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28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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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주정 玄州亭
- 남구 노대동 산 56 (노대마을) 노대마을에는 현주 윤경(尹熲, 1590~1634)이 지었다는 정자가 있었다.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남쪽 10리에 있다. 함안윤씨들은 노대마을과 대동마을에 자작일촌을 이루며 지금도 살고 있다. 남구 행암동 구남마을 광유재光裕齋 뒤에는 함양윤씨 입향조 남촌 윤지화의 묘가 있다. 윤지화는 연산군 때 중종반정 이후 이곳에서 난을 피해 머물렀다. 눌재 박상, 양곡 소세양, 감사 정만종 등과 시로 창수唱酬하며 세월을 보냈다. 윤경은 윤지화의 증손자다. 문장이 뛰어나고 덕망이 현저하여 사계 김장생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벼슬은 사과司果였는데 벼슬과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 김장생은 사계전서沙溪全書 제46권 부록 ‘거의록擧義錄’에서 윤경에 대해 “자는 영중瑩中이고 호는 현주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이름났으며, 과거 공부를 일삼지 않았는데 선생은 낭묘廊廟의 큰일을 해낼 그릇이라고 칭찬하였다. 정묘년의 난리 때 선생이 공을 뽑아 문서유사文書有司로 삼자, 공은 의병들을 규합하여 전주에 이르렀다가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되돌아갔다. 서석산 속에 은거해 산수를 스스로 즐겼다"고 전하고 있다.1627년 정묘호란에 의병을 모아 청주까지 갔다가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동궁을 호송한 후 자취를 감추고 현주정(玄州亭)을 짓고 은거하여 산수로 낙을 삼았다. 3대 독자로 내려오시다가 아들 5형제를 두었다 (壽一, 壽益, 壽喜, 壽斗, 壽長)
- 2020-03-16 | NO.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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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가정 浩歌亭
- 광산구 동곡분토길 195 (본덕동) 호가정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단종 때 계유정란에 공을 세워 정란공신 3등에 책록되었고 세조 때 중추원첨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공조참판을 지낸 설강(雪江) 유사(柳泗: 1502∼1571)가 지은 정자이다.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서쪽 무이구강武夷九江의 위에 있다. 영산강과 평동천이 합류하는 S라인 곡진 부분을 말한다. 광산구 본덕동 노평산 기슭에 자리한 호가정은 중국 송나라 강절 소옹이 말한 ‘호가지의浩歌之意’에서 뜻을 따온 것으로 유사의 기개가 잘 나타나 있다. 호가정은 1558년 노평산 기슭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소실되고 1871년 중건되어 1932년과 1956년 재중수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광주시 문화재자료 제14호이다. 정사각형으로 축조한 대지의 중심부에 정면과 측면이 각 3칸인 골기와 팔작지붕의 건물로, 당초에는 중앙에 거실을 두었으나 중수할 때 이를 없애고 전부 우물마루로 고쳤다. 사방좌우 모서리에는 1칸씩의 낮은 난간을 두었다. 사방 중앙 칸의 가운데는 댓돌을 두어 출입에 편리하도록 하였다.여기에는 호가정 현판과 설강의 호가정기와 노사 기정진의 호가정 중건기, 후손 유보한의 호가정 중수기, 호가정 원운과 당대에 교분이 두터웠던 명유인 이황(李滉),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 ~ 1553) 등과 지족암(知足庵) 오겸(吳謙, 1496 ~ 1582), 만덕(晩德) 김대기(金大器 1557 ~ 1628), 사위로 맞이한 서하(棲霞) 김성원 金成遠 1525 ~ 1597)과 후대의 동악(東岳).이안눌(李安訥 1571∼1637),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 등이 그의 시를 즐겨 차운한 편액들이 걸려 있다. 광산구 광주송정역에서 나주 가는 국도로 8km 쯤 가다보면 왼쪽으로 호가정 진입 입구에 이정표가 보인다. 호가정이 자리한 본덕동 마곡마을은 옛 마곡면 소재지로 장場이 섰다. 요동은 질그릇을 굽던 마을로 ‘욧굴(요동)’, ‘점촌’이라고도 한다. 창교는 관내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로 ‘창다리’라는 다리가 있었다. 유사는 ‘호가소서浩歌小序’에서 말하기를 “내가 벼슬을 버리고 남쪽 고향으로 돌아와 병강屛江의 남쪽에 있는 구강의 언덕을 거닐며 주위 경관을 살펴보았다. 왼쪽으로는 수려한 추월산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오른쪽으로는 가파른 월출산의 깎아지른 듯한 높은 바위가 솟아있다. 동쪽으로는 서석의 웅장한 기운이 서려 있고 서쪽으로는 금성의 산뜻한 운치가 뭉쳐 있다. 수 백리를 연이은 호수가 호만한 모습으로 흘러가고 사시불변의 푸른 솔이 산언덕을 둘러 있다. 명사십리의 밝은 모래가 부두가에 널려 있고 노 젓는 어부들의 화창한 노래 소리가 흥겹게 들려왔다. 이러한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저절로 일어나는 흥취를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한 곡조의 노래를 큰 소리로 불렀다.”하며 그곳에 정자를 지었다.그곳의 경치는 한 번 찾은 사람은 누구라도 잊지 못할 만큼 빼어나며 편안함을 느끼는 데 손색이 없는 곳이었다. 입에서 맴도는 노래가 아닌 큰소리로 불렀다는 큰소리 浩로 부른 노래 歌, 호가정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그는 원운에서 “언덕 위에 앉아 자우르는 한 쌍의 백조와 강위에 떠 있는 눈 속의 흰 배가 한없이 그립다”고 읊었다. 그래서 영산강 6경이다.류사는 저서로 <설강집> 2권과 <위친필봉제축유서爲親筆奉祭祝遺書>가 전하고 있다. 현재는 서산유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광주 경렬사에 제향되었다.
