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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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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광선(高光善)의 『현와유고(弦窩遺稿)』
    『弦窩遺稿』는 석판본 16권 8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1에는 시 247수, 권2~3에는 서 442편, 권4에는 잡저 107편, 권5에는 序 99편, 권6~7에는 記 283편, 권8에는 발 37편, 銘 4편, 贊 5편, 辭 5편, 혼서 1편, 상량문 22편, 축문 11편, 제문 6편, 권9에는 碑 57편, 권10~11까지는 묘갈명 109편, 권12에는 묘지명 5편, 묘표 52편, 권13~15까지는 행장 103편, 권16에는 實蹟 26편, 전 14편 등이 수록되어 있고, 마지막 부록으로서 언행록ㆍ가장ㆍ행장 등 高光善에 대한 인물 정보를 알 수 있는 자료들이 모아져 있다. 이렇게 보면, 『현와유고』는 어떤 문집보다도 방대한 분량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권1에는 247수의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시문의 특징은 증시와 차운시가 대다수를 차지한다는 점이다. 증시와 차운시가 많다는 것은 시문의 제작이 인간관계 속에서 지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전체 시문을 두고 보면, 예술적인 미감을 추구했다기 보다는 관계망을 중요하게 생각한 흔적이 역력하다. 또한 시문의 내용이 교훈적이다. 이는 고광선의 평소 성격이 드러난 것이기도 하겠지만, 奇正鎭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익힌 학도로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교훈적인 면은 가령, 옛 선인을 들어 보여주는 식으로도 나타났는데, 「謹次益齋李先生影幀韻」과 같은 작품이 이에 해당한다. 이 시에서 고광선은 고려 때의 성리학자인 益齋 李齊賢의 영정을 소재로 살아생전 그의 업적을 찬양하고 있다. 권2~3까지는 편지글로 총 442편이 수록되어 있다. 스승인 기정진과 羅燾圭에게 올린 편지가 각각 2편과 1편씩, 최익현에게 올린 편지가 1편, 기우만에게 올린 편지가 1편 등이다. 그리고 교유 인물인 鄭義林, 吳繼洙, 朴魯述, 吳駿善 등에게 보낸 편지가 각각 1편씩 있다. 고광선은 이들 편지를 통하여 스승과 학문적인 문답을 했을 것인데, 특히 기정진에게 올린 「上蘆沙奇先生」에서는 자신의 학문적 성취가 매우 힘듦을 토로하고 있다. 권4에는 107편의 잡저가 실려 있다. 잡저도 편지글이 대부분으로 교훈적인 내용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권5의 서는 문집의 서문이나 契案의 것이 많다. 그 외 기ㆍ발문ㆍ비ㆍ묘갈명 등 다수의 글이 있는데, 대체로 당대 유림들의 동태를 살필 수 있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집 간행은 1962년 제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서문은 宋在直이, 발문은 崔允煥이 작성하였다. 이렇게 보면, 『현와유고』는 어떤 문집보다도 방대한 분량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이는 고광선의 필력이 그만큼 우수했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당대 호남유림들의 동향을 읽을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2020-08-04 | NO.26
  • 괴암일고 槐庵逸稿
    문병일文炳日(1877~1948)의 괴암일고 槐庵逸稿는 序-南光鎭(1968), 跋-朴壎植(1968), 小識-文武在(1968) 쓰고 1968년에 간행되었다.광주 북구 금곡동에 1900년 괴암槐庵 문병일文炳日(1877~1948)이 부친 삼괴三愧 문유식文愉植의 뜻을 받들어 삼괴정을 건립하였다.
    2020-08-11 | NO.25
  • 금호유고(錦湖遺稿)
    임형수林亨秀(1514~1547)는 본관이 평택이며 자는 사수(士遂), 호는 금호이다.  <금호유고>는 목판본으로 1677년에 간행된 원집과 부록의 합 1책이며 판심제는 <금호집>이다. 시문은 대부분 丁酉亂에 佚失되고 저자의 후사가 끊기는 바람에 본가에는 전해지지 못하였다. 뒤에 저자의 둘째 사위 柳景進의 아들 參奉 柳玶이 權韠을 통해 「동차록東槎錄」에 수록된 저자의 詩 약간 수를 얻고 見聞을 통해 얻은 글들을 수습, 1책으로 편차하여 보관해 두었다. 여기서 말하는 「東槎錄」은 「동차집東槎集」을 말하니, 1539년 華察과 薛廷寵 두 사신이 나왔을 때 遠接使 일행이 迎送을 위해 왕래하면서 서로 酬唱한 시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蘇世讓, 陽谷集 序)그 뒤 柳玶의 從孫 柳應壽가 柳玶의 수습본을 가지고 간행을 도모, 文谷 金壽恒에게 교정을 받고 또 遺事 성격의 〈行蹟紀略〉을 부탁하여 받아 부록에 추가해서 定稿本을 만들었다. 이를 光州 牧使 李敏敍의 협조를 받아 1677년 光州에서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1677년 李敏敍가 쓴 序文이 있고, 目錄은 없다. 原集에는 詩 110제, 冊文 1편, 誌 1편, 雜著 2편이 실려 있다. 1681년 宋時烈이 쓴 跋文, 1678년에 金壽恒이 쓴 跋文이 있다.1907년에 와서 저자의 조카 松坡公 林植의 후손이 光州 校堂에 보관되어 있던 舊板을 집으로 옮겨와 殘缺된 부분을 보충하여 重刊하였다.
