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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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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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읍취정 挹翠亭1
    북구 우치로 236 (오치동)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다. 하서 김인후가 정자 이름을 지었다는 점에서 1570년대 무렵으로 여겨진다. 임진왜란 때 김천일 장군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 싸움에서 왜적과 대적하다 순절한 승사랑 읍취 이방필(李邦弼, ?~1592)의 후손이 세웠다. 그 후손이 이양원(1526~1592)으로 호는 노저鷺渚 자는 백춘伯春이라는 기록도 보인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10리에 있다.고종 때 남강 이재정의 문하생 70여 명이 1898년에 창계한 강의계講誼契가 있었으나 소멸되었다. 원래 동리 양편의 구릉에 반송이 있어서 읍취라 칭하고 이곳에 정자를 창건하여 강회講會의 장소로 사용하였다 한다.예전에는 판서 조경호의 편액과 노사 기정진의 기문이 있다. 기우만을 비롯해 이장헌李章憲, 이재순李載純, 김택수金宅洙, 송병제宋秉濟, 황연수黃烈周 등의 시문이 적힌 현판이 걸려 있었다. 기록에는 마을 전체의 공유로 나와 있으나 지금은 함평이씨 문중의 소유이다.1996년에 철거하고 1997년 옛 정자를 모방해 지하1층 지상 6층의 새 건물을 지었다. 앞면 4칸 옆면 2칸의 골기와 팔작지붕 건물로 현재 광주농협 오치동지점 뒤편 주차장 관리사무소로 사용하고 회랑에 방을 내어 함평이씨문중 사무실로 만들었다. 정자 오른쪽에는 오산 이용현을 기리는 조선유민오산이공지비朝鮮遺民梧山李公之碑가 있고 정자 위쪽에는 함평이씨종회각이라는 건물이 있다. 읍취정이 있었다는 장소만 말해주고 있을 뿐 의미가 없다.
    2020-03-13 | NO.75
  • 읍향정 挹香亭
    남구 압촌길 78 (압촌동)   남구 제봉산 하록에 있다. 이 정자는 고경명의 종손인 남주 고영문(1841~ ?)이 피서 겸 휴식처로 그의 집 앞에 지은 2칸 와가의 조그마한 건물이다. 비록 그의 이름은 정자라 하지만 그의 규모로 볼 때 어느 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촌각에 불과하다. 의병장 고경명의 옛터에 후손들이 1917년에 건축한 목조 고가인 고원희가옥高元熙家屋의 입구에 지어진 정자다. 연못 가운데에 있었던 이 정자의 3면에는 손잡이 난간이 있고, 그 옆에는 연방죽이 있다. 그 후면에도 연방죽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도로로 편입되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1930년에 건립된 것으로 다른 정자와는 달리 시문 현판이 전혀 없고 정자 이름을 표시한 간판도 없다. 다만 상량 괴목에 ‘읍향정’이라는 세 글자가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읍향정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고경명과 그 아들 고종후高從厚, 고인후高因厚 형제가 순국을 위로해 모신 사당과 고원희가옥, 반대편 서쪽에는 1충, 3효, 2열, 1절로 7명의 충절을 기리는 고씨삼강문高氏三綱門과 후원각이 있다. 일대의 압촌鴨村은 올미실이라 부른다. 
    2020-03-13 | NO.74
  • 이산정사 泥山精舍
    남구 양과동 (야평제)   1918년 이후 산림에 은둔하여 후학을 가르치는 데 전념한 경당 최윤환(1898~1979)이 만년에 이관산泥冠山 아래에 이산정사를 지어 학문을 강론했다. 오늘날 호남유림의 손꼽을 만한 보인계輔仁契로 사족을 넓혔다.최윤환은 최상정崔相廷의 아들로 1898년 광주 양과동 야평마을에서 출생했다. 그는 죽파 최기룡에게서 경전을 배우고 현와 고광선을 사사하였다. 이관산 아래 현 광산구 이장동은 살벌한 붕당정치로 꿈이 꺾였던 절인 이발李潑, 이길李洁 형제의 고향이다.1918년 고종황제가 승하한 이후 밤낮으로 나라를 걱정하며 산림에서나마 후학을 가르치는데 전념하였다. 양과동 향약에 깊이 참여하여 양과동정 보수에 참여해 중수기를 찬撰하였다.그는 우정愚汀 고광익高光益, 지암芝菴 박재원朴載元, 운파雲坡 최수화崔洙華 등과 학문을 강론하였고 효당 김문옥, 고당 김규태와 시문을 나눴다. 그의 시문이 전라도에 많이 남아 있다. 저서는 <경당만록敬堂漫錄>이 있다. 그의 시가 북구 생룡동 범현식의 야옹정野翁亭에 남아 있다.  
