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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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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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인함평이씨효행비
    광주시 서구 화운로23번길 7-81982년서구 화정동 화정힐스테이트아파트 건너편 길로 가면 있다. 1982. 9. 5. 마을사람들이 가륵한 孝行을 찬양하여 세웠다. 나주 吳成烈에게 시집가 啓煥 女息을 父母와 舅姑(구고)를 극진한 효성을 다하고 동리에 施德(시덕)하다..
    2018-07-02 | NO.119
  • 유인행주기씨효열비 효열각
    광주시 서구 용두동 483-2 1977년유인행주기씨효열비(孺人幸州奇氏孝烈碑)이 비는 장흥 고광은이 찬하고 글씨를 썼다. 광복후 첫 정사년이라 한 것을 보면 1977년에 세웠다.비 설립 추진위원장은 박하만朴夏樠이고 부위원장은 기세은이다.
    2018-06-11 | NO.118
  • 유천당장흥고씨귀연여사효열비
    광주시 북구 일곡동 515이 유천당장흥고씨귀연여사효열비(柳川堂長興高氏貴淵女士孝烈碑)는 만주사 옆에 있다.
    2018-11-13 | NO.117
  • 윤영기-의병장정재윤영기공적비
     광주시 남구 행암동 92018년의병장정재윤영기공적비는 구남마을 광유재 앞에 2018년 10월에 세웠다.윤영기(1880∼1971) 자 경안(京安), 호 정재(貞齋)이며 조선 말기의 의병장. 독립운동가이다.1907년 1월24일 을미의병에 참가했고 9월17일 호군에 임명, 천여명의 군사를 훈련시켜 30여명 적을 섬멸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 선언문을 군중에게 살포, 군자금 모금하였고  3.1운동 일어나자  광주 역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1920년 10월 독립자금 모금하더 일경에 체포 광주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고 1954년 광주향교 제3대 전교에 선임되었다. 1977년 정부로부터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2018-10-26 | NO.116
  • 의병대장죽파오성술묘비
    광주시 광산구 송산동 417-31978년義兵大將竹坡吳成述墓碑는 종후손 전 국회의원 오중렬 짓다.광산구 본량동을 가다보면 항일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죽파(竹坡) 오성술 선생의 묘지를 만날 수 있다.선생은 1884년 5월 15일 광산군 삼도면 송산리 죽산마을에서 오영선과 나주 임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인수, 자는 성술, 본관은 나주이다.선생의 가문은 전형적인 지방 양반가였고, 경제적으로도 매우 윤택했던 것 같다. 그것은 부친이 참봉 벼슬에 있었으며, 훗날 선생이 거의할 때 50여 두락의 전답을 팔아 군자금으로 충당했던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특히 선생은 손이 귀한 집안의 외아들이기에 더욱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생각된다.일제의 정치적·경제적 침탈에 통분함을 금치 못하고 1907년 용문산에서 거의했다.먼저 가재를 털어 의병기금을 마련, 김태원의 의진에 입대해 활약했다.오성술 선생은 몸을 담고 있던 의진의 의병장 김태원은 호남 창의대장 기삼연이 체포되어 순국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더욱 적과 격렬히 접전을 전개하다가 1908년 4월 광주 무등산 전투에서 전사하자 이전부터 함께 전투에 참여한 바 있던 전해산과 함께 의진을 수습하고, 일부 잔병은 조경환이 인솔했다.선생은 적과의 접전에서도 적극적이었으나 군자금 모금도 소홀하지 않았다.1908년 1월 10일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광주에 거주하는 일본인 제등 일가를 습격해 3인을 살해하고 소총·일본도 등 무기를 탈취한 후 방화했다. 그리고 나주에서는 밀정 황도현의 재산을 몰수한 후 살해했다.1909년 1월 30일에는 광주 대기면에 살던 일본인 삼십내의 집을 습격해 2천500엔 상당의 물품을 몰수했다.이러한 일련의 모금 활동이 적에게 알려지고, 마침내 체포되어 대구로 압송됐다.뒤따라 박영근, 심남일, 강무경 등 의병장이 체포되어 왔는데 이들 중 특히 심남일과는 일찍이 남평에서 회동해 군사문제 제반에 걸쳐 상의한 바도 있었다. 오성술은 광주 재판소에서 소위 강도 및 살인죄로 사형언도를 받았다.후에 공소했으나 기각, 1910년 9월 15일 대구형무소에서 사형 순국했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내 평생 시름없는 사람이라 자위했건만 나라의 운명이 어려워져 그 걱정뿐이네 술 속의 취기는 밤낮이 없건만 글 속에 대의는 춘추를 지녔구나 집안이 기울어도 천금 부자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붓을 내던지니 오직 백성 시중들 생각만 하네.세상살이에 마음속 일을 알기 어렵지만 분노 그밖에 다시 무엇을 구하겠는가生平自謂我無愁 天步艱難是可憂 酒褒微?罔晝夜 書中大義有春秋 傾家不顧千金富 投筆唯思萬戶候 處世難知心內事 慨然此外更何求-광산저널(2007)
