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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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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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중판사사 건천 정광신도비
    광주시 남구 진월동1916년전중판사사(殿中判寺事) 건천(巾川) 정광(程廣) 신도비(神道碑)주(州)의 서쪽 5리의 거리인 금당산(金堂山)에 있는 비석으로 이천(伊川)의 사손(祀孫) 오경박사(五經博士) 광인(廣仁)의 전서(篆書) 및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명사(銘詞)가 있다.<명 문(銘文)>한산정씨(韓山程氏) 선조이신 이천(伊川)선생* 그분께서이기철학(理氣哲學)의 깊은 듯을 이 세상에 권했도다우리 후학(後學) 깨우치는 그의 뜻이 간절하여천억만억(千億萬億) 여러 사람 많은 교훈 얻었도다그 당시의 여러 후손(後孫) 동쪽으로 내려와서그지없는 번창(繁昌)으로 이 나라를 빛냈도다이 가운데 한사람인 건천(巾川)이란 이 어른이그의 조덕(祖德) 이어받아 많은 행적(行蹟) 남겼도다숭불(崇佛)하는 그 당시에 삼년독상(三年獨喪) 지키면서척불(斥佛)하는 그 신념을 가훈(家訓)으로 남겼도다포은(圃隱) 야은(冶隱) 두 동지와 서로 뜻을 모아임금 앞에 나아가서 많은 간언(諫言) 올렸도다.어지러운 나랏일(國事)을 그지없이 걱정하여ユ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눈물 흘렸도다.모든 일을 단념하고 전원(田園)으로 돌아가니고려(高麗)라는 이 나라가 뒤를 따라 망했도다망복(罔僕)** 하는 그의 뜻을 시를 지어 읊으면서여러 자손 불러모아 엄한 훈계(訓戒) 내렸도다죽지 않은 그 자체(自體)를 부끄럽게 여기면서사립문(柴扉)을 굳게 닫아 그의 몸을 숨겼도다바른 언사(言辭) 옳은 의리 어김없이 지키면서위아래의 순서 따라 모든 정(情)을 다했도다이와 같은 높은 행의(行義) 어느 누가 따를손가이 세상의 바른 윤리(倫理) 일으키어 세웠도다조그마한 언덕 위에 가는 샛길(間路) 이어지니사척(四尺) 높이 그의 무덤 어렴풋이 보였도다아름다운 그의 유덕(遺德) 그지없이 추모하매나도 모른 그 사이에 나의 몸을 굽혔도다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지음*이기(理氣)의 철학을 제창하여 유교의 도덕적 기초를 다진 중국 북송(北宋) 때 유학자 정이(程顧)의 호(號).**고려의 신하로써 절개를 지키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의미1916년에 건립된 정광(程廣) 신도비는 진월동 마 국도1호선 LG서비스센터 옆에 위치한다. 하남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풍우에 의한 마모가 심한 편이다.617년 전에 이곳에 터를 잡은 하남(河南) 정씨(程氏)의 시조, 정사조(程思祖)의 2세인 정광(程廣)이 은거했고, 묻힌 땅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정사조는 원나라 사람으로 1351년 12월에 고려 공민왕의 왕비인 노국공주를 모시고 개경에 들어온 인물이다. 그는 노국공주를 보필하면서 어사대부(御使大夫, 관리의 감찰 업무를 맡는 관청의 정삼품 벼슬)를 지냈고, 훗날 공신으로 책봉되어 정일품인 삼한삼중대광(三韓三重大匡)으로 추증되었다. 정사조를 따라온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 정도(程度)는 오부부사(五部副使)를 지냈지만 후손이 없어 대가 끊겼고, 둘째 아들 정광은 아버지를 따라온 직후인 135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중성(殿中省, 왕실 살림을 관장하던 부서) 판사(判事)에 이르렀다.  