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284
게시물 검색 폼
  • 竹塢權公墓誌銘 幷序 -노백헌집(老柏軒集) 권41
    竹塢權公墓誌銘 幷序 - 권정희(權應五)이다.권준(權濬, 1578~1642), 광주목사로 의령 안동권씨 명석적의 입향조이다. 권정희는 그의 후손이다.노백헌집(老柏軒集) 권41영오(英五), 후윤(厚允)이고, 호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 김석귀(金錫龜), 정의림(鄭義林), 기우만(奇宇萬), 허유(許愈), 곽종석(郭鍾錫) 등과 교유했다.竹塢居士權公。隱居鵬山之中。築亭逍遙。其言曰。人之志大如鵬。可以逍遙於世。我非其人。只寓懷於逍遙耳。童稺灑掃。課日伊吾。亦一逍遙也。賓朋時至。琴酒嘯咏。亦一逍遙也。竊惟逍遙本旨。隨意自適。不受物惹絆之意。而南華老人託志虛曠。蓋遊方之外者。若公隨遇隨安。寓至樂於名敎之中。觀於此。公之爲公。槩可見矣。公諱珽煕字應五。高麗太師諱幸。始得姓。食邑安東。諱漢功諡文坦。諱仲達諡忠憲。遂爲東方顯閥。諱嗣宗判吏部。自是仕我朝世簪纓。諱濬號霜嵒。遊鄭寒岡門。光海昏朝。杜門完節。仁廟丙子。以光牧倡義旅勤王。聞和成而歸。不復仕。是生諱克履有隱德。始家宜寧。是生諱欽贈司僕正。是生諱宇亨文牧使。監連山時。尤齋先生謫耽羅。延送盡禮。及楚山柩歸。迎哭奠賻。坐是罷黜。後贈左承旨。是生諱壽期。有行誼贈參判。是生諱翕有才早亡。是生諱佖中號納新齋。師事尹屛溪。寔公之高祖也。曾祖諱思宅。祖諱正夏通德郞。考諱秉肅。妣光州盧氏。慶祖女。有婦德。公自幼志尙異凡。見人爲不義。不忍不告。人多敬憚。嘗赴擧入塲。見塲屋風色不佳。折券而歸。遂挈家入鵬山。養竹千竿。因以自號。脫略世絆。結情雲山。悠然有自得之趣。收敎村子弟。與里人倣呂約。春秋勸懲。峽俗漸化。恒以早孤不克終養爲至痛。祭必盡誠。口不葷腥。省掃以時。雖衰老不廢。子孫皆循循雅飭。參鉉早知爲儒方。勉勉於內修。庶幾不遷於時學者。公之身敎然也。己亥十一月八日考終。距生乙酉。壽七十五。葬于洛西方寺洞午坐原。從先兆也。配全州全氏。文國女。先公卒。葬鵬山村後亥坐。子三男一女。載鳳,載庸,載學出後。女適陳益煥。孫七男五女。參鉉,永鉉,徐炳奎妻長房出。榮鉉,商鉉,奭鉉,盧直洪妻仲房出。夏鉉,玠鉉,盧賢圭妻。二未行。季房出。內外曾玄繁不盡名。載鳳納誌幽堂。使參鉉述行。徵銘於不佞。不佞嘗屢承顔色者。遂櫽栝而序之。繼以銘。銘曰。
    2023-07-31 | NO.284
  • 竹塢處士權公 (珽煕) 墓表- 심석재집(心石齋集) 권29
    竹塢處士權公 (珽煕) 墓表- 권정희(權珽煕,1825~1899)의 자는 응오(應五)이다.심석재집(心石齋集) 권29송병순(宋秉珣, 1839~1912)의 자는 심석재(心石齋)이다. 入山。耕樵以供滫瀡。築精舍於閒曠一區。扁以鵬山亭。識之曰。人固志大如鵬。可以遊於世。然我非其人。只取閒地之逍遙耳。灑掃庭除。伊吾課業。琴酒嘯咏。竟日歡娛。亦一逍遙也。又以詩述懷曰。棲息殘年於此足。向人何暇問竆通。於此槩可見其藏修之樂矣。嘗與里人倣藍田鄕約。春秋會集。勸以德業。規以過失。里俗漸化。永成遺模。每語及事親。輒流涕曰。凡爲人子。生當盡歡。猶有風樹之憾。况未克終養者乎。喪餘之日。必致如在之誠。雖及隆耋。不進薰腥。省掃以時。不以氣衰或廢。非終身慕其親者。烏能如是。人皆光牧齋。受學于屛溪尹文獻公。屢登剡薦。諱思宅。諱正夏通德郞。祖以上昭穆也。考諱秉肅。令德克世其家。妣光州盧氏。慶祖女。克有壼範。配全州全氏。文國之女。與公同年而生。先公五年而圽。墓在鵬山乾坐原。擧三男一女。男長載鳳。次載庸。季載學出其叔父后。女適陳益煥。曰參鉉,永鉉,徐炳奎妻長房出也。曰瑨鉉,商鉉,奭鉉,盧直洪妻仲房出也。曰夏鉉,玠鉉,盧賢圭妻過房出也。餘幼不盡錄。噫。公淸直其行。可敦薄夫之俗。高尙其操。無愧隱淪之躅。古人所云竆居求道者。非公而伊誰哉。參鉉抱家狀而徵墓文於余。余雖蕪拙。揆以先契。終難孤負。略敍如右。且戒樵牧曰勿歌嘯踐傷於此。此竹塢處士衣履之藏也。
    2023-07-31 | NO.283
  • 處士權公墓碣銘- 월고집(月皐集) 권15 / 墓碣銘
    處士權公墓碣銘- 權思璨월고집(月皐集) 권15 / 墓碣銘직교(直敎), 호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 정태원(鄭泰元), 이최선(李最善), 김녹휴(金祿休), 최익현(崔益鉉), 기우만(奇宇萬) 등과 교유했다.處士權公諱思璨。歿已八十餘禩。其玄孫載斗請碣銘于趙性家曰。府君望實俱隆。足以不朽。而狀誌俱闕。惟挽祭一卷存焉。且家庭間耳口傳授。猶有未盡泯者。乃敢述其表著者一二爲行錄。邀惠公一言以賁于阡。性家嘗撰處士公之孫曾幽窩,西洲父子文字矣。今益昏瞀。何敢上而至於處士公金石事乎。禮辭不獲。敢攟摭而著之銘。敍其世裔生卒婚嗣于左。銘曰。公字義之。其先安東人也。文坦忠憲兩公。大顯麗季。入我朝簪組不絶。進士繼祐。始居丹城。霜巖諱濬。出爲光牧。入爲樂正。有名節。曾祖壽鵬贈僕正。祖????考有中。代有儒望。全義李石臣。妣之父也。公生以英廟癸酉四月。卒以純祖己卯八月十九日。春秋六十七。配海州鄭胤新女。有賢行。墓中麻卯坐。男女各二。男長敍夏早卒無嗣。次敬夏。壻許欑,朴煕性。敬夏三男。長秉天系伯父。次秉祚,季秉佑。曾孫以下不盡錄。
    2023-07-31 | NO.282
  • 觀察使崔公神道碑銘 최철견- 상촌선생집 권28 / 신도비명(神道碑銘)