    2020-03-13 | NO.73
  • 이임정 履臨亭 행은정 杏隱亭
    남구 행암도동길 14 (구암마을)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남쪽 10리의 거리에 참봉 암사(嵓史) 또는 암수(岩叟) 윤희상(尹喜祥)이 지었다[履臨亭 在州南十里 參奉 尹喜祥 所構]라고 전한다. 그는 남구 행암동 구암마을 출신으로 서예로 명성이 있었으며, 1930년 이임정을 짓고 지냈다. 이임履臨이라는 이 말은 '얇은 얼음을 밟고 깊은 연못에 다다른 것처럼 언제나 그의 마음을 조심하고 주의한다'는 뜻으로 붙인 하나의 잠언箴言이다.그의 사후에 1982년에 윤석봉에게 인수되어 행은정杏隱亭으로 이름이 바뀌어 현재 그 자리에 대신 자리하고 있다. 광주대학교 뒷산에서 대동마을로 이어지는 산줄기 남쪽에 마을이 위치한다. 윤석봉이 아버지행은(杏隱) 윤희규(尹喜奎)의 뜻을 받들어 마련한 효정자이다.정내에는 설주(雪舟) 송운회(宋運會 1874~1965)의 행은정이라는 현판과 윤희규의 원운 한 수만 걸려 있다. 윤희상이 읊은 시가 있다.   괴벽스런 이 내 몸이 노는 것을 싫어하여긍외兢外하는 마음으로 이 마을에 살았도다지난 옛날 그 청춘이 어제처럼 느껴지니하얀 백발 오늘날 많은 회환 느꼈도다해가 지는 어둔 밤에 밝은 달빛 떠오르고날이 밝은 한나절에 다락문을 닫았도다늙은 나이 이 내 몸이 이 가운데 즐겨하니아름다운 향기꽃이 계절따라 피었도다  
    2020-03-13 | NO.72
  • 이택당 以澤堂
    광산구 월계동 510번지 월계동 첨단지구내 무양공원 남쪽 끝에는 고려 인종 때의 명신 장경공 최사전을 비롯하여 그의 후손인 손암 최윤덕, 금남 최부와 문절공 유희춘, 충렬공 나덕헌 등 다섯 명의 인물을 만날 수 있는 무양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서원은 일제강점기 때인 1927년에 탐진최씨 문중이 전국 유림의 호응을 얻어 세운 서원이다. 광주의 옛이름 ‘무진의 볕’[武珍之陽]이라는 뜻에서 무양서원으로 이름지었다 전한다. 1984년 지방문화재 자료 제3호로 탐진최씨 문중 소유이다.강당인 이택당以澤堂은 앞면 5칸 옆면 2칸,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이택麗澤은 붕우 간에 강습함을 말한다. 주역周易 태괘兌卦에 “두 못이 연결되어 있는 형상이 태兌이니 군자가 이를 따라 붕우 간에 강습한다[麗澤兌 君子以 朋友講習]”는 말에서 유래한다.   오른쪽에 동재인 성지재誠之齋, 왼쪽에 서재인 낙호재樂乎齋가 있다. 높은 대지 위에 담장을 돌린 무양사武陽詞가 있다. 사당은 앞면 3칸 옆면 2칸,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내삼문인 삼오문이 있어 사우祠宇 안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원래 서원이 명현을 제사하는 사祠와 교육을 담당하는 재齋로 나누어진 점을 생각하여 탐진최씨 문중에서는 1945년 광산구 첨단중앙로 181번길(쌍암동)에 무양중학교(현 비아중학교)를 설립, 지금까지 교육기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2020-03-13 | NO.71
  • 일성재 日省齋