    2020-08-12 | NO.24
  • 기대승(奇大升)의 고봉집(高峯集)
    『고봉집』은 3권의 시문과 「논사록」 2권 등 모두 5권 5책으로 되어 있다. 서문은 張維와 張顯光이 썼는데, 장유는 기대승이 처음에는 김인후를 종유하다가 이황의 수제자가 되었다고 하였고, 장현광은 퇴계가 斂藏謙退‚ 淸修高節하다면 기대승은 超揚發越‚ 直截峻特하다고 평하였다. 기대승의 일생이 연도별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권1은 詩인데, 336수의 시가 詩體의 구분 없이 1550년부터 1568년경까지의 작품이 연대순으로 편찬되어 있다. 주 내용은 敍景詩, 次韻詩, 贈別詩, 挽詩이며, 朴孝伯, 奇大恒, 朴淳, 鄭琢, 吳謙, 李後白, 李山海, 鄭澈, 鄭之雲, 金麟厚, 許曄, 盧禛, 成守琛, 尙震, 盧守愼, 崔慶昌, 梁楊應鼎, 蘇世讓 등 사림출신의 당대의 정치가나 학자, 그리고 호남지방의 많은 문인과도 많은 시를 주고 받았다. 권2는 雜著이다. 表 10편, 祭文 9편, 記 7편, 辭狀 6편, 疏 4편, 論 3편을 비롯해서 2편의 , 奏文과 說, 그리고 箋, 上樑文, 書契修答, 擬批, 箚, 樂章, 祝文 등이 각각 1편씩 수록되어 있다. 여러 차례 知製敎 등을 역임하였기 때문에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인 표나 제수된 관직을 사양하는 소가 많고, 기타 소, 론, 전, 비의, 차, 악장, 축사 등 다양한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1572년 宗系辨誣를 위해 지은 「辨誣奏」,「二主說」, 仁宗과 明宗의 文昭殿 祔廟를 위한「文昭殿議」와 「論文昭殿箚」, 羅整菴의 학문이 禪學에서 나왔음을 논한 「論困知記」, 송순의 면앙정의 유래와 풍광을 노래한 「俛仰亭記」, 그리고 穆宗皇帝, 明宗, 기대승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鄭校理와 李滉 등에 대한 제문 등을 들 수 있다. 권3은 碑誌 14편과 書 9편을 비롯해서 行狀 3편, 跋은 1편이 수록되어 있다. 碑誌는 이황, 李彥迪, 成守琛, 行狀은 奇大恒, 金宏弼 등 기대승 생전이나 당대의 저명한 사림을 위해 지어진 것이고, 書는 이황을 비롯해서 金啓, 李楨, 鄭澈 등과 주고받은 나눈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특히 이황과의 편지는 家廟, 나정암과 노수신의 학설, 太極動靜說, 心性說, 喪服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서 기대승의 예학과 성리학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발문은 이황이 지은 「朱子書節要序」에 대하여 지어진 것이다. 발문은 1629년 『고봉집』을 간행한 기정진의 손서인 趙纘韓이 지었다. 그리고 「論思錄」은 上, 下 2권으로 明宗 19년(1564), 22년, 宣祖 1년, 2년, 5년에 기대승이 經筵에서 四書, 「近思錄」 등을 강론한 내용을 모아서 간행한 것이다. 서문은 1787년 趙儆이 발문은 1786년 金鍾秀가 지었다. 「논사록」의 내용은 堯舜부터 程朱에 이르기까지의 道學淵源과 帝王의 王道政治를 말하고, 誠意 正心 등의 수양을 하여 군왕의 至治를 이루게 하는 것들이다. 기대승은 국가의 安危는 宰相에게 달려 있고 군주의 덕이 성취됨은 經筵에 달려 있음을 강조하였고, 또 言路를 열고, 財用을 절약하고, 예의를 숭상할 것 등을 역설하였다.
    2020-08-03 | NO.23
  • 기정룡(奇挺龍)의 『낙암유고(樂菴遺稿)』
    기정용의 『樂庵遺稿』는 5권 1책의 목활자본으로 1910년 후손 奇東斗 등에 의해서 간행되었다. 서문은 宋秉珣이 썼다. 서문은 宋秉珣이 썼다. 송병순은 기정룡이 기대승이 살았던 터에 암자를 짓고 살았기 때문에 樂菴이라고 일컬어졌으며, 遜齋 朴光一로부터 기대승 이후의 1인이라고 평가를 받았고, 陶庵 李縡로부터 독실하게 행하는 군자라는 평을 받았다고 칭송하고, 기정룡의 후손인 東斗와 重燮의 부탁을 받아 서문을 작성하게 되었다고 서문을 쓰게 된 경위를 밝혔다. 권1에는 5편의 賦가 수록되어 있다. 「次歸去來賦」는 陶淵明의「歸去來辭」를 본떠 지은 자신의 安貧樂道하는 삶을 노래한 것이고, 「次方丈幽棲賦」는 외삼촌 박상현이 지리산 아래에 있는 구례로 이주하면서 지은 「方丈幽棲賦」를 차운한 것이고, 「和睡翁思賦」는 고종 사촌인 李治에게 화답하는 글이고, 「次韓文公別賦別李友」는 친구인 李士樞와 작별하면서 준 글이다. 권2는 47제 53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시체(詩體)를 구분하지 않고 자신의 일상생활이나 독서하면서 느낀 생각, 사물이나 자연에 대한 묘사, 자신의 과거에 대해 술회하였으며, 선배들이나 친구들의 시에서 차운한 詩나 贈詩, 輓詞도 남겼다. 권3은 7통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杏亭 李士樞에게 보내는 편지 6통과 睡軒 李士治에게 보낸 1통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는데, 서로간의 안부를 묻는 내용이다. 권4에는 序 2편, 記 2편, 跋 3편이 수록되어 있다. 序 가운데 「龍洞契約序」는 기정룡이 사는 龍洞의 향약을 다시 禊事를 중수하면서 法禁을 두는 등 향약을 다시 정한 과정에 대한 서문이며, 「龍湖鄕約序」는 烏山鄕에 사는 사람들이 龍湖에 모여 고을의 미풍양속과 어려울 때 돕기 위해 향약을 제정하는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記 중에 「退求齋記」는 기정용이 親屬인 玄敬之가 은거하는 장소로 삼기 위해 지은 退求齋에 대한 기문이며, 「銀杏亭記」는 친구인 李士樞의 銀杏亭의 유래와 그곳에 심어져 있는 은행나무에 대한 감상문이다. 그리고 「移建鄕亭記」는 1713년(숙종 52)에 泉洞에 있었던 鄕亭을 복구하였으나 다시 비바람이 새자 다시 1728년(영조 4)에 기대승의 유허지인 杜洞의 白雲亭으로 옮기는 과정에 대한 글이다. 발문으로는 「書萍水錄後」나 「紫荊詩帖跋」은 같은 해에 태어나서 평생 시문을 주고 받았으나 먼저 세상을 떠난 淸窩 高泰重와 睡軒 李治의 시문집에 대한 발문이고, 「書李爭汝遺稿後」는 기정룡과 외손간인 李淨汝의 유고에 대한 발문이다. 권5는 附錄으로 1740년(영조 16)에 閔師夏가 기록한 家狀과 李縡가 撰한 行狀, 1910년 기우만이 찬한 墓碣銘, 기정룡의 사위인 星山玄氏 明直이 찬한 行蹟, 외종형 朴光元과 族姪 奇彦鼎이 올린 祭文, 동문인 閔師夏가 지은 輓詞가 있다. 말미에는 1910년 奇宇萬과 기정룡의 후손 奇東斗가 찬한 跋文이 수록되어 있다. 