- 2020-03-16 | NO.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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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심정
- 서구 운천로 165(쌍촌동)광주 운천호수를 서호西湖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2011년 ‘서호’로 명명하고 기념식을 가졌으나 아직 공식적인 명칭은 운천저수지 또는 운천호수이다. 서호는 광주 서구에 있는 호수란 뜻에서 강원구 탁인석 등 서호를 아끼는 사람들이 모여 부른 것이다. 호수 안에 있는 정자의 현판이 없어 2015년 4월 은행나무로 만든 ‘西湖 湖心亭’이란 현판식을 가졌다. 이어 이들은 이곳을 서호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위해 2016년에는 서호西湖라는 비석을 건립하였다. 西湖라는 이름은 유명하여 중국에 36개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일본, 월남에도 서호를 본 따 만든 호수가 있다. 서호로 가장 유명한 곳은 중국 항주杭州의 서호이며, 우리나라는 수원에 있으며, 안산에서도 서호를 만들자고 한다.중국의 항주는 외국인이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선정되었으며, 남송南宋시대의 수도였다. 함평 출신 김철 선생이 이끌었던 임시정부가 있었고, 대각국사 의천이 세운 고려사高麗寺가 있다.항주의 서쪽으로 펼쳐진 서호는 천연 호수에 인공을 가미하였으며, 송나라시대 소동파가 만든 둑인 소제蘇堤와 당나라시대 백락천이 만든 백제白堤가 있다. 서호는 백락천이나 소동파로도 유명하지만, 특히 송나라 시인 임포林逋에 의해서 더욱 유명하다.송강 정철도 '관동별곡'에 "금강대 맨 윗층에 선학仙鶴이 새끼 치니, 춘풍 옥적성玉笛聲에 첫잠을 깨었던지, 호의현상縞衣玄裳이 반공半空에 솟아 뜨니, 서호 옛 주인을 반겨서 넘노닌 듯"이라는 시구에도 서호를 언급한다. 이처럼 서호는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 일본, 월남 등 한자문화권에서 널리 알려진 이름이다.강원구 한중문화교류회 중앙회장은 “서호를 주변을 조금 더 확대하고 매일 밤 보게 되는 분수 쇼는 더 아름답게 만들면 많은 시민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 중에 중국인들이 좋아 할 것이며, 서호를 문학공원으로 만들고 탁광무선생의 경렴정을 만들면 광주의 명소가 될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 2018-05-23 | NO.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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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은정 湖隱亭
- 광산구 본량본촌길 29 (동호동) 호은정은 일제강점기 때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중재실中齋室을 갖춘 팔작지붕의 건물로 1930년 호은 심노옥沈魯玉(1847~1915)이 설계만 한 상태에서 원운과 원기 등을 만들었다. 나중에 아들인 심원하가 지방 향리를 지내면서 완성하였다고 한다. 호수의 물가에서 숨어 산다는 은거호상(隱居湖上)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작지만 정자가 갖는 상징성은 다 지니고 있다. 정원수에 둘러진 계단식 논 가장위에 자리한 호은정에 앉아 있으면 근처에서 움직이는 모든 사물의 확인이 가능하다.호은정의 원운에는 심원하의 부친인 심노옥의 70세 인생회한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물가 위에 숨어 산지 몇 년의 봄을 지났는고칠십되는 늙은 나이 흰 머리만 새롭도다.문(文)도 무(武)도 없어 쓸모없는 우수되고고기잡고 나무하는 한갖 사람 되었도다.묘(妙)한 약제(藥劑) 만들어서 티글 풍속 다스리고뜬 이름을 멀리하니 이 한 몸이 가볍도다.요즈음의 모든 일이 뉘우침이 많아지니작시금비(昨是今非) 깨달아서 참 이치를 찾았도다.