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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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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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시원-양심당묘정비급유허비창립기적비
    광주시 남구 임암길11번길 73-1이 양심당묘정비급유허비창립기적비(養心堂廟庭碑及遺墟碑刱立紀蹟碑). 
    2018-06-11 | NO.106
  • 이시원-양심당이선생유적비
    광주시 남구 구만산길 34(원산동 535-1)2005년 1월이 양심당이선생유적비(養心堂李先生遺蹟碑)는 남구 이장동 출신의 양심당 이시원의 비석으로 안동 권희문이 찬하고 종후손 이병모가 글씨를 썼다. 예문관제학 이선제의 아들이다.
    2018-06-11 | NO.105
  • 이시원-양심당이선생유허비
    광주시 남구 원산동 952-3양심당이선생유허비(養心堂李先生遺墟碑)는 필문 이선제의 큰 아들인 양심당 이시원(李始元)의 유허비이다. 원산마을 입구 삼거리에 필문 이선제의 신도비는 왼편에, 양심당유허비는 오른편에 세워져 있다. 양심당은 아버지  필문의 시묘살이를 마친 후 서식처이자 후학자의 강학터로 지은 당호이기도 하다. 그는 이 마을 출신으로 일찍 과거에 올라, 홍문관제학, 예조참판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지금의 광주시 남구 원산동 뒷산 제청골에 양심당이 있었으나 전하지 않고, 현재 광주시 남구 원산동 구만산길 입구에 그의 유허비만 위치하고 있다. 또한 바로 그 뒤에 유적비도 함께 세워져 있다.
    2018-06-11 | NO.104
  • 이용헌-조선유민오산이공지비
    광주시 북구 오치동 956-8(오산정 내)1923년이 조선유민오산이공지비朝鮮遺民梧山李公之碑는 오산梧山 이용헌李龍憲의 묘비로  현와 고광선高光善이 짓고 종2품 가선대부 전 참판 이우명李愚明이 쓰다.  오산정 앞에 있었다. 오산정은 부친을 위해 아들인 송천松泉 이계익李啓翼이 지었다고 한다.현재 오산정과 이 묘비는 사라졌다. 제보를 받은 바에 따르면 이 비석은 현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봉명리 753번지 해림농원 부근에 있다. *2020.4.21. 수정
    2018-11-12 | NO.103
  • 이윤호-애국지사광산이공윤호공적비
    광주시 북구 삼각동 254-31968년이 애국지사광산이공윤호공적비(愛國志士光山李公允鎬功蹟碑)는 이윤호의 독립운동을 선양하는 비이다. 金善馹 짓고 李淇休 쓰다. 이윤호(1898∼1931)는 독립운동가이다.
    2018-11-13 | NO.102
  • 이조원-청심당이선생유허비(淸心堂李先生遺墟碑)
    광주시 남구 원산동 868-11957년청심당이선생유허비(淸心堂李先生遺墟碑)는 대촌사거리와 포충사 사이 도로변에 있다.청심당 이조원(李調元, 1433~1510)은 필문 이선제의 5형제 중 둘째 아들이다. 천품이 고아(高雅)한 그는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독학으로 학문이 대성하였다.  부친 필문의 학통을 이어 문장과 도학이 당세의 종사(宗師)라 추앙되었다.학행이 뛰어나 정헌대부 예조판서를 증직하였다. 현재 수암서원(秀巖書院) 오현당(五賢堂)에 배향하고 있다.이 비는 1957년 광주광역시 남구 대촌동 원산마을 대로변(포충사와 대촌사거리 사이)에 세워졌다. 현재 광산이씨 문중 소유이다. 비문은 서흥(瑞興) 김규태(⾦奎泰)가 지었다.