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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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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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향교모성회기실비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2003년광주향교모성회기실비(光州鄕校慕聖會紀實碑)는 모성회(慕聖會) 설립에 관한 전말(顚末)과 모성회(慕聖會) 소유토지 등기명의인(登記名義人) 35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광주향교 모성회(慕聖會)에서 2003년에 세웠고, 찬자(撰者)는 유한상(柳漢相), 서자(書者)는 고광렬(高光烈)이다. 모성회(慕聖會)는 1940년에 광주의 유림 650여명이 성현의 덕을 추모하고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 취지로 발족하였다. 일제식민지 말기 일본인의 학정이 극심하여 향교재산이 그들의 손에 넘어가고, 제사조차 드리지 못하게 하자, 이 고장의 유림들이 분연히 일어나 향교의 기본재산을 조성하고 석전대제를 드리며, 향교의 보수, 기념비 등을 건립하여 유교사상을 통해 윤리의식 및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2018-06-11 | NO.254
  • 교관광산김공화택효행비
    광주시 북구 양산동 원산마을1938년 이 교관광산김공화택효행비(敎官光山金公和澤孝行碑)는 광산김씨 문중에서 관리한다. 李漢雨가 찬했다.
    2018-12-01 | NO.253
  • 근시재(近始齋) 김 선생(金先生) 묘지명
    갈암집 제25권 / 묘지명(墓誌銘)근시 선생 김공이 돌아가신 지 93년이 지났는데, 어느 날 선생의 손자인 국자 상상(國子上庠) 면(愐)이 가전(家傳)을 가지고 와서 현일에게 말하기를, “황대부(皇大父)의 선한 덕과 행의(行誼)로 볼 때 마땅히 지(志)가 있어야 하는데, 처음에 국난(國難)이 평정되지 않아 장사 지낼 때 묘지명을 쓰지 못하였고, 그럭저럭 세월이 흘러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이러다가 마침내 사적이 인멸되면 유명(幽明)에 죄를 짓게 될까 두려우니 속히 묘에 명(銘)을 묻어 후손을 일깨우고 싶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어 아는 자가 더욱 적어졌으므로 지명(誌銘)을 부탁할 사람이 없는데, 그대만은 가정에서 익히 들어 필시 우리 조부의 일을 능히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니, 우리를 위해 지문을 써 주십시오.” 하였다. 현일이 일어나 절하고 사양하기를, “현일의 선인(先人)께서 일찍이 선생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셨으니, 공의 고모가 바로 나의 선비(先妣)이십니다. 선인께서 선생이 살아 계실 때 직접 뵙고 가르침을 받지는 못했지만 현자(賢子)들과 교유하면서 유풍(遺風)에 감화받은 것이 많았습니다. 현일이 다행히 선대의 중한 교분으로 인하여 그 끼치신 은택을 입고 우러러 존모하는 것이 일반 사람과 다르니, 오늘의 의리에 있어 진실로 감히 사양할 수 없는 점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먼 시골의 후생으로 학문이 보잘것없고 문장이 심히 비루하니 어떻게 덕행을 능히 기술하여 먼 훗날에 전할 수 있겠습니까. 감히 백번 절하고 사양합니다.” 하였는데, 상사군(上舍君)이 거듭 대의(大義)를 들어 책망하기에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마침내 그 가전에서 뽑고 내가 들은 것을 참고하여 아래와 같이 그 사적을 논차(論次)한다.삼가 살피건대,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실로 신라 왕의 후손으로 신라가 쇠할 때 왕자 흥광(興光)이 국가가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광주(光州)로 피신하였으니, 이분이 바로 비조(鼻祖)이다. 고려 때 휘(諱) 길(吉)이 태조(太祖)를 도와 공을 세워 품계가 대광(大匡)이고 지위가 사공(司空)에 올랐다. 그 후 대대로 광주에 살았고, 여러 대에 걸쳐 재상을 지냈으므로 사람들이 그 사는 마을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불렀다. 국조(國朝)에 들어와 휘 회(淮)가 음성 현감(陰城縣監)을 지내고 졸한 뒤에 병조 참의에 추증(追贈)되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안동(安東)에 살았다. 이분이 휘 효로(孝盧)를 낳았는데, 성균관 생원으로 졸한 뒤에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또 예안(禮安)으로 옮겨 휘 연(緣)을 낳았는데,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이분이 휘 부의(富儀)를 낳았는데, 성균관 생원으로 퇴도(退陶 이황(李滉)) 노선생(老先生)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하는 대방(大方)을 들었다. 권씨(權氏)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을묘년(1555, 명종10) 2월 모갑(某甲)에 선생을 낳았다.선생의 휘는 해(垓)이고 자(字)는 달원(達遠)이다. 태어난 지 7일 만에 모부인(母夫人)이 돌아가시어 세모(世母) 하씨(河氏)의 손에서 자랐다. 조금 자라서 독서하고 행실을 닦아 고인(古人)의 학문에 뜻을 두었는데, 우뚝하게 일찍 성취하여 명성이 자자하니 제공(諸公)과 명인(名人)들이 모두들 탄복하고 허여하였으며 나이와 지위를 잊고서 더불어 사귀기까지 하였다. 그 전에 관찰공(觀察公)이 2남(男)을 두었는데, 장자가 부필(富弼)이니 별호(別號)는 후조당(後凋堂)이고 선생에게는 백부가 된다. 자식이 없어 선생을 자기 자식처럼 여기니, 선생이 그분이 살아 계실 때에는 효도를 다하였고, 돌아가시자 심상(心喪) 3년을 입었다. 만력(萬曆) 임오년(1582, 선조15)에 외간(外艱)을 당하여 묘 옆에서 시묘살이하면서 삭망(朔望) 때에만 내려와 궤연(几筵)에 전(奠)을 올렸고, 상을 마칠 동안 외부의 일에 간여하지 않았다.정해년(1587, 선조20)에 천거한 자가 있어 광릉 참봉(光陵參奉)에 제수되었는데 나아가지 않았고, 무자년(1588)에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에 제수되자 사은숙배하였다. 이해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이듬해 여름에 비로소 출사(出仕)하여 승문원 정자에 보임(補任)되었는데, 얼마 안 있어 예문관 검열에 옮겨졌다. 