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28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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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서정 暢叙亭
- 동구 운림동 구한말 만석꾼 일농一聾 최상현崔相鉉(1881~1945)이 일제강점기 때 거처했던 무신재武新齋 남쪽에 육모정으로 지었던 정자이다. 지금의 조선대학교에서 후록에서 증심사 사이 동구 운림동 부근에 지어졌다. 조선호남지(1935)에는 지한면 홍림리 무신재 내에 주사 최상현이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1970년까지 존재했다가 이후 자손에 의해 매각되어 헐렸다. 창서정기暢叙亭記에는 “뜰 앞에 연못을 만들어 연꽃을 심었고 맑은 생수를 이끌어 그 수량을 채웠다. …… 행류송백杏柳松栢 등의 아름다운 나무가 줄을 지어 서있고 맑은 물소리 푸른 산빛의 뛰어난 경관이 주위에 둘러 있다.…… 혹 휘파람을 불어 자신의 마음을 달래기도 하고 혹 시를 읊어 자신의 뜻을 노래하기도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창서暢叙는 자신의 마음을 화창하게 펴 스스로의 정신을 수양한다는 뜻으로 정자 주인이 읊은 원운 시에그 의미가 잘 드러난다. 무신재의 언덕위에 육모 원정圓亭 일으켜서늙은 백수 이 현손이 책을 보며 앉았도다.늙은 노송 깊은 골짝 바람소리 만학하고하얀 연꽃, 높은 가을, 맑은 물이 회정하네풍속 티끌 끊어지니 맑은 시벽詩癖 이뤄지고푸른 산이 상쾌하니 취한 술이 쉬이 깨네매일매일 돌아와서 물 뿌리고 청소하니깊은 처마 달빛 아래 노는 영혼 나타난 듯
- 2020-03-16 | NO.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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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척금당 滌襟堂
- 북구 동문대로 31번길 13 (한국관 부근) 광주에서 북쪽으로 5리 정도 되는 서방 부근에 역참의 찰방이 상주하는 경양역景陽驛이 있다. 경양역 내에 척금당이 있었다. 1895년 역 제도가 폐지되면서 1909년 이 땅은 150여명의 소작인조합이 경작했다. 지금의 북구 우산동 392와 382번지 일대로 농협은행 풍향동지점 건너편에 있는 한국관 부근이다. 광주교대와 동강대학 부근이 역촌이었다. 서방시장 건너편 인도에 경양역터 표지석이 있다. 광주부사를 지냈던 동강東江 신익전申翊全(1605∼1660)이 척금당기滌襟堂記를 썼다. 척금滌襟은 시름을 씻는다는 의미로 금계 노인이 어느 역에서 읊은 시에서 “근래에 먼 길손이 같은 한 품었음에 / 좋은 시 읽어보고 가슴팍을 씻었네 年來遠客同含恨 看到瓊詞一滌襟”라고 했다. 척금당에 대해서는 경양역의 역지인 《경양지景陽志》에 실려 있다. 경양지는 1686년에 경양도찰방 양와養窩 이세구李世龜(1646~1700)가 편찬한 것이다. 경양역지에 실린 각 역의 역마를 보면, 경양역에 20필, 덕기역에 4필, 가림역에 10필, 인물역에 10필, 검부역에 10필, 창신역에 7필, 대부역에 5필 등 총 66필이 배정되어 있었다.기에는 제방(경양호)을 걷는 사람들은 유월에 청량하여 좋다고 한다. 제방 끝에는 절양루가 있었다. 동강 신익전의 외사촌 동생인 이선장(李善長)이 날마다 제방에 새로 지은 별당에 머물면서 한껏 멀리 바라보며 맑고 깨끗한 바람을 쐬니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시원해서 이에 ‘척금滌襟’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알리고 있다.