비문 光州府南二十里有長者洞卽故淸心堂李先生諱調元杖屨所也先生光山之世而尙書僕射珣白之后慶昌君蓽門先生先齊之子也克守庭訓敎力於格致誠正之學  成宗朝擧遺逸歷正郞執義吏曺參議 轉至慶尙全羅兩道按廉使旌명於便蕃詣闕頌辭後値昏朝先生旣辭曰聞七十致仕未聞七十入仕臣寧墜身於銅柱豈可輔惡於瓊宮乎居喪廬墓終制 仍築室冢傍以寓畢生之慕而引進後學名碩多出于門佔畢金先生宴過贈詩曰巨族五元家一元遯跡嘉右文今世上母使玉音遐 今誦其詩慕其人槩想德學風節固己炳烺千秋矣十六世孫季休不忍遺址荒廢辨巨資竪穿碑乞銘於奎泰聞址之傍有柳名掛波亭者枯死復甦枝葉甚茂抑先生德蔭益長驗兆於此耶 吁亦奇矣爲之銘曰 惟心惟一 灑落淸通 炳幾割戀 芥視寓鍾 發揮家學 忠孝是崇 樂育英秀 繼開其功 爰有哲裔 追慕靡窮 盟珉丹刻 精彩勝空 慶延霽月 稱柳光風 儀型彷彿 陟降心翁 彊圉作噩春正月上元 瑞興 金奎泰 撰 丁酉三月 日 立 비문번역 광주부 남쪽 이십리에 장자동이 있다. 고 청심당 이조원 선생의 소요처이다. 선생은 광산이 세거지로 상서 복야 순백(珣白)의 후예이다. 경창군 필문 선생 선제의 아들이다. 격물치지 성정의 학문에 대한 가정교육을 잘 지켰다. 성종 조에 유일로 천거되어 정랑 집의 이조참의를 거처 경상 전라 양도의 안렴사를 전전하였다. 성대한 은전이 내려져 대궐에 나아가 송사하였다. 후에 혼조를 만나 선생이 이미 사직하며 말하기를 “나이 칠십에 관직을 그만둔다는 말은 들었지만 나이 칠십에 관리에 나아간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신이 차라리 동주에서 몸을 추락시킬지언정 어찌 궁에서 나쁜 보필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상을 당해 여막에서 복을 마치고 그대로 무덤 옆에 집을 짓고 죽을 때까지 사모하는 마음을 본받고자 하였다. 후학들을 끌어들여 석학들이 그의 문에서 나오게 되었다. 점필재 김 선생이 시를 주어 말하기를 “巨族五元家 一元遯跡嘉 右文今世上 母使玉音遐”라고 하였다. 지금 그의 시를 읽어보고 그 사람을 사모하니 대개 생각건대 덕학과 풍절은 진실로 천년동안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16세손 계휴(季休)가 차마 유지가 황폐해 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큰돈을 마련하여 비석을 세우는데 나에게 명문을 부탁하였다. 듣자니 유지의 곁에 괘고정이라는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말라죽었다가 다시 소생하여 가지와 잎이 무성해졌다고 한다. 대체 선생의 덕음이 여기에서 더욱 자라났음을 징험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 또한 기이한 일이로다. 다음과 같이 명을 한다. 정유년(1957) 1월 15일 서흥 김규태 씀
    2018-06-11 | NO.101
  • 이종-율원군사당유허비
    광주시 광산구 장덕동 1291-1(수완지구 근린5-4호 공원)율원군(栗元君) 이종(李宗) 사당(祠堂) 유허비(遺墟碑)<광주읍지>에 따르면 주(州)의 북쪽 30리의 거리인 완동(莞洞)에 있는 비석이다. 그의 후손인 긍의(兢儀) 기섭(起攝) 강호(康五) 등이 서로의 힘을 모아 설치(移建)하였다. 이들의 이러한 일은 오로지 옛날의 그 유지(遺志)를 그대로 묵힐 수 없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음기(陰記)가 있다.율원군사당유허비는 이재만가옥 동쪽 편에 있는데  율원군의 자는 유안(幼安), 호는 이력(履歷), 휘는 이종(1432~1476)으로 효령대군파이다. 시호는 양경(襄頃). 대군의 손자로 보성군 갑(갑)의 차남이다. 1467년 5월에 장용대장 대호군이 되었다. 원래는 광산구 장덕동 527에 있었으나 택지개발로 인해 광산구 장덕동 1291-1(수완지구 근린5-4호 공원)로 이재만 가옥(등록문화재 제146호)이 옮길 때 함께 이전했다.