    광산구 안청동 (안청마을 후면)   일성재는 광산구 안청동 안청마을의 후면 높은 언덕위에 위치해 있다. 이재(易齋) 박노열(朴魯烈)은 그의 족형인 석음(石陰) 박노술(朴魯述, 1851∼1917)에게 학업을 익히고, 다시 송사 기우만의 문하에 나아가 그의 학문을 넓혔다. 박노열은 자신의 학문을 대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의 큰 아들 박민규를 비롯한 종친 박일, 인척인 심수택 등과 함께 10년 동안 장성군 남면 통현산通峴山의 한적한 곳에 산당을 지어 독공篤工을 하는 칩거생활을 했다.이로 인하여 여러 제자들이 그를 따라 학문을 익혔으며, 하산한 이후에도 많은 제자가 모였다. 이때의 제자들이 서로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하나의 계안契案을 만들어 그 이름을 ‘일성’이라 하였다. 해마다 한 차례의 모임을 가져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각자의 성의에 의한 희사로 계회契會의 재원을 충당하였다. 하남산단이 들어서면서 토지보상금을 받게 되었고 이 기금과 재일교포로 일본에 거주한 그의 아들 박민규의 참여로 일성재가 건립되었다. 앞면 4칸 옆면 2칸의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도리석초, 도기기둥의 규모를 갖추고 있다. 이 집은 좌우 양쪽에 각 한 칸의 거실이 있고 중앙의 2칸은 벽이 없는 통용마루로 터져 있다. 창건은 1988년 4월 일성계 발의와 1989년 7월 상량을 거쳐 1990년 9월에 준공됐다. 일성日省이란 뜻은 옛날 중국의 명현名賢 증자의 일삼성오신日三省吾身라는 고어에서 연유된 말이다. 이 말은 날마다 자신을 하루 세 번씩 반성하여 스스로의 잘못을 깨우쳐 바로 한다는 뜻이다.첫째는 사람을 위에 어떠한 일을 하면서 나의 성심을 다하지  않았는가. 둘째는 벗을 사귀면서 나의 신의를 지켰는가. 셋째는 스승에게 배운 바의 학문을 제대로 익혔는가 등이다.정내에는 별다른 문헌이 없고 중앙 정면에 일성재라는 대서현판과 나갑주의 일성재 기문이 벽상에 걸려 있고, 주인 박노열의 옛날 고서 일부가 책장에 보관되어 있다. 
    2020-03-13 | NO.70
  • 일신당
    서구 금화로 23(금호동)『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서쪽 20리 거리에 일신당日新堂이 있었다. 뒤로는 얕은 산이 둘러싼 고즈넉한 만호마을이었다. 개촌 때는 만호곡晩湖谷이라 불렀고 정자는 상당히 오래전에 지어졌다. 1827년 이 마을에 살던 당시의 의식있는 지식인 3성씨인 음성박씨 일산日山 박호언朴浩彦, 순천박씨 후조後造 박유현朴柔鉉, 전주이씨 심곡재心谷齋 이현문李顯文 등 3옹이 일신계日新契를 조직하고 후진을 가르친 서당이다. 이곳은 문도강학問道講學하는 유가이념을 구현하기 위하며 일대의 적지 않은 향촌의 규율과 생활질서를 담당한 향약의 장소이다. 6.25 민족상잔의 아픔을 겪으면서 많은 시련을 맞았다.제일 앞에 돈의당이란 무실 정자가 있었다. 앞면 2칸 옆면 1칸의 작은 정자였다. 그 뒤에 있었던 일신당은 모두 옛 영화를 잃은 채 존폐의 기로에 서 있다가 모두 철거하고 지금은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일신당은 앞면 4칸 옆면 3칸에 내실이 있고 쪽마루에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었다. 심곡재心谷齋라고 부르고 전주이씨 재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일신당기와 현와 고광선의 중수기가 비석으로 새겨져 있다. 위암猬菴 박성우朴性愚의 제액도 있었다. 1999년에 일신당보존위원회장 이달우李達宇를 중심으로 일신당육영공적비를 세우고 일신당지를 발간하였다.2017년 초까지 황폐화되어 무너지기 직전이었으나 2017년 중반 이후 주차장으로 바뀌었다.
