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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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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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송천묘역梁松川墓域
    광주광역시 광산구 동호동 32-2에 있는 조선 중기의 문신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의 묘. 1978년 9월 22일 광주광역시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었다. 양응정(1519~1581)의 자는 공섭(公燮), 호가 송천(松川)으로 본관이 濟州이며, 홍문 관 교리를 역임한 학포 양팽손(學圃 梁彭孫)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 가, 청요직을 두루 거쳐 성균관 대사성·대사간·이조참의에까지 올랐다. 때로 모함을 입 어 外職을 전전하기 여러 차례였으며, 후에 박산마을(光山區 博湖洞)로 낙향하여 후진 양성에 몰두하기도 하였다. 그의 훈도를 받은 제자들 중에는 송강 정철을 위시하여 옥 봉 백광훈(玉峰 白光勳)·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 등 훗날 이름을 날린 인물들이 많았다.송천은 문장에 앞서 경학을 익히고 심성을 함양할 것을 내세우던, 도학자로서의 풍모를 강하게 풍기던 선비였다. 그것은 문장으로 이름이 있는 문인 송강과 백광성(白光城)·홍 련(洪蓮) 등에게, ‘글로 헛이름을 얻어 비방거리가 되는 것은 儒者의 수치이니 행여 문 장가가 되려 애쓰지 말라’거나, 혹은 ‘窮理의 뿌리 없이 문장에 능한 자는 있을 수 없다’ 고 경계하였던 데서 알 수가 있다. 또한 자녀들에게, ‘크게는 三綱五常에서부터 작게는 一事一物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 자신에게 갖추어져 있으니, 修養의 길에는 男女의 다름 이 없다’면서, ‘忠信·愼獨·無自欺야말로 학문의 요체’이며, 朱子가 말한 대로 ‘모든 것은 忠과 孝의 밖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기도 하였다. 梁氏三綱門(광주시 기념물 제11호)에서 드러나듯이 훗날 임진왜란을 당하여 그의 자녀들이 忠·孝·烈로 이름을 떨 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송천의 그와 같은 가정에서부터의 교육이 있었기에 가 능한 일이었다고 하여 좋을 것이다.묘 앞에 민병승(閔丙承)이 찬한 神道碑가 서 있으며, 묘역의 산 아래에는 제각이 있다.
    2020-05-16 | NO.151
  • 양진여 양상기 의병장 묘역
    광주시 서구 매월동 산151-9(백마산)*양진여-양상기 의병장 묘역*양진여-의병장제주양공진여배밀양박씨지묘*양상기-의병장제주양공상기지묘
    2018-12-10 | NO.150
  • 엄이재유적비
    광주시 서구 용두동 산 79(봉산정사)유적비는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1855~1934)의 문하생인 충주인 송애松厓 박하형朴夏炯(1891~1971)이 글을 짓고 후학인 죽산인 송곡松谷 안규동安圭東(1907~1987)이 글씨를 썼다.
    2018-05-31 | NO.149
  • 열녀문화류씨기실비
    광주시 광산구 등임동 방해마을1987년이 열녀문화류씨기실비(烈女文化柳氏記實碑)는 평택임씨 문중에서 관리한다. 金永載가 찬했다.
    2018-12-01 | NO.148
  • 열녀숙부인추성전씨지려
    광주시 동구 운림동 5691937년이 열녀숙부인추성전씨지려(烈女淑夫人秋成田氏之閭)는  운림동 서산정씨지려瑞山邱氏之閭내에 있으며 정만재鄭萬在 정봉서비鄭鳳瑞碑와 나란히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정리중)
    2018-11-11 | NO.147
  • 열녀창녕조씨지비
    광주시 동구 선교동 444이 열녀창녕조씨지비는 탐진최씨4효2열각 앞에 있다.