    2018-06-18 | NO.100
  • 이한원-세심당이선생유적비
    광주시 남구 구만산길 34(원산동)1990년, 2005년세심당이선생유적비(洗心堂李先生遺蹟碑)는 1990년에 세웠다가  을축년에 훼손되어 2005년에 다시 건립했다. 호남인물지 광주편에는 자(字)는 청경(淸卿), 호(號)는 세심당(洗心堂), 본관은 광산(光山)고려 충숙왕 때 문과상서좌복야(文科尙書左僕射) 순백(珣白)의 5세손으로 조선 세종조에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증이조판서(贈吏曺判書) 선제(先齋)의 3남이다. 세종 32년에 생원을 지내고 단종 1년에 문과 장원으로 홍문관(弘文館)교리(校理)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이조참의(吏曺參議)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을 역임하고 정헌대부예조판서(正憲大夫禮曺判書)에 추증되었다.(광주지. 광산군지. 능주읍지)옛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지금 비문은 더 간략하다.부군의 휘(諱)는 한원(翰元)이요, 자(字)는 청경(淸卿)이요, 호(號)는 세심당(洗心堂)이니 그 선계(先系)는 신라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후예(后裔)이다. 고려 현종조(顯宗朝)에 휘(諱) 종금(宗金)이 거란을 토벌한 훈공(勳功)으로 군(君)에 봉(封)하니 광산이씨(光山李氏)가 실(實)로 이 때에 비롯되었다. 왕실계통(王室系統)으로 현관대작(顯官大爵)이 계계승승(繼繼承承)하여 울연(蔚然)히 동방(東方)의 거족(巨族)이 되었다. 휘(諱) 순백(珣白)에 이르러 고려 충숙왕조(忠肅王朝)에 영남(嶺南)의 걸출(傑出)한 선비로서 문과(文科)에 등제(登第)하여 한림원(翰林院) 학사(學士)·상서좌복야(尙書佐僕射)를 역임하였고 경신년(庚申年)에 충숙왕이 토번(吐蕃 티베트)에 유찬(流竄)되자 오직 공(公)이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원(元)나라에 글을 보내서 누대(累代)의 정의(情誼)를 극진히 진언(陳言)하여 드디어 풀려나게 되니 충숙왕이 이로써 녹훈(錄勳)하여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封)하고 충장(忠莊)의 시호(諡號)를 내렸으니 바로 중시조(中始祖)가 되신다.자(子)에 휘(諱) 기(奇)는 중현대부(中顯大夫) 단양부령(丹陽府令)을 지내고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증직(贈職)되었으니 공(公)의 고조(高祖)이고, 증조(曾祖)의 휘(諱)는 홍길(弘吉)이요, 호(號)는 퇴은(退隱)이니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인(文人)으로 벼슬은 밀직제학(密直提學)·개성윤(開城尹)·상호군(上護軍)을 지냈다.조(祖)의 휘(諱)는 일영(日暎)이니 장흥도호부사(長興都護府使)를 지내고 호남의 석학(碩學)으로 여지승람(與地勝覽)에 실려 있으며, 고(考)의 휘(諱)는 선제(先齊)요, 호(號)는 필문(蓽門)이니 경학(經學)에 널리 통하여 원근(遠近)에서 모두 선생으로 존숭(尊崇)하였다.세종(世宗) 기해년(己亥年)에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에 발탁(拔擢)되어 계묘년(癸卯年)에 사관(史官)·수찬(修撰)·검토관(檢討官)에 배수(拜授)되고, 임술년(壬戌)年)에 집현전(集賢殿) 직제학(直提學)·병조(兵曹)·예조참의(禮曹參議)·강원도 관찰사(觀察使)를 지냈으며, 무진년(戊辰年)에 하정사(賀正使)로 명(明)나라에 들어갔다.돌아와서 다시 공호조참판(工戶曹參判)을 거쳐 문종 경오년(庚午年)에 예문관(藝文館) 제학(提學)·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좌부빈객(左副賓客)·경창부윤(慶昌府尹)에 배수(拜授)되었으며, 왕명(王命)을 받고 고려사·고려사 절요(節要)·태종실록(太宗實錄) 편찬(編纂)에 참여하니 임금이 그 상모(狀貌)를 그려서 어소(御所)의 병풍(屛風) 뒤에 붙였고, 순조(純祖) 경진년(庚辰年)에 강진 수암서원(秀巖書院)에 봉향(奉享)하였다.비는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보성선씨(寶城宣氏) 절도사(節度使) 중길(仲吉)의 여(女)로 5 남(男)을 두었으니 모두 출중(出衆)한 재지(才智)와 덕행(德行)을 갖추었으며, 공은 제 3자(子)로 세종 병지년(丙辰年) 3 월 20 일에 태어났다.