광산구청에서 영광 방향으로 10분 정도 가다가 삼도교를 거쳐 본량 서부도로를 타고 3분 정도 가면 본촌마을에 다다른다. 호은정에 가는 길 입구 쪽에는 만취정과 동호사가 있다. 심노옥의 아내인 기계유씨杞溪兪氏는 남편의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되자 그의 왼쪽 허벅다리 살을 베어 드렸다. 이같은 열행烈行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심원하가 부친이 돌아가신 뒤에 그 유지를 받들어 이 정자를 지었다. 몇 년 전에 기와를 보수한 흔적은 있으나 지금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한다. 본촌마을은 옛날 장본면의 ‘본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조선 중종 때 이조정랑을 지낸 심풍공이 철산에 유배되어 나주에 와서 기거하였는데 그 아들 심광헌이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우고 김해부사를 거쳐 이곳에 들어와 정착 그 후손들이 번성하여 지금에 이른다. 이곳에서 니산 고광열은 펼쳐지는 열 가지 경치를 읊었다. 만고호수 맑은 물이 한이 없이 흘러가니죽서라는 적은 섬이 한 가운데 떠 있도다.연기 깨인 물결위에 돛대 달고 노저으니너 혼자서 오고 가는 그 모습이 그립도다-죽서에 떠있는 먼 배를 보고 읊은 시
- 2020-03-16 | NO.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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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수정 花樹亭
- 남구 서오층석탑2길 15 광주공원 서쪽 오층석탑 윗쪽 아래의 도로가에 일제강점기 때 광주지역 당호로 비서승의 관직을 받은 사범士凡 임병룡(1846~ ?)이 주위의 권유에 의해 1927년 관덕정으로 건립했다. 원래는 활을 쏘는 사장射場이었으며, 후일 이 지역이 택지 개발되면서 사장의 기능을 더하지 못하게 되자 임병룡의 손자가 1959년 최씨 문중에 양도하면서 화수정으로 바뀌었다. 1985년 최씨 문중 6대 회장인 최동렬의 주선으로 오늘의 모습으로 남았다. 의재 허백련의 현판이 걸려 있고 대서주련이 앞면 4개의 기둥에 있다. 사각 주춧돌에 사각기둥으로 골기와 팔작지붕 형태의 정면 3칸 측면 2칸 구조의 한옥과 양옥이 혼합되어 있다. 화수정이 위치한 이 자리가 현재의 공원과 연계되어 매우 아늑한 풍치를 이루고 있다. 당시의 한량들이 이 정자를 중심으로 서로의 모임을 가져 각자의 지능을 겨루는 궁시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시판으로 남아 있는 晴簑 崔允植이 지은 시에서 정자의 의미를 알 수 있다. 幾個豪雄上此樓 몇 사람의 호응들이 이 다락에 올랐던고年年花樹應千秋 연년마다 모인 화수 천추까지 이어지길淸風朗月俱公物 맑은 바람 밝은 달은 너나없는 공물이요黃髮靑瞳卽道流 누런 머리 푸른 동자 도가류가 분명하네 向來浩氣空多誤 지난 날의 높은 호기 많은 잘못 저질렀고老去眞工尙可收 늙어가는 오늘날에 참된 공부 거뒀도다.信知暮境還佳境 아름다운 이 가경에 뒤늦게야 돌아와서天借吾行日日遊 우리들의 마음대로 즐겁게 놀았도다. 광주의 명소였던 경암敬菴 최숙崔橚의 화수정원운花樹亭原韻은 이곳의 운치를 유감없이 대변해 주고 있다. 對立全州寒碧樓 전주고을 한벽루와 대립하여 서 있으니乾坤日月自春秋 하늘 땅의 밝은 일월 본 가을이 오고 가네.庭蘭挺秀香無盡 피어나는 뜰앞 난초 그지없이 향기롭고先輩敦風好轉遊 선배들의 맑은 풍류 호전하여 흘렀도다.微醉添杯山影倒 맑은 잔에 술 부으니 산 그림자 비쳐있고愛吟來社世塵收 시 읊으며 올라오니 세상 티끌 거둬지네.夢中幾有輕謾想 경만스런 잡생각이 꿈속에서 일어나니不敢斯筵繼續遊 아름다운 이 자리에 오래 놀지 못했도다 지후遲後 최병일崔炳日이 지은 시이다. 南來短杖辛登樓 짧은 단장 의지하여 어려웁게 등루하니時是正當黃菊秋 누른 황국 곱게 피는 가을철이 되었도다.庭畔草看生理活 정반위의 풀을 보니 그 생기가 활발하고濁中蓮愛不汚流 진흙속에 자란 연꽃 오류없이 깨끗하네. 群公暇日消憂坐 여러사람 가일하여 근심없이 앉아있고才子吟風萬景收 많은 재가 음풍하며 맑은 경치 거뒀도다向夕花亭明月上 저녁무렵 꽃 정자에 밝은 달이 떠오르니更擬仙侶下相遊 하늘 선녀 내려와서 서로 함께 놀았도다.
