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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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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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갑자계기적비
    광주시 북구 용전동 601-13(용전마을 입구)1981년이 갑자계기적비(甲子契紀蹟碑)는 朴來鎬 짓고 朴年在 쓰다.
    2018-11-13 | NO.62
  • 겸재김령김공유허비
    광주시 북구 신룡동 62-26(복룡마을 입구)1969년이 겸재김령김공유허비(謙齋金寧金公遺墟碑)는 盧文永 짓고 金鎭哲 쓰다.
    2018-11-13 | NO.61
  • 경렬사복원기실비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산 176 경렬사 경렬사복원기실비는 1984년 11월에 하동정씨경렬공파종회에서 세웠다.  정지장군은 고려 말 우왕 때인 1381년부터 1386년까지 해도원수와 해도도원수 등 6번의 수군 최고 지휘관을 지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우리나라 해군의 최초지휘관으로 평가받는다.당시 명장으로 활약한 이성계와의 나이 차이는 정지장군이 12살 아래고, 최영과는 32살 아래이며, 당시 최영이 도통사를 지낼 때 이성계는 육군을, 정지는 수군을 지휘하였다. 정지장군은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최초로 수군 창설과 전함 건조 상소를 올렸으며, 전함에 최무선이 발명한 화포를 장착하였다. 그가 왜구와의 접전에 대승을 거둔 주요 전적은 1378년 그의 나이 32세 때의 미라사대첩(지금의 곡성군 옥과면 마전리)과 1383년 5월(우왕 9년) 남해 관음포대첩이다.   정지장군은 나주 죽곡에서 태어났다. 본관이 하동이며 시호가 경렬(景烈)이다. 19세에 사마장원, 20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374년(공민왕 23년) 중랑장을 거쳐 전라도 안무사가 되어 왜구 토벌과 수군 창설에 이바지하였다. 이후 전라도 순문사, 해도원수(海道元帥)를 역임하였고 양광․전라․경상․강릉도 도지휘처치사(都指揮處置使)를 지냈다. 장군은 24번의 전투를 치루면서 대부분 승전하였고, 임금으로부터 11번의 포상을 받았다. 판개성부사(判開城府使)에 임명됐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1391년 10월 15일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경렬사는 공민왕 때 전라, 경상 양도에 걸쳐 왜구를 격퇴시킨 정지 장군을 배향한 사당이다. 그는 최초로 수군을 창설하고 전함을 건조하자는 상소를 올렸던 바다의 명장으로 알려져 있다. 경렬사는 장원봉 줄기를 따라 북쪽 제4수원지 아래쪽에 펼쳐지는 협곡에 자리한 분토마을 뒷산에 있다. 군왕봉 자락 아래의 양지바른 곳이다.
    2018-06-11 | NO.60
  • 경렬사유허비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산 176번지1893년이 경렬사유허비(景烈祠遺墟碑)는 망월동에 있는 경렬사에 있다. 사당에는 고려 말의 무신 정지(鄭地)장군을 비롯하여 정충신, 유사, 고중영 등 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그 안에 1893년 행주인 奇宇萬  선생이 쓴 경렬사유허비가  옛 사지에서 1979년 경열사 경내로 이건해 자리하고 있다.
    2018-06-11 | NO.59
  • 고재정-긍헌거사고공유적비
    광주시 남구 대촌동 석교마을이 긍헌거사고공유적비는 남구 대촌동 석교마을에 있는 고재정 유적비로 오병익이 찬했다.
