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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政大夫承政院右副承旨贈資憲大夫吏曹判書成公墓誌銘- 성안의

通政大夫承政院右副承旨贈資憲大夫吏曹判書成公墓誌銘- 성안의 광주목사

갈암집 제25권 / 묘지명(墓誌銘),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의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익승(翼昇)인데, 아호로는 갈암 외에 남악(南嶽)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공은 휘가 안의(安義)이고 자는 정보(精甫)이며, 성은 성씨(成氏)이고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고려 때 휘 송국(松國)이 태위(太尉)가 되어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 이르렀고, 본조에 들어와서는 휘 만용(萬庸)이 판도 판서(版圖判書), 보문각 태학사(寶文閣太學士)를 지냈다. 명공(名公)과 거경(巨卿)이 잇따라 나와 동남(東南) 지방의 망족(望族)이 되었다. 증조는 휘가 익동(翼仝)이고, 조는 휘가 윤(胤)이고, 부는 휘가 궤(几)이니, 모두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모(母)는 장연 노씨(長淵盧氏)이니, 호조 참의 휘 사영(士英)의 따님이다. 대가(大家)에서 태어나 덕(德) 있는 집안에 시집와서 아내의 역할과 어머니의 역할을 함에 있어 모두 그 도(道)를 얻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준하고 숙성하여, 겨우 이를 갈 나이에 모부인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때 선공이 외출하여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공이 즉시 뜰 가운데 표(表)를 세우고 달빛에 비치는 그림자를 측량하여 시각을 기록하니, 듣는 사람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구두(句讀)를 배움에 미쳐서는 눈으로 본 것은 곧 외웠고, 집이 가난했으나 독서를 좋아하여 이름 있는 이에게 가서 배웠다. 성장하여서는 한강(寒岡 정구(鄭逑)) 정 선생(鄭先生)의 문하에 가서 배웠는데, 정 선생이 매우 인정하고 중시하였다.
만력 19년 신묘(1591, 선조24)에 비로소 벼슬을 하였고, 이듬해 여름에 일본이 난을 일으키니, 공이 의병장 곽공 재우(郭公再祐)에게 가서 따랐다. 또 관찰사 백암(柏巖) 김공 륵(金公玏)의 막하(幕下)가 되니 백암공이 경도되어 허여하였고, 이때 공이 막 상처(喪妻)하니, 마침내 맞이하여 형의 손녀서(孫女壻)로 삼았다. 공이 이에 양친을 모시고 영천군(榮川郡)에서 처가살이를 하였고, 피난 나온 친척들이 공에게 의지하였다.
갑오년(1594)에 교서관 부정자(校書館副正字)에서 봉상시 참봉(奉常寺參奉)으로 옮겼고, 정자(正字)와 저작(著作), 박사(博士)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봄에 규례에 따라 전적(典籍)에 올랐고, 여러 차례 옮겨 승문원 교검에 이르렀다. 가을에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뒤에 체차되어 예조의 낭관(郞官)이 되었다. 겨울에 관서(關西)의 좌막(佐幕)으로 나갔는데, 당시에 난리를 당하여 기무(機務)가 매우 많았지만 일마다 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병신년(1596) 겨울에 조정에 들어와 성균관 직강이 되었고, 이듬해 가을에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가 사간원 헌납으로 옮겼다. 또 이듬해 가을에 조정에서 정신(廷臣) 중에 위망(威望)이 있고 간국(幹局)이 있다고 일컬어지는 자를 차출하여 군량미를 공급하고 황정(荒政)을 검속(檢束)하게 하였는데, 공이 병조의 낭청으로서 영남 조도사(嶺南調度使)의 임무를 받아 시기 적절하게 일을 처리하여 그 자리에서 해결하는 것이 많았다.
이때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유 문충공(柳文忠公)이 영남(嶺南)에 개부(開府)하였는데 자주 세상을 구제할 재능이 있다고 공을 칭찬하였다. 이어 근친(覲親)하기 위해 휴가를 받았는데, 총독사(摠督使) 윤승훈(尹承勳)이 평소 공에게 유감을 가지고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관직을 비우고 직차(職次)를 이탈했다고 무고하여 드디어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일이 장차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었는데, 문충공이 치계(馳啓)한 데 힘입어 용서받게 되었다. 공이 풀려나온 뒤에 더욱 스스로 노력하여 군량미를 조달하고 기민을 구휼하여 군국(軍國)이 이에 힘입었다.
