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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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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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한공신도비
    광주시 광산구 서봉동 서봉마을1962년이 고려한공신도비(高麗韓公神道碑)는 청주한씨이다.
    2018-12-01 | NO.269
  • 고봉기대승묘역
    광주시 광산구 광산동 452, 광곡마을빙월당에서 북쪽으로 약 200m 가파른 산 중복에 있는 기대승의 묘역이다. 고봉 기대승(1527-1572)은 조선시대의 성리학자로,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峰), 본관은 행주(幸州), 덕성군 기진(寄進)의 아들로 광산구 신룡동에서 출생하였고, 1558(명종 13년) 문과 급제후 선종때 大司諫(대사간)에 이르렀다. 고봉 선생은 문학에 이름을 떨쳤을 뿐 아니라 독학으로 고금에 선학들이 미쳐 생각지 못한 학설을 제시한 것이 많다. 그 중에서도 퇴계 이황(李遑)과 사단칠청(四端七淸)을 주제로 하고 상호자기 학설을 주장한 서신왕복(書信往復)이 8년간 계속되어 조선 성리학계의 2백년간 논쟁의 실마리가 되기도 하였다. 퇴계의 학설은 4단-측은, 수오, 사양, 시비, 심리작용은 理에서 발동한 것이며 칠정일선, 희, 노, 애, 락, 애, 오, 욕의 감정작용은 기질에서 발동한다고 하였고, 고봉학설은 이와 기를 분리할 수 없다고 주장 이기, 공발설(共發說)을 역설하였다.월봉서원 뒤쪽으로 나있는 산길로 10여분을 오르면 그곳에 고봉묘역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 산길을 중심으로 백우산 일대에는 고봉선생이 걸었던 철학자의 길이라는 트레킹 코스가 있다.
    2018-12-02 | NO.268
  • 고부군수박원명묘지
    광주시 서구 서창동 506-7고부군수 박원명朴源明 묘지가 있다. 서창동 곽창기씨의 증언이다.당시 문제를 일으킨 조부갑이 체포 압송된 이후 용안현감이었던 박원명이 신임군수로 파견되어 이 전후사정을 잘 알고 설득하는 적절한 조치로 군중은 자진해산한 바 있다. 그러나 후에 부임한 안핵사인 이용태의 무자비한 조치로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했다. 박원명의 묘지가 있던 땅이 다른 사람에게 팔려 묘지가 방치된 상태이다. 동네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묘는 아직 이장이 안된 상태이다.박원명은 충주박씨로 우리나라 최고 증권투자사 박 모 회장의 종증조부로 알려져 있다. 확인이 필요하다.* 이 묘지는 당시 다른 사람에게 매각된 상태였는데 2021년 10월 무렵 문중 관련 후손들이 이장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2018년 10월 경 서창동 고부군수 박원명 묘지가 황폐화된 채 문인석마저 넘어져 있었다. 사진은 주민 곽창기씨가 알려주고 있다. 이분들이 어렸을 때는 이곳이 박 대감 묘지라고 햤었고 동네 놀이터였다고 한다.
    2018-11-29 | NO.267
  • 고양현후부군한사기공묘표
    광주시 광산구경인년高陽縣侯府君韓謝奇公墓表는 청주한씨 한기흥 짓고 한섭 쓰다.한사기는 중국 고양현후이며 1257년 송정 서봉리에 출생, 원나라에 특사로 가서 수훈을 세워 세상을 떠난 후 고양현후에 추증됐다.
    2018-12-02 | NO.266
  • 고재정-긍헌거사고공유적비
    광주시 남구 대촌동 석교마을이 긍헌거사고공유적비는 남구 대촌동 석교마을에 있는 고재정 유적비로 오병익이 찬했다.
    2018-06-17 | NO.265
  • 관산임씨 기행비
    서구 백설길 37(마륵동)운천사를 끼고 돌아가면 그 길목 중간쯤에 효열문孝烈門이 하나 서 있다. 효열부 관산임씨(1909~1969) 기행비孝烈婦冠山任氏紀行碑이다. 서창 출신 김평길金平吉이 그의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1993년에 세운 것이다. 비문 내용을 보면 관산임씨는 임윤재任允在의 딸이며 김해 감무공파 김천두金千斗(1910~1956)의 처였다. 그의 손자가 김월출 제5대 광주광역시의원이다. 남편이 영암 도갑사에서 공부하던 중 병이 들어 이를 치료하기 위해 23년간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세상을 떠나자 3년상을 치렀다. 또한 먼저 떠난 자식 생각에 중풍에 걸린 시아버지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간병 활동을 하였다. 그렇게 세상을 떠나자 또 3년상을 치렀다. 글은 장흥인 만취晩翠 위계도魏啓道(1926~1990)가 지었고 글씨는 신천인 강인환康仁煥이 썼다.