겨울에 사원(史院)의 동료가 사초(史草)를 불사른 일에 연좌되어 파직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이때 역변(逆變)이 있었는데, 무고로 조사를 받다가 재신(宰臣)이 변호해 주어 벗어날 수 있었고, 관작을 삭탈당하여 전리(田里)에 돌아왔다. 이때부터 두문불출하고 조정의 시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으며 3, 4년간 지방에만 있었다.임진년(1592) 여름에 왜란이 일어나 열흘 사이에 삼도(三都)가 모두 무너졌다. 선생이 종국(宗國)의 비상한 변란에 통분하여 창의(倡義)하여 향병(鄕兵)을 일으키고 동지(同志)를 규합하여 거느리고 의를 위해 목숨을 버릴 계획을 하였는데, 마침 학봉(鶴峯 김성일(金成一)) 김 선생(金先生)이 초유(招諭)의 명(命)을 받고서 도내에 격문(檄文)을 돌렸다. 선생이 답한 편지에, “도이(島夷)가 창궐하여 어가(御駕)가 파천(播遷)하였으니, 신민(臣民)으로서 통탄스러워 살아 있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합니다. 그러나 궁벽한 시골에서 한묵(翰墨)만을 일삼아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히지 못했으니 맨주먹만으로는 스스로 공을 이루기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나 충의(忠義)는 타고난 본성인지라 복수하려는 뜻이 간절하니, 천지에 맹세코 적을 토벌하는 의리를 펴겠습니다.” 하였다. 8월에 진군하여 안동에 이르니 열읍(列邑)의 의병들이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았다. 이에 빈객(賓客)을 안배(按排)하고, 용궁(龍宮)과 함창(咸昌)의 지경으로 진(陣)을 옮겨서 기회를 보아 적에 대응하여 공을 세우려 하였다. 계사년(1594) 1월에 명(明)나라 군대가 평양(平壤)을 수복하자 적이 철군하여 달아나니, 이에 승세를 타서 적을 사로잡고 참(斬)하여 상당히 많은 수급(首級)을 얻었고, 이로 인하여 적을 추격해서 남쪽으로 내려와 여러 군대와 밀양(密陽)에서 모였다. 5월에 단인(端人) 이씨(李氏)의 부음(訃音)을 듣고서 계모(繼母)는 늙고 자식은 어린데 형제가 없는 것을 염려하여 잠시 돌아가 가사(家事)를 상의하고 즉시 진(陣)으로 돌아왔다. 행군하여 경주(慶州)에 이르러 병이 나서 졸(卒)하니, 춘추가 39세였다.부음이 이르자 전군(全軍)이 부르짖고 통곡하기를 친척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처럼 하였고,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들 탄식하기를, “선인(善人)이 죽었다.” 하였다. 이해 11월 경오일에 현(縣)의 서쪽 지례촌(知禮村) 계향(癸向)의 언덕에 장사 지내니,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의 묘와 같은 언덕이다. 이는 선생이 상락공의 외손이기 때문이다. 을미년(1595, 선조28) 가을에 상(上)이 선생의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순국(殉國)한 의리를 생각하여 특별히 승의랑(承議郞) 홍문관 수찬에 추증하였다. 천계(天啓) 병인년(1626, 인조4)에 상락공의 손자가 본도의 관찰사가 되어 강제로 선생의 묘를 파서 옮기게 하였다. 이듬해 2월에 재사(齋舍)의 뒤쪽 기슭에 임시로 이장했으나 마침 나라에 전란이 있어 길지를 가려 안장하지 못하였다. 전란이 안정되자 거음곡(居音谷) 신좌을향(辛坐乙向)의 언덕에 모셔 안장하니, 이때가 12월 모일(某日)이었다. 그 후 무신년(1668, 현종9)에 복인(卜人)의 말을 따라 또 송음동(松音洞) 유좌(酉坐)의 언덕에 이장하니, 이때가 4월 24일이었다.선생은 타고난 자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의용(儀容)과 풍도(風度)가 근엄하였다. 그 학문은 참으로 알고 실천하여 성현의 바른 문로(門路)를 얻었다.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는 그 힘을 다하였고, 선조를 받듦에 있어서는 그 정성을 다하였다. 집안을 다스리는 데에 법도가 있어 내외(內外)가 분명하였고, 친지와 향당(鄕黨)에 대해서는 돈독하고 화목하며 공경하고 겸양하는 도리를 다하였다. 길흉(吉凶)에 경조(慶弔)할 때 예를 빠뜨림이 없었고, 궁핍한 자를 구휼할 때에도 그 힘을 아끼지 않았는데, 일찍이 말 1필을 출연(出捐)하여 궁핍한 벗의 급함을 구제해 주었다. 취사(取捨)를 신중히 하고 응대(應對)를 삼갔으며, 남의 작은 허물을 용납하고 남의 선을 말하기를 좋아하였다. 교제하는 데 구차하지 않아 사귐이 오래되어도 공경하였으니, 비지(賁趾) 남치리(南致利),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 송소(松巢) 권우(權宇),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존재(存齋) 곽준(郭䞭)과 도의(道義)로 사귀면서 책상을 마주하여 강론하고 편지로 왕복한 것이 함께 수양하고 절차탁마하는 데 도움되는 것 아님이 없었다.사는 집 남쪽에 작은 서재를 열고 현판을 근시(近始)라고 하고서 날마다 거기에서 독서하며 경훈(經訓)을 깊이 연구하고 예서(禮書)를 널리 상고하여 그 요체를 궁구하고 그 차이점을 바로잡았으며, 역대의 치란과 흥망의 자취를 모두 이해하고 통달하였다. 그리고 천문(天文), 지지(地誌), 병법(兵法), 군율(軍律), 의술(醫術), 복서(卜筮)의 설까지도 모두 그 근원과 지류를 섭렵하여 그 대체를 알았다. 학자(學子)가 찾아와 배움을 청하면 그 재품(才品)에 따라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항상 퇴도(退陶)의 문하에 나아가 직접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고, 퇴도 선생의 남은 자취를 정리하고 실추된 서업(緖業)을 이어서 사문(斯文)을 흥기(興起)시키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려운 세상을 만나 병들어 죽었으니, 어찌 후학의 무궁한 한이 되지 않겠는가.처음에 퇴도 선생이 〈사단칠정변(四端七情辨)〉을 짓자 근세의 대유(大儒)라고 불리는 자들이 이기(理氣)는 호발(互發)이 없다는 설을 주장하면서 노선생(老先生)에 대해 의리(義理)가 분명하지 않다고 기롱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선생이 설(說)을 지어 변론하기를, “천지(天地)에 가득 차고 고금(古今)에 유행(流行)하는 것은 이기일 따름이다. 사람의 한 몸은 이(理)와 기(氣)를 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사단(四端)이 발(發)하는 것에 대해 기(氣)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 주(主)가 되는 것이 이(理)이기 때문에 이발기수(理發氣隨)라고 하는 것이고, 칠정(七情)이 발하는 것에 대해 이(理)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 주가 되는 것이 기(氣)이기 때문에 기발이승(氣發理乘)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성현이 그 서로 떨어지지 않는 가운데서 서로 섞이지 않는 묘(妙)를 집어내서 말하였는데, 근세에 일종의 의론이 반드시 이와 기를 합쳐서 하나로 만들어 노선생이 주장한 이발기발(理發氣發)의 설을 가리켜 잘못되었다고 하니, 이는 이 설이 실로 주자(朱子)에게서 근본한 것이요, 노선생을 욕하는 것이 바로 주자를 욕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것이다.” 