    2018-11-30 | NO.146
  • 열부광산김씨정려 / 烈婦光山金氏旌閭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량동 지산리 1850년 문중에서 광산김씨의 열행을 기리고자 목조와가로 건립 1979년 중건
    2020-03-02 | NO.145
  • 열부김해김씨실적비
    광주시 광산구 삼거동 응유마을1955년이 열부김해김씨실적비(烈婦金海金氏實蹟碑)는 경주김씨 문중에서 관리한다. 宋光世가 찬했다.
    2018-12-01 | NO.144
  • 열부유인김씨행적비
    광주시 서구 눌재로 420(세하동)이 비는 서창한옥문화관 주차장 입구에 있다, 상산김씨商山金氏 전라도 병마절도사 김수정金守貞의 후손인 김채호金彩鎬가 산송山訟 사건으로 1905년 악한에게 피살된다. 그 부인 김씨(1871~1930)가 남편의 원수를 갚고 열부가 되기까지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그 부인은 삽봉 김세근 장군의 후손이다. 산송山訟은 현대인에게는 아주 낮선 말이다. 산과 관련된 소송인데 특히 묘지 소송을 말한다.
    2018-05-25 | NO.143
  • 열부천안전씨정려유허비
    광주시 동구 지원동(월남동) 녹동마을1974년이 열부천안전씨정려유허비(烈婦天安全氏旌閭遺墟碑)는  녹동마을 앞에 위치해있으며 입석과 함께 있다.
    2018-11-11 | NO.142
  • 열부흥성장씨행적비
    광주시 서구 서창동 산46-101986년김해김씨 열부각 열부흥성장씨 행적비는 서창동 백마교차로 사거리에서 서창주민센터방향으로 들어가는 입구 왼쪽에 있다. 구산재와 백마교 사이 산자락에 있다. 1986년에 세워진 것인데 빨간 벽돌로 사면 담장을 두르고 김해김씨 열부각이라는 석조물로 집을 만들었고 ‘열부흥성장씨행적비(烈婦興城張氏行蹟碑)’를 그 안에 세웠다.  이 비의 내용을 간추리면 흥성 장하동(張荷洞, 1871~1959)은 17세 때 삽봉 김세근의 8대손인 김기두(金琪斗)와 결혼하여 어린 남매를 둔 채 남편이 결혼 4년만에 병고에 눕자 그 후 5년 동안 온갖 고생으로 약을 댔으나 세상을 떠났다. 그 뒤로 남매를 돌보며 집안 일을 하여 세상을 뜨니 광주향교 유림들이 통문으로 열부 행적을 칭송하였다는 내용이다.
    2018-05-25 | NO.141
  • 영광김씨효열정려
    광주시 광산구 진곡동 89-27(백길마을)1921년영광김씨 효열정려는 박세방(朴世芳)의 부인 영광김씨의 효열행을 기리기 위해 1921년 골기와 팔작지붕건물(정사각형)로 세워졌다. 백길마을 어귀에 위치한다. 영광김씨는 어려서부터 이미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를 깨쳤고, 박세방과 혼인한 뒤에는 시부모와 남편을 극진히 섬겼다. 25세때 남편이 괴질에 걸리자 밤에는 병을 대신하기를 기원하였고 낮에는 의약을 구하는데 힘썼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뒤를 따르려 하였으나 시부모와 자식이 있어 마음을 돌려 시부모의 봉양에 힘썼다. 정려의 형태는 골기와 8작 지붕으로 사방으로 정사각형 형태의 건물로서 기둥에다 주두위에는 우실첨차와 용두를 조석하였다. 정려 내부에는 숙인영광김씨효열비(淑人靈光金氏孝烈碑)란 해서체의 제하에다 이면에는 효열부영광김씨기적비(孝烈婦靈光金氏記蹟碑)란 제하에 효열내용이 음각 되어 있다.조양 임인환이 짓고 쓰다.
