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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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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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양대 朝陽臺
    광산구 박호동 산131-1 송천 양응정(1519∼1581)은 1519년 화순군 능주 월곡리에서 태어났다. 부친 앵팽손이 을사사화에 연좌되어 화순 중조산 아래 쌍봉리에 학포당學圃堂을 짓고 은둔하였을 때 조양대朝陽臺에서 수학했다. 조양(朝陽)은 아침해가 뜨는 동산으로, 오동나무가 이곳에서 자라 봉황새가 산다고 한다. 시경(詩經) 권아(卷阿)에 “봉황이 우니, 저 높은 산에서 우는도다. 오동이 자라니, 저 조양에서 자라는도다.[鳳凰鳴矣 于彼高岡 梧桐生矣 于彼朝陽]”이라 하였는데, 그 주에 “산의 동쪽을 조양이라 한다.” 하였다. 봉명조양(鳳鳴朝陽)의 다른 의미는  거리낌 없이 직간(直諫)하는 사람이나 그 행동을 칭찬하는 것으로, 양응정의 인품을 이르고 있다.양응정은 1534년 생원시에 장원했다. 1552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홍문관 정자가 되고 시강원, 부수찬, 대교를 거쳐 수찬에 이르렀다. 외직으로 전라도사, 순창현감이 되었다. 다시 내직으로 정언, 헌납, 필선, 장령, 지평, 공조 좌랑, 예조 좌랑에 이어 1556년에는 병조좌랑이 되었다. 문신정시文臣庭試에서 수석을 하는 특출한 실력을 내보였으며 이후 이조좌랑이 되었다가 사가독서를 했다. 제학諸學에서 교수하다. 다시 외직으로 관서 관북 평사評事로 지내다가 능양(綾陽 화순 능주)에서 당시 나주(羅州) 박산(朴山)으로 이주하여 조양대(朝陽臺)와 임류정(臨流亭)을 짓고 시주(詩酒)와 강학을 일삼았다.양응정은 1567년 광주목사를 지냈으며 1568년 유선록儒先錄을 편찬하는 데에 참여하고 1570년 진주목사에 이어 1571년 다시 중앙직의 대사간에 이어 병조, 이조 참의, 대사성, 부제학, 승문원부제조 겸 동지경연춘추관사를 역임했다. 1574년 모함으로 파직되나 곧 바로 신원되어 예조참의가 되었다가 첨지중추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귀향하여 경적經籍을 연구하며 생도를 가르치게 된다. 그는 아버지가 유배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10년간 은거하였고 1627년의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로 왕을 호종하며 대사성·도승지 등을 역임했다. 그의 사후에 의식있는 문인들이 그의 삶을 무척 흠모했다.  
    2020-03-16 | NO.60
  • 존심당(存心堂)
    서구 금호운천길 31 (금호동)    존심당(存心堂)은 병천사(秉天祠)에 있는 건물이다. 아파트 숲속에 색다른 문화와 깊은 애국정신이 깊이 녹아 있는 곳이다. 존심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중앙 3칸은 대청마루이며 양익간에는 모두 방을 두었으며, 행정(杏亭)이라고 부르고 있다. 존심당은 사당과 내외삼문, 동서재, 강당, 중문, 원직사 등 10여동의 건물이 병천사를 이루고 있는데 전체 건물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존심당이 처음 지어진 것은 고려시대로 추정되고 있다. 1979년 8월 3일 광주시 유형 문화재 제 11호로 지정되었다.고려사의 탁미를 충줄의 피로 장식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선생 등 사현을 제정해 그들의 정신과 얼을 모시는 병천사(시지정유형문화재)는 전국 굴지의 대사우이며 경내에 있는 약수의 정량 또한 천하일품이였다고 전하고 있다.존심당은 정자명 존심(存心)과 연계가 된다. 존심(存心)이란 단어의 의미 맹자(孟子) 진심편(盡心篇) 머리에 나오는 “자기의 마음을 보존하고 그 본성을 키우는 것은 하늘을 섬기기 위함이다(存其心養其性所以事天也)”라는 말을 기본으로 한다. 결국 사당을 지은 이유가 이 단어 내포되어 있다.존심당에 또다른 현판 한송죽(寒松竹)이라는 현판이 있다고 한다.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추울수록 송죽은 기개가 더욱 꿋꿋하다. 歲寒松竹節彌堅”, 즉 혹한 추위가 왔을 때는 소나무와 대나무만이 변함없이 푸르름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다.논어 자한편에 나온 구절 "歲寒然後 知松柏之 後凋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는 뜻으로 대나무와 소나무를 통해,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꿋꿋이 지켜 나가는 인물을 비유해서 표현한 말이다. 그 모든 세월을 지난 겨울, 늙어야만 그러한 도취된 생활을 하지 않은 소나무같이 초지일관의 삶이 마지막에 청송의 곧고 굳은 기상으로 인생을 마감한다는 의미심장한 '한송죽(寒松竹)' 정신을 후인에게 전하고 있다.“큰 일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작은 지출을 아끼지 않는다 成大事者 不惜小費”  
    2020-03-16 | NO.59
  • 주곡정
    서구 벽진동광주향교의 『광주지』(1964)에는 주곡정舟谷亭은 서구 벽진동에 진사 박치화朴致和가 늘그막에 유유자적하며 지낸 곳이다. 후손 박하선朴夏善이 중건하고 원운을 남겼다.
