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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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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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주한씨부인효열비
    청주한씨부인효열비(淸州韓氏夫人孝烈碑)는 광주시 광산구 신룡동 486-1 도로변에 있다.윤상원 열사 생가 입구에서 오남재 입구로 가는 길 오른편이다.원래 비석은 공부자 탄강 2487년(1936년) 전 참판 이병관(이병관)이 모성공회장을 맡아 찬하여  세웠는 데 비바람에 글씨가 거의 보이지 않게 되자 2001년 5월에 새로 건립했다. 재당질인 권오(權五)가 부지를 희사하고 한오(漢五)가 비석을 세웠다.
    2021-04-01 | NO.59
  • 청주한씨효열비
    광주시 광산구 신룡동 천동마을1890년 이 청주한씨효열비(청주한씨효열비)는 정매영씨 소유로 李炳觀이 찬했다. 임곡 지역이다.
    2018-12-01 | NO.58
  • 최봉거-탐진최공봉거효자비
    광주시 동구 선교동 4441948년이 탐진최공봉거효자비(耽津崔公鳳巨孝子碑)는 주남마을 도로변에 위치해 있다. 열녀창녕조씨지비烈女昌寧曺氏之碑와 함께 있다 건비 연대建碑年代는 단기4281년 무자戊子 2월로 보아 1948년에 해당된다.
    2018-11-11 | NO.57
  • 최사전묘지 (崔思全墓誌)
    최샤전묘지(崔思全墓誌)는 1140년(인종18 ) 의 것으로  국립광주박물관에 있다.국립광주박물관은 고려시대 명의로 불렸던 최사전 의원의 유물을 2011년 2월에 전시한 바 있다. 이 전시회는 무양서원(탐진 최씨)이 2009년 기증한 '최사전 묘지'로 고려시대 임금의 의원이었던 최사전(崔思全, 1067~1139)의 행적이 해서체(楷書體)로 기록되어 있다.또 최사전에 대해 관람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국립광주박물관은 최 의원이 당시 약을 조제했던 기관인 '상약국(尙藥局)'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보물 제1023호 청자음각운룡문 상약국 명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을 함께 전시했다.최사전 묘지는 탐진 최씨 문중이 일제강점기에 일본 동경대박물관으로 반환청원서를 제출해 1921년 반환받은 유물이다.한편 최사전은 1126년(인종4) 이자겸의 난을 평정한 공을 세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2023-07-17 | NO.56
  • 최언광-탐진최씨사효이열정려, 비
    광주시 동구 선교동 218-111774년이 탐진최씨사효이열정려(耽津崔氏四孝二烈旌閭)는 1774년 국가에서 사효일렬의 정려를 내려 산수동에 건립되었다가 도시개발에 의해 1917년 현지로 이건하면서 일렬을 추가하였다. 孝子 崔彦光, 孝子 崔世孝, 孝子 崔雄傑, 孝子 崔斗傑, 烈女 崔世孝의 처 咸豊李氏, 烈女 崔弘淳의 처 平山申氏등 四孝二烈의 정려비이다.건물은 정면 6간 측면1간의 일식기와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다듬 주초 위에 엔타시스식 원주기둥을 세웠고 겹처마로 되어있다. 참고: <鄉土史大系 孝烈行誌> 全羅南道, 1985효열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이하 정리중)書孝烈婦金氏張實蹟부충효열爲三綱而民生用彝倫也慰人有孝烈則可移而爲忠無孝烈不可以爲忠故有일於此삼綱皆可以描矣 人鮮能有 鄕人榮行而又有二人焉者則尤不可任其泯也歟今觀孝烈婦金氏張氏二夫人家狀則氏錄 絡後 紝不待姆敎 烈 等 有三之義年十九諦利川徐璘洙故判書孝0後事舅姑甘旨無闕癠而侍湯憂虜當不有其身逮其夫病救治百方凡藥餌椅忒靡不用極而竟至不淑之際以事親立後不絶杞事託而歿焉初欲自裁旋念亡夫之託在耳不敢忘-遵遺数而終能成立家道能繼夫後其子婦張氏籍沃城年十七爲徐相厚妻殿直咳後自入徐門事始如其姑之事其姑事夫若其姑之事其夫而昭今時裂。灌血廷數之命又其姑所無豈不益爲難者乎鳴庠世之論孝以水鯉慕雀爲責論烈以倉卒辦命爲難此則不知 钱爲孝死易生難之義者也今二夫人之孝烈00行爲難顧倫理斁傷之始姑婦而連世而趾之雖徐氏之家運甚替而道則有裨aj勝欽哉天日宜得苴處之典而芒芒長夜不知何日得見清明若因循而待則恐至湮沒使卓絶二夫人之行晦昧而不顯故其族聖鉉現洙欲爲不朽榧力國之俾朴斯文魯宣介於余然不朽人者實態其二婦之若節而亦感其二徐氏之心而書状後而歸之丙子閏月下澣 錦城 吳東洙 書
    2018-11-11 | NO.55
  • 최형한-사헌부장령 최공 신도비
    광주시 남구 지산재길 51이 사헌부장령최공신도비는 지산재 뒤에 있다. 영사정 주인인 최형한이다.
