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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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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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아당안동김공형근효행비
    광주시 북구 청풍동 209-5 청풍쉼터1974년청아당안동김공형근효행비(淸雅堂金衡根孝行碑)는 무등산 청풍쉼터에 있다. 金潤東 짓고 쓰다. 김형근의 자는 성범(聖範), 호는 청아당(淸雅堂)으로, 본관은 안동이다. 고려태사의 선평의 후예로 명문 귀족 출신이다.
    2018-10-22 | NO.61
  • 청주한씨 쌍효비각(쌍효각)
    광주시 남구 진월동 진제마을1862년 韓弼五, 韓弼龍 형제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命旌되어 청주 한씨 쌍효비(淸州韓氏雙孝碑)를 1864년에 건립했다.1979년 번역비를 옆에 건립 1995년 화순군 도곡면 천태산리로 이건청주한씨 문중에서 한필오韓弼五, 한필룡韓弼龍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862년에 命旌되어 1864년에 건립된 비석이다. 비명은 한정교가 썼으며, 비문 말미에는「大明崇禎後五周甲子三月曾孫 生員基佑竪」이란 글귀는 이 비석의 건립시기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한필오(1715~1789)와 한필룡은 형제 사이로서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1760년 부친상을 당하자 두 형제는 묘소에 시묘를 하여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머님이 노망을 하게 되었다. 두 형제는 어머님의 간호에 정성을 다하였는데 겨울철에 산비둘기 고기를 원하는지라 산천을 두루 헤메었으나 산비둘기를 구하지 못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산비둘기가 방으로 들어와 어머님의 소원을 풀어 주었다. 이는 두 형제의 효성에 하늘이 감동한 것이라 하여 동리 사람들의 치하를 받았다. 그러나 어머님의 임종에 이르러 두 형제는 손가락을 잘라 어머님의 입속에 피를 흘리면서 차도를 빌었으나 타계하자 상례를 맞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에 국가에서 1862년 에 정려를 명하여 1864년에 쌍효비를 세웠다.*2020.3.2. 수정
    2018-06-13 | NO.60
  • 청주한씨부인효열비
    청주한씨부인효열비(淸州韓氏夫人孝烈碑)는 광주시 광산구 신룡동 486-1 도로변에 있다.윤상원 열사 생가 입구에서 오남재 입구로 가는 길 오른편이다.원래 비석은 공부자 탄강 2487년(1936년) 전 참판 이병관(이병관)이 모성공회장을 맡아 찬하여  세웠는 데 비바람에 글씨가 거의 보이지 않게 되자 2001년 5월에 새로 건립했다. 재당질인 권오(權五)가 부지를 희사하고 한오(漢五)가 비석을 세웠다.
    2021-04-01 | NO.59
  • 청주한씨효열비
    광주시 광산구 신룡동 천동마을1890년 이 청주한씨효열비(청주한씨효열비)는 정매영씨 소유로 李炳觀이 찬했다. 임곡 지역이다.
    2018-12-01 | NO.58
  • 최봉거-탐진최공봉거효자비
    광주시 동구 선교동 4441948년이 탐진최공봉거효자비(耽津崔公鳳巨孝子碑)는 주남마을 도로변에 위치해 있다. 열녀창녕조씨지비烈女昌寧曺氏之碑와 함께 있다 건비 연대建碑年代는 단기4281년 무자戊子 2월로 보아 1948년에 해당된다.