고려 땅에 순조롭게 안착하는가 싶던 정씨 집안은 공민왕이 살해되고, 우왕·창왕으로 이어지는 혼란기에 다시 한번 변화를 겪었다. 정광이 벼슬을 버리고 광주에서 서남쪽으로 10리쯤 떨어진 금당산 자락(지금의 진월동)으로 숨었다. 정광은 이미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는 충실한 고려의 신하가 되어 있었다.그는 “일찍이 고려가 번성한 날 엔/ 온 세상이 고려의 신하였는데/ 어찌 고려가 쇠잔할 줄 알았으랴/ 온 세상이 고려의 신하가 아니네”라고 세상을 한탄했다.  정광이 광주까지 내려오게 된 것은 아마도 그의 아내가 광산(光山, 광주광역시 광산구) 이씨여서, 처가 동네 근처로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그는 “물가에 터를 잡고 띠를 베어 산수간에 집을 짓고” 살면서, 때로 무등산 정상 서석대에 올라 송도를 그리워했다.  등서석음(登瑞石吟)이라는 시이다.瑞石靑春也自好  서석대의 푸른 봄을 좋아하네雖將松岳舊顔來   송악에 있던 나를 누가 데려왔나一回含淚一回哭   한 번 눈물에 또 한 번 통곡하네 水咽出溪鬱此懷   물과 산골짜기 우울한 회포를 삼키네백제 가요 무등산가(無等山歌)는 가사가 전해오지 않으니, 무등산을 소재로 한 시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걸로 여겨지는 작품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정광은 역성혁명에 편승하여 조선 왕조로 스며들지 않고, 외진 산간으로 스며들어 버렸을까? 더욱이 연고도 없는 자식들에게까지 훈계하는 계자시(戒子詩)를 남겨, “너 또한 고려조의 신하이거늘/ 어찌 새 임금을 섬기랴/ 만약 신하 된 도리를 안다면/ 전조의 임금 은혜를 잊지 마라”고 했다. 이 유언 때문인지 하남 정씨 집안에서는 국가적인 변란인 임진왜란 때 화순 향리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순국한 정득운(程得雲), 정득원(程得元) 형제가 공신으로 책봉될 때까지 크게 이름을 얻은 이가 없었다.  정광이 의리를 지킬 수 있었던 힘은 그의 집안 내력에서 나왔다. 하남 정씨인 정광은 본관이 중국의 하남성으로, 송나라 수도였던 낙양(洛陽, 하남의 옛 이름)에 그의 선조가 살았다. 정광의 10대조가 바로 이천부자(伊川夫子)인 정이(程)인데, 정이는 그의 형 명도부자(明道夫子) 정호(程顥)와 함께 성리학을 창시한 걸출한 인물이다. 주자가 뒤이어 정호와 정이의 학설을 집대성하면서 성리학이 완성되는데, 이들의 성(姓)을 따서 성리학을 정주학(程朱學)이라고도 부른다. 성리학, 즉 정주학은 한반도에서 고려 말부터 통치이념으로 뿌리내리게 되는데, 하남 정씨는 정주학과 더불어 한반도에 뿌리내린 집안인 셈이다.  정광은 당시 불교를 숭상하고 복(福)을 구하는 시대 풍조를 보고 “나의 가문은 이천부자와 선조(先祖)로부터 불도(佛道)를 쓰지 않거늘 내 어찌 저 무리를 존숭하고 믿겠는가”라고 비판할 정도였다. 그는 예(禮)와 윤리, 도덕을 중시하는 정주학의 근본에 충실하여 고려 충신으로 남고자 한 것이다.  (여행작가 허시명의 글 중에서)안쪽에는 재실(永慕齋, 1960년 건립)과 묘소와 묘비가 있다.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이 비문을 지어 1916년(崇禎5周 병진)에 세웠다. 저서는 정광인(程廣仁), 비문 글씨는 18세손 정남진(程南鎭)과 정의진(程義鎭)이 썼다. 원문은 《송사선생문집》권24(한국문집총간 345집 587쪽)에 실려 있다.⾼麗殿中判寺事⼱川先⽣程公神道碑中州聖賢之裔。多舍中⼟⽽居褊邦。若孔孟周朱⽒是⽿。⽽河南程{⽒伊川先⽣之後。亦其⼀也。蓋箕聖東出。⼋條敎⺠。禮樂⽂物。⾮復舊時之陋。⽽夫⼦⼜欲居之。故⽅五胡亂華。避地⽽來者。不於他⽽必於此歟。抑東⽅⽂敎將興。菀然有⼩中華之稱。⽽爲吾道東來之兆眹歟。程{⽒以有宋太⼦少師⽻爲肇祖。尙書員外希振。開府儀三司遹。太中⼤夫珦。少師後三世。太中公⽣明道伊川兩夫⼦。伊川三⼦。季端彥郊社齋郞。五傳⾄翰林學⼠庇,樞密院事在⼼。六傳⽽衛尉校丞思祖。與翰林孔紹等陪魯公主東來。官殿中侍御史。卽⼱川先⽣考也。妣貢⽒。⽗錢塘太守載。公諱廣字德魯。⽣卒年⽉。世久無徵。⽣⽽純孝有氣節。養兼志軆。⽣致樂喪致哀。時麗季短喪。