    2018-11-30 | NO.54
  • 최형한-영사정 최선생 묘갈추지
    광주시 남구 지산재길 51영사정최선생묘갈추지는 영사정 최형한의 비문이다.
    2018-11-30 | NO.53
  • 최형한-영사정 최선생 묘비
    광주시 남구 지산재길 51
    2018-12-17 | NO.52
  • 충노봉이귀인지비
    광주시 남구 구만산길 34(포충사)충노봉이귀인지비(忠奴鳳伊貴仁之碑)는 포충사에 있다.고경명의 집에서 일하던 노비 중에 봉이와 귀인이 주인을 따라 의병에 참여했다. 금산에서 사망한 고경명과 둘째아들 인후의 시신을 수습한 이가 이들이었고, 첫째아들 종후의 두 번째 거병에도 참가해 주인과 목숨을 함께 한 의인이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노비들을 기리는 비석이다.포충사 홍살문 앞에 있는 커다란 비석은 자연석 바위를 깍아 만든 볼품없는 형상이다. 하지만 이 비석에는  충노 봉이.귀인 지비(忠奴鳳伊貴仁之碑)라고 씌어 있다. 말 그대로 충성스런  노비들을 기리는 비석이다.  비석 앞에 제단이 설치 된 것으로 보아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이들은 고경명의 집에서 일하던 노비 중에 봉이(鳳伊)와 귀인(貴人)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이 둘은 주인은 따라 의병에 참여했던 인물들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은 60세의 노구로 광주에 모집한 의병 6천명을 이끌고 북상하여 전라도에 침공하려는 고바야가와 다다가게가 지휘하는 제 6군 12,000명과 금산에서 싸워 1592년 7월 9일 전사했다. 둘째아들 인후는 아버지 고경명과 같이 싸워 전사한다.이때 같이 참여하다  고경명과 둘째아들 고인후(高因厚 1561∼1592)의 시신을 수습한 이가 바로 이들이었다. 또한 첫째아들 종후(從厚, 1554 ~ 1593)의 두 번째 거병에도 참가해 맏아들 종후 또한 군사를 일으켜 복수의병장(復讐義兵將)으로서  진주성을 사수하기 위해 애를 썼으나, 9일 만에 진주성이 함락되자 의병장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 1537 ∼ 1593), 삼계(三溪) 최경회(崔慶會 1532 ~ 1593)를 따라 남강(南江)에 투신하여 순국(殉國)하였다. 이때 주인과 목숨을 함께 받친 의인들이었다.
