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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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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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칠송정1 七松亭
    16세기에 지어졌다는 광산구 지평동(芝平洞) 중방(仲方)마을의 칠송정. 조선 중종 때 성균관 진사였던 나주 오씨 칠송(七松) 오인(吳認 1507~?)의 정자였다고 전한다. 그는 27세 때 진과로 등과했으나 덕을 숨기며 벼슬로 나아가지 않은 은덕불사(隱德不仕)로 지식을 쌓는 데 일생을 바쳤다.오인(吳認)은 1964년에 광주향교에서 발행한 《광주지》(光州誌)에 “在三道面 伏龍山下하니 處士吳認藏修所라”고 하서 김인후가 말하고 있어 고봉 기대승과 가장 아끼고 존경하는 벗의 외우(畏友)관계로 그의 학덕이 생각보다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는 나주 오씨를 명문의 반열로 올려놓은 오자치(吳自治)의 손자로 오자치는 세훈 세익이란 두 아들을 두었다. 세훈은 부평도호부사에 이어 의정부 좌찬겅 나원군으로 봉군되었고 세익은 상호군을 지냈으며 청백리로 명성이 높았다. 그 세훈의 아들 오겸(吳謙. 1496 ∼1582), 오인(吳認 1507~?), 오원(吳원 1507~1596)이다. 그의 형 오겸은 담양부사·광주목사를 거쳐 호조참판·병조참판·대사헌을 역임하였으며 1559년에 예조판서가 되고 뒤에 이조·병조·호조의 판서를 거쳐 지경연사가 되었으며, 1564년에 좌찬성에 오르고 왕으로부터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지춘추관사가 되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우의정에 이르렀다. 오인은 아들 아홉을 두었는데 큰아들 언린(彦麟)은 증 공조참판 벼슬에 이르렀고, 넷째아들 언표(彦彪)의 아들이 한림학사로 담양 명옥헌(鳴玉軒) 주인 오희도(吳希道, 1583∼1623)다. 그는 나주 오씨 칠송공파(七松公派) 파조로 자손들은 광주시 광산구 평동, 오운동, 유덕동, 목포 등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칠송정에 관련해서는 그가 지은 원운만 전하고 있다. 落魄身多病 넋 나간 이 내 몸이 병치레까지 하게 되어幽居溪上村 시내 흐르는 한 마을에 고요하게 살았다네.山明仍積雪 산이 푸르게 밝은 것은 많은 눈 때문이니爲客夜開門 행여 손님 맞으려고 문을 열어 놓았다네   이 시 내용을 보면 오인의 정자는 복룡산 아래 시내가 흐르는 깊은 산중 마을에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일대는 나주오씨(羅州吳氏)의 집성촌이 많으며 고려시대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오언(吳偃)을 일세조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으며 5세손 오자치(吳自治)가 조선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을 세운 후 나성군(羅城君)에 봉해져 그 후손들이 나주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지평동에는 나주 오씨 오자치가 자기 애마를 기념하기 위해 자연석을 깨뜨려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는 ‘오자치 용마 ’용마암(龍馬巖)이 있다.