獨⾏三年。⽴家廟。祭盡誠敬。俗尙祈佛。獨慨然⽈。吾家⾃伊川先祖。不⽤浮屠。斥之甚嚴。恭愍朝。爲殿中判寺事。與鄭圃隱,吉冶隱。志同道合。與論國計。輒⾄流涕。嘗登滿⽉臺賦聯句。若閔{農隱,安富,直提學安省,鄭圃隱,掌令徐}甄,籠巖⾦澍,樞密李鍾學,沙川伯南⼄珍。皆⼀時淸流。遣意悽切。亦⾒交遊之盛。知國事不可爲。棄官歸⼭。散錄隱淪之蹟。題其⾸⽈。忠節⼈⾂之⼤寶。古之君⼦奉以周旋於蕩板之⽇。苟⼀失之。⾮⼈⾂道理。余亦亡國⼤夫。不勝⽲⿆之懷。摭記若干⼈。以愧後世爲⼈⾂懷⼆⼼者。⼜以詩⾒志⽈。我以⼈間無似⼈。肯作泉下有罪⾂。如將今⽇出新國。後世其柰辱及⾝。亦以戒⼦⽈。汝亦麗朝⾂。何可事新君。若知⼈⾂道。不忘前⺩恩。太祖屢徵。以書辭⽈上不負⺩⽒。下不負鄭夢周。屛居以終。墓在光州⾦塘⼭程郞洞⼦坐。夫⼈光州李⽒。掌令彥章⼥。雙封。三⼦有連判尹,有達進⼠,有通府使。判尹⼦儒。進⼠⼦任。府使⼦仁。鄭侍郞鴻慶序公遺集云孟⽒⾃國初。已爲顯族。孔⽒始著于中廟。屢登淸顯。朱⽒始著於正廟。雲漢昭回。譜牒增光。⽽夫何伊川之裔。淪落草野。深致慨惜之意。第念程{⽒克守先祖勿仕之訓。五百年鞱光鏟跡。此則程{⽒⽽已。久屈}必⼤伸。以先⽣⾼⾵偉節。兼爲⼤賢之後。闡揚必有其⽇。旣刊集矣。⼜將昭刻矣。昌⼤其⾨。將⾃今伊始矣。⼜有私慨于⼼者。遺⽂久爲⼱衍之藏。使其早⾏于世。使今⽇爲親⾂世⾂者讀之。則必有所感激于衷。⽽圖所以善後者矣。今於神道之刻。程{⽣炳鉉致其⾨⻑⽼之命⽽徵爲銘。⼤賢之裔。兼有扶植之義。不敢以⽼且病辭。銘⽈。所祖伊川。傳不傳學。啓我後⼈。彌萬彌億。遺孫東來。光華在國。矧是⾀修。克念祖德。獨喪三年。家訓斥佛。圃冶同志。出⼊禁闥。傷⼼國⾮。潸然霑臆。筮遯歸隱。麗社隨屋。以詩⾒志。戒⼦罔僕。不死爲恥。杜⾨屛跡。上下不負。辭嚴義直。萬世倫綱。賴以扶植。程{郞之阡。是公四尺。⾼⼭景⾏。疇敢不式。嶽崇五周丙辰 八月幸州 奇宇萬 撰中等河南伊川祀翰林院五經博士程廣仁篆十八世孫 南鎭 謹書번역고려 전중판시사 건천선생 정공 신도비명 [서문을 함께 씀]중주 성현의 많은 후예들이 살기 좋은 땅을 버리고 편방으로 옮겨 살고 계시는 분들은 공맹정주씨이니 하남정씨 이천선생의 후예도 또한 그 한분이시다. 그 당시 기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팔조지교로 백성을 가르치니 예악과 문물이 구시대와는 달리 많이 향상되었으나 그때 중화에서는 오호가 난립하여 세상이 어지러울 때 명도 이천 두 부자도 살고자 함에 그 난을 피하여 편방으로 옮기게 되었다.이때 동방의 문교가 점점 흥하여 융성하여지니 소중화라는 칭이 있었음은 유교가 크게 발전할 수 있는 징조이며 정씨는 송태자 소사 우로 중시조를 삼으니 상서 원외랑 희진과 개부의삼사 휼과 태중대부 향은 소사후의 3세이다. 태중공이 명도 이천 양부자를 생하였고 이천의 자 단중은 관농 영전사요 한림학사는 비요 추밀원사는 응발이며 위위교승은 사조니 한림 공소등과 함께 노국공주를 모시고 고려에 처음으로 나와 그 벼슬이 전중시어사가 되니 건천선생의 고이며 비는 공씨이니 부는 전당태수의 재이다. 공의 휘는 광이요 자는 덕노이며 벼슬은 전중성판사이니 돌아가신 년월은 오래되어 알길 없으나 공의 천성이 순효하고 기절이 뛰어나 부모를 봉양함에 지체를 겸하였으며 상사에 있어서는 애를 극진하게 하였다. 당시 고려에서는 단상을 행하였으나 공께서는 꼭 3년을 행하시고 가묘를 세워 지성과 공경심을 다하니 당시의 풍속이 불교를 숭상함에 이를 개탄하며 이르시기를 우리 가문은 이천선조로부터 부처를 믿지 아니하였으며 배척하기를 심히 엄하게 하였다. 공민왕 4년 1355년 을미에 그 벼슬이 전중성판사가 되어 정포은 길야은과는 뜻이 같고 도가 같아 서로 국사를 논의할 때에는 어지러운 고려를 생각하며 눈물까지 흘렸다. 일찍이 만월대에 올라 연구를 읊으시는데 농은 민안부와 직제학 안성과 정포은과 장령 서견과 농암 김수와 추밀이종학과 사천백 남을진은 당시의 손꼽는 청풍류로서 그 절친한 친교의 뜻을 가히 알 수 있었으며 고려가 망하자 다함께 은거 망복하니 벼슬을 버리고 광주 금당산에 돌아와 지금까지 행적을 산록하니 그 서문에 쓰기를 충절은 신하의 대보이며 옛 군자도 모든 국정이 문란해지면 바로잡도록 주선을 하였으니 진실한 충절은 한번 잃으면 신하의도리가 아니라 하였으며 이제 망국대부로서 고려국의 회포를 이기지 못하나 후세 사람으로서 신하가 되어두 마음을 품은 자는 부끄럽게 여겨왔다. 