기정룡은 기대승이 태어났던 소고룡리에서 태어나 평생 그곳을 떠나지 않고 기대승의 유업을 계승하였던 인물이다. 기정룡은 마을의 미풍양속을 위해 향약을 다시 제정하고 정자를 기대승의 유허지로 옮기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17세기 중엽 송시열의 문인이었던 안청의 박상현의 외손으로서 그의 외삼촌이었던 손재 박광일이나 백야 박광원과 매우 관계가 깊었다. 또한 기정룡 사후 문집의 행장을 도암 이재에게서 받았는데, 당시 안청의 순천박씨는 호남의 핵심 노론세력들이며 이재는 노론산림이었다. 따라서 기정룡의 문집에 나타난 이들과의 관련 글 들을 통해 기대승 가문이 어떠한 정치적 입장을 취했으며, 기대승 가문의 향촌사회에서의 사회적 위상은 어떠하였는가를 개략적으로 엿볼 수 있다. 당시 기정룡의 글에 대해 송시열의 문인인 외삼촌 朴光一은 기대승 이후의 일인자라고 높이 평가하였으며, 기정룡의 행장은 노론 산림인 李縡가 찬할 정도로 기정룡의 가문이 노론과 밀착된 관계를 보이고 있었다. 따라서 기정룡의 문집은 당시 기대승 가문의 정치적 입장과 향촌사회에서의 사회적 위상, 학문적 수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2020-08-04 | NO.22
  • 김문옥 효당문집 曉堂文集
    김문옥의 자는 성옥聖玉, 호는 효당曉堂,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김기추(金箕錘)의 아들이며 합천 출신이다. 정기(鄭琦)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효당문집은 서문과 발문이 없어 저자의 생애 및 편찬경위를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저자가 죽은 뒤 그가 강학(講學)하던 전남 화순군 남면 절산리에서 1962년경 후손과 문인 위계도(魏啓道) 등이 편집,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木板本. 16卷8冊.目錄. 合9冊으로 29.8x20.6cm이다. 四周雙邊. 半匡 ; 22.6x16cm. 有界. 10行24字. 註雙行. 上下向二葉花紋魚尾이다. 시(詩)는 제영(題詠) 및 각처를 유람하며 승경(勝景)과 마주하며 지은 작품이 특히 많고, 문사적 기질이 짙은 낭만적 작품도 다수 있다. 「독두시(讀杜詩)」는 깊은 밤 불행하였던 두보(杜甫)의 생애를 떠올리며 그의 시를 읽다가 느낀 감회를 적은 것이고 「을유칠월칠일문일본항우연합국(乙酉七月七日聞日本降于聯合國)」은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기뻐 환호하며 지은 장편으로 일제치하의 수모를 잊지 말고 되찾은 나라의 기반을 반석과 같이 단단하게 하기 위하여 일치단결할 것을 호소한 내용이다. 「포상망춘(浦上望春)」에서는 끝없이 펼쳐진 쪽빛 바다 아득한 물결을 바라보는 호탕 황홀한 심회를 노래하였고, 「제호산벽상(題湖山壁上)」에서는 약초 캐고 글 읽으며 손자아이의 벗이 되기도 하고 학과 사슴을 짝하여 대화를 나누는 은일적 삶의 자세를 천명하기도 하였다. 서(書)는 벗들과 주고받은 안부편지 외에 학문적 내용으로 문답한 것이 많다. 「상율계정선생(上栗溪鄭先生)」에서는 스승 정기(鄭琦)의 편지를 받고 그 가르침에 감사하며 학문을 향한 자신의 다짐을 천명하였다. 곽기영(郭基永)과는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며 도학의 여러 문제를 토론하였다. 「답곽우헌(기영)별지(答郭愚軒(基永)別紙)」에서는 심(心)과 성(性)의 관계를 주자가 오봉(五峰)의 심(心)과 성(性)의 상대설을 비평하면서 제시한 심성대입부당론心性對立不當論)을 인용, 해설하고 심통성(心統性)이라는 말을 들어 어디까지나 마음속에 성이 포함되어 있음을 주장하였다. 잡저의 「대학척의(大學摭義)」는 《대학》의 서문에서 장구(章句) 또는 잔주에 이르기까지 긴요하척고 의문이 제기될만한 곳을 들어 문답형식을 빌려 해설한 것이다. 「강설(强說)」에서는 예로부터 어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죽음으로써 도를 지킨 전현(前賢) 등의 위대한 업적을 예찬하였다. 김원여에게 주는 「이지설(二至說)」은 "지극한 즐거움은 글 읽는 것 만한 것이 없고, 지극히 중요한 것은 자식 가르치는 것 만한 것이 없다"라는 말이 천언만어(千言萬語)의 다른 말보다 중요하다 하여 일생 동안 실행에 옮기기에 힘쓸 것을 권면한 글이다.
    2020-06-18 | NO.21
  • 김석구(金錫龜)의 『대곡유고(大谷遺稿)』
    『大谷遺稿』는 김석구의 시문집으로 6권 3책의 목활자본이다. 序는 1901년 崔益鉉이 지었다. 최익현은 奇正鎭의 수제자로서 김석구의 학술상의 위치를 중국의 정명도와 정이천 형제에 비유하였다. 권1은 시이다. 모두 102수를 수록하였는데, 궁핍한 생활에 자족하면서 자신에 대한 성찰이나 자연이나 천리에 대한 이치를 노래하였다. 김석구는 시를 통해 궁핍한 삶을 자족하면서 학문에 대한 나태함을 자책하고 더욱 면려하는 계기로 삼았다. 또한 자연을 노래하되 자연속의 도를 추구하였으며, 천리와 인성이 일치되는 경지를 추구한 것이다. 권2는 書와 序, 記, 跋, 祭文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書에서는 가장 먼저 스승인 기정진에게 올린 편지를 수록하고 있다. 내용은 이황의 『성학십도』와 이이의 『격몽요결』의 차서가 君德과 蒙學이 필요한 바가 다르지만 학문에 들어가는 단서와 문로로 삼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기정진이 『성학십도』나 『격몽요결』의 차서는 간략하거나 절실하지 않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다고 답한 내용이다. 학문에 뛰어난 그와 스승인 기정진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가 1통 밖에 남아 있지 않아서 애석한 일이나, 두 사람간의 학문에 대한 문답이 「師門問答」으로 잡저편에 따로 실려 있어서 그의 사상적인 편린을 엿볼 수 있게 한다. 李崑壽에게는 5통의 글을 보냈는데, 자신의 근황을 전하기도 하고, 스승인 기정진이 돌아가서 애도하기도 하였으며, 학문은 시비를 잘 분별하고 실천함에 있으며, 기질이나 습관, 질병에도 불구하고 성인되는 공부를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든가 주자의 「中和後說」 등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도 하였다. 