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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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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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시원-양심당이선생유적비
    광주시 남구 구만산길 34(원산동 535-1)2005년 1월이 양심당이선생유적비(養心堂李先生遺蹟碑)는 남구 이장동 출신의 양심당 이시원의 비석으로 안동 권희문이 찬하고 종후손 이병모가 글씨를 썼다. 예문관제학 이선제의 아들이다.
    2018-06-11 | NO.104
  • 이시원-양심당이선생유허비
    광주시 남구 원산동 952-3양심당이선생유허비(養心堂李先生遺墟碑)는 필문 이선제의 큰 아들인 양심당 이시원(李始元)의 유허비이다. 원산마을 입구 삼거리에 필문 이선제의 신도비는 왼편에, 양심당유허비는 오른편에 세워져 있다. 양심당은 아버지  필문의 시묘살이를 마친 후 서식처이자 후학자의 강학터로 지은 당호이기도 하다. 그는 이 마을 출신으로 일찍 과거에 올라, 홍문관제학, 예조참판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지금의 광주시 남구 원산동 뒷산 제청골에 양심당이 있었으나 전하지 않고, 현재 광주시 남구 원산동 구만산길 입구에 그의 유허비만 위치하고 있다. 또한 바로 그 뒤에 유적비도 함께 세워져 있다.
    2018-06-11 | NO.103
  • 이용헌-조선유민오산이공지비
    광주시 북구 오치동 956-8(오산정 내)1923년이 조선유민오산이공지비朝鮮遺民梧山李公之碑는 오산梧山 이용헌李龍憲의 묘비로  현와 고광선高光善이 짓고 종2품 가선대부 전 참판 이우명李愚明이 쓰다.  오산정 앞에 있었다. 오산정은 부친을 위해 아들인 송천松泉 이계익李啓翼이 지었다고 한다.현재 오산정과 이 묘비는 사라졌다. 제보를 받은 바에 따르면 이 비석은 현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봉명리 753번지 해림농원 부근에 있다. *2020.4.21. 수정
    2018-11-12 | NO.102
  • 이윤호-애국지사광산이공윤호공적비
    광주시 북구 삼각동 254-31968년이 애국지사광산이공윤호공적비(愛國志士光山李公允鎬功蹟碑)는 이윤호의 독립운동을 선양하는 비이다. 金善馹 짓고 李淇休 쓰다. 이윤호(1898∼1931)는 독립운동가이다.
    2018-11-13 | NO.101
  • 이조원-청심당이선생유허비(淸心堂李先生遺墟碑)
    광주시 남구 원산동 868-11957년청심당이선생유허비(淸心堂李先生遺墟碑)는 대촌사거리와 포충사 사이 도로변에 있다.청심당 이조원(李調元, 1433~1510)은 필문 이선제의 5형제 중 둘째 아들이다. 천품이 고아(高雅)한 그는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독학으로 학문이 대성하였다.  부친 필문의 학통을 이어 문장과 도학이 당세의 종사(宗師)라 추앙되었다.학행이 뛰어나 정헌대부 예조판서를 증직하였다. 현재 수암서원(秀巖書院) 오현당(五賢堂)에 배향하고 있다.이 비는 1957년 광주광역시 남구 대촌동 원산마을 대로변(포충사와 대촌사거리 사이)에 세워졌다. 현재 광산이씨 문중 소유이다. 비문은 서흥(瑞興) 김규태(⾦奎泰)가 지었다.비문 光州府南二十里有長者洞卽故淸心堂李先生諱調元杖屨所也先生光山之世而尙書僕射珣白之后慶昌君蓽門先生先齊之子也克守庭訓敎力於格致誠正之學  成宗朝擧遺逸歷正郞執義吏曺參議 轉至慶尙全羅兩道按廉使旌명於便蕃詣闕頌辭後値昏朝先生旣辭曰聞七十致仕未聞七十入仕臣寧墜身於銅柱豈可輔惡於瓊宮乎居喪廬墓終制 仍築室冢傍以寓畢生之慕而引進後學名碩多出于門佔畢金先生宴過贈詩曰巨族五元家一元遯跡嘉右文今世上母使玉音遐 今誦其詩慕其人槩想德學風節固己炳烺千秋矣十六世孫季休不忍遺址荒廢辨巨資竪穿碑乞銘於奎泰聞址之傍有柳名掛波亭者枯死復甦枝葉甚茂抑先生德蔭益長驗兆於此耶 吁亦奇矣爲之銘曰 惟心惟一 灑落淸通 炳幾割戀 芥視寓鍾 發揮家學 忠孝是崇 樂育英秀 繼開其功 爰有哲裔 追慕靡窮 盟珉丹刻 精彩勝空 慶延霽月 稱柳光風 儀型彷彿 陟降心翁 彊圉作噩春正月上元 瑞興 金奎泰 撰 丁酉三月 日 立 비문번역 광주부 남쪽 이십리에 장자동이 있다. 고 청심당 이조원 선생의 소요처이다. 선생은 광산이 세거지로 상서 복야 순백(珣白)의 후예이다. 경창군 필문 선생 선제의 아들이다. 격물치지 성정의 학문에 대한 가정교육을 잘 지켰다. 성종 조에 유일로 천거되어 정랑 집의 이조참의를 거처 경상 전라 양도의 안렴사를 전전하였다. 성대한 은전이 내려져 대궐에 나아가 송사하였다. 후에 혼조를 만나 선생이 이미 사직하며 말하기를 “나이 칠십에 관직을 그만둔다는 말은 들었지만 나이 칠십에 관리에 나아간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신이 차라리 동주에서 몸을 추락시킬지언정 어찌 궁에서 나쁜 보필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상을 당해 여막에서 복을 마치고 그대로 무덤 옆에 집을 짓고 죽을 때까지 사모하는 마음을 본받고자 하였다. 