공의 뜻을 시로써 나타내기를 ‘나라는 인간이 무사한 사람으로서 지하에 가서도 죄 있는 신하가 될 것인가 만일 이제 새 나라에 나가 벼슬을 한다면 후세에 그 욕이 내 몸에 미쳐오는 것을 어찌하리오’ 하였다. 또한 아들에게 벼슬을 하지 말라는 경계 시에서 ‘너도 또한 고려의 신하로서 어찌 새 임금을 섬길 것인가 만일 신하로서 그 도리를 안다면 전왕의 은혜를 잊지 못하리라 하였다. 황익성공이 벼슬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갈 때 고시를 써서 중하기를 그대는 청운을 타고 가는데 나는 청산을 바라보며 돌아가도다. 구름과 산이 이를 좇아 이별하니 눈물이 옷깃을 적시도다‘라 하였고 이태조께서 벼슬길에 나오라고 여러번 부르니 글로써 나타내기를 위로는 고려 왕씨를 저버릴 수 없고 아래로는 정몽주를 저버릴 수 없으니 죽지 못함이 부끄러울 뿐이라 거절하였다.그 뒤 영영 은거하여 조용한 일생을 마치니 묘는 광주 금당산 정랑동 자좌에 있으며 부인은 광산이씨이니 장령 언장의 딸이며 묘는 쌍봉하였다. 세 아들 가운데 유련은 판윤이요 유달은 진사요 유통은 부사이다. 판윤의 자 유는 진사요 임도 진사이며 인은 부사이다. 가만히 돌아 보건데 정시랑 홍경이 유업을 서술한 글에서 말하기를 맹씨는 조선 국초로부터 이미 관직에 나가 벼슬을 하였고 공씨는 비로소 중종 때에 와서 학식과 문벌이 높아 규장각 홍문관 선원관의 벼슬에 올랐으며 주씨는 비로소 정조 때에 이르러 운막이 나타나 빛을 보게 되어 보첩이 증광되었는데 어찌하여 이천의 후손은 고려가 망하자 초야에 묻혀 벼슬을 아니 하셨는지! 후손들은 이를 깊이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 당시 정씨는 선조의 말씀대로 벼슬을 하지 말라는 훈계를 굳게 지켜 조선 오백년에 그 훌륭한 공적이 나타나지 않고 감추어져 흔적이 없어졌으니 이는 오직 정씨 뿐이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버리고 이조에 나가 벼슬을 했었다면 정씨가문은 대성하였을 것이다.선생의 고풍위절이 겸지하여 대현의 후예가 틀림없으며 이 뒷날 그 훌륭한 공적과 행적이 크게 나타나 반드시 밝게 빛나는 그날이 꼭 있을 것이다. 오래 전부터 선조들의 문집을 간행하여 이를 세상에 널리 알렸으면 정씨 가문이 더욱 밝게 대창 하였으련만 은거생활로 초야에 묻혀 그 빛을 잃게 되었으니 오직 마음에 개탄할 일이나 건천선생께서 남긴 유문이라도 오래도록 소중히 간직하게 되었으니 이를 세상에 널리 간행하여 친신 또는 세록신들이 그 문집을 읽고 정씨 가문을 알게 되었더라면 과연 충절은 신하의 대보로서 진실로 그 충절을 한 번 잃으면 신하의 도리가 아니라고 느끼게 되었을 것이며 ‘긍작유죄신 기나욕급신’과 그 ‘여역여조신 하가사신군’과 그 ‘상불부왕씨 하부정모씨’라 말씀하신 것을 보면 충절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후예들에게 꼭 전하고자 함이다. 이제 공의 모든 사실을 신도비에 낱낱이 새겨 후인으로 하여금 이를 보고 느끼도록 함이니 이미 비석이 갖추어져 정생 병현이 그 문중 어른의 명을 받아 비에 새기도록 대현의 후예가 이를 부탁하니 감히 늙었으나 이를 사양하지 못하노라.이천선생은 전치 못한 성리학을 후세에 전하여 어두웠던 당시의 후인들을 밝은 세상으로 인도하여 깨우쳐 주었으니 그 뒷날 그 광화가 우리나라에 까지 미쳐왔으며 선조들의 뜻을 받들어 큰 덕을 쌓아 삼년상을 홀로 행하고 가훈으로 불교를 배척하니 정포은과 길야은은 동지로서 금지된 대궐에 출입하고 국란과 국정의 어지러움에 상심하니 감추려했던 눈물이 문득 가슴에 적시도다.처음부터 은거생활로 돌아와 송도개경을 바라보며 시로써 모든 뜻을 나타내어 아들에게 벼슬을 하지 말라는 경계를 하였으나 죽지 못함이 부끄러울 뿐이며 두문불출 은거로서 자취를 감추어 버리니 위로는 충절을 저버릴 수 없고 아래로는 친교의 도의를 저버릴 수 없었으나 오직 만세의 윤상이 깊이 뿌리내려 영원히 빛나리라. 금당산 정랑동에서 공이 평생을 조용히 마치시니 고산같이 우러러보며 스스로 고개가숙여지도다.1916년 병진 8월 기우만이 짓고 중등 하남 이천사 한림원 오경박사 정광인이 전서를 쓰고 십팔세 손 남진과 의진이 글씨를 쓰다.
