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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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찰충혼탑(1956)
    남구 사동 177 사직공원광주 사직공원에 세운 탑으로 여순 사건과 한국전쟁 등 당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광주, 전남출신 순국 경찰관 3,196명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높이가 약 14m에 이른다. 1956년 전남도청 앞 상무관 정원에 건립되었는데 1981년 10월 23일 현재의 위치에 이전했다.
    2018-06-19 | NO.329
  • 고경명-임란의병장 충렬공제봉고경명선생상
    광주시 서구 화정동 407-17 광주월드컵경기장 북문옆 무궁화동산서구 풍암 월드컵경기장 북문 옆 공원에 임진왜란 때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북상, 왜군과 싸우다 1592년 충청 금산전투에서 아들 인후(因厚)와 함께 전사한 고경명(高敬命) 장군을 기리는 동상이다.
    2018-06-19 | NO.328
  • 고계영-장흥고씨진사공휘계영기념비
    광주시 동구 선교동 410-142013년
    2018-11-30 | NO.327
  • 고동재-성재 장흥고동재 모선공적비
    광주시 남구 포충로 701(원산동), 황산사 1987년성재 장흥고동재 모선공적비는 황산사 올라가는 옆길에 있다. 1987년에 세웠다.
    2018-10-21 | NO.326
  • 고산 윤선도 '오우가'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1587∼1671)의 '오우가'(五友歌)내 벗이 몇이나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동산에 달오르니 그더욱 반갑고야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구름빛이 좋다하나 검기를 자로한다바람소리 맑다하나 그칠적이 하노매라 좋고도 그칠뉘 없기는 물뿐인가 하노라꽃은 무슨일로 피면서 쉬이지고풀은 어이하여 푸르는듯 누르나니아마도 변치않는건 돌뿐인가 하노라더우면 꽃피고 추우면 잎지거늘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는다구천에 뿌리 곧은줄을 그로하여 아노라풀도 아닌것이 나무도 아닌것이 곧기는 뉘 시키며 속은 어이비엇는가저렇고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작은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치니밤중에 광명이 너만한이 또 있느냐보고도 말 아니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2018-06-21 | NO.325
  • 고원희가옥
    광주시 남구 압촌길 68(압촌동)1917년남구 압촌동의 고씨삼강문과 추원각을 지나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솔숲을 배경으로 산기슭에 자리잡은 고원희 가옥이 있다. 고택에 못미쳐 작은 정자가 하나 있는데 이름하여 ‘파향정(把香亭)’이다. 정자 옆으로는 고원희 가옥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콩문화센터가 있다. 대문채는 세칸 규모로 양쪽에 방을 두고 가운데 문이 위치해 있다. 소박한 모습의 대문이다. 대문 옆으로 담장을 터서 주 출입구로 이용하고 있는데 이는 대문으로 차량 등이 드나들 수 없기 때문이다. 고원희 고택늬 사랑채는 대가집치고는 규모가 크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다. 화려한 벼슬살이를 하지는 않았지만 기품있게 살다 간 고경명 장군의 모습과 닮은 듯하다. 담백하게 서 있는 모습이 오히려 더욱 기품있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사랑채는 정면 4칸 규모로 사랑방에 이어 한칸 규모의 대청이 오른쪽 끝으로 약간 높게 자리하고 있다. 이 대청은 양쪽 2면이 모두 창호로 닫혀 있다. 한쪽 창호는 들어열개로 열 수 있도록 돼 있다. 또한 사랑방에서 대청쪽으로도 들어열개가 있어 이를 통해 공간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구조다.사랑채 옆으로는 안채로 통하는 중문이 있다. 안채는 사랑채에 비해 규모도 크고 널찍하다. 정면 7칸에 측면 2칸반의 겹집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팔작지붕의 합각부분에 새긴 문양도 아름답다. 정면에는 안방에서부터 건넌방까지 툇마루가 이어져 있다. 