이 뒤에는 대체로 같은 노사문인 간에 왕래한 편지를 수록하였는데, 주로 기정진의 문인 중 성리학에 뛰어난 인물들이다. 강진의 金漢燮에게는 자신이 재주가 둔한데다가 학문을 궁구하지 못하고 존양성찰 공부에 게을리 하고 있으니, 자주 가르침을 달라고 부탁하였다. 보성의 鄭時林와는 주로 능주의 鄭義林를 통해 글을 주고받았다.스승이 돌아간 이후 자신의 재질이 부족하여 사문의 기대를 저버려 부끄럽지만 정시림은 궁핍한 가운데 뜻이 장하여 노사문인들에게 큰 힘이 되고 있으며, 기정진의 문집에 대한 看儉을 부탁하기도 하고, 오십이 되어 학문에 진척을 이루지도 못하건만 학질이 도져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과 스승이 돌아간 뒤 초심을 지닌 사람은 호남에서 鄭義林와 鄭時林 뿐이니 도를 위해 보중하라는 글이다. 또 노문삼자인 정의림에게는 스승이 돌아간 이후 서로 자주 만나지 못하는 쓸쓸함과 학문에 대한 기대, 心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도 하였다. 스승의 손자 奇宇萬에게는 스승의 기대를 이룬 것도 없이 나이가 들어감을 한탄하고, 군부의 원수를 만났을 때 힘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묻기도 하였다. 김석구는 특히 鄭載圭, 鄭冕圭, 權雲煥, 權基德, 陳樸, 金顯玉 등 영남의 노사문인들에게 많은 편지를 보냈다. 그 중에서도 노사문하의 삼대제자인 정재규와 가장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스승이 돌아가신 뒤에 멀리 떨어져 있어서 보고 싶은 마음이나 자신의 어머니가 아프시다는 것을 전하기도 하고, 정재규가 편찬하고 있는 『答問類編』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수정해달라고 하거나 그 두서와 규모가 적절하다든가, 스승의 문집은 어려운 중에도 기우만이 힘써 진행하고 있다는 것, 그 밖에 성리학이나 예학에 관해 서로 답문하기도 하고, 안부를 묻기도 하였다. 권운환에게는 整齊嚴肅해야 主一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 기정진의 喪에 조정에서 제관을 보내어 조문했다는 것, 자신이 학질에 걸려 고생하고 있다는 것과 기우만이 막내상을 당했다는 것을 전하기도 하고, 진주의 趙性家를 통해 편지를 받고 성인의 학문은 평생 공부해야 할 것이므로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하였다. 진박에게는 스승인 기정진이 돌아가신 뒤 매년 슬픔이 더하고, 자신에게 동문들이 기대하는 바가 크나 자신이 그러지 못해 부끄럽다고 하기도 하였다. 김현옥에게는 제천의 민기용을 통해『답문류편』을 베껴서 보내주어 감사하다는 것과 『노사집』 간행에 관해서는 자신이 쇠잔하여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그 밖에 鄭學仁, 沈魯綜 등 같은 동문이나 朴準基 등의 문인, 자신의 족속들에게 보낸 편지가 있는데, 주로 안부를 묻거나 독서를 권면하는 내용이다. 序로는 영남에서 공부하러 온 金秋槎翁이나 제주도에서 바다를 건너 북으로 공부하러 온 安行五, 자신을 찾아 왔다가 제천으로 떠나는 민중호, 기타 南俊西, 明洞主人과 작별하는 글이 수록되어 있다. 기문으로는 회나무가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지만 회나무가 자신의 천성을 잘 보존한다는 취지의 「雙槐堂記」, 湖狂者와 醉夢子의 대화를 통해 항상 취하고 광망함을 말한 「湖狂齋記」가 있다. 발문으로는 「書兩鄭奇遇說後」가 수록되어 있는데, 영남의 정재규와 호남의 정의림이 같은 정씨로서 마을 이름도 같은 墨洞에서 똑같이 古人의 학을 배우겠다고 기정진을 찾아오자, 이에 스승인 기정진이 가상하게 여기므로 김석구가 글을 지어 두 사람이 함께 열심히 공부하여 스승의 기대에 부응하라는 내용이다. 제문은 기정진 사후 스승의 높은 도학과 행실, 자신을 극진하게 가르쳐준 은혜에 감사하고 돌아가심을 슬퍼하는 글을 추모하는 글인데 세 번이나 글을 올려 자신의 존경하는 마음과 슬픈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祭金章汝文」은 동문으로서 선배인 金致熙의 죽음을 슬퍼하는 글이다. 권 3-5는 雜著인데, 권3은 「自敬說」이다. 김석구가 25세부터 35세까지 10년 동안 느낀 바가 있으면 기록한 것인데, 10년 뒤에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여 44세인 1878년 동지에 다시 경계한다는 것으로 학문에 대한 면려, 자신의 처신과 언행, 마음가짐에 대해 자신을 경계한 글이다. 권 4는 師門問答으로 김석구의 질문에 스승인 기정진이 답한 것으로, 태극동정이나 理氣, 陰陽, 道器, 이일분수, 인심·도심, 미발과 이발, 인물성동이 등 성리설을 비롯해서 군자의 처신, 상례나 제례 등 예학에 걸쳐 많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노사학파의 성리학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권 5는 「知舊問答」과 「沙上語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구문답」은 동문들간에 유학 전반에 관해 논한 자료로서, 노사학파의 성리학이나 예학 등의 학문적 특성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정재규와 심성, 이기, 경서, 상복이나 제례에 관한 논의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은 정의림이나 정시림 사이에 논한 내용도 수록되어 있다. 사상어록은 노사 기정진이 장성 황룡강변의 下沙에서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1853년 김석구가 기정진을 배알하여 수학하기 시작한 때부터 20년 이상 동안 기정진에게서 성리학이나 예학, 역사 등에 대해 들었는 말을 간략하게 적어 둔 것이다. 권6은 김석구의 글이 아니라 김석구와 관련된 스승과 동문들의 글을 모은 것이다. 기정진이 지은 「脫灑說」, 기우만이 지은 「大谷記」, 김석구의 문집을 편찬하기 위하여 영남에서 돈을 모아 김현옥을 보내자고 정재규가 권운환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김석구의 죽음을 애도하는 동문이나 제자들의 제문이 수록되어 있으며, 기우만의 행장, 정재규의 묘지명, 정의림의 傳, 최숙민의 발문으로 되어 있다. 노문삼자를 비롯한 영,호남의 학문적으로 훌륭한 노사문인들이 참여하였다. .