    2018-11-11 | NO.140
  • 영사정 최공(최형한) 묘갈문 추기(永思亭崔公碣文追記)
    錦谷先生文集 卷之十四 / 墓碣송내희(宋來熙, 1791~1867) 정보15년~고종4년영사정 최공 묘갈문 추기(永思亭崔公碣文追記)송내희(宋來熙) 지음 — 『금곡선생문집』 권14 도암(陶菴) 선생(이재)은 사람을 논할 때 결코 가볍게 판단하지 않았다. 이번에 이 갈문(碣文, 묘비에 새긴 글)을 읽어보니, 간결하면서도 증거로 삼기에 충분하다. 이 글을 남긴 영사정 최공(永思亭 崔公)의 이름은 참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세상에는 수사만 요란하고 내용 없는 묘비 글을 남기는 이들이 있지만, 오히려 부끄러운 일일 뿐이다. 그중에서도 최공이 죽음에 이르게 된 경위에 관해 반복하여 상세히 논한 대목은 오직 돈신(惇信, 이재의 자) 선생의 신중하고 공정한 문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그런데 갈문이 완성된 뒤 다시 정원일기(政院日記)* 살펴보았더니,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었다.“정사년(丁巳年, 1497) 12월 6일, 장령 최형한이 직언으로 극간하다가 궁궐 문 밖으로 끌려 나가 죽었다.”또한 부제학 최명상(崔命相)이 지은 《경주최씨 명현록(名賢錄)》에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연산군 시절, 소인배들이 여러 현인들을 모함할 음모를 꾸미던 중, 최공은 대간의 직책으로 강직히 간언하였고, 9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다가 죽었다.”위 두 기록은 날짜까지 정확히 서로 일치한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최공의 죽음은 분명히 무오사화(1498) 이전의 일이며, 《무오당적(黨籍)》에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당시 소인배들이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 것이 이미 오래된 일이었다면, 무오사화 이전에도 직언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 인물이 있었던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또한 “음식을 먹지 않아 죽었다”는 표현은 곧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자결)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재가 남긴 갈문 속의 암시적인 문장들 역시 이제는 구체적 사실로 밝혀지게 된 것이다.만약 이 같은 진실을 후세의 어진 이들이 널리 문헌을 참고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이런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겠는가?지금 그 후손들이 뜻을 모아 이 기록을 묘비에 덧붙여 기록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기존 이재의 원문을 함부로 고칠 수는 없으므로, 그 아래쪽에 추기(追記)의 형태로 덧붙인다. 永思亭崔公碣文追記陶菴先生論人不苟。今觀此碣語。約而足徵。永思公其不朽矣。彼遊辭而謏墓者。適以羞之爾。最以致命一事。反覆詳論者。儘是惇信公正之筆矣。然碣文成後。更考政院日記。則書以丁巳十二月初六日。掌令 崔亨漢。以直言極諫。拿出闕門外而死。又副提學崔公命相所著慶州崔氏名賢錄。略曰。燕山時。少人輩搆誣諸賢。公以臺職論諫。不食九日而死。年月日。與政院記相符。若據此則公之死。果在戊午之先。不見於黨籍固宜。盖宵小醞釀之計。旣是夙搆。則安知無先於戊午。而有盡其言責之機關耶。不食而死。亦可認自盡之義。則前此微辭。幾箇闡發。苟非後承之賢。廣攷書籍。何以得此乎。今其子孫。合辭請補。而原文不敢擅易。略記其事實於下方如此。
    2025-05-26 | NO.139
  • 영춘나주오공두영효행비
    광주시 광산구 명도동 137-7(명곡마을)
    2018-11-11 | NO.138
  • 오병일-양암처사낙안오씨유적비
    광주시 서구 용두동 656-51982년이 양암처사낙안오씨유적비(養庵處士樂安吳氏遺蹟碑)는 현와 고광선의 문인인 오병일에 관한 비이다. 옆에는 양암거사유적비건립위원방명비가 함께 있다.
    2018-06-11 | NO.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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