후학들을 끌어들여 석학들이 그의 문에서 나오게 되었다. 점필재 김 선생이 시를 주어 말하기를 “巨族五元家 一元遯跡嘉 右文今世上 母使玉音遐”라고 하였다. 지금 그의 시를 읽어보고 그 사람을 사모하니 대개 생각건대 덕학과 풍절은 진실로 천년동안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16세손 계휴(季休)가 차마 유지가 황폐해 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큰돈을 마련하여 비석을 세우는데 나에게 명문을 부탁하였다. 듣자니 유지의 곁에 괘고정이라는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말라죽었다가 다시 소생하여 가지와 잎이 무성해졌다고 한다. 대체 선생의 덕음이 여기에서 더욱 자라났음을 징험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 또한 기이한 일이로다. 다음과 같이 명을 한다. 정유년(1957) 1월 15일 서흥 김규태 씀
    2018-06-11 | NO.100
  • 이종-율원군사당유허비
    광주시 광산구 장덕동 1291-1(수완지구 근린5-4호 공원)율원군(栗元君) 이종(李宗) 사당(祠堂) 유허비(遺墟碑)<광주읍지>에 따르면 주(州)의 북쪽 30리의 거리인 완동(莞洞)에 있는 비석이다. 그의 후손인 긍의(兢儀) 기섭(起攝) 강호(康五) 등이 서로의 힘을 모아 설치(移建)하였다. 이들의 이러한 일은 오로지 옛날의 그 유지(遺志)를 그대로 묵힐 수 없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음기(陰記)가 있다.율원군사당유허비는 이재만가옥 동쪽 편에 있는데  율원군의 자는 유안(幼安), 호는 이력(履歷), 휘는 이종(1432~1476)으로 효령대군파이다. 시호는 양경(襄頃). 대군의 손자로 보성군 갑(갑)의 차남이다. 1467년 5월에 장용대장 대호군이 되었다. 원래는 광산구 장덕동 527에 있었으나 택지개발로 인해 광산구 장덕동 1291-1(수완지구 근린5-4호 공원)로 이재만 가옥(등록문화재 제146호)이 옮길 때 함께 이전했다.
    2018-06-18 | NO.99
  • 이한원-세심당이선생유적비
    광주시 남구 구만산길 34(원산동)1990년, 2005년세심당이선생유적비(洗心堂李先生遺蹟碑)는 1990년에 세웠다가  을축년에 훼손되어 2005년에 다시 건립했다. 호남인물지 광주편에는 자(字)는 청경(淸卿), 호(號)는 세심당(洗心堂), 본관은 광산(光山)고려 충숙왕 때 문과상서좌복야(文科尙書左僕射) 순백(珣白)의 5세손으로 조선 세종조에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증이조판서(贈吏曺判書) 선제(先齋)의 3남이다. 세종 32년에 생원을 지내고 단종 1년에 문과 장원으로 홍문관(弘文館)교리(校理)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이조참의(吏曺參議)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을 역임하고 정헌대부예조판서(正憲大夫禮曺判書)에 추증되었다.(광주지. 광산군지. 능주읍지)옛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지금 비문은 더 간략하다.부군의 휘(諱)는 한원(翰元)이요, 자(字)는 청경(淸卿)이요, 호(號)는 세심당(洗心堂)이니 그 선계(先系)는 신라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후예(后裔)이다. 고려 현종조(顯宗朝)에 휘(諱) 종금(宗金)이 거란을 토벌한 훈공(勳功)으로 군(君)에 봉(封)하니 광산이씨(光山李氏)가 실(實)로 이 때에 비롯되었다. 왕실계통(王室系統)으로 현관대작(顯官大爵)이 계계승승(繼繼承承)하여 울연(蔚然)히 동방(東方)의 거족(巨族)이 되었다. 휘(諱) 순백(珣白)에 이르러 고려 충숙왕조(忠肅王朝)에 영남(嶺南)의 걸출(傑出)한 선비로서 문과(文科)에 등제(登第)하여 한림원(翰林院) 학사(學士)·상서좌복야(尙書佐僕射)를 역임하였고 경신년(庚申年)에 충숙왕이 토번(吐蕃 티베트)에 유찬(流竄)되자 오직 공(公)이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원(元)나라에 글을 보내서 누대(累代)의 정의(情誼)를 극진히 진언(陳言)하여 드디어 풀려나게 되니 충숙왕이 이로써 녹훈(錄勳)하여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封)하고 충장(忠莊)의 시호(諡號)를 내렸으니 바로 중시조(中始祖)가 되신다.자(子)에 휘(諱) 기(奇)는 중현대부(中顯大夫) 단양부령(丹陽府令)을 지내고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증직(贈職)되었으니 공(公)의 고조(高祖)이고, 증조(曾祖)의 휘(諱)는 홍길(弘吉)이요, 호(號)는 퇴은(退隱)이니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인(文人)으로 벼슬은 밀직제학(密直提學)·개성윤(開城尹)·상호군(上護軍)을 지냈다.