    2020-08-03 | NO.20
  • 난와유고難窩遺稿
    <난와유고難窩遺稿> 난와 오계수(1843∼1915)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16년에 간행된 시문집이다.유학자이며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며 항일지사인 오계수는 본관은 나주. 자는 중함重涵, 호는 난와難窩. 아버지는 갑선甲善이며, 어머니는 나주 정시혁鄭時爀의 딸이다. 17권 8책. 목활자본. 1916년 오준선(吳駿善)·오정선(吳禎善)·오재수(吳在洙) 등 그의 문인들에 의해 편집, 간행되었다. 서문은 없고, 권말에 오재수의 발문이 있다.권1∼4에 시 505수, 권5·6에 소 2편, 서(書) 111편, 권7∼9에 기 79편, 서(序) 59편, 발 22편, 권10·11에 행장 34편, 전(傳) 7편, 권12∼14에 묘갈명 18편, 묘지명 4편, 권15·16에 논 2편, 설 7편, 잠 2편, 명 1편, 혼서(婚書) 3편, 표전(表箋) 2편, 제문 9편, 축문 7편, 상량문 23편, 여문(儷文) 3편, 권17은 부록으로 난와기(難窩記) 3편, 행장·묘갈명·제문·각금실기(却金實記)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잡저인 「정명분립기강론(正名分立紀綱論)」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명분을 바로 하고 기강을 세우는 것이 그 근본이 된다고 전제하고, 이 근본이 바로 서게 되면 나라가 안정되고 그렇지 못하면 나라가 혼란해지니, 한 나라의 인군(人君)이 이 근본을 세움에 힘쓰지 않을 수 없음을 주장한 글이다.「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 등 3편의 이기론에서는 이기설이 일상생활이나 학문을 익히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를 전혀 모르면 심성의 근본과 기질의 변화마저 모르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理)·기(氣)란 선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는 생물의 근본이자 성(性)이고 기는 생물의 그릇이자 형(形)이므로, 한 몸 속에 같이 존재하기 때문에 ‘불리부잡(不離不雜)’의 네 글자만으로도 이기설의 오묘한 뜻을 다 깨칠 수 있다는 지론을 폈다. 이 저서들은 화서일문(華西一門)의 이기지학(理氣之學)을 이해하는 데 좋은 참고가 된다.그는 이기론理氣論에 있어 이理는 본성本性이고, 기氣는 기형器形으로, 둘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표리와 같이 불리부잡不離不雜한 하나라는 일물론一物論을 주장하였다.이밖에 「시장성헌병분대장서(示長城憲兵分隊長書)」와 「시삼거리헌병소장(示三巨里憲兵所長)」 등은 헌병대 우두머리들에게 보낸 글들로, 1910년의 경술국치 후 일본이 이른바 은사금(恩賜金)을 나누어줄 때 이를 거절한 대가로 1911년 5월에 왜병에 끌려가 갖은 폭행과 고초를 겪으면서도 끝내 뜻을 굽히지 않은 그의 굳센 항일정신을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2020-08-10 | NO.19
  • 매산시고 (梅山詩稿)
    송용만(宋用萬, 1888~1962)의 문집 『매산시고 (梅山詩稿)』는 2권 1책 석인본으로 1992년에 손자 송병대(宋炳大)가 발행하였다. 卷1詩 五言絶句 : 池洞慕賢亭韻, 吟庭桃, 聽鵑, 偶吟 三首, 和陳市隱, 贈文孝子, 偶吟, 寄林漢采, 偶吟 三首, 秋夜吟 二首. 五言四律 : 嘆世, 自笑, 自歎七言絶句 : 和鄭琫采, 與洪芳植共吟, 初夏 二首, 與李春馥相酬, 偶吟, 與鄭琫采 二首, 送友, 與居京韓仲植共吟, 春日卽事, 述懷, 與友人, 與吳俊洙 二首, 偶吟, 入南原, 偶吟, 入書齋, 夏日歎倭人幕兵, 挽鄭琫采, 挽梁志遠. 七言四律 : 謹次林桂隱原韻, 謹次鄭得采?宴韻, 謹次奇石村忠鉉?宴, 次鄭鶴亭韻, 謹次金梧軒韻洪凡, 梅山原韻, 舍伯?宴日吟, 述懷, 別洪芳植, 別高海柱, 與李春馥 共吟, 偶吟, 偕諸彦入多寶寺韻, 伏日與諸友共吟, 別吳俊洙, 除夕吟, 別洪芳植, 生日感詠, 呈池洞鄭丈盖仲, 入書齋, 至書堂, 與諸友共吟, 訪林漢錫, 逢洪承悔子旭, 題荷潭亭長城臥?, 與洪芳植吟, 與林漢錫吟, 寡婦吟, 春日?懷, 林竹軒見訪不可無詩, 與林漢錫吟, 與竹軒林暎相共吟 二首, 陪心山舍伯出遊前江, ?日吟, 餞春, 入京城, 還婚詩, 芙水齋詩會, 礪山永護齋重建韻, 與林漢錫會吟 二首, 春日吟, 登金安?溪亭, 偶吟, 與金錫興, 與林漢錫共吟, 與洪芳植會吟, 病中吟, 偶吟, 次不換亭煮伏韻, 次金?太書堂契韻, 與洪芳植共吟, 白踵, 別洪芳植, 七月旣望與洪芳植相詠 三首, 題金剛山?幅, 回甲, 除夕, 偶吟, 丙戌三月十日洞會李明沙金玄圃諸彦共吟, 古阜斗升寺與工人朱慶峰共吟, 聳珍續修契韻, 登?溪亭, 和鄭琫采, 偶吟, 餞春, 謹挽奇晦溪先生, 挽金錫奎, 挽李春馥, 挽李民厚(子吉), 挽林丈西允, 挽四從弟翼萬, 挽鄭鍾鉉, 挽林漢采, 謹挽謙山李先生, 挽申京植 居長城南面, 挽金判壽, 挽林官鎬, 挽洪山隱(子旭), 挽林化集, 挽吳仲彬, 挽羅明善, 金台煥, 挽金桂煥, 挽吳德述, 挽沈南一義兵將, 聞趙相國秉世閔輔國永煥乙巳殉節有感, 聞閔輔國永煥血守有感, 謹輓崔勉庵先生, 所懷賦歌謹呈李春馥, 朝鮮解放 ?小序, 贈陳市隱 ?小序卷2附錄 : 行狀, 記, 墓表, 跋, 詩稿編刊辭 권두에 나주의 나은균(羅殷均)이 1988년에 쓴 서문이 실려 있다. 권1에는 시 134수와 서(序) 2편, 노래 1편이 실려 있다. 권2은 부록(附錄)으로 족질 상욱(庠旭)이 쓴 행장과 오필선(吳弼善)이 쓴 매산기(梅山記), 그리고 이병학(李秉鶴)이 쓴 묘표가 실려 있다. 권말에 김상순(金商順)이 1983년에 쓴 발문이 실려 있다. 이 문집은 손자 우대(宇大가) 매산시고편간사(1991년)를 써서 1992년에 손자 송병대(宋炳大)가 발행하였다. 송용만은 이 문집에서 당시의 국난(國難)으로 우국의 아픔이나 산수 자연을 노래한 내용을 부나 시 속에 담아냈다. 송용만은 광산군(光山郡) 본량면(本良面) 매동리(梅洞里) 집에서 태어났다. 송용만의 자는 현중(賢仲), 호는 매산(梅山)이며, 본관은 여산이다. 아버지는 경(坰)이고, 어머니는 진주 강씨(姜氏) 익상(翊尙)의 딸이다.