    2018-12-02 | NO.115
  • 의열사 유허비
    의열사(義烈祠) 유허비(遺墟碑)<광주읍지>에 따르면 간석(艮石) 이중철(李中轍)의 명문(銘文)이 있다.의열사는 서구 벽진동 벽진서원이 되었다가 서구 풍암동으로 옮겼다. 벽진동 터에는 의열사 유허비가 없다고 한다. 음성박씨 광주문중의 관계자가 확인해주었다.
    2018-06-18 | NO.114
  • 이경채-독립운동가 이경채선생 공적비
    광주 광산구 (송정동초등학교)광주학생독립운동을 잉태하고, 일본과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벌인 독립운동가 이경채(1910~1978) 선생의 공적비 제막식이 2017년 5월 30일 송정동초등학교에서 열렸다. 송정동초는 이 선생의 모교로 그가 타개한 지 39년 만에 공적비가 세워졌다.광주학생운동에 불을 붙이다이경채는 인쇄한 수십 장의 문서를 광주역 앞 경찰관 파출소 게시판, 광주고보를 비롯하여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송정리역이나 송정리 신사 등의 전신주와 판자벽에 붙였다. 그뿐 아니라 전남 각 중등학교, 경찰서에도 발송하였다. 이는 광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광주 지역에 여러 사회주의 청년 단체가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었지만 이른바 ‘불온 문서’가 시내에 뿌려진 것은 처음이었다. 경찰은 즉시 수사에 착수했지만 단서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였다. 이경채 등이 문서를 인쇄한 등사판이나 남은 문서들을 모두 불태워 없앤 뒤였다.조국 광복을 위해 소설보다 더한 삶을 살았던 선생이 타개한 지 39년 만에 세운 공적비. 참가자들은 때늦음을 송구하게 생각한 만큼 애국지사의 정신을 대대손손 계승할 것을 제막식에서 결의했다.선생은 1910년 4월 6일 전남 광산군 송정리(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에서 부친 이성륜(李成倫) 씨의 3남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홉 살 때 목격한 3·1운동은 선생의 지난한 항일투쟁의 자양분이었다.광주고보 재학 중이던 1926년, 선생은 학우들과 ‘독서회’를 비밀리에 조직해 독립운동을 결의한다. 2년 뒤 그는 ‘광주 조선독립선언문’을 배포해 세상을 뒤흔들었다. “천황은 신성으로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제국주의자의 말”이라고 쓴 유인물을 광주역 앞 파출소 게시판, 송정리역, 송정리 신사(송정공원) 등 사람이 많이 오가는 장소에 붙여놓은 것.이 투쟁으로 선생은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개성소년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29년 10월 특사로 풀려났다. 당시 모교 학우들은 선생의 석방을 요구하며 전교생 동맹휴업을 벌였다. 퇴학 47명, 정학 270명에 이를 정도로 동맹휴업은 맹렬했다.1929년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 배후 인물로 또다시 검거된 선생은 일제의 감시로 운신이 어려워지자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 전문학교(야간) 법률과에 입학했다. 일본에서도 동경유학생, 광주학생독립운동 참가자들과 항일투쟁을 벌인 선생은 ‘임시정부 내통’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6개월 고문에 시달렸다.일본에서 신변 위협에 시달리던 선생은 1933년 4월 고베항에서 중국 상하이로 밀항했다. 이곳에서 선생은 김판수(金判守), 이중환(李中煥) 등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일제와 싸웠다.중국에서 인성학교 교사, 한국독립당 기관지 <진광(震光)> 간행에 간여하던 선생은 1936년 9월 중국군 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 입교를 계기로 일제와 총칼로 맞서며 무장투쟁에 돌입했다. 당시 대륙 침략으로 총력전을 펼치던 일본을 중국에서 무너뜨려야 조국 해방도 가능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중국군 중교(소령)까지 진급한 선생은 1949년 10월 귀국길에 올랐다.고향에 돌아온 선생은 주변의 정계입문 권유를 모두 물리쳤다고 한다. 그 권유를 피해 1974년 연고도 없는 경남 양산 기장면 석산리로 이사해 양어장을 운영하며 살았던 선생은 4년 뒤 3월 25일 불의의 사고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우리 정부는 1991년 8월 15일 건국 훈장 애국장을 선생에게 추서했다.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이경채 선생을 ‘2014년 11월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선생의 묘소는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있다.