- 2020-03-16 | NO.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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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돌당 淸湥堂
- 청심당 안용환安龍煥(1857~1911)이 지었다. 송사 기우만(1846~1916)의 문인으로 공부했다. 청심당의 기문은 기우만이 썼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남쪽으로 10리에 있다. 광주읍지에 기우만의 기문과 1921년 2월 20일 안용환(安鏞煥)이 박봉혁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또 기우만이 쓴 청심당기(淸深堂記)는 "光山之鳳谷 安氏世居 新築而顔用淸深 吾友安居士龍煥景雲堂也 居士有肖子圭冕 克承父志....."이라고 적고 있다. 호는 청심당이고 정자명은 청돌당인 데서 비롯하여 잘못 적었을 것으로 보인다.1931년 간행된 기우만의 《송사집松沙集》8권에 안용환의 호상소護喪所에 보낸 편지글[만사]이 남아있다. 봉곡안씨鳳谷安氏, 즉 저불에서 살았던 죽산안씨 송학종중 오치문중을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與鳳谷安氏護喪所 頓首。淸深堂主人。已古人耶。風雨長夜。有志之士。雖不樂生。而如此公蓋有用可恃者。少須臾毋死。共見祚宋之天。年前相握。懇懇以此相告語。豈意棄我而先逝耶。訃書之來。令人失魄。平日相信如此。公而病。不能含蓼。遽隔千古。人事愴涕。寧欲無言。宇萬歲內呻囈。數朔不離衾。躬唁末由。爲我告主哀。卒事無憾。節哀順變。以慰慈念
- 2020-03-16 | NO.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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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량암 누각 淸凉庵 樓閣
- 청량암(淸凉庵) 누각은 광주 광산구 광산동 백우산(해발 343m)에 있는 암자에 있었던 누각이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백우산은 임곡에서 장성 황룡으로 가는 지역에 고봉 기대승선생을 모신 월봉서원이 있는 산이다. 기언관(奇彦觀, 1706~1784)이 고향에 은거하며 이곳에 오르고 읊은 시 '雨中春興 再淸凉庵'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기언관은 고봉 기대승의 6대손으로 형조·호조참의를 역임하다 낙향해 거처였던 귀전암(歸全庵)을 중건했다. 지금도 백우산(白牛山)은 청량이라는 지명이 있다. 그 아래 광산동 428번지에는 1750년에 국천재(菊泉齋)라는 정자를 짓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강론했다.
- 2020-04-13 | NO.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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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송정 淸松亭
- 광산구 본량본촌길 29 (동호동) 광산구 동호동 본촌마을의 논이 끝나는 야산 위에 청송정이 있다. 광산구청에서 영광방향으로 가다가 삼도교를 거쳐 3분 정도 가면 호은정이 있는 본촌마을에 도착한다. 청송정에 가는 길 입구쪽에는 동호사가 있으며 1km 쯤 가다보면 양송천 묘역과 호은정이 있다.청송정은 기둥이나 벽이 모두 시멘트 벽돌로 되어 있는 정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이 마을 청송심씨 만오晩悟 심영구沈永求에 의해 지어진 현대식 건물이나 지붕은 오래된 기와였다. 그 옆에 영효재永孝齋란 재각과 같이 하고 있다.이 정자의 주위에는 아름드리 늙은 괴목이 있고, 그 옆에 이 정자의 주인 심영구의 부인인 월암月庵 진주정씨晉州鄭氏의 행적비가 있다. 그 위에 청암淸庵 심종수沈鍾秀, 송촌松村 심종선 沈鍾善의 효행비가 있다.이 정자의 주인인 심영구는 지역 유림으로 그의 선친인 송촌松村 심종선沈鍾善 형제의 유지를 받드는 추모의 정을 나타내는 효의 정자다. 1965년 3월에 건립된 건물로 보존 상태는 좋은 편이나 현판 및 시문詩文 등의 각판刻版이 없다. 심종수가 지었다는 청송정원운이 있다. 거꾸러진 뜬 인생이 무슨 이름 있을손가?좋은 계산(溪山) 점득(占得)하여 한 마을이 맑았도다.골목길이 너무 깊어 사람소리 안들리고골짝 어기 고요하니 새소리만 요란하네.두어칸의 작은 띠집 봄바람이 온화하고조그마한 모진 못에 맑은 달빛 밝았도다.어지러운 속세 일을 무엇하러 물을손가?만종 같이 많은 녹봉 깃털처럼 가볍도다.