    2018-11-11 | NO.57
  • 최사전묘지 (崔思全墓誌)
    최샤전묘지(崔思全墓誌)는 1140년(인종18 ) 의 것으로  국립광주박물관에 있다.국립광주박물관은 고려시대 명의로 불렸던 최사전 의원의 유물을 2011년 2월에 전시한 바 있다. 이 전시회는 무양서원(탐진 최씨)이 2009년 기증한 '최사전 묘지'로 고려시대 임금의 의원이었던 최사전(崔思全, 1067~1139)의 행적이 해서체(楷書體)로 기록되어 있다.또 최사전에 대해 관람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국립광주박물관은 최 의원이 당시 약을 조제했던 기관인 '상약국(尙藥局)'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보물 제1023호 청자음각운룡문 상약국 명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을 함께 전시했다.최사전 묘지는 탐진 최씨 문중이 일제강점기에 일본 동경대박물관으로 반환청원서를 제출해 1921년 반환받은 유물이다.한편 최사전은 1126년(인종4) 이자겸의 난을 평정한 공을 세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2023-07-17 | NO.56
  • 최언광-탐진최씨사효이열정려, 비
    광주시 동구 선교동 218-111774년이 탐진최씨사효이열정려(耽津崔氏四孝二烈旌閭)는 1774년 국가에서 사효일렬의 정려를 내려 산수동에 건립되었다가 도시개발에 의해 1917년 현지로 이건하면서 일렬을 추가하였다. 孝子 崔彦光, 孝子 崔世孝, 孝子 崔雄傑, 孝子 崔斗傑, 烈女 崔世孝의 처 咸豊李氏, 烈女 崔弘淳의 처 平山申氏등 四孝二烈의 정려비이다.건물은 정면 6간 측면1간의 일식기와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다듬 주초 위에 엔타시스식 원주기둥을 세웠고 겹처마로 되어있다. 참고: <鄉土史大系 孝烈行誌> 全羅南道, 1985효열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이하 정리중)書孝烈婦金氏張實蹟부충효열爲三綱而民生用彝倫也慰人有孝烈則可移而爲忠無孝烈不可以爲忠故有일於此삼綱皆可以描矣 人鮮能有 鄕人榮行而又有二人焉者則尤不可任其泯也歟今觀孝烈婦金氏張氏二夫人家狀則氏錄 絡後 紝不待姆敎 烈 等 有三之義年十九諦利川徐璘洙故判書孝0後事舅姑甘旨無闕癠而侍湯憂虜當不有其身逮其夫病救治百方凡藥餌椅忒靡不用極而竟至不淑之際以事親立後不絶杞事託而歿焉初欲自裁旋念亡夫之託在耳不敢忘-遵遺数而終能成立家道能繼夫後其子婦張氏籍沃城年十七爲徐相厚妻殿直咳後自入徐門事始如其姑之事其姑事夫若其姑之事其夫而昭今時裂。灌血廷數之命又其姑所無豈不益爲難者乎鳴庠世之論孝以水鯉慕雀爲責論烈以倉卒辦命爲難此則不知 钱爲孝死易生難之義者也今二夫人之孝烈00行爲難顧倫理斁傷之始姑婦而連世而趾之雖徐氏之家運甚替而道則有裨aj勝欽哉天日宜得苴處之典而芒芒長夜不知何日得見清明若因循而待則恐至湮沒使卓絶二夫人之行晦昧而不顯故其族聖鉉現洙欲爲不朽榧力國之俾朴斯文魯宣介於余然不朽人者實態其二婦之若節而亦感其二徐氏之心而書状後而歸之丙子閏月下澣 錦城 吳東洙 書
    2018-11-11 | NO.55
  • 최형한-사헌부장령 최공 신도비
    광주시 남구 지산재길 51이 사헌부장령최공신도비는 지산재 뒤에 있다. 영사정 주인인 최형한이다.
    2018-11-30 | NO.54
  • 최형한-영사정 최선생 묘갈추지
    광주시 남구 지산재길 51영사정최선생묘갈추지는 영사정 최형한의 비문이다.
    2018-11-30 | NO.53
  • 최형한-영사정 최선생 묘비
    광주시 남구 지산재길 51
    2018-12-17 | NO.52
  • 충노봉이귀인지비
    광주시 남구 구만산길 34(포충사)충노봉이귀인지비(忠奴鳳伊貴仁之碑)는 포충사에 있다.고경명의 집에서 일하던 노비 중에 봉이와 귀인이 주인을 따라 의병에 참여했다. 금산에서 사망한 고경명과 둘째아들 인후의 시신을 수습한 이가 이들이었고, 첫째아들 종후의 두 번째 거병에도 참가해 주인과 목숨을 함께 한 의인이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노비들을 기리는 비석이다.포충사 홍살문 앞에 있는 커다란 비석은 자연석 바위를 깍아 만든 볼품없는 형상이다. 하지만 이 비석에는  충노 봉이.귀인 지비(忠奴鳳伊貴仁之碑)라고 씌어 있다. 말 그대로 충성스런  노비들을 기리는 비석이다.  비석 앞에 제단이 설치 된 것으로 보아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이들은 고경명의 집에서 일하던 노비 중에 봉이(鳳伊)와 귀인(貴人)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이 둘은 주인은 따라 의병에 참여했던 인물들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은 60세의 노구로 광주에 모집한 의병 6천명을 이끌고 북상하여 전라도에 침공하려는 고바야가와 다다가게가 지휘하는 제 6군 12,000명과 금산에서 싸워 1592년 7월 9일 전사했다. 둘째아들 인후는 아버지 고경명과 같이 싸워 전사한다.이때 같이 참여하다  고경명과 둘째아들 고인후(高因厚 1561∼1592)의 시신을 수습한 이가 바로 이들이었다. 또한 첫째아들 종후(從厚, 1554 ~ 1593)의 두 번째 거병에도 참가해 맏아들 종후 또한 군사를 일으켜 복수의병장(復讐義兵將)으로서  진주성을 사수하기 위해 애를 썼으나, 9일 만에 진주성이 함락되자 의병장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 1537 ∼ 1593), 삼계(三溪) 최경회(崔慶會 1532 ~ 1593)를 따라 남강(南江)에 투신하여 순국(殉國)하였다. 이때 주인과 목숨을 함께 받친 의인들이었다.