    2018-12-18 | NO.113
  • 이긍-사은부사 이긍 묘역
    광주시 북구 각화동 산 28 부근태봉 서쪽 자락에 이긍李兢1389-1433의 묘가 있다. 북구 군왕로 311 휴먼파크서희스타힐스아파트 건너편이다. 국가에서 이곳에 묘를 쓰도록 하였다. 연고가 없는 광주에 묘를 쓰게 된 데에는 광주의 유력인사였던 그의 장인 광산인 이초 李椒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1405년(태종 5)과 1427년(세종 9) 두 번이나 문과에 급제한 뒤 중앙 관직을 두루 거쳤다. 그 후 1433년(세종 15) 당시 명나라 사은부사로 북경에 가던 도중 병을 얻어 압록강 첨수참括木站에서 인타깝게 생애를 마감하였다.그가 죽은 뒤 묘를 광주에 쓰게 되면서 광주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의 증손 계인 繼仁이 기묘사화를 피하여 선조의 묘와 가까운 오치동으로 이사해 오면서 함평이씨가 오치동에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2018-12-07 | NO.112
  • 이기손-금재 이기손 장군 건립사실기
    광주시 광산구 송정공원로 8-13, 송정공원李起巽將軍義積碑建立事實記 李起巽, 1877~1957현 주소: 광주광역시 광산구 북산동 109번지 옛 주소 : 전남 광산군 본량면 북산리 110 사적지 : 한말 의병장 이기손의 생가터 이기손은 오준선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히고 국운이 쇄하자 구국운동에 나섰다.1907년 황제 폐위 및 군대 해산이 모두 일제의 내정간섭에 의한 것임을 알고 광산·나주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스스로 의병장이 된 이기손은 의병을 이끌고 진도·완도 연안의 외적을 격퇴시켰다. 이어서 장성의 기삼연 의병부대의 부장 전해산·김죽봉과 상의하여 호남의 서부지방 즉 광산·나주·함평 일대의 상본장相本將이 되었다. 일군으로부터 노획한 총 500정으로 의병의 무장을 마친 이기손은 본격적인 의병전을 전개하였다. 1908년 2월 용진산龍鎭山 전투에서 다수의 적을 사살하고 총 100여 정을 노획하였으며 이어서 전개된 전투에서 다시 적병을 사살하였다. 이어 전남 무안군 지도에 설치한 일본군 해군본부를 습격하기 위하여 100명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군을 섬멸하였다. 또 영광군 대마면 성산리 노감촌과 고산 등지로 출병하여 많은 왜적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1908년 이후 병력과 장비를 증강시킨 적의 의병 토벌대와 접전하기에는 중과부적이므로 의병을 해산시켰다. 1909년에 다시 거의하였으나 2월 사촌沙村에서 패전한 후 전해산 의병부대과 동맹하여 호남 제7진의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적에게 체포당하였다. 그러나 압송하던 병졸이 술을 마시고 취한 틈을 이용해 결박을 풀고 탈출하여 금산錦山에 은신하였다. 그후 만주를 거쳐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그동안 그의 가족 중 2남은 옥고로 인하여 사망했고 부인은 두 번이나 옥고를 치렀다. 1915년에 귀국하여 충청도 금산에서 후진양성에 주력하였다. 생가는 한말에 건립하였으나 현재는 멸실된 상태이다. ※ 2019.09.30 수정