조(祖)의 휘(諱)는 일영(日暎)이니 장흥도호부사(長興都護府使)를 지내고 호남의 석학(碩學)으로 여지승람(與地勝覽)에 실려 있으며, 고(考)의 휘(諱)는 선제(先齊)요, 호(號)는 필문(蓽門)이니 경학(經學)에 널리 통하여 원근(遠近)에서 모두 선생으로 존숭(尊崇)하였다.세종(世宗) 기해년(己亥年)에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에 발탁(拔擢)되어 계묘년(癸卯年)에 사관(史官)·수찬(修撰)·검토관(檢討官)에 배수(拜授)되고, 임술년(壬戌)年)에 집현전(集賢殿) 직제학(直提學)·병조(兵曹)·예조참의(禮曹參議)·강원도 관찰사(觀察使)를 지냈으며, 무진년(戊辰年)에 하정사(賀正使)로 명(明)나라에 들어갔다.돌아와서 다시 공호조참판(工戶曹參判)을 거쳐 문종 경오년(庚午年)에 예문관(藝文館) 제학(提學)·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좌부빈객(左副賓客)·경창부윤(慶昌府尹)에 배수(拜授)되었으며, 왕명(王命)을 받고 고려사·고려사 절요(節要)·태종실록(太宗實錄) 편찬(編纂)에 참여하니 임금이 그 상모(狀貌)를 그려서 어소(御所)의 병풍(屛風) 뒤에 붙였고, 순조(純祖) 경진년(庚辰年)에 강진 수암서원(秀巖書院)에 봉향(奉享)하였다.비는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보성선씨(寶城宣氏) 절도사(節度使) 중길(仲吉)의 여(女)로 5 남(男)을 두었으니 모두 출중(出衆)한 재지(才智)와 덕행(德行)을 갖추었으며, 공은 제 3자(子)로 세종 병지년(丙辰年) 3 월 20 일에 태어났다.공(公)은 어려서부터 뛰어남이 범상(凡常)하지 않았고 천성(天性)으로 타고난 효우(孝友)와 탁월한 예지(叡智)는 일찍이 향리(鄕里)에 널리 알려졌다. 일찍이 부형(父兄)의 엄(嚴)한 가르침을 받고, 또 점필제(?畢齊 김종직) 문하(文下)에서 성리학(性理學)을 탐구(探究)하여 엄하게 스스로 자기 몸을 닦는 방법을 세우니 선생이 일찍이 이르기를 능히 대학의 덕문(德門)에 들어가고, 능히 중용(中庸)의 도(道)를 닦는 자는 오직 청경(淸卿) 한 사람이라고 하였다.단종 계유년(癸酉年)에 문과에 장원(狀元)하여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제수(除授)되고 갑술년(甲戌年)에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를 거쳐 을해년(乙亥年)에 이조참의(吏曹參議)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였다.얼마 후에 병을 칭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오로지 학문만을 닦고 당시의 명유(名儒)들과 교유하며 때로는 혹 한가하면 동산을 배회하며 시냇가에서 바람을 쐬고 소영(嘯詠)하면서 심회(心懷)를 화창하게 펴고 흉중(胸中)을 깨끗이 씻으니 그 수연(愁然)한 의태(儀態)와 강의(剛毅 굳셀 의)한 기상(氣象)은 사람들이 감히 그 한계를 엿볼 수 없었다.중씨(仲氏)가 마음으로 유독 사랑하여 공(公)의 자(字)를 청경(淸卿)이라 지어주고 그 당호(堂號)를 세심당(洗心堂)이라 이름하니 또한 5 형제가 화락하게 지냈던 정경을 엿볼 수 있다.성종조(成宗朝) 갑진년(甲辰年)에 조정에서 홍문관(弘文館) 제학(提學)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중종조(中宗朝) 정묘(丁卯年) 10 월 2 일에 정침(正寢)에서 돌아가시니 뒤에 정헌대부(正憲大夫)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증직(贈職)되고 당시 사자(祠字)에 배향하자는 의훈이 있었으나 결과를 보지 못하였다.배(配)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창녕조씨(昌寧曺氏)로 유한정정(幽閑靜貞)한 덕행을 갖추어 능히 부군(夫君)을 승순(承順)하니 사람들이 세상에서 드문 여사(女師)라 일컬었다.공의 묘는 창평(昌平) 도두원(道頭院) 갑좌원(甲坐原)이라고 이르나 임진난으로 인하여 실전(失傳)되고 만산동(萬山洞)에 소재한 군수공(郡守公)의 묘상(墓上)에 제단(祭壇)을 모셨다. 오호라! 공은 첨품(天稟)이 매우 고매하고 기자(氣字)가 유연하며 학문은 부사(父師)의 연원(淵源)이 있고 덕행은 형제간에 화순하는 지정(至情)이 있었다. 안으로 그 심덕(心德)은 너그럽고 넓으며, 밖으로 그 행실은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사람들을 대하고 사물을 처리함에 조금도 막히는 바가 없었으니 거의 평생을 천시(天時)에 따르고 명의(名義)에 처(處)하는 군자(君子)였다.4남(男)을 두었으니 장남(長男) 지선(止善)은 생원이요, 차남(次男) 창선(彰善)은 진사(進士)요, 삼남 삼선(三善)은 문과(文科)로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통례원(通禮院) 상례(相禮)·홍문관(弘文館) 제학(提學) 등을 역임하였고, 사남 사선(思善)은 문과(文科)로 현감(縣監)을 지냈다.손(孫)에 염(廉)과 노최련(盧崔連)의 처(妻)는 장자의 소생(所生)이요, 공우(公佑)·공좌(公佐)와 김윤신(金允信)의 처(妻)는 차자의 소생(所生)이요, 공건(公建) 생원 교수(敎授)와 공검(公儉) 승의랑(承議郞)과 이량(李良)의 처는 3 자의 소생이며, 연종(延終), 이원량(李元良)의 처와 이윤수(李允粹)의 처는 계자(季子) 소생이다. 이 밖에 자손들은 사승(史乘)과 보첩(譜牒)에 찬연(燦然)하니 여기에 모두다 기록하지 않는다. (중간 생략)                산 높고 물 깊어 철인(哲人)이 태어나니                 청풍(淸風)과 밝은 달 그 덕이 아름답네.                높은 뜻 빼어나 세상에 우뚝하고                덕교(德敎)는 천인(天人)을 꿰뚫어 무궁하리. -세심당 묘지명 중에서