    2018-06-11 | NO.51
  • 충민공전상의장군정려각유허비
    광주시 북구 화암동 산 239(충민사)1982년이 충민공전상의장군정려각유허비(忠愍公全尙毅將軍旌閭閣遺墟碑)는 충민사 부근 전상의 장군 예장석묘 입구인 광주광역시 북구 화암동 산 239에 세워져 있다. 충민공 전상의 장군의 충신정려각은 광주광역시 동구 지산동 화산마을에 세워졌으나 제 2 순환도로로 인해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대리석으로 제작하였고, 국한문혼용체로 음각되어 있다. 현재 천안김씨문중 소유이며, 비문은 양성인(陽城人) 이종일(李鍾日)이 지었고, 천안후인(天安后人) 김운령(金雲靈)이 썼다.비문 이 遺墟趾는 全尙毅 將軍의 忠臣旌閭閣이 建立되어 있던 곳이다. 全尙毅將軍은 西紀一六二七年 丁卯胡亂때 龜城府使로 安州城 싸움에서 最後까지 싸우다가 殉節하였다. 將軍의 字는 希元이요 號는 龜城으로서 本貫은 天安이다. 始祖 歡城君 聶의 四五世孫이며 天安府院君 樂의 一六世孫으로 容의 아들이다. 西紀一五七五年 二月 一七日 光州郡 陶泉面에서 태어나 一六0三年에 武科에 及第하고 內外官職을 두루 歷任하였다. 一六一七年七月 吳允謙과 같이 回答使로 日本에 건너가 壬辰倭亂때 붙들려간 一五0餘名의 同胞를 送還해 오는데 큰 功을 세우고 內禁衛預差로 奉職타가 一六一八年 八月에 禦侮將軍에 任命되었고 李适의 亂이 平定된 뒤 龜城府使로 左營將을 兼하였다. 一六二七年 一月一四日 淸나라 太宗이 三萬 大軍을 이끌고 義州에 侵入하니 南以興 金浚과 安州城을 防禦케 되었는데 將軍은 中營인 百祥樓에 陣을 치고 五日間 敵과 싸웠으나 勢窮力盡하여 最後까지 싸우다가 殉節하였다. 이로써 仁祖는 江華島로 世子는 全州로 避難할 수 있게 한 戰功으로 丁卯胡亂은 바로 收拾될 수 있었다. 亂이 平定된 뒤 二月 七日 兵曹判書에 追贈되고 七月 二六日 無等山 아래 平頭山에 禮葬하였다. 一六八日年 平安道 安州의 忠愍祠에 配享하고 一六八四年 八月에 忠臣 旌閭를 命하니 同年 十一月 이 터에 忠臣閣을 건립하게 되었다. 뒤에 光州의 景烈祠와 濟州의 橘林書院에 進享되었는데 一八六八年 祠宇는 毁撤되었고 이 곳 忠臣閣은 頹落되어 一九四六年 撤去하였다. 이에 將軍의 遺蹟을 保存하기 위하여 一九八二年에 社團法人 忠愍公 全尙毅將軍 遺蹟保存會를 建立 一次事業으로 이 곳을 길이 保存하고자 이 碑를 세우다. 西紀 一九八二年 八月 二八日 陽城人 李鍾日 撰 天安后人 全雲灵書 社團法人 忠愍公 全尙毅 將軍 遺蹟保存會理事 全相均 全永稷 會長 全富一 副會長 朴載龍 副會長 金孟鍾 理事 崔奇泳 理事 李承萬 理事 金雲鍾 理事 高在均 理事 金基東 理事 全東錫 理事 金琪鍾 監事 羅琪洙 監事 安秉湜 監事 全泰鍊 財務 全福燮 幹事 全善基 特志者 崔奇泳 特志者 全德成 特志者 全富一 特志者 全孟鍾 特志者 全雲鍾 特志者 全基東 特志者 全善漢 特志者 全昌燮 特志者 全蒙錫 特志者 全大鉉 特志者 全泰鍊 敷地提供者 全容萬
    2018-06-11 | NO.50
  • 충장공김덕령묘비
    광주시 북구 금곡동 10231975년김덕령 묘비는  충장사 내에 있다. 김남중이 글을 짓고 김상필이 글씨를 써서 1975년에 세웠다.