    2018-12-19 | NO.111
  • 이기손-의병대장 금재 이기손장군의적비
    광주시 광산구 신촌동 4-1, 송정공원1975년이 의병대장금재 이기손장군의적비 義兵大將 錦齋李起巽將軍義跡碑는 송정공원 내에 자리하고 있다. 그 옆에 비석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용진산 정기받아 님이 나셨고 구국의 횃불들고 일어나신 곳 함성도 드높았다 그날의 함성 빛나는 오십회의 빛난 전공에 날뛰던 왜적들도 넋을 잃었네 장군의 애국충절 같구나 의적비 세운곳에 영령 계시니 오가는 길손들이 머리숙이네의병장 이기손은 자는 안식, 호를 급재라 했으며 당호는 용섭당이다. 효령대군의 17대손이며 아버지는 농포공 이영의이다. 1895년 민비피살 사건을 비롯 1905년의 을사보호 조약 1907년의 고종황제 폐위 관군해산등 국치의 분함이 거듭되자 평소병서를 연구하여 손자병법에 통달한 공은 광산, 나주 등지 장정을 모아 나라를 구해야 함은 젊은이들의 의무라고 역설 의병을 조직했다. 1908년 의병창의삼대장으로 나주, 광주, 담양, 함평, 무안, 영광, 고흥등지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특히 담양 무동촌 전투에서 왜장 요시다의 부대와의 접전에서 괄목할 성과를 올렸다.그 후 일제의 탄압으로 만주망명길에 올랐으며 6년후 귀국하여 충남금산에서 은거,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1930년 금산군 금성면 하신리의 온양이씨 문중에서 고종황제와 융희 황제를 모신 숭봉전, 어필각을 건립하여 민족혼을 일깨웠다. 광복후 금산과 향리인 광산을 왕래하면서 1957년 11월 27일 80세로 별세하였다.의적비 옆에는 의적비건립사실기가 1975년 종질인 이강유, 이강재, 이강순 등이 세웠다는 이름이 있다.또 이기손장군의적비는 광산구 본량초등학교 교정에도 있다.
    2018-10-17 | NO.110
  • 이남유허비
    광주시 북구 삼각동 삼각마을1964년이 이남유허비(李南遺墟碑)는 김규태(金奎泰)가 찬했다.
    2018-12-01 | NO.109
  • 이상희 공군대위 호민헌신 추모비
    광주시 서구 덕흥동 23-5 덕흥경로당 앞1992년1991년 12월 13일 3시경 공군 작전 임무수행 중 덕흥부락 상공에서 항공기 사고로 추락하는 순간 관제소로부터 탈출명령을 받았지만 마을에 엄청난 인명과 재산손실이 초래될 것을 우려하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호민살신한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덕흥동천에 추모비를 건립했다.