    2018-06-11 | NO.98
  • 이홍길-퇴은 이홍길 신도비
    광주시 남구 원산동필문 이선제의 부친인 퇴은退隱 이홍길李弘吉 신도비퇴은 이홍길(1324~1406)은 고려 말의 문신으로 초명은 계방桂芳. 호는 퇴은退隱. 본관은 광산光山. 밀직부사기의 아들로 이장동 출신이다. 정몽주의 문인으로 학업에 탁월하고 시문에 밝았으며, 역리에 통달하여 공양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제학과 개성윤을 역임하고 상호군이 되었다. 시국의 어지러움을 알고 있던 차 1388년(우왕 14)에 이성계가 왕명으로 중국 명나라를 치러 가다가 압록강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쳐들어와 왕을 내쫓고 최영을 유배시킨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학문을 벗 삼아 도리를 밝혔다.고려가 망하고 조선에서 누차 관직을 높여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절계를 지켰다. 항상 선악화복을 모든 자질에게 일깨워 가르쳤다. 이때 상을 당하여서 당시 백일 탈상의 고려 풍속을 독단으로 주자의 가례를 본받아 삼년상을 치루니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여 이 고장에서도 이 풍속을 따르기 시작 하는 계기가 되었다. 뒤에 가선대부 예조참판에 증직 되었다. 2019.1.8. 수정
    2018-12-17 | NO.97
  • 일휴당선생최공정려중수기 日休堂先生崔公旌閭重修記
    정의림 일신재집 권14鄭義林(1845~1910) 《日新齋集》日休堂先生崔公旌閭重修記昔在龍蛇之變 伏節死義 前後相望 而其磊磊落落 如青天白日輝映於天下 膾炙於百世 未有如三壮士之爲尤盛也日休堂崔公即三壯士之一 後人爲之棹楔於綾 俎豆於晉盖綾是杖屨之鄉 而晋是殉節之地也 所以寓追幕不㤀之心者 靡有間焉 壬辰秋 晉之士謀修祠字屬斯文成福閠全柱一河龍辰來湖南牧議 因過綾 見旌閭頹敝慨然曰 此行本爲祠宇計 而今旌閭如此 豈重修祠宇而不修旌閭乎 遂停鞭開橐 聚材募工 不幾日而一新之嗚乎 先生所以扶植綱常 倡勵名敎者 其功可以與天壤俱敞非一區棹楔所能輕重 然興物寓情 不可無所 則今日之役亦豈可已者耶 後之人 苟舆斯文同志 繼以修之無失其時 則此屋亦將與先生不朽 竊有望焉 * 일휴당日休堂 최경회崔慶會(1532~1593)조선 중기의 문신. 1567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영해군수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이 되어 금산, 무주 등지에서 왜병과 싸워 크게 이겼다. 이듬해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승진했으나 6월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9주야를 싸우다가 전사했다.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잠정리에 있는 삼충각은 을묘왜변 때 전라남도 해남 지방에 침입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조현 장군과 임진왜란 때 진주성 2자전투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충의공 최경회 장군과 문홍헌 장군 세 충신의 애국 충정을 추모하기 위하여 1685년 능주향교 유림들이 3동의 정려를 건립한 것으로 1985년 2월 25일 전라남도기념물 제77호로 지정되었다.
    2020-06-11 | NO.96
  • 장렬사유적비
    광주시 북구 효령동 636(우곡마을)1957년장렬사유적비(壯烈祠遺蹟碑)는 광주광역시 북구 효령동 우곡마을 입구 대로변에 있다. 金亨在 짓고 具哲祐 쓰다이 비는 1957년 광주광역시 북구 효령동 우곡마을 입구 큰길가에 세워 놓은 유적비이다. 장렬사는 1868년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06년 유림들에 의해 현재의 광주 두암동에 위치하여 김유신 장군 등을 배향하고 있는데 처음 장렬사가 있던 곳에 이 비를 세워 놓았다. 비문 앞에는 '장렬사유적비(壯烈祠遺跡碑)'로 되어 있는데, 장열사유허비로 통용되어 사용하고 있음을 이 비의 소유자인 장열사유적보존회를 통해 알 수 있었다.<광주읍지>에는 장렬사(壯烈祠) 유허비(遺墟碑)라 했다.후손(後孫) 김기주(金基柱)가 이 비를 세워 좌찬성(左贊成) 완산(完山) 이용원(李容元)의 음기(陰記)가 있다.