공(公)은 어려서부터 뛰어남이 범상(凡常)하지 않았고 천성(天性)으로 타고난 효우(孝友)와 탁월한 예지(叡智)는 일찍이 향리(鄕里)에 널리 알려졌다. 일찍이 부형(父兄)의 엄(嚴)한 가르침을 받고, 또 점필제(?畢齊 김종직) 문하(文下)에서 성리학(性理學)을 탐구(探究)하여 엄하게 스스로 자기 몸을 닦는 방법을 세우니 선생이 일찍이 이르기를 능히 대학의 덕문(德門)에 들어가고, 능히 중용(中庸)의 도(道)를 닦는 자는 오직 청경(淸卿) 한 사람이라고 하였다.단종 계유년(癸酉年)에 문과에 장원(狀元)하여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제수(除授)되고 갑술년(甲戌年)에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를 거쳐 을해년(乙亥年)에 이조참의(吏曹參議)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였다.얼마 후에 병을 칭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오로지 학문만을 닦고 당시의 명유(名儒)들과 교유하며 때로는 혹 한가하면 동산을 배회하며 시냇가에서 바람을 쐬고 소영(嘯詠)하면서 심회(心懷)를 화창하게 펴고 흉중(胸中)을 깨끗이 씻으니 그 수연(愁然)한 의태(儀態)와 강의(剛毅 굳셀 의)한 기상(氣象)은 사람들이 감히 그 한계를 엿볼 수 없었다.중씨(仲氏)가 마음으로 유독 사랑하여 공(公)의 자(字)를 청경(淸卿)이라 지어주고 그 당호(堂號)를 세심당(洗心堂)이라 이름하니 또한 5 형제가 화락하게 지냈던 정경을 엿볼 수 있다.성종조(成宗朝) 갑진년(甲辰年)에 조정에서 홍문관(弘文館) 제학(提學)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중종조(中宗朝) 정묘(丁卯年) 10 월 2 일에 정침(正寢)에서 돌아가시니 뒤에 정헌대부(正憲大夫)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증직(贈職)되고 당시 사자(祠字)에 배향하자는 의훈이 있었으나 결과를 보지 못하였다.배(配)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창녕조씨(昌寧曺氏)로 유한정정(幽閑靜貞)한 덕행을 갖추어 능히 부군(夫君)을 승순(承順)하니 사람들이 세상에서 드문 여사(女師)라 일컬었다.공의 묘는 창평(昌平) 도두원(道頭院) 갑좌원(甲坐原)이라고 이르나 임진난으로 인하여 실전(失傳)되고 만산동(萬山洞)에 소재한 군수공(郡守公)의 묘상(墓上)에 제단(祭壇)을 모셨다. 오호라! 공은 첨품(天稟)이 매우 고매하고 기자(氣字)가 유연하며 학문은 부사(父師)의 연원(淵源)이 있고 덕행은 형제간에 화순하는 지정(至情)이 있었다. 안으로 그 심덕(心德)은 너그럽고 넓으며, 밖으로 그 행실은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사람들을 대하고 사물을 처리함에 조금도 막히는 바가 없었으니 거의 평생을 천시(天時)에 따르고 명의(名義)에 처(處)하는 군자(君子)였다.4남(男)을 두었으니 장남(長男) 지선(止善)은 생원이요, 차남(次男) 창선(彰善)은 진사(進士)요, 삼남 삼선(三善)은 문과(文科)로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통례원(通禮院) 상례(相禮)·홍문관(弘文館) 제학(提學) 등을 역임하였고, 사남 사선(思善)은 문과(文科)로 현감(縣監)을 지냈다.손(孫)에 염(廉)과 노최련(盧崔連)의 처(妻)는 장자의 소생(所生)이요, 공우(公佑)·공좌(公佐)와 김윤신(金允信)의 처(妻)는 차자의 소생(所生)이요, 공건(公建) 생원 교수(敎授)와 공검(公儉) 승의랑(承議郞)과 이량(李良)의 처는 3 자의 소생이며, 연종(延終), 이원량(李元良)의 처와 이윤수(李允粹)의 처는 계자(季子) 소생이다. 이 밖에 자손들은 사승(史乘)과 보첩(譜牒)에 찬연(燦然)하니 여기에 모두다 기록하지 않는다. (중간 생략)                산 높고 물 깊어 철인(哲人)이 태어나니                 청풍(淸風)과 밝은 달 그 덕이 아름답네.                높은 뜻 빼어나 세상에 우뚝하고                덕교(德敎)는 천인(天人)을 꿰뚫어 무궁하리. -세심당 묘지명 중에서
    2018-06-11 | NO.99