    2018-05-23 | NO.58
  • 주은정
    서구 벽진동옛 서창면 주곡리 벽진마을 산기슭에 정자 주은정舟隱亭이 있었다. 처사 김해 김만성金滿姓의 시음 공간으로 지어졌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원운과 사우들의 시가 전한다고 있다. 다만 정자 이름에서 배[舟]자를 사용했다는 것은 극락강의 오가는 배를 상징한 것으로 보여 강가에 위치했을 것이라는 추측만 할 뿐 다른 정보를 알 수 없다.
    2018-05-23 | NO.57
  • 죽계정(竹溪亭)
    무성한 푸른대는 황계(黃鷄)에 비치고맑고 찬기운 세모(歲暮)에 과시함을 점쳐얻었네.벗을 기다리는 뜰가에 가을 빛이 늦고옷깃을 씻은 난간엔 저녁빛이 나직하네.   바람앞에 거문고는 스스로 서리앞의 가지를 사랑하고달아래 거울은 먼저 비갠 언덕에서 보네.오늘에 쫏고 가는 기울의 글귀는모름지기 정자위의 시제를 물어보렴  노강(魯岡) 류시한(柳是漢 1826~?)이 황계(黃鷄) 어느 곳에 죽계정을 짓고 은거하면서 지은 '죽계정원운'이다. 정자가 있었다는 황계(黃鷄)는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동(雲岩洞)에 있는 운암산(雲岩山) 주변을 말한다. 운암산의 지세가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어 풍수지리로 볼 때 황계포란형(黃鷄拘卵形) 명당이라고 했다.이 일대가 1872년 지방지도(地方地圖)에는 황계면이라고 표기되어 있어 극락강변 동림동 운암동 일대로 여겨진다. 류시한은 광주시 광산구 본덕동 출신으로 처사적 삶을 살며 성리학에도 밝아 후학양성에 전력해 100여명의 문인을 배출했다. 문집도 《노강만록(魯岡漫綠)》등 문집만 1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을 따라 배웠다.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은 류시한의 호를 빌어 죽계정(竹溪亭)을 노와(魯窩)라고 하고 그의 시에 차운한 2수(次柳君寔 是漢 魯窩韻 二首)가 노사집에 남아 있다.   珍重紫陽庵  진중한 자양의 암자(紫陽書院)에屛山一晦字  병산(주희 스승)이 회 한 글자 썼네要言不在多  요언은 많은 데 있지 않으니莫負止翁志  지옹의 뜻 저버리지 말길  魯得雖難言  노(魯)라는 어려운 말 얻고서도終踰輕俊字  끝내 경준(輕俊) 글자를 넘었네吾師屋後山  나의 스승 집 뒤가 산이니若抱臨深志  임심(臨深)의 뜻 안은 듯하여라 /박명희 (역)   시에서 임심(臨深)의 뜻은 시경 소민(小旻)에 “전전 긍긍하여 깊은 못에 임하듯 얇은 얼음을 밟듯 한다.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라는 의미다. 