    상촌선생집 권28 / 신도비명(神道碑銘)그 뒤에 흠은 과거에 급제하여 낭서(郞署)를 역임하고 만력 임진년에 체찰사의 막하에 차출되어 그 부관으로 호남을 순찰하였는데, 몽은공은 그때 전라 도사(全羅都事)로 있었으므로 날마다 함께 어울려 군중의 일을 같이 처결하는 과정에서 더욱 어느 한 지역을 담당할 만하다는 것을 알았으며 아울러 공의 임진년 사적을 얻어들었으니, 다음과 같다. 공이 군병을 거느리고 남원을 지키고 있을 때 중국 참장 낙상지(駱尙志)가 순천(順天)에서 진주(晉州)가 함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남원으로 와 공과 합류하였다. 그런데 적의 기병이 주변 고을까지 접근하여 남원 사람들이 술렁거리며 밧줄을 타고 성을 빠져나가자, 어느 한 역관(譯官)이 공에게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공은 흔들리지 않으니 낙장(駱將)이 의롭게 여겼다. 고의 휘는 철견(鐵堅), 자는 응구(應久)이고 몽은은 그의 호이다. 최씨의 선계는 전주에서 나왔는데 원조(遠祖) 득평(得枰)은 고려조를 보좌하였고 본조에 들어와 대대로 관직을 살았다. 고조 효기(孝基)는 증 이조 참판이고 증조 해(瀣)는 이조 참의이고 조부 희증(希曾)은 숨은 덕이 있었는데 증 형조 참의이며, 선고 역(櫟)은 증 호조 참판이고 선비 이씨는 선계가 선파(璿派)에서 나왔는데 희릉령 석(熙陵令晳)의 따님이다. 가정 무신년(1548, 명종3)에 공을 낳았다.경인년에 다시 병조로 들어가 정랑이 되었으며 서장관으로 연경에 갔다가 돌아와서 직강과 병조 정랑이 되었고, 지방으로 나가 전라 도사(全羅都事)가 되었는데 공로를 인정받아 승진하여 풍저창 수(豐儲倉守)를 겸임하였다.신축년에 황해관찰사에 제수되고 호조 참의로 체직되었으며 갑진년에 춘천 부사(春川府使)가 되었다가 신병으로 해직되어 돌아왔다. 무신년에 선묘가 승하하셨을 때 풍수가의 말로 인해 산릉을 오래도록 잡지 못하자 공은 상소하여 그 부당함을 말함으로써 조정의 논의가 마침내 결정되었다. 만년에 신병이 들어 근 10년 동안 칩거 생활을 하다가 무오년(1618, 광해군10) 겨울에 마침내 일어나지 못했으니, 향년 71세였다. 이듬해 기미년에 양주(楊州) 송산(松山) 해좌(亥坐)의 자리에 장사지냈는데 선영이 있는 곳이다. 부인은 진주 정씨(晉州鄭氏)로 진사 윤붕(允弸)의 따님인데 공보다 7년 앞서 작고했으며 공과 합장하였다.공은 담박하고 차분하여 공명을 세우는 것을 일삼지 않았고 평소에 재산을 늘리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책을 보기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고 문장력이 매우 풍부하여 붓대를 잡으면 거침없이 수백 자를 즉시 이루어냈다. 일찍이 승지로 있을 때 선묘께서 그 문장을 기특하게 여겨 고문 중에서 어떤 것을 숭상하는가 묻기까지 하였다. 이미 재주와 기국을 갖추었으면서도 지닌 것을 다 베풀어 쓰지 못하였으니, 장차 하늘의 보답이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흠의 아들 익전(翊全)은 공의 사위 조군(趙君)의 동상랑(東床郞 사위의 별칭)이 되었으므로 흠이 공에 대해서는 한 조정에 벼슬하여 우의가 두터운 정도만이 아니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쓰여질 것 같더니만 / 如必以施뜻을 얻지 못했으니 / 而乃不偶자기 당댄 막혔으나 / 嗇之于身뒤에 결실 거뒀다네 / 而食於後울창한 저 동녘산은 / 鬱彼東阡공의 만년 무덤인데 / 萬年之藏사실대로 명을 지어 / 我銘非諛이 현당을 빛낸다오 / 賁玆玄堂
    2023-07-31 | NO.281
  • 通政大夫承政院右副承旨贈資憲大夫吏曹判書成公墓誌銘- 성안의
    通政大夫承政院右副承旨贈資憲大夫吏曹判書成公墓誌銘- 성안의 광주목사갈암집 제25권 / 묘지명(墓誌銘),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익승(翼昇)인데, 아호로는 갈암 외에 남악(南嶽)으로 불려지기도 했다.공은 휘가 안의(安義)이고 자는 정보(精甫)이며, 성은 성씨(成氏)이고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고려 때 휘 송국(松國)이 태위(太尉)가 되어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 이르렀고, 본조에 들어와서는 휘 만용(萬庸)이 판도 판서(版圖判書), 보문각 태학사(寶文閣太學士)를 지냈다. 명공(名公)과 거경(巨卿)이 잇따라 나와 동남(東南) 지방의 망족(望族)이 되었다. 증조는 휘가 익동(翼仝)이고, 조는 휘가 윤(胤)이고, 부는 휘가 궤(几)이니, 모두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모(母)는 장연 노씨(長淵盧氏)이니, 호조 참의 휘 사영(士英)의 따님이다. 대가(大家)에서 태어나 덕(德) 있는 집안에 시집와서 아내의 역할과 어머니의 역할을 함에 있어 모두 그 도(道)를 얻었다. 만력 19년 신묘(1591, 선조24)에 비로소 벼슬을 하였고, 이듬해 여름에 일본이 난을 일으키니, 공이 의병장 곽공 재우(郭公再祐)에게 가서 따랐다. 또 관찰사 백암(柏巖) 김공 륵(金公玏)의 막하(幕下)가 되니 백암공이 경도되어 허여하였고, 이때 공이 막 상처(喪妻)하니, 마침내 맞이하여 형의 손녀서(孫女壻)로 삼았다. 공이 이에 양친을 모시고 영천군(榮川郡)에서 처가살이를 하였고, 피난 나온 친척들이 공에게 의지하였다.