하였다. 이것이 그의 식견이 진실되고 사설(邪說)을 종식시키 데 도움되는 것이니, 어찌 근세의 유자(儒者)들이 발돋움하여 미칠 수 있는 것이겠는가. 글을 짓는 데 꾸미는 것을 일삼지 않아 평이하고 진실하며 온후하고 전아하였고, 가리키는 뜻이 명백하였다. 시(詩)는 혼후(渾厚)하고 담박(淡泊)하여 그분의 됨됨이와 같았다. 평생 저술한 것이 대부분 병화(兵火) 중에 산실(散失)되었고 약간 권만 집에 보관되어 있다.단인 이씨는 본관이 진성(眞城)인데, 조부는 휘가 의(漪)이고, 부는 휘가 재(宰)이며, 퇴도 선생에게는 질손녀(姪孫女)가 된다. 성품이 온화하고 정숙하며, 선생의 배필이 되어 부덕(婦德)에 어긋남이 없었고, 선생보다 한 달 먼저 졸하였으니, 향년 42세였다. 처음 장사 지낼 때부터 세 번을 이장하도록 모두 합장하였다.4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광계(光繼)는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냈고, 유행(儒行)이 있었다. 차남은 광실(光實)이고, 3남은 광보(光輔)인데 성균관 생원이었다. 4남은 광악(光岳)이다. 큰사위는 찰방(察訪) 박회무(朴檜茂)이고, 둘째 사위는 사인(士人) 유암(柳嵒)이다. 막내딸은 우리 선군(先君)께 시집왔는데, 선군의 휘는 시명(時明)이고, 성은 이씨(李氏)이고, 일찍이 능서랑(陵署郞)을 지냈다. 교관(敎官)이 자식이 없어 광실의 아들 렴(????)을 후사(後嗣)로 삼았다. 광실은 5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초(礎), 려(礪), 렴(????), 선(????), 빙(砯)이다. 딸은 모두 시집가서 사인의 처가 되었는데, 사위는 권계(權), 오익훈(吳益勳), 이민표(李民標)이다. 생원이 3남을 두었는데, 장남 면(愐)은 진사(進士)이고, 차남은 이(怡)이고, 3남은 근(慬)이다. 딸이 여섯인데, 장녀는 사인 정시태(丁時泰)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생원 변지두(邊之斗)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사인 조병(趙頩), 금이석(琴以晳), 이홍지(李弘至), 권경(權暻)에게 시집갔다. 광악이 3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정(䂻), 영(碤), 성(????)이고, 딸은 사인 김인(金????), 생원 채익하(蔡翊夏), 사인 강명(姜????)에게 시집갔다. 찰방이 1남을 두었는데, 이름이 료(炓)이다. 유암은 아들은 없고, 딸만 하나 있는데 사인 정억(鄭億)에게 시집갔다. 우리 선비(先妣)께서 일찍 돌아가셨는데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상일(尙逸)인데 참봉을 지냈고, 딸은 사인 여국헌(余國獻)에게 시집갔다. 렴이 또 아들이 없어 선의 아들 순의(純義)를 후사로 삼았다. 내외의 손, 증손, 현손을 합치면 90여 명이다.아, 선생의 타고난 아름다운 자품과 학문을 좋아하는 독실함으로 볼 때 만약 더 오래 살아서 대업(大業)을 마쳤더라면, 나아가서는 이 백성들에게 은택을 입히고 물러나서는 후세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어떠하였겠는가. 불행히 성년(盛年)에 세상을 떠나 하늘이 수명을 조금도 연장시켜 주지 않았으니, 슬프다. 비록 그러나 그 남아 있는 것을 미루어 보면 사람으로 하여금 사(私)를 잊고 나약함을 분발시켜 도(道)를 보호하고 사설(邪說)을 물리치게 하는 공이 있으니, 끝내 불행하지만은 않다.명(銘)은 다음과 같다.아, 선생이시여 / 嗟惟先生정성스럽고 신중하며 단정하고 진실되도다 / 誠愼端慤지키시는 지조가 엄하고 / 持守之嚴실천함이 독실하였도다 / 踐行之篤지극히 효성스러웠고 / 謹謹其孝또 지극히 충성스러웠도다 / 蹇蹇其忠문재(文才)가 있고 무재(武才)가 있으며 / 有文有武훌륭한 말씀과 큰 공이 있도다 / 有言有功전에는 차분하게 / 伊昔從容시서를 읽고 법도가 있더니 / 詩書法度강개하게 전장에 임하여서는 / 慷慨臨戎그 용모가 굳세었네 / 其容曁曁또한 논저가 있어 / 亦旣論著사설(邪說)을 막았도다 / 式遏詖淫선현(先賢)에 빛나는 공로가 있으니 / 于前有耀어찌 오늘날만을 다행스럽게 한 것이겠는가 / 不寧幸今그 시종을 살펴보면 / 循厥始終후인으로서 어찌 서운하고 부끄럽지 않겠는가 / 奚憾奚愧명을 지어 밝게 드러내서 / 銘以昭之후세를 일깨우노라 / 以覺來世
    2022-04-29 | NO.252
  • 기대승-고봉기대승신도비
    광주시 광산구 광곡길 133 월봉서원고봉 기대승은 광주 출신으로 16세기 대표적인 성리학자이다. 그는 퇴계와 사단칠정을 비롯한 성리 논변을 통해 자신의 학문적  지평을 넓혔으며, 율곡의 성리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文憲公高峯奇大升先生碑는 아들 기효증이 찬했다.
    2018-12-04 | NO.251
  • 기양김공묘갈명비
    광주시 광산구 양동 마암마을1920년이 기양김공묘갈명비(箕陽金公墓碣銘碑)는 천안김씨 문중에서 관리한다. 기우만이 찬했다.
    2018-12-01 | NO.250
  • 기진-덕성군물재기공유허비
    광주시 광산구 임곡용동길 166 (오남재 뒤 야산)1957년이 덕성군물제기공유허비(德城君勿齊奇公遺墟碑)는 기근섭이 찬했다.고봉 기대승 선생의 부친인 물재 기진(奇進)의 유허비이다. 그의 동생 기준이 기묘사화로 인해 죽임을 당하자 그때 낙향하여 터를 잡고 지은 오남재(五南齋)가 있다. 그 옆 산길을 따라 5분정도 걸어 오르면 후손 근섭(近燮)이 찬(撰)하고, 김규태(金奎泰)가 서(書)한 그의 유허비가 있다.
    2018-06-11 | NO.249
  • 기진-행주기씨기진묘비
    광주시 광산구 임곡용동길 166(오남재 뒤 야산)행주기씨 참봉 기진묘비(奇進墓碑)는 오남재(吾南齋) 뒤에 있다. 행주기씨 낙남선조(落南先祖)인 덕성군 물제(物齊) 기진(奇進)을 제향하는 제각으로 1560년에 건립했다. 물제 기진은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의 부친이며, 기묘명현 기준의 중형이다.
    2018-06-11 | NO.248
  • 김덕경-둔암처사 김해김공 유장비
