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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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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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사여공규익구폐선정비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內)1875년어사여공규익구폐선정비(御使呂公圭益捄弊善政碑)는 전라좌도암행어사(全羅左道暗行御史) 여규익(呂圭益)의 선정비로 1875년에 건립되었다.여규익(呂圭益, 1825~1894)은 조선 말기 문신으로 본관은 함양(咸陽)이고 자는 치능(稚能)이다. 1864년(고종 1) 갑자(甲子)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23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1865년(고종 2)에 홍문록(弘文錄, 홍문관 관원의 후보자)에 선발되었다. 1872년(고종 9)에는 태조대왕(太祖大王)의 어진(御眞)을 옮길 때, 대축(大祝)으로 참여하여 품계를 올려 받았다. 1874년(고종 11)에 전라좌도암행어사(全羅左道暗行御史)로 재직 중, 각 지방 관리들의 비리를 적발하고, 선정(善政)을 보고하였다. 1883년(고종 20)에는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임명되었다. 이후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등을 역임하였다.
    2018-06-11 | NO.149
  • 어사조공헌OO비(御使趙公憲OO碑)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內)  어사 조공헌OO비(御使趙公憲OO碑)가 광주공원 비석군에 있다. 어사 조헌(趙憲·1544-1592)의 행적이 눈길을 끈다. 조헌은 경기도 김포출신으로 선조 때 어사와 전라도 도사를 지냈다. 정여립과 갈등해 정철과 더불어 서인 강경파에 속해 호남인맥숙청에 영향을 미쳤을 것도 같지만 성품이 강직해 자기주장에 선명했다 한다. 상소를 올리는 방법도 도끼를 옆에 놓는 이른바 도끼상소를 하거나 자기 머리를 바닥에 찍어 피를 내는 시위를 했다하니 그 위세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선조는 조헌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싫어했던 인물 중 하나였다고 전해진다. 예나 지금이나 쓴 소리하면 싫어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세태다.
    2018-06-28 | NO.148
  • 엄이재중건비
    광주시 서구 용두동 산 79(봉산정사)중건비는 1976년에 파평인 중헌重軒 윤정복尹丁鍑이 글을 지었고 함평인 이창헌李昌憲이 글씨를 썼다.
    2018-05-31 | NO.147
  • 엄이재중건의연방명비
    광주시 서구 용두동 산 79, 봉황산 봉산정사1976년이 엄이재중건의연방명비(掩耳齋重建義捐芳名碑)는
    2018-12-01 | NO.146
  • 역사가 살아 숨쉬는 다리
    광주시 북구 동림동 118-2옛 산동교 역사가 살아 숨쉬는 다리 비석이 있다. 6·25전쟁 당시 큰 전투가 없던 광주지역에도 산동교라는 전적지가 있어 지역주민들에게 6·25전쟁을 떠올리는 장소이다.산동교는 1950년 7월 23일 군경합동부대가 북한군의 광주점령을 막기 위해 첫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북한군의 남침직후 호남지역에 방어병력이 없는 상황에서 북한군 제6사단이 호남지역으로 진출하였다.1950년 7월 23일 국군 제26연대 공병대가 새벽 4시에 북한군의 광주 진출을 지연시킬 목적으로 산동교를 폭파하였다. 국군은 임시로 군경합동부대를 편성하여 교량에서 광주 쪽으로 약간 떨어져 있는 산등성이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오전 11시 30분경 북한군 제6사단 병력 일부가 탱크 3대를 앞세우고 산동교에 이르렀을 때, 군경합동부대는 2.3인치 로켓포를 발사했으나 탱크는 꿈적도 안했다. 군경부대는 1시간 동안 저지하다가 그들의 화력에 밀려 후퇴함으로써 광주 방어는 사실상 실패하고 말았다. 실제 방어병력이 전혀 없는 전남지구편성관구 이응준 사령관과 제5사단 이형석 대령 등은 보성을 경유, 순천으로 후퇴했다. 전투과정에서 김홍희 총경이 전사했고, 장명규 경감은 다리를 잃는 중상을 입었다.
    2018-06-20 | NO.145
  • 염재광산이연술공덕비
    광주시 동구 선교동 472-3 용연마을 입구1983년이연술은 광주지역 최초의 직영백화점인 화니백화점 회장이다.
    2018-11-30 | NO.144
  • 영랑 용아 시비
    광주시 남구 구동 16 광주공원1970년광주공원에 용아 박용철(송정리 출신) 시비와 영랑 김윤식(강진 출신) 시비가 있다. 이 시비는 1970년대 초 허연, 정소파, 문병란, 손광은 등 이 지역 시인들의 발의에 의해 향토문인시비건립위원회를 구성하여 건립된 최초의 시비라 할 수 있다.
    2018-06-26 | NO.143
  • 영원한 빛의 탑
    남구 구동 16 광주공원2015년광주공원 내 현충탑광장 '영원한 빛의 탑' 현충탑은  6.25 호국 영령들의 희생정신을 되새길 수 있도록 탑신을 6각형 기단과 25m 높이로 형상화하고, "영원의 빛"을 주제로 화강석과 스테인레스밀러 재질로 조형미를 살렸다. 이미 있었던 '우리 위한 靈의 塔'(1963)이 노후화되어 새롭게 조성한 탑이다.