이때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유 문충공(柳文忠公)이 영남(嶺南)에 개부(開府)하였는데 자주 세상을 구제할 재능이 있다고 공을 칭찬하였다. 이어 근친(覲親)하기 위해 휴가를 받았는데, 총독사(摠督使) 윤승훈(尹承勳)이 평소 공에게 유감을 가지고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관직을 비우고 직차(職次)를 이탈했다고 무고하여 드디어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일이 장차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었는데, 문충공이 치계(馳啓)한 데 힘입어 용서받게 되었다. 공이 풀려나온 뒤에 더욱 스스로 노력하여 군량미를 조달하고 기민을 구휼하여 군국(軍國)이 이에 힘입었다. 갑진년(1604) 가을에 어버이의 병이 있어 창녕에 돌아왔는데, 잇달아 내외간(內外艱)을 당하였다. 장사를 지낸 뒤에 분암(墳庵)을 지어 영모(永慕)라는 현판을 달아 놓고 슬퍼하고 돌보며 그리워하는 곳으로 삼았다. 거상(居喪)하는 여가에 고을 사람들의 자제를 가르쳐서 성취시킨 자가 많았다고 한다. 신해년(1611) 봄에 규례에 따라 광주목(光州牧)으로 옮겼는데, 공의 뒤를 이어 남원 부사가 된 자가 당시 재상의 뜻에 따라 공의 허물을 캐내려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광주 목사가 된 지 겨우 1년 만에 당로자(當路者)의 비위를 거슬러 파직되어 영천(榮川)으로 돌아왔다. 한가히 지내면서 심신을 수양한 지 13년이었는데, 자주 점잖고 덕 있는 선배들과 교유하고, 또 유인(幽人), 일사(逸士)와 더불어 즐거이 임천(林泉)에 모여 배회하며 유유자적하게 지냈다.이듬해 이괄(李适)의 반란으로 공이 어가(御駕)를 호위하여 공주(公州)로 갔고, 돌아와서는 호종한 공로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이어 제주 목사(濟州牧使)에 제수되었는데, 조정의 의론이 그가 늙은 것을 걱정하여 가지 않기를 바랐으나, 공이 말하기를, “신하의 의리는 어려움을 사양하지 않는 것이다.” 하고 즉시 떠나서 임지에 가서 어질고 관대한 정사가 많으니, 백성과 아전들이 사모하였다. 병인년(1626) 봄에 일로 인하여 파직되어 돌아왔다.그 후 19년 뒤 정해년(1647)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서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고, 또 아들 이성(以性)이 영국 공신(寧國功臣)이 되었기 때문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세자좌빈객 오위도총부도총관(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世子左賓客五衛都摠府都摠管)에 추증되었다.5남 5녀를 두었는데, 장남 이침(以忱)은 어진 행실이 있었으나 일찍 죽었고, 지평(持平)에 증직되었으며, 차남은 이각(以恪)인데 전부인의 소생이다. 3남 이성(以性)은 화현직(華顯職)을 두루 역임하였고 자급은 통정대부이며, 청백리(淸白吏)로 저명하였다. 4남은 이념(以恬)이고, 5남은 이항(以恒)이다. 공은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효성스럽고, 형제와는 우애로웠으며, 집안의 식솔을 거느리고 빈객을 접할 때 정성과 신의로써 하여 속이지 않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또 남의 과실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들과 구차히 영합하려 하지 않았지만 남들이 사모하여 함께 사귀었다. 공은 관대하고 온후하며 외모가 준수하여 중인(衆人)들이 거인 장자(巨人長子)로 추대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박학하여 통달한 것이 많았고, 특히 심계(心計)를 잘하였다. 관리의 일을 가지고 결정함에 있어 남보다 뛰어났으나 대부분 백성을 사랑하고 옛 법을 지키는 것을 힘쓰고, 겉으로 엄하거나 심히 각박한 것을 능사로 여기지 않았다. 분수에 편안하여 스스로 만족하고, 영리를 도모하는 데 급급하지 않았다. 명은 다음과 같다.선비가 혹 덕은 넉넉한데 재주가 부족한 경우가 있고 / 士或德優而才歉또한 재능은 많은데 행실이 불완전한 경우도 있다 / 亦有多能而行不完그러므로 두 가지를 겸비하기가 / 故兼二者而有之자고로 어렵다고 하였다 / 自古以爲難오직 공은 이미 이 아름다운 덕이 있고 / 惟公旣有此德美또 그 재능이 어려운 시국을 구제하기에 충분하였다 / 又其才猷足以濟時艱그 평생에 세운 공을 돌이켜 보면 / 跡其平生所樹立어찌 이른바 선인 군자가 아니겠는가 / 豈所謂善人君子者邪아, 지위가 재능을 따라가지 못하니 / 吁嗟乎位不滿能그것이 명임을 어찌하랴 / 其如時與命何
    2023-07-31 | NO.280
  • 갑자계기적비
    광주시 북구 용전동 601-13(용전마을 입구)1981년이 갑자계기적비(甲子契紀蹟碑)는 朴來鎬 짓고 朴年在 쓰다.