    광주시 남구 노대동 707번지 신기마을 뒤편 양양재(洋洋齋)1981년남구 진월동(노대동) 노대마을 앞에 1981년 둔암처사 김덕경(遯庵處士 金德慶)의 유장비를 세웠다. 현재는 양양재(洋洋齋) 제각 한편에 있다.遯庵處士金海金公遺庄碑  遯庵處士金公諱德慶字明述系出駕洛國首露王傳十世讓王遯位新羅至曾孫諱庚信統合三韓封興武王是金海金氏三王中祖高麗版圖判書諱管入李朝節孝公慕庵先生諱克一節孝公之孫文愍公濯纓先生諱馹孫文愍公之姪三足堂先生諱大有也謹稱三賢公郞文愍公之玄孫也自先生之酷被戊午士禍以 後其後孫之流落?間者多矣而遯庵處士亦其一也謹按公生長乎 宣仁孝顯之世而專政儒術造詣甚高常曰士不得於朝則野遂南遯於光山瑞石山之西葛嶺之下古之老大里今光州市孝德洞也結茅爲屋杜門歛跡澹寂自養一床琴書三巡花竹悠然有碩人不護之趣竊念公以簫灑之胸次膽麗之學文宜常翶平朝端而自遯荒山晦名沒齒必其深徵先世之連禍而無竟仕進者歟弦窩高翁嘗題其墓文曰此果爲聖世之逸民信乎百世之立言也公只有一子至玄孫始擧四男曰尙九感奉九貞九兄弟四人孝友備至居民咸頌曰人地相筏蓋此一區統稱孝友洞改云爾自足世爲綮衍戶可百餘而不寂家於一方亦不失三賢世家之典型則惟公不食之報必將有大來之日矣十二世孫鎬永謀議閭門就遺墓之前將堅一碑以使後昆不忘先德而思所以嗣宇之計命其族弟鎬翊鎬巖鎬瑾兌仁族姪相洙道洙江洙謁余東山之寓居爲文以識之余感其追遠之孝誠而不忍辭爲之銘曰 處士肥遯居貞深徵先禍經否爲榮聸望葛嶺爰想遐蹤鬱彼桑梓敢不肅容曰子有後不束遺墓表厥宅里屹其碑矧伊雲善述且繼餘慶綿綿於千萬世光復後三十七年辛酉六月駕洛金海金亨在 謹撰
    2018-06-13 | NO.247
  • 김덕령-충효동정려비각(조선국증좌찬성충장공김덕령증정경부인흥양이씨충효지리)
    광주시 북구 충효샘길 7(충효동)1789년충장공 김덕령 충효리비(忠孝里碑)는 <광주읍지>에 따르면 주(州)의 동쪽 30리에 있다. 광주 석저면(石底面)의 고비(古碑名)로 朝鮮國 贈左贊成 忠壯公 金德齡 贈貞敬夫人 興陽李氏 忠孝之里충효동 정려비忠孝洞旌閭碑는 김덕령金德齡(1567-1596)과 그의 가족의 충효와 절개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건립 연대는 1789년(정조 13)이다. 1985년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었다.비문은 비신의 전면과 후면에 기록되어 있다. 비신의 전면에는 ‘조선국증좌찬성충장朝鮮國贈左贊成忠壯/공김덕령증정경부인公金德齡贈貞敬夫人/흥양이씨충효지리興陽李氏忠孝之里’라는 제명이 세로 세 줄로 크게 적혀 있다. 제명의 서자는 미상이다.  비신 후면에는 김덕령의 업적 및 임진왜란 당시 금산전투錦山戰鬪에서 전사한 김덕령의 형 김덕홍金德弘(1558-1592)과 아우인 김덕보金德晋(1571-1627)의 충효를 기리는 내용이 담겨 있다. 비문에 따르면, 정조正祖(재위: 1776-1800)가 직접 김덕령의 고향 마을을 충효리忠孝里라고 이름 짓고 비를 세워 표시하게 하였다고 한다.  비문은 서유린徐有隣(1738-1802)이 글을 짓, 서용보徐龍輔(1757-1824)가 글씨를 썼다. 서체는 해서이며, 각자는 미상이다.  비는 개석과 비신, 하대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석의 재질은 응회암이고, 비신의 재질은 석회암이며, 하대석의 재질은 화강암이다. 개석은 팔작지붕 형태이다. 내림마루와 추녀마루의 형태가 잘 남아 있으며 추녀의 끝이 들려 있다. 비신의 상태는 전체적으로 양호하지만, 곳곳에 낙서를 비롯해 인위적인 긁힘이 보인다. 하대석은 직육면체 형태로 아무런 무늬가 없으며, 상태는 양호하다.  서유린(徐有鄰)의 기(記)에 다음과 같이 써 있다."옛날에 충용장군 김덕령이 초야로부터 일어나 의병을 일으켜 흉한 왜구를 막아냈다. 위엄과 명성이 일본에까지 진동했으나 불행하게도 기이한 재앙에 걸려 죽었다. 이에 앞서 그의 형 덕홍도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였고 부인 이씨 또한 왜적을 만나 순절하였다. 이처럼 충효가 한 집안에 모였으나 지하의 원혼을 펴지 못하고 아름다운 빛이 표창되지 못하여 군자(君子)가 이를 슬퍼했다. 현종때 비로소 공의 원통함을 씻어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증하고 숙종 때 벼슬을 올려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증하고, 의열(義烈)의 편액을 하사했다. 정조 무신(戊申, 1788)에 다시 벼슬을 올려 좌찬성(左贊成)을 증하고 충장(忠壯)의 시호를 하사하였다. 그리고 이씨에게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을 증하고 덕홍(德弘)에게는 지평(持平)을 추증하였다. 이어 공의 고향 마을을 충효리(忠孝里)라 이름하여 비석을 세워 표하게 하고 신(臣) 유린(有鄰)에게 명하여 비석 뒷면에 그 음기(陰記)를 짓게 하였다.공의 아우 덕보(德普) 또한 지행(志行)으로써 집의(執義)를 증하여 형제 인이 모두 의열사(義烈祠)에 향(享)하였는데 이와같이 국가에서 김씨의 집안에 치우치듯이 위로와 도움을 준 것은 진실로 충장공(忠壯公) 때문이다. 방금 성주(聖主)의 교화(敎化)가 널리 드러나 어둡고 숨겨진 곳을 반드시 비추어 잘못된 것을 바르게 하고 억울한 일을 제대로 펴는데 있어 공이 가장 으뜸가는 혜택을 받아 큰 비석에 특별히 새긴 비문이 단청(丹靑)처럼 찬란하여 한 때의 억울함이 백세(百世)의 훗날에 펴지게 되었으니 공에게 있어 무슨 유감이 있으라. 따라서 하늘이 공을 탄생시킨 것은 충용(忠勇)을 우주의 사이에 고취시키기 위한 것일 것이다. 어찌 공의 집안만의 다행한 일이랴. 그러나 충(忠)이라는 것은 반드시 효(孝)에 근본하는 것으로서 공의 집안에서의 효도가 바로 국가를 위한 충성이 되었던 것이다. 하물며 형이 앞에서 죽고 아내가 뒤에서 죽어 한 집안의 열렬(烈烈)함이 진실로 한 나라의 충성이 되었으니 이 또한 효도를 미루어서 이루어진 것이며 마을에 세운 정문(旌門)을 충렬(忠烈)이라 하지 아니하고 충효(忠孝)라 한 것은 성상(聖上)의 깊은 뜻이 있어서인 것이다. 후일에 이 정려문(旌閭門)을 향하여 머리를 숙이고 이 비문을 읽는 사람은 마땅히 먼저 효도에 힙을 써야할 것이다. 삼가 기록하여 오는 후인들에게 고하는 바이다."충효비각은 1792년에 처음 세워졌는데 정면은 3칸이고 옆면은 1칸이고 지붕은 맞배지붕이다.<비문>故忠勇將軍金公德齡起自草野倡義旅遏兇寇威聲震於日域不幸中奇禍以死其兄德弘先死於錦山之戰夫人李氏又遭倭殉節死忠烈萃於一家而幽冤未伸懿光不彰君子悲之顯廟始雪公冤贈兵曹參議肅廟加贈兵曹判書賜祠額曰義烈當宁戊申又加贈左成賜諡忠壯李氏贈貞敬夫人德弘亦贈持平仍名公故居曰忠孝里碑以表之命臣有隣記其陰臣承命踧踖退自惟念國家有事天必生濟難之才以待之然媢克之不罥而成功者鮮矣況公之不幸哉世之冤公者恒比之岳武穆武穆猶有隁城捷爾公則自擧義之始己爲用事者沮撓齎志蓄鋒百不一施而卒以橫累死使公得爲武穆死則幸矣嗟乎天之生之適足以遺志士之痛耶然列聖之湔滌褒顯殆無餘憾而節惠也旌表也又皆出特恩忠臣遭遇之盛奚間於生死哉公之弟德普又以志行贈執義兄弟三人並享于義烈祠國家之慰藉若偏金氏寔惟忠勇之故也方今聖化普彰幽隱畢照枉直屈伸公實居最而豊碑特書炳若丹靑一時之屈伸於百世在公何慽焉然則天之生公所以皷忠勇於寰宇也豈獨公家幸哉然忠者必本於孝公之孝於家正所以忠於國也況兄死於前妻死於後一家之烈擅爲一國之重是亦孝之推也宅里之旌不曰忠烈而曰忠孝者聖意有以也後之式是閭而讀是碑者盍先勉於孝哉謹書之以告來許弘文提學徐有隣撰 奎章閣直閣徐龍輔 上之十三年己酉三月日立*수정 : 2023.07.17 
    2018-06-17 | NO.246
  • 김덕령-형조좌랑증좌찬성충장김공신도비명