  • 이홍길-퇴은 이홍길 신도비
    광주시 남구 원산동필문 이선제의 부친인 퇴은退隱 이홍길李弘吉 신도비퇴은 이홍길(1324~1406)은 고려 말의 문신으로 초명은 계방桂芳. 호는 퇴은退隱. 본관은 광산光山. 밀직부사기의 아들로 이장동 출신이다. 정몽주의 문인으로 학업에 탁월하고 시문에 밝았으며, 역리에 통달하여 공양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제학과 개성윤을 역임하고 상호군이 되었다. 시국의 어지러움을 알고 있던 차 1388년(우왕 14)에 이성계가 왕명으로 중국 명나라를 치러 가다가 압록강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쳐들어와 왕을 내쫓고 최영을 유배시킨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학문을 벗 삼아 도리를 밝혔다.고려가 망하고 조선에서 누차 관직을 높여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절계를 지켰다. 항상 선악화복을 모든 자질에게 일깨워 가르쳤다. 이때 상을 당하여서 당시 백일 탈상의 고려 풍속을 독단으로 주자의 가례를 본받아 삼년상을 치루니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여 이 고장에서도 이 풍속을 따르기 시작 하는 계기가 되었다. 뒤에 가선대부 예조참판에 증직 되었다. 2019.1.8. 수정
    2018-12-17 | NO.98
  • 일휴당선생최공정려중수기 日休堂先生崔公旌閭重修記
    정의림 일신재집 권14鄭義林(1845~1910) 《日新齋集》日休堂先生崔公旌閭重修記昔在龍蛇之變 伏節死義 前後相望 而其磊磊落落 如青天白日輝映於天下 膾炙於百世 未有如三壮士之爲尤盛也日休堂崔公即三壯士之一 後人爲之棹楔於綾 俎豆於晉盖綾是杖屨之鄉 而晋是殉節之地也 所以寓追幕不㤀之心者 靡有間焉 壬辰秋 晉之士謀修祠字屬斯文成福閠全柱一河龍辰來湖南牧議 因過綾 見旌閭頹敝慨然曰 此行本爲祠宇計 而今旌閭如此 豈重修祠宇而不修旌閭乎 遂停鞭開橐 聚材募工 不幾日而一新之嗚乎 先生所以扶植綱常 倡勵名敎者 其功可以與天壤俱敞非一區棹楔所能輕重 然興物寓情 不可無所 則今日之役亦豈可已者耶 後之人 苟舆斯文同志 繼以修之無失其時 則此屋亦將與先生不朽 竊有望焉 * 일휴당日休堂 최경회崔慶會(1532~1593)조선 중기의 문신. 1567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영해군수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이 되어 금산, 무주 등지에서 왜병과 싸워 크게 이겼다. 이듬해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승진했으나 6월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9주야를 싸우다가 전사했다.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잠정리에 있는 삼충각은 을묘왜변 때 전라남도 해남 지방에 침입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조현 장군과 임진왜란 때 진주성 2자전투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충의공 최경회 장군과 문홍헌 장군 세 충신의 애국 충정을 추모하기 위하여 1685년 능주향교 유림들이 3동의 정려를 건립한 것으로 1985년 2월 25일 전라남도기념물 제77호로 지정되었다.
    2020-06-11 | NO.97
  • 장렬사유적비
    광주시 북구 효령동 636(우곡마을)1957년장렬사유적비(壯烈祠遺蹟碑)는 광주광역시 북구 효령동 우곡마을 입구 대로변에 있다. 金亨在 짓고 具哲祐 쓰다이 비는 1957년 광주광역시 북구 효령동 우곡마을 입구 큰길가에 세워 놓은 유적비이다. 장렬사는 1868년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06년 유림들에 의해 현재의 광주 두암동에 위치하여 김유신 장군 등을 배향하고 있는데 처음 장렬사가 있던 곳에 이 비를 세워 놓았다. 비문 앞에는 '장렬사유적비(壯烈祠遺跡碑)'로 되어 있는데, 장열사유허비로 통용되어 사용하고 있음을 이 비의 소유자인 장열사유적보존회를 통해 알 수 있었다.<광주읍지>에는 장렬사(壯烈祠) 유허비(遺墟碑)라 했다.후손(後孫) 김기주(金基柱)가 이 비를 세워 좌찬성(左贊成) 완산(完山) 이용원(李容元)의 음기(陰記)가 있다.