    2018-06-13 | NO.89
  • 절부광산김씨실행지비
    광주시 북구 용두동 1044-1(거상마을 내)1900년 전후이 절부광산김씨실행지비(節婦光山金氏實行之碑)는 젊어서 남편과 사별한 후 유복자를 낳아서 어렵게 살았으나 타인의 모범이 되어 세웠다. 후석 오준선(後石 吳駿善;1851~1931)이 쓰다.
    2018-11-13 | NO.88
  • 정경구-남곡거사정공효행실적비
    광주시 서구 벽진동 마산마을 입구 1954년이 남곡거사정공효행실적비(南谷居士鄭公孝行實蹟碑)는 서창입구에서 서창동주민센터 방향으로 가는 도로 왼편에 있다. 계사년에 충주 박승주가 글을 지어 세웠다. 이름은 경구(庚九)이다. 철종(재위 1849~1863) 을묘(1855)~ 병진(1856) 연간에 나이 4~5세에 연달아 상을 당하였으나 극진히 상을 치렀다는 내용으로 보인다.2019.1.8. 수정
    2018-10-26 | NO.87
  • 정경렬공유허비
    광주시 동구 동명로14번길 19-4 옛 경렬사 터(동명동)이 정경렬공유허비(鄭景烈公遺墟碑)는 광주 두방면(斗坊面)의 고비명(古碑名)이다. 원촌리(院村里)에 있다. 현 동구 동명동이다. (조선지지자료)
    2018-07-03 | NO.86
  • 정구신도비
    광주시 북구 탑골길 35(장등동) 사성재(思誠齋)이 정구신도비(鄭球神道碑)는 장등동 장등마을에 있다. 기우만이 찬했다.
    2018-12-01 | NO.85
  • 정엄-효자광주정공엄정려
    남구 서서평길 26-4(양림동 157-1), 양림오거리에서 사직공원으로 가는 샛길광산정씨문중 정엄鄭淹의 정려로 1611년 건립되었으나 오랜 기간 닳아져 1975년에 재건했다. '양림동 개비'로 알려진 충견 석상도 함께 있어 더욱 의미가 깊다. 국가에서 1611년 정엄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정려이다. 이수는 종 모양에 변형운문을 조식하였다. 정려각 내에는 견석상이 1구 있다.효자 정엄은 명종 무오년(1558)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부승지 등을 지냈다. 평소 효성이 지극하여 모친 섬기기에 효성을 다하였고 모친이 병상에 눕게 되자 옷을 벗지 않고 모친을 돌보았으며, 상을 당하여서는 장례절차를 성대히 하였으나 모친의 죽음에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얼마 되지 않아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정엄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국가에서 정려를 세웠으나 세월이 흘러 정려각이 퇴락하여 1975년에 석조로 재건하였다.비신에는 「贈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兼弘文館提學 藝文官提學同知 經筵春秋館義禁府事五衛都摠管 世子左副賓行通政大夫承政院同副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知製 敎楊村鄭先生 旌閭碑」라고 쓰여 있다. 
    2018-06-13 | NO.84
  • 정지-경렬공 정지장군 사적비
    광주시 북구 경렬사길 46(망월동) 경열사1980년광주시 북구 경렬사길 46(망월동) 경열사1980년이 경렬공정지장군사적비(景烈公鄭地將軍事蹟碑)는 경열사에 있다.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글씨를 썼다. 민족의 전통이란 결코 하루아침에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오랜 역사를 거쳐서 되는 것이니 우리 해군 전통도 역시 그러하다.이미 삼국시대부터 高句麗와 百濟의 해군이 모두 다 강성했거니와 新羅에 있어서는 儒禮王 6年(289)부터 戰船을 건조했으며 眞平王 5年(583)에는 船府署를 두어 해군과 戰船을 관장했고 말엽에는 張保皐가 강대한 해군을 거느리고 동양 삼국을 제패했으며 高麗의 王建 太祖와 後百濟의 甄萱도 실상은 다 해군 지휘자들이었다.그랬던 것이 李氏王朝 시대로 들어온 뒤에 차츰 文弱에 기울어져서 壬辰亂 같은 큰 국난을 당했지마는 위대한 영웅 李忠武公이 일어나 해전 사상 역사적인 대승첩을 거두어 나라를 건져낼 수 있었거니와 그도 실상 오랜 해군 전통을 계승한 데서 큰 힘을 얻었던 것이다.그러면 李忠武公에게 이어진 우리의 해군 전통은 과연 무엇이었으며 그 전통의 산맥 속에 가장 우뚝 솟은 봉우리는 또한 누구였던가. 高麗 말엽 해군의 영도자 바다의 영웅 鄭地 장군이 바로 그이시다. 恭愍王 때 中原 대륙에서 元나라와 明나라의 세력이 서로 바뀔 무렵 그 틈을 타고 일어난 紅巾賊들이 大軍을 이끌고 침구해 들어왔고 또 元의 후예 納哈出과 女眞의 三善三介가 침구해 오기도 했으며 高麗의 王室이 부패해짐에 따라 恭愍王이 시해됨에까지 이르렀었다. 