    2018-11-13 | NO.279
  • 거오재양만용선생신도비
    광주시 광산구 동호동 산 32-2 1986년據梧齋梁曼容先生神道碑는 박도빈(1828~1866)이 찬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이는 오재 양공의 묘이다. 공의 7대손 찬영이 나의 선군자를 찾아 뵙고 비명을 부탁했었다. 선군자께서는 뜻이 있었으나 이루지 못했다. 지금 찬영씨가 그의 장남 상기를 보내서 도빈에게 부탁했다. 도빈은 뜻이 계술에 있으니 어찌 감히 문장이 아니라고 사양할 수 있겠는가? 삼가 행장을 살펴보니 공의 휘는 만용이요 자는 장경이다. 선조의 계통은 탐라에서 나왔고 증조 학포는 휘가 팽손인데 홍문과 교리로서 정암 조선생과 함께 기묘화를 당하고 나란히 죽수서원에 철향되었다. 조부 송천은 휘가 응정인데 대사성을 지내고 문장으로 일세를 복종시켰다. 고의 휘는 산축인데 율곡 이선생을 스승으로 받들고 경학에 전심하여 처사로 불리었다. 임진란 때 형 생원 산룡, 좌랑 산숙과 의병을 일으켰고 정유재란에 이르러 모부인 박씨를 모시고 창날을 피해 바다로 갔다가 졸지에 적을 만나서 나주 삼향포에서 순절했다. 효를 포상하여 정려문이 세워졌다. 비는 장흥 고씨인데 효열공 종후의 딸로서 부도를 지니고 서사에도 능했다. 정유년 부인은 바야흐로 임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온 가족과 함께 바다에 이르렀다가 계집종들이 구출하여 다행히 목숨을 구했다. 만력년간 무술(1598)년 3월 24일 공을 낳았다. 공이 5세 때 참새새끼를 얻어서 가지고 놀았는데 갑자기 죽어 버렸다. 공은 종이에 싸서 파묻고서 말하길 「새가 죽었는데 사람이 묻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나 때문에 죽었으니 이런 까닭에 묻는 것이다」라고 했다. 보는 사람이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글을 배웠는데 한 번 들으면 곧 외웠고 시문을 짓는데 말이 곧 사람을 놀라게 했다. 성품이 소탕하여 글 읽는 소리를 섬기지 않았는데 일찍이 외지스승인 수은 강항공에게 매를 맞아 피가 흐르고 종기가 생겼다. 그런데 구더기가 생기게 되도록 오히려 굴복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물으니 공이 말하길 「글을 다독하면 소견이 좁아질까 두렵기 때문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오. 복종하고 다독하지 않으면 자기를 기만하는 것이며 장자를 속이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강공이 또 썩은 새끼줄로 묶어서 깊은 못 위 누운 소나무 가지에 매달아 놓고 두렵게 하고자 했는데 공은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았다. 하루는 알리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모부인이 친히 그 종기를 씻어 주고 그날로 돌려보내자 야막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곧 자책하기를 「존사께 알리지도 않고 왔는데 또 자모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으니 내가 어찌 사람인가?」하고선 즉시 스승의 집으로 갔다. 강공은 독려함이 지나치고 더욱 엄했는데 갖가지 방법으로 위협했다. 한 번은 옷을 벗겨서 더러운 연못 속에 집어넣으니 거머리가 달라붙어 피를 빨았으나 또한 날이 다 지나도록 굴복하지 않고 웃으며 말하면서 태연자약했다. 하루는 공이 갑자기 마음을 바꾸고 말했다. 「다독하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공은 이로부터 공경하게 대하는 방책을 잠시도 거두지 않아서 여름에는 옷이 썩어 헐었다. 어떤 사람이 전후의 근면함과 게으름이 같지 않음을 물으니 공이 대답하기를 「전에는 뛰어난 기억력에만 의지했지만 지금은 곧 숙독하고 상세히 음미한 이후에야 궁리진성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하였다. 비로소 성동이 되어 문사가 크게 성취되었는데 강공이 그 문조를 몹시 칭찬하여 이르길 「등림의 큰 강물이 붓 적실 물 대기에 부족하네」라고 했다. 그의 자랑함이 이와 같았다. 청년이 되어 남곽 박동열공의 문하에 학업을 청하여 경적에 침잠하고 성리를 탐색했다. 이때 혼조를 당하여 나설 뜻이 없었다. 그러나 부모 때문에 억지로 과거시험에 나갔다. 인조가 개옥한 이듬해 역적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어가가 파천했다. 공은 변란의 소식을 듣고 곧 적을 칠 의거를 부르짖고 병량을 모을 계책을 세웠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적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계획을 그쳤다. 이로부터 과거시험에 나가지 않고 날마다 주자서를 강론했다. 정묘년 금나라 오랑캐가 평산에 이르자 호소사 사계 김 선생이 양호에서 군대를 일으키니 공은 다시 거병하여 그 모임에 응했다. 그러나 조정과 오랑캐가 화해하여 곧 돌아갔다. 숭정 계유년 생원과 진사에 장원 합격하고 또 문과에 뽑혀서 그날로 한림에 배수되었다. 갑술년 시강원 설서, 예문관 검열에 배수되었다. 이때 적신 김자점이 전권으로 징병하니 여러 관료들이 두려워서 위축되었다. 공이 홀로 말하여 죄줄 것을 청했다. 