    2020-08-13 | NO.18
  • 박노술(朴魯述)의 『석음유고(石陰遺稿)』
    朴魯述의 자는 公善, 호는 石陰, 본관은 順天으로, 1851년에 光州 安淸里에서 觀魚軒 陽東과 長興高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奇正鎭에게서 수학하였으며, 특히 性理學에 조예가 깊어 노사의 후손인 奇宇萬과 더불어 자주 논변이 있었다. 奇宇萬이 일으킨 의병활동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栗里田舍에 숨어 살면서 제자를 양성하였다. 『石陰遺稿』은 영인본 1책 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1에는 모두 125제 231수의 시가 실려 있는데, 雙石亭, 晩悟亭, 湖隱亭, 晩翠亭 등 정자에서 차운한 시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또한 그의 시에서는 지사로서의 열정을 읽을 수 있는 곳이 많다. 권2에는 31명에게 보내는 書 40편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 宋秉璿에게 보낸 편지는 3편이 실려 있는 반면 奇正鎭에게 보낸 편지는 한 편도 실려 있지 않은 것이 특이하며, 이밖에 기우만에게 보낸 6편의 편지를 비롯하여 高光善, 吳駿善, 崔永祚 등 벗들에게 보낸 편지와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다. 권3은 序, 권4는 記․說․跋․傳, 권5는 祭文․上樑文․行狀․墓文, 권6은 부록이 실려 있다. 「石陰說」을 읽어보면 그의 호 ‘석음’이 의미가 몇 번 변했음을 알 수 있는데, 寸陰을 아낀다는 뜻의 惜陰을 쓰기도 하고, 저녁이 되면 悔한다는 의미를 가진 夕陰을 쓰기도 하였으며, 결국엔 瑞石山을 의미하는 石자를 써서 石陰으로 호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작품 중 주목할 것은 「辨田艮齋猥筆辨」이나 「辨田艮齋納凉私議疑目」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승인 기정진의 理氣論이 師承의 구애를 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전개되어, 기호학파에 속하면서도 다소 다른 점이 있자, 이에 田愚가 『猥筆辨』·『納凉私議辨』을 지어 기정진의 사상을 비판하여 사상계에 큰 논의를 일으켰다. 그러자 제자들도 그것에 대한 변론을 하였는데, 박노술도 그중 한 사람이다. 『石陰遺稿』는 1989년 전라남도에서 향토문화연구자료 제29집으로 영인․간행하였다. 기정진의 제자로서, 스승과 제자들의 사상을 알 수 있는 글 등이 수록되어 있어서 당시 호남 학자들의 동향과 사상을 파악할 수 있다.
    2020-08-03 | NO.17
  • 박상(朴祥)의 『눌재선생집(訥齋先生集)』
    『訥齋先生集』은 16권 7책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문집이다. 본집에는 먼저 범례와 서문 등이 있고, 권1에 부 3편, 오언고시 16수, 권2에는 칠언고시 18수, 권3~7까지는 근체시 305수 등이 수록되어 있다.또한 속집 권1~3까지는 시 292수, 제문 1편, 권4에는 序 3편, 기 2편, 발 2편, 제문 1편 등이 있으며, 별집에는 부 9편, 시 9수, 碑辭 3편 등이, 부록에는 권1에 행장, 권2에 「請復故妃愼氏疏」 등이 모아져 있다. 또한 마지막으로 부집 권1과 2에서는 박상 형제들의 시문을 모아두었다. 『눌재선생집』은 그동안 한문학에서 지대한 관심을 보여왔다. 그만큼 박상의 문학적 성과가 우수하며, 당시 문단에 끼친 그의 영향이 지대했기 때문이다. 박상이 살았던 당시 문단은 송시풍에서 唐詩風으로 변모해가던 때로 그가 문단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이런 점에서 박상에 대한 연구는 지속적으로 있어왔고, 앞으로 깊이 있는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2020-08-02 | NO.16
  • 박정휴(朴鼎休)의 『둔고집(芚皐集)』
    『芚皐集』은 朴鼎休(1805~1865)의 시문집으로 1913년 박정휴의 손자인 朴用柱 등에 의해 18권 9책의 목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권말에 고동주(高東柱)와 손자 박용주의 발문이 있다.박용주는 16세기 중엽 호남사림의 대표적이니 인물인 눌재 박상의 후예로서 송준길의 후손인 금곡 송래희의 문인이 되었던 인물이다.권1은 시 303수, 부 1편, 권2∼7은 서(書) 206편, 권8은 잡저로 서(序) 1편, 기 2편, 명 2편, 잠 2편, 사(辭) 3편, 소 4편, 발 1편, 권9는 제문 1편, 묘갈 1편, 행장 3편, 권10∼12는 경의집요(經義輯要) 상·중·하, 권13은 심경분류집략(心經分類輯略), 권14∼16은 가례정전집해(家禮正傳集解) 상·중·하, 권17은 상제례기견(喪祭禮記見), 권18은 부록으로 제문·행장·묘지명·만, 별책 부록 1권으로 아들 원홍(源弘)의 유고인 『서서유고(瑞西遺稿)』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시는 대부분 이학(理學)의 요체와 의의를 천명하고, 선현(先賢)과 사우(師友), 그리고 말년에 『대학』·『심경(心經)』 등을 강론하며 지은 것이다. 「성(性)」·「이(理)」·「이기음(理氣吟)」 등은 이학의 요체를, 「치지격물물격지지(致知格物物格知至)」·「신독(愼獨)」·「혈구음(絜矩吟)」·「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부동심(不動心)」 등은 경전의 문구를 그대로 시제(詩題)로 하여 그 의의를 밝히고 있다.「행향음례계지이운(行鄕飮禮繼之以韻)」은 59세 때 동곡에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한 뒤 지은 것이다. 「몽배선생행향음례미반이오부위지지(夢陪先生行鄕飮禮未半而寤賦爲之識)」는 꿈속에서 스승 송내희(宋來熙)를 모시고 향음주례를 행하다가 깬 뒤 지은 것이다.문장은 선진풍(先秦風)의 문체로 서(書)가 대부분이다. 