    2018-10-26 | NO.49
  • 충주박씨효열비각
    광주시 서구 벽진동 벽진마을1961년이 충주박씨효열비각(忠州朴氏孝烈碑閣)
    2018-12-01 | NO.48
  • 취병조형유허비
    광주광역시 광산구 비아안길23(도촌동) 조형어린이공원1873년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8호,  비각은 없으며 낮은 철제 난간으로 비를 보호하고 있다. 이 취병조형유허비(翠屛趙珩遺墟碑)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조형(1606∼1679)을 기리기 위해 그의 6세손인 광주목사(光州牧使) 조운한(趙雲漢)이 세운 것이다. 조형의 자는 군헌(君獻)이고 호는 취병(翠屛)이며, 본관은 풍양(豐壤)이고 승지 희보(希輔)의 아들이다. 이 비는 그 형식이 특이하다. 비신이 이수와 1석이며, 비좌는 별석으로 되어 있다. 전체 높이 95㎝, 너비 120㎝, 두께 28㎝이다. 비신에 비해 너비가 너무 넓어 일반적인 석비와는 구별되고 있다. 비문은 비신의 전면과 후면에 새겨져 있다. 여느 비석과 달리 전액이나 제명이 없어서 이채롭다. 전면에는 조형의 간략한 인적사항과 생년월일, 그리고 이곳이 그가 태어난 산실이 있던 자리라는 사실이 적혀 있다. 말미에는 당시 광주목사光州牧使였던 6세손 조운한趙雲漢(1739-?)이 계유년癸酉年에 비를 세웠음이 기록되어 있다. 후면 비문의 내용은 전면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서술한 것으로서, 후손들이 떠나버려 밭으로 변한 곳이 산실 자리임이 분명하기에 그곳에 비를 세워 기념한다고 하였다. 비문의 서체는 해서이다. 서자와 각자는 미상이다.비는 개석, 비신, 하대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석과 비신의 재질은 응회암이고, 하대석의 재질은 화강암이다.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개석과 비신이 별개의 돌이 아닌, 하나의 통돌로 다듬어져 특이하다. 비신의 형태 또한 세로보다 가로가 길어서 대단히 이례적이다. 비신의 상태는 양호하나 곳곳에 풍화와 지의류에 의한 손상이 드러난다. 하대석은 장대석을 짜맞추어 세 단으로 구성하였다. 각 단은 사각 평면인데, 위로 갈수록 폭이 줄어들고 있다. 각 단의 높이는 큰 차이 없이 비슷하되, 지면과 만나는 하단의 높이가 위의 두 단에 비해 조금 낮다. 하대석의 이러한 형태 또한 여느 비에서는 볼 수 없는 남다른 모습이다. 이수는 우진각 지붕 모양이며 용마루와 내림마루의 우동은 큼직하고 낙수면은 약간 경사져 있다. 비좌는 직사각형이며 2단을 이루고 있다.조형은 1626년(인조 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파방되고, 1630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대교를 거처 사국(史局)으로 옮겼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임금을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가 독전어사(督戰御史)가 되고, 이듬해 환도하여 병조좌랑이 되었다.1651년(효종 2)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와 보덕을 거쳐 승지가 되었다. 1655년 대사간이 되어 일본에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츠를 만나고 돌아왔으며 『부상일기(扶桑日記)』를 남겼다.1657년 도승지·대사간이 되었고 1659년 동지성균관사로 성균관 좨주 송준길(宋浚吉)과 사학규제(四學規制)를 마련하였으며, 예조참판이 되었다. 이듬해 경기감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형조판서가 되고 1661년(현종 2) 공조판서·대사헌·예조판서가 되었다.1663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와 판윤이 되었다. 이때 동대문 밖 금산(禁山)의 소나무 남벌사건에 관련되어 고신(告身)을 박탈당하였다.그 뒤 지의금부사·우참찬·공조판서·좌참찬·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에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하여 양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 풀려나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2023.07.17 수정