    2018-06-26 | NO.108
  • 이선제-필문이선제신도비
    광주시 남구 원산동 951-61996년필문이선제신도비(蓽門李先齊神道碑)는 원래 1912년에 면우 곽종석(俛宇 郭鍾錫, 1864~1919)이 비문을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1995년에 이가원(1917~2000) 박사의 추기 비문을 받아 1996년에 세웠다. 한 비에 시기를 달리하여 두 사람이 지은 비문이 있는 셈이다.마을 입구 도로변에 그의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이 신도비는  전서는 미수 허목(眉叟 許穆, 1595~1682)의 전서를 집자하였다. 이 비와는 다르게 1957년(정유)에 곽종석 찬 비문의 신도비도 있었다.공적이 있어 나라에서 부조묘(不祧廟)를 명하였는데 광주광역시 민속문화재 제 7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또한 광주광역시는 1988년 필문 이선제의 위업을 기리 위해 필문로(蓽⾨路, 남광주-서방사거리)의 가로 명을 지정하였다. 재실인 여재각(如在閣, 1960년 건립)도 함께 있다.그리고 제청골 골짜기에는 양심당(養⼼堂)이 있다. 이선제의 큰 아들인 이시원이 시묘살이 하던 터라 한다.신도비 원문은 《면우선생문집》권47(한국문집총간 344집 122쪽)에 실려 있다. 마을 앞에는 필문이 심었다고 하는 600년쯤된 왕버들이 있다. 괘고정수라 한다.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글이 써 있다.光國佐理功臣嘉善大夫行吏曹參判藝文館提學問知春秋館事世子左副賓客慶昌君 贈正憲大夫曺判書藝文館大提學蓽門先生李公神道碑銘 幷序 參贊 俛宇  郭鐘錫 謹撰  文正公  眉臾 許先生穆 集篆際聖朝啓運英碩雲興贊成右文之治類多以經論謨譙章翰詞頌假鳴於一時其能游心理域率履法門循聖賢之塗轍而進則訃君以當道退則倡學一方俾來者有可繼焉盖亦十不二三矣時則有若慶昌君篳門先生李公者其庶乎爲先覺於草昧之世而不洋於行藏之正其學足以有爲其功足以開後者乎先生諱先齊字家父蓽門號也其先新羅之金也至麗祖時有諱宗金以功賜今姓封光山入傳而日珣白翰林以忠 贈尙書左僕射是生奇丹陽府今 贈密直副使生弘吉密直提學生日映府使贈兵曹參判娶密直副使草溪鄭允吉之女以共武甲子生公干光之泥館山下幼而眉字淸瀅神采照人寡言笑重作止儼乎有成人儀屆就傳穎悟絶倫博經史通大義旣而嘆曰人之性天也非學無以知性知天下知性天無以爲人遂慨然有求道之志閒權楊村梅軒先生兄弟者遂邃性理之學從之難疑講質渙然有得踐行米篤而所适益精徵蔚有斯文之望 莊憲王甲午府策選第一由翰施玉著歷敭淸華亞長銓曺賓客 曺筵啓沃論思懇懇於出治之本嘗啓曰今之言者以富國强兵爲先務然此覇政之餘習人君正必正朝延百官萬寐則國安有不富兵安有不强又曰古者擇士入學學成然後論之論定然後宮之今不擇賢否不論高下槪取功今文詞之未望其謀國之無缺不亦難乎又言宜選有德之士置之儲宮興之起居出入如莊嶽之聽齊語則此宗杜生靈無疆之福時 上勵勵精圖治虛心采納春注日深倚以公輔繪公像於御屛以龍之甲辰遭外艱丙午居內憂時喪紀廢壞百日卽吉公獨行三年之制哀毁踰節情文兩旨造主立祠一依於禮人多化之嘗爲藝文館提學鄭麟趾金銚望等受命撰麗史錄光國勳封慶昌君退老于鄕上疏請陞光山爲洲牧建喜慶堂選一鄕文學地淫之士別爲需籍以獎育又立約于鄕倣藍田遺意春秋會集而勸規之於光之士皆敦尙經行民俗丕變爲湖南之純享年七十一而經葬于萬山洞亥原後 贈吏曹判書藝文館大提學高齎峰先生敬命以先生存倡學之功嘗疏請陞享聖廡而不報識者恨焉士林立祠宇康津之秀巖以俎頭祀之者淸心堂詞元玄孫履素齊仲虎來孫東巖發南溪洁從享焉其數之垂于家者遠而不替德之入于人者以以不忘斯可以觀矣配貞夫人寶城宣氏節度使仲吉女生五男始元判中樞調元吏議 贈禮判翰元校理贊元修撰享元副提學孫曾而下詵善詵然不可勝紀先生之墓久闕神道之刻后孫承鎰以其門父老之命走四百里于伽倻之西徵銘於鐘錫今距先生將五百年劫灰屢晹文獻寢泯其徵言懿蹟固有不可得以悉孝矣謹據夫性齊許文靈公傳之狀與後孫承愚之錄最其槪而爲之銘曰郁郁文化莊靈之世號爲鄧隆來汝 王佑篳門不閉風雲之從其稱差覇學不貴藝沃于 宸哀王肅不舍罘罳有繪贊我笙鏞衣冠孲孲損護孝悌湖學螵螵陽海之老有會有詣載篤于耶歸 歸箇箇鳳翥邁以奕厥宗千載起懦光山麗君子攸宮湖天不夜湖樹不髮孰識其功通政大夫前議政府參贊弘文館 經筵官兼侍講院書筵官苟一郭鐘錫撰文正公眉叟 許先生穆集篆 丁酉 三月日立번역광국좌리공신 가선대부 호조참판 세자좌부빈객 증정헌대부 리조판서 예문관대제학 필문선생이공신도비명[서문을 함께 쓰다.]