    2020-03-16 | NO.30
  • 칠송정2 七松亭
    광산구 광곡길 77 (광산동)   칠송정은 함재(涵齋) 기효증(奇孝曾 (1551~1616)의 작은 정자이다. 아버지 고봉 기대승을 3년간 시묘살이 했던 곳으로 원래는 구들이 놓인 움막집 형태로 그의 만년에 지냈던 정자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50리 떨어진 너브실마을에 있다고 했다. 지금 정자는 원래에 위치에서 중건하면서 옮겨지었다. 광산구 임곡동 소재지에서 장성읍으로 향하다 보면 오른편에 광곡(너브실)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 입구에는 고봉 기대승의 도학사상을 잇기 위한 고봉학술원이 있는데, 그 옆에 칠송정이 있다. 이 마을 안쪽에는 고봉을 배향한 월봉서원이 백우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광산구 지평동에 있는 칠송 오인의 정자와 같은 이름이다. 칠송정은 기효증의 올곧은 정신을 담고 있다. 그는 부친의 뜻을 좇아 벼슬길을 멀리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을 연마하며 평생을 지낸 선비로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대적하였고 의곡義穀 3,000석을 수집하여 의주의 행재소로 수송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이로써 군기사검정軍器寺劍正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이곳에 칠송정을 세워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이 정자의 건립 시기는 문헌상 정확한 기록은 없어서 확실한 연대는 추정할 수 없지만 임진왜란 이후로 짐작된다. 그동안 몇 차례의 중건과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칠송정은 기효증의 의병 활동에 감탄한 선조 임금이 ‘천리길을 멀다 않고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충의가 참으로 가상하다’고 칭송했다는 말을 듣고, 그가 이곳에 일곱 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사계절 푸르름으로 불변하는 소나무의 청고한 절개를 본받고자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의 호 함재涵齋는 ‘넣고 들이며 가라앉히고 쌓아두어라’라는 아버지 기대승의 훈계를 따르기 위해 지은 그의 좌우명이다. 칠송정의 건축적 특징은 외벌대 기단 위에 네모난 주춧돌을 놓고 둥그런 기둥을 세웠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건물 4면에 머름을 설치하고 마루는 귀틀에 의한 우물마루로 되어 있다. 천정은 우물천정이며 처마는 평고대를 서까래위에 받친 겹처마이며 기와지붕의 곡선이 후림으로 전형적인 한옥건물이다.정자에는 석촌 윤용구가 행서로 쓴 현판을 비롯하여 기동준의 ‘칠송정중건기’, ‘호산승처필명정湖山勝處必名亭’ 등이 당시 모습을 보여준다.   湖山勝地必名亭 산 경치 좋은 곳에 정자 세우니縹緲溪岺繞翠屛 아득한 넓은 산고 물이 푸른 병풍 둘렀네地闢園林全淑景 땅이 열려 동산의 숲이 맑고 아름다워서天敎泉石守仙靈 자연이 생긴 산수의 경치 신선의 영기 지켰네奇觀可樂兼仁知 뛰어난 경관 즐길만 하고 인지의 덕을 겸하였고逸興猶宜任醉醒 깊어지는 흥취로 취하고 깨기를 마음대로 하네喬木特爲人愛情 하늘 높이 솟은 나무 사람이 유독 사랑하니前修遺蹟尙丁寗 예전에 닦은 유적이 아직도 씩씩하네.
    2020-03-16 | NO.29
  • 침석대 枕石坮
    동구 운림동   동구 학운동에서 무등산으로 오르는 길 중에 동적골 산행길로 접어드는 곳에 족욕足浴 체험하는 길을 따라 가면 끝지점 계곡 가운데 '침석대枕石坮'라는 각서가 써진 바위가 있다.글씨 아래에는 침류수석枕流漱石 손재섭孫在燮 김한규金瀚奎 등의 글씨가 암벽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곡성 4대 석곡면장을 지냈던 손재섭과 곡성출신의 지헌芝軒 김한규金瀚奎이다. 그들이 이곳에 들려 남긴 것으로 보인다.대臺의 옛 글자인 坮는 순수한 우리말로는 이런 곳을 너럭바위라고 한다. 산에서 경치를 즐기기엔 좋은 정자라 할 것이이다. 우리나라 지명에는 대臺를 붙여 바위의 생김새를 표현한 곳이 많다. 침석대도 몇 사람이 앉아 계곡물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침류수석枕流漱石은 시냇물을 베개 삼고 돌로 양치질한다는 의미로 은거 생활을 한다는 뜻이다.이곳에 여러 지인들과 풍월을 읊은 참봉 김한규는 구한말에 지인들과 무등산을 오르며 들렸을 것이다. 그는 곡성군 석곡면 능파정凌波亭 아래 대황강大荒江 언덕에 있는 탁사대濯斯坮, 기동리基洞里 앞 매계梅溪 위에 있는 육일대六一坮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는데 자연을 벗 삼기를 즐겨했던 터라 무등산까지 온 것으로 보인다. 
