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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오재양만용선생신도비

광주시 광산구 동호동 산 32-2

1986년


據梧齋梁曼容先生神道碑는 박도빈(1828~1866)이 찬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는 오재 양공의 묘이다. 공의 7대손 찬영이 나의 선군자를 찾아 뵙고 비명을 부탁했었다. 선군자께서는 뜻이 있었으나 이루지 못했다. 지금 찬영씨가 그의 장남 상기를 보내서 도빈에게 부탁했다. 도빈은 뜻이 계술에 있으니 어찌 감히 문장이 아니라고 사양할 수 있겠는가? 삼가 행장을 살펴보니 공의 휘는 만용이요 자는 장경이다. 선조의 계통은 탐라에서 나왔고 증조 학포는 휘가 팽손인데 홍문과 교리로서 정암 조선생과 함께 기묘화를 당하고 나란히 죽수서원에 철향되었다.
조부 송천은 휘가 응정인데 대사성을 지내고 문장으로 일세를 복종시켰다. 고의 휘는 산축인데 율곡 이선생을 스승으로 받들고 경학에 전심하여 처사로 불리었다. 임진란 때 형 생원 산룡, 좌랑 산숙과 의병을 일으켰고 정유재란에 이르러 모부인 박씨를 모시고 창날을 피해 바다로 갔다가 졸지에 적을 만나서 나주 삼향포에서 순절했다. 효를 포상하여 정려문이 세워졌다. 비는 장흥 고씨인데 효열공 종후의 딸로서 부도를 지니고 서사에도 능했다. 정유년 부인은 바야흐로 임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온 가족과 함께 바다에 이르렀다가 계집종들이 구출하여 다행히 목숨을 구했다.
만력년간 무술(1598)년 3월 24일 공을 낳았다. 공이 5세 때 참새새끼를 얻어서 가지고 놀았는데 갑자기 죽어 버렸다. 공은 종이에 싸서 파묻고서 말하길 「새가 죽었는데 사람이 묻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나 때문에 죽었으니 이런 까닭에 묻는 것이다」라고 했다. 보는 사람이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글을 배웠는데 한 번 들으면 곧 외웠고 시문을 짓는데 말이 곧 사람을 놀라게 했다. 성품이 소탕하여 글 읽는 소리를 섬기지 않았는데 일찍이 외지스승인 수은 강항공에게 매를 맞아 피가 흐르고 종기가 생겼다. 그런데 구더기가 생기게 되도록 오히려 굴복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물으니 공이 말하길 「글을 다독하면 소견이 좁아질까 두렵기 때문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오. 복종하고 다독하지 않으면 자기를 기만하는 것이며 장자를 속이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강공이 또 썩은 새끼줄로 묶어서 깊은 못 위 누운 소나무 가지에 매달아 놓고 두렵게 하고자 했는데 공은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았다. 하루는 알리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모부인이 친히 그 종기를 씻어 주고 그날로 돌려보내자 야막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곧 자책하기를 「존사께 알리지도 않고 왔는데 또 자모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으니 내가 어찌 사람인가?」하고선 즉시 스승의 집으로 갔다. 강공은 독려함이 지나치고 더욱 엄했는데 갖가지 방법으로 위협했다. 한 번은 옷을 벗겨서 더러운 연못 속에 집어넣으니 거머리가 달라붙어 피를 빨았으나 또한 날이 다 지나도록 굴복하지 않고 웃으며 말하면서 태연자약했다. 하루는 공이 갑자기 마음을 바꾸고 말했다. 「다독하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공은 이로부터 공경하게 대하는 방책을 잠시도 거두지 않아서 여름에는 옷이 썩어 헐었다. 어떤 사람이 전후의 근면함과 게으름이 같지 않음을 물으니 공이 대답하기를 「전에는 뛰어난 기억력에만 의지했지만 지금은 곧 숙독하고 상세히 음미한 이후에야 궁리진성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하였다. 비로소 성동이 되어 문사가 크게 성취되었는데 강공이 그 문조를 몹시 칭찬하여 이르길 「등림의 큰 강물이 붓 적실 물 대기에 부족하네」라고 했다. 그의 자랑함이 이와 같았다.
청년이 되어 남곽 박동열공의 문하에 학업을 청하여 경적에 침잠하고 성리를 탐색했다. 이때 혼조를 당하여 나설 뜻이 없었다. 그러나 부모 때문에 억지로 과거시험에 나갔다. 인조가 개옥한 이듬해 역적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어가가 파천했다. 공은 변란의 소식을 듣고 곧 적을 칠 의거를 부르짖고 병량을 모을 계책을 세웠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적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계획을 그쳤다. 이로부터 과거시험에 나가지 않고 날마다 주자서를 강론했다. 정묘년 금나라 오랑캐가 평산에 이르자 호소사 사계 김 선생이 양호에서 군대를 일으키니 공은 다시 거병하여 그 모임에 응했다. 그러나 조정과 오랑캐가 화해하여 곧 돌아갔다.