    2018-06-11 | NO.95
  • 장흥고씨삼강문 / 長興高氏三綱門
    광주광역시 광산구 대촌 갑촌리 압촌동 마을 입구1595년 임진왜란 공신인 고경명 일가의 忠孝烈行의 뜻을 기리고자 유림들의 천거로 선조가 命旌, 문중에서 목조와가로 건립조선 중기의 문관·의병장인 고경명 일가삼강문옆에 문중 제각인 追遠閣이 있음長興 / 高敬命長興 / 高從厚長興 / 高因厚長興 / 高氏長興 / 高傳金光山 / 鄭氏
    2020-03-02 | NO.94
  • 전부일장군효행비
    광주시 남구 임암동 562-6, 임정마을1970년남구 임정마을 입구 임정마을 복지회관 옆에 천안전씨 문중에서 세웠다.전부일 장군은 20세기 초 일제의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이 지역 출신의 장군이다. 장군은 비문 내용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국방경비대에 자원 입대하여 군 복무 중에도 효행이 지극하여 많은 사람의 귀감이 되기도 하였으며, 충효를 겸비한 사람이었다. 장군의 효행비는 임정마을 입구에 위치해 있는데, 소유 및 관리는 천안전씨 문중에서 하고 있으며 건립시기는 1970년에 해당된다. 전부일(1924~2004)은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여 박정희 4공화국 때 초대 병무청장을 지냈다. 이후 1976~1980년 유신정우회 9, 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비문의 원문내용은 다음과 같다.서석산 자락 금당산 앞 임정 마을에 하늘이 내린 효자가 있어 지방선비들이 비를 세워 그 효행을 찬양하니 이 비의 주인공이 바로 전부일 장군이다. 장군의 본관은 천안으로 광주목사인 구생의 후손 방은의 제3자이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재주가 영특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가세가 궁핍하여 밭을 갈고 땔나무를 해 어버이를 봉양할 제 순종하여 어기는 일이 없었고,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건강을 보살피는 도리에 극진하였으니 장군의 타고난 효행은 옛날 왕상과맹종의 효도에 비기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왜정의 강제 징병으로 군에 입대하여 만주에서 복무 중 부친상을당했다는 비보를 들었지만 달려 올 수가 없었다. 땅을 치고 하늘을 부르며 곡을 하였는가 하면 손가락에 피를 흘려 성공보은(成功報恩)이라는 네 글자를 써서 영전에 올리도록 하였다.8·15 광복을 만나 고향에 돌아와 홀어머니를 효성으로 봉양하였으며 부친 묘소를 성묘하는 데 비바람을 피하지 않고 3년을 하루같이 하니 인근 모두가 듣고 칭찬하였다. 그 뒤 어머니의 승낙을 받아 국방경비대에 자원 입대하여 가정에 들어와서는 효도를 하고 부대에서는 충성하라는 교훈을 마음깊이 뼈에 새겼기에 빛나는 전공을 세웠으며 벼슬은 계속 승진되어 육군중장으로 국방부 차관보의 요직을 거치면서도 고향에 돌아와서는 언제나 노모를 등에 업고 부친의 묘 앞에 나아가 성묘를 하니 부모 남녀노소가 바라보고 감단하여 효자를 낳은 어머니요 충신을 낳은 어머니라고 하며 장군의 어머니를 부러워하였다.모친상을 당하여서는 예절에 의해 장례를 마치고 삭망 때마다 영전에서 녹음해 둔 어머니 생전의 음성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3년상을 마친 뒤에도 어머니 영정을 군에 군무실에서까지 모시면서 나가고 들어올 때마다 아뢰어 죽은 어머니를 살아있는 어머니처럼 섬겼고 고향에 돌아올 때는 반드시 부모님 묘소를 성묘한 뒤 마을 어른들을 찾아 뵙고 반찬대금을 제공하니 온 마을이 장군의 효행에 감동을 받았다.아~ 아름답도다. 장군의 효행이여, 순종하는 마음으로 부모님 뜻을 받들었고, 헌신하여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으니, 장군이야말로 가히 츙효를 겸했다고 하겠다. 부모의 은혜란 하늘과 같아서, 다 갚을 수 없는 것인데, 오늘날 자식들은 오히려 불효가 허다하니, 이 비를 바라보고 뉘우침이 있었으면 한다.고을 선비들이 장군의 효행을 이상과 같이 대략 비에 새겨 포양을 하고 아울러 이 세상 모든 자식에게 어버이 섬기는 도리를 일깨워 주며 권장하는 바이다.1970년 8월 건립추진위원회 짓고, 전면 제자 최한영 쓰고, 후면 비문 이병춘 쓰다.
    2018-06-14 | NO.93
  • 전상의 장군 예장석묘(묘비)
    광주시 북구 화암동 산239전상의장군예장석묘(全尙毅將軍禮葬石墓)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전상의(1575∼1627)의 장군의 묘소이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3호이다. . 장군은 선조 36년(1603)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첫 벼슬로 내외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인조 3년(1625)에는 구성부사로서 좌영장을 겸하였다. 광해군 9년(1617) 오윤겸과 함께 회답사(回答使)로 일본에 건너가 임진왜란 때 끌려간 동포 1500여 명을 귀국시키는 공을 세웠다. 또한 인조 5년(1627)에 후금이 인조의 친명정책을 구실삼아 3만 대군으로 침략하자 안주성 싸움에서 분전하였다. 그러나 구원병이 오지 않자 모든 장병과 함께 죽기를 각오하고 누각 위에 올라 싸우다 53세의 나이로 전사하였다. 난이 끝난 후 자헌대부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관직이 높여졌으며, 숙종 10년(1684)에는 안주의 충민사에 헌종 15년(1849)에는 광주의 경렬사와 제주의 귤림서원에 배향되었다. 현재 묘역에는 장군과 정부인 풍천 임씨 및 광산 김씨가 합장되어 있으며, 묘 아랫부분에는 둘레석이 둘러져 있다. 묘 앞에는 1857년에 세운 묘비가 있고, 묘역 근처에는 유적보존회에서 1979년에 세운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다.