    광주시 북구 송강로 13(금곡동)2004년증 좌찬성 충장 김공 신도비(贈 左贊成 忠壯 金公 神道碑)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우리 선조(宣祖)께서 국운을 어루만지신 지 20여 년 만에 섬나라 왜적이 크게 방자하여 우리 8도의 백성(生靈)들을 짓밟자, 당시의 의사들이 갑옷 입은 말을 타고서 칼날과 살촉을 뚫고 중흥의 공적을 협찬 선양하여 공적이 큰 사람은 기상(旗常)에 표창되고 공적이 적은 사람은 봉록(俸祿)과 관작(官爵)으로 보답하여 수두룩하게 이루 다 셀 수 없다.그런데 고(故) 충용장군으로서 의정부 좌찬성을 추증한 김 충장공만은 의병을 일으킨 지 4년 되도록 한 번 명령한 포상도 받지 못하고 또 터무니없이 모함을 당하여 죽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2백년이 되도록 당시를 거슬러 올라가 논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탄식하면서 팔뚝을 움켜잡고 맨 먼저 김 장군을 칭찬 이야기하여 비록 아낙네와 어린이, 마부와 가마꾼들일지리도 김 장군이 비로소 의병을 일으켰을 적에 분조(광해군)가 명령한 익호장군의 칭호를 받았다. 이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익호장군이라고 부르다가 시호(諡號)를 충장(忠壯)이라고 내려줌에 이르러서는 사대부들이 모두 충장공이라고 부른다.공의 휘(諱)는 덕령, 자는 경수인데 광주 석저촌 사람이다. 증조의 휘는 후(珝)인데 호조정랑이요. 할아버지의 휘는 윤효(允孝)인데 선무랑이며, 아버지의 휘는 붕변(鵬變)인데 습독(習讀)이요. 어머니는 남평반씨인데 직장 계종(季宗)의 딸이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공이 그 둘째이다. 공은 대대로 예부터 유가(儒家)로서 일찍이 문장 명성을 날리어 17세에 향해(鄕解, 초시)에 합격하였다. 얼마 후에 또 우계 성 선생(성혼)의 문하에서 유학하여 유자의 학문을 강문(講問)하여 비록 뛰어나게 큰 뜻을 지녔으나 사람들이 아는 이가 없었다.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의 형으로 지평에 추증된 덕홍이 앞장서 의병을 일으키자 공도 역시 종군하였는데 지평공이 말하기를 “우리 형제가 모두 죽으면 늙으신 어머님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하고서, 마침내 공을 보내어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봉양하도록 하고, 홀로 고공 경명과 더불어 진군하여 금산에서 전투하다가 죽었다.이듬해 계사년에 왜적들이 서울에서 퇴각하였으나 그래도 영남에 웅거하면서 날마다 병력을 증강하여 재차 침략할 것을 도모하는데도 관군 및 여러 의병들이 대부분 왜적이 먼지만 바라보고도 달아나 피해 버렸다. 이때에 공은 어머니 반부인(潘夫人)의 상사(喪事)를 당하여 이미 장사를 지냈었다. 관찰사 및 이웃 고을의 수령들이 비로소 차츰 공의 명성을 듣고 서로 조정에 천거하였다. 충정공 이귀(李貴)가 당시에 장성현감이 되어 “공이 대장(大將) 인재이다.”고 말하니, 이에 특별히 형조좌랑 벼슬을 제수하였다.공의 자부(姊夫, 자형) 김응회(金應會)는 호걸스러운 선비였다. 대의로써 공을 개도(開導)하고, 조정의 교지가 또 마침 이르니, 공은 이에 묵최(墨縗, 검은 상복)로써 의병을 일으켜 전답과 집을 팔아서 무기를 마련하고 이웃 고을에 격문을 전달하여 용감하게 싸울 병사 5천여 명을 얻었다. 그러자 도원수 권율은 그 군대를 초승군(超乘軍)이라고 표지해 주고, 임금이 또 사자(使者)를 보내 군호를 충용군(忠勇軍)이라고 내려주셨는데, 때는 갑오년 정월이었다. 공은 마침내 병사들을 이끌고 영남 지역에 당도하여 격문을 돌려 “곧바로 대판성(大坂城)을 쳐들어가겠다.”하였는데 대판성은 왜적의 수도이다. 왜장 청정(淸正)이 몰래 화가를 보내 공의 용모를 그려 오도록 하여 그 용모를 보고 끌끌 혀를 차면서 말하기를, “참 장군이다.”라고 하고서, 이에 여러 주둔한 병사들을 철수시켜서 통합하여 큰 진지를 만들어 대비하였다.이때를 당하여 여러 장수와 병사들이 성벽과 보루가 서로 바라보이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오직 곽재우 장군만이 충성과 지략으로써 특별히 드러났었다. 공은 편지를 보내 힘을 합쳐 왜적들을 섬멸하자고 약속하고서 마침내 함께 정암(鼎巖) 나루터에 진을 쳤다. 왜적이 밤중에 시내를 건너와 장차 군영을 습격하려고 하자, 공은 복병을 설치하였다가 습격하여 그 왜적들을 크게 무찌르니 왜적들이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공이 진중에 있으면서 일찍이 울부짖는 두 마리 호랑이를 생포하여 왜적들에게 보여주니, 왜적들은 더욱 떨고 두려워하여 서로 경계하면서 익호장군을 피하였다.공은 진주에서 군대를 주둔시켰는데, 진주가 막 왜적들의 유린한 바가 되어 해골(骸骨)들이 언덕처럼 쌓여 있었다. 그러나 공이 병사를 주둔시킨 뒤로는 한 사람이나 한 기마병도 감히 진주 지역에 접근한 자가 없었다. 이 때문에 왜적을 참수하고 노획한 공은 없어도 영남과 호남의 사이에 백성들이 비로소 안심하고 호미와 쟁기를 잡고 농사지어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니면서 품팔이하던 사람들이 차츰 돌아오고, 군대도 역시 남은 군량이 있었다. 그런데 공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이에 말하기를, “공이 성루를 대치한 지 3년 되도록 지금까지 촌공(寸功)도 없었다.”고 하였으니, 아! 어찌 모함이 아니겠는가.공은 또 일찍이 곽 장군과 더불어 바다에 배를 타고 동래 앞바다로 향하여 왜적의 성루를 공격하니, 왜적들이 필사적으로 부르짖으며 군영을 닫고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이때에 공이 조정의 명령을 받아 제도의 의병들을 모두 통솔하게 되니, 군대의 명성이 크게 떨쳐 병사들이 모두 좋아서 뛰며 한 번 분전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천조(天朝, 명나라)가 이미 전쟁을 싫어하여 봉공(封貢)을 논의하고, 조정에서도 역시 여러 장수들에게 경계하여 왜적들과 교전하지 말도록 하여 공이 여러 차례 싸울 것을 주청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니, 공은 성공하지 못할 줄을 알고서 마침내 감상(感傷) 분개하여 술을 흠뻑 마시고 또 병마저 생겼다.공은 군중에 있을 적에 군리(軍吏)로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참수하였었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가 죄 없는 사람을 죽였다.”고 하여 마침내 체포되어 국문 당하다가, 당시의 재상인 정공 탁(琢)이 힘껏 구제함에 힘입어 석방되었다.그로부터 얼마 되지 아니하여 호서(충청도)의 역적 이몽학이 반역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공과 곽장군 및 홍계남, 고언백, 최담령이 모두 자기와 내통하여 공모하였다.”고 하였는데, 계남․언백도 역시 의병의 여러 장수로서 왜적들이 꺼리는 바가 된 사람들이며 담령은 공의 휘하 병사로서 의용(義勇)이 있었던 사람이다.공은 바야흐로 병사들을 이끌고 몽학을 토벌하려다가 도중에 역적이 이미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본진으로 돌아갔었다. 그런데 조정이 마침내 유언비어를 받아들여 공을 체포하니, 공은 강개하게 국문을 받으면서 말씨가 태연자약하게 말하기를, “신이 친상 중에 있다가 전쟁 일로 종사하였지만, 또 조그마한 공도 이루지 못하여 충성과 효도가 모두 무너졌으나, 죄가 마땅히 죽어야 할 것으로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원컨대 신의 연고 때문에 죄 없는 최담령을 죽이지 마십시오.”