가운데 두칸이 대청이다. 이곳 역시 사랑채처럼 창호를 만들었다. 겹집 구조나 대청의 창호 등을 보면 이곳이 겨울에는 다소 추웠던 지역으로 짐작된다.안채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조금 높은 곳에 사당이 있다. 이 사당은 고경명 장군을 비롯해 그의 두 아들인 고종후와 고인후를 모시는 불천위 사당이다. 대개의 경우 종가에서도 4대 선조까지의 제사를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데, 불천위란 영원히 제사를 모실 수 있는 인물로 이는 나라에서 정해주는 인물들이다. 장흥 고씨가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것은 현 종손 고원희씨의 20대 선조인 고자검(高自儉)때다. 압촌마을 장흥 고씨의 중시조이다. 집에서 마주 보이는 마을 오른편 산기슭에 아래 위로 묘가 있는데, 바로 고자검과 그의 아들인 고운(高雲)의 묘이다. 당시 살던 집도 그곳에 있었다.고경명 장군이 고운의 아들이자 부친인 고맹영(高孟英)의 묘를 현재 삼강문이 있는 쪽으로 모시면서 집터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잡았다. 당초에는 지금보다 건물이 더 많았다고 한다. 콩문화센터가 있는 곳도 원래는 이 집의 일부로 고종석의 둘째 아들에게 분가시켜준 집이었다. 광주시에서 콩문화센터 운영을 위해 임대를 요청해 30년간 임대해주기로 했다는 게 고원희씨의 설명이다.고씨 문중 종가에 자손이 귀해 양자들이 더러 들어왔다. 현재의 집을 건립한 고종석도 양자로 들어왔고, 그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큰 아들에게는 아들이 없고 작은 아들에게 아들이 있어서 큰 집에 양자로 들어오게 됐다. 고원희씨는 바로 그 양자로 들어온 이의 아들이다.
    2018-12-03 | NO.324
  • 고재춘-삼각산
    광주시 북구 오치동 66북구 오치동 광주노씨 재각 100미터 전 왼편에 세워졌다. 2005년 오치1동 주민자치위원회에서 주민 공모를 거쳐 운봉 고재춘의 '삼각산'이라는 시를 선정해 시비를 세웠다.
    2018-12-07 | NO.323
  • 고정희 시비 '상한 영혼을 위하여'
    해남 출신의 고정희(1948~1991) 시비는 북구 광주문화예술회관 내에 있다.  이 시비는 박홍원, 범대순, 문도채, 손광은, 전원범, 김종, 정윤태, 신동언 등이 건립위원이면에는 그의 흉상과 함께 1983년에 쓴 「상한 영혼을 위하여」 전문이, 뒷면에는 그의 행적이 새겨져 있다. 시인을 소개한 글은 김종이 썼고, 글씨는 정광주,  조각은 박광구가 했다. 1997년 10월 15일 광주광역시 문인협회에서 세웠다.고정희(1948∼1991)는 전남 해남군 삼산면 송정리에서 출생하여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1975년 ????현대시학????에 시 「부활 그 이후」,「연가」 등이 추천되어 문단에 나왔다. 1989년부터 ‘목요시’ 창립동인으로, 1984년에는 ‘또 하나의 문화’ 동인으로 활동했다. 또한 1988년에는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역임했으며, 1991년 6월 9일 취재차 오른 지리산에서 불의의 사고로 타계할 때까지 독신으로 생활하며 시 창작에만 전념했다.시집으로는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1979), ????지리산의 봄????(1987), ????광주 눈물비????(1990), ????아름다운 사람 하나????(1991) 등 10여 권이 있다. 그는 시 창작에서 고정 관념적 여성주의를 멀찍이 벗어나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투시력과 비판을 종횡으로 구사한 능력 있는 시인이었다. 그는 또한 분노에 젖었던 시대적 아픔을 힘차고 당당한 서정으로 고양시켜 실천적 의지와 전망을 참신한 표현으로 보여주었다. 상한 영혼을 위하여(고정희, 1983년)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뿌리 깊으면야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들불은 켜지듯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고통과 설움의 당 훨훨 지나서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마주잡은 손 하나 오고 있거니
    2018-06-21 | NO.322
  • 고제철 박사 공덕비
    서구 용두동 414-1고제철박사공덕비는 1988년 3월 전주 이한용이 찬하고 남양 홍순만이 썼다.충렬공 고경명 장군의 11대손으로 서구 용두동에서 태어났다. 송원대학교 설립자이며 금강기업 회장이다.