- 2020-03-16 | NO.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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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암당 花菴堂
- 북구 무등로 1021 (화암동) 마을 이름 화암은 주변에 꽃과 바위가 많아 화암花菴이라 했다거나 조선 중엽 송타宋柁 (1567~1597)가 마을 주변에 백일홍을 심어 화암당花菴堂이라 하고 그의 호를 화암花菴이라 한데서 연유했다 한다.그 이전에는 도자기를 구웠던 곳이었던 탓에 ‘불’의 의미 즉 ‘불바우’가 화(火) → 화(花)로 표기되면서 ‘화암花菴’이라고도 했다. 화암마을 141번지 일대에서 백자 가마터가 나와 이곳에서 배재에 이르는 고개가 옛부터 자기소磁器所가 있던 지역이었다. 송타는 1597년에 왜적이 호남을 침입하자 피난해 전남 무안현務安縣 사포沙浦에 살면서 이곳에 화암花菴이라 편액하고 백일홍정百日紅亭을 지었다. 집안의 불운은 임진왜란 때 풍지풍파를 겪는다. 송타는 어느 날 밤에 왜적에게 붙들려 바다를 건너게 되었다. 송타는 죽음에 임하여 크게 말하기를, “나는 광주에 사는 송제민의 아들이다. 불행히 적에게 붙들렸고 지금 또 죽게 되었다. 그대들 여러 배의 포로된 자들은 혹 언젠가는 탈출하여 돌아갈 것이니, 나의 부모에게 전해주기 바란다.”하였다. 4년이 지난 1600년에 수은 강항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와 이 사실을 자세히 말하였다. 1706년에 광주에 건립된 운암서원雲岩書院에 부친인 송제민과 권필權鞸, 고경리高敬履, 신필申滭, 신한주申漢柱 등과 같이 배향하고 있다.
- 2020-03-16 | NO.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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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벽당 環碧堂
- 북구 환벽당길 10 (충효동) 환벽당은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 1501~1572)가 노년에 자연을 벗 삼아 후학양성을 목적으로 건립한 남도지방의 전형적인 유실형 정자이다.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동쪽 30리에 있다. 가까이에는 무등산 원효계곡의 물이 흐르며 계곡 아래 증암천甑巖川 주변에는 배롱나무가 아름다운 장관을 이뤄 자미탄紫薇灘이라 불렀다. 환벽당 북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는 김윤제가 살았던 충효마을과 증암천 너머에는 송강 정철이 살았던 지실마을, 소쇄공 양산보가 살았던 창암촌이 있다. 이 마을을 주변으로 식영정息影亭과 면앙정俛仰亭, 송강정松江亭, 독수정獨守亭, 소쇄원瀟灑園, 환벽당環碧堂 등 10여개 정자가 있어 이 일대가 조선시대 원림 문화의 중심지역으로서 가치가 뛰어나다.면앙정 송순은 서하당 김성원이 식영정을 건립하고 3년이 지난 뒤 1563년 식영정의 시를 차운하며 ‘식영정과 환벽당’은 형제의 정자라고 했다. 또 소쇄원과 식영정, 환벽당을 가리켜 한 동(증암천) 안에 세 명승 즉, 一洞之三勝이라 말했다.환벽당은 환벽環璧이란 뜻 그대로 푸르름이 고리를 두르듯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이루고, 시가문학과 관련된 국문학사적인 인문학적 가치가 매우 큰 곳이며, 별서원림으로서 가치가 우수한 호남의 대표적인 누정문화를 보여주는 곳이다.환벽당 아래에는 김윤제와 정철이 처음 만난 곳이라는 전설이 깃든 조대釣臺와 용소龍沼, 쌍송雙松이 있어 콘텐츠가 풍부한 곳이다. 환벽당은 무등산 북능의 능선으로 북봉을 거쳐 꼬막재로 이어지는 여러 지맥 중의 하나이며, 광주와 담양을 경계로 흐르는 증암천(자미탄)을 사이에 두고 남쪽 무등산에서 북쪽 성산에 이르기까지 산들이 고르게 파노라마 경관을 보여준다.환벽당의 초기 모습은 소세양이 지은 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삼연 김창의 《남유일기南遊日記》를 통해 그 당시의 원림의 식물상과 조경 수종을 짐작할 수 있고, 김성원의 《서하당유고》에 ’성산계류탁열도‘ 등의 그림이 남아있어 인문적 가치가 있다.