    2020-03-16 | NO.28
  • 탁금재 濯錦齋 관호정2 觀湖亭
    광산구    《광주읍지》(1924)에 주의 서쪽 30리 거리에 있다. 광산구 용곡동 복룡산 기슭에 진사 김순식金舜植이 지은 관호정觀湖亭이 있었던 곳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저절로 무너져 없어지자 그의 후손 김헌기金憲基가 원래의 터에 중건하여 탁금재라고 했다. 송사 기우만의 상량문 및 기문이 있었다.  
    2020-03-16 | NO.27
  • 탁송정 卓松亭
    광산구 월계동   탁송정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정공文貞公 죽정竹亭 탁신卓愼(1367∼1426)이 당시 천곡리에 지었던 정자였다.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북쪽 35리에 있다. 기록에는 주춧돌만이 남아있으며 노송이 있어 탁송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지금은 주택단지로 변모하여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광주 광산구 월계동 535-1 의 무양서원건너편 주택단지로 추측된다.광주의 토박이는 '탁 노 이'[卓 盧 李]라고 하였지만 지금은 탁卓씨가 적은 편이다.     
    2020-03-16 | NO.26
  • 풍암정1 -김덕보
    북구 풍암제길 117 (금곡동)   조선 선조와 인조 때 활동했던 집의 풍암楓巖 김덕보金德普(1571~1621)가 지은 정자이다. 풍암정은 무등산 분청사기 박물관에서 원효계곡 쪽으로 한참을 올라가다 보면 계곡 건너편 기슭에 자리를 잡고 있다. 《광주읍지》(1879, 1924)에 따르면 주의 동쪽 20리에 있다.‘풍암’이라는 이름은 그의 호를 따서 붙였다. 김덕보는 임진왜란 때에 큰형 김덕홍이 고경명의 뒤를 따라 금산싸움에서 죽고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하던 작은형 충장공 김덕령은 억울한 옥사를 당하였다. 김덕보는 이를 슬퍼하여 무등산 원효계곡을 찾아와 학문을 연구하며 평생을 살았다. 후에 의열사에 신주를 모셨다. 400여 년전 송강의 넷째 아들 기암 정홍명의 풍암기楓岩記는 이 지역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아주 은밀한 명승지로 소개됐다. “무등산의 어느 곳이라 할지라도 모든 면에서 이곳을 따를만한 곳이 없다”라고 했고,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기암괴석의 사이마다 100여주의 단풍나무가 끼여 있어 흐르는 시내의 물빛이 붉을 정도로 무성하다”라고 했다. 정자는 도리 주춧돌에 도리 기둥의 앞면 2칸 옆면 2칸 규모의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되어있으며 중앙의 거실 1칸을 제외한 좌우양간이 판자마루이다. 기묘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 기암괴석과 수십 그루의 노송, 그리고 각종 야생화가 사방으로 둘러있으며, 원효계곡의 맑은 시내가 앞으로 흐르고 있어 천하일품의 뛰어난 경관을 이루고 있다. 광주시 문화재 자료 제15호이다. 정자 안쪽에 ‘풍암정사楓岩精舍’라는 행서로 쓴 현판과 정자 앞 커다란 바위에도 ‘풍암楓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정내에는 우산 안방준, 석천 임억령, 제봉 고경명, 기암 정홍명 등의 판각시문이 걸려있어 당시의 경관을 엿볼 수 있다. 