    2018-05-23 | NO.69
  • 일신재 日新齊
    북구 일곡로 41번길 41-8   옛 일곡동 자연부락 주택가 안에 일신재가 자리하고 있다. 일신재는 일곡동 절효사節孝祠와 함께 있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20리 거리에 있다. 원래 있던 사우가 철폐된 이후 탕 임금의 반명盤銘을 따라 그 이름을 일신이라 했다. 은나라 탕임금은 세수 대야에 날마다 새롭게 한다는 ‘구일신苟日新 일일신日日新 우일신又日新’을 새겨놓고 매일 자신을 돌아보았다고 했다.일신재라는 현판 옆에 강당이라는 편액이 나란히 있어 후학양성으로 사용했던 서당, 강당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신재에는 26개의 시문 현판이 걸려있어 전각의 무게감을 주고 있다. 들어가는 입구에서 바라보면 일신재가 한 단 아래에 먼저 있고 일신재를 지나서 그 뒤에 한 단 위에 절효사가 있다. 절효사는 광주노씨 절효공파의 노준공(盧俊恭, 1340-1397), 노희서(盧希瑞, 1558-1592)를 배향하는 사우이다. 조선 정종때 ‘절효’라는 시호를 내리고 정려를 짓도록 하여서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에 1398년 창건되었다가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이후 지금의 1986년 북구 일곡동 일신당 뒤에 다시 복원되었다.
    2020-03-13 | NO.68
  • 임류정 臨流亭
    광산구 박호동 480-8 임류정은 조선 전기 유학자인 송천 양응정(1519~1581)이 조양대와 함께 지은 누정이다. 화순군 도곡면 월곡리에서 태어났다. 교리 양팽손梁彭孫의 아들이며 동래부사를 역임한 양응태梁應台의 동생이다. 그는 처가가 있는 박호마을로 거처를 옮겼다.현재 누정은 임류정중수기에 따르면 1994년에 보수한 것으로 창건 당시의 모습은 아니다. 바로 옆 양씨삼강문과 함께 광산구 지정문화재이며, 양응정의 절의정신을 대표하는 유물이다. 현재는 5점의 현판이 걸려 있다.광산구 송정동에서 영광, 함평 쪽으로 송산대교를 건너기 전에 황룡강을 따라서 북쪽으로 송산유원지를 지나 양씨삼강문이 나타난다. 멀리 황룡강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정자가 있었으나 화재로 전소하여 다시 지었다.양응정은 생원시와 중시에서 장원을 하였다. 양응정과 기대승은 무척 친했다.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살았다. 그것은 그들의 술자리가 빈번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고 또 기대승의 정자가 임류정에서 가까운 임곡동 낙암정樂庵亭이었다. 양응정은 8년의 나이 차이를 '유자의 스승'이라며 받들고 서로를 극진히 존경했다.  
    2020-03-13 | NO.67
  • 임리정 臨履亭 -만오정2
    광산구 산월동 월봉마을 안산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20리에 있다. 북구 용두동 거진마을에 살던  최희순이 건립했고 현와 고광선의 상량문 및 후석 오준선의 기문, 화석 송조헌의 시가 있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건물이었다. 최희순은 이렇게 정자를 노래했다.   높은 곳에 임리정이 그지없이 깨끗하니이 가운데 몸을 숨겨 많은 덕을 길렀도다오동梧桐 위의 밝은 달빛 보답없이 바라보고드리운 성사(成絲) 버들 봄철을 알려주네.농담農談을 나누면서 술잔을 기울이고바둑판 앞에 두고 시詩를 나누는 친구 맞았도다.항시 조심하는 마음가짐 성훈(聖訓) 명심하여임리臨履라는 두 글자로 나의 뜻을 부쳤도다. 은진恩津 송병직宋秉稷은 임리정기臨履亭記에 “옛날에 군자가 항상 공경한 마음으로 남들이 듣지도 않고 보지도 않는 홀로 있을 때의 언행을 삼가 두려워하였고 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싹트려는 사심의 기미를 미리 점검하여 사전에 예방하는 독실한 수양을 쌓았다”고 며 적은 것으로 보아 정자가 지어진 의미를 잘 나타냈다.이 기문에서는 그의 아들 최재진崔在鎭이 어버이의 뜻을 받들기 위해 정자를 지어 기쁘게 했다면서 정자의 이름을 부탁해 ‘임리’라 했다고 밝혔다. 