김윤제는 16세기 호남사림의 중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息影亭, 瀟灑園과 함께 星山詩壇의 한 부분인 環碧堂을 중심으로 시단을 이루어 당대 명류 시인들과 수창하였다. 사촌은 말년에 환벽당에 은거하면서 후인의 교육에 전념하여 鄭澈, 金成遠, 金德齡 등을 계발시켰다환벽당 관련 시문은 당대의 일류 문인들로서 임억령, 기대승, 송순, 김인후, 소세양, 정철, 백광훈, 고경명, 권필도, 정홍명, 목장흠, 이은상, 이하곤, 이명한, 김창흡, 조상건, 양경지, 정민하, 서봉령 등 시인묵객의 시가가 전해져 인문학적 가치가 있다.앞면 3칸 옆면 2칸의 정자로서 광주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환벽당의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쓴 행서로써 강건함이 배어 있으며 벽에 걸려 있는 석천 임억령의 시는 과거의 환벽당과 주변의 아름다움을 말없이 알려주고 있다. 烟氣兼雲氣 연기의 기운인지 구름까지 겸했는지琴聲雜水聲 거문고 소리인지 물소리가 섞이었는지斜陽乘醉返 석양무렵 거나하게 취해서 돌아오니沙路竹與鳴 모래 길에 대밭가마 소리쳐 우네 이 시는 자연을 벗 삼아 거문고 타고 술 마시는 노옹의 유유자적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환벽당은 안개와 구름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거문고 소리는 물소리와 겹쳐서 나고, 술을 마시다 취객은 다시 돌아가고 모랫길에서 대나무로 만든 가마소리만 들린다는 흥겨움을 노래하고 있다.
- 2020-03-16 | 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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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강정 黃江亭
- 광산구 도산로 12 (도산동) 신도산마을에 있는 도산동주민센터가 옛 황강정 터이다. 도산동은 대부분 황룡강의 범람으로 형성된 충적지로 각종 채소재배가 성했다. 광주비행장 주변 일대가 해당된다. 비행장 터에는 옛 강줄기가 끊어져 고립된 배후습지와 우각호 흔적이 남아 있다.문화류씨종친회 기록에 따르면 류재천(柳在千, 1914~? )의 자는 성천(誠千) 호는 송호(松湖), 광주 송정읍에서 출생했다. 광산구 수정동에 율수재를 건축하고 나주에 금산재를 건축했고 율수지를 간횅하였다. 송정읍에 황강정을 축조하여 노인들의 쉴 수 있는 곳으로 사용토록 했다고 한다.도산동 지명은 산암리의 둥근 야산인 ‘도리매’에서 유래되었다. 황룡마을은 ‘수성무우’로 유명했고, 국악인 임방울林芳蔚(1904~11961)의 출생지이다. 정자 주변에 황룡강이 흐르고 있어 이름한 것으로 보인다.
- 2020-03-16 | NO.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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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산재 黃山齋
- 남구 대촌동(황산리)황파黃坡 최신지崔愼之(1748~1822)가 지냈던 장소로 현감 수헌睡軒정주환 鄭冑煥이 시를 남겼다.최신지의 자는 우신(又愼)이며, 호는 황파(黃坡), 본관은 경주이다.1748년 정월 8일에 광주 유등곡면 황산리(남구 지석동)에서 출생했다. 4,5세에 박찬혁에게 수업을 시작하여 김원행에게서 사사하다가 김선생이 졸하자, 그의 아들 삼산을 종유했다. 수촌 최정봉, 삼한 박효덕, 만원 오정원, 맥호 김수조, 상사 이창우 등과 친분이 두터웠다. 정조 21년(1797)에 「어정대학연의」를 광주에 반하(頒下)하여 교정할 때 목사 서형수는 그로 하여금 수정하도록 하였다. 이듬해인 무오(1798)에 공령과 응시하여 「어제경의조문」을 써서 막 올리려는 차에 부친상을 당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번번히 좋은 기회를 놓쳤다. 순조 16년(1816)에 직지 조만영이 그를 특천하였으나 수용하지 않았다. 순조 22년(1822) 정월 75세에 졸하였다. 1948년 간행된 석인본 《황파유고黃坡遺稿》는 4권 2책 77장으로 이루어졌다.