숭정 계유년 생원과 진사에 장원 합격하고 또 문과에 뽑혀서 그날로 한림에 배수되었다. 갑술년 시강원 설서, 예문관 검열에 배수되었다. 이때 적신 김자점이 전권으로 징병하니 여러 관료들이 두려워서 위축되었다. 공이 홀로 말하여 죄줄 것을 청했다. 양파 정태화공이 그 소식을 듣고 「조정에 직신이 있구나」하였다. 얼마 안 있어 호당에 추천되고 예문관 대교와 봉교로 승진되고 예조좌랑과 겸설서로 임명되었다. 한림과 주서로서 날마다 경광을 모시면서 진퇴가 민첩하고 기주가 물 흐르는 듯했다. 상께서 그 고아한 용의를 사랑하여 그 손을 잡고 그 수염을 어루만졌다. 그것은 특별한 대우였다. 후에 오랑캐 사신이 와서 인정전에서 불러 보았는데 따라온 오랑캐들이 난입함이 많았다. 공은 몹시 분노하여 상소를 올려 척화를 주장했는데, 그 상소에 「호전은 작은 조정에 차마 머물지 못했다」는 말이 있었다.
병자년 겨울 오랑캐가 들어와 노략질을 하자 공은 호남의 수재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서로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구획을 이미 정했는데 이때 널리 알리는 교서가 남한산성이 포위된 가운데서 왔다. 공은 그것을 읽고 통곡하다 실성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격문을 쓰고 여러 의사들과 여산에서 모일 것을 약속했다. 집으로 돌아와 모부인과 이별하니, 모부인이 말하길 「힘껏 하여라. 나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정축년 시산에 도착하여 시를 쓰기를 「마땅히 남한산성의 달은 고신의 한 조각 충성을 비추리라」고 했다. 그것은 공의 스스로의 맹서였다. 청주에 이르니 적병이 점점 가까이 왔다. 공은 몇 명의 기병을 따라 적을 살폈다. 적은 산골짜기에 모여 소를 잡아서 먹고 있었다. 갑자기 들이쳐서 9명을 목 베고 그 적의 물자들을 취했다. 바야흐로 군사를 옮겨 험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러 의사들과 함께 북쪽을 향해 통곡하고 즉시 달려가 도성 아래에 이르렀다. 그리고 항소하여 대의를 밝혔다. 인조가 가상히 여겨 표창했다. 이로부터 물러나서 선롱을 지키면서 세상일에 뜻을 끊어 버렸다.
항상 주자의 내수외양의 의리를 강론함으로써 충분의 마음을 드러냈다. 말이 병자, 정축의 일에 이르면 칼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정언에 배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무인년 전남도사에 배수되어 숙명 하고서는 곧 돌아왔다. 조정에서 재학으로서 전량으로 추천했다. 이때 대각에서 원망을 품고 무고하는 상소가 있어 연서찰방으로 강등하여 제수했다. 기묘년 흥양현을 맡아서 모든 일을 맑게 다스리니 이민이 편안하게 여겼다. 신사년 모부인의 상을 당하여 너무 슬퍼하여 몸이 여윈 것이 정도에 지나쳤다. 계미년 홍문관 수찬에 배수되고 갑신년 거듭 배수된 후 정언에 배수되었다. 그러나 연이어 나가지 않았다. 또 부수찬에 배수되어 여러 번 은혜로운 부름을 받고 한 차례 사례드린 후 곧 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또 정언에 배수되었는데 이 해에 명나라의 운명이 끝나고 청인이 연경에 들어와 점거했다. 공은 명나라가 임진년 두 차례 군대를 보내 준 은혜와 정축년 남한산성 아래의 수치를 설욕할 것을 말하면서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나중에 연경 가는 사신을 전송하며 「의관과 문물이 모두 새로 보는 것이고 성곽과 우정도 옛날과 다르다 하는데 만약 황금대 아래 길을 지나거든 나를 위해 모름지기 여러 군신들에게 위문해 주시오」라는 시구절을 썼다.