    2020-03-16 | NO.25
  • 풍암정2 -금당산
    서구 풍암신흥로50번길 48 (풍암동)해발 302m의 금당산金堂山은 남구 효덕동 관할 진월동과 서구 풍암동 경계에 있는 산이다. 금당산 서쪽 끝 서구 풍암동에 해당하는 곳에는 금당산의 주 물길이 흘렀다. 금당산 오르는 초입에 풍암저수지를 바라보는 곳에 풍암정楓巖亭이 자리하고 있다. 정자 아래에 약수터가 있어 이곳에서도 물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자는 최근에 지어졌지만 오래전에도 지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금당산신사金堂山神祠가 현 남쪽 10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금당金堂은 불교에서 본존불을 모신 집을 말한다. 산 바로 동남쪽 밑으로 광주에서 남평가는 길이 있었고, 옥천사玉泉寺가 위치한다. 금당산은 옥녀봉과 함께 풍수지리설에서 여성을 지칭하며, 음기가 드세다고 전한다. 옥천사는 이런 음기를 누르기 위해 지었다는 얘기가 있다.기대승, 고경명, 박순, 이이, 노사신, 박순 등과 교유했고, 임진왜란 당시 고경명, 김천일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군대의 장비와 양식을 조달하는 의병으로 활동했던 회재 박광옥의 호를 딴 도로명인 회재로懷齋路가 풍암정 앞으로 이어지고 있고 서구 송풍로 42(풍암동)에는 그를 배향한 벽진서원(옛 운리사雲裏祠)이 있다. 풍암동 운리마을은 마을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여 마치 구름 속에 있는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박광옥의 선인인 음성박씨가 처음 들어와 터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이 지역은 1991년 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되어 개발되어 1999년 대규모 아파트 밀집지역이 준공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2018-05-23 | NO.24
  • 풍영정 風詠亭
    광산구 풍영정길 21(신창동)   풍영정은 조선시대 승문원판교를 지낸 칠계 김언거(金彦据, 1503∼1584)가 지은 정자로 광주와 광산 일대에 있는 100여 개의 정각 중 대표적인 것이다.《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서북쪽 20리에 있다. 지금의 광산구 신창동 선창산(仙滄山)과 극락강(極樂江)이 마주치는 강변의 대지 위에 있다. 풍영정은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이며 팔작지붕이다. 극락강 상류에 지은 정자 안쪽에는 이황, 김인후 등이 지은 현판들과 한석봉이 쓴 ‘제일호산第一湖山’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광주시 문화재자료 제4호이다. 김언거는 언제 풍영정을 지었을까? 광산김씨칠계공파 문중의 자료에 의하면 김언거가 승문원 판교 시절인 1558년에 지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송인수와 송순, 그리고 송흠의 시와 퇴계 이황이 1548년에 쓴 ‘김계진 시첩’의 발문을 살펴보건대, 풍영정은 1548년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이황에게 풍영정 차운시를 받은 때가 1545년, 송순의 시는 송인수의 시에서 차운한 때를 1543년으로 밝혀 결국 그 이전에 풍영정이 지어졌을 것이다.극락강과 경전선 철로가 내려다보이는 강변의 언덕 위에 세워진 정자는 지금은 강물과 강폭이 줄어들어 운치가 옛날 같지는 않으나 멀리 광주시가지 너머로 바라보이는 무등산의 위용은 여전히 장관이다. 정자로 오르는 돌계단도 가파르지도 않고 아담한 높이여서 평지를 가듯 편안하게 오를 수 있다. 풍영정에는 현판에 얽힌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명종이 정자에 걸 현판의 글씨를 당시 기인이었던 갈처사에게 받아 걸라고 하였다. 