그러는 한편 무엇보다 가장 큰 나라의 걱정은 倭寇였던 것이니 倭寇란 日本 연해안 流浪民으로 對馬 壹岐를 근거로 한 해적들인데 우리는 식량과 물품으로 회유도 하고 또 武力으로 응징도 했으나 高宗 이후로 倭寇들의 무수한 침구와 약탈이 끊일 사이가 없더니 鄭地 장군이 그들을 섬멸함으로써 해군의 전통을 확립시켰던 것이다.鄭地 장군은 본관이 河東이요、高麗 忠穆王 3年(1347) 丁亥에 錦城山 榮山江의 정기를 타고 羅州에서 났으니 첫 이름은 准提요. 어려서부터 모습이 장대하고 史書들을 즐겨 읽어 大義를 통했으며 19세에 司馬 장원 20세에 文科 급제 28세에 中郞將이 되었다.恭愍王 마지막 23년 장군은 28세로 왕을 모신 速古赤로서 倭寇 평정 책을 올려 全羅道 按撫使가 되고 다시 이어 상소를 올리되 섬에서 생장한 자들과 水戰을 자원하는 자들로서 해군을 편성하여 五년만 훈련시키면 연해안을 맡기겠다 하였으나 실시되지는 못했었다.다음 해 禑王 元년에 倭寇 두목 藤經光을 죽이려다 실패한 뒤부터 倭寇들은 더 난폭해져서 禑王 3年 장군 31세 되던 해 여름 順天 樂安을 침구하므로 장군은 禮儀判書로서 順天道 兵馬使가 되어 그들을 무찌르고 겨울에도 목 베고 사로잡아 큰 전과를 거두었으며 이듬해에 倭寇들이 靈光 光州 등지를 침략하므로 그 뒤를 쫓았더니 적들이 玉果縣 彌羅寺로 들어가므로 불을 질러 모두 타죽게 했다. 36세 때 海都元帥가 되어 鎭浦로 들어온 적들을 소탕한 뒤에 戰船들을 새로 건조하여 왕으로부터 金帶와 白金 五十兩을 받았고 때마침 유행병으로 죽은 군사들을 모두 알뜰히 장사지내 주었으며 장군도 병에 걸리자 왕은 특별히 散騎 河忠國을 보내어 위로했다.禑王 9년 37세 때 적선 120여척이 慶尙道로 들어오자 合浦 元帥 柳曼殊가 급히 알리므로 장군은 戰船 47척을 이끌고 급히 蟾津에 이르렀더니 적들이 南海 觀音浦로 들어가 엿보는지라. 그러나 日氣不順으로 風雨가 尤甚하매 將軍은 곧 사람을 智異山神祠에 보내 기도를 올리자 바람 자고 비도 멎어 장군의 전투사상 최대의 격전 끝에 가장 통쾌한 대승첩을 거두고 海道都元帥 楊廣全羅慶尙江陵道 都指揮處置使로서 諸道에 戰船들을 건조하여 海寇를 남김없이 쓸어버리고 우리 해군의 위용을 자랑했던 것이다. 禑王 14년 42세 때 李成桂의 遼東 정벌에 같이 종군했다가 중도에서 回軍하자 倭寇들은 그 틈을 타서 南原까지 쳐들어오므로 장군은 그리로 달려가 58級을 목 베고 말 64필을 노획하니 사람들이 장군 아니었다면 3道 백성들이 모두 죽을 뻔했다고 칭송했었다.그러나 장군의 마지막 운명은 기구하여 昌王 元년 43세 때에 禑王을 복위시키려는 金佇 등과 관련되었다 하여 慶州로 귀양 갔었고 다시 李成桂를 반대한 尹彝 李初 등과 연계되어 淸州獄에 갇혔더니 하늘의 돌보심인지 큰 홍수가 나서 저절로 풀려나온 몸이 되었다.그 뒤 回軍한 공로로 2等錄券과 논 50結을 하사받고 석방되므로 光州 別業으로 물러나있었는데 判開城府事로 召命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被召不赴) 향년 45세로 세상을 여의니 恭讓王 3年(1391)10月 15日이었고 光州市 北區 淸玉洞(望月洞)에 禮葬되었다.李朝 太宗 2年 壬午에 景烈이라는 謚號가 下賜되고 墓域 環山 15里와 祭田 五結이 賜牌地로 내려졌다. 장군은 실로 한 시대의 인물이나 또한 문중의 인물만이 아니요 겨레 전체의 영원한 인물이다. 장군의 영전에 삼가 찬송을 바친다.文武를 겸하시고 지혜 용맹 갖추시니.한때의 인물이리까 역사의 영웅이외다.戰艦을 만드시고 해군을 기르시어전통을 세워 주시니 바다의 영웅이외다.사나운 도둑 떼들 장군이 무찌르시니그 은혜 잊으오리까 겨레의 영웅이외다.자기 한 몸 돌보 잖고 나라만을 위하시니진실로 우러러 받들 거룩한 영웅이외다.시대가 바뀌어도 그 정신 빛나시니우리들 가슴마다에 깊이 새길 영웅이외다.장군은 이같이 우리 해군 전통의 초석이 된 역사적 인물이었건마는 뒷사람들이 높이 받들 줄 모르다가 仁祖 32년(1644)에야 3道 선비들이 全南 光州에 景烈祠를 창설하고 장군을 제사 모시더니 高宗 8년(1871)에 大院君의 서원 폐쇄령에 의하여 철훼되었고 뒤에 羅州 老安面 金安里에 사당을 옮겨 모시고 제사를 받들어 왔다.그러다 1974년 봄에 사단법인 鄭地 장군 유적보존회를 창립하고 1977년에 사당 중건에 착공하여 1980년에 준공함과 동시에 光州市 望月洞 장군의 묘소를 우러러보는 곳에 이 사적비를 세우며 거액의 국비와 지방비로써 보조해 주신 정부 당국에 감사를 드린다.後學 文學博士 鷺山 李 殷 相 짓고、 一中 金 忠 顯 씀1980년 12월 일後孫 周 永、 進 基 삼가 세움<추기>경렬공정지장군사적비는 경남 남해에 또 하나가 있다. 이 비는 정지장군유적보존회와 임진성기념사업회, 남면문화재보호위원회의 감수를 받아 1977년 가을에 남해군 남면 상가리 579-1번지 임진성기념각 전정에 세워 보존 관리해 오던 중 기념각은 폐허가 되고 주위는 잡초에 묻혀있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당시 종친회장인 20대손 정인규씨께서 복원을 추진중 남해군과 협조하여 2004년 4월 하순 임진성 주변으로 옮겨 보존하게 되었다.