    2018-06-17 | NO.58
  • 광람계기적비
    광주시 북구 용전동 601-9(용전마을 입구)1968년이 광람계기적비(光藍契紀蹟碑)는 전면에 향약 덕목을 기록하고 후면에는 계원 명단을 6명씩 16행으로 96명의 이름을 새기고 있다. 비 좌측면에는 35인, 우측면에는 17인 모두 148인으로 구성되어 있다.범재풍范在豊 설립하고 심한구沈翰求 쓰다. 1918년 당시 광주군 우치면장에 재직중이던 범재풍(范在豊, 1885-1944)이 우치·본촌면 일대의 주민 61명을 계원으로 하여 창계하였다. 계원의 거주지를 보면 생룡, 용전, 태령, 수곡, 입암, 회룡, 단지, 거진, 지야, 본촌, 용두, 양지, 일곡 등 광범한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범재풍이 작성한 서문(序文)을 보면 덕업상권, 과실상규, 예속상교, 환난상휼의 향약 4대 덕목 실천이라는 큰 목표아래 계원 상호간 친목도모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특히 광람계라는 명칭은 우리고장 광주에서도 중국의 남전여씨(藍田呂氏) 향약(鄕約)의 전범에 따른 유교적 이상향을 건설해 보고자 하는 바램으로 시작한 것으로 짐작된다. 광람계는 지금까지도 존속되고 있어 1900년대 초기 계의 형태와 현재의 계를 비교·검토하는데 하나의 좋은 사례가 되고 있다. 창계 당시 계원 자격은 광주군 우치면에 거주하는 20세 이상의 남자였으며, 총 61명이 백미 1말씩을 갹출(醵出)하여 시작하였다. 창계 이후 가입범위가 본촌면까지 확대되었다. 최초의 임원조직은 임기 3년의 계장 1인, 공사원 1인, 유사 1인, 장재(掌財) 겸 집사(執事) 6인으로 되어있는데, 계장은 계무를 총괄하고 공사원은 계장의 보좌역, 유사는 총무역이고 장재 겸 집사는 물자관리와 연락책이었다. 1956년 규약 개정시 임원 조직은 계장 1인, 부계장 2인 ,총무 1인, 재무 1인, 간사 약간명(10명당 1인), 감사 2인, 고문 1~2인으로 손질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계장, 부계장, 총무, 재무는 총회에서 선출되고 여타 임원은 계장이 지명 또는 추대한다. 그러나 여느 계와 마찬가지로 계장, 총무, 재무 이외는 명목상 직책에 불과한 실정이다. 광람계의 강신일(降神日)은 매년 음력 3월 25일이며 창계 때부터 한해의 강신유사를 연령순 윤번에 따라 10명씩을 선정하여 이들의 공동부담으로 음식을 장만하고, 유사 중 1인의 집 마당이나 인근 마을의 경치좋은 정자, 명소 등에서 계회를 치렀다. 강신총회는 계장 주재로 계칙에 관한 사항, 예산결산 문제, 임원선출, 사업계획 및 실적보고, 표창자 시상, 유사 선정 및 기타 안건을 토의한다. 현재는 계의 활동상이 상당히 미약한 상태이며 강신일이 오면 용전동 인근 식당에 전 계원이 모여 몇 만원씩의 회비를 모아 수계를 한다. 계재는 초기 창계시 백미 1두씩 거둬들인 것을 5할대의 이율로 식리하여 목돈을 만들어서 용전동 405번지에 답 504평을 구입하고 경작료를 받아 운영비로 사용한다. 무엇보다도 광람계 운영의 핵심은 품행 우수자 표창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 내용을 보면 가장 기본적인 조위를 비롯 효행, 열절, 덕행, 우애, 신의, 구휼, 봉양, 장학, 돈행 등 10개 항목으로 도표를 만들어 매년 조위자와 표창자의 인원과 명단을 기록해 나감과 더불어 부조 및 표창을 하였다. 이러한 표창은 물질적인 도움보다는 덕행을 널리 고양시켜 지역민들이 쉽게 본받고 따르도록 하는 의도가 담겨진 것이다. 1958년 이후에도 얼마동안은 몇 개 부문에 국한하여 표창을 해오다가 70년대 이후에는 계원 및 계원가족의 문상하는 일만이 사실상 광람계 사업의 전부가 되다시피 하고 있다. 광람계는 향촌민들에게 유교적 교화이념을 구현시키기 위해 당시 광주 우치면장이던 범재풍이 심혈을 기울여 조직, 주도한 전형적인 광역(廣域) 향약계(鄕約契)라고 할 수 있다. 80여 년 전에 설립되어 내외의 갖은 악조건 하에서도 지금까지 지속해 온 점은 놀랍다. 보릿고개가 있었던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쌀 한 두 되는 별 것 아니겠지만 그 당시 최소한의 의식주 해결 자체도 어려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상부상조한 이들의 드넓은 애민애향(愛民愛鄕)정신은 높이 기려야 할 것이다.