    2018-09-06 | NO.47
  •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 증(贈)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吏曹判書) 성공(成公) 묘지명
    갈암집 제25권 / 묘지명(墓誌銘)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성안의(1561~1629) 광주목사, 1611년(광해군 3)에 광주목사(光州牧使)가 되었으나, 소송 처리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이에 영천(榮川)으로 돌아가 13년 동안을 한거하면서 일사(逸士)와 교유하였다.공은 휘가 안의(安義)이고 자는 정보(精甫)이며, 성은 성씨(成氏)이고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고려 때 휘 송국(松國)이 태위(太尉)가 되어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 이르렀고, 본조에 들어와서는 휘 만용(萬庸)이 판도 판서(版圖判書), 보문각 태학사(寶文閣太學士)를 지냈다. 명공(名公)과 거경(巨卿)이 잇따라 나와 동남(東南) 지방의 망족(望族)이 되었다. 증조는 휘가 익동(翼仝)이고, 조는 휘가 윤(胤)이고, 부는 휘가 궤(几)이니, 모두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모(母)는 장연 노씨(長淵盧氏)이니, 호조 참의 휘 사영(士英)의 따님이다. 대가(大家)에서 태어나 덕(德) 있는 집안에 시집와서 아내의 역할과 어머니의 역할을 함에 있어 모두 그 도(道)를 얻었다.공은 어려서부터 영준하고 숙성하여, 겨우 이를 갈 나이에 모부인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때 선공이 외출하여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공이 즉시 뜰 가운데 표(表)를 세우고 달빛에 비치는 그림자를 측량하여 시각을 기록하니, 듣는 사람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구두(句讀)를 배움에 미쳐서는 눈으로 본 것은 곧 외웠고, 집이 가난했으나 독서를 좋아하여 이름 있는 이에게 가서 배웠다. 성장하여서는 한강(寒岡 정구(鄭逑)) 정 선생(鄭先生)의 문하에 가서 배웠는데, 정 선생이 매우 인정하고 중시하였다. 만력 19년 신묘(1591, 선조24)에 비로소 벼슬을 하였고, 이듬해 여름에 일본이 난을 일으키니, 공이 의병장 곽공 재우(郭公再祐)에게 가서 따랐다. 또 관찰사 백암(柏巖) 김공 륵(金公玏)의 막하(幕下)가 되니 백암공이 경도되어 허여하였고, 이때 공이 막 상처(喪妻)하니, 마침내 맞이하여 형의 손녀서(孫女壻)로 삼았다. 공이 이에 양친을 모시고 영천군(榮川郡)에서 처가살이를 하였고, 피난 나온 친척들이 공에게 의지하였다.갑오년(1594)에 교서관 부정자(校書館副正字)에서 봉상시 참봉(奉常寺參奉)으로 옮겼고, 정자(正字)와 저작(著作), 박사(博士)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봄에 규례에 따라 전적(典籍)에 올랐고, 여러 차례 옮겨 승문원 교검에 이르렀다. 가을에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뒤에 체차되어 예조의 낭관(郞官)이 되었다. 겨울에 관서(關西)의 좌막(佐幕)으로 나갔는데, 당시에 난리를 당하여 기무(機務)가 매우 많았지만 일마다 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병신년(1596) 겨울에 조정에 들어와 성균관 직강이 되었고, 이듬해 가을에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가 사간원 헌납으로 옮겼다. 또 이듬해 가을에 조정에서 정신(廷臣) 중에 위망(威望)이 있고 간국(幹局)이 있다고 일컬어지는 자를 차출하여 군량미를 공급하고 황정(荒政)을 검속(檢束)하게 하였는데, 공이 병조의 낭청으로서 영남 조도사(嶺南調度使)의 임무를 받아 시기 적절하게 일을 처리하여 그 자리에서 해결하는 것이 많았다. 이때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유 문충공(柳文忠公)이 영남(嶺南)에 개부(開府)하였는데 자주 세상을 구제할 재능이 있다고 공을 칭찬하였다. 