    2018-05-30 | NO.321
  • 고한석-겸헌고공행적비
    광주시 동구 지원동 용연마을1976년이 겸헌고공행적비(謙軒高公行蹟碑)는 장흥고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고한석, 자는 도일이다.公姓高氏諱漢錫字道一號謙軒公之平口言行常自謙故當時士林公稱之號也盖高氏始自耽羅乙邦致麗朝良獻公諱福林有勳封長建興伯故仍籍焉於公爲十八代祖也李朝成均生員 贈司憲府持平號滄浪諱敬履九代孫也公生長于簪纓世家天姿淳粹溫恭自虛言動以禮惟以飾躬奉先導迪門子弟爲弟石義今外榮達推暴別人念化者吾宗族門戶植敦(이하 입력중)睦增揱先祭有田止衛墓道具儀物皆使無遺感焉此莫非公之垦生誠孝廣 恩義之致也於乎公之盛德高義己, 郷黨定論無待乎門少輩之讚沙阿好乜然異及公時喜有以墓效而承述之者則不可己也此承裕契之設而樂其有賢父兄也周年後公輒知峻責嚴絶不容貸時日故不敢遠嚴今而强忍而罷悔恨之餘以實想告于大小門長老則僉曰公也固有實德實行者也豈可以公之自謙而拒絶沒其實而蔑承述之道乎於是更謀於門 則周盛之餘欣然從之比承裕契之耵以復設而實因公之老昏不者者也未數月而公遽見背後生之痛爲何如哉因其從f濟信勞力拮据而僅僅維支日濟信告余曰而今世道日非人心   첨륜향모선덕지심일익소박유공오계역수이해지이탄보의원석일言而記碑使進常目재지인득기덕화무량이이以爲水冬慕效之資如何余悵然良久以其自소견德己久向慕尤심고불감이무졸고사이서기만일凡我門少令而後能認得非復公在之曰而深念倚靠着부득지의而自省自勵常思喜以振拔於衰李則可謂善於承述而忠於爲謀矣若夫簪裾도재이唁行不相顧虛장성名而沒其實者非但余習性之所惡也公亦厭之矣   檀紀四千三百九年丙辰二月
    2018-11-11 | NO.320
  • 관암류공상렬기적비
    광주시 광산구 본량신촌동기 59-6(동호동) 대동사1998년이 관암류공상렬기적비 寬菴柳公庠烈紀績碑는 월성 정동휘가 짓고 철성 이석환 쓰다. 이름은 상열庠烈이며 자는 관일寬逸이다.관암 유상열(寬菴 柳庠烈)이 광산구 본촌동 호은정(湖隱亭)에 지은 시에 정자를 지은 의미가 남아 있었다.호산(湖山)위에 몸을 숨겨 칩십춘(七十春)이 되었는데천석(泉石)위에 지은 정자 그 모습이 새롭도다자손 위해 남긴 유업(遺業)이 늙은이 제일이요뜻에 의해 이룬 사업이 사람을 보았도다.독실하는 그의 행동 많은 선비 칭찬하고일생동안 힘을 모아 그의 몸을 지켰도다매화나무 벗을 삼아 성심으로 좋아하니교자 같은 높은 유풍 평탄하여 솔진(率眞)하네.호은(湖隱)은 심원하(沈遠河)의 호이며 호수의 물가에서 숨어 산다는 은거호상(隱居湖上)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작지만 정자가 갖는 상징성은 다 지니고 있다. 관수정이란 정자에도 이런 시를 남겼다.謹次觀水亭韻 重修舊址十分椽眼下龍 江又鵲川返照魚登波底 峀高秋鴈落渡頭天竹山 風宿村相接松洞雲坪野 更圓靜坐悠然觀以術無 人不謂是神仙 寬菴文化柳庠烈
    2018-11-21 | NO.319