- 2020-03-16 | NO.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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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화루 皇華樓
- 동구 객사 광산관 정문 광주는 호남의 대표 도시로 자리 잡았지만 그 과정에서 조선시대 관아 건물들은 단 한 채도 보존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다. 그중에 가장 늦게 까지 남았던 관 누정으로 객사인 광산관 정문이었던 2층 누각인 황화루이다. 1870년대 초반까지 남아 있었다. 조선 초기 1483년에 지어져 약 400여년 동안 유지하고 있었다. 1760년에 편찬한 여지도서와 광주읍지(1879, 1924)에는 1751년 부임한 목사 김시영(金始煐)이 중수하였다는 '皇華樓 在客舍前牧使金始煐重修' 기록이 있다. 1985년 광주시사에 1910년 경술국치라는 한일병탄(韓日倂呑) 후 일본에 의해 광주읍성이 헐릴 때 동구 동명동 구 광주교도소 정문 앞으로 옮겼다가 1971년 교도소가 북구 문화동으로 이전하면서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1896년 1월, 초대 지도군수(智島郡守) 채원(茝園) 오횡묵(吳宖默, 1834~1906)이 광주 황화루 아래에서 읊다[光州皇華樓下有吟]라는 시가 광주읍지 등에 남아있다.황화루는 광주읍성 내의 누각으로 임금의 칙사, 정부 고관, 기타 내외 귀빈을 맞이하는 장소였다. 칙사나 외국 사신을 맞이할 때 환영의 의미로 부르는 황화곡皇華曲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또는 ‘황황자화皇皇者華’라는 시경詩經 소아편에서 연유했다고 한다. 이는 조선시대에 중국의 천자나 천자의 사신을 높여 부르는 말이었다.
- 2020-03-16 | NO.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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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산정사 晦山精舍
- 광산구 비아동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서쪽 25리에 있다. 회산晦山 강세영(姜世永)이 지어 지냈다. 일제강점기 초기에 지어진 정자로 보인다. 그의 친구 범원식范瑗植이 부탁해 후석 오준선(1851~1931)이 기문을 써주었다. 정자 주인 강세영의 시에 ‘비아飛鵝 학림鶴林 두 지역이 서북으로 둘러 앉고’라는 글귀로 볼 때 광산구 비아동 인근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강세영의 원운, 참판 동계 이우명李愚明의 차운, 1887년 1월 14일에 곡성현감 남하 김영직金永稷 등의 시문이 있다.서구 매월동의 술헌述軒을 지은 강길회姜吉會의 아들이다. 술헌을 중수하는 데 참여했다.
- 2020-03-16 | NO.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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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암정 後巖亭
- 광산구 진곡안길 6 (진곡동) 광산구 하남산단 9번도로 외곽도로 끝부분 왼쪽 농로 길로 들어서면 하남동 진곡마을이 나온다. 진곡마을회관 옆에는 향나무와 대나무 등이 어우러진 숲속에 후암정이 있다. 원래 광산군 거치면에 속한 지역으로 조선 중종 때 순천박씨가 나주군에서 옮겨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 정자는 후암 박섬동 朴暹東의 아들인 박노두朴魯斗, 박노걸朴魯傑 두 형제가 1899년에 건립했다. 이제는 거의 허물어져 장소만 확인되는 정도이다. 아버지 유지를 받들기 위한 효정자이다. 정자는 사각석초 사각기둥의 평범한 건물로 중앙의 거실 한 칸을 제외한 좌우 2칸이 마루, 마루의 좌우전면에 덧창문이 설치되어 재실齋室 형태로 되어 있었다. 앞면 3칸 옆면 3칸의 평기와 팔작지붕이었으나 지금은 완전히 허물어졌다. 정자의 왼쪽에 후암의 큰아들 남파 박노두의 80주년 기념비가 서 있다. 정자 터 입구엔 100년을 훨씬 넘은 향나무만이 그 자리를 지켜보고 있다.박섬동은 한말 사람으로 연재 송병선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그의 호를 ‘후암’이라 한 것은 그의 종선조인 검암 박치도의 학덕을 추모하여 스스로 제2의 검암이 되겠다는 굳은 의지를 나타냈다. 이 정자가 한 때 후암 박섬동의 문생들에 의해 그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근래에 이르러 이러한 향사享祠가 폐지되면서 다시 정자로 남게 되었다. 정내에는 효당 김문옥의 후암정기後岩亭記와 송남 정규종의 후암기後岩記가 걸려있었다고 하나 찾을 길이 없다.바로 옆 건물은 순천 박씨 박충정朴忠挺, 박중항朴中恒, 박성록朴聖祿, 박성수朴聖壽등을 제향하는 재각인 오성재五星齋로 잘 관리되고 있는 것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 2020-03-16 | NO.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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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주정 後洲亭