참찬 후한 곽종석이 삼가 짓고 문정공 미수 허목선생의 전자를 집서하다.성군의 명대를 즈음하여 인걸이 많이 태어나 문학을 숭상한 정치를 도왔다. 거의가 경륜모모와 장한사송으로서 일시에 이름을 올렸으나 그 능히 성리학에 전념하여 법문을 따르고 성현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고 나아가서는 군상을 대도에 어긋나지 않게 받들고 물러난 즉 일방을 거느려 후학으로 하여금 가히 이어가게 한 사람은 대개 열에서 둘셋도 못되었다.그대 경창군 필문 이선생 같은 이가 있어 거의 초매한 세상에 선각이 되고 행장의 정직함이 도에 배반함이 없어 그 학문은 족히 써 하옴이 있고 그 공은 족히 써 후학을 깨우침인져. 선생의 휘는 선제요, 자는 가부이며 필문은 그의 호이다. 그의 선계는 신라의 김씨이다.고려 때에 휘 종금의 공으로 광산을 봉하니 팔전하여 순백은 한림이니 충으로 상서좌복야로 증직하였고, 아들 기는 단양부령으로 밀직부사를 증직하였고, 그의 아들 홍길은 밀직제학이요, 그의 아들 일영은 부사로 병조참판을 증직하였는데 장흥위씨 평장사 문하시중 충의 딸과 밀직부사 초계 정윤길의 딸에게 장가들어 정종 기묘년에 광주 이관 산하에서 선생을 출생하였다.어려서 미우가 맑고 신채가 훌륭하였다. 언소를 적게 하고 기거를 무겁게 하여 엄연히 성인스러웠다. 좀 자라서 두뇌의 명석함이 뛰어나 경사를 널리 보고 대의를 통달하였다.이윽고 탄식하여 가로되 사람의 성정은 곧 하늘이니 학문이 아니면 성정과 천리를 알 수 없고 성과 천을 알지 못하면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하고 드디어 개연이 구도의 뜻이 있어 양촌 권근, 매헌 권우 선생 현제가 성리설에 공부가 깊다는 말을 듣고 스승으로 섬겨 강론하고 질문하여 환연히 득함이 있어 더욱 독실히 실천하고 더욱 공부가 정밀하여 유림 간에 물망이 높았다.세종 기해년에 제일등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한원옥서로부터 청화아장 전조빈객을 역이하였다. 위연에서 군상에게 치국의 근본을 간간히 논하였으며, 일찍이 아뢰어 가로되 이제 말하는 사람들이 부국강병으로서 먼저 할 것을 생각하나, 그러나 이는 패정이 여습이니 인군이 정심하여 조정 백관 만민을 바로 잡은 즉 국가가 어찌 불부하며 병이 어찌 불강하리요.또 가로되 옛날에 선비들을 뽑아 학교에 들여보내 학문이 성공한 뒤 인품을 의논하고 의논을 정한 뒤 벼슬을 시키더니 이는 현부도 가리지 아니하여 고하도 의논하지 않고 대개 공령문사만 취하니 그 모국의 무결함을 바람이 또한 어렵지 않나이까. 또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유덕한 선비들을 뽑아 세자 곁에 두고 같이 기거하며, 출입하기를 장악에서 제어를 듣는 것 같이 한즉 종사생령의 무궁한 복이나이다.그때 상이 정치를 한번 잘하자는 뜻으로 마음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상의 총애가 일심하여 재상으로 추대 하였다. 