김언거는 기쁜 마음으로 갈처사를 찾아갔으나 여러 번 헛걸음을 하였고 14번이나 찾아간 끝에 만날 수 있었다. 갈처사는 칡넝쿨로 붓을 만들어 글을 써주며 기는 길에 절대로 펴보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궁금함을 참지 못한 김언거는 살짝 첫 장을 펼쳐 보고 말았는데 첫 장을 펼치자마자 ‘風’자가 하늘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놀란 김언거는 돌아가 갈처사에게 다시 써 줄 것을 청했지만 거절당하자 할 수 없이 갈처사의 제자인 황처사에게 ‘風’ 자를 받았다. 그래서 지금도 현판을 자세히 보면 ‘風’자는 나머지 ‘詠亭’보다 자획이 조금 비뚤어져 있다는 것이다.”또다른 이야기도 있다. 김언거는 덕망이 높아 낙향을 하자 그를 아끼던 사람들이 12채나 되는 정각을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풍영정 이외의 11채의 정각들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풍영정만 소실을 면한 데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다른 정자들이 다 타버리고 풍영정이 불길에 휩싸이자 현판 글자 가운데 앞의 풍〉자가 오리로 변하여 극락강 위로 날아올랐다. 기이하게 느낀 왜장이 즉시 불을 끄도록 하자 극락강의 오리가 현판에 날아들어 다시 글씨가 또렷이 되살아났다. 현재 정각에 걸린 현판의 글자를 자세히 살펴보면 풍자와 영정의 글씨체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 이 전설이 생겨난 까닭이 아닌가 여겨진다.정자에는 주인 김언거의 원운 이외에도 퇴계 이황,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석주 권필, 송인수 등을 비롯한 여러 문인들이 시를 남기는 등 현재도 47개에 달하는 현판이 걸려 있어 풍영정이 호남 지방 정자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실감할 수 있다.풍영정의 ‘풍영 風詠’은 <논어> ‘선진’ 편에서 증점이 공자에게 한 말인 “늦봄에 봄옷이 다 만들어지면 어른 대여섯, 동자 예닐곱과 함께 기수 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 舞雩에서 바람을 쐬고는(風乎舞雩) 노래를 부르고 돌아오겠다.(詠而歸)”의 ’바람을 쐬다‘의 풍 風과 ‘노래를 부르다’의 영 詠에서 따온 이름이다.정자에는 ‘풍영정 風詠亭’ 현판이 두 개 있다. 정자 밖에 하나, 안에도 하나 있다. 정자에 올라서 극락강을 바라보니 경치가 너무나 빼어나다.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옛 선비들이 이곳에서 시 한 수 읊었음직하다.여기에는 〈제일호산(第一湖山)〉이라는 편액(扁額)도 걸려 있는데, 이는 명필 한석봉(韓石奉)이 쓴 것이다사람은 자연을 좇고 자연은 인간 세상을 따르니 풍영정 앞으로 흐르는 천의 이름은 풍영정의 이름을 빌어 풍영정천이라 부른다. 풍영이란 뜻은 세상에서 모든 잡념을 버리고 오로지 자연 경관을 벗 삼아 스스로의 심신을 다스리는 하나의 수양을 의미한다. 세상의 온갖 복잡함에서 벗어나 자연의 바람을 맘껏 즐기며 시만 읊겠다는 뜻이 풍영이라는 정자 이름에서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러한 김언거의 속마음이 풍영정 원운에 그대로 나와 있다.   替緩年來未得休 벼슬길에 있으면서 편히 쉬지 못했는데 暫登高閣一刪愁 높은 누정에 올라서니 모든 근심 사라지네 月邊孤影人移棹 노를 젓는 사공 외로운 얼굴 달빛 아래 비추이고 風外寒聲鴈下洲 물을 찾는 기러기떼 바람에 차갑구나 爲是名區開壯麗 이름 있는 이 지역이 한이 없이 화려하니 仍敎行客故淹留 지나가는 길손들이 찾아와서 머무르네 憑看諸老詩篇在 난간위에 기대앉아 여러 시편 바라보니 漆水羅山護萬秋 칠수나산 경관이 천만추를 이어가리 
    2020-03-16 | NO.23
  • 풍천대 風泉臺