    2018-06-11 | NO.51
  • 충민공전상의장군정려각유허비
    광주시 북구 화암동 산 239(충민사)1982년이 충민공전상의장군정려각유허비(忠愍公全尙毅將軍旌閭閣遺墟碑)는 충민사 부근 전상의 장군 예장석묘 입구인 광주광역시 북구 화암동 산 239에 세워져 있다. 충민공 전상의 장군의 충신정려각은 광주광역시 동구 지산동 화산마을에 세워졌으나 제 2 순환도로로 인해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대리석으로 제작하였고, 국한문혼용체로 음각되어 있다. 현재 천안김씨문중 소유이며, 비문은 양성인(陽城人) 이종일(李鍾日)이 지었고, 천안후인(天安后人) 김운령(金雲靈)이 썼다.비문 이 遺墟趾는 全尙毅 將軍의 忠臣旌閭閣이 建立되어 있던 곳이다. 全尙毅將軍은 西紀一六二七年 丁卯胡亂때 龜城府使로 安州城 싸움에서 最後까지 싸우다가 殉節하였다. 將軍의 字는 希元이요 號는 龜城으로서 本貫은 天安이다. 始祖 歡城君 聶의 四五世孫이며 天安府院君 樂의 一六世孫으로 容의 아들이다. 西紀一五七五年 二月 一七日 光州郡 陶泉面에서 태어나 一六0三年에 武科에 及第하고 內外官職을 두루 歷任하였다. 一六一七年七月 吳允謙과 같이 回答使로 日本에 건너가 壬辰倭亂때 붙들려간 一五0餘名의 同胞를 送還해 오는데 큰 功을 세우고 內禁衛預差로 奉職타가 一六一八年 八月에 禦侮將軍에 任命되었고 李适의 亂이 平定된 뒤 龜城府使로 左營將을 兼하였다. 一六二七年 一月一四日 淸나라 太宗이 三萬 大軍을 이끌고 義州에 侵入하니 南以興 金浚과 安州城을 防禦케 되었는데 將軍은 中營인 百祥樓에 陣을 치고 五日間 敵과 싸웠으나 勢窮力盡하여 最後까지 싸우다가 殉節하였다. 이로써 仁祖는 江華島로 世子는 全州로 避難할 수 있게 한 戰功으로 丁卯胡亂은 바로 收拾될 수 있었다. 亂이 平定된 뒤 二月 七日 兵曹判書에 追贈되고 七月 二六日 無等山 아래 平頭山에 禮葬하였다. 一六八日年 平安道 安州의 忠愍祠에 配享하고 一六八四年 八月에 忠臣 旌閭를 命하니 同年 十一月 이 터에 忠臣閣을 건립하게 되었다. 뒤에 光州의 景烈祠와 濟州의 橘林書院에 進享되었는데 一八六八年 祠宇는 毁撤되었고 이 곳 忠臣閣은 頹落되어 一九四六年 撤去하였다. 이에 將軍의 遺蹟을 保存하기 위하여 一九八二年에 社團法人 忠愍公 全尙毅將軍 遺蹟保存會를 建立 一次事業으로 이 곳을 길이 保存하고자 이 碑를 세우다. 西紀 一九八二年 八月 二八日 陽城人 李鍾日 撰 天安后人 全雲灵書 社團法人 忠愍公 全尙毅 將軍 遺蹟保存會理事 全相均 全永稷 會長 全富一 副會長 朴載龍 副會長 金孟鍾 理事 崔奇泳 理事 李承萬 理事 金雲鍾 理事 高在均 理事 金基東 理事 全東錫 理事 金琪鍾 監事 羅琪洙 監事 安秉湜 監事 全泰鍊 財務 全福燮 幹事 全善基 特志者 崔奇泳 特志者 全德成 特志者 全富一 特志者 全孟鍾 特志者 全雲鍾 特志者 全基東 特志者 全善漢 特志者 全昌燮 特志者 全蒙錫 特志者 全大鉉 特志者 全泰鍊 敷地提供者 全容萬
    2018-06-11 | NO.50
  • 충장공김덕령묘비
    광주시 북구 금곡동 10231975년김덕령 묘비는  충장사 내에 있다. 김남중이 글을 짓고 김상필이 글씨를 써서 1975년에 세웠다.