이 말은 '여임심연여리박빙如臨深淵如履薄氷'이라는 옛날 성현의 말씀대로 깊은 연못에 다다르고 얇은 얼음을 밟은 듯이 언제나 조심스러운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한때 광산구 산월동 월봉마을의 천봉안千鳳安씨에게 매도되어 그가 일부 구조를 바꾸어 그 이름을 만오정晩悟亭으로 고치어 다른 기록에는 만오정이라고 한다. 따라서 임리정과 만오정은 같은 정자이다. 만오정으로 부르다가 1961년에 건물 자체가 퇴락되어 그의 모습을 잃었다.만오정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천봉안의 만오정원운과 김상기가 여러 벗들과 함께 노래한 시로 만오정여제익공부晩悟亭與益共賦가 있다.그리고 이 정자의 창건연대를 관련 기록의 내용으로 보아 1880년대가 아닌지 추정된다.전후 4개, 좌우 3개의 주춧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정면 3칸(三間), 측면 2칸(二間)의 건물임 이 분명하고 또 좌우후면의 토사유입방지를 위한 별도의 석축방벽(石築防壁)이 있어 당시의 완고 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또 이 정자가 다른 정자와 달리 높은 산정에 위치해 있어, 전후좌우가 모두 트여있고 송백수림(松栢樹林)이 주위를 둘러 그의 전망이 매우 아름답다.  이 이외에도 이 산 의 아래에 많은 어족(魚族)이 생장(生長)하는 깊은 개울이 있어 여름철의 놀이터로 아주 안성맞춤 이다. 그러나 이 정자가 후손들의 무관심으로 무너져 없어지고 대신 그자리가 무성한 잡초로 황폐 되어 많은 아쉬움을 남기게 하고 있다.   송조헌(宋祖憲)은 임리정에서 읊기를 한 지역 맑은 땅이 티끌없이 깨끗하니 /전긍戰兢에 깊은 공부 날마다 새롭도다.공경으로 持身하여 바른 예의 좋아하고/화한 기운 滿座하니 봄 기운이 돋아네.   푸른 솔이 무성하니 三經 길이 荒蕪하고/ 버들가지 그늘지니 네 이웃이 후미지네늙어가는 閒情으로 이 정자를 卜築하여/아름다운 강호속에 道中人이 되었도다. 
    2020-03-13 | NO.66
  • 임이재(臨履齋, 임리재)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이재(臨履齋), 조선 후기 유학자 오태규(吳泰圭 1795∼1866)가 학문을 강구하고 후학을 강학했던 곳이다.  자는 덕현(德現)이고, 호는 임이재(臨履齋), 나주(羅州) 오(吳)씨다. 증조부는 오수원(吳洙源)이고, 조부는 오정상(吳正相)이며, 부친은 오영효(吳榮孝)인데 모두 문학으로 이름을 드러냈다. 임리(臨履)는 전긍임리(戰兢臨履), 즉 항상 두려워하는 자세로 매사에 조심하여 신중히 처리하는 것을 뜻하며, 시경 소아(小雅) 소민(小旻)에 “매우 두려워하고 전전긍긍 조심하여 깊은 못에 임한 듯, 얇은 얼음을 밟는 듯이 한다.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冰” 하였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 수종재(守宗齋) 송달수(宋達洙: 1808∼1858)‧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 등과 교유하였다. 그의 문집으로 임이재유고(臨履齋遺稿)가 있다.기정진이 임이재 오태규에 대한 만사(挽臨履齋 吳泰圭)에서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매사를 신중히 처리하는 것을 말하는 연빙(淵氷)이었다"며 그를 기리고 있다. 연빙은 시경 소민(小旻)의 “전전긍긍하여 심연에 임하듯 얇은 얼음을 밟듯 한다.〔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聞名非一日 명성 들음이 하루 이틀이 아니요接話屬殘年 만나 담화하기는 말년의 일이었네生老舊家世 오랜 명문 집안에 태어나 늙었고淵氷新宅扁 새로운 집의 현판은 연빙이었네   浮生眞石火 덧없는 인생은 진정 전광석화이니交道盡重泉 사귄 사람들은 다 황천으로 가네拭淚還成賀 눈물 닦고서 다시 하례를 하노니知君嗣述賢 그대가 현인 서술 잘 했음을 알겠네
    2020-03-13 | NO.65
  • 자운대 紫雲臺
    동구 운림동   무등산 장군봉 중턱에 전망대 역할을 했던 자운대紫雲臺가 있었다. 동운桐雲 조규복曺圭復이 세워 지냈다고만 전하고 있다. 자운紫雲은 자줏빛 구름, 자줏빚 자紫, 구름 운雲, 돈대 대臺 자를 써서 자줏빛 구름으로 싸인 축대를 의미한다.    