    2020-03-16 | NO.56
  • 죽림정 竹林亭
    광산구 원임곡길 46 (임곡동)   광산구 임곡동 원임곡마을의 죽산박씨 대종가 뒷산에 있다. 죽림 박경의 후손인 박동춘朴東春이 1926년 그의 집 뒷산 죽림골에 죽림정을 세웠다. 여러 해 동안 풍수해 등으로 정자가 무너져 후손들이 1969년에 임곡동 원임곡마을 죽산박씨 종가집 뒷산으로 다시 이건했다. 임곡에서 임곡고가 다리를 올라가지 않고 오른쪽 밑으로 가보면 임곡제일 교회가 나오고 원임곡 노인당을 지나서 철도길 쪽으로 계속 가보면 나지막한 죽산 박씨의 선산이 나온다. 후손 박진관朴鎭觀의 ‘죽림정기竹林亭記’에 따르면 “그의 선조인 죽림竹林 박경朴璟의 가학정駕鶴亭 성성재惺惺齋가 붕괴되어 그의 유적이 없어짐에 따라 이를 애석하게 여긴 종손 박동춘이 별도의 정자를 지어 박경의 호를 따라 그 이름을 죽림이라 하였다”라고 전한다.하지만 옛날의 정자가 아니라 임곡동 원임곡마을로 옮겨 새로 지은 정자이다. 정자는 도리석초, 도리기둥의 육모지붕 단칸 건물로 4면에 나간이 설치되어 용진산의 가학정駕鶴亭과 흡사하고 유래도 같다. 정자 입구에 죽산박씨세장산竹山朴氏世葬山이라는 석비가 세워져 있어 이 정자가 죽산박씨의 소유임을 알리고 있다.박문환의 중건기에는 “임곡이라는 이 고을은 그의 선조인 박경이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그의 만념을 즐긴 장구의 땅이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 정자를 다시 중건하였다”면서 “이 정자의 최초 창건이 지금으로부터 2백년의 성상이 흘렀다”는 기록이 있다.원래의 정자가 퇴락 후 1926년에 재건되어 1969년에 이곳으로 옮긴 것으로 이해된다. 정자 안에 결려있는 현판들은 이미 없어져 옛날 정자의 시문詩文도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정내에는 누구의 글씨인지 알 수 없는 ‘죽림정’이라는 석자와 후손 박문환의 죽림정중건기竹林亭重建記 현판 1개가 걸려있다. 죽림정기(竹林亭記) 옛날 조선(朝鮮) 14대왕 선조(宣祖) 임진왜란 당시 나의 9세조되는 직장(直長)공(公)께서 아무런 관직(官職) 없는 민간인의 신분으로 분연(奮然)히 일어나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피난길에 오른 임금의 뒤를 따라 병사(兵士)를 모집하고 군량(軍糧)을 수합하는 등의 다각적인 노력으로 당시의 위란(危亂)을 평정하는 큰 공을 세웠다. 공의 이러한 공훈을 높이 평가한 조정(朝廷)에서 이에 상응(相應)한 관작(官爵)을 내리기 위해 세 번 의 부름이 있었음에도 나아가지 않고 “한가한 곳을 찾아 조용한 야인(野人)으로 살고 싶다”는 그의 본뜻을 상소로 올려 본래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공의 이러한 뜻을 가상히 여긴 선조가 특별히 궤장 및 죽림(竹林)처사(處士)의 호를 하사하여 그의 참된 충의(忠義)를 표양하였다. 조정으로부터 이러한 우대(優待)를 받게 된 공이 광산(光山)의 임곡(林谷)으로 그의 몸을 숨기게 된 것은 이곳의 운림(雲林)수석(水石)등 자연경관이 매우 빼어나 그의 취향에 맞았기 때문이다. 학문을 위주로 한 성성재(惺惺齋)와 유락(遊樂)을 위주로 한 가학정(駕鶴亭) 등의 건물을 이곳에 지어 그의 아우인 단구자(丹邱子) 상상공(上庠公) 박종(朴琮)과 함께 이곳에 노닐면서 그 뜻을 높이 숭상하였다.산수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넓고 한가한 공간을 즐겨하며 성조(聖朝)에서 베풀어준 권애(眷愛)에 높은 은혜에 보답하려는 굳은 의지를 간직하였다. 어찌 이를 아름다운 성사(盛事)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점을 생각하여 볼 때 “동강(桐江)에서 한가히 드리운 엄자릉(嚴子陵)의 한오리실 낚시가 그의 가치로 보아 주(周)나라의 구정(九鼎)보다 오히려 중하다”는 이 말이 어찌 엄선생(嚴先生) 한 사람만을 가리켜 이름이라 할 수 있겠는가? 오랜 세대가 지남에 따라 정자가 없어지고 대신 빈 터만 남게 되었다. 