- 광산구 평동로735번길 29 (옥동) 후주 이진영(1876∼1956)이 효행으로 1911년에 건립한 정자이다. 평동 일대를 서당골로 부르고 있는 데는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를 지낸 그의 아버지 이종수李鐘秀의 뒤를 이어 이진영이 서당을 차려 후학을 가르쳤다. 문하생 400여 명이 당시의 이곳에 모여 가르침을 받았다. 지금의 광산구 평동 천주교회 옆이다.정자가 퇴락하자 그의 제자 및 유림 등의 협조로 1921년에 중건하고 지금은 그의 제각으로 사용하고 있다. 정내에는 그의 스승이었던 석전 이병수의 후주기後主記와 효행을 찬양한 각 향교 유림들의 통문과 상량문이 괘벽掛壁되어 있고 여러 권에 달한 이진영의 미발간문고가 보존되고 있다. 이진영은 지극한 효성으로 정부에서 벼슬을 받아 지냈다. 옥연서당玉淵書堂에서 배우고 이병수 문하에서 경서정독을 수학하였다. 저서로는 문인록門人錄과 후주공문집後洲公文集 등 다수가 있다.그는 그의 선조 이중명李重溟의 아호인 구주鷗洲의 주자를 취하여 호를 지었다. 그의 중년 나이에 침랑寢郞의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한일합방을 통탄하여 한 때 은둔생활을 하면서 일제의 만행에 분개해 삼일 단식의 고초를 겪었고 후주정사後洲情舍를 세워 많은 후학을 배출했다.
- 2020-03-16 | NO.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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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경루 喜慶樓
- 1390-1453동구 객사 광산관 북쪽 * 희경루 방회도 참여인사. 이 그림 하단에 적은 발문에 앉은 자리도 언급하고 있는데 관복의 인물 가운데 오른쪽이 모임을 주관한 전라도 관찰사 강섬(52세), 가운데가 광주목사 최응룡(54세), 왼쪽 세명 가운데 앞쪽부터 정자공 임복(47세), 남효용, 유극공이다. 위쪽 세 사람은 현직 관원이라 관모를 썼고, 정자공과 남효용은 전직이라 평량자(平凉子)를 썼다.희경루는 신숙주(申叔舟)의 기문에 옛날에 공북루라는 누각이 있었으나 없어져 태수 죽산(竹山) 안철석(安哲石)이 부임하여 1년도 되지 않았는데 진실로 보고 즐길만한 장소가 없다는 이야기에 마을 어른들이 좋은 장소로는 공북루의 옛터만한 곳이 없다라고 해 1452년 짓게 된 것이 희경루였다.《광주읍지》(1879, 1924)에는 객사 북쪽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고 했다. 1451년 안철석 목사 때 지은 희경루는 불에 타 1534년 광주수령으로 부임한 신한이 다시 지었다, 1686년 이항과 1866년 안응수에 의해 중수되었다. 지금의 광주 충장우체국 자리로 알려져 있다.기문에서 희경루는 “남북이 5칸이고, 동서가 4칸이니, 넓고 훌륭한 것이 우리나라에서 제일이었다. 동쪽으로는 큰 길에 닿았고 서쪽으로는 긴 대밭을 굽어보며, 북쪽에는 연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동쪽에는 사장射場을 만들어 관덕觀德의 장소로 삼으니, 손님과 주인이 이제야 비로소 올라 쉬는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다. 이는 태수의 뜻을 고을의 백성들이 이루어 놓은 것”이라고 전한다. 그래서 1924년 당시 관덕정으로 불리기도 했다.그러나 희경루에는 다른 사연이 있다. 1430년 광주 사람 노흥준의 행패로 목사 신보안을 구타한 사건이 일어나 당시 광주는 광주목光州牧에서 무진군茂珍郡으로 강등되었다. 이때 필문 이선제가 1451년 광주의 원로들과 함께 임금에게 사건과 목사 승격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하는 등 간곡한 상소로 광주를 다시 광주목으로 복귀시키게 된다.이러한 소식이 전해지고 마침 이 누각마저 낙성되자, 부로들은 모두 모여 태수에게 치하를 드리고 기쁘고 경사스런 일이라 해서 이 시기에 지어진 누각을 희경루라 이름하였다.1451년 신숙주와 1536년 심언경은 각각 ‘희경루기’에서 “고을의 원로들이 모두 모여 경축했다(父老咸集致慶)”, “고을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고 서로 경축했다(邑人咸喜相慶)”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방회도란 과거시험 합격 동기생들의 모임을 그린 그림. 모인 장소는 광주의 희경루(喜慶樓). 하여 “희경루 방회도”라 부른다. 서울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 원래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였는데 2015년 9월 2일 보물 제1879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한마디로, 1546년(명종 1)의 증광시(增廣試) 문·무과 합격 동기생 5명이 1567년(선조 즉위) 전라도 광주의 희경루에서 만나 방회(榜會)를 갖고 제작한 기년작(紀年作) 계회도(契會圖)이다. 비단에 그린 채색화로 크기는 세로 98.5㎝, 가로76.8㎝. 정자공 풍암 임복(楓巖 林復, 1521~1576)의 자는 희인(希仁). 정자공의 휘함(諱啣)이 들어간 방회도(榜會圖)가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되었다.