경자년(1600) 가을에 일을 마치고 조정에 돌아오니 성적(聲績)이 혁혁하였다. 시의(時議)가 장차 화요직(華要職)을 맡기려 하였는데, 공이 어버이가 늙었다는 이유로 걸군(乞郡)하여 외직으로 나가 영해 부사(寧海府使)가 되었다. 지친 백성들을 무마하고 학교를 널리 권장하여 정사를 한 지 4년 만에 온 경내가 치적을 칭송하였다.
갑진년(1604) 가을에 어버이의 병이 있어 창녕에 돌아왔는데, 잇달아 내외간(內外艱)을 당하였다. 장사를 지낸 뒤에 분암(墳庵)을 지어 영모(永慕)라는 현판을 달아 놓고 슬퍼하고 돌보며 그리워하는 곳으로 삼았다. 거상(居喪)하는 여가에 고을 사람들의 자제를 가르쳐서 성취시킨 자가 많았다고 한다.
상을 마치고 나서 남원 부사(南原府使)에 제수되었는데, 그곳은 규모가 크고 일이 많아 평소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로 일컬어졌다. 공이 폐단을 혁파하고 쇠잔한 백성을 소생시키며 결재를 지체시킴이 없었고, 퇴청(退廳)한 뒤에는 번번이 고을의 현자를 초대하여 강론하고 술 마시고 시를 지으며 즐기니, 암행 어사가 공장(功狀)을 올릴 때 뛰어난 치적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상이 총애하여 관작을 높여 주려 하였으나 그때 방해하는 자가 있어 그 일이 마침내 취소되었다.
신해년(1611) 봄에 규례에 따라 광주목(光州牧)으로 옮겼는데, 공의 뒤를 이어 남원 부사가 된 자가 당시 재상의 뜻에 따라 공의 허물을 캐내려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광주 목사가 된 지 겨우 1년 만에 당로자(當路者)의 비위를 거슬러 파직되어 영천(榮川)으로 돌아왔다. 한가히 지내면서 심신을 수양한 지 13년이었는데, 자주 점잖고 덕 있는 선배들과 교유하고, 또 유인(幽人), 일사(逸士)와 더불어 즐거이 임천(林泉)에 모여 배회하며 유유자적하게 지냈다.
당시에 광해(光海)의 정치가 어지럽고 세도(世道)가 크게 무너졌는데, 공은 흔들리지도 않고 꺾이지도 않아 고을과 나라에서 존중받았고, 도(道)를 높이고 덕을 숭상하는 일에는 반드시 솔선하여 사림(士林)의 수창자(首倡者)가 되었으나, 집안의 자제들은 알지 못하게 하였다. 계해년(1623)에 반정(反正)하여 노성(老成)하고 현달(賢達)한 사람을 불러들였는데, 공은 사성(司成)으로서 상의원 정(尙衣院正)으로 옮겨졌고, 다시 봉상시 정(奉常寺正)으로 옮겨졌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반란으로 공이 어가(御駕)를 호위하여 공주(公州)로 갔고, 돌아와서는 호종한 공로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이어 제주 목사(濟州牧使)에 제수되었는데, 조정의 의론이 그가 늙은 것을 걱정하여 가지 않기를 바랐으나, 공이 말하기를, “신하의 의리는 어려움을 사양하지 않는 것이다.” 하고 즉시 떠나서 임지에 가서 어질고 관대한 정사가 많으니, 백성과 아전들이 사모하였다. 병인년(1626) 봄에 일로 인하여 파직되어 돌아왔다.
숭정(崇禎) 무진년(1628, 인조6)에 서용(敍用)되어 서함(西銜)에 부직(付職)되었고, 곧이어 승정원 우부승지에 제수되었는데, 병으로 사양하고 부름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2월 모갑(某甲)에 집에서 고종(考終)하니, 향년 69세였다. 이해 모월 모일에 군(郡)의 동쪽에 있는 석현(石峴) 경향(庚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으니, 생전의 명(命)을 따른 것이다.
그 후 19년 뒤 정해년(1647)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서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고, 또 아들 이성(以性)이 영국 공신(寧國功臣)이 되었기 때문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세자좌빈객 오위도총부도총관(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世子左賓客五衛都摠府都摠管)에 추증되었다.
공은 두 번 장가들었는데, 전부인(前夫人) 황씨(黃氏)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근(謹)의 따님이고, 후부인(後夫人) 김씨(金氏)는 호조 참판 계선(繼善)의 따님이다.