방공(龐公)의 높은 풍류를 찾을 곳이 없고 오직 이 정자의 빈터가 있는 녹문(鹿門)의 푸른 산만이 흘연(屹然)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가 우금(于今) 2백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죽림정을 다시 세워  박문환이 쓴 기문에는 이곳에서 멀리 산중턱에 자리한 가학정의 정자주인의 사연이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일본 왜적들이 우리나라를 침략한 임진왜란 당시 아무런 관직 없는 민간인의 신분으로 의병(義兵)을 일으켜 피난길의 임금을 호종(扈從)하였다. 이리하여 평난(平亂)의 뛰어난 공적을 세웠음에도 벼슬에 나아감을 꺼려하여 임금의 부름을 사양하였다. 이로 인하여 임금으로부터 궤장 및 죽림처사의 호를 특사(特賜) 받아 나라의 은총을 입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 월강(越江)의 용진(聳珍)산 동쪽에 성성재(惺惺齋) 가학정(駕鶴亭)을 지어 이곳에 노닐면서 그 평생을 마치었다.
    2020-03-16 | NO.55
  • 죽와 竹窩
    광산구 풍영정길 21 (신창동)   풍영정의 주인 칠계 김언거金彦据 (1503~1584)의 5세손 죽와竹窩 김정혁金廷赫(1611~ ?)은 풍영정을 관리하면서 일대에 ‘죽와竹窩’도 관리했다. 《십성당집(十省堂集)》을 남긴 엄흔嚴昕(1508~1543)의 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죽와는 김언거 생전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밖에 죽와에서 시를 남긴 사람은 이순신 장군의 형인 이요신李堯臣(1543?~?), 송기태宋基泰(1629~1711), 조전소趙全素, 임협林悏, 이유한李維漢 등이 있었다. 
    2020-03-16 | NO.54
  • 죽취정 竹翠亭
    북구 생룡동 (생룡마을)   광주패밀리랜드 건너 생룡마을 뒷산인 죽취산 기슭에 금성범씨 모정 범형식范瀅植(1872~ ?)의 죽취정이 있었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30리에 있다. 죽취정은 그의 선묘가 있는 근처에 1895년 추모의 정자 성격을 띠었다. 그의 아들 범희채范熙埰가 중수하였다.주인 범형식은 한말 유학자로 송사 기우만에게 사사했으며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이 뛰어난 학자였다. 심석 송병순의 제액 및 후석 오준선, 석음 박노술, 춘담 기동준의 기문을 비롯하여 일신 정의림의 상량문 등이 있다. 송사 기우만의 죽취정기와 시, 난와 오계수, 녹실 정해만의 시가 전하고 있다. 지재(止霽) 송철헌宋哲憲(1870~1925)이 지은 죽취정에 대한 명문에서 “범군 형식이 광주의 죽취산 아래에 있는 선영을 추모하여 그 옆에 조그마한 띠집을 지었다”라고 전하며 시를 읊었다.또 초입에는 죽천범선생순의실묘비竹川范先生殉義室墓碑, 생룡동 성지 등이 있다. 성지는 마을 뒤에서 죽취봉 쪽으로 가파른 구릉을 따라가면 금성범씨 범여환의 묘와 견훤대라 부르는 돌무더기 꼭대기까지 약 2.5㎞에 걸쳐 토축과 일부 열을 지은 돌들이 폭 2~3m로 길게 뻗쳐 성터의 흔적이 드러나 있다. 정자주인 범형식이 읊은 죽취정 원운에 정자를 지은 사연이 남아 있다. 죽취봉의 언덕 위에 이 띠집을 일으키니빼어난 맑은 빛이 그지없이 푸르도다불어오는 바람소리 책상 위에 가득하고 서늘한 나무그늘 섬돌 가에 넘쳤도다오늘날의 헛된 영화 무엇 하러 바랄손가지난날의 모진 변란 여러 차례 겪었도다 상시우도傷時雨道 이런 일로 마음이 간절하여여러 친우 불러들여 서로 함께 취했도다범형식의 또 다른 시가 있다.십년간의 노력으로 이 띠집을 일으키니죽취산(竹翠山)의 봉우리에 푸른 빛이 서렸도다. 봄이 깊은 이동(梨洞)마을 꽃 향기가 가득하고달빛 어린 지담(芝潭) 못에 뜰 그림자 비쳤도다. 평생동안 힘을 다해 선조 무덤 지키었고남은 시간 이용하여  글 읽었도다. 우도상시 이 마음이 한이 없이 간절하여친우들과 술 마시며 취중에서 깨었도다. 