- 2020-03-16 | N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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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우정 喜雨亭
- 광산구 박호동 535-3 박산마을 입구에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충민공 양산숙梁山璹을 비롯한 송천 양응정 가족 8명의 충효열행을 기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인 양씨삼강문梁氏三綱門과 임류정林流亭이 자리하고 있다.이곳에서 남쪽 방향의 박호등임로에 황룡강과 포전들을 바라다 보이는 길 언덕에 희우정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는 옆에 있었으나 퇴락하여 2000년에 다시 이축하여 중건했다.희우喜雨는 두보杜甫(712~770)의 시에서 ‘좋은 비 시절을 알아서 내리니, 봄을 맞아 만물을 피어나게 하네[好雨知時節 春夜喜雨]’에서 유래한다. 농사의 감독을 위한 권농의 성격인 찰농지소察農之所로서 전사田舍나 장사莊舍 정도로 보인다. 희우정은 지금 지어진 시기보다 더 오래전인 일제강점기 무렵에 초당으로 지어졌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소재 노수신도 두보를 들어 희우를 거든다. 好雨知時節 좋은 비가 시절을 알아서 내리니何如杜子春 두보의 봄비와 비교하여 어떠한고上農霑上瑞 상농가는 더 큰 혜택을 입었으리中夏浹中旬 오월 중순 내내 단비를 내리는구려희우정(喜雨亭)은 속담에 '봄비는 일 비고, 여름 비는 잠 비고, 가을비는 떡 비고, 겨울 비는 솔 비다' 했듯이 봄에는 비가 와도 들일을 해야 하고, 여름에는 비교적 농한기 이므로 비가 오면 낮잠을 자게 되고 가을비는 햅쌀로 떡을 해먹으며 쉬고, 겨울에는 술을 먹고 즐긴다는 뜻으로 일대 마을민의 삶의 흔적이 묻어 있는 곳이다.노수신이 읊은 시에서 희우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五月天地昏 오월의 천지가 저물어 가니陽烏赤如火 태양이 불처럼 빨갛게 달아올라熯乾中谷蓷 골짜기의 익모초가 바싹 말랐네農事半已墮 올 농사가 절반은 이미 글렀구려 皇天譴告極 하늘의 견책 경고가 극에 달하자雷聲喧昨夜 어젯밤 천둥소리가 요란하다가 風定雲黑色 바람 자고 검은 구름 펼쳐지더니 沛然雨斯下 큰비가 줄기차게 내리는구나/소재집 제1권같은 이름으로 서울에 세종대왕이 희우정이라 이름 붙인 곳이 있다. 1925년 큰 홍수로 자취를 감추었다가 1989년 10월 복원해 1990년 6월 서울시기념물 제9호로 지정된 문화재가 있다. 마포구 망원동의 동명이 유래되기도 한 망원정은 양화나루 서쪽에 자리한 옛 정자로,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이 세종6년(1424)에 지은 별장이다.별장은 지은 이듬해 가뭄이 계속되자 세종이 농사형편을 살피려 효령대군이 기거하던 마포에 거동했다가 이 정자에 올랐는데, 그 때 마침 단비가 내려 들판을 흡족히 적시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정자 이름을 '희우정(喜雨亭)'이라 명하며 글씨를 내린 곳이다.세종은 그후 자주 희우정에 나와 농사일을 살피고 한강을 지키는 수군들의 군사훈련을 참관했다 한다. 이후 1484년에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소유로 바뀌게 되자, 월산대군은 정자를 보수해 '먼 경치도 잘 볼 수 있다'는 뜻으로 이름을 '망원정(望遠亭)'이라 고쳐 지었다.
- 2020-03-16 | NO.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