그 중에서도 송내희와 주고받은 것이 많으며, 이학에 관한 문답체가 다수이다.「오행명(五行銘)」·「직재잠(直齋箴)」 등 잠명류는 존양성찰(存養省察)하는 선비로서의 도학자적 풍모와 법도가 보인다. 「경의집요」·「심경분류집략」·「가례정전집해」 등은 경전과 『심경』, 그리고 『가례』 등에 관한 해박한 식견이 체계적으로 정리, 표현된 문장이다. 그는 송래희의 문인들의 결집체인 관선계의 계장을 역임할 정도로 송래희와 그의 문인들의 존중을 받았으며, 경학과 성리학, 예학에 뛰어나서 서간문이나 독립된 저서로 관련 글을 많이 남겼는데, 『芚皐集』에 대부분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芚皐集』은 박용주를 비롯한 송래희의 경학이나 성리철학, 호남지방 사림들의 정치적 경향이나 학문 수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2020-08-02 | NO.15
  • 박치화의 주곡유고舟谷遺稿
    박치화의 주곡유고舟谷遺稿주곡(舟谷) 박치화(朴致和)의 박명사(博命辭)와 망미인사(望美人辭)주곡공(舟谷公)이 칩거하며 지은 박명사(博命辭)와 망미인사(望美人辭)가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전하니, 이를 소개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박명사(博命辭)와 망미인사(望美人辭)는 박종우(朴鍾宇) 역 ‘국역 주곡유고(舟谷遺稿)’에 원문이 실려 있으나 너무 길어서, 여기에서는 장흥 후인 고재붕이 쓴 주곡행장에 간추려 실린 일부를 소개한다. 박명사(博命辭)顧素心之不阿兮(고소심지불아혜) 돌아보건대 본디 아부하는 마음이 없어故俯仰而無怍(고부앙이무작) 짐짓 우러러보고 굽어보아도 부끄러움 없네.名連登於解額兮(명연등어해액혜) 이름은 해액(解額)에 오르고聲大譟于騷壘(성대조우소루) 명성은 문단에서 크게 드날렸도다.從伯氏而頡頑兮(종백씨이힐완혜) 백씨(伯氏)를 좇아 서로 겨루며步雁塔而踵武(보안탑이종무) 안탑(雁塔)을 밟고 따라다녔네.心無倦於樂善兮(심무권어낙선혜) 마음이 선행을 즐기는 데 게으름이 없었고,服忠信而制行(복충신이제행) 충신을 품에 두고 행실을 바르게 하였네.任經訓之菑畬兮(임경훈지치여혜) 경훈(經訓)을 치여(菑畬)로 삼았는데,怕兀兀以窮年(파올올이궁년) 어찌하여 평생토록 위태롭기만 하느뇨.*해액(解額) : 향시(鄕試) *백씨(伯氏) : 상사(上舍) 백미공(白眉公) *안탑(雁塔) : 과거 급제* 경훈(經訓) : 경서의 뜻풀이 *치여(蓄審) : 글공부의 비유망미인사(望美人辭)表獨立乎船之中兮(표독립호선지중혜) 나 홀로 배 가운데 우뚝 서서搴芙蓉兮徒延佇(건부용혜도연저) 연꽃을 들고 우두커니 서있네.北極遠以雲深兮(북극원이운심혜) 북쪽 끝 멀리 구름이 깊은지라恐玉顏之不可覩(공옥안지불가도) 옥안을 뵐 수 없을까 근심하네.期黃昏之已違兮(기황혼지이위혜) 황혼(黃昏)의 기약은 벌써 어긋났고,惜中塗而改路(석중도이개로) 중도에 길 바꿈이 애석하도다.顧余情其信芳兮(고여정기신방혜) 돌아보건대 내 마음은 정녕 꽃다우니苟得列乎下陳(구득렬호하진) 실로 아래 사람들 줄지어 따르네.水有芷兮山有桂(수유지혜산유계) 강에 지초(芝草)가 있고 산에 계수나무 있는데懷佳人兮不可忘(회가인혜불가망) 고운 사람 생각하니 잊을 수 없도다.​*지초(芝草) : 지칫과에 속한 여러해살이풀
    2020-08-08 | NO.14
  • 삼우당유고 三友堂遺稿
    광산 출신의 삼우당 이제백의 <삼우당유고三友堂遺稿>가 있다. 노사 기정진 선생이 삼우당유고 서문을 써주었다. 蘆沙先生文集 卷28에 실린 서문은 다음과 같다. 情竅旣開。冰炭相攻。百年之內。好襟懷鮮一日有焉。幸而有之。則自外來而有不可必者三焉。曰時也地也人也。三者一有不遇。則襟懷蓄而不洩。終焉汩沒而已矣。若三友公之當日酬唱。可謂內有襟懷。外得其所遇者也。謹按公諱齊白。姓李氏。光山望族。文詞夙就。而無希世進取意。好遯考槃。以忠信篤敬自持。行之旣久。鄕黨服其行義。士友許其志操。顧其胷中所樂。公未嘗自語。世亦莫得以知也。蓋人之所腴。公之所淡。人之所淡。公之所腴。以此言之。公之百年。盡襟懷中日月歟。嘗與石柏梅三物。結無情遊。堂名三友。蓋取諸此。遠近多和其原韻者。又與執友韻士。酣暢山水。載唱載和。隨手成軸。摠之爲一小卷。子孫或有以平生文字散軼。未克合編爲慊者。正鎭曰。唯唯否否。公之爲公。不在於詞。苟公之襟懷托此而傳。雖多又奚以加焉。俾正鎭泚筆者。公之後承章銑其名。章銑固佳士。而雅淡修飭。泊於外慕。其家風爲然。公之遺敎爲未泯云。
    2020-08-10 | NO.13
  • 석문집(石門集)
    오이익(1618~1666)의 석문집(石門集)은  5권 2책으로 되어 있다. 卷首에 李景在가 지은 序와 목록이 있다. 序(李景在 撰), 跋(金炳學ㆍ奇正鎭ㆍ高時鴻ㆍ吳駿善 撰), 刊記, 吳恒圭行錄(吳駿善 撰, 後石遺稿 卷21) 등이다. 7대손 吳恒圭(1824~1872)가 가장초고를 바탕으로 수집하여 刪定 編次하고 李景在의 서문을 받고는 재원을 마련해서 匠人을 고용하여 印役을 시작하였으나 미처 완료하지 못한 채 죽었다. 이어 7대손 吳元圭가 鼓山 任憲晦(1811~1876)에게 부탁하여 1873년 행장을 받고 1874년에는 저자의 外裔 高時鴻에게 발문을 받았다. 이후, 오항규의 아들 8대손 吳駿善(1851~1931)이 부친의 뒤를 이어 계속 진행하여 인행 사업을 완료한 것으로 보이며, 1874년 3월 羅州 道林講堂에서 활자로 인행하였다. 《초간본》 이 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421), 규장각(古3428-668), 장서각(D3B-1320), 성균관대학교 존경각(D3B-506) 등에 소장되어 있다.저본은 저자의 7대손 오항규ㆍ오원규, 8대손 오준선 등이 1874년에 활자로 인행한 초간본으로 규장각장본이다. 영인저본 중 권4의 板次 ‘二十一ㆍ二十二’와 遺墨의 板次 ‘一’이 重複되어 있다. 권1~3의 앞부분은 詩(339題)이다. 권1은 五言絶句 50題, 五言四律 53題, 五言排律 18題이고, 권2는 七言絶句 164題이며, 권3의 앞부분은 七言四律 47題, 七言古詩 7題로 詩體別 분류를 해 놓았다. 편목의 각주에 간혹 石門錄, 離騷錄, 庚子錄, 箕城錄 등을 달아 놓은 것으로 보아 시 초고는 미리 정리되어 있었던 듯하다. 