  • 관암류선생강학기적비
    광주시 광산구 동호동 신촌마을1978년이 관암류선생강학기적비寬菴柳先生講學紀蹟碑의 주인 이름은 상열庠烈이며 자는 관일寬逸이다. 신촌마을에 있다. 문화류씨 문중에서 관리한다. 문화류씨 좌상공파 대승공(左相公派 大丞公) 32세손이다.유상열(柳庠烈, 1880~1962)은 자 관일(寬逸), 호 관암, 본관 문화(文化)이다. 고조는 명종(命宗), 증조는 흥일(興一), 조는 위영(渭榮)이고, 아버지 인엽(寅燁)과 어머니 금성나씨(錦城羅氏) 종익(鍾益)의 딸 사이에서 1880년(고종17) 10월 17일 나주 금호리(琴湖里)에서 태어났다. 1950년 한국전쟁 때에도 후진을 이끌고 강학을 전수하였으며, 향리의 사람들을 위무(慰撫)하였다. 1962년 봄에 한기(寒氣)로 인하여 병이 일어 6월 16일 자제들에게 효제(孝悌)를 당부하고 사망하였다. 묘는 나주 본량면(本良面) 신촌(新村)에 있다. 문집으로 관암유고가 있다. 화호영당(華湖影堂)에서 발행했다. 관암유고는 1965년에 간행된 1책 석인본이다. 권수 구분 없이 시(詩), 서(書), 서(序), 기(記), 발(跋), 장(狀), 문(文) 등과, 부록(附錄)으로 만사(輓辭)와 제문(祭文)이 수록되어 있다. 서(序)는 유인원(柳寅瑗, 1965), 발(跋)은 심영구(沈永求, 1965)가 썼으며, 책의 첫 머리에 서(序)와 발(跋)을 함께 실어놓았다. 책의 끝 부분에 충현각각회록(忠賢閣講會錄)과 계원명록(契員名錄)이 있어 그 당시 저자와 교유하였던 지역 인사들에 관하여 알 수 있다. 이 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내용 정리중)道百而難齊未可率爾解必須先覺之解惑而講說之難疑?問然復曲暢旁通以入於眞師之功其大矣夫寬菴柳先生諱庠烈字寬逸文化人西先生自湄之肖孫也豪邁?豁之姿少而任俠好義個?慷慨有萬夫不當之勇折節窮經出入師門識其宗皆讀書每當古人卓節奇行合於義理處未嘗不菴卷嘆嘗當國之屋社忠念激奮視虜如犬大言蹴踏劫禍至少不挫撓矢心夙僕社門自靖仍愍祖蹟幽滯創大東祠妥八祖而俎豆之繼述其先志矣盖忠孝之心自學問上傲出來耳公志常存乎聖學手不釋卷時復思繹眞積力久得於心而踐履篤實成於行而儼然爲一鄕之師表風化所及學徒稱益進非徒以尋章摘句句讀之敎乃解其惑博之以及以明聖旨約之以禮敎其天然學不壓敎不倦刮劇講討各充其量心悅誠服各自供一辨番矣以鄭先生禮建宇俎豆之餘誠??猶其未足也竪碑以表其寬菴峯下講學之所以寓裳壇之慕昭示來百噫目今曰師曰弟之道土?之際有此盛擧庶或復見一線之?將回泰歟碑其成求文於余余寔非其人豈可不朽其事哉固辭不護以平曰所見聞者敍之月城 李瑾雨 撰 冠山 林晩洙 書戊午 九月 日
    2018-11-18 | NO.318
  • 관찰사 민정식 추모 마애비
    관찰사 민정식 추모 마애비가 무등산 원효사  미처 못가서 북구 금곡동 818번지에 있다. 무등로 1448 인근이다.광서신화(光緖辛和)가 옆에 적혀 있다.