    2018-05-25 | NO.264
  • 광람계기적비
    광주시 북구 용전동 601-9(용전마을 입구)1968년이 광람계기적비(光藍契紀蹟碑)는 전면에 향약 덕목을 기록하고 후면에는 계원 명단을 6명씩 16행으로 96명의 이름을 새기고 있다. 비 좌측면에는 35인, 우측면에는 17인 모두 148인으로 구성되어 있다.범재풍范在豊 설립하고 심한구沈翰求 쓰다. 1918년 당시 광주군 우치면장에 재직중이던 범재풍(范在豊, 1885-1944)이 우치·본촌면 일대의 주민 61명을 계원으로 하여 창계하였다. 계원의 거주지를 보면 생룡, 용전, 태령, 수곡, 입암, 회룡, 단지, 거진, 지야, 본촌, 용두, 양지, 일곡 등 광범한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범재풍이 작성한 서문(序文)을 보면 덕업상권, 과실상규, 예속상교, 환난상휼의 향약 4대 덕목 실천이라는 큰 목표아래 계원 상호간 친목도모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특히 광람계라는 명칭은 우리고장 광주에서도 중국의 남전여씨(藍田呂氏) 향약(鄕約)의 전범에 따른 유교적 이상향을 건설해 보고자 하는 바램으로 시작한 것으로 짐작된다. 광람계는 지금까지도 존속되고 있어 1900년대 초기 계의 형태와 현재의 계를 비교·검토하는데 하나의 좋은 사례가 되고 있다. 창계 당시 계원 자격은 광주군 우치면에 거주하는 20세 이상의 남자였으며, 총 61명이 백미 1말씩을 갹출(醵出)하여 시작하였다. 창계 이후 가입범위가 본촌면까지 확대되었다. 최초의 임원조직은 임기 3년의 계장 1인, 공사원 1인, 유사 1인, 장재(掌財) 겸 집사(執事) 6인으로 되어있는데, 계장은 계무를 총괄하고 공사원은 계장의 보좌역, 유사는 총무역이고 장재 겸 집사는 물자관리와 연락책이었다. 1956년 규약 개정시 임원 조직은 계장 1인, 부계장 2인 ,총무 1인, 재무 1인, 간사 약간명(10명당 1인), 감사 2인, 고문 1~2인으로 손질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계장, 부계장, 총무, 재무는 총회에서 선출되고 여타 임원은 계장이 지명 또는 추대한다. 그러나 여느 계와 마찬가지로 계장, 총무, 재무 이외는 명목상 직책에 불과한 실정이다. 광람계의 강신일(降神日)은 매년 음력 3월 25일이며 창계 때부터 한해의 강신유사를 연령순 윤번에 따라 10명씩을 선정하여 이들의 공동부담으로 음식을 장만하고, 유사 중 1인의 집 마당이나 인근 마을의 경치좋은 정자, 명소 등에서 계회를 치렀다. 강신총회는 계장 주재로 계칙에 관한 사항, 예산결산 문제, 임원선출, 사업계획 및 실적보고, 표창자 시상, 유사 선정 및 기타 안건을 토의한다. 현재는 계의 활동상이 상당히 미약한 상태이며 강신일이 오면 용전동 인근 식당에 전 계원이 모여 몇 만원씩의 회비를 모아 수계를 한다. 계재는 초기 창계시 백미 1두씩 거둬들인 것을 5할대의 이율로 식리하여 목돈을 만들어서 용전동 405번지에 답 504평을 구입하고 경작료를 받아 운영비로 사용한다. 무엇보다도 광람계 운영의 핵심은 품행 우수자 표창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 내용을 보면 가장 기본적인 조위를 비롯 효행, 열절, 덕행, 우애, 신의, 구휼, 봉양, 장학, 돈행 등 10개 항목으로 도표를 만들어 매년 조위자와 표창자의 인원과 명단을 기록해 나감과 더불어 부조 및 표창을 하였다. 이러한 표창은 물질적인 도움보다는 덕행을 널리 고양시켜 지역민들이 쉽게 본받고 따르도록 하는 의도가 담겨진 것이다. 1958년 이후에도 얼마동안은 몇 개 부문에 국한하여 표창을 해오다가 70년대 이후에는 계원 및 계원가족의 문상하는 일만이 사실상 광람계 사업의 전부가 되다시피 하고 있다. 광람계는 향촌민들에게 유교적 교화이념을 구현시키기 위해 당시 광주 우치면장이던 범재풍이 심혈을 기울여 조직, 주도한 전형적인 광역(廣域) 향약계(鄕約契)라고 할 수 있다. 80여 년 전에 설립되어 내외의 갖은 악조건 하에서도 지금까지 지속해 온 점은 놀랍다. 보릿고개가 있었던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쌀 한 두 되는 별 것 아니겠지만 그 당시 최소한의 의식주 해결 자체도 어려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상부상조한 이들의 드넓은 애민애향(愛民愛鄕)정신은 높이 기려야 할 것이다.