공의 초상화를 어병에 그려 총애를 받았더니 갑진년에 부친상을 당하고 병오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그때 상기가 퇴패하여 백일로 탈복할세 공께서 홀로 삼년상을 행하여 쇠훼가 절도에 넘고 정문이 겸하여 극진하였으며, 사당을 세워 신주를 모시고 한결같이 예를 따르니 사람들이 많이 본받았다.일찌기 예문관 제학이 되어 정인지, 김도 등으로 더불어 명령을 받아 고려사를 찬하니 광국훈으로 경창군으로 봉하였다. 향리에 퇴로할세 상소하여 주목의 고을로 승격하고 일향문학의 선비들을 뽑아 별도로 유적을 만들어 장려하며 기르며, 또 향약을 세워 남전여씨 유의를 모방하여 춘추로 회합하고 권하며 따르게 하니 이에 광주 사림들이다. 경행을 돈상하여 민속이 크게 변하여 호남의 순향이 되었다. 나이 팔십에 돌아가시니 만산동 해원에 장사를 지냈다. 그 뒤에 이조판서 예문관 대제학을 증직하였다.제봉 고경명이 선생께서 창학의 공이 있다하여 일찍이 문묘에 배향할 것을 소청하였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니 식자들이 한탄하였다. 순묘 경진년에 사림들이 강진 수암에 사당을 세워 제사 지내니 아들 청심당 조원과 현손 중봉, 중호와 내손 동암 발과 남게 길이 같이 배향되었다. 그 가르침이 가문에 미친 것이 이와 같이 멀어도 없어지지 않고 덕이 남에게 미쳐 오래도록 잊지 않는 것을 가히 알 수 있다.부인은 정부인 보성선씨이니 다섯 아들을 낳았다. 시원은 판중추요, 찬원은 수찬이요, 조원은 이조참의로 이조판서를 증직받았고, 한원은 교리요, 형원은 부제학이요, 손증 이하는 하도 많으니 다 기록하지 못하노라.선생의 묘에 오래도록 신도비가 없더니 수혼 승일이 그 문중 부로의 명으로써 사백리 길로 가야산 서쪽에 와서 종석에게 비명을 청하니 생각해 보면 선생께서 졸아가신지 오백년이 지난지라 난리를 여러번 지나 문헌이 없어져 그 중요한 말과 아름다운 사적이 진실로 가히 다 알지 못한지라 삼가이 성재 허문헌공 전의 행장과 후손 승우의 기록을 상고하여 그 요점만을 뽑아 명을 짓노라. 명에 이른다.성한 문화여! 세종시대에 가장 훌륭하였으니 어찌 왕을 돕지 않을까? 필문을 닫지 아니하였으니 풍운의조화로다. 그 패도를 부끄러워하며 학문은 재주를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여 왕의 마음을 깨우치니 왕께서 버리지 아니하여 공의 초상화를 그려놓고 그 공적을 칭찬하였도다.의관이 줄줄이 늘어짐이며 읍양하고 효제하도다. 호남의 학문이 융융함은 양촌 권근과 매헌 권우의 제자로 조예가 깊었기 때문이다. 학문이 독실하니 면면개개가 봉황새와 붕조와 같이 상서스러워 그 씨족을 빛내도다. 천재에 게으른 사람들을 깨우침이여! 광산의 고을은 군자의집이로다. 호남에 광명을 주었으며, 호남에 몽매함을 면하게 하였으니 누가 그 공을 알리요? 임자년.*수정 2023.11.21.
    2018-06-11 | NO.107
  • 이세환-병마절도사광산이공세환의적비
    광주시 북구 오룡동 808(치촌마을 뒤)1972년이 병마절도사광산이공세환의적비(兵馬節度使光山李公世環義蹟碑)는 이세환의 행정을 李문수 짓고 쓰다.
    2018-11-13 | NO.106
  • 이시원-양심당묘정비급유허비창립기적비
    광주시 남구 임암길11번길 73-1이 양심당묘정비급유허비창립기적비(養心堂廟庭碑及遺墟碑刱立紀蹟碑). 
    2018-06-11 | NO.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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