주광역시 남구 구소동 -으로 落鄕(낙향)하여 松下(송하)의 江亭(강정)에서 隱居(은거)하며 山水(산수)와 經史(경사)를 벗삼아 시화(詩畵)를 自娛(자오)하였다. 1592년 宣祖(선조25) 壬辰年(임진년) 4월에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자 公(공)은 “國運(국운)이 風前燈火(풍전등화)의 危機(위기)에 놓여 있고 官僚(관료)들과 百姓(백성)들이 塗炭(도탄)에 빠져있는 이때 勳家(훈가)의 後裔(후예)로서 國難(국난)을 坐視(좌시)할 수 있으리오 마땅히 百姓(백성)들과 生死(생사)를 함께 하리라” 라는 遺訓(유훈)를 남기고 南平(남평)에서 아들 參奉(참봉) 諱(휘) 永水(영수)와 더불어 家僮(가동)을 이끌고 倡義(창의)를 하였다. 사흘만에 數百(수백)여명의 義兵(의병)이 몰려들었데 대부분이 民草(민초)들인 것을 보고 “정녕 이들이 이 나라의 主人(주인)이자 의로운 百姓(백성)들이구나”하고 歎息(탄식)과 함께 結義(결의)를 다졌다. 義兵(의병)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南平(남평)에 사는 主簿(주부) 豊山洪公(풍산홍공) 民彦(민언)은 軍糧(군량) 10淅(석)을 보내오고 宗姪(종질)인 崔未能(최미능) 尙重(상중)과 李正郞(이정랑) 大胤(대윤)은 고을에서 運糧(운량)을 담당하고 楊直長(양직장) 士衡(사형)과 朴進士(박진사) 天挺(천정)은 陣中(진중)으로 運糧(운량)을 하고 士人(사인) 慶州崔公(경주최공) 厚立(후립)·弘立(홍립)등 壯丁(장정)들이 찾아와 함께 하여 500여명의 南平義兵(남평의병)을 이루었다. 公(공)은 南平義兵(남평의병)을 이끌고 同年(동년) 6월 3일에 月波(월파) 文化柳公(문화유공) 彭老(팽노)가 이끄는 玉果義兵(옥과의병) 齊峯(제봉) 長興高公(장흥고공) 敬命(경명)등과 合流(합류)하여 全羅左義兵(전라좌의병)을 이루었다. 連山(연산) 珍山(진산)과 礪山(여산)을 지나 7월 8일에 錦山(금산)에 도착하여 7월 9일 官軍(관군)과 義兵(의병)이 左右翼(좌우익)으로 하여 倭敵(왜적)과 對敵(대적)하여 수백명을 무찌르고 다음날인 7월 10일에 倭敵(왜적)은 官軍(관군)을 먼저 急襲(급습)하여 官軍(관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後退(후퇴)하자 義兵(의병)의 陣(진)에도 삽시간에 陣中(진중)이 술렁이고 士氣(사기)가 급격히 저하되자 이에 松巖公(송암공)은 아들 竹峰公(죽봉공) 諱(휘) 永水(영수)로 하여금 先鋒(선봉)에 나아가 倭敵(왜적)을 對敵(대적)케 하여 倭敵(왜적) 수백명을 斬殺(참살)하니 義兵(의병)들은 士氣(사기)가 오르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수천명의 倭敵(왜적)을 무찔렀으나 衆寡不敵(중과부적)으로 義兵(의병)의 陣(진)도 무너지고 말았다. 戰勢(전세)가 敗(패)함에 이르자 松巖公(송암공)은 조금도 물러섬이 없이 직접 劍(검)을 빼들고 큰 소리로 號令(호령)을하며 수많은 敵(적)을 斬殺(참살)하다가 全身(전신)에 槍傷(창상)을 입고 마침내 殉節(순절)하였다. 義兵(의병)의 死傷者(사상자)가 많았던 이유는 松巖公(송암공) 父子(부자)가 退却(퇴각)하지 않고 앞장서서 勇敢(용감)히 싸운 모습에 義兵(의병)들이 感服(감복)을 하여 끋까지 倭敵(왜적)을 對敵(대적)한 때문이라고한다. 아들 竹峰公(죽봉공) 參奉(참봉) 永水(영수)와 더불어 三代獨子(삼대독자) 父子(부자)가 殉節(순절)하여 宣武原從功臣(선무원종공신)에 策勳(책훈)되어 錄(녹)되었다.당시의 世人(세인)들은 二代獨子(이대독자) 松巖公(송암공)과 三代獨子(삼대독자) 竹峰公(죽봉공) 父子(부자)의 崇高(숭고)한 殉節(순절)에 哀悼(애도)의 뜻을 표하고 忠節公(충절공)과 武烈公(무열공) 父子(부자)라고 불렀다. 1789년 正祖(정조13) 己酉(기유)년에 左副承旨(좌부승지) 滌齋(척재) 李書九(이서구) 先生(선생)은 松巖公(송암공)과 竹峰公(죽봉공) 父子(부자)의 忠節(충절)과 戰功(전공)이 묻혀 있음을 歎息(탄식)을 하고 松巖公(송암공)을 吏曹判書(이조판서)에 竹峰公(죽봉공)을 都承旨(도승지)에 贈職(증직)할 것을 薦擧(천거)하여 증직되었다 松巖公(송암공) 諡號(시호)는 忠節(충절) 竹峯公(죽봉공) 諡號(시호)는 武烈(무열) 이다. 正祖十三(정조13) 己酉(기유:1789)년에 忠勳府(충훈부)에서 靖難(정난), 佐翊(좌익), 佐理(좌리) 3훈의 正勳功臣(정훈공신)인 寧城府院君(영성부원군) 崔恒(최항)과 그의 玄孫(현손)인 宣武原從功臣(선무원종공신) 松巖公(송암공) 崔應龍(최응룡)과 竹峰公(죽봉공) 崔永水(최영수) 父子(부자)의 功勳(공훈)으로 後孫(후손)들에게 忠義衛(충의위) 崔漢福(최한복)등 二十三人(23인)에게 啓下事目(계하사목)을 발급하였다. * 위 내용 중에 일부 광주목사를 지낸 송정(松亭) 최응룡(崔應龍, 1514~1580)과 섞여 있어 자료의 확인이 필요합니다.