    2018-06-26 | NO.142
  • 예향광주
    광주 북구 북문대로 601993년광주문화에술회관준공 기념비이다. 뒷면에는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광주시민의 마음을 이 곳에 모아 건립한 광주문화예술회관은 국제문화예술도시다운 예향광주의 자긍심을 펼쳐보일 터전이 되었다. 1985년 전석홍 전라남도지사가 발주, 1993년 준공까지 김양배 최인기 이효계 김동환 강영기 역대 광주직할시장이 심혈을 기우려 준공한 문화창조의 전당에서 시민이 문화예술을 향수토록 했다. 문화환경을 국제화시킨 이 곳에서 창조를 통해서만 예술이 살아 움트고 꽃피고 숨쉬도록 하자"고 적혀 있다.1993년 7월 1일 준공했다. 글은 손광은, 글씨는 하남호가 썼다.
    2018-06-21 | NO.141
  • 옛 상무대 표지석
    광주시 서구 상무중앙로 22 부근1952년상무대 옛터 표지석은 이승만 대통령의 글씨로 1952년에 세웠다가 지난 1999년 12월 옛 상무대 터 입구 주변에 최초로 이전했다.
    2018-06-26 | NO.140
  • 옛 우리 위한 靈의 塔(1963)
    남구 구동 16 광주공원6·25 전쟁 당시 전몰 호국 영령을 기리는 현충탑으로 광주, 전남지역의 전몰 호국용사 15,867명(군인 10,745명, 경찰 5,122명)을 모셨으나, 위패부는 모두 없다. 노후화되어 2015년 '영원한 빛의 탑'으로 개축, 재건했다.
    2018-06-26 | NO.139
  • 오경렬 공적비
    서구 덕흥로 312(덕흥동)덕암나주오공경렬공적비德菴羅州吳公璟烈功績碑는 덕암 오경렬을 기리기 위해 1988년에 세웠다. 덕호재 옆에 있다. 행주幸州 기세은奇世殷이 글을 짓고 이천利川 서종견徐鍾堅이 글씨를 썼다.
    2018-05-25 | NO.138
  • 오웬기념각
    광주시 남구 백서로 70번길 6(양림동)1914년유진 벨 목사와 함께 전남 최초의 선교사로 들어와 광주에서 순교한 오웬선교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미국 친지들이 보낸 기금 4,200 달러로 1914년에 세워진 연면적 434평방미터(부속건물 포함)인 양옥건물이다.
    2018-06-26 | NO.137
  • 와헌오공기적비
    광주시 서구 덕흥로 312(덕흥동)1971년에 세운 충신忠臣 증선무원종훈贈宣武原從勳 와헌卧軒 오공吳公 기적비紀蹟碑이다. 덕호재 옆에 있다. 나주오씨 와헌卧軒 오이수吳以壽는 자는 계수繼壽이다. 비문은 은진恩津 송재성宋在晟이 지었다.
    2018-05-25 | NO.136
  • 외당고선생경모비(고한주)
    광주시 북구 장등동 205(장등마을 입구)1996년이 외당선생경모비(畏堂先生景慕碑)는 李家源 짓고 宋成鏞 쓰다.부 : 高濟寅 조 : 高亨鎭 증조 : 高時瑾 외조 : 鄭燦默 처부1 : 忠州 朴源佑고한주(高漢柱, 1871~1959)의 본관은 장흥이며 장흥고씨(長興高氏)이다. 자는 방서(邦瑞)이고, 호는 외당(畏堂)이다. 아버지는 제인(濟寅)이고, 어머니는 하동 정씨(河東鄭氏) 찬묵(燦黙)의 딸이다. 고한주는 고종 8년(1871)에 광주(光州) 장산리(長山里)에서 태어났으며, 계화도에 있는 간재(艮齋)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성리학(性理學) 강의를 했다. 이때 간재 선생은 고한주가 학문을 좋아하고 독실히 배운 것을 행하는 것을 보고 외당(畏堂)이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 만송재晩松齋를 경영했다. 1894년 장성 西二面의 유생 奇宇冕 朴義容 등과 함께 召募使에게 東學에 가담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소지를 올렸다.1905년 봄에는 옥천(沃川) 산중에 있는 연재(淵齋)ㆍ심석(心石) 두 선생을 찾아가 뵈었다. 만년에는 집 뒷산에 집을 지어 ‘만송재(晩松齋)’라 이름하고 원근 학도들을 가르쳤으며 늙어서도 지극한 효성이 시들지 않았다. 1959년에 죽으니 향년 89세였고, 뒷산 가장동(可獐洞)에 초장(初葬)하였다가 동복(同福) 옹성(甕城)에 안장하였으며, 죽기 전에 스스로 만가(輓歌)를 짓기도 했다.<외당유고(畏堂遺稿)>는 9권 2책으로 되어 있으며, 석인본이다. 1책은 유실되어 그 내용을 알 수 없고, 권6의 내용은 「소쇄원기(瀟灑園記)」를 비롯하여 19편의 기(記)와 그밖에 발(跋), 명(銘), 사(辭), 가사(歌詞)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7에는 「연재선생제문(淵齋先生祭文)」등 8편의 제문과 축문(祝文), 상량문(上樑文), 비문(碑文) 등이 다수 실려 있다. 권8에는 묘갈명(墓碣銘), 묘지(墓誌), 행장(行狀)이 수십 편 실려 있고, 권9는 부록(附錄)으로 가장(家狀)과 권순명權純命)이 쓴 행장(行狀), 송재성(宋在晟)이 쓴 묘갈명(墓碣銘)과 25인이 쓴 만장(挽章), 제문(祭文) 8편이 수록되어 있다. 서문은 누가 썼는지 미상이고, 발문은 없다. 수정: 2020.02.05.
    2018-11-13 | NO.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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