5남 5녀를 두었는데, 장남 이침(以忱)은 어진 행실이 있었으나 일찍 죽었고, 지평(持平)에 증직되었으며, 차남은 이각(以恪)인데 전부인의 소생이다. 3남 이성(以性)은 화현직(華顯職)을 두루 역임하였고 자급은 통정대부이며, 청백리(淸白吏)로 저명하였다. 4남은 이념(以恬)이고, 5남은 이항(以恒)이다.
다섯 사위는 참봉 이억(李嶷), 사인 박료(朴炓)ㆍ이천표(李天標)ㆍ이문한(李文漢), 문과 급제(文科及第) 권도(權鍍)인데, 5녀는 모두 후부인의 소생이다. 지평이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창하(昌夏), 창리(昌李)이다. 이각이 4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응하(應夏), 경하(慶夏), 강하(康夏), 도하(度夏)이다. 통정(通政)이 5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 갑하(甲夏)는 진사이고, 석하(錫夏), 득하(得夏), 용하(用夏)이고, 문하(文夏)는 참봉이다. 이념이 4남을 두었는데, 명하(命夏), 정하(正夏), 시하(時夏)이고, 대하(大夏)는 생원이다. 이항은 아들이 없어 득하를 후사로 삼았다. 내외의 손, 증손, 현손을 합치면 100여 명이다.
공은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효성스럽고, 형제와는 우애로웠으며, 집안의 식솔을 거느리고 빈객을 접할 때 정성과 신의로써 하여 속이지 않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또 남의 과실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들과 구차히 영합하려 하지 않았지만 남들이 사모하여 함께 사귀었다. 공은 관대하고 온후하며 외모가 준수하여 중인(衆人)들이 거인 장자(巨人長子)로 추대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박학하여 통달한 것이 많았고, 특히 심계(心計)를 잘하였다. 관리의 일을 가지고 결정함에 있어 남보다 뛰어났으나 대부분 백성을 사랑하고 옛 법을 지키는 것을 힘쓰고, 겉으로 엄하거나 심히 각박한 것을 능사로 여기지 않았다. 분수에 편안하여 스스로 만족하고, 영리를 도모하는 데 급급하지 않았다.
당시에 사우(師友)로 교류한 사람은 월천(月川 조목(趙穆)),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동계(桐溪 정온(鄭蘊)), 창석(蒼石 이준(李埈)) 등 여러 노선생이고, 사서(沙西) 전식(全湜)은 막역한 벗이었다. 공이 돌아가신 지 60여 년 뒤에 창녕 사람들이 부용당(芙蓉堂) 곁에 공을 제사 지내고 이공 장곤(李公長坤)과 병향(並享)하니, 이곳은 공이 평소에 강학하던 곳이다. 현일이 뒤늦게 태어나 공을 알지는 못하지만 공이 영해부(寧海府)의 수령을 맡았을 때 나의 왕부(王父) 참판공이 백성의 예로 공을 섬겼고 공이 매우 우애롭게 대해 주셨고, 나의 선인(先人) 형제가 또 공의 제자(諸子)에게 배워서 공의 행의(行義)에 대해 익히 듣고 즐겨 말하였기 때문에 내가 일찍이 전해 듣고 흠모하였었다. 지금 공의 손자 용하가 가첩(家牒)을 받들고 와서 묘지명을 써 달라고 하면서 선대의 교분을 가지고 거듭 요구하니, 의리상 사양할 수 없어 서(序)와 명(銘)을 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선비가 혹 덕은 넉넉한데 재주가 부족한 경우가 있고 / 士或德優而才歉
또한 재능은 많은데 행실이 불완전한 경우도 있다 / 亦有多能而行不完
그러므로 두 가지를 겸비하기가 / 故兼二者而有之
자고로 어렵다고 하였다 / 自古以爲難
오직 공은 이미 이 아름다운 덕이 있고 / 惟公旣有此德美
또 그 재능이 어려운 시국을 구제하기에 충분하였다 / 又其才猷足以濟時艱
그 평생에 세운 공을 돌이켜 보면 / 跡其平生所樹立
어찌 이른바 선인 군자가 아니겠는가 / 豈所謂善人君子者邪
아, 지위가 재능을 따라가지 못하니 / 吁嗟乎位不滿能
그것이 명임을 어찌하랴 / 其如時與命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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