양파 정태화공이 그 소식을 듣고 「조정에 직신이 있구나」하였다. 얼마 안 있어 호당에 추천되고 예문관 대교와 봉교로 승진되고 예조좌랑과 겸설서로 임명되었다. 한림과 주서로서 날마다 경광을 모시면서 진퇴가 민첩하고 기주가 물 흐르는 듯했다. 상께서 그 고아한 용의를 사랑하여 그 손을 잡고 그 수염을 어루만졌다. 그것은 특별한 대우였다. 후에 오랑캐 사신이 와서 인정전에서 불러 보았는데 따라온 오랑캐들이 난입함이 많았다. 공은 몹시 분노하여 상소를 올려 척화를 주장했는데, 그 상소에 「호전은 작은 조정에 차마 머물지 못했다」는 말이 있었다. 병자년 겨울 오랑캐가 들어와 노략질을 하자 공은 호남의 수재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서로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구획을 이미 정했는데 이때 널리 알리는 교서가 남한산성이 포위된 가운데서 왔다. 공은 그것을 읽고 통곡하다 실성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격문을 쓰고 여러 의사들과 여산에서 모일 것을 약속했다. 집으로 돌아와 모부인과 이별하니, 모부인이 말하길 「힘껏 하여라. 나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정축년 시산에 도착하여 시를 쓰기를 「마땅히 남한산성의 달은 고신의 한 조각 충성을 비추리라」고 했다. 그것은 공의 스스로의 맹서였다. 청주에 이르니 적병이 점점 가까이 왔다. 공은 몇 명의 기병을 따라 적을 살폈다. 적은 산골짜기에 모여 소를 잡아서 먹고 있었다. 갑자기 들이쳐서 9명을 목 베고 그 적의 물자들을 취했다. 바야흐로 군사를 옮겨 험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러 의사들과 함께 북쪽을 향해 통곡하고 즉시 달려가 도성 아래에 이르렀다. 그리고 항소하여 대의를 밝혔다. 인조가 가상히 여겨 표창했다. 이로부터 물러나서 선롱을 지키면서 세상일에 뜻을 끊어 버렸다. 항상 주자의 내수외양의 의리를 강론함으로써 충분의 마음을 드러냈다. 말이 병자, 정축의 일에 이르면 칼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정언에 배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무인년 전남도사에 배수되어 숙명 하고서는 곧 돌아왔다. 조정에서 재학으로서 전량으로 추천했다. 이때 대각에서 원망을 품고 무고하는 상소가 있어 연서찰방으로 강등하여 제수했다. 기묘년 흥양현을 맡아서 모든 일을 맑게 다스리니 이민이 편안하게 여겼다. 신사년 모부인의 상을 당하여 너무 슬퍼하여 몸이 여윈 것이 정도에 지나쳤다. 계미년 홍문관 수찬에 배수되고 갑신년 거듭 배수된 후 정언에 배수되었다. 그러나 연이어 나가지 않았다. 또 부수찬에 배수되어 여러 번 은혜로운 부름을 받고 한 차례 사례드린 후 곧 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또 정언에 배수되었는데 이 해에 명나라의 운명이 끝나고 청인이 연경에 들어와 점거했다. 공은 명나라가 임진년 두 차례 군대를 보내 준 은혜와 정축년 남한산성 아래의 수치를 설욕할 것을 말하면서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나중에 연경 가는 사신을 전송하며 「의관과 문물이 모두 새로 보는 것이고 성곽과 우정도 옛날과 다르다 하는데 만약 황금대 아래 길을 지나거든 나를 위해 모름지기 여러 군신들에게 위문해 주시오」라는 시구절을 썼다. 을유년 교리에 배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때 척화제신의 무리가 조정을 떠나감이 많아서 성지가 엄절하여 끝내 교체되어 돌아올 수 없었다. 수찬에 배수되고 사헌부 장령으로 옮겨졌는데 회곡 조한영공의 삭직 사건에 상소하여 구하려다 뜻에 거슬려서 연루되어 파직당했다. 그리고 다시 수찬과 시강원 보덕에 차례로 배수되었다. 병술년 여러 번 집의, 부수찬, 부교리, 부응교, 응교, 사복시정에 배수되고 영국원종공신 이등 제이로 녹훈되고 여러 학교의 교수를 역임했다. 무자년 천재가 거듭 이르러 인정이 흉흉하고 소란스러웠다. 공은 사간으로서 소를 올려 궁궐을 규탄했는데 말이 모두 매우 적절하였다. 이 일로 인해 나주 옛집으로 돌아와 노년을 마칠 계획으로 삼았다. 기축년 인조가 세상을 뜨고 효종이 즉위하여 부수찬을 배수했다. 그런데 대각에서 소를 올려 국애사에 오지 못한 것을 언급하여 파직되었다. 한때의 명공들이 많은 소를 올려 구원하였다. 경인년 청풍군수에 배수되었다. 관용에 관련하여 민폐를 끼친 사람은 모두 견책하고 파면했다. 그리고 곳간을 헐어 백성의 고통을 구휼함에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다. 신묘년 8월 26일 관사에서 고종하니 향년 54세였다. 공은 풍자가 영위하고 기량이 굉박했으며 문장과 절의는 세상에서 흠양을 받았다. 그러나 도리어 퇴연하게 스스로 영욕에 굴신하지 않고 처신이 여유로웠다. 대개 남의 착한 점을 좋아하고 나쁜 점을 치지 않고 명리에 흔들리지 않은 것은 천성이 그러하였다. 갑자, 정묘의 난에 포의로서 창의하였으나 미처 어려움에 다다르지 못했는데 곧 난리가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나라의 다행이었다. 