    2018-07-03 | NO.317
  • 관찰사윤공웅렬선정비
    광주광역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內)1898년이 관찰사윤공웅렬선정비(觀察使尹公雄烈善政碑)는 광주공원 비석군에 있다. 비의 양 옆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維公喬木世華  氷O淸操  哭O設府 毁尿咸O  革二O染   一省OO十里湖山 人皆自得 召棠冠栢 百世匹休 豊功盛德 書難盡辭이 비는 관찰사 윤웅렬(尹雄烈, 1840~1911)의 선정비로 무술년(1898년)에 건립되었다. 윤웅렬은 충남 아산 출생으로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영중(英仲), 호는 반계(磻溪)이다. 1856년 무과에 합격했다. 1896년 8월부터 전라남도관찰사로서 전라남도재판소 판사를 겸임했다. 합병 직후인 1910년 조선귀족령에 따라 남작작위를 받았다. 1911년 1월 은사공채 2만 5000원을 받고, 2월 총독관저에서 열린 작기본서봉수식(爵記本書捧受式)에 예복을 갖추어 참석했다. 1911년 사망 후 작위는 장남 윤치호(尹致昊)가 이어 받았다. 김영집 지역미래연구원 원장은 "윤웅렬은 1896년 고종이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전라도 초대 관찰사로 부임한다. 그런데 이 때 나주에서 군수와 관리들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서 윤웅렬은 광주로 도망쳤고 그 뒤 광주에 눌러 앉아 관찰사 일을 했다. 이후 광주에 배치된 관찰도는 전남도청이 됐다. 매국노 윤웅렬도 한때 개화파 정치인으로 갑신정변에 참여했으나 나중에 일본에 망명한 후 친일내각의 군부대신이 됐다."고 했다.<광주매일, 2017.8.9.)〇참고문헌『친일인명사전』
    2018-06-11 | NO.316
  • 관찰사이공근호선정비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內)1903년이 관찰사이공근호선정비(觀察使李公根澔善政碑)는이근호(李根澔, 1861~1923)의 의 비이다. 이근호 선정비는 그가 전남 5대 관찰사(1902년∼1903년) 재직 시절에 선정을 베풀었다는 이유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근호는 조선 말기의 무신이자 일제강점기의 조선 귀족 출신이다. 계묘년(1903년)에 건립되었다. 비의 양면에 4자씩 4줄로 시가 적혀 있다.측면 향교쪽來宣棠化 一路澄淸 措以舊約 三代風俗측면 천변쪽 我粒伊誰 豊口有頌 我衣公德 視以片石 이근호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문옥(文玉), 호는 송천(松泉)·송은(松隱)·규제(奎齊)이다. 이근택(李根澤, 을사늑약 당시 군부대신으로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지냄)과 이근상(李根湘, 남작 작위를 받고 중추원 고문을 지냄)의 형이다.이근호는 1891년에는 평안북도 영변군의 부사로 재직하면서 재물을 탐학한 죄로 벌을 받았다가 재기용된 전력이 있다. 1898년 경무사에 임명되었고 1902년 2월 전라남도관찰사 겸 전라남도재판소 판사에 임명 돼 전라남도 지계감독을 겸했다. 1906년 육군참모장을 지냈다. 한일병합 이후 1910년 10월 ‘조선귀족령’에 따라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1911년 1월에는 은사공채 2만5000원을 받고 2월 총독 관저에서 열린 작기본서봉수식(爵記本書奉授式)에 예복을 갖춰 참석했다.이 같은 내용은 대통령 직속기구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95인 명단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한 ‘친일인명사전’ 명단에 각각 확인됐다.민족문제연구소 측은 “이근호의 형이 을사오적 이근택이며 본인을 포함해 세 형제가 작위를 받아 습작자까지 모두 여섯 명이 조선귀족이 된 대표적인 친일 집안으로, 사람들은 이근호 5형제를 ‘5귀’(五鬼)라고 불렀다”고 밝혔다.광주역사정의행동연대는 “의향 광주의 중심에 자리 잡은 광주공원에 아직까지 친일파의 선정비가 남아있다는 것은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일”이라며 “그들의 잘못을 후세에 전하는 차원에서 그들의 친일행각을 기록한 ‘단죄비’를 선정비 옆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8-06-11 | NO.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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