    2018-11-13 | NO.263
  • 광산김공정복정열쌍효비
    광주시 남구 덕남동 산138번지 향등제 인근1922년  남구 양과동 만산마을에는 1922년 광산 김씨 김정복(金廷福)·김정열(金廷烈)의 효행를 기리는 ‘쌍효비(雙孝碑)’가 있었다. 광산김씨 문중에서 두 형제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으며, 효열의 내용은 효열행지에 기록되어 있다. 남구 양과동 쓰레기매립장 조성공사 등으로 인하여 이 비는 남구 덕남동 산138번지 일대에 향등제 저수지와 빛고을전남대병원 가는 좁은 길 오른편 억덕 아래에 있다. 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선조님에게 진실로 지극한 효행이 있어 정려(旌閭)를 세우고 싶지만 신청할 곳이 없어 걱정이고, 국사에 기재하고 싶지만 정직한 붓을 잡을 사람이 없다. 그 효행을 숨겨 두는 것보다는 차라리 조그마한 돌에 새겨 영원히 후세 사람들에게 보여 일깨워주는 것이 어떠하겠는가.오늘날 송석동(松石洞) 향등리에 김효자 정복·정렬 형제가 있었으니 광산김씨 문숙공이신 주정(周鼎)의 후손 계문(啓文)의 아들이다. 특이한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어려서부터 그 어버이를 사랑하고 공경하여 그 마음을 미리 짐작하고 그 몸을 편안히 하였다. 그 어머니 김해김씨의 병세가 위독하자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이 차례로 손가락을 깨물어 입안에 피를 흘려 수명을 몇 일간 연장하도록 하였다고, 본장(本狀)에서 이 사례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효도는 온갖 행동에 근본이 되는 것이기에 기타 행동을 추측하여 알만하다.대개 효도란 그 어버이가 운명하려 할 때 그 절박한 심정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일이니 한 가문에서 두 효자가 배출되었다는 것은 세상에 드문 일이다. 아~ 효자 두 형제가 세상을 떠나간 지 이제 2백여년이 되었다. 당시 본 고을 또 도내(道內) 선비들이 그 효행을 열거하여 군수와 관찰사에게 보고를 하였건만 임금님에게까지는 알리지 못하였으니 어찌 아쉬움이 아니겠는가.그 증손 용휴(容休) 등이 효자비를 세울 것을 결심 땅을 팔아 비석을 세우려 했건만 불행하게도 죽었다. 용년(容年)이 소를 팔아 비석을 다듬고 그 종제 용휴 조카 이중(二中)과 더불어 효행 포양장을 안고 나를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비문을 지어줄 것을 간청할 때 해가 이미 넘어갔다. 나는 그들의 선조를 추모하는 생각과 또한 효자 두 분의 사적에 감명을 받아 천만년 후세에 믿음직한 고증자료를 남길 것을 결심하고 드디어 붓을 들어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지었다.뭇 백성들의 행동에 효도가 가장 첫머리가 된다. 김씨가문 두 아들은 순수한 성품을 하늘에게 받았다. 이치는 밝고 밝은 것이니 그 어찌 효행자취가 묻혀버릴 것인가. 단단히 이 돌에 새겨, 요즘 사람을 깨우쳐주는 자료로 사용하리라.1922년 여름 종손 영식 지음.