라고 하니, 담령은 마침내 죽임을 모면하였다.이때에 여러 장수들 중에 이따금 공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충청병사 이시언은 더욱 심하였다. 공이 체포된 것은 시언의 밀계 때문이었다. 충숙공 서성이 당시에 승지가 되어 공이 반역하지 않았다고 힘껏 보호하고, 재상인 정탁과 김응남도 모두 공이 죄가 없다고 극도로 말하였지만, 조정의 의론이 넌지시 이시언의 말을 주장한 사람이 있어 공은 마침내 병신년 8월에 가혹한 형벌을 받아 옥중에서 돌아갔다.공은 이미 성 선생의 문하에 들어갔었고, 문청공 정철은 또 공의 고을 사람이었다. 성 선생과 정 공은 모두 바야흐로 동인의 당 사람들이 속 시원하게 죽이려고 하는 대상이 되었고, 공의 위력 있는 명성이 또 독특하게 여러 장수들의 위에 솟아났었다. 때문에 공과 함께 체포된 사람들이 많았지만, 공만 홀로 죽임을 모면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서는 여러 의사들이 모두 해산되어 싸울 마음이 없었다.공이 돌아가자 왜적의 진중에서는 술을 따라 마시면서 서로 경축하며 말하기를, “김 모가 죽었으니 양호(전라도와 충청도)는 다시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듬해 정유년에 마침내 대규모로 군대를 일으켜 남원을 함락시키고, 승승장구하여 경기 지방을 침범하였으나, 양호의 사이에서는 감히 한 화살이라도 쏘아 서로 방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천조가 대규모로 군사를 파견하여 그 왜적들을 꺾지 않았더라면 국가의 일을 거의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 참소하는 사람의 입이 사람의 나라에 전화(戰禍)를 끼침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참혹하구나!공은 날쌘 용력이 무리에서 뛰어나 눈이 10리 밖의 물체도 구별할 수 있었다. 일찍이 길이가 두어 길이나 되는 큰 칼을 가지고 말을 채찍질하며 산비탈을 달리면서 칼을 휘두르며 오르내림에 숲의 나무들이 모두 쓰러졌으나 평소에 항상 깊이 스스로 숨기었다.그는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 용모가 화순(和順)하여 어린 아이의 얼굴빛을 지녔다. 반부인이 병에 걸려 위태로움에 다다르자, 유능한 명의를 찾아 하룻밤에 2백리를 말로 달려 진주에 당도하여서는 뜰아래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울면서 굳이 왕진(往診)해 달라고 요청하고, 따라서 그 명의를 위하여 채찍을 잡고 말을 몰아 집에 당도하니 겨우 반나절이 걸렸었다. 곧바로 약을 올리니 병이 나았었다.공의 형이 이미 의병을 일으켜 국난에 순절하였고, 공의 아우 덕보도 역시 일찍이 군중에서 공을 따라다니다가 얼마 뒤에 공을 여의고 서석산 밑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풍암거사라고 호를 지어 부르면서, 정홍명, 안방준과 더불어 벗을 삼았었다. 정묘난에는 안 공에게 편지를 보내 충의로써 서로 격려하였었는데, 그 수적(手蹟)이 지금까지 아직도 전하면서 격앙(激昻) 감개(感慨)하여 크게 공의 유풍(儒風)이 있다. 공의 배위는 흥양이씨인데, 공이 돌아간 이듬해에 왜적들을 꾸짖으며 추월산 안에서 순절하였다.공이 돌아간 뒤로 65년 만에야 우리 현묘(顯廟, 현종)가 비로소 명령하여 공의 원통함을 씻어준 뒤에 여러 차례 벼슬을 추증하여 병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우리 정묘(正廟, 정조)는 또 명령하여 시호를 내려주고 좌찬성을 추증하면서 친히 제문을 지어 치제(致祭)하고, 또 공이 살았던 곳을 ‘충효리’라고 명명하고서 사신(詞臣)으로 하여금 그 비석에 글을 새겨 표창하도록 하였다.이 부인은 공을 따라 정경부인을 추증하고, 공의 백형(伯兄)은 특은으로써 지평을 추증하였다. 풍암공은 일찍이 유일(遺逸)로써 천거되어 벼슬을 제수하여 별제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이르러 역시 특별히 집의를 추증하였다. 공은 후사가 없었고, 풍암공만이 유독 한 아들을 두었는데, 말하자면 거(璩)로서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며 풍암공의 명령으로 공의 제사를 겸하여 받들었다. 정묘 때에는 또 조정의 명령으로써 방손 한 사람을 선택하여 공의 제사를 받들어 대대로 끊어지지 않도록 하였는데 지금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은 진사의 7세손 홍기(洪基)이다. 진사는 폐조(광해군) 시대를 당하여 상소를 올려 흉악한 무리들을 배척하였고, 그의 아들 경휘(慶輝)는 정공 홍명의 문하에서 종유(從遊)하여 문행으로써 명성이 드러나 모두 공의 집안의 자손들이 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었다.공의 장지는 광주의 이치에 있으면서 유좌(酉坐)로 봉분돼 있는데, 지평공과 풍암공의 묘소도 모두 한 산등성이에 가까이 있다. 공이 이미 증직이 1품에 이르렀으니 전식(典式)에 있어서 마땅히 신도(神道)에 비석을 세워야 하겠기에 마침내 글을 새기어 사실을 기재하고 거기에 명을 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하늘의 영웅 인물을 탄강시킴에광주 무등산의 영기를 배태(胚胎)하였네.충성과 용맹이 근간이며 울타리였고문과 무를 두루 겸비하였네.시와 예를 차근차근 배워 집안에서 행실을 닦다가휙 옷소매를 떨치고 일어났는데 국란을 당한 임진왜란이었네.우르쾅하는 우레 번쩍하는 번개이며으르렁거리는 호랑이요 사나운 송골매였네.왜적들이 위풍을 바라보고고슴도치처럼 움츠러들고 버섯처럼 집결하였네.일찍이 정암에서 싸웠는데강물이 몹시도 붉었네.수많은 위병들을 쉽게 지휘하여3년 동안 호남과 영남이 몹시 편안하게 농사를 지었네.국가의 방패와 성이었으며 보루였으니공훈이 나보다 더 큰 사람이 없었네.그런데 춘산의 불꽃을 그 누가 불어 일으켰는가.저 지나친 붕당이 왜적과 한 패거리가 되었네.그러나 천도의 공정함은 사람에게 있어서 어긋남이 없어공의 원통함은 일시적이었고 신설(伸雪)됨은 영원하네.밝디 밝은 성스러운 임금님이해와 달처럼 나란히 빛나억울한 것을 밝히고 공적을 선양하니화려한 관복이 빛나구나.이치의 신비탈 남쪽에 충신이 짙푸른 피가 황천에 묻혀 있네.굳센 형과 명철한 아우가 좌우에 연이어 잠들어 있네.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칭송되기에이 견고한 빗돌에 새기노라.금궤(金櫃) 속의 역사책에도 기록되어아울러 영원히 전해지리.-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풍산 홍석주 지음(추기)아! 충장 김공은 우리 해동(우리나라)의 명장이다. 그 귀신같은 무용(武勇)과 책략을 미처 조금도 펴보지도 못하고 무옥에서 원통하게 돌아가 후사(後嗣)가 없었다.그의 아우 풍암공 덕보가 그의 아들 풍계공 거에게 유명(遺命)하여 그로 하여금 공의 제사를 겸하여 받들도록 하였다. 