- 2020-03-16 | NO.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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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심당 淸心堂
-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서남쪽 30리에 있는 데 집의 청심당 이조원(李調元, 1433~1510)이 건립했다. 현재의 광주시 남구 구만산길 34, 광산이씨 상서공파의 여재각 옆에 있었다고 한다. 필문 이선제의 셋째아들이다. 아버지의 시묘를 마친 후 그 옆에 다시 이 당을 지어 그의 생활공간으로 활용한 건물이다. 청심당이 이처럼 유명하게 된 이유는 그의 규모가 웅장하여 세인의 이목을 놀랍게 해서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공명을 마다하고 오직 학문 연구와 자연관상에 몰두한 이조원의 독특한 행적이 있기 때문이다. 평소 은일자정의 산림처사로 자처한 그가 비록 성종조의 간곡한 소명에 의해 집의, 어사 등의 관직에 취임한 사실이 있었으나 얼마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그의 종적을 숨기었다. 이에 제봉 고경명은 청심당 옛터를 지나며 당시의 일을 회상하며[過淸心堂遺墟懷古]라는 시로 그를 기리기도 했다.필문 이선제의 손자인 이달선은 청심당기淸心堂記에서 “당의 이름을 청심이라 한 것은 이 ‘당’이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원래 맑은 마음을 가진 맑은 사람이 이 집을 지었기 때문에 이 집이 따라서 맑게 된 것이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맑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지은 집이기 때문에 그의 명칭을 ‘청심’이라 하였고 이 집의 당호일 뿐만아니라 이조원의 아호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의식있는 재야인사들이 들려 청심당 운을 따라[題淸心堂次韻] 시를 남기며 그의 행적을 따랐다. 영사정 최형한(1460?∼1504)은 이렇게 읊었다.堂號淸心誰作主 집 이름은 청심인데 그 주인은 누구인고主人淸槪似氷槃 이 집 주인 곧은 기개 빙반처럼 맑았도다紅塵不到醉鄕闊 붉은 홍진 아니오니 술기운이 광활하고白氣自生虛室寒 참 기운이 돋아나니 빈 방이 시원하네天上月來邀李白 하늘 위에 달이 뜨니 이백을 맞이하고庭前雪壓臥袁安 빈 달 위에 눈 쌓이니 원안 遠安처럼 누웠도다霜臺憶得少年事 어사하던 소시때를 어렴풋이 생각하며時向囊中拂豸冠 주머니 속의 마패 치관 때때로 만져보네 청심당이선생유허비淸心堂李先生遺墟碑가 1957년 남구 원산동 대촌사거리와 포충사 사이 도로변에 세워졌다. 서흥 고당 김규태(1902~1966)가 비문을 지었다.
- 2018-10-21 | NO.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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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우당
- 주의 서쪽 10리청우당淸友堂은 『광주읍지』(1924)에 주의 서쪽 10리 거리에 송병효宋炳孝가 건립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송병효는 이에 대한 많은 문적을 남겼고 월성月城 최영조崔永祚(1859~1927)의 기문과 김문제金文濟의 제액이 있다고 했다.