    2018-06-15 | NO.262
  • 광산김씨 효열문
    광주시 광산구 박호동 152-1(노동마을)1623-1649황룡강변을 끼고서 들녘이 바라다 보이는 박호동 노동부락 어귀에 광산김씨산 옆에 효열문이 있다. 이 효열문의 건립 연혁은 효자 김응기와 나주나씨 효열을 기리고자 유림들의 천거로 인조와 선조가 명하여 세워졌다. 김응기는 3세때 모친 죽산박씨를 잃고 13세때 백부 김건에게 양자로 입양됐다. 김응기는 어려서부터 부모님 시중을 잘하고 15세 때 생부가 별세하자 슬픔과 성심으로 3년 상을 치루었다. 18세 때 같은 마을 문화유씨와 결혼하고 양부모에게 효성을 다했다. 34세 때 부친이 병상에 눕자 백방으로 명의와 선약을 구해 간호했으며 별세하자 묘소 곁에서 3년 동안 시묘를 하였다고 전한다.
    2018-11-11 | NO.261
  • 광산김씨효열각
    광주시 남구 포충로 701에 있는 광산김씨효열각이다. 오른쪽은 효원각으로 효자천선당광산김선진행적비가 있고, 왼쪽은 열일각으로 효열부풍산홍씨실적비이다. 효자천선당광산김선진행적비는 황산사 밑에 1956년 김해김씨 문중이 건립했다. 비의 내용은 노조모와 편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여 향리의 효자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라는 점이다.  [碑文의 內容] 省以日溫淸如時一經慈候之命則勿逆勿怠恒時悲痛者幼孤不能盡誠於嚴君皇靡逮讀主衰蓼莪之淚省楸顔丁不及其返而息無時不切十四歲窂平澤林錫周之女琴湖諱亨秀后生長于壺則之門端莊幽閒德配君子誠孝事舅姑堂內和集皆以貞婦稱君自後奉偏慈命負笈于弦窩高先生門二十一杖策于鹿洞書院責課數年二十三復往從太學生于成均館學業成家遍遊於長德宿儒之門非直以博吾聞見以其慈候表彰之誠心也京鄕鴻碩皆感君誠孝而贈之以笈善之筆用是遠近士友皆知洪氏特節之行各郡通狀及散處院宇兪文積以卷軸監司公所築漆石芙蓉亭爲人所執君濁0金額而還完且每歲百種之節以白米數石賑恤鄕里之窮之歲甲申日人以巧畫之物品欲取利于民間自郡道廳以至各面室皆和同之君獨力拒破之大運動元解至於新聞記載此皆君三十前事而奉行親命者也世皆以大義男子稱之不幸短命以三十四己丑十一月二日切其奈天壽何可欲者君之生世也纔逾壯年其行義之起越乎老成如許孝烈之親化疾尙今康寧七十而先祖芙蓉亭天然無患冠賊之行肆見燀而破之諸盤從可推矣噫使君至今在世則行政者取法不法者見化豈徒爲修身篤行   효열부 풍산홍씨 실적비 1956년 김해김씨 문중에서 건립한 비석이다. 주변은 대리석의 돌기둥을 세워 돌담장을 둘러 비석을 보호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碑文內容> 之素聞移孝事舅姑姑姑曰善事我敬戒夫子子子甚宜之歲壬戌夫人年才二十二其夫忽羅奇疾夫人不擇晝夜以迎醫合藥爲事舍置餘事嘗糞以驗其差劇湯藥必親手晨昏井花設壇以木兄天及其隕絶以脂血注口幾絶還甦如是者累矣知其將不免囑夫人曰吾家是忠孝節行之家及於身而止今也不幸以家事托夫人善養五王父母與偏慈及乳孤而不絶後嗣則地下之目庶幾可暝奄然而終夫人蒼黃顚制仆地氣絶而還甦盖下從之意不勝亡夫臨終之託也初終葬祭一一稱禮而少無遺憾後當王舅姑憂衰毁之節几尊之奉遵古制偏慈在堂抑搔撫問藥餌之供未嘗之絶平日嫂叔娣妣庭無間言嫁娶分戶極稱人情及其哭偏慈也比於前喪尤極備禮疊故之餘田地盡沒負債無弄晨夜績織裁縫不過數載而淸了素來遺業沒數還復宗家山地之見執者以巨額復完家度稱敍乳孤漸長使之負笈于弦窩先生門常自戒來力曰寡婦之子非有見焉不與爲友汝須節勵篤行使朋儕有好德之實也其於堂內尤盡恩義奉祭接賓之道未嘗懈惰雖在鄕憐之餓每多賑恤之爲子別築讀書之室曰晴霽軒善鎭長成有二男二女女出嫁爲羅州吳根求室餘幼善鎭從京鄕有名之家學業克承家庭夫人每從其所言不自專監司公所築漆石芙傭亭見奪於人命善鎭濁金額而遺復家中雍睦和氣滿室鄕道士林薦狀擬以漢陳孝婦令女之行至成均館各鄕校祠宇儒會所贊湯之狀昏奉