그러나 공의 충성은 이미 병자년 난리에서 드러났으니 바야흐로 수백의 오합지졸로써 수백만의 사나운 올빼미 같은 적을 당하여 분발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죽음을 무릅쓰고 북쪽으로 갔는데 갑자기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비록 계책을 쓰지 못했으나 그 충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그 대절에 임했을 때 그의 뜻을 빼앗을 수 없음이 또한 이미 환하게 드러났다. 그러므로 고금에 있어서 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궁궐의 신하보다 결코 아래가 아니었다. 곧 통곡하고 남쪽으로 돌아와서 의리를 지키고 강학을 자정의 요체로 삼았다. 비록 은륜이 여러 번 내려와서 끝내 열심히 직책을 받들게 되었지만 그 어렵게 나아가고 쉽게 물러나는 마음은 시종 한결같았다. 시남 유계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경연에 만약 양학사를 얻어온다면 틀림없이 좋을 것이다」라고 했다. 청음 김상헌공도 「장경은 지절이 있으니 그가 기꺼이 출사하겠는가?」하였다. 그로 인해 유공을 시켜 출사의 의리로써 타이르게 했다. 대개 공을 알아 준 사람은 김, 유 두 분인데 공의 일어남은 또한 도량과 의리가 있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혹 병자, 정축년 후의 관함을 척화신의 허물로 여겨 격론을 하였다. 유고가 집에 소장되어 있고 배필은 광주 이씨 현감 태남의 딸이며 우의정 인손의 후손이고, 문화 유렴의 외손이다. 순의단장하고 부도가 갖춰짐이 지극했다. 묘소는 나주 장본면 서쪽 기슭 계좌이다.공은 처음엔 동복 대원산에 묻혔다가 나중에 부인 묘 아래 계좌에 옮겨 묻혔다. 2남 4녀가 있는데 장남 화남은 요절했다. 차남 세남은 참봉으로 종사를 받들었고 장녀는 송지하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최거옹에게 시집가고 3녀는 군수 이정룡에게 시집가고 4녀는 진사 임치에게 시집갔다. 화남에게는 딸 한 명이 있는데 이분에게 시집갔고 세남의 아들은 극가와 대가이고 송지하의 아들은 기재, 기창, 기백이다. 최거옹은 아들이 여일이고 장녀는 윤유 동추에게 시집가고 차녀는 노주에게 시집갔다. 이정룡의 아들 오는 부사이고, 택은 생원 문과로 참판이었고, 협은 진사, 집은 문과로 감사였고, 딸은 박태정에게 시집갔다. 임치의 아들은 규와 예와 기이고 딸은 참봉 윤시교에게 시집갔다. 내외의 증현들을 다 기록하지 못한다. 명에 다음과 같이 쓴다.사람을 보는 데는 술이 있으니출처와 사생이어렵고 쉬울 때 이 생을 저울질하여 처함에 쉬운데로 나아가면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어렵고시대의 조처를 삼가 생각하고사는 바에 오묘한 뜻을 밝혀서나가야 할 때 나가고마땅히 살아야 할 때 사니누가 그러하였던가?오재선생은충문에서 빼어나와사는 바를 더럽히지 않고어린 시절의 우뚝함을평생 지켜 이루었네.간혹 시대적 처신에 있어스스로 생을 기약하지 않았네마땅히 이 명을 거울삼을지어다.모든 후생들이여.
    2018-12-02 | NO.278
  • 겸재김령김공유허비
    광주시 북구 신룡동 62-26(복룡마을 입구)1969년이 겸재김령김공유허비(謙齋金寧金公遺墟碑)는 盧文永 짓고 金鎭哲 쓰다.
    2018-11-13 | NO.277
  • 경렬사복원기실비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산 176 경렬사 경렬사복원기실비는 1984년 11월에 하동정씨경렬공파종회에서 세웠다.  정지장군은 고려 말 우왕 때인 1381년부터 1386년까지 해도원수와 해도도원수 등 6번의 수군 최고 지휘관을 지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우리나라 해군의 최초지휘관으로 평가받는다.당시 명장으로 활약한 이성계와의 나이 차이는 정지장군이 12살 아래고, 최영과는 32살 아래이며, 당시 최영이 도통사를 지낼 때 이성계는 육군을, 정지는 수군을 지휘하였다. 정지장군은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최초로 수군 창설과 전함 건조 상소를 올렸으며, 전함에 최무선이 발명한 화포를 장착하였다. 그가 왜구와의 접전에 대승을 거둔 주요 전적은 1378년 그의 나이 32세 때의 미라사대첩(지금의 곡성군 옥과면 마전리)과 1383년 5월(우왕 9년) 남해 관음포대첩이다.   정지장군은 나주 죽곡에서 태어났다. 본관이 하동이며 시호가 경렬(景烈)이다. 19세에 사마장원, 20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374년(공민왕 23년) 중랑장을 거쳐 전라도 안무사가 되어 왜구 토벌과 수군 창설에 이바지하였다. 이후 전라도 순문사, 해도원수(海道元帥)를 역임하였고 양광․전라․경상․강릉도 도지휘처치사(都指揮處置使)를 지냈다. 장군은 24번의 전투를 치루면서 대부분 승전하였고, 임금으로부터 11번의 포상을 받았다. 판개성부사(判開城府使)에 임명됐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1391년 10월 15일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경렬사는 공민왕 때 전라, 경상 양도에 걸쳐 왜구를 격퇴시킨 정지 장군을 배향한 사당이다. 그는 최초로 수군을 창설하고 전함을 건조하자는 상소를 올렸던 바다의 명장으로 알려져 있다. 경렬사는 장원봉 줄기를 따라 북쪽 제4수원지 아래쪽에 펼쳐지는 협곡에 자리한 분토마을 뒷산에 있다. 군왕봉 자락 아래의 양지바른 곳이다.