    2018-06-11 | NO.96
  • 장령 최공의 묘갈명(최형한)
    陶菴先生集 卷三十一 / 墓碣[一]이재(李縡, 1680~1746) 숙종6년~영조22년장령 최공의 묘갈명이재(李縡)가 짓다 ― 『도암선생문집』 권31, 「묘갈(一)」   옛날 연산군 시대에는 사화(士禍)가 극심하여, 한때의 현인과 군자들이 무차별하게 제거되고 베어졌으니,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지금까지도 그 일을 생각하면 참으로 통탄할 만하다.나는 예전에 호남 출신 유생들과 교류하며, 신참봉 응순(辛參奉 應純)이 편찬한 자료를 읽은 적이 있다. 그 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장령 최형한(掌令 崔亨漢)은 경주(慶州) 사람으로, 생원 최영원(生員 永源)의 둘째 아들이다. 연산군이 무도하고 방탕하던 시절, 그는 직언을 감히 올리고 궁궐 아래에서 명을 기다리다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분이 바로 그 사람이다.”나는 최공이 시대를 잘못 만나 충정을 품고 억울하게 죽은 것을 마음 아프게 여긴다. 하지만 당시 실제 사정을 가장 정확히 기록한 것은 《무오당적(戊午黨籍)》인데, 거기에도 최공에 대한 내용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혹시 그가 죽은 일이 무오사화 이전의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 점은 단정할 수 없다.최씨 집안의 가승(家乘, 족보)은 병화(兵火)로 모두 소실되어, 선배 문인들의 글 속에 일부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다.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최공은 성화 경자년(1480)에 진사가 되었고, 그로부터 4년 뒤인 계묘년(1483)에 문과에 급제하였다.이후 부모를 차례로 여의고, 복상을 마친 뒤 관원 추천으로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었으며, 사신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돌아와서는 옥과현감에 제수되었고, 이어 영암군수로 부임하였다가, 다시 조정으로 들어와 장령(掌令)이 되었다.이것이 최공의 관력(官歷)이다. 옥과현감으로 부임할 당시, 조정에서는 그의 하향을 안타까워하였다. 이때 탁영 김일손(金馹孫)이 ‘송최옥과서(送崔玉果序)’를 지어 보냈고, 거기서도 그의 문학이 뛰어나고 사람들의 존중을 받았다고 칭송하였다.최공은 광주에 세거하였으며, 고을 서쪽 건지산(巾之山) 자락에 조상의 묘가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집과 겨우 한 길(1리) 떨어진 곳에 정자를 짓고 ‘영사(永思)’라 이름 붙였으며, 《성용재기(成慵齋記)》에는 그의 효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그는 한 시대의 문인·관료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그러나 유독 죽음에 이르게 된 사연에 대해 믿을 만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아쉽다. 아, 옛사람들은 임금에게 간언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물러나거나, 직위 아래에서 죽음을 택하곤 하였다. 혹은 분노와 울분으로 뜻을 펴지 못해 자결로 그 뜻을 드러내기도 하였다.최공은 물러나지도 못했으니, 그의 죽음은 이 두 경우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올린 직언의 내용이나 죽음의 구체적 방식(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약을 복용했는지 등)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이런 일은 마땅히 국사 편찬자가 상세히 기록해야 할 일이며, 후세 사람들이 이를 마땅히 알아야 한다.