    2020-03-16 | NO.53
  • 죽파재 竹坡齋
    북구 청풍동 (신촌마을)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동쪽 10리에 있다. 청풍마을에 있는 건물로 남평문씨의 여러 종친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학문을 강학했던 장소이다. 균산筠山 문용현文龍鉉(1837~1886)은 노사 기정진의 제자로 죽파재에서 많은 후학을 배출했다. 기정진의 기문과 위당 신헌의 제액이 있다. 문용현의 제영과 신헌, 기우만의 차운도 있다.균산정의 건립자인 문인환의 6대조 문성제가 ‘수헌水軒’이라는 정자를 지었는데 이것이 퇴락하여 이를 서쪽으로 옮겨짓고 이름을 죽파재라 하였다. 죽파재는 괴양정, 균산정, 서석단과 이웃하여 있었다. 현재 죽파재의 건물은 없고 가정집 안에 현판만 보관되어 있다.문용현은 제영에서 이렇게 읊은다.조그마한 이 다락이 산수 속에 자리하니아름다운 맑은 경치 이 가운데 넘쳤도다짝을 지은 여러 어조魚鳥 봄을 맞아 모여들고 보기 드문 많은 금서 옛날 집에 쌓였도다주인처럼 맑은 달빛 창문 위에 가득하고손님 같은 하얀 구름 처마 가에 떠있도다푸른 녹죽 맑은 집에 서로 함께 모여 앉아시 읊으고 술 마시며 그지없이 놀았으면한편 균산 문용현(筠山 文龍鉉)의 유지를 받아 그의 아들  해사 문인환(海史 文仁煥·1863~1930) 선생이 1921년에 균산정을 건립했다. 정자의 옛터는 균산의 5대조 성제공惺齋公 문필상文弼尙(1671~1735)이 수헌(水軒)이라는 별당을 지어 학문을 연마하면서 많은 후학들을 가르쳤던 곳인지라 더욱 그 역사성이 깊다. 훗날 해사는 초막을 지어 아버지의 학문을 이으려 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균산이 작고한 지 36년 만에 비로소 이 터에 정자를 세우고 선친 균산의 호를 따라 ‘균산정’이라 이름하였다.
    2020-03-16 | NO.52
  • 죽파정 竹坡亭
    남구 양과동 (지산마을) 근대 한학자 남구 양과동 지산마을의 죽파(竹坡) 최기룡(崔基龍, 1843~1913)이 지냈던 정자다. 자는 찬서(贊瑞).  본관은 경주(慶州). 최유환(崔有煥)의 아들로 광주 지산리(芝山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선천적으로 성실하고 친절하며 인정이 두텁고 의지와 취향이 훌륭하였다.부모가 모두 돌아가신 뒤 선대의 기업基業을 이루기 위해 멀리 면암 최익현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송사 기우만과 학문을 교류하였다. 그 후 최익현이 광주에 내려와 그의 효행과 학문에 대해서 세상이 변하여도 변치 않을 것이다고 하였다. 1902년 세상의 변함이 예측 불가능함을 보고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백운산에 들어가 후손을 가르치고 시詩 사詞로 서로 주고받으며 방황의 세월을 보냈다. 1906년 최익현이 순창에서 의병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분연히 일어나기도 했다. 형제자질兄弟子姪에게 말하기를 글을 배운 유생으로 스승을 따라 죽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 하고 순창으로 가는 도중에 최익현이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머금고 돌아왔다.