    2018-07-02 | NO.92
  • 전상의-충민공 전상의 신도비
    광주시 북구 무등로 1050 충민사 內(화암동)1972년전상의신도비(全尙毅神道碑)는 충민사에 있다. 구성부사 증자헌대부 병조판서 시충민 전공 신도비(龜城府使 贈資憲大夫 兵曹判書 諡忠愍 全公 神道碑)라 한다. 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1627(정묘)년에 건노(建虜, 후금국)가 반적(反賊) 강홍립(姜弘立)을 앞세워 쳐들어올 때 구성부사 겸 좌영장인 전공 휘 상의가 전사하였다. 처음에 공이 평안병사 남이홍과 안주목사 김준과 같이 안주에 진치고 있다가 남 김 양공(兩公)은 중영(中營)을 지키고 공은 백상루(百祥樓) 아래 진을 치고 있었다. 적병이 점점 가까이 올 때 공이 군중에 명령하기를 적의 세력이 저렇게 강성하고 우리는 밖에서 개미새끼만한 구원병도 오지 않으니 강약이 분명하고 수효의 많고 적음이 대등하지 않으니 전쟁을 이길 방법은 오직 군기를 구비하고 있어야 한다. 지금 군기가 부족하니 함부로 남용하지 말라 당부하였다. 갑자기 적진에서 철갑을 입은 기병들이 달려오니 공이 군사를 정리하여 기다리고 있는데 발사명령을 하기도 전에 먼저 총을 쏜 자가 있어 곧 베어 죽이니 일군이 놀라 숙연하였다.이에 병기를 감추고 일부러 약세를 보이니 적군이 더욱 교만하여 바로 성 아래로 갑자기 뛰어 들어왔다. 공이 선봉에 발포 명령을 내려 전군이 일시에 계속 발포하니 포성이 천지를 진동하였다. 노병(虜兵)이 크게 무너져 죽은 시체가 산 같이 쌓이니 싸움에 이긴 여세를 타서 적병을 평야에서 크게 쓸어버렸다. 모든 군사가 재빨리 앞을 다투어 추격하고자 하니 공이 말려 말하기를 “병사가 교만하면 패하는 것이니 적의 정세를 파악하기 어려움에 함부로 진격하지 말고 성벽을 견고히 지켜서 그때그때 형편에 맞추어 알맞게 처리하는 것이 병법가의 계책이다” 하고 대오를 정비하고 망동치 못하게 엄중히 경계하고 사방에서 모여든 자 그 수효를 알 수 없었다. 우리 병사는 미약하고 식량과 군기도 다되어 가니, 공이 눈물을 흘리며 군졸과 더불어 여기서 순국할 것을 맹세했다. 이때 남공이 노병(虜兵)에게 강화를 요청하여 잠시라도 그 세력을 완화시키고자 하였다. 전공은 분연 대노하여 대의로써 남공을 꾸짖고 칼을 들어 죽이려고 하다가 남공의 뜻이 실지로 강화하려는 것이 아닌 줄을 알고 멈추었다.연일 싸움을 격려하며 충의로 장사들을 권장하여 모두 죽기로 맹세하고 발길을 돌리지 않고 싸우고 있는데, 남공이 불을 질러 스스로 타 죽자고 하니, 공이 말려 말하기를 “만일 먼저 방화를 하면 우리 남은 군사가 다 죽을 것이며 군기도 다 없어질 것이니 우리에게 좋을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적의 세력만 더 높게 할 뿐이다. 잔병을 수습하여 적 한 사람이라도 더 잡아 죽인 것이 먼저 죽는 것보다 나은 일이 아닌가? 싸우다가 군사와 화살이 다 떨어진 뒤에 조용히 나가 죽어도 늦지 않다” 하였다.남이흥과 김준 부자가 마침내 불에 타 죽고, 군졸과 병기가 모두 타 없어지고 말았다. 전공이 남은 병기를 수습하여 누중(樓中)에 두고 장사들을 불러 놓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병기와 식량이 다 떨어지고 후원군은 오지 않고 중영이 이미 함락되었으니 천명을 어찌 할 것인가? 너희 장사들이 있어 보았자 어찌할 수 없다. 너희들은 속히 생명을 도모하여 지체 말고 나가거라. 관교 배상증과 백유정이 머뭇거리며 차마 공만 남겨 두고 갈 수 없어 배회하고 가지 않으니, 공이 크게 꾸짖어서 내보냈다.홀로 백상루 위에 서서 활을 들어 적을 쏘면서 일현(一弦)에 화살 3개를 매겨 적을 향하여 쏘아 대니 화살이 맞지 않음이 없었다. 적의 화살이 비 오듯 하는 가운데 화살이 공의 좌측 정강이에 맞아 화살을 뽑아내니 살대만 빠지고 촉은 살 속에 박혀서 나오지 아니하자 차고 있던 칼을 빼어 납시공생(納矢貢生)을 주며 살을 헤치고 촉을 빼라 명하고 조금도 돌아보지 않고 연속 활을 쏘아댔다. 그러나 날은 저물고 화살은 없어지고 힘이 다하여 공이 서울을 향해 네 번 절하고 칼을 뽑아 자문(自刎)하여 백상루 아래로 떨어져 죽으니 그날이 정월 이십일일이다. 노병들도 놀래어 서로 말하기를 충신열사의 시체를 군중의 시신 속에 섞여 둘 수 없다 하고 루 앞에 매장하고 표를 세워 두고 갔다. 뒤에 광주 무등산에 예장하니 유좌이다.이 일을 조정에서 듣고 자헌대부병조판서의 증직을 하고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주고 숙종 갑자(1684)년에 정려를 명하고 그 이름을 충신지문이라 하였다. 그리고 안주 충민사에 배향하고 광주 경열사에 추향하였으니 조정의 포상과 사림의 은덕을 보답함이 또한 지대하였다.