    2018-06-11 | NO.83
  • 정지장군예장석묘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산 176정지장군 예장석묘는 경열사내에 있다. 광주시 기념물 제2호이다.
    2018-06-11 | NO.82
  • 제주양사근처동복오씨정렬비
    광주시 북구 문흥동 995-4(느티나무공원 내)1970년이 제주양사근처동복오씨정렬비(濟州梁泗根妻同福吳氏貞烈碑)는 林海玉 쓰다.
    2018-11-12 | NO.81
  • 제주양씨충민공산숙신도비명
    광주시 광산구1819년濟州梁氏忠愍公山璹神道碑銘은 양산숙의 신도비로 풍산 홍양호가 찬했다.
    2018-12-02 | NO.80
  • 조선호정려각
    광주시 북구 서하로 48-25(용봉동) 광주시립민속박물관 오른편1884년이 조선호정려는 전남 승주군 송광면 대곡리 조선호(1812∼1870)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졌다.조선호는 부모의 병환 때 배설물을 맛보아 병세를 살폈고, 임종 때에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드려 잠시 연명케 하였을 만큼 효성이 지극하였다. 이러한 조선호의 효행이 혼 세상에 널리 퍼져 1883년(고종 20)에 동문교관 조봉대부(童蒙敎官 朝奉大夫)에 추증되었고, 1년 후 정려가 하사되었다. 1968년 4월에 중건되었던 이 정려는 주암댐 건설공사로 수몰되자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서 기증받아 1989년 10월에 이설 복원하였다.
    2018-11-12 | NO.79
  • 조아라-소심당 조아라 기념비
    광주시 남구 백서로 13, 수피아여자고등학교2008년1931년 수피아여학교를 졸업한 조아라는 여성 민주 인권화 운동에 실천적으로 앞장 서온 인물로 광주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였다.
    2018-06-20 | NO.78
  • 조언수-증병조참판조공언수비명
    광주시 광산구 명도동순의원종증병조참판조공언수비명殉義原從勳贈兵曹參判曺公彦壽碑銘은 월성 최영조가 짓다.1592년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의병으로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했다. 호남절의록에 올라 있다.창녕조씨삼강정려(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8호)에 충에 해당한다.
    2018-12-02 | NO.77
  • 조언수-창녕조씨삼강정려각
     광주시 광산구 용진로 219(북산동 450)1887년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8호창녕조씨삼강정려각(昌寧曺氏三綱旌閭閣)은 창녕조씨 일가 4대의 충, 효, 열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동한 조언수의 충, 그의 손자 조순악과 증손자 조후건의 효, 며느리 문화유씨의 열을 기리는 정려이다. 이 정려각은 1897년 <광무원정> 에 조정에서 정려가 내려져 1923년에 건립하였는데 그 안에는 충신과 효자, 열부의 현판이 그 사적과 함께 걸려있다.충신 조언수(1575~1592)는 1592년 임진왜란때 금산전투(錦山戰鬪)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했다.효자 조언수 손자 조무악은 부친 조성복이 젊어서 세상을 뜨자 과부인 모친 문화유씨를 정성껏 섬기고 가난한 살림중에도 단 한번도 심려를 끼치는 일이 없었다. 모친이 병석에 눕자 대변을 혀로 맛보아 병세를 알고 엄동설한에 물고기를 구해드리고 선약(仙藥)을 구해 간호해 드렸으나, 효험이 없어 별세를 하자 여막을 짓고 3년시묘(三年侍墓)하였다.열부 문화유씨는 남편이 병석에 눕자 가난한 살림에도 정성껏 간호했는데도 병세가 악화되어 손가락을 잘라 피를 공급하였으나 3일은 더 살고 세상을 뜨자 남편의 뒤를 따르려 하였지만 어린 두아들을 위해 수절하였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1923년 중수하였고 그 안에는 충신과 효사, 열부의 현판이 그 사적과 함께 걸려 있다. 