    2020-03-16 | NO.51
  • 중사정(衆斯亭)- 취사당
    담양군 대전면 평장동일부 기록에 따르면 중사정(衆斯亭)은 김윤현(金胤鉉), 김오현(金五鉉)이 1925년 경 지은 정자라고 했다. 이곳은 평장사(平章事) 근처에 있는 광산 김씨 종회소였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고 했다. 김영수, 김영녹, 김수현, 김덕수 등의 기문과 시문이 1925년에 편찬한 《광주읍지》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그러나 실제 《광주읍지》를 확인해보니 취사당(聚斯堂)의 잘못된 기록이다. '취사당'을 참조바란다.
    2020-03-16 | NO.50
  • 증심사 취백루 翠栢樓
    동구 증심사길 177 (운림동)   증심사 취백루는 일종의 범종을 설치해 놓은 건물이었다. 범종을 설치한 건물은 흔히 단층일 때는 범종각이라 하고 2층 누각의 형태를 하고 있을 때는 범종루라고 한다. 증심사의 범종루는 특별히 시적 운치가 있는 취백루라 했다.취백루는 정유재란 당시 증심사 건물이 모두 불타버린 뒤, 1609년에 중창을 하면서 다시 세운 정문 누각인데, 6.25한국전쟁 때 다시 한 번 불타버렸다. <무등산>의 저자 박선홍은 불타기 전의 취백루 아래층에는 사천왕이 모셔져 있었고, 취백루 정문은 대웅전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사찰 경내로 들어갈 수 있도록 세워져 있었으며, 마루가 깔린 2층 한쪽에는 법고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1999년에 복원된 취백루는 앞면 5칸에 옆면 3칸 규모의 누각으로 1층은 종무소와 교육공간으로, 2층은 자향다실慈香茶室이라는 이름으로 찻집 겸 다용도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판은 학정鶴亭 이돈흥李敦興의 작품이다.원래 취백루라는 아름다운 종루의 이름은 고경명의 문집 <제봉집>의 ‘유서석록遊瑞石錄’에서 “마침내 취백루에 올라, 난간에 기대어 잠깐 쉬면서 생각하니 이 누대의 이름은 ‘뜰앞 잣나무가 푸르다[栢樹庭前翠]라는 글귀에서 따온 듯 싶다. 벽 위에 권흥權興 등의 시 현판이 걸려있다. 대체로 1368~1398년에 쓴 것으로 김극기의 현판만 빠졌으니 후세 사람으로서 유감이 아닐 수 없다”는 구절이 나온다. 백수정전취栢樹庭前翠는 취백홍도翠栢紅桃가 얽혀서 피어있는 아름다운 정경을 묘사한 고려 명종 때의 노봉 김극기의 시구에서 취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2020-03-16 | NO.49
  • 지남정사
    광주 지남정사(芝南精舍)는 조선 후기의 학자 이지호(李贄鎬, 1836~1892)가 지어 학문을 탐구하고 연구하며 지냈던 곳이다. 이지호는  광주 이씨, 자는 동현(東賢), 호는 지남(芝南)으로 광산(光山)에서 태어났다.중국을 존중하고 서양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존왕양이론(尊王攘夷論)의 최익현(崔益鉉), 이항로(李恒老), 김평묵(金平默), 기정진(奇正鎭), 이강년(李康秊) 등과 함께 대표적인 인물이다.그의 문집인 『지남집(芝南集)』은 10권에 부록1권을 합한 총 11권 2책으로 되어 있으며, 1909년에 아들 이승우(李承愚)가 간행하였다. 그는 지남정사(芝南精舍)를 비롯해 장성 완재정(題完在亭), 균헌서숙(題筠軒書塾 鄭在翰), 균심재(贈鄭君心齋 在益), 봉남재(題鳳南齋 洪埰周), 대은정사(題臺隱精舍 鄭在勳), 율리재(題栗里齋 金在錫),  눌와(寄尹訥窩 滋鉉), 화순 천일대(登天日臺),  호계정사(題虎溪精舍 朴漢珪), 영매정(詠梅亭蘇持平 輝冕), 삼괴정(諸李進士三槐亭 宜中), 삼지재(謹次三芝齋原韻), 탄벽정(登嘆碧亭), 화순 봉서루(與諸益登鳳捿樓), 석오당(次石梧堂原韻 吳壽玹), 경독재(題耕讀齋 鄭在洪), 광주 이씨 부조묘(淸心堂先生不祧廟遺址記), 괘고정(掛鼓亭記), 경연대(慶延臺遺址記), 계정(溪亭遺址記), 신묵재(愼黙齋記), 나주 지석정(砥石亭遺址記), 남강정(南崗亭遺址記), 동애정(同愛亭記), 만회재(晩悔齋記), 만오재(晩悟齋記) 등에서 시문을 남겼다.