공은 천안인이니 백제 십제 공신 환성부원군 휘 섭(聶)이 그 시조이고, 본조에서 광주목사가 휘 구생(俱生)이 그 육대조이다. 증조의 휘는 완(琬)이고 조고(祖考)의 휘는 개(漑)이니 참봉을 지내었고 고(考)의 휘는 용(蓉)이니 증 승지이다. 공은 만력 을해(1575)년에 출생하여 계묘(1603)년에 중식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배(配)는 증정부인 풍천임씨이니 묘는 합장하였다. 아들이 셋인데 백원(伯元), 중원(仲元), 계원(季元)이고 손자는 유긍(有恆)과 유성(有成), 유장(有章)이다.공이 훈련되지 아니한 군사를 거느리고 범과 이리와 같은 십만 적병을 대하고 보니 형세가 난처하여 어찌할 수 없었다. 아무리 해도 목숨을 건질 수 없음을 알고 살기를 돌아보지 아니한 그의 기특함을 알 수 있다. 계책과 사려가 공허하지 아니함이 없어 결국 몸을 희생하고 말았으니, 옛 현인들의 말이 대담하게 죽기는 쉬워도 조용하게 의를 취해서 죽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공은 이 두 기지를 겸하였으니, 이른바 죽기가 어려운 일이 아니라 죽는 방법을 얻기가 어려운 일이다. 진실로 순절한 것이 그 의의(宜義)에 합당함을 안다면 어찌 그 죽음을 아끼리오! 몸을 버림이 만일 그 장소를 얻었다면 열사가 그 존재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아! 아름다운 일이다. 공은 일찍이 시와 예를 통하고 학문을 연구하여 유고도 있어서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이 많다. 무식한 영웅이 없다더니 거짓말이 아니다. 공의 후손인 광태(光兌) 광표(光表) 광로(光魯) 응팔(應八)이 나에게 비문을 청하기로 내가 일찍부터 공의 사절의 의의를 알고 있고 또 제 손들의 성의에 감격하여 병으로 사양을 못하고 이에 명하노라.슬프다 전공은 남국의 기강이라.시를 잘하고 예법도 잘 설명하여옛날 극곡(郤縠)과 같도다.심산에서 병서를 공부하고궁술에 뜻을 두어서무술로 몸을 닦아 신분을 발휘하여훌륭한 사람이 되었도다.건노가 약속을 위반하고우리 서쪽 변방을 침범하여긴 행렬로 달려드니그 형세가 심히 웅장하다.공이 구성에 병부를 갖고좌영장이 되었더니병기와 식량이 떨어져서어떻게 할 계책이 없으나공은 그 용맹을 다하여계략을 뛰어나게 발휘하여순국할 것을 맹서하고극력 대항할 것을 말하고뚜렷하게 계획을 세워갑옷에 신체를 싸고 죽었다.아름다운 옥은 부서지지 않고굳은 정조가 훼손될 수 없다.곰을 취하고 물고기를 버리는 것은천성으로부터 나온 것이다.하늘과 땅 사이에나의 큰 경륜을 세웠으니응당 정령(精靈)이 있어바람과 번개가 되어재앙을 쓸어버리고일월이 다 밝아졌다.임금의 포창이 더 하여높은 벼슬을 명하고위로의 조사도 있었으니삼충을 충민사에 병향하고경열사에도 추향하였다.여러 사림들이 상의하여제찬(祭餐)도 만족하고제미(祭米)도 풍부하니천세 만세까지무궁한 보은이로다.무등산 묘소에큰 비를 세우고내 명을 깊이 새겨두니길이길이 보전하소서.숭정기원후 4신해(1851) 대사헌 당성 홍직필 짓고 전면 큰 글자는 능성 구철우가 쓰고, 신천 강인환이 쓰다. 단군 서기 4305년(1972) 임자 음력 5월 하순 세우다. 天啓丁卯建虜引反賊姜弘立八寇時龜城府使兼左營將全公諱尙毅死之始公與平安兵使南以興安州牧使金浚同陣于安州南金兩公守中營公留陣百祥樓下賊兵漸邇公下令軍中曰賊勢甚盛而外絶蟻子之援强弱相懸衆寡不敵制勝之具專在軍械而以告乏愼不虚發俄而賊以鐡騎長驅公方整軍以待有不待令而先放銃丸者立斬之一軍警肅乃戢兵以示弱賊勢益驕馳突直扺城下公於是令先鋒一時放砲軍中鱗次繼放砲聲振天虜兵大壤僵尸山積遂乘勝大破之賊兵披靡平壤諸軍皆欲乘鋭遂之公止之曰兵驕則敗賊情難測不可輕進堅壁自守隨時應變是兵家之筭也嚴整行伍戒厥妄動翌日曉望賊兵籠郊絡野自四方流八者又不可勝數我兵單弱饗械俱罄公雪涕誓衆矢心立慬於是南公與虜講和盖欲少緩其鋒以有待也公奮然大怒責南公以大義欲拔劒斬之尋知南公之意不在於和乃止連日督戰忠義自勵將士皆以死自誓戰不旋踵南公欲放火自焚公止之曰若先放火則我軍餘者皆死而軍械消盡無益徒增賊勢未若收捨殘兵獲一醎猶勝於先斃必待兵矢俱盡然後從容就死未晩也南公及金公父子卒死於火軍卒及兵械己灰燼矣公收餘械樓中召將士抆淚而言曰兵食俱竭後援不至而中營己陷天實爲之奈爾將士何爾等速出圖生母用踟蹰官校裴尙增白惟精不忍捨公遲回不去公大叱放出獨挺立樓上張弓射賊一絃三矢發無不中賊矢如雨中其左股拔箭而鏃留在肥拔佩刀給納矢貢生剖肥出鏃連射之日己脯矢竆力盡公望京師四拜遂拔劒自刎墜于樓下而正月十七日也虜動色相語曰忠臣烈士之體不可雜於衆尸之中瘞樓前立表而去返葬于光州無等山酉坐事聞贈資憲大夫兵曹判書遺禮官致侑肅宗甲子命旌其閭曰忠臣之門配享于安州之愍忠祠追享光州景烈祠朝家之褒賞士林之崇報亦至矣公天安人十濟功臣歡城府院君諱聶其初祖也八本朝有諱俱生光州牧使寔公六代祖也曾祖諱琬祖諱漑叅奉考諱蓉贈承旨公生于萬曆乙亥癸卯中式年武科配贈貞夫人豊川任氏墓附有三子伯元仲元季元孫有恆有成公提不敎之卒當虎狼十萬之衆形格勢禁事無奈何而出萬死不顧一生斯已奇矣而出謀發慮罔不中窾竟以身殉曩哲云慷慨殺身易從容取義難公具此兩者是所云非死之難處死之難者也是知殞節苟合其宜義夫豈吝其殉捐軀若得其所烈士不愛其存於呼懿哉公早服詩禮力治文辭有零稿可傳世無不識字英雄云者詎不信哉公後孫光兌光表光魯應八請不佞以牲石之文不佞夙服公死綏之義又感諸孫苦誠靡敢以癃病辭遂爲之銘曰嗟嗟全公南國之紀敦詩說禮郤縠是似竆山讀兵厲志孤矢發身韎韋是爲君子建虜敗盟寇我西陲長蛇封豕其勢騤騤公握龜符爲左營帥兵食俱殲無計可施公奮其勇發謀出奇矢心殉國克抗厥辭定計於鮮衽革裹尸圭璧不碎堅貞靡虧熊魚取舎出自秉彝天地中間立我大經應有精靈化爲風霆掃盪腥氛日月雙明褒寵有嘉命秩斯隆有侐愍詞並祀三忠追侑烈廟詢謀僉同牲牢伊碩黍稷維豊有來永世崇報無窮有山無等石戴螭首我銘深鐫用垂不朽崇禎紀元後四辛亥大司憲 