그 뒤에 차 증손인 이촌공 수신(守信)에 이르러서는 권도(權道)로 공의 사당을 받들고 있었는데 때마침 한포재(寒圃齋) 이공 건명(健命)이 이조판서가 되어 숙종 38년 임진 11월 27일 병오 도목정(都目政, 6월과 12월에 시행하던 인사행정을 이르는 말)에 이촌공을 채용하여 벼슬이 별검에 이르렀다.이때에 서명우가 장령이 되어 상소를 올려 한포재를 탄핵하기를 “이조판서로 들어온 사람이 자기의 당 사람은 심어주고 다른 당 사람은 배척한 것이 아니라면 대체적으로 사사로움을 따라 공도(公道)를 멸시하여 순전히 한쪽 사람만 채용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한포재가 상소를 올려 모두 변론하기를, “충용장 김덕령은 바로 임진왜란에 창의하였던 사람인데, 화를 당하여 원통하게 죽어 사적이 더욱 드러났습니다. 신이 이조에 들어가서는 그의 봉사손을 채용하였습니다.”라고 하고 나의 족선조(族先祖)인 대사간 수촌공 방(埅)도 역시 상소를 올려 강력히 변론하기를 “의병장 김덕령을 봉사한 사람이 정주(政注, 관원을 임명하는 인사행정)에 채용된 것이 뭐 의심할 것이 있기에 교묘하게 취모멱자(吹毛覓疵, 털 사이를 불어가면서 흠을 찾는다는 뜻으로, 남의 결점을 억지로 낱낱이 찾아내는 것을 말함)하였으니 다른 것은 어찌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숙종께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정중한 비답을 내려주어 이르기를 “조목조목 논박한 것이 명쾌하다고 이를 만하다. 서명우(徐命遇)는 관직을 삭탈하고 축출하면 충분히 죄가 징계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위대하도다! 왕의 말씀이여!그 뒤에 보첩을 편수할 적에 노사(蘆沙), 간재(艮齋), 연재(淵齋) 삼현들에게 예를 질문하여 별검공 이하 봉사 자손들을 2세를 띄워서 충장공 각하(脚下)에 기록하였는데 이 홍상공이 지은 비문 중에 이른바 “지금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은 홍기(洪基)이다.”고 한 것은 바로 별검공의 5개 주손(冑孫)이다.지금 이 봉사 전말이 원비 중에 누락되었다. 때문에 장차 신도비를 세우려고 할 적에 그 후손 충호(忠浩)가 그 사실들을 숙종대왕실록 및 충장공유사와 한포재, 수촌 여러 문집에서 찾아 모아 실기를 지어가지고 나를 영주(寧州, 천안의 옛이름)의 태화산(泰華山) 기슭으로 찾아와 추기의 글을 지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었다. 내가 비록 그 적합한 사람은 아니지만 돌아보건대 선대의 정의(情誼)에 있어서 그 아름다운 일과 훌륭한 뜻을 감시 저버릴 수 없기에 그 이름 붙이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면서 우(右)와 같이 서술한다.공이 돌아간 뒤로 일곱 번째의 갑신년 첫 봄 중완(仲浣, 중순)에 후학 풍천 임용순 삼가 지음. 후학 족후손 선원은 삼가 전을 쓰고 아울러 해서도 씀공이 돌아간 뒤로 408년(2004)이 된 갑신년 중춘 일에 삼가 세움我宣廟撫運之二十餘載島倭大肆猘躪蹂我八路生靈一時義士服介馬衝鋒鏑用協敭中興績大者表旂常小者疇祿爵磊落不可殫籌唯故忠勇將軍贈議政府左贊成金忠壯公敦義旅四年不獲登一命之賞又横被讒構以死然迄今玆二百歲有尙論當時者必咨嗟扼腕先稱說金將軍雖婦孺皀輿未有不知金將軍名者將軍始起兵受分朝所命翼虎將軍號由是世皆稱翼虎將軍及賜諡忠壯士大夫皆稱忠壯公公諱德齡字景樹光州石底村人也曾祖諱珝戶曹正郞祖諱允孝宣務郞考諱鵬變習讀妣南平潘氏直長季宗女有丈夫子三人公其仲也公世故儒家夙蜚詞藝聲年十七取鄉解既又遊牛溪成先生之門講問儒者之學雖卓犖有大志人莫知也壬辰亂作公兄贈持平德弘首倡義起兵公亦從焉持平公曰吾兄弟皆死奈老母何遂遣公歸養獨與高公敬命偕進戰錦山死之明年癸巳賊退自王京猶據嶺南日益兵圖再逞而官軍及諸義旅率望塵奔避時公丁潘夫人憂己葬矣觀察使及鄰郡宰始稍稍聞公名交薦于朝李忠定貴時爲守長城言公大將才也於是特授官刑曹佐郞公姊夫金應會倜儻士也以大義開公而朝旨又適至公乃以墨縗起斥田宅具器仗傳檄旁邑得敢戰士五千餘人權元帥慄標其軍曰超乘上又遣使賜軍號忠勇時甲午正月也公遂引兵抵嶺南界上移檄言直抵大坂城大坂城倭所都也倭酋淸正潛遣工圖公容貌見之咤曰眞將軍也乃撤諸屯兵合爲大陣以待之當是時諸將士壁壘相望唯郭將軍再祐以忠智特著公移書約戮力殲賊遂偕陣鼎巖津賊夜渉川將刼營公設覆掩擊大創之賊不敢出公在陣嘗生縳兩虓虎以示賊賊愈震龔相戒避翼虎將軍公軍晋州晋州新爲賊所刳積骸如阜自公屯兵後無一人一騎敢近境者以是無斬獲功而嶺湖之間民始得安意操鋤棃流庸漸復軍亦有羡食矣娟公者乃謂公對壘三年迄無寸功嗟乎豈不誣哉公又嘗與郭將軍駕海舶繇東萊前洋直摩倭疊倭死咋閉營不敢動於是公受朝命盡統諸道義兵軍聲大振士皆踴躍思一奮而天朝己厭兵議封貢朝廷亦戒諸將母與倭交兵公屢請戰皆不許公知功不就遂感憤縱酒且成疾公在軍斬軍吏犯罪者或言其殺無辜遂被逮問賴時相鄭公琢力救得釋未幾湖西賊李夢鹤叛流言公與郭將軍及洪季男高彦伯崔聃齡俱與己通謀季男彦伯亦義兵諸將爲賊所憚者而聃齡則公麾下士有義勇者也公方引兵討夢鶴道聞賊己平乃還而朝廷遂用流言逮公公忼慨對薄辭氣自若曰臣居親喪而從金革之事又不能成尺寸功忠孝俱隳罪當死無所惜願無以臣故殺無辜崔聃齡聃齡竟得免時諸將中往往多忌公者而忠淸兵使李時言尤甚公之逮以時言密啓也徐忠肅公渻時爲承旨力保公不及鄭相琢金相應南皆極言公無罪而廟議有陰主時言者公竟以丙申八月受酷刑卒于獄中公旣登成先生之門鄭文淸公澈又公邑人也成先生與鄭公皆方爲黨人所甘心公威聲又獨出諸將上以故與公偕逮者衆而公燭幽揭烈華袞煒煌梨坂之陽碧血在泉毅昆哲季左右連蜷萬口之騰刻此貞石金匱靑簡並詔無斁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左議政 豊山 洪奭周 謹撰(追記)嗚呼忠壯金公我海東名將也其神武鬼策未及少展之寃卒誣獄而無後嗣其弟楓巖公德普遺命其子楓溪公璩使之兼奉公祀至次曾孫梨村公守信權奉公廟會寒圃齋李公健命長曹銓肅廟三十八年壬辰十一月二十七日丙午都目政錄用梨村公官至別檢時徐命遇爲掌令上疏彈劾之曰入銓者若非植黨擯異則率是循私蔑公而純用一邊寒圃齋陳疏悉辨之曰忠勇將金德齡卽壬辰倡義之人而被禍寃死事蹟尤著臣之入銓收錄其奉祀孫我族先祖大司諫水村公埅赤陳疏盛辨之曰義兵將金德齡奉祀之人見擬於政注者有何可疑而巧加吹覓他尙何言肅宗頷之而賜優批曰條論可謂明快而削黜徐命遇足以懲罪大哉王言厥後修譜也問禮於蘆艮淵三賢別檢公以下奉祀子孫間二世而錄之於忠壯公脚下此洪相公所撰碑文中所謂今主祀者洪基卽別檢公五代冑孫也今此奉祀顚末原碑中見漏故將竪神道碑也其後孫忠浩搜摭其事實於肅宗大王實錄及忠壯公遺事寒水諸集而撰實記訪余于寧州泰華山鬱而請文之吾雖非其人顧於先誼其美事盛意莫之敢孤而榮其託名叙之如右云爾公歿後四百八年甲申孟春仲浣後學豊川任龍淳謹撰族孫 金善源 謹篆竝書公歿後四百八年甲申仲春日 謹立
    2018-11-12 | NO.245
  • 김문발-부용정 김문발 신도비