    2020-03-17 | NO.48
  • 지어재(志於齋)
    광산구 삼도동 도림마을 지어재(志於齋)는 조선 영조때 광산에 살던 동강처사 오대하吳大夏(1677∼1743)가 강학터로 지어 지냈던 곳이다. 지어(志於)는 논어 술이(述而)편에 “도에 뜻을 두고, 덕을 굳게 지키며, 인에 의지하고, 예의 세계에서 노닐어야 한다. 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游於藝”는 공자 말의 의미를 담고 있다.나주목읍지(羅州牧邑誌)에 '在官門北三十里三加面吳大夏 詩 天將一理賦斯人'라고 전하고 있다. 삼가면(三加面), 도림면(道林面)은 삼도면 일원으로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삼도동에 해당한다.원래 지어재는 이 마을에 살았던 동강처사 오대하(1677-1743, 오이익의 손자)가 건립했다. 주민들은 이곳을 보통 강당이라고 부른다. 여러 문인들이 모여 한학을 공부한 곳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도림강당이라고도 불렸다. 고종 11년 오이익의 문집인 석문집(石門集)을 간행한 일이 있는데 이 문집의 간행처가 도림강당으로 돼 있어 이렇게 불렸다. 이후 노인들의 휴식처로 쓰이다 인근에 노인당이 들어서면서 사용처를 놓고 고심중이다.오대하는 나주오씨(羅州吳氏)로  자는 관보(觀甫), 호는 동강(東岡),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1677년(숙종 3) 나주 도림리(道林里)의 집에서 붕석(朋錫)의 3남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8세 때 부친을 여의고 숙부를 아버지처럼 받들어 섬겼다.일찍이 우암 송시열 문도인 그의 훈도 아래 날로 학문에 전념하여 16∼17세에 이르러서는 글에 막힘이 없었다. 1698년(숙종 24) 숙부의 아들 오대준吳大濬과 함께 농암農岩 김창협金昌協(1651∼1708) 선생을 찾아 수학하였는데 농암은 그의 자질을 높이 여겨 늘 글을 보내 문의文意를 토론케 하고 면학에 힘쓰도록 하였다. 1700년(숙종 26) 모친상을 당하고 그 후에도 학문을 폐하지 않고 학업에 뜻을 두었으나 때를 얻지 못하고 고향에 머물며 학문을 궁구하였다. 그러다가 1721년 이미 선거한 농암선생의 형인 김창집金昌集이 이이명李頤命 등과 함께 왕제 연기군延祁君을 받들어 세제弟)로 삼았으나 류봉휘柳鳳輝 등 소론파의 반대로 그 해 12월 거제에 유배되었다가 그 다음해 5월 사사賜死된 세화世禍가 발생하자 문을 걸어 잠그고 벼슬을 포기하고  동강東江이라 하고 시주詩酒로 세월을 보냈다.그는 윤선尹善의 도강정(途中望見尹善道江亭想與君山會遊比亭捉魚作羹今其事跡歷歷如昨日而君山已作泉下人不勝悵然傷心馬上聊成小吟), 정읍 유상대( 與仲深同行至泰仁古縣內崔孤雲流觴曲水臺相酬唱), 화순 적벽(遊於福川赤壁賦絶句聞而次之) 등에서 시를 남겼다그의 후손으로 1905년 을사늑약을 당하여 오적을 처단하자고 주창하고 의병에 참여하고 일제강점기 망국한 백성으로 분수 밖의 은사금을 거절한 지식인  오계수吳繼洙(1843∼1939)와 근대전환기에 광주 광산지역을 중심으로 성리학자로 활동하였던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善(1851∼1931) 등이 지어재에 들려 시(志於齋與梁汝慶(相賀)唱和, 志於齋與李享仲(鍾宅)小話)를 남겼다.