- 2018-05-23 | NO.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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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원정 淸遠亭
- 광산구 풍영정길 21 (신창동) 청원정은 광산구 신창동은 옛 광주 마지면馬池面 선창리仙滄里 선창산과 칠천漆川 강변에 있었다. 옥과 훈도를 지낸 김언거의 중형인 청원정 김언우(金彦瑀)의 정자이다. 인근에 칠계 김언거(金彦据, 1503~1584)의 풍영정이 자리하고 있다. 정자가 자리했던 극락강을 칠천(漆川)이라 했던 것은 장자(莊子)가 칠원 땅의 관리 노릇을 한 적이 있으므로 그를 칠원리(漆園吏)라고도 부른것에서 유래한다. 1546년에 처가인 지금의 담양군 창평면의 용산聲山으로 이사하면서 아우인 김언거에게 주고 간 정자다. 청원은 염계濂溪의 ‘향기가 멀수록 더욱 맑다[香遠益淸]’라는 말을 취하여 이름을 지었다. 주변의 대나무는 절개에서, 소나무는 지조에서, 그리고 매화는 향기와 빛깔에서 빼어나다며 원림을 이루고 유유자적했다.김언거의 《칠계유집漆溪遺集》에는 청원정을 소재로 한 이황의 답시[寄題淸遠亭] 등 시가 몇 수 더 실려 있다. 聞道幽居作小塘。花中君子發天香。可憐植物淸如許。曾對高人映霽光光霽高懷百世風。淸通嘉植一塘中。洗心洗眼來看處。宛見當時無極翁<退溪先生文集卷之四>
- 2020-03-16 | NO.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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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음정 淸音亭
- 북구 용봉동 전남대 학생회관 뒤편으로 이어가는 언덕자락은 용주龍珠와 반룡盤龍마을을 안고 있어 반룡희주盤龍戱珠의 명당이라 전해지고 있다. 이곳이 개발되기 전에 청음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10리의 거리에 만포처사(晩圃處士) 김재화(金在華)가 지었다. 아들은 김진현金鎭鉉(1878~1966)으로 송사 기우만에게 배웠다.송사 기우만의 기문과 1907년 법부차관이었던 김각현, 난와 오계수, 석음 박노술, 춘담 기동준, 창성 김택수의 차운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제강점기 초반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없다.석음 박노술은 그의 문집 《석음유고》에서 이렇게 청음정을 노래했다.대숲 그늘 뒤덮인 곳 정자를 마련하여노년에 비용들이지 않고 창건했다네오뉴월 무더위 바람 불지 않아도 시원한 날씨홀로 지샌 맑은 밤 달빛이 밝아라깊숙히 사노라니 세속 멀리 벗어났고드러누워 있자니 복잡한 심사 모두 잊네단 소원이라면 청음정 올라 그 자리 절반 빌려투호하며 책 볼 자투리 청음(淸陰)이나마 빌려주오 시인 곽재구(郭在九)의 글 중에서 "1980년 봄이 왔다. 5월 광주에서의 폭력은 詩 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도 찾아왔다. 청음정은 전남대학의 캠퍼스에 바로 붙어 있었고, 5월 18일 아침 나는 며칠 동안 세수를 하지 않은 장발의 몰골로, 무릎이 튀어나온 작업복에 운동화 뒤축을 구겨 신은 채 공수부대원들이 진을 치고 있는 전남대 정문을 빠져나왔다."라는 내용으로 보면 1980년대까지도 청음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기우만은 기문에서 “김공에 있어서는 죽음竹陰을 가리켜 청음淸陰이라 하였으나 옛날 향산거사香山居士는 대나무를 가리켜 어진 군자라는 뜻인 사현似賢의 이름을 붙였고 또 동파노인同派老人은 속된 풍습을 다스린다는 뜻의 의속醫俗의 이름을 붙였다. 