    광주시 남구 부용정芙蓉亭 김문발金文發(1358~1418)은 고려말부터 조선초의 무인, 본관은 광산, 칠석동 출신이다.문정공(文正公) 태현(台鉉)의 7세손으로, 아버지는 증참판 거안(巨安)이다. 어려서부터 남다르게 총명하고 학식이 뛰어나 10여세에 제덕을 겸비하였으며, 무예에도 남다르게 뛰어나 문무를 겸전하였다. 고려말 도평의논사(都評議錄事)출신으로서 1386년(우왕12년) 전라도원수를 따라 남원, 보성 등지에서 왜구를 격퇴한 공으로 돌산만호(突山萬戶), 순천부사(順天府使)가 되었다. 조선초기 1394년(태조3년)에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김빈길(金賓吉), 만호 김윤검(金允劒)등과 함께 왜적선 세 척을 포획한 공으로 왕으로부터 활, 화살, 은기(銀器)등을 하사 받았다. 1406년(태종6년) 전라도수군단무사(全羅道水軍團撫使)로서 왜적선 한 척을 포획하였다. 이듬해에 상호군(上護軍)이 되어 이추(李推), 대호군(大護軍) 강원길(姜元吉)과 함께 요동의 피망민을 압송하여 돌려보내는 업무를 관장하였다. 1408년에 경기수군도절제사에서 충청․전라도수군도체찰추포사(水軍都體追捕使)가 되었다. 1411년에 충청전라도수군체찰추포사(忠청全羅道水軍都體追捕使)를 병으로 인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에 내려왔다. 고향에 돌아와 부용정(芙蓉亭, 칠석동소재, 문화재 자료 제13호)을 짓고, 여씨 향약과 주자의 백록동규약을 베풀어 풍속교화에 힘썼는데, 이것이 광주 향약 좌목의 유래가 되었다. 따라서 이 정자는 이 지역의 향약 시행장소로 매우 유서가 깊은 곳이다. 1412(태종12년)에 전라도수군절제사가 되었으며, 1418년에 황해도관찰사를 제수받고 부임한지 얼마 아니되어 병으로 사직하고, 그 뒤 바로 졸하였다. 조선 초기 1394년(태조 3)에 왜적의 병선 3척을 포획한 공으로 왕으로부터 하사품(활⋅화살⋅은기銀器)을 받았다. 그 뒤 순천부사順天府使가 되고, 1406년(태종 6) 전라도수군단무사全羅道水軍團撫使로서 안부도安釜島를 수색하여 왜적선 1척을 나포하였는데, 적병 40여명이 모두 바다에 투신하여 죽고 8명을 생포하여 보고하니 포상으로 궁온(宮醞 임금이 신하(臣下)나 백성(百姓)에게 내려 주는 술)을 하사받았다.1407년(태종 7)에 상호군上護軍이 되어 명나라에서 도망쳐 온 여진인 가운데 아직 송환되지 않은 포로 유산성劉山城 등 그 가속家屬 총 4,126명을 요동으로 압송하여 넘겨주었다.1408년(태종 8) 1월 경기수군도절제사京畿水軍都節制使인 공이 충청⋅전라도수군도체찰추포사水軍都體察追捕使가 되어 경기의 병선 15척을 거느리고 체찰體察 추포追捕 업무를 수행하던 중, 1411년(태종 8) 3월에 병환으로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이즈음 공은 광주 칠석동漆石洞에 부용정芙蓉亭을 짓고, 여씨향약呂氏鄕約과 주자朱子의 백녹동규약白鹿洞規約을 따라 풍속교화에 힘썼으며 공의 뒤를 이어 필문蓽門 이선제李先齊 시원始元 부자父子와 대사성大司成 노자형盧自亨 등이 계승 강마講磨하여 후일 광주향약이 시행되어 우리나라 향약의 효시가 되었다. 따라서 부용정은 우리나라 최초의 향약이 시행된 역사성을 갖는 장소로서 매우 유서 깊은 곳이다. 1412년(태종 12)에 국가의 조곡租穀을 육수陸輸에서 조운漕運으로 하는 문제에 대해 상소하여 해상 운송 제도를 시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다시 전라도수군절제사全羅道水軍節制使에 임명되었고, 1413년(태종 13)에 경상우도慶尙右道에 수군을 나누어 좌도도절제사左道都節制使가 되었으나, 부임 여부와 퇴임 시기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이 기간에 고향에 돌아와 있었는데, 1418년(태종 18)에 황해도도관찰사黃海道都觀察使를 제수 받고 부임한 후 병으로 사임하고 고향에 내려와 같은 해 4월 향년 60세로 타계하였다. 조선왕조실록 공의 졸기卒記에 사람됨이 매우 겸손하였으며, 청렴하고 언행이 무거웠으며, 왜구토벌倭寇討伐에 공이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가정대부형조참판嘉靖大夫刑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2018-11-29 | NO.244
  • 김성원-서하당김선생모호산순효비
    광주시 북구 금곡동 산 164-1(충장사 주변)1978년이 서하당 김선생 모호산 순효비(棲霞堂金先生母護山殉孝碑)는 전남 화순군 남면 복교리에 세워졌다가 1990년대에 광주로 옮겼다. 충장사 입구에서 충효동 쪽으로 송강로길을 타고 150m 지점의 길 우측에 있다. 옆에는 김성원(金成遠)의 할아버지인 김함(김감)의 신도비가 있다. 보호각 등 별도의 보호 시설은 없으나 현대에 세운 화강석 비석이라 보존 상태는 아주 양호하다. 관리 주체는 광산 김씨 종중이다.조선시대 정유재란 시기의 김성원의 행적과 순효 사실, 광주와 화순의 향토학 현장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김성원 순효비가 있던 원래 위치인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복교리는 주암호 수몰 지역으로 들어가게 되어 현재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충효동]에 옮겨졌다. 김성원의 후손 김정식(金禎植)과 김희조(金熙祚)가 김성원 순효비(棲霞堂金先生母護山殉孝碑)를 세웠다. 비문은 담양의 전원식(田元植)이 짓고, 글씨는 김성원의 11세손 김희진(金熙鎭)이 썼다.  앞면에 내려쓰기 1행으로 ‘서하당 김선생 모호산 순효비(棲霞堂金先生母護山殉孝碑)’, 뒷면 비음기는 11행[1행 40자]으로 비문의 내용은 김성원의 인적 사항과 교유 관계, 임진왜란 때의 활동, 그리고 정유년의 동복 가관(假官), 모후산에서의 90세 노모와 함께 피신하다가 1597년 10월 7일에 어머니를 보호하며 순효한 사실, 이후 산 이름을 모호산으로 하고 촌명을 모호로 부르게 되었다는 지명 유래, 충효리와 충장공의 사호 등을 기록했다.옆면[향우]에는 ‘宣廟丁酉后三百八十二年戊午陽復月 潭陽田元植謹撰/十一世孫 熙鎭謹書/己未夏四月湖南儒林建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담양인 전원식이 정유재란 뒤 382년 되던 1978년 10월에 지었고 글씨는 11세손 희진이 써서, 비문을 지은 이듬해인 1979년 4월 호남 유림 명의로 세웠음을 알 수 있다.
    2018-09-06 | NO.243
  • 김세근-삽봉 김세근 장군 묘역
    광주시 서구 서창동 산 59삽봉揷峯 김세근金世斤(1550∼1592) 장군의 묘소는 서구 서창동 학산사 입구 왼편에 있다.
    2018-12-07 | NO.242
  • 김용훈-야은거사 김해김공용훈 유적비명
    서구 눌재로 420(세하동)야은거사 김해김공 용훈 유적비명은 서창한옥문화관과 야은당 사이 주차장 한쪽에 있다. 야은野隱 김용훈金容燻(1876~1948)의 9대조가 삽봉 김세근 장군이다. 야은공의 덕행과 후학 양성을 위해 노력한 과정을 비문에 새겼다. 글은 김종金鍾 전 조선대 교수(시인)이 썼다.
    2018-05-25 | NO.241
  • 김이려묘지(金以碼墓誌)
    김이려묘지(金以碼墓誌)는 1552년(명종)의 것으로 강원도 강릉시 장현동에서 출토되었다. 전남대박물관에 있다.김이려의 자는 성지(成之), 본관은 강릉이다. 조부는 찰방을 지낸 김석견(金石堅), 아버지는 교수를 지낸 김보(金黼)이고 어머니는 안동권씨 권신(權伸)의 딸이다. 김이려는 1487년(성종 18)에 출생하였으며, 1552년(명종 7)에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참봉 김세달(金世達)의 딸이다. 청자로 만들어진 판에 김이려의 가계가 기술되어 있다. 개자판(蓋磁板)과 저자판(底磁板)으로 만들어졌다. 개자판은 가로 18.5㎝, 세로 25㎝, 두께 2.8㎝, 저자판은 가로 18.5㎝, 세로 25㎝, 두께 3㎝이다.
    2023-07-17 | NO.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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