그들과 근친했던 구한말 항일의사요 의적이라고 불렀던 조선 말기의 의병장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1846~1916)이 들려 송사집 권1에 시(後石吳德行 駿善 以其叔祖東岡公志於齋原韻寄示 因命追和)를 남겼다.吾道分明不遠人 遠人爲道道非眞 霽月光風離俗累 開花敷葉見天仁孔壁藏書時習習 湯盤有水日新新 顧名百世指南在 信及何難志處臻1958년 오대하의 6대손 오구선吳龜善과 7대손 오철수吳喆洙 등에 의해 편집·간행한 《동강유고東岡遺稿》2권2책이 있다. 권두에 송재성宋在晟의 서문, 권말에 오철수의 발문이 있다.主人吳大夏詩天將一理賦斯人 隨處道存箇箇眞 着意看來方識妙 及躬行去何成仁 磨礱不輟時時習 講討惟救日日新 居此堂能勉此義 終期尋向聖門臻又聖訓分明啓後人 布於方策語皆眞 一開卷使知道大 着心詩易體天仁讀必精深功漸熟 悅如芻豢味方新 此道政爲講劘設 冀有良朋自遠臻又人若欲爲君子人 要先養得性情眞 天君泰後無形役 物慾消來有是仁理拆絲毫明始盡 身遵規矩德方新 勉君弩力事斯語 希聖希賢自有臻/호남읍지
    2020-05-08 | NO.47
  • 창산재 蒼山齋
    광산구 진곡동 산15번지 창산재는 만회재(晩晦齋) 창암(蒼庵) 박휘진(朴徽鎭, 1705~1790)이 마을 앞 창산蒼山(팔랑산) 아래에 초당을 짓고 지냈던 공간이다. 그의 본관은 순천, 자는 백회(伯晦)다.  광산구 진곡동에서 송시열의 제자였던 손재(遜齋) 박광일(朴光一)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1740년 증광시에 합격하고 성균관 생원으로 등재 후 정조 때 절충장군검지중추부사 벼슬을 마지막으로 낙향했다.팔랑산은 여덟팔자 임금왕자 팔왕산(八王山)이 아니라 푸르다 해서 파랑산이 되었다. 팔왕산 옆으로 왕삼봉이라는 산이 있는데 이 산은 바위가 푸르다 해서 푸를 창자 바위 암자 창암이라 불렀고,  왕삼봉 아래의 마을을 창암이라고 했고, 행정구역상 고룡동 왕삼봉 아래 벽파정의 서북편에 있는 마을을 창암이라고 부르는 마을이 있으며, 근방에서는 왕삼봉에 있는 청암을 파라매라 부른다. 학문과 강론에 출중해 영조로 부터 “과연 나의 스승의 자손이라”고 하며 어제어필御製御筆를 하사하며 그를 총애했다. 그가 창산재蒼山齋을 짓고 읊은 시에서 초당임을 알리고 있다.   만년에 속세를 떠나 살기 위해 초당 서너간 지어놓고 보니맑고 한가한 한 평생 재주 없는 것이 부끄럽구나.산 위에 하얀 저 달은 천지개벽에 생겨나마을을 조석(朝夕)으로 비추고 있네.숲속에 귀여운 새들은 모두가 나의 벗이요찾아오는 손님 없으니 길에는 푸른 이끼 끼었고책상 위에 고서(古書) 읽어 보며 즐기려는데행여 북쪽 아이들 시기(猜忌)할까 두렵네.
    2020-03-16 | NO.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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