    2020-03-16 | NO.64
  • 장한재 藏寒齋
    광주시 광산구 평동(관동)에 돈학재敦學齋의 주인 묵헌(默軒) 이중권李重權(1869~1932)의 강학지소였다. 송사 기우만이 기문을 남겼고 여러 문인이 석채례釋菜禮를 행하였다.이중권의 자는 경구(敬球)요, 호는 묵헌(黙軒) 또는 돈학재(敦學齋)이며 본관은 전주(全州)다. 1869년 광주에서 감찰(監察)을 역임한 복룡재(伏龍齋) 이용태(李容泰)의 아들로 평동 용동마을 출신이다. 조선 말기 의병장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1846∼1916) 문하에 출입하면서 한말의 유학자요 호남일대의 사표(師表)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善 1851∼1931), 항일지사 난와(難窩) 오계수(吳繼洙 1843∼1915) 등 일대 당대의 명사들과 강론하면서 두문불출하며 흥학계를 조직하고 세한재에서 학문을 강구하고 후학을 가르치다 1918년 고종이 승하 하자 망곡단을 쌓고 통곡하며 국운을 걱정하다 세상을 떠났다.광주지(光州誌 1964)에 기록이 있다. 그의 문집 돈학재유고(敦學齋遺稿)가 남아 있다. 돈학재기(敦學齋記), 세한정사상량문(歲寒精舍上梁丈), 세한재기(歲寒齋記) 등이 있다.
    2020-03-16 | NO.63
  • 정각정 正閣亭 초은정
    북구 수곡동 산45-1   북구 수곡동에 정각정이 있다. ‘정각正覺 = 정등각正等覺 - 참(정말) + 깨닫다’는 불가의 용어로 바른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정자의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3칸의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거실 1칸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판자마루로 꾸며져 있다. 효령동의 초은정樵隱亭을 수곡마을로 옮겨 정각정으로 했다고 한다. 정각정은 전주이씨로 대를 이어 이곳에 살아온 이길신李吉信이 부친 정각 이장섭의 뜻을 잇기 위해 1959년에 옮겨 지은 효정자다. 이길신의 정각정원운에서 이미 변화된 효심-육아시蓼莪詩(부모가 애써 자식을 키운 공을 노래한 시)의 심정-세태와 사정思亭의 의미가 퇴색될까 걱정을 하고 있다.상량문은 족제 삼청산인 이석종이 썼다.정각정에는 당시에 일대의 경치를 보여주는 10경을 포함 오준선 등 많은 인사들의 차운 시와 글이 전하고 있다. 이장섭은 한말의 선비로 특히 시를 좋아한 인물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족종(族從) 이상남(李相南), 족제(族弟) 이춘섭(李春燮), 생질(甥姪) 노유영(盧有永), 운파 김진현, 홍주 송재학, 백인재 김련, 남애 임태영, 화산 오택렬, 의당 노진영, 미호 정운영, 유남 고광영, 문강 기근섭, 남강 정순환, 운파 최수화, 연빙 김상해, 옥산 이광수, 외당 고한, 행산 오주열, 외당 고한주, 진제산인 윤영기, 만취 박승주, 긍당 이기영, 종하(宗下) 이회춘, 사종제(四從弟) 이관섭, 명춘 노석우, 유곡 고연주, 죽포 기세풍, 춘강 노문영 등의 글이 보인다.원래 초은정은 효령동 학동마을 뒷산 높은 언덕 위에 초은 이호헌(1858~1919)이 지었다. 그가 이 정자를 다 짓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자 아들 이상호李相皓가 그 뜻을 받들어 완성하고 부친의 호를 따 초은정이라고 했북구 수곡동 산45-1 북구 수곡동에 정각정이 있다. ‘정각正覺 = 정등각正等覺 - 참(정말) + 깨닫다’는 불가의 용어로 바른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정자의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3칸의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거실 1칸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판자마루로 꾸며져 있다. 