    2018-11-13 | NO.57
  • 광산이공남지유허비
    광주시 북구 삼각동 254-31964년이 증통정대부일곡광산이공남지유허비(贈通政大夫逸谷光山李公楠之遺墟碑)는 일곡 이남지의 행적을 기록한 비이다. 金奎泰 짓고 쓰다. 광산이씨 문중 건립하다.
    2018-11-13 | NO.56
  • 광주향교모성회기실비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2003년광주향교모성회기실비(光州鄕校慕聖會紀實碑)는 모성회(慕聖會) 설립에 관한 전말(顚末)과 모성회(慕聖會) 소유토지 등기명의인(登記名義人) 35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광주향교 모성회(慕聖會)에서 2003년에 세웠고, 찬자(撰者)는 유한상(柳漢相), 서자(書者)는 고광렬(高光烈)이다. 모성회(慕聖會)는 1940년에 광주의 유림 650여명이 성현의 덕을 추모하고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 취지로 발족하였다. 일제식민지 말기 일본인의 학정이 극심하여 향교재산이 그들의 손에 넘어가고, 제사조차 드리지 못하게 하자, 이 고장의 유림들이 분연히 일어나 향교의 기본재산을 조성하고 석전대제를 드리며, 향교의 보수, 기념비 등을 건립하여 유교사상을 통해 윤리의식 및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2018-06-11 | NO.55
  • 기진-덕성군물재기공유허비
    광주시 광산구 임곡용동길 166 (오남재 뒤 야산)1957년이 덕성군물제기공유허비(德城君勿齊奇公遺墟碑)는 기근섭이 찬했다.고봉 기대승 선생의 부친인 물재 기진(奇進)의 유허비이다. 그의 동생 기준이 기묘사화로 인해 죽임을 당하자 그때 낙향하여 터를 잡고 지은 오남재(五南齋)가 있다. 그 옆 산길을 따라 5분정도 걸어 오르면 후손 근섭(近燮)이 찬(撰)하고, 김규태(金奎泰)가 서(書)한 그의 유허비가 있다.
    2018-06-11 | NO.54
  • 김덕경-둔암처사 김해김공 유장비
    광주시 남구 노대동 707번지 신기마을 뒤편 양양재(洋洋齋)1981년남구 진월동(노대동) 노대마을 앞에 1981년 둔암처사 김덕경(遯庵處士 金德慶)의 유장비를 세웠다. 현재는 양양재(洋洋齋) 제각 한편에 있다.遯庵處士金海金公遺庄碑  遯庵處士金公諱德慶字明述系出駕洛國首露王傳十世讓王遯位新羅至曾孫諱庚信統合三韓封興武王是金海金氏三王中祖高麗版圖判書諱管入李朝節孝公慕庵先生諱克一節孝公之孫文愍公濯纓先生諱馹孫文愍公之姪三足堂先生諱大有也謹稱三賢公郞文愍公之玄孫也自先生之酷被戊午士禍以 後其後孫之流落?