그러나 후대에서 알든 모르든, 그것이 최공의 진실한 삶의 가치에 무슨 손상이 있겠는가?   掌令崔公墓碣 往在燕山之世。士禍罔極。一時賢人君子。芟刈斬伐。殆不可勝記。至今思之。可爲於邑。余從湖南士友。得辛參奉應純所爲輯錄者讀之。有曰掌令崔亨漢。貫慶州。生員永源之第二子也。燕山荒淫無度。乃敢抗直。待命闕下。遂自盡焉。公卽其人也。余竊悼公遭時之不幸。懷忠掩抑而死。然當時事實。莫詳於戊午黨籍。而公則無少槪見。豈公之死。在於戊午之先歟。是未敢知也。崔氏家乘。盡逸於兵燹。惟得於先輩文字者。略有可据。蓋公成化庚子進士。越四年癸卯及第。連喪二親。服闋始由館薦拜司憲府監察。充書狀朝燕。比還出監玉果縣。旋授靈巖郡守。入爲掌令。是公履歷。而其赴玉果也。朝廷咸惜其去。濯纓金公馹孫作序以將之。謂公文學優贍。引重甚盛。公世居光州。州之西巾之山。親墓在焉。去家纔一里。公作亭於其側。名曰永思。成慵齋俔爲記文。稱道其孝。公之見推於一代名士大夫者如此。而獨恨夫致命一事。無足以考信者。嗚呼。古之人諫於其君。而不聽則去。否則死於職下。又往往憂憤鬱塞。無以見其志。則寧引决以自快焉。公旣不能去。則其死也。固不出於斯二者矣。然其抗直之辭。不可得以詳。而况所謂自盡者。或引敺或仰藥。其事不一。則不知公所處。又果如何也。是則國史氏必有大書特書者。後之人當自知之。然知不知。於公亦何加損焉。公字倬卿。其先自麗朝政丞雞林府院君光位始。其後孫潞中領郞將。郞將之子仲濟縣監。輯錄所稱生員。其子也。公外祖曰生員陰城朴繼陽。公娶靈光金氏。郞將孝本之女。三男三女。男長彥漴生進兩試。次彥泓進士。次彥冲生員。女爲進士宋驌,參奉丁需,參奉張俔妻。彥漴男松年文科縣監。彥泓男栢年部將。春年參奉。彥冲男應期,應世,應時。張壻之子以吉司諫。三房子孫甚蕃。而俱以儒業承家云。公之墓亦在巾之山。八世孫進士洛及沃。來請樹隧之文。余謂公之事迹。固微而不章。而乃其心則蓋所謂天理民彝之不可泯者。理必終顯於世。盍少遲之。洛作而言曰。雖然。願且得子之言以眎諸後也。余不能辭。銘曰。我聞濯纓。節行之士。餘事文章。闊步高視。而獨於公。引重若是。聲氣之同。孰疑其死。百世之後。請徵國史。
    2025-05-26 | NO.95
  • 장흥고씨삼강문 / 長興高氏三綱門
    광주광역시 광산구 대촌 갑촌리 압촌동 마을 입구1595년 임진왜란 공신인 고경명 일가의 忠孝烈行의 뜻을 기리고자 유림들의 천거로 선조가 命旌, 문중에서 목조와가로 건립조선 중기의 문관·의병장인 고경명 일가삼강문옆에 문중 제각인 追遠閣이 있음長興 / 高敬命長興 / 高從厚長興 / 高因厚長興 / 高氏長興 / 高傳金光山 / 鄭氏
    2020-03-02 | NO.94
  • 전부일장군효행비
    광주시 남구 임암동 562-6, 임정마을1970년남구 임정마을 입구 임정마을 복지회관 옆에 천안전씨 문중에서 세웠다.전부일 장군은 20세기 초 일제의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이 지역 출신의 장군이다. 장군은 비문 내용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국방경비대에 자원 입대하여 군 복무 중에도 효행이 지극하여 많은 사람의 귀감이 되기도 하였으며, 충효를 겸비한 사람이었다. 장군의 효행비는 임정마을 입구에 위치해 있는데, 소유 및 관리는 천안전씨 문중에서 하고 있으며 건립시기는 1970년에 해당된다. 전부일(1924~2004)은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여 박정희 4공화국 때 초대 병무청장을 지냈다. 이후 1976~1980년 유신정우회 9, 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비문의 원문내용은 다음과 같다.서석산 자락 금당산 앞 임정 마을에 하늘이 내린 효자가 있어 지방선비들이 비를 세워 그 효행을 찬양하니 이 비의 주인공이 바로 전부일 장군이다. 장군의 본관은 천안으로 광주목사인 구생의 후손 방은의 제3자이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재주가 영특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가세가 궁핍하여 밭을 갈고 땔나무를 해 어버이를 봉양할 제 순종하여 어기는 일이 없었고,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건강을 보살피는 도리에 극진하였으니 장군의 타고난 효행은 옛날 왕상과맹종의 효도에 비기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왜정의 강제 징병으로 군에 입대하여 만주에서 복무 중 부친상을당했다는 비보를 들었지만 달려 올 수가 없었다. 