    광산구 하남산단9번로 62 (안청동) 하남산단 9번 도로 안청공원 끝 숲길 입구에는 풍천대라는 삼층석대三層石臺가 있다. 처음엔 안청동 계안마을 앞 안산案山 비룡등飛龍嶝 순천박씨 선산에 있었다. 이곳이 하남산단으로 편입되면서 자리를 옮긴 것이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30리 거리에 있다. 석음 박노술(1851~1917)이 정자의 터를 닦았으나 일을 마치지 못했다. 박노술의 묘비가 함께 있었다. 그의 아들 춘파 박일규가 유지를 받들어 1920년에 축성하였다. 이 풍천대는 일명 비룡대라고 한다. 박노술의 항일의적抗日義蹟의 얼이 고스라니 스며있는 삼층석대이다. 이후 도시개발에 따른 하남산단 건설로 인해 철거될 처지가 되자 박태원朴太遠, 박길원朴吉源 등 여러 후손들이 정성을 다하고 광주시의 협찬을 얻어 1993년 하남산단 안청공원 내에 복원했다.원래의 풍천대는 정면은 북향이고 좌측에는 마을의 노인들이 바위신앙처럼 신봉한 바위가 드러나면 동네에 재앙이 뒤따른다고 하여 흙이나 낙엽으로 덮고 있다. 풍천風泉이란 시경詩經의 편명인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을 말한다. 현인이 국가의 쇠망을 걱정하고 나라의 백성이 자기 나라의 어진 임금을 못잊어 사모한다는 뜻이다. 나라의 망국을 슬퍼한 박노술은 북망통곡의 땅을 기억하기 위해 일부러 이 대를 쌓아 그 이름을 풍천이라 했다. 풍천대는 박노술의 유덕을 추모하는 석채釋菜의 제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풍천대는 주변에 사각형의 기단을 쌓고 중앙에 크기가 다른 화강석을 3단으로 올렸다. 맨 상단의 단에는 앞면에 ‘風泉臺’ 뒷면에 ‘小華遺民 朴魯述’ 옆면 왼쪽에 ‘飛龍在天利見大人’ 오른쪽에 ‘舊名飛龍臺’라고 음각으로 글씨를 적었다. 크기는 85cm×85cm×55cm이다. 2단에는 앞면에 ‘都有司 高光善 副有司 李熙容 都監董 李啓琼 副監董 文仁煥 李重權 掌財 鄭海鵬 金永銓’ 왼쪽에는 풍천대의 건립 시기로 보이는 ‘庚申十月日 丁巳九月日 改修’라 되어 있는 화강석이다. 크기는 135cm×135cm×44cm 이다. 3단은 183cm×183cm×45cm의 크기로서 명문은 없으며, 4단부터는 지대석에 해당된다. 이곳에 그의 아들 박일규의 추모시가 있다. 奉承先意始成臺 어버이 뜻 받들어 풍천대를 이룩하니戀國思親軼體哀 내 나라 내 부모생각 모두가 서러울 뿐衷心淨淨秋山屹 정정한 높은 충심 추산처럼 솟아있고義魄炯炯夜月來 형형한 밝은 의혼 달빛따라 찾아오네後淍貞節猶能守 굳세고 곧은 절개 한평생을 한결같고旣倒警波竟末回 지나간 험한 풍파 다시 오지 않았으면感舊論今淚何極 끝없는 눈물 속에 고금사古今社를 생각하며西風倚斗更斟盃 서쪽바람 별빛아래 술잔을 기울이네   軼 질淍 주 氵+周 주琼 경 王京 경
    2020-03-16 | NO.22
  • 하모당 何暮堂
    동구 문화전당로 38 (광산동)   광주의 동헌을 하모당이라 하였다. 1872년 지방지도에는 남쪽의 제일 깊숙한 곳에 위치한 동헌의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회랑에 둘러싸여 있으며, 누각과 삼문 등 총 15채의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광주읍지(1879, 1924)에는 하모당이 객사의 동쪽에 있다. 건물의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본 건물을 중심으로 기다랗게 놓인 행랑이 빙 둘러 놓였으며 그 가운데 뜰에는 연못도 있었다고 한다. 삼문으로 이루어진 출입문은 지금의 구도청 쪽으로 나 있었다. 건물면적이 대략 50여 평 남짓했던 하모당은 1911년부터 상품진열소로 사용됐다. 광주·전남지역의 토산품을 전시한다는 목적이었다. 이후 하모당이란 이름은 차츰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지고 같은 자리를 상품진열소라 부르게 되는 관행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때에 원래의 하모당 내부도 상당부분 개조됐다고 한다. 이것으로 부족해 일제는 그 옆에 새로 하얀 벽면의 일본식 목조건물을 지어 상품진열소 신관(新館)이라 했다. 삼문을 들어서면 바로 마주한 것이 바로 이 신관이었다. *삼문 뒤편으로 보이는 흰 건물이 1911년에 신축한 상품진열소 신관이고 그 옆으로 하모당이 있었다. 