間者多矣而遯庵處士亦其一也謹按公生長乎 宣仁孝顯之世而專政儒術造詣甚高常曰士不得於朝則野遂南遯於光山瑞石山之西葛嶺之下古之老大里今光州市孝德洞也結茅爲屋杜門歛跡澹寂自養一床琴書三巡花竹悠然有碩人不護之趣竊念公以簫灑之胸次膽麗之學文宜常翶平朝端而自遯荒山晦名沒齒必其深徵先世之連禍而無竟仕進者歟弦窩高翁嘗題其墓文曰此果爲聖世之逸民信乎百世之立言也公只有一子至玄孫始擧四男曰尙九感奉九貞九兄弟四人孝友備至居民咸頌曰人地相筏蓋此一區統稱孝友洞改云爾自足世爲綮衍戶可百餘而不寂家於一方亦不失三賢世家之典型則惟公不食之報必將有大來之日矣十二世孫鎬永謀議閭門就遺墓之前將堅一碑以使後昆不忘先德而思所以嗣宇之計命其族弟鎬翊鎬巖鎬瑾兌仁族姪相洙道洙江洙謁余東山之寓居爲文以識之余感其追遠之孝誠而不忍辭爲之銘曰 處士肥遯居貞深徵先禍經否爲榮聸望葛嶺爰想遐蹤鬱彼桑梓敢不肅容曰子有後不束遺墓表厥宅里屹其碑矧伊雲善述且繼餘慶綿綿於千萬世光復後三十七年辛酉六月駕洛金海金亨在 謹撰
    2018-06-13 | NO.53
  • 김용훈-야은거사 김해김공용훈 유적비명
    서구 눌재로 420(세하동)야은거사 김해김공 용훈 유적비명은 서창한옥문화관과 야은당 사이 주차장 한쪽에 있다. 야은野隱 김용훈金容燻(1876~1948)의 9대조가 삽봉 김세근 장군이다. 야은공의 덕행과 후학 양성을 위해 노력한 과정을 비문에 새겼다. 글은 김종金鍾 전 조선대 교수(시인)이 썼다.
    2018-05-25 | NO.52
  • 김정수-계남김선생유허비
    광주시 남구 대촌동(화장동) 농막마을1913년이 계남김선생유허비는 김정수(桂南 金鼎洙)의 유허비이다. 경당 최윤환(敬堂 崔允煥)이 글을 썼는데 1913년에 건립되었다. 광주광역시 남구 화장동 농막부락 김인규씨집 뒷편 숲속이다.유허비에는 김정수는 현와 고광선(弦窩 高光善)의 문인으로 이름난 효자였을 뿐 아니라 땅을 주어 농민들의 기근을 면하게 해주고 병자들을 구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종종 관호정(觀湖亭)의 건립자를 김영현(金永賢), 김형준(金亨俊) 및 김동정(金東鼎) 등으로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는데, 김영현은 김정수의 자(字), 김형준은 호적상의 이름, 그리고 김동정은 족보에 항렬자로 맞춰 쓴 이름으로 모두 김정수를 뜻하는 이름이다. 관호정의 상량문에 따르면 김정수가 지은 이 정자는 1932년에 건립되었다.  이 정자의 거실 한칸을 자신의 처소로 할애하여 그의 호를 따 계남정사(桂南精舍)라고도 불렀다. 桂南金先生 遺墟碑韓文公曰道之所在師之所在也師者所傳道授業解惑也人非生而知之者孰能無惑惑而不從師其爲惑也經不解矣故桂南金先生從師弦窩高先生質疑解惑早得爲己之學博通貴典敎授學徒成就者多且孝於雙親養志爲先親有疾病煎湯躬進終至殞命斷脂灌血延命數日奄遭巨創全廢酒肉蘭蘭梅梅有棘人諸氣象侍墓痛哭以終三年後喪亦然世稱孝子又以慈善爲心每出己財用藥於貧病者終爲廖愈買受田土許與於無晨者免其艱難飢歲傾廩救給於貧窮者脫其窘途且送米藥救護於窮産者全其生命喜迎過容禮遇而厚贐之且無困境如此功德何可盡說乎鄕黨稱善壬申建蔡觀湖亭湖南名碩多有題詠居處安閒日事詠觴訓迪弟子每叙彛倫韓文公所謂道之所存者非此耶噫先生之學問孝行善德不可一日忘之故同碩諸益合謀翌碑於亭下以寓羹墻之慕庶扶風敎之頹廢金萬鎬與文吉殫誠也先生諱鼎洙字永賢桂南號也高宗丁亥與丙子生卒年也駕洛國王諱首露興武王諱庚信蔡隱公諱方礪俱爲顯祖有雲齊公贊仲子也先生有子三人鳳奎龍奎麟奎眞鳳毛而孫曾甚繁不盡錄方翌遺蹟碑於觀湖亭友人宋營鎭請余文余與公有舊不辭而書之癸丑二月上澣 慶州崔允煥 撰 信州康仁煥 書