땅을 치고 하늘을 부르며 곡을 하였는가 하면 손가락에 피를 흘려 성공보은(成功報恩)이라는 네 글자를 써서 영전에 올리도록 하였다.8·15 광복을 만나 고향에 돌아와 홀어머니를 효성으로 봉양하였으며 부친 묘소를 성묘하는 데 비바람을 피하지 않고 3년을 하루같이 하니 인근 모두가 듣고 칭찬하였다. 그 뒤 어머니의 승낙을 받아 국방경비대에 자원 입대하여 가정에 들어와서는 효도를 하고 부대에서는 충성하라는 교훈을 마음깊이 뼈에 새겼기에 빛나는 전공을 세웠으며 벼슬은 계속 승진되어 육군중장으로 국방부 차관보의 요직을 거치면서도 고향에 돌아와서는 언제나 노모를 등에 업고 부친의 묘 앞에 나아가 성묘를 하니 부모 남녀노소가 바라보고 감단하여 효자를 낳은 어머니요 충신을 낳은 어머니라고 하며 장군의 어머니를 부러워하였다.모친상을 당하여서는 예절에 의해 장례를 마치고 삭망 때마다 영전에서 녹음해 둔 어머니 생전의 음성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3년상을 마친 뒤에도 어머니 영정을 군에 군무실에서까지 모시면서 나가고 들어올 때마다 아뢰어 죽은 어머니를 살아있는 어머니처럼 섬겼고 고향에 돌아올 때는 반드시 부모님 묘소를 성묘한 뒤 마을 어른들을 찾아 뵙고 반찬대금을 제공하니 온 마을이 장군의 효행에 감동을 받았다.아~ 아름답도다. 장군의 효행이여, 순종하는 마음으로 부모님 뜻을 받들었고, 헌신하여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으니, 장군이야말로 가히 츙효를 겸했다고 하겠다. 부모의 은혜란 하늘과 같아서, 다 갚을 수 없는 것인데, 오늘날 자식들은 오히려 불효가 허다하니, 이 비를 바라보고 뉘우침이 있었으면 한다.고을 선비들이 장군의 효행을 이상과 같이 대략 비에 새겨 포양을 하고 아울러 이 세상 모든 자식에게 어버이 섬기는 도리를 일깨워 주며 권장하는 바이다.1970년 8월 건립추진위원회 짓고, 전면 제자 최한영 쓰고, 후면 비문 이병춘 쓰다.
    2018-06-14 | NO.93
  • 전상의 장군 예장석묘(묘비)
    광주시 북구 화암동 산239전상의장군예장석묘(全尙毅將軍禮葬石墓)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전상의(1575∼1627)의 장군의 묘소이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3호이다. . 장군은 선조 36년(1603)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첫 벼슬로 내외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인조 3년(1625)에는 구성부사로서 좌영장을 겸하였다. 광해군 9년(1617) 오윤겸과 함께 회답사(回答使)로 일본에 건너가 임진왜란 때 끌려간 동포 1500여 명을 귀국시키는 공을 세웠다. 또한 인조 5년(1627)에 후금이 인조의 친명정책을 구실삼아 3만 대군으로 침략하자 안주성 싸움에서 분전하였다. 그러나 구원병이 오지 않자 모든 장병과 함께 죽기를 각오하고 누각 위에 올라 싸우다 53세의 나이로 전사하였다. 난이 끝난 후 자헌대부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관직이 높여졌으며, 숙종 10년(1684)에는 안주의 충민사에 헌종 15년(1849)에는 광주의 경렬사와 제주의 귤림서원에 배향되었다. 현재 묘역에는 장군과 정부인 풍천 임씨 및 광산 김씨가 합장되어 있으며, 묘 아랫부분에는 둘레석이 둘러져 있다. 묘 앞에는 1857년에 세운 묘비가 있고, 묘역 근처에는 유적보존회에서 1979년에 세운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다.
    2018-07-02 | NO.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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