    2018-10-21 | NO.260
  • 광산김씨효열문 / 光山金氏孝烈門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읍 박호리 노동마을 입구孝子 金應期와 烈女 羅州羅氏의 孝烈을 기리기 위해 조선 인조 때 건립한 효열문, 목조와가孝子 金應期와 烈女 羅州羅氏의 孝烈의 뜻을 기리고자 儒林들의 천거로 仁祖와 宣祖께서 命旌  
    2020-03-02 | NO.259
  • 광산이공남지유허비
    광주시 북구 삼각동 254-31964년이 증통정대부일곡광산이공남지유허비(贈通政大夫逸谷光山李公楠之遺墟碑)는 일곡 이남지의 행적을 기록한 비이다. 金奎泰 짓고 쓰다. 광산이씨 문중 건립하다.
    2018-11-13 | NO.258
  • 광산이씨 효열비각
    서구 금호동 702-37 인근광산이씨효열정려는 음성박씨 박성립朴性立의 처 광산이씨의 효열을 기리는 정려였다. 음성박씨정승공파백암문회에서 관리했다. 광산이씨의 아버지는 이중근, 조부는 이경욱, 증조는 이언식으로 대제학을 지냈으며 외조부는 조계원이다. 광산이씨는 1795년에 출생하여 박성립과 성혼하였으나 출가한지 한 달 만에 남편과 사별하게 되었다. 이씨는 남편을 따라 하종하니 1819년의 일이었다. 순조 때 특명으로 1832년에 정려가 내리니 비각은 정면, 측면 1칸의 골기와 팔작지붕 건물이었다. 매산 홍직필이 짓고 노사 기정진이 찬했다. 효열비각孝烈碑閣 광산이씨정려중건기실비光山李氏旌閭重建紀實碑는 2007년에 기존의 비를 다시 세운 것이다. 그 옆에는 1978년에 세워졌던 원래의 효열녀유인 광산이씨 정려중건기실비가 있다. 이 비문은 파평인 중헌重軒 윤정복尹丁鍑이 짓고 영천인 이재련李載鍊이 글씨를 썼다. 광주 북쪽의 대재동에 건립하였고 고종 때 만호동으로 옮겼다가 세월이 흘러 훼손되어 마을 남쪽에 중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효열비각 건립기 비문이 옆에 따로 있다. 내용은 서구 금호동은 20세기 말까지 광산군 서창면 만호실마을로 조선 순조 때 음성 박성립 공의 부인으로 효부이자 열부였던 광산이씨를 기리는 정려가 나라에서 내려져 2백여년 동안 보존되어 왔던 자랑스러운 마을이었다. 오늘날 광주가 현대 도시로 팽참함에 따라 고층건물이 숲을 이루니 정려가 그에 묻혀 유지할 수 없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정려를 거두고 이 자리에 효열정려 비각을 세워 자랑스러웠던 유적으로 남겨 후세대 사람들이 그를 더듬어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음성박씨 만호실 백암문회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웠다고 한다.
    2018-05-25 | NO.257
  • 광산정씨효열실적비
    광주시 광산구 지평동 지정마을1983년이 광산정씨효열실적비(光山鄭氏孝烈實蹟碑)는 광산정씨 문중에서 관리한다. 奉奇鐘이 찬했다.
    2018-12-01 | NO.256
  • 광주노씨 신도비
    광주시 북구 오치동 109광주노씨 신도비각은 노씨삼릉단 재각 앞에 있다.
    2018-12-07 | NO.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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