    2018-06-17 | NO.51
  • 김창환-동몽교관 김창환 유허비
    광주시 광산구 신촌동 975-3번지1910년(순종4년)이 김창환유허비(金昌煥遺墟碑)는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조봉대부(朝奉大夫)를 지낸 김창환 선생의 비이다. 전통시대에 효행을 실천한 선비의 유허비로 효행정신의 선양과 후대의 추숭활동을 알 수 있어 제도사와 향토사적 의의가 있다.아원표출이창대부(我願表出以昌大夫) 숭정후오주병진(崇禎後五周丙辰)이라는 연기(年記)로 보아 1916년에 이 곳(광주 광역시 광산구 신촌동 975-3번지)에 세워졌다.기우만(奇宇萬)이 명(銘)을 짓고 오준선(吳駿善)이 찬(撰)하였다. 이중권(李重權)이 글을 짓고, 이재춘(李載春)이 글씨를 썼다.창살로 네 면이 둘러져 보존되고 있으나 비문의 활자가 닳아지고 있어 바로 확인하기는 어려운 상태이다. 비의 앞면에는 "有朝鮮孝子童蒙敎官行朝奉大夫 贈吏曹參判幽菴金海金公昌煥之遺墟碑'라고 쓰여 있다.1916년 김해김씨 종중에서 건립하였다.    孝子金公遺墟碑三孝一烈。萃于一家。有古罕聞。于今尤嘉。有家獨然。有國則無。我願表出。以勖夫夫。
    2018-06-11 | NO.50
  • 대치사(대치서원) 유허비
    전남 담양군1920년대치사(大峙祠) 유허비 (遺墟碑) <광주읍지>에 따르면 간석(艮石) 이중철(李中轍)의 명문(銘文)이 있다.담양군 대전면 평장리 화암마을 영천이씨 문중에서는 문중내 8賢을 배향한 대치서원을 1754년에 담양 대치 중부촌에 건립하였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20년 이석지의 후손에 의해 옛 터에 유허비가 건립되었다.대치사에 배향된 인물 중 효암 이정실, 묵은 이정신, 야은 이정태는 병자호란시 의병을 이끌고 진군하기도 하였으며, 인근 척서정에는 야은 이정태의 원운 2수가 전해지고 있다.
    2018-06-18 | NO.49
  • 동평군정선생유허비
    광주시 광산구 본덕동 마곡마을 뒷편1937년이 동평군정선생유허비(東平君鄭先生遺墟碑)는 정종우의 비석이다. 하동정씨 문중에서 관리한다.(정리중)公諱種字播卿系出河東新羅景明王朝諱道正南方豪族先見國之將屋率先歸服于高麗太祖陞爲平章事受封河東君爲得貫始祖隣世五傳諱國龍匡靖大夫密直副使生諱蘭衍文科左尹高祖文科錦城君諱盛曾王考文科判軍器寺事 贈匡靖大夫都僉議諱履王考恭愍王乙巳魁司馬丙午魁殿策創設高麗水軍建造戰艦四海道都指揮處置使門下評理諡景烈公號退菴諱地祖?郡夫人密陽朴氏右相椿女考文科七道觀察使號悔?諱耕?