효령동의 초은정樵隱亭을 수곡마을로 옮겨 정각정으로 했다고 한다. 정각정은 전주이씨로 대를 이어 이곳에 살아온 이길신李吉信이 부친 정각 이장섭의 뜻을 잇기 위해 1959년에 옮겨 지은 효정자다. 이길신의 정각정원운에서 이미 변화된 효심-육아시蓼莪詩(부모가 애써 자식을 키운 공을 노래한 시)의 심정-세태와 사정思亭의 의미가 퇴색될까 걱정을 하고 있다. 상량문은 족제 삼청산인 이석종이 썼다. 정각정에는 당시에 일대의 경치를 보여주는 10경을 포함 오준선 등 많은 인사들의 차운 시와 글이 전하고 있다. 이장섭은 한말의 선비로 특히 시를 좋아한 인물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족종(族從) 이상남(李相南), 족제(族弟) 이춘섭(李春燮), 생질(甥姪) 노유영(盧有永), 운파 김진현, 홍주 송재학, 백인재 김련, 남애 임태영, 화산 오택렬, 의당 노진영, 미호 정운영, 유남 고광영, 문강 기근섭, 남강 정순환, 운파 최수화, 연빙 김상해, 옥산 이광수, 외당 고한, 행산 오주열, 외당 고한주, 진제산인 윤영기, 만취 박승주, 긍당 이기영, 종하(宗下) 이회춘, 사종제(四從弟) 이관섭, 명춘 노석우, 유곡 고연주, 죽포 기세풍, 춘강 노문영 등의 글이 보인다. 원래 초은정은 효령동 학동마을 뒷산 높은 언덕 위에 초은 이호헌(1858~1919)이 지었다. 그가 이 정자를 다 짓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자 아들 이상호李相皓가 그 뜻을 받들어 완성하고 부친의 호를 따 초은정이라고 했다. 초은정은 석촌 윤용구가 현판을 썼으며 고광선, 윤영구, 오준선 등이 기를 써 이들이 활동했던 시기를 보아 일제강점기 초반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다. 초은정은 석촌 윤용구가 현판을 썼으며 고광선, 윤영구, 오준선 등이 기를 써 이들이 활동했던 시기를 보아 일제강점기 초반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2020-03-16 | NO.62
  • 제금루 製金樓
    동구 금남로1가 (하모당 서쪽) 광주읍성은 주위가 8천2백53척이고, 높이가 9척이며, 안에 우물 백 개가 있었다고 전해 꽤 큰 읍성터였다. 흔적조차 사라진 그곳에 누각 제금루가 있었다. ‘제금製金’은 ‘춘추좌씨전’에 나온 말로 비단으로 옷을 지어 입히듯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겠다는 다짐을 나타내는 말이다.《광주읍지》(1879, 1924)와 《호남지》(1935)에는 하모당 서쪽에 있으며 1848년 목사 윤치용(1800~ ?)이 창건했다. 규모는 객사 정문인 황화루와 비슷했다. 건물은 2층이었고 앞면 3칸이었다. 나주에 있는 옛 관아 정문인 정수루와 비슷한 크기였다. 1855년 목사 홍재응이 중수했으며 이후 얼마 되지 않아 1877년에 헐렸다. 소빈헌과 월소루가 불났을 때 화마를 입은 듯하다.광주읍성내 아사衙舍 정문 쪽에 있으며 공무의 여가를 이용한 관원들의 휴식터로 사용됐다. 지금의 옛 도청 앞 광장에 있었다고 보인다. 읍성안의 관아 배치는 음양오행 원리사상에 따라 중앙에 객사, 북동쪽에 동헌, 북서쪽에 군사시설, 서남방에 신분이 낮은 관아를 배치했다. 이 기준에 따라 동헌의 서북쪽은 지금의 궁동인 사정리射亭里가 되었고 서문 안에 옥을 두고 이를 관리하는 보관청과 공방청(수사기관)을 두었다. 천민계급에 속한 기생과 악공, 취타수들이 근무하는 교방청도 배치했다. 물론 취타수들은 따로 서남쪽에 배치한 수성청守城廳 곁에 따로 두기도 했다. 수성청 곁에 군기고와 기고청, 화약고, 천양관, 관덕정 등을 배치했으므로 충장로 3가 일대와 황금동 제일극장 일대가 이에 속한다.
    2020-03-16 | NO.61
  • 광주광역시
  • 한국학호남진흥원
  • 사이버광주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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