일가의 삼강정려는 흔하지 않은 것으로 역사적 의미가 있고 건축적 측면에서도 정려 건축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임곡90번 버스를 타고 북성마을에 내리면 바로 만날 수 있다. 김윤식(1835~1922)의 『운양속집』 권3, 기(記), 창녕조씨 삼강 유적기〔昌寧曺氏三綱遺蹟記〕사람에게 삼강(三綱)이 있는 것은 하늘에 해와 달과 별의 삼광(三光)이 있는 것과 같다. 삼광이 어둡고 흐릿하면 천지가 막히고 만물이 질서를 잃는다. 삼강이 무너져 느슨해지면 사람의 기강이 문란해져서 모두 금수의 영역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러니 현명한 왕이 다스릴 때 반드시 인륜의 상도(常道)를 세우는 것을 급선무로 삼은 것은 참으로 까닭이 있는 것이다.호남 나주(羅州) 고을에 창녕 조씨(昌寧曺氏)의 삼강 유적(三綱遺蹟)이 있다. 나는 그 실기(實紀)를 읽은 적이 있는데, 한 가문 네 사람의 절개가 찬란하게 이어졌으니 얼마나 성대한가? 지난날 선조(宣祖) 임진왜란 당시, 송암(松庵) 조언수(曺彥壽) 공은 포의로서 떨치고 일어나서 대중을 고무시켜 군사를 모집했다. 나중에 조중봉(趙重峰) 선생과 함께 금산(錦山) 전투에서 순국하여, 포상으로 아경(亞卿)에 추증되고 곧 맹부(盟府)에 공훈이 실렸다. 공의 아들 참봉(參奉) 조성복(曺成福)의 부인인 숙부인(淑夫人)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남편이 병들자 손가락을 자르고 넓적다리를 베었으며, 남편이 죽자 맹세하여 스스로 절개를 지켰다. 자식을 가르쳐서 가정을 이루게 하고, 죽은 남편의 뜻을 이루었기에 정려(旌閭)의 포상을 받기에 이르렀다. 부인의 아들 통정(通政) 순악(舜岳)은 효성을 다하여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효행에 감응하여 물고기를 얻는 이적(異蹟)이 일어날 정도였기에 고을 사람들은 아직도 그 일을 칭송한다. 순악의 아들 후건(厚建) 또한 효로 이름났다. 삼 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는데, 호랑이가 와서 지켜주었다. 어사가 포상을 내려주십사 아뢰어준 덕에 특별히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조씨 집안에는 정려문이 이어져 백 년 동안이나 전해졌으며, 또한 향리의 모범이 되었다. 후에 무신년(1908, 융희1) 난리를 당하여 온 마을이 불타면서 정려문 또한 불속에 사라져 버리니, 종족과 향당이 모두 상심해하며 안타까워했다. 13년이 지난 경진년(1920)에 모여서, 옛 터에 누각을 세우고 잊지 않고자 하는 뜻을 내보이자고 계획하였다. 그해 가을, 공의 11세손 규완(圭浣)이 보따리를 짊어지고 상경하여 내게 글을 지어 기록해 달라고 부탁했으니, 그 일을 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병들고 늙어 오래도록 필연(筆硯)을 멀리해 왔었다. 그러나 이 일만은 윤상에 관계된 터라, 감히 늙고 병듦을 이유로 사양할 수 없기에, 마침내 그 일을 대략 기록하고서 가지고 돌아가 문미에 걸도록 한다.『雲養續集』 卷3, 記, 昌寧曺氏三綱遺蹟記人之有三綱。猶天之有三光也。三光晻翳則天地閉塞而萬物不得其序。三綱隳弛則人紀紊亂而胥淪於禽獸之域。是以明王之出治也。必以扶植倫常爲先務。良有以也。湖南羅州之鄕。有昌寧曺氏三綱遺蹟。余甞讀其實紀。一門四節。輝赫相承。何其盛哉。昔在宣廟龍蛇之變。松庵曺公諱彥壽奮起布韋。激衆募旅。後與趙重峰先生同殣於錦山之役。褒贈亞卿。勳載盟府。公之子參奉成福之婦淑夫人文化柳氏。夫病斫指刲股。夫死矢志自守。敎子成家。克卒亡夫之志。至蒙旌褒。夫人有子曰通政舜岳。竭誠奉母。致孝感得魚之異。鄕人至今稱之。舜岳之子厚建亦以孝聞。三年居墓。山君來護。因繡衣褒啓。特除童蒙敎官。以是曺氏之門。綽楔相望。傳至百年之久。而爲鄕閭之所矜式。後値戊申之擾。一村燒燬。綽楔亦入其中。宗族鄕黨。莫不傷惜。粤十有三年庚申。相謀建閣于遺墟。以志不忘之義。是歲秋。公之十一世孫圭浣裹足上京。謁余文以記之。盖重其事也。顧余癃耄。久謝筆硯。然惟事關彜倫。不敢以老病辭。遂畧記其事。使歸而揭之楣。
    2018-06-11 | NO.76
  • 주암나주오공유인함평이씨부부효선비
    광주시 광산구 명도동 가마마을이 주암나주오공유인함평이씨부부효선비
    2018-12-01 | NO.75
  • 광주광역시
  • 한국학호남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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