이처럼 어진 군자와 같고 속된 풍습을 다스리는 의원 같다는 뜻의 죽음이 오늘의 청음으로 그 이름을 바꾸어 이 정자를 청음이라 했다. 이 대나무의 맑은 청음이 김공의 취미에 알맞은 나름대로의 깊은 사유가 있기 때문이다.”고 김재화를 칭송했다.또한 노사집 권1에서 청음정을 이렇게 놀했다. 푸른 산은 연꽃과 같고 / 蒼山似芙蓉끊긴 언덕엔 돌이 말 같아라 / 岡斷石如斗이에 한 줄기 샘이 있어 / 爰有一道泉날아와 그 오른쪽에서 우네 / 飛來鳴其右이곳 이끼 낀 모퉁이 사랑하여 / 愛玆苔蘚稜얽은 집이 구름 속에 그윽하네 / 爲構雲木黝서늘한 정자는 머리 부딪칠 듯 / 凉榭欲打頭따스한 집은 팔꿈치만 감추네 / 煖屋纔隱肘유상을 기탁할 곳 있어 기쁘니 / 幽賞欣有托구졸을 어찌 원망하겠는가 / 鳩拙夫何咎슬프다, 옛날 늙고 완고한 사람이 / 慨昔老頑骨휑한 골짝 입구에서 한가로웠지 / 等閒谽谺口마른 오동 거문고 소리 못내고 / 桐枯不成琴모질어진 매화는 빗자루 같네 / 梅禿還似帚관목과 잡초 모두 덮였으니 / 灌莽極蔽覆그 누가 이 형승 드러내겠나 / 形勝誰得剖우리 집의 숙부가 현명하여 / 吾家叔父賢풍소의 뒤에 뜻이 높았네 / 抗志風騷後당종에 뛰어난 인재 있으니 / 堂從有俊彥본디 고상하여 구차함 없어라 / 素尙亦不苟고향 산천 가까운 거리에 있어 / 家山跬步閒티를 씻고 또 때 갉아내었네 / 滌瑕復刮垢고무담 서쪽의 작은 구릉도 / 鈷鉧西小丘중국의 유종원 부럽지 않아라 / 不羨中州柳울퉁불퉁한 난석 가운데에 / 崢嶸亂石中갑자기 낙성식 술을 마셨네 / 飮落忽有酒구름 안개의 장관 달라졌고 / 雲煙劃改觀남산은 문 안으로 들어오네 / 南山入戶牖산들바람 대나무를 흔들고 / 微風動竹樹차가운 비 돌절구를 채우네 / 寒雨添石臼귓가에 맑은 소리 들리니 / 耳畔覺淸音좌사의 시구만 못하지 않네 / 左思句不負내가 이 땅에 표박한 것은 / 抑吾泊玆土양구의 액운 만날 때부터라네 / 粤自遭陽九자손은 십여 대째 / 子孫十世餘운학을 전수 받았네 / 雲壑有所受작은 집을 뉘 하찮다 하리 / 數椽誰云微묵은 인연 실로 우연이 아니네 / 宿緣良非偶만년의 세월 조석과도 같아 / 萬紀如晨夕아는 이들은 감탄한 지 오래네 / 知者感歎久기와로 초가지붕 대신하니 / 陶瓦代茅茨아마 십 년은 썩지 않으리라 / 庶免十稔朽난간을 털고 유편 가까이 하며 / 拂檻近遺編탑상 쓸고 좋은 벗들 맞이하네 / 掃榻延良友한 세상 내려다보고 올려다보니 / 偃仰一世上장저 걸닉과 짝이 된 것 같네 / 沮溺如可耦
- 2020-03-16 | NO.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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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당 草堂
- 북구 청풍동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동쪽 10리에 있다. 지평 증직을 받은 평산신씨 신형申瀅이 건립했다. 그러나 오랜 세월로 저절로 무너져 없어졌다가 5세손 서산거사西山居士 신현정申鉉禎이 다시 중건하였으나 지금은 없다. 신현정은 덕계(德溪) 신건(申楗)의 후손이다. 노사 기정진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마음을 책을 읽는 일에 몰입하여 문장文章이 일찍이 완성되었다.노사 기정진의 기문과 송사 기우만의 중수기가 《광주읍지》에 전하고 있다. 보국 신헌의 제액이 있다. 담산 김경규의 제영 시와 담양 지곡에서 살던 만송 정해욱의 차운 등이 남아 있다.