    2018-10-26 | NO.49
  • 충주박씨효열비각
    광주시 서구 벽진동 벽진마을1961년이 충주박씨효열비각(忠州朴氏孝烈碑閣)
    2018-12-01 | NO.48
  • 취병조형유허비
    광주광역시 광산구 비아안길23(도촌동) 조형어린이공원1873년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8호,  비각은 없으며 낮은 철제 난간으로 비를 보호하고 있다. 이 취병조형유허비(翠屛趙珩遺墟碑)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조형(1606∼1679)을 기리기 위해 그의 6세손인 광주목사(光州牧使) 조운한(趙雲漢)이 세운 것이다. 조형의 자는 군헌(君獻)이고 호는 취병(翠屛)이며, 본관은 풍양(豐壤)이고 승지 희보(希輔)의 아들이다. 이 비는 그 형식이 특이하다. 비신이 이수와 1석이며, 비좌는 별석으로 되어 있다. 전체 높이 95㎝, 너비 120㎝, 두께 28㎝이다. 비신에 비해 너비가 너무 넓어 일반적인 석비와는 구별되고 있다. 비문은 비신의 전면과 후면에 새겨져 있다. 여느 비석과 달리 전액이나 제명이 없어서 이채롭다. 전면에는 조형의 간략한 인적사항과 생년월일, 그리고 이곳이 그가 태어난 산실이 있던 자리라는 사실이 적혀 있다. 말미에는 당시 광주목사光州牧使였던 6세손 조운한趙雲漢(1739-?)이 계유년癸酉年에 비를 세웠음이 기록되어 있다. 후면 비문의 내용은 전면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서술한 것으로서, 후손들이 떠나버려 밭으로 변한 곳이 산실 자리임이 분명하기에 그곳에 비를 세워 기념한다고 하였다. 비문의 서체는 해서이다. 서자와 각자는 미상이다.비는 개석, 비신, 하대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석과 비신의 재질은 응회암이고, 하대석의 재질은 화강암이다.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개석과 비신이 별개의 돌이 아닌, 하나의 통돌로 다듬어져 특이하다. 비신의 형태 또한 세로보다 가로가 길어서 대단히 이례적이다. 비신의 상태는 양호하나 곳곳에 풍화와 지의류에 의한 손상이 드러난다. 하대석은 장대석을 짜맞추어 세 단으로 구성하였다. 각 단은 사각 평면인데, 위로 갈수록 폭이 줄어들고 있다. 각 단의 높이는 큰 차이 없이 비슷하되, 지면과 만나는 하단의 높이가 위의 두 단에 비해 조금 낮다. 하대석의 이러한 형태 또한 여느 비에서는 볼 수 없는 남다른 모습이다. 이수는 우진각 지붕 모양이며 용마루와 내림마루의 우동은 큼직하고 낙수면은 약간 경사져 있다. 비좌는 직사각형이며 2단을 이루고 있다.조형은 1626년(인조 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파방되고, 1630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대교를 거처 사국(史局)으로 옮겼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임금을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가 독전어사(督戰御史)가 되고, 이듬해 환도하여 병조좌랑이 되었다.1651년(효종 2)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와 보덕을 거쳐 승지가 되었다. 1655년 대사간이 되어 일본에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츠를 만나고 돌아왔으며 『부상일기(扶桑日記)』를 남겼다.1657년 도승지·대사간이 되었고 1659년 동지성균관사로 성균관 좨주 송준길(宋浚吉)과 사학규제(四學規制)를 마련하였으며, 예조참판이 되었다. 이듬해 경기감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형조판서가 되고 1661년(현종 2) 공조판서·대사헌·예조판서가 되었다.1663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와 판윤이 되었다. 이때 동대문 밖 금산(禁山)의 소나무 남벌사건에 관련되어 고신(告身)을 박탈당하였다.그 뒤 지의금부사·우참찬·공조판서·좌참찬·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에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하여 양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 풀려나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2023.07.17 수정
    2018-09-06 | NO.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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