이어 근친(覲親)하기 위해 휴가를 받았는데, 총독사(摠督使) 윤승훈(尹承勳)이 평소 공에게 유감을 가지고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관직을 비우고 직차(職次)를 이탈했다고 무고하여 드디어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일이 장차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었는데, 문충공이 치계(馳啓)한 데 힘입어 용서받게 되었다. 공이 풀려나온 뒤에 더욱 스스로 노력하여 군량미를 조달하고 기민을 구휼하여 군국(軍國)이 이에 힘입었다. 경자년(1600) 가을에 일을 마치고 조정에 돌아오니 성적(聲績)이 혁혁하였다. 시의(時議)가 장차 화요직(華要職)을 맡기려 하였는데, 공이 어버이가 늙었다는 이유로 걸군(乞郡)하여 외직으로 나가 영해 부사(寧海府使)가 되었다. 지친 백성들을 무마하고 학교를 널리 권장하여 정사를 한 지 4년 만에 온 경내가 치적을 칭송하였다.갑진년(1604) 가을에 어버이의 병이 있어 창녕에 돌아왔는데, 잇달아 내외간(內外艱)을 당하였다. 장사를 지낸 뒤에 분암(墳庵)을 지어 영모(永慕)라는 현판을 달아 놓고 슬퍼하고 돌보며 그리워하는 곳으로 삼았다. 거상(居喪)하는 여가에 고을 사람들의 자제를 가르쳐서 성취시킨 자가 많았다고 한다. 상을 마치고 나서 남원 부사(南原府使)에 제수되었는데, 그곳은 규모가 크고 일이 많아 평소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로 일컬어졌다.공이 폐단을 혁파하고 쇠잔한 백성을 소생시키며 결재를 지체시킴이 없었고, 퇴청(退廳)한 뒤에는 번번이 고을의 현자를 초대하여 강론하고 술 마시고 시를 지으며 즐기니, 암행 어사가 공장(功狀)을 올릴 때 뛰어난 치적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상이 총애하여 관작을 높여 주려 하였으나 그때 방해하는 자가 있어 그 일이 마침내 취소되었다.신해년(1611) 봄에 규례에 따라 광주목(光州牧)으로 옮겼는데, 공의 뒤를 이어 남원 부사가 된 자가 당시 재상의 뜻에 따라 공의 허물을 캐내려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광주 목사가 된 지 겨우 1년 만에 당로자(當路者)의 비위를 거슬러 파직되어 영천(榮川)으로 돌아왔다. 한가히 지내면서 심신을 수양한 지 13년이었는데, 자주 점잖고 덕 있는 선배들과 교유하고, 또 유인(幽人), 일사(逸士)와 더불어 즐거이 임천(林泉)에 모여 배회하며 유유자적하게 지냈다. 당시에 광해(光海)의 정치가 어지럽고 세도(世道)가 크게 무너졌는데, 공은 흔들리지도 않고 꺾이지도 않아 고을과 나라에서 존중받았고, 도(道)를 높이고 덕을 숭상하는 일에는 반드시 솔선하여 사림(士林)의 수창자(首倡者)가 되었으나, 집안의 자제들은 알지 못하게 하였다. 계해년(1623)에 반정(反正)하여 노성(老成)하고 현달(賢達)한 사람을 불러들였는데, 공은 사성(司成)으로서 상의원 정(尙衣院正)으로 옮겨졌고, 다시 봉상시 정(奉常寺正)으로 옮겨졌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반란으로 공이 어가(御駕)를 호위하여 공주(公州)로 갔고, 돌아와서는 호종한 공로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이어 제주 목사(濟州牧使)에 제수되었는데, 조정의 의론이 그가 늙은 것을 걱정하여 가지 않기를 바랐으나, 공이 말하기를, “신하의 의리는 어려움을 사양하지 않는 것이다.” 하고 즉시 떠나서 임지에 가서 어질고 관대한 정사가 많으니, 백성과 아전들이 사모하였다. 병인년(1626) 봄에 일로 인하여 파직되어 돌아왔다.숭정(崇禎) 무진년(1628, 인조6)에 서용(敍用)되어 서함(西銜)에 부직(付職)되었고, 곧이어 승정원 우부승지에 제수되었는데, 병으로 사양하고 부름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2월 모갑(某甲)에 집에서 고종(考終)하니, 향년 69세였다. 이해 모월 모일에 군(郡)의 동쪽에 있는 석현(石峴) 경향(庚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으니, 생전의 명(命)을 따른 것이다. 그 후 19년 뒤 정해년(1647)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서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고, 또 아들 이성(以性)이 영국 공신(寧國功臣)이 되었기 때문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세자좌빈객 오위도총부도총관(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世子左賓客五衛都摠府都摠管)에 추증되었다.