사진은 하모당 삼문이 경무부와 헌병대 정문으로 사용됐을 때 촬영됐으며 촬영시기는 1910년대 후반으로 추정된다.하모당 근처에는 다른 관아건물들도 연달아 들어섰다. 1699년 하모당에서 열 걸음 정도 떨어져 신축된 소빈헌과 월소루가 그것이다. 아울러 1871년에는 목사 신석유가 광주일고 근처의 공북루와 함께 이곳 하모당을 대대적으로 수리를 했다고도 전해진다. ‘하모’란 중국 한나라 때 염숙도가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자 지방민들이 ‘염숙도여, 어찌하여 이렇게 늦게 부임하셨습니까[廉叔度 來何暮]’라고 했다는 ‘후한서’의 고사에서 따왔다. 이후 하모는 지방관의 선정을 일컫는 말이 됐다. 하모당은 이런 선정에 대한 염원보다는 임진왜란 뒤에 가장 늦게 세워진 건물이란 의미가 더 강했다. 하모당이란 이름은 1610년대 광주목사를 지낸 해봉 홍명원(15732~1623) 시절에 건물의 준공을 기념해 지은 ‘하모당기’를 보면 내력이 나온다. 7년에 걸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은 뒤에 광주 시내는 황폐해졌다. 전란의 영향으로 광주관아 역시 건물이 헐고 비루해져 도저히 관아로 쓸 수가 없어 몇 년 동안 민가를 빌려 써야 할 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을의 면모를 생각해 ‘뒤늦게 지은 집’이란 뜻으로 하모당이라 지었다는 것이다. 하모당은 목사의 집무실인 상방上房이 좌우 각 2칸씩 있었고 여기에 익랑翼廊 1칸, 협방夾房 1칸 등 모두 6칸으로 이루어졌다. 목사의 집무실이자 재판정 구실도 했다. 이 건물의 중요성에 비추어 건물의 위치가 후대의 기록에라도 남아야 할텐데 그 기록을 찾기 어렵다.  이 건물은 1896년 광주가 전라남도의 관찰부(훗날 도청) 소재지가 되면서 관찰부의 부속건물로 사용됐다. 관찰부가 된 그 해 9월 광주에 온 한 지방관의 견문기록에 따르면 하모당은 서석헌瑞石軒이란 이름으로도 불렸고 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宣化堂과는 다른 건물이라고 했다. 광주관아의 중심건물이었던 하모당은 전남관찰부 시절부터는 부속건물로 지위가 낮아진 셈이다. 현재 하모당의 위치는 가늠하기 힘들다. 하모당 자리는 1920년대 중반, 그 옆에 무덕전(武德殿)이란 일본식 건물이 세워지면서 헐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상품진열소도 옛 전남도의사당 자리, 즉 회화나무 뒤편으로 옮겨갔고 삼문도 헐렸다. 하모당 일대에는 1876년에 처음 문향각이란 이름으로 지었다가 이듬해에 불타 없어지는 바람에 거의 새로 짓다시피 한 누각인 신향각, 관찰사의 숙소였던 내아, 전남 도내를 아우르는 경찰본부 격이던 경무청, 관찰사의 비서 업무를 수행하던 집사청과 사령청, 각종 행사에 동원됐던 취타수들의 거처였던 취수청, 그리고 이런 건물들의 정문이었던 삼문 등 수 십 여 채의 건물들이 있었다.
    2020-03-16 | NO.21
  • 하은정 荷隱亭
    북구 하백로29번길 24 (매곡동) 광주민속자료 제3호로 지정된 김용학가옥金容鶴家屋을 구성하는 건물 중 하나이다. 김용학이 아버지 하은 김희수를 위해 지은 건물로 아버지의 호를 따 하은정이라 이름 붙였다. 하백마을에 1933년 건립되었으며, 앞면 5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 기와집 구조이다.주거공간 왼쪽에 연못과 함께 있으며, 높은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마당에서 왼쪽으로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100년 생 벚나무에 둘러싸인 하은정이 나온다. 하은정 뒤쪽으로 연파정蓮坡亭이 있다. 사랑채는 백암이다. 1918년 하은 김희수가 부친 김영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인 연파정과 함께 원림을 이루고 있는 유일한 곳이다.하은정 안에는 방대한 양의 문서가 보관되어 있다. 한말 유학자 현와 고광선을 비롯해 화석 송조헌, 방은 임호응 등의 기문이 있다.    