- 2020-05-12 | NO.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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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영묵(宋永默)
- 송영묵(1843~?)의 본관은 홍주, 자는 효일(孝一)이며 광주시 거진(오늘날 북구 용두동)에 살았다. 1889년에 眉巖 柳希春을 기리는 모임에 참여하였다.부 : 宋文龜조 : 宋仁源증조 : 宋福鉉외조 : 崔基馥처부1 : 朴東煥
- 2020-03-06 | NO.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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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온묵(宋溫默)
- 송온묵(1853~1903)의 본관은 홍주, 자는 일문(一文)이며 호는 낙헌(樂軒)이다. 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 宋駒의 후손이다.天賦聰頴하고 志操淸貞이며 孝於事親하여 誠於奉先이라 自幼勤學이고 甞就에 노사 기정진 선생이 ‘之門獲聞 爲己之學’이라 말했다.부 : 宋來良조 : 宋鶴賢증조 : 宋守憲외조 : 李益五
- 2020-03-06 | NO.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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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요경 宋堯卿 영조 1년(1725) 11월 27일∼영조 3년(1727) 9월
- 송요경 宋堯卿 영조 1년(1725) 11월 27일∼영조 3년(1727) 9월송요경(1668∼1748)의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자는 백유(伯兪)이다. 아버지는 증 이조 참판 송병문(宋炳⽂)이며, 증조할아버지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이다. 1699년 영릉참봉을 시작으로 1700년 경안찰방, 1702년 진천현감, 1703년 제천현감, 1709년 제용판관, 청도군수, 1716년 선산부사, 1720 충주목사, 1724년 금천군수(⾦川), 1725 년 6월 담양부사, 1725년 10월 21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11월 27일 부임하다가 1727년 11월 28일에 의금부로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있어 파직되었으나 1741년에 다시 심의한 결과 이 사건은 어사 이광덕(李匡德)의 무고로 관직을 박탈당하여 금고형(禁 錮刑)을 받았음을 확인하고 다시 오위장(五衛將)에 임용되었던 일이 있었다. 1735년 부호군, 1736년 첨지중추부사, 1737년 돈녕도정, 1741년 오위장, 1744년 통정대부에 가자, 1745년 부호군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을사(1725년) 11월 27일 도임하 였고 정미(1727년) 9월에 어사의 장계에 의하여 파직되었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3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