공은 두 번 장가들었는데, 전부인(前夫人) 황씨(黃氏)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근(謹)의 따님이고, 후부인(後夫人) 김씨(金氏)는 호조 참판 계선(繼善)의 따님이다.5남 5녀를 두었는데, 장남 이침(以忱)은 어진 행실이 있었으나 일찍 죽었고, 지평(持平)에 증직되었으며, 차남은 이각(以恪)인데 전부인의 소생이다. 3남 이성(以性)은 화현직(華顯職)을 두루 역임하였고 자급은 통정대부이며, 청백리(淸白吏)로 저명하였다. 4남은 이념(以恬)이고, 5남은 이항(以恒)이다. 다섯 사위는 참봉 이억(李嶷), 사인 박료(朴炓)ㆍ이천표(李天標)ㆍ이문한(李文漢), 문과 급제(文科及第) 권도(權鍍)인데, 5녀는 모두 후부인의 소생이다. 지평이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창하(昌夏), 창리(昌李)이다. 이각이 4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응하(應夏), 경하(慶夏), 강하(康夏), 도하(度夏)이다. 통정(通政)이 5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 갑하(甲夏)는 진사이고, 석하(錫夏), 득하(得夏), 용하(用夏)이고, 문하(文夏)는 참봉이다. 이념이 4남을 두었는데, 명하(命夏), 정하(正夏), 시하(時夏)이고, 대하(大夏)는 생원이다. 이항은 아들이 없어 득하를 후사로 삼았다. 내외의 손, 증손, 현손을 합치면 100여 명이다.공은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효성스럽고, 형제와는 우애로웠으며, 집안의 식솔을 거느리고 빈객을 접할 때 정성과 신의로써 하여 속이지 않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또 남의 과실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들과 구차히 영합하려 하지 않았지만 남들이 사모하여 함께 사귀었다. 공은 관대하고 온후하며 외모가 준수하여 중인(衆人)들이 거인 장자(巨人長子)로 추대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박학하여 통달한 것이 많았고, 특히 심계(心計)를 잘하였다. 관리의 일을 가지고 결정함에 있어 남보다 뛰어났으나 대부분 백성을 사랑하고 옛 법을 지키는 것을 힘쓰고, 겉으로 엄하거나 심히 각박한 것을 능사로 여기지 않았다. 분수에 편안하여 스스로 만족하고, 영리를 도모하는 데 급급하지 않았다. 당시에 사우(師友)로 교류한 사람은 월천(月川 조목(趙穆)),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동계(桐溪 정온(鄭蘊)), 창석(蒼石 이준(李埈)) 등 여러 노선생이고, 사서(沙西) 전식(全湜)은 막역한 벗이었다. 공이 돌아가신 지 60여 년 뒤에 창녕 사람들이 부용당(芙蓉堂) 곁에 공을 제사 지내고 이공 장곤(李公長坤)과 병향(並享)하니, 이곳은 공이 평소에 강학하던 곳이다. 현일이 뒤늦게 태어나 공을 알지는 못하지만 공이 영해부(寧海府)의 수령을 맡았을 때 나의 왕부(王父) 참판공이 백성의 예로 공을 섬겼고 공이 매우 우애롭게 대해 주셨고, 나의 선인(先人) 형제가 또 공의 제자(諸子)에게 배워서 공의 행의(行義)에 대해 익히 듣고 즐겨 말하였기 때문에 내가 일찍이 전해 듣고 흠모하였었다. 지금 공의 손자 용하가 가첩(家牒)을 받들고 와서 묘지명을 써 달라고 하면서 선대의 교분을 가지고 거듭 요구하니, 의리상 사양할 수 없어 서(序)와 명(銘)을 쓴다.명은 다음과 같다.선비가 혹 덕은 넉넉한데 재주가 부족한 경우가 있고 / 士或德優而才歉또한 재능은 많은데 행실이 불완전한 경우도 있다 / 亦有多能而行不完그러므로 두 가지를 겸비하기가 / 故兼二者而有之자고로 어렵다고 하였다 / 自古以爲難오직 공은 이미 이 아름다운 덕이 있고 / 惟公旣有此德美또 그 재능이 어려운 시국을 구제하기에 충분하였다 / 又其才猷足以濟時艱그 평생에 세운 공을 돌이켜 보면 / 跡其平生所樹立어찌 이른바 선인 군자가 아니겠는가 / 豈所謂善人君子者邪아, 지위가 재능을 따라가지 못하니 / 吁嗟乎位不滿能그것이 명임을 어찌하랴 / 其如時與命何
    2022-04-29 | NO.46
  • 통정대부병조참의오상욱사적비
    광주시 광산구 명도동 가마마을이 通政大夫兵曹參議오상욱사적비
    2018-12-01 | NO.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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