    2018-06-11 | NO.276
  • 경렬사유허비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산 176번지1893년이 경렬사유허비(景烈祠遺墟碑)는 망월동에 있는 경렬사에 있다. 사당에는 고려 말의 무신 정지(鄭地)장군을 비롯하여 정충신, 유사, 고중영 등 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그 안에 1893년 행주인 奇宇萬  선생이 쓴 경렬사유허비가  옛 사지에서 1979년 경열사 경내로 이건해 자리하고 있다.
    2018-06-11 | NO.275
  • 경은유공효행비
    광주시 광산구 동호동 신촌마을1960년이 경은유공효행비耕隱柳公孝行碑는 동호교 옆 신촌마을 입구에 유인옥(柳寅玉, 1850~1919)의 효행을 기록한 비이다. 경자년 정월에 건립되었으며, 비문은 정종원이 편찬하고 나승만이 글을 썼다.광산구 덕림동 산 37-2 수성마을 덕림사 德林祠에 일당(逸堂) 유절(柳節, 1517~1580)과 그의 둘째 아들 농포(弄圃) 유희달(柳希達), 농포의 아들 고암(高巖) 유시필(柳時必), 농포의 9세손 경은(耕隱) 유인옥(柳寅玉) 등을 배향하고 있다. 자 학선(學善). 호 경은(耕隱). 서산 자미(西山 自漏)의 I5대손이요, 롱포 희달(弄圃 希達)의 9대손이요, 춘영(春永)의 계자(系子)이다. 생부(生父)는 용영(龍永)이다. 철종(哲宗) 원년 庚成 7월 23일 광산군 본량면 동호리 금호(光山郡 本良面 東湖里 琴湖)에서 태어나 겨우 4세에 부친을 여의고 편모 슬하에 성장 하였다. 일찍 서당(書堂)에 다니면서 소학(小學)과 효경(孝經)을 읽었는데 효우(孝友)에 대한 글귀가 나오면 반드시 심중에 새기고 말하기를 『옛 사람은 효제(孝悌)를 인(仁)의 근본으로 삼았다. 만약 효제를 먼저 힘쓰지 않으면 마침내 인이 될 수 없을 것이니 어찌 실천하지 않아서 되겠는가?』하였다. 이렇듣 효우를 천성으로 타고나 모친을 섬기고, 형들을 받듬에 효성과 우애가 독실함으로 향당에서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나이 18세에 종가(宗家)로 출계(出系)하였는데 가세가 본래 빈한하여 부모 공양이 어려운지라 글공부를 폐하고, 몸소 농사 지어 자신은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지성을 다하여 봉양하였다. 그리고 조석으로 거처를 살피어 문안을 드리고 집을 나가거나 돌아와서는 반드시 아뢰고 낮을 보이며, 뜻을 순종하여 조금도 어김이 없었다. 고종(高宗) 13년 丙子(1876) 3월, 출행중 정읍(井邑)에 이르러 날이 저물었는데 갑자기 마음이 놀래어 땀이 흐르는지라, 이상히 여기고 밤 길을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노령(蘆嶺)을 넘는데 범 한마리가 나타나 길을 인도하여 새벽녘에 집에 당도하니 부친께서 병환이 위독하여 사경(死境)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공의 회귀(回歸)를 이상히 여기고 말하기를 『이는 필시 공의 효성을 산 신령이 강복함이라.』하였다. 급히 의원을 모셔다가 진찰한 후 약을 다려 드리고 한편 하늘에 기도하여 자신을 대신해 주도록 간절히 빌었으나 환후(患候)가 더욱 위독하므로 자기의 손가락을 깨어 피를 흘려 드리니 4일을 연명하고 드디어 운명하시었다. 공께서 망극의 슬픔을 다하고 장례를 모신 후 궤전(饋奠)의 절차를 예제에 쫓아 3년을 하루 같이 행하고, 기일에는 초종(初終)과 같이 슬픔을 다함은 물론 촛불을 밝히고 날을 새우면서 살아 계시는것 같이 지성을 다 하였다. 31년 甲午(1894)에 동학란(東學亂)이 일어나 사설(邪說)이 횡행하고 인심이 흉흉하거늘 공께서 출입을 금하고 자정(自靖)하여 자질들을 경계하고 이웃을 회유하니 온 마을이 그에 힘입어 안정하였다. 己未 4월 6일 향년 70으로 졸하시니 본량면 동호리 후록 수영동 선영 을좌(本炎面 東湖里 後麓 水永洞 先瑩 乙坐)에 장례를 모시었다. 배위 광산정씨(光山鄭氏)는 류(?)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을 갖추어 구고(舅姑)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고, 부군(夫君)을 받들어 공경을 다하였으며 1남2녀를 두어 아들은 홍렬(洪烈)이요, 따님은 금성나상운(錦城羅尙運) ? 수성최작현(隋城崔灼鉉)에게 출가하였다. 향당에서 공의 효행을 기리어 庚子(1960) 3월에 공께서 생장하신 금호(琴湖)마을 앞에 효행비 (孝行碑)를 세웠는데 비문은 오천정종원(烏川鄭琮源)이 지었다. 이로부터 유림(儒林)의 공론이 일어나 호남(湖商) 각 향교(鄕校)의 천장(薦狀)이 있어 乙巳(1965) 9월에 광산 덕림사(光山 德林祠)에 추배(追配)하였다. 공의 묘갈명은 술암 송재성(述菴 宋在晟)이 지었다. 자손이 본량면 덕림리(本良面 德林里)에 살고 있다. ※ 孝行碑銘, 德林祠誌 (비문 정리중)耕隱柳公孝行碑蔭記孝爲百行之源也子識之所當行而世敎之所先務也然?古令而能之者幾人乎志體供養父母安之宗族鄕黨稱之而爲稔慕者其惟耕隱柳公諱寅玉字學善其庶幾乎公以 哲廟庚戌二十三日生于高巖里弟賊性淳厚用心近仁自幼能知愛親而溫淸?省之節不敎而能及就學也至於孝友等文句沈潛反覆常以愉婉承順而未嘗有?其親意矣年至十人以父命出系于族叔春永后而事所后慈親如事所生甘旨之供靡不庸極而家貧躬耕以供子職負米百里極力營辨而嘗欲上京至于井邑忽心驚而星夜還程至族蘆嶺遇席同行及未明而還家親?危谷尤祈斗禱天以不怠至於本生孰喪如一人皆稱之以小大連之居喪也至于忌日則以致如枉可謂終身慕者也旣有鄕道剡薦而未蒙棹?之典可歎也己未四月六日卒葬于水永洞己坐原柳氏系出文化以高麗大承公諱車達爲鼻祖而圭組火?爀可謂三韓巨族矣入本朝而有諱自湄 端廟遜位葉官入山而世稱西山先生諱軒大司憲諡文簡定公之十五世祖也和錫命百興民春永高曾祖補諱也?咸平李氏李生考諱龍永?靈光丁氏齊光山鄭氏擧一男二女男洪烈女適羅尙運崔灼鉉余?之洪烈男枉薦在鎬嗣孫在萬克趾其義爰謀代石以圖不朽要余記實世好難慧累辭不獲而?述便槪以?後人之弓今式云爾庚子正月上元 鳥川 鄭琮源 謹撰金城 羅承萬 謹書