오언사율의 〈戊戌十月十七承拿命曉發長城〉과 〈卄六入京翌日就理又翌日決配井邑留別安孔明〉은 1658년 한양으로 잡혀 갈 때와 정읍으로 귀양이 결정되고 나서의 소회를 읽을 수 있고, 칠언절구의 〈感懷詩〉는 효종 승하 시 유배지에서 지은 10수의 시로 憂國忠君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으며, 〈送兒尤庵丈席〉은 학업을 위해 아들 吳朋錫을 尤庵 宋時烈에게 보내며 지어준 시이다.권3의 뒷부분은 賦(4), 頌(1), 箋文(1), 序(2)이다. 부 가운데 〈拊几作箴賦〉는 저자가 19세 때 지은 것으로 相公과 小子의 대화체 형식을 빌려 출사하지 않고 은거하는 이유를 읊고 있고, 〈仁義半載賦〉는 1646년 진사시 때 지은 것이며, 〈衣錦尙絅賦〉는 東堂試 때 지은 것이다. 서 중 〈千里面目序〉는 1650년 여름 성균관에서 함께 일하며 몇 개월을 보낸 崔尙虎, 安峑, 吳以翼, 高斗紀, 朴重輝, 韓養吾 등 6명이 8월 초 社稷署에서 다시 만나 성명, 나이, 거주지를 적은 小帖 6부를 나누어 가졌는데, 그 경위를 기록한 것으로 최상호의 跋文과 同苦錄이 뒤에 붙어 있다.권4는 疏(4), 雜著(8), 祭文(5), 墓誌銘(1), 書(8)이다. 소 중 〈時弊疏〉는 효종 승하 후 새로 즉위한 현종에게 올린 상소로 호남 지역 賦役의 폐해를 지적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제시하며 이를 바로잡아 줄 것을 요청한 것이고, 〈河西先生請額疏〉는 河西 金麟厚를 모신 祠宇에 사액을 청하는 상소이며, 〈德山書院請額疏〉는 유생들을 대신하여 지은 것으로 訥齋 朴祥을 제향한 덕산서원의 사액을 청하는 상소이다. 잡저 가운데 〈至樂堂記〉는 저자가 石門洞에 精舍를 짓고 당호를 ‘지락당’이라 한 내력을 설명한 것이고, 〈書九友堂記後〉는 친우 柳東淵이 南磵에 구우당을 짓고 梅, 柳, 楓, 菊, 松, 竹, 碧梧, 碧桃, 사계절 꽃을 벗으로 삼겠다며 당호를 붙인 이유를 설명한 기문를 읽고 지은 書後이며, 〈謾說〉은 詩 作法에 대한 것으로 절차탁마의 노력뿐만 아니라 올바른 방법을 찾아 그 요체를 알아 힘쓰는 것이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제문은 柳東淑, 柳泰翊, 吳俊臣 등에 대한 것이고, 묘지명은 20여 년 교유했던 李滾에 대한 것이며, 서는 전라도 관찰사 趙龜錫, 朴增輝, 林㙔 등에게 보낸 것으로 주로 안부편지이다.권5는 附錄이다. 三淵 金昌翕이 지은 묘갈명, 任憲晦가 1873년에 지은 행장, 東湖 朴鼎元을 제향한 箕山祠에 저자를 배향할 때 지은 撰者 미상의 奉安祝文ㆍ兩丁祝文, 金聲五와 鄭涖가 지은 제문, 행장에 수록되지 않은 저자의 행적을 따로 정리한 實記가 실려 있다.卷末에 지은 연도가 기록되지 않은 金炳學의 跋, 奇正鎭ㆍ外裔 高時鴻ㆍ8대손 吳駿善이 1874년에 지은 跋과 “崇禎紀元後五甲戌季春道林講堂新刊”이라는 刊記가 있고 이어 遺墨이 실려 있다. 광해군 10 1618 무오 萬曆 46 1 1월 16일, 昌平 后山里에서 태어나다. 광해군 12 1620 경신 泰昌 1 3 羅州 道林의 季父 吳希有의 양자가 되다. 광해군 14 1622 임술 泰昌 2 5 5월, 부친상을 당하다. 인조 1 1623 계해 泰昌 3 6 11월, 생부상을 당하다. 인조 14 1636 병자 崇禎 9 19 12월, 장남 吳朋錫이 태어나다. 인조 24 1646 병술 順治 3 29 5월, 차남 吳玄錫이 태어나다. ○ 사마시에 합격하다. 효종 3 1652 임진 順治 9 35 增廣 文科에 丙科로 합격하다. ○ 승문원 정자가 되다. 효종 4 1653 계사 順治 10 36 윤7월, 주서가 되다. ○ 10월, 생모상을 당하다. 효종 7 1656 병신 順治 13 39 3월, 주서가 되다. ○ 10월, 전적이 되다. ○ 11월, 예조 좌랑이 되다. ○ 12월, 병조좌랑 겸 지제교가 되다. 효종 8 1657 정유 順治 14 40 2월, 모친 봉양을 위하여 咸平 縣監이 되다. 효종 9 1658 무술 順治 15 41 5월, 濫率衙眷한 죄로 파직되다. ○ 10월, 함평 현감 재직 시 송사를 벌이려다 도리어 刑杖을 받은 사람이 무고하여 楚山(井邑)으로 유배되다. 효종 10 1659 기해 順治 16 42 효종이 승하하자 〈感懷詩〉를 짓다. 현종 7 1666 병오 康熙 5 49 3월 7일, 졸하다. ○ 5월, 同福 先塋에 장사 지내다. ~ - ~ ~ ~ - ~ 咸平 箕山祠에 배향되다. 고종 10 1873 계유 同治 12 - 鼓山 任憲晦가 행장을 짓다. 고종 11 1874 갑술 同治 13 - 7대손 吳恒圭ㆍ吳元圭, 8대손 吳駿善 등이 활자로 문집을 인행하다. 石門集卷之四 / 疏 / 德山書院請額疏 代儒生作伏以國家右文興化。象賢崇德。夐出前古。至於近代。尤有大焉。凡賢臣立祠。賢祠賜號。一從士林公議。有號卽居。靡言不從。此是千古美事。三代以下。未有此擧。此臣等之所以裹足千里。仰瀆天聽者也。臣等伏見故牧使臣朴祥。中廟朝名臣也。生而神氣英爽。長而聰明過人。量峻心直。有壁立千仞底氣像也。持身則整肅而準繩有截。處心則莊栗而言笑不妄。溫然於接物。凜然於臨事。立朝則犯顔敢言。不訐不諱。勁直之言。秋霜也烈日也。正戚里越資之罪。陳中壼防微之道。風霜竄逐。屢阽危亡。而終不少撓。其天資之高。學力之深。槩可想矣。其三寸侄子故右議政朴淳。自齠齕已爲揖讓周旋之容。長而受業於先正臣徐敬德。得聞性理之說。精深透悟。人莫之及。貶議林百齡之諡。擧正尹元衡之罪。選六行之士。復枉死之官。先正臣李滉稱以泂如一條淸氷。神氣頓爽。先正臣奇大升亦言剖析精微。明辨剴切。其學問之功。造詣之極。從可知矣。是以宣廟奬之以松筠節操。水月精神。詔使稱之以宋人物唐詩調。其他所守之確。見道之高。雜出於諸賢之記。不暇臣等之一二談也。名世之士。五百年乃出。而詭論之士。猶以爲朝暮遇之。今一家之間。叔姪趾美。雖顯晦不同。施設有殊。而其高節卲德。輝耀一世。蔚然爲邦家之光。豈不偉歟。數十年前。因一道多士之公議。告于本道方伯。立祠於所居光州地。同堂幷享。歲歲俎豆之。獨不遑銜章籲呼。名賢祠宇。未蒙華額之賜。致國家崇奬之道未弘。使儒林尊奉之意有闕。此臣等之罪也。臣等之過也。抑臣等竊伏惟念朴祥。立朝未久。遊䆠亦小。雖無諸處立祠之事。而獨其德業傳於儒林。氣節載於國乘。朴淳則仁廟旣許立祠於永平。孝考又許刱院於羅州。二聖盛德。實非偶然。朴祥朴淳。幷美匹休。各有深德。難可甲乙。若使二聖得聞朴祥之風。則其必與朴淳同許者明矣。崇賢造士。爲國急務。奬一勸百。王政所先。伏願殿下追念二聖之意。深惟勸誘之道。特許賜額之請。以慰多士之心。則其有補於國家右文之化。豈淺淺也哉。臣等不勝惶悚屛營之至。謹昧死以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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