- 2020-03-16 | NO.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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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연루(超然樓)
- 고경명의 후손으로 전남 담양군 창평면 정곡리에 살고 있던 고재붕(高在鵬, 1869~1936)의 유서석기(遊瑞石記)에 초연루(超然樓)가 등장한다.유서석기는 그의 나이 27세 때인 1895년 4월 여름에 정자앙(子仰 鄭海隣)과 함께 서석산을 오른 뒤에 슨 글이다. 이 글에는 원효암에서 김안중(金晏仲), 고경좌(高敬佐) · 김선명(金善鳴) · 김찬인(金贊引), 정희경(鄭晦景) · 박경심(朴景心), 박우서(朴禹瑞) · 고경률(高敬律), 고문경(高文卿) 등을 만나 술과 하룻밤을 지내고 가마를 타고 산에 오른다는 내용이 있다.풍암정(楓岩亭)에 올랐다가 어사암(御史巖)을 지나 초연루에 들어가 쉬었다는 부분이다. 한 스님이 나와서 맞이하고선 연방(蓮房)에 자리를 정해주었다는 내용으로 보아 절에 있는 누각으로 보인다. 어사암은 암행어사 민달용(閔達龍)이 새긴 석벽을 말한다.풍암정은 지금의 광주시 북구 충효동 718번지로 창평에서 무등산을 오르는 길에 있다.
- 2020-03-16 | NO.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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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은정 樵隱亭
- 북구 효령동 (학동마을)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30리에 있다. 북구 효령동, 학동 남쪽에는 황새형국의 황새봉을 향해 깊게 패여 있는 골짜기 점불이 있고 학동 동북쪽에는 쑥대봉이, 동남쪽에는 감나무가 많은 감남골이 있다. 학동마을 뒷산 높은 언덕 위에 초은(樵隱) 이호헌(李顥獻)(1858~1919)이 정자의 터를 닦았으나 이를 다 이루지 못해 아들 이상호李相皓 이상학李相鶴이 지어 아버지의 아호를 따라 초은정이라 했다. 정자는 석촌 윤용구가 현판을 썼고 현와 고광선의 상량문과 참판 해평 윤영구, 후석 오준선, 송조헌 등이 기를 썼다. 이들이 활동했던 시기를 보면 일제강점기 초반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오준선의 기문에 따르면 북구 효령동 죽취봉 아래의 학동마을 남쪽에 지었다고 했다. 오늘날 본래의 정자는 사라지고 북구 수곡동으로 옮겨 정각정으로 이름을 바꿨다. 정각 이장섭의 아들인 이길신이 그의 동족지간인 초은(樵隱) 이호헌(李顥獻)의 초은정(樵隱亭)을 그의 후손으로부터 매수하여 그 목재로 이 정자를 지었다.
- 2020-03-16 | NO.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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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가정 醉歌亭
- 북구 충효동 397-3 취가정은 환벽당 남쪽 동산에 자리하고 있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동쪽 30리 거리인 충효리 뒷산에 있다. 임진왜란 때의 충장공 김덕령(1567~1596)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1890년 후손 김만식(1845~1922) 등이 세웠다.주변 정자들 가운데 가장 늦게, 야트막한 산 위에 누대처럼 지었다. 대부분의 정자들이 강변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과 달리 넓게 펼쳐진 논과 밭들을 향하여 세웠다. 정자 앞에 서 있는 소나무는 정자의 운치를 한결 더해준다. 정자의 이름은 정철의 제자였던 석주 권필의 꿈에서 비롯하였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김덕령이 꿈에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고 한맺힌 노래 ‘취시가醉時歌’를 부르자, 권필이 이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 원혼을 달랬다고 한다.1950년 한국전쟁으로 건물이 불에 타 없어지는 불행을 맞이한 후에 후손들이 1955년에 중건하였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중앙의 거실 1칸을 제외한 좌우 양칸이 모두 마루로 꾸며져 있다. 앞면에는 설주 송운회의 취가정醉歌亭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문헌공 송근수의 정기와 후손 김만식의 상량문, 충장공과 석주의 ‘취시가’ 및 화답시와 난와 오계수, 월파 김영만 등의 많은 편액들, 성문우천聲聞于天, 충관일월忠貫日月, 기장산하氣壯山河, 취가어지醉歌於地 등 4개의 주련이 있어 당시의 정취를 실감케 한다.