    2020-03-16 | NO.20
  • 학림정사(鶴林精舍)
    학림정사(鶴林精舍)는 광산구 등임동에 있다. 유학자 금우(錦愚) 임상희(林相熙, 1858~1931)가 후학양성을 하며 민족혼을 일깨운 곳이다. 1902년 한말의 유학자 임상희의 은덕강학(隱德講學)을 목적으로 사용된 처소로 초가였던 것을 중수하여 지금은 제실(祭室)로 사용하고 있다.- 재각 편에 자세한 내용이 있다.
    2020-09-03 | NO.19
  • 학수당 鶴壽堂
    고재현(高在鉉, 1885 ~ 1967)이 '次光州鶴壽堂'이라는 학수당에 차운하는 시문을 <지산유고(志山遺稿)>에 남겼다.
    2020-08-28 | NO.18
  • 학심정사(學心精舍)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동본래 광주군 두방면(斗坊面) 지역으로서 길가에 있는 말머리처럼 생긴 큰바위인 말바우를 한자지명으로 풀어 두암(斗岩)이라 했다.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알려진 두암동은 장원봉에서 달려온 용이 군왕봉(356m)에 이르러 좌우로 뻗쳐 좌청룡 우백호가 되고, 우산동의 소산·무냉이등· 범덕등이 북서쪽 벌판에서 부는 찬기를 막아주는 안산(案山)에 솔샘(松泉)이 수구혈(水口穴)이 되어 옛부터 세 정승이 나온다 하여 삼정골이란 땅이름도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곳에 학심정사(學心精舍)가 있었다. 최석지(崔錫祉)가 "학문에 힘쓰는 데 마음에 게으름이 없었으면 / 시대를 바로잡는 일에는 뜻을 굽히지 않았으면 劬學心無懈 匡時志不移" 하는 바램으로 지었다.그가 이곳에서 학문을 강구하며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다만 1935년에 편찬한 조선환여승람에 전하고 있어 이 이전에 지어졌다는 추측만 갖게 한다.
    2020-03-16 | NO.17
  • 향사당(鄕射堂)
    향사당(鄕射堂)은 광주읍성 내 객사 북쪽에 있었던 향청이다. 광주목지에 ' 鄕射堂在客舍北卽鄕廳肇自文正公金台鉉世修各賢巨卿籍名以鄕座目留藏而行鄕飮鄕射等禮故名之"라고 기술하고 있다.향사당은 조선시대 향촌자치기구로서 이용된 청사이다. 향사당(鄕社堂)·향서당(鄕序堂)·집헌당(執憲堂)·풍헌당(風憲堂)·향헌당(鄕憲堂)·회로당(會老堂) 등으로도 불렸다. 향당(鄕黨)의 나이 많은 어른들이 모여서 향중(鄕中)의 여러 일들을 의논하거나 향사(鄕射)·독법(讀法)을 하며 향안(鄕案)을 보관하고 삼향임(三鄕任 : 좌수·좌별감·우별감)이 상시근무하던 청사이다.처음에는 예악덕행(禮樂德行)을 세우고 향사음례(鄕射飮禮)를 행하는 고려ㆍ조선 시대에, 지방의 수령을 보좌하던 자문 기관인 유향소(留鄕所)로서 기능을 하였으나, 향원들이 서로 편을 갈라 활쏘기 재주를 겨루는 의식을 치뤘다. 향사당은 처음에 관아에서 떨어진 경치 좋은 곳에 일향부로(一鄕父老)의 힘과 관아의 후원으로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후에는 대체로 향부로들의 출자에 의하여 재건되면서 그 위치도 관아 구내로 이전되었다.
    2020-04-28 | NO.16
  • 광주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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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이버광주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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