唐城 洪直弼 撰前面大字綾城 具哲祐 書信川 康仁煥 謹書檀君紀元四千三百五年壬子端陽月下浣 竪 충민사는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청(淸)나라 침략군을 맞아 안주성(安州城) 싸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장렬히 순국한  구성도호부사(龜城都護府使) 전상의(全尙毅)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장군은 조선(朝鮮) 선조(宣祖) 8년(1575)에 지금의 광주광역시(光州廣域市) 서구(西區) 구동(龜洞)에서 전용(全蓉)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력과 무술이 남달리 뛰어나 선조 36년(1603) 29세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첫 벼슬로 내외 관직을 역임하였다. 광해군(光海君) 9년(1617) 오윤겸(吳允謙)과 함께 회답사(回答使)로 일본(日本)에 건너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끌려간 동포 150여 명을 귀국시키는 데 공을 세우고, 내금위(內禁衛) 예차(豫差) 및 어모장군(御侮將軍)을 봉직하였다. 인조(仁祖) 3년(1625) 구성도호부사(龜城都護府使) 겸 좌영장(左營將)이 되어 흐트러진 관위를 정비하고 변방방어에 극력 대비하였다. 인조 5년(1627) 1월 청의 3만 대군이 쳐들어와 의주(義州)를 점령하고 물밀듯이 남으로 안주(安州), 평양(平壤)을 거쳐 황주(黃州)에 이르렀다. 이때 장군은 안주성(安州城) 싸움 중 남영(南營)인 백상루(百祥樓)에서 5일간 분전하다가 53세를 일기로 장렬히 순절(殉節)하니 적장(敵將)들도 충신(忠臣)의 죽음을 애통해하였다 한다. 난이 끝난 후 2월 7일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추증(追贈)되고, 이어서 안주로부터 그의 출생지인 광주로 시신(屍身)을 옮기어 동년(同年) 7월 26일 이곳에서 서쪽으로 보이는 평두산(平頭山)에 예장(禮葬)하였다. 숙종(肅宗) 8년(1682) 장군의 충절(忠節)을 기리기 위하여 전몰지(戰歿地)인 안주의 충민사(忠愍祠)에 받들게 하고, 동(同) 10년(1684)에는 충신정려(忠臣旌閭)를 명하였다. 헌종(憲宗) 15년(1849) 광주의 경렬사(景烈祠)와 제주(濟州)의 귤림서원(橘林書院)에도 배향(配享)되었었으나 고종(高宗) 5년(1868)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 의하여 헐리게 되었다. 본 사당(祠堂) 건물은 유적정화사업으로 1982년 6월 28일에 착공하여 1985년에 완공하였다.  
    2018-06-11 | NO.91
  • 전상의장군정려각
    광주 북구 무등로 1050(화암동) 충민사1684년이 전상의장군정려각(全尙毅將軍旌閭閣)은 충민사 경내에 위치해 있다. 전상의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864년 9월 2일 명정되어 그해 광주시 동구 지원동 회산마을 앞에 세웠다. 1982년 충민사가 새로 건립되면서 이곳으로 정려각을 이건하였다. 정려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한식기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겹처마로 되어 있다. 내부에는 증 충신자헌대부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행 통훈대부구성도호부사 전상의 지려 숭정 후 갑자 11월(贈 忠臣資憲大夫兵曹判書 兼 知義禁府事 行 通訓大夫龜城都護府使 全尙毅 之閭 崇禎 後 甲子 11月)의 복원된 정려편액이 걸려 있다.
    2018-11-12 | NO.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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