을유년 교리에 배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때 척화제신의 무리가 조정을 떠나감이 많아서 성지가 엄절하여 끝내 교체되어 돌아올 수 없었다. 수찬에 배수되고 사헌부 장령으로 옮겨졌는데 회곡 조한영공의 삭직 사건에 상소하여 구하려다 뜻에 거슬려서 연루되어 파직당했다. 그리고 다시 수찬과 시강원 보덕에 차례로 배수되었다. 병술년 여러 번 집의, 부수찬, 부교리, 부응교, 응교, 사복시정에 배수되고 영국원종공신 이등 제이로 녹훈되고 여러 학교의 교수를 역임했다. 무자년 천재가 거듭 이르러 인정이 흉흉하고 소란스러웠다. 공은 사간으로서 소를 올려 궁궐을 규탄했는데 말이 모두 매우 적절하였다. 이 일로 인해 나주 옛집으로 돌아와 노년을 마칠 계획으로 삼았다. 기축년 인조가 세상을 뜨고 효종이 즉위하여 부수찬을 배수했다. 그런데 대각에서 소를 올려 국애사에 오지 못한 것을 언급하여 파직되었다. 한때의 명공들이 많은 소를 올려 구원하였다. 경인년 청풍군수에 배수되었다. 관용에 관련하여 민폐를 끼친 사람은 모두 견책하고 파면했다. 그리고 곳간을 헐어 백성의 고통을 구휼함에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다.
신묘년 8월 26일 관사에서 고종하니 향년 54세였다. 공은 풍자가 영위하고 기량이 굉박했으며 문장과 절의는 세상에서 흠양을 받았다. 그러나 도리어 퇴연하게 스스로 영욕에 굴신하지 않고 처신이 여유로웠다. 대개 남의 착한 점을 좋아하고 나쁜 점을 치지 않고 명리에 흔들리지 않은 것은 천성이 그러하였다. 갑자, 정묘의 난에 포의로서 창의하였으나 미처 어려움에 다다르지 못했는데 곧 난리가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나라의 다행이었다. 그러나 공의 충성은 이미 병자년 난리에서 드러났으니 바야흐로 수백의 오합지졸로써 수백만의 사나운 올빼미 같은 적을 당하여 분발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죽음을 무릅쓰고 북쪽으로 갔는데 갑자기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비록 계책을 쓰지 못했으나 그 충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그 대절에 임했을 때 그의 뜻을 빼앗을 수 없음이 또한 이미 환하게 드러났다. 그러므로 고금에 있어서 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궁궐의 신하보다 결코 아래가 아니었다. 곧 통곡하고 남쪽으로 돌아와서 의리를 지키고 강학을 자정의 요체로 삼았다.
비록 은륜이 여러 번 내려와서 끝내 열심히 직책을 받들게 되었지만 그 어렵게 나아가고 쉽게 물러나는 마음은 시종 한결같았다. 시남 유계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경연에 만약 양학사를 얻어온다면 틀림없이 좋을 것이다」라고 했다. 청음 김상헌공도 「장경은 지절이 있으니 그가 기꺼이 출사하겠는가?」하였다. 그로 인해 유공을 시켜 출사의 의리로써 타이르게 했다. 대개 공을 알아 준 사람은 김, 유 두 분인데 공의 일어남은 또한 도량과 의리가 있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혹 병자, 정축년 후의 관함을 척화신의 허물로 여겨 격론을 하였다. 유고가 집에 소장되어 있고 배필은 광주 이씨 현감 태남의 딸이며 우의정 인손의 후손이고, 문화 유렴의 외손이다. 순의단장하고 부도가 갖춰짐이 지극했다. 묘소는 나주 장본면 서쪽 기슭 계좌이다.
공은 처음엔 동복 대원산에 묻혔다가 나중에 부인 묘 아래 계좌에 옮겨 묻혔다. 2남 4녀가 있는데 장남 화남은 요절했다. 차남 세남은 참봉으로 종사를 받들었고 장녀는 송지하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최거옹에게 시집가고 3녀는 군수 이정룡에게 시집가고 4녀는 진사 임치에게 시집갔다. 화남에게는 딸 한 명이 있는데 이분에게 시집갔고 세남의 아들은 극가와 대가이고 송지하의 아들은 기재, 기창, 기백이다. 최거옹은 아들이 여일이고 장녀는 윤유 동추에게 시집가고 차녀는 노주에게 시집갔다. 이정룡의 아들 오는 부사이고, 택은 생원 문과로 참판이었고, 협은 진사, 집은 문과로 감사였고, 딸은 박태정에게 시집갔다. 임치의 아들은 규와 예와 기이고 딸은 참봉 윤시교에게 시집갔다. 내외의 증현들을 다 기록하지 못한다. 명에 다음과 같이 쓴다.


사람을 보는 데는 술이 있으니
출처와 사생이
어렵고 쉬울 때
이 생을 저울질하여 처함에 쉬운데로 나아가면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어렵고
시대의 조처를 삼가 생각하고
사는 바에 오묘한 뜻을 밝혀서
나가야 할 때 나가고
마땅히 살아야 할 때 사니
누가 그러하였던가?
오재선생은
충문에서 빼어나와
사는 바를 더럽히지 않고
어린 시절의 우뚝함을
평생 지켜 이루었네.
간혹 시대적 처신에 있어
스스로 생을 기약하지 않았네
마땅히 이 명을 거울삼을지어다.
모든 후생들이여.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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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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