    2018-11-18 | NO.274
  • 계산유공인교효행비
    광주시 광산구 동림동 구룡마을1982년이 계산유공인교효행비(桂山柳公寅敎孝行碑)는 문화유씨 문중에서 관리한다. 계산 유인교(桂山 柳寅敎)
    2018-12-01 | NO.273
  • 고경명-고씨삼강문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길 66(압촌동 산14)광주시 기념물 제12호. 1985년 2월 25일 지정고씨삼강문(高氏三綱門)은 조선 중기의 문관·의병장인 고경명(1533∼1592) 일가 7명의 충효열 삼강문이다. 삼강문은 충신, 효자, 열녀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旌閭)이다. 삼강문옆에 문중 제각인 추원각(追遠閣)이 있다. 보호구역 66㎡이며 장흥고씨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 정려는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장 고경명을 비롯하여 그 일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844년에 세운 것으로 1층, 3효, 2열, 1절로 표창되어 있다. 1충은 고경명, 3효는 장남 종후(從厚), 차남 인후(因厚), 손자 부금(傅金), 2열은 딸 노상룡(盧尙龍)의 처와 질부인 거후(居厚)의 처 광산정씨(光山鄭氏), 1절은 동생 경형(敬兄)이다.충렬공 제봉 고경명(1533-1592)은 압촌동에서 태어나 여러 관직을 거쳐 1501년 동래부사를 끝으로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금산에서 왜병과 싸우다 두 아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곳에는 고경명을 비롯하여 진주성에서 전사한 효열공 종후, 금산에서 전사한 의열공 인후 등 효자 두 아들과 열녀로서 정유재란때 순절한 그의 딸 영광 유생 노상룡의 처와 고거후의 처로 그의 질부인 광산정씨, 효자로 그의 손자인 선교랑 고부금과 절의로 죽은 동생 고경형 등 일가 7명이 기록되어 있다. 1595년에 고경명·고경형·고종후·고인후, 1597년에 노상룡의 처, 1655년고부금, 1844년광산정씨가 정려를 받았다.현존 건물은 1844년에 세운 것으로 사방에 홍살문을 설치하여 내부를 차단하고 앞뒤 이열로 정려 현판을 걸었다. 정면 4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지붕은 부연이 없는 홑처마로 처리했다. 건물밖에는 담장을 돌리고 외삼문을 세웠다.
    2018-06-17 | NO.272
  • 고광선-현와고선생묘비명
    광주시 서구 용두동 산 79(봉산정사)이 조선유민현와고선생묘비명(朝鮮遺民弦窩高先生墓碑銘)은 현와 고광선 선생의 묘비명이다. 봉산정사  건너편 왼쪽의 산록에 있다.고광선은 광산구 안청동 석음 박노술의 풍천대를 1920년 세울 당시에 도유사를 맡는 등 지역의 중추적인 인물이었다. 영식재와 만취정의 상량문을 써주었고 월호정의 찬기와 일산당의 중수기를 써주기도 했다. 『광주읍지』(1924)에 주의 서쪽 10리에 있다는 농은정農隱亭 에 명문이 있었다 한다.
    2018-05-31 | NO.271
  • 고려광주군노공신도비
    광주시 북구 오치동 109-2(광주노씨삼능단 입구)2003년이 고려광주군노공신도비(高麗光州君盧公神道碑)는 高光善 짓고 吳駿善(전면) 奇琮燮 쓰다.(추기) 盧在九 짓고 奇浩仲 쓰다. 광주노씨광주군파종회가 건립했다.1960년대 북구 삼각동에 세웠으나 2003년 비를 새로 만들고 비각을 세웠다.
    2018-11-13 | NO.270
  • 광주광역시
  • 한국학호남진흥원
  • 사이버광주읍성
  • 광주서구청
  • 광주동구청
  • 광주남구청
  • 광주북구청
  • 광주광산구청
  • 전남대학교
  • 조선대학교
  • 호남대학교
  • 광주대학교
  • 광주여자대학교
  • 남부대학교
  • 송원대학교
  • 동신대학교
  • 문화체육관광부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광주문화예술회관
  • 광주비엔날레
  • 광주시립미술관
  • 광주문화재단
  • 광주국립박물관
  • 광주시립민속박물관
  • 국민권익위원회
  • 국세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