貞夫人光山金氏門下侍中文正公台鉉女高麗恭讓王辛未生孝友剛直文武兼全李朝 太宗八年戊子登文科出宰濟州鍾城等邑歷黃海道忠淸道觀察使 端宗元年癸酉十月咸吉道都節制使李澄玉叛據北鎭及女眞全域自稱大金皇帝將定都五國城澄玉之武勇絶人出等華夷畏之皆服從野人聞風爲迎賊計上待除公爲鍾城府使專擔滅賊公遂星夜赴任鍾城時澄玉設置部署官屬刻期將越江定都行至鍾城日巳暮矣公欲夜圖之進日墓夜行軍部伍相失不如待明曉澄玉可之據椅假寐公預伏武士於民家親率內廂軍乘其熱睡而突入澄玉所斬殺澄玉幷殺其子滋源潤源妾子鐵同成同軍官朴文憲等三十餘人滅之時値隆冬丁亥五月五日吉州李施愛學其弟施合擧兵叛大殺北方守令席卷咸興以北人心洶洶咸興府民包圍監營其務甚急上命龜城君李浚爲都摠使曺錫文爲副公及康純許琮南怡魚有沼等文科有將略者二十八員爲大將出征浚領十萬後發接應公與曺錫文等率三萬兵先赴咸興解圍大戰於洪源北靑且戰於利原蔓嶺(馬訖嶺)大破叛軍施愛脫身逃走于吉州追擊生擒斬首乃八月也錄勳精忠出氣布義??愾功臣號賜鐵券東平君爲資憲大夫行兵曹判書 贈諡良襄溫良好樂曰良甲?有勞曰襄庚寅退老于此吾河東鄭氏之始居而爲世居之地源出於蘆嶺或興佛甲錦城或成壟崗平野透施東南星降魯平開面正立萬山輻輳拱衛極樂黃龍合流於面前千水萬流自成之江河秀麗山水沃野千里盡入一眸之間眞足南國勝地王考退翁吟詠錦城山木浦水公繼其志愛山水而寓此地世稱種丘亭矣丁酉卒葬于光州壯元峰下艮原有碣配貞夫人竹山朴氏王頁女墓?育三男長曰鋤字保民號漁隱文科內翰林淑夫人瑞山鄭氏縣監繼咸女仲曰耕文科金海府使淑夫人羅州林氏季曰宣蔭密陽府使孫成字子輝文科監察廣州李氏縣監典翰女穫字子收文科監察漢陽趙氏奎女積蔭主簿禾惠蔭縣監開字子華逸箕子殿參奉行南平縣監金城吳氏縣監蕃女恂文科縣監咸陽朴氏光彦女思湜蔭佐郞曾孫承玄蔭校尉光山金氏府使鍾孫女孝宗進士參奉羅州羅氏翰林昶女元宗文科通訓大夫新平宋氏持平碩? 孫承玄蔭校尉光山金氏府使鍾孫女孝宗進士參奉羅州羅氏翰林昶女元宗文科通訓大夫新平宋氏持平碩考女(通訓玄孫忠信武科行兵曹判書封錦南君諡忠武)悌宗蔭參奉白川趙氏郡守淨女慈宗?育忠宗蔭縣監彦祥蔭參奉禧武宣傳官恩津宋氏宗元遊留八域壽堅蔭別侍衛禦侮將軍密陽朴氏訓導儼碩女思平不仕忠州朴氏舜臣生員全義李氏以下不盡錄且公之昆李有四公居長次曰諱機文科海州牧使後孫居玉果三曰諱?文科山蔭縣監后孫居咸平務安四曰諱和蔭直長后孫居海西松禾長淵等地嗚呼公在朝累滅叛賊盡忠報國退老多涉勝地遺裔八域長房翰林住趾于光羅次房金海遺裔於靈長之間三房密陽遺裔於海西康翎石橋海州加川翰林之子長監察後裔寓光州芝山洞柳德洞次監察後裔住羅州金安洞咸平務安三主簿後裔移住忠南珍山四縣監後裔留於八域五南平後裔惟獨留此誦舊傳而繁衍我東平先祖肇基於此地寔近乎半千載其間累經滄桑或盛或衰從近式蕃數至幾千生事凡百一無就緖故曾設二五行榮?淳寬玉淳祥今爲主動創起遺墟之役謹識始基先德誓守後昆益篤斯役也巨且難淳龍淳基淳孝淳泰淳晧淳煥合力經之營之不煩他而成遂石旣具委任屬文上爲慕先之誠孝下爲諸從宗之情親特其上下誠情略?其大綱如右歲 檀紀四千三百六年癸丑上巳東平君諡良襄公十五代孫淳杓?手謹識書
    2018-12-01 | NO.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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