- 2020-03-16 | NO.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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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사당 聚斯堂
-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 204-1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50리에 있다. 《호남읍지》(1871)에는 주의 북쪽 40리에 있다. 《대동지지》(1862~1866)에는 주의 서북쪽 30리에 있다. 평장동에 있는 건물로 광산김씨의 종회소이다. 김윤현金胤鉉이 광주목사로 부임하여 1885년에 종회소로 사용할 본당 10칸과 고사庫舍 8칸, 문랑門廊 5칸을 짓기 시작해 1892년에 완공됐다. 대제학이던 김영수金永壽가 당호를 취사당이라 했다.김윤현의 취사당서聚斯堂序에 “내가 을유년(1885)에 광주목사로 부임하니 각파제종各派諸宗들이 평장동에 종회소가 없는 것을 한탄하므로 내가 먼저 봉급을 털어낸 다음 호남제종湖南諸宗들에게 도움을 청하여 본당 십칸, 고사 팔칸, 문랑 오칸을 세우기로 계획하고 판서 영수永壽에게 의논하여 집 이름을 취사(聚斯)라 하였으니 아! 참으로 아름답다.”라고 적고 있다.나라가 광복한 뒤로는 숭조하는 사업은 더욱 박차를 가하여 1956년에는 경모재敬慕齋 3칸을 건립하였으며 기존 취사당 건물을 옛 고사가 있던 자리에 이축하여 수존재水存齋라고 개칭했다. 기문은 당시 광주지법원장이던 김연수金蓮洙가 썼다. 김연수는 이듬해 평장동지平章洞誌를 기초로 하여 평장사平章史를 발간했다.1985년에 새로운 취사당을 중건하였다. 취사당이란 광산김씨 후손이 이곳에[斯] 모이는[聚] 집[堂]이라는 뜻이다. 취사당은 강학과 모임이 있을 때 회합 장소로 활용되는 공간이다. 취사당은 전면 5칸, 측면 2칸, 전 후퇴의 건물로 장대석 기단위에 디딤돌 초석이 놓이고 그 위에 원주를 세웠다. 이익공 형식의 겹처마 건물로써 지붕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유교 전통 서원 강당 형식이다.
- 2020-03-16 | NO.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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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매당 七梅堂
- 남구 도금동 칠매당 김오(金浯, 1617~1676)는 본관은 광산, 자는 중원(仲源)이며 남구 도금동 출신이다. 1660년에 경자증광사마시庚子增廣司馬試에 생원 3등 28위로 합격하였다. 칠매당을 짓고 과거에 응시하지 않은 채 후학 양성에 일을 삼았다. 칠촌漆村 김충남金忠男의 증손이자 명암처사鳴巖處士 김형金逈의 손자이다. 아버지 김성로金成輅는 1624년 갑자증광사마시甲子增廣司馬試에 진사進士 3등으로 합격하였다.청사淸沙 고용후高用厚와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1574~1656),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俊吉 문하에서 공부하여 문학으로 사림의 으뜸이 되었다. 학식이 매우 넓고 아는 것이 많아 유림의 종장宗匠으로 추대하였다. 뒤에 지평持平에 증직 되었다. 1667년에 전라도 유생들이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할 때 상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674년에 김집의 문인이었던 우암 송시열이 모함을 당해 금성에 귀양 가 있을 때도 상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렇게 선생의 원통함을 펴고자 하였으나 모함을 당하여 혹독한 고문에도 이를 굽히지 않았다.
- 2020-03-16 | NO.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