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정희 宋正熙 철종 14년(1863) 3월 15일∼고종 2년(1865) 6월송정희(1802∼1881)의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자는 문오(⽂吾), 호는 풍야(豊埜)이다. 아버지는 판관 송계근(宋啓根)이고 이조참판에 추증된 송계락(宋啓樂)에게 입양되었다. 1834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1836년 영릉창봉, 1837년 가례도감 감조관·
[제21회 전국 애송시 낭송대회 본선 경연 진행]“시를 통해 감성을 일깨워 마음을 표현하는 감동의 현장.”18일 광주 빛고을국악전수관에서 열린 전국 애송시 낭송대회에서 ‘박정대 시인의 아무르 강가에서’를 낭송한 김선묵 낭송가가 대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광주광역시 서구청과 서구문화원이 주최·주관하고 한국문화원연
호남계록(湖南啓錄)○고종(高宗) / 고종(高宗) 23년(1886)정월 13일 승정원 개탁매년 봄 맹월(孟月 1월)에 동반(東班 문반(文班)) 3품 이상 서반(西班 무반(武班)) 2품 이상은 각각 수령과 변장에 합당한 사람을 천거하되 모두 세 사람을 넘을 수 없다고 법전에 실려 있습니다. 신이 천거하는 수령과 변장의 천거 단자 각 1건
저녁에 양사형ㆍ최상중(崔尙重)과 함께 문장을 논하며 이야기를 좀 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파했다. 양사형은 말하기를, “광주의 정즐(鄭隲)과 장성의 정운룡(鄭雲龍)이 모두 기고봉(奇高峯)의 제자인데, 지조와 행실이 취할 만한 사람입니다.”1519년(중종14) 생원시에 합격하고, 1525년(중종20) <가정기묘식사마방목(嘉靖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논(論)을 씀1. 머리말이 책은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1527~1572)의 문집과 저술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4책으로 출판한 것이다. 《고봉집(高峯集)》은 1989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국역하여 펴낸 바 있다. 1970년에 간행된 석인본을 대본으로 한 기왕의 국역서
1. 저자기대승(奇大升) : 정해년(1527, 중종22)~임신년(1572, 선조5).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ㆍ존재(存齋)이며, 본관은 행주(幸州)이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2. 가계3. 행력중종 22년(정해 1527년, 1세) ◦ 11월 18일, 광주(光州) 소고룡리(召古龍里) 송현동(松峴洞)에서 태어나다.중종 28년(계사 1533년, 7세)
세종(世宗) 가정(嘉靖) 6년 중종대왕(中宗大王) 22년○ 정해(1527) 11월 18일 임진 갑진시(甲辰時)에 선생은 광주(光州) 소고룡리(召古龍里) 송현동(松峴洞) 집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행주(幸州)이니, 지금의 고양군(高陽郡)이다. 대대로 서울에 살았다. 물재(勿齋) 선생 기진(奇進)이 아우 준(遵)과 함께 유학(遊學)
광주에서 열린 제18회 전국애송시낭송대회에서 영예의 대상에 경기도 화성의 남상구씨, 금상에는 전남 해남의 노강자씨가 각각 수상했다.제18회 전국애송시낭송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남상구씨의 낭송 모습최근 빛고을국악전수관 공연장에서 광주광역시 서구청, 한국문화원연합회, 광주광역시 문인협회가 후원하고 광주광역
사헌부가 신한을 파하여 죄줄 것과 정희문ㆍ조연을 체직할 것을 아뢰다 - 중종 32년 정유(1537) 7월 7일(갑신) 헌부가 아뢰었다.“사도시 첨정(司䆃寺僉正) 신한(申瀚)이 전에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있을 적에, 나주 목사(羅州牧使) 봉사종(奉嗣宗)이 광주에 사는 백정(白丁)
충훈부 당상 신숙주 등이 정미수를 파직할 것을 청하다 - 성종 4년 계사(1473) 5월 2일(임진) 충훈부 당상(忠勳府堂上) 신숙주(申叔舟) 등이 와서 아뢰기를,“신 등이 어제 정미수(鄭眉壽)에게 관직을 제수하는 것이 미편(未便)하다는 일을 가지고 아뢰었으나, 유윤(兪允)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신 등은 생각하건대 성상(
광주 서구문화원(원장 정인서) 문화교실에서 문예창작반을 다닌 수강생이 최근 동서문학상 금상을 수상해 관심을 끌고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지난 3년간 문예창작반 수업을 들으며 시를 습작해온 최경심(66)씨. 2020년 제15회 삶의 향기 동서문학상에 ‘얼룩말 나비와 아버지’라는 작품으로 금상을 수상했다. 이번 동서문학
정단(正壇) 32인 - 홍재전서 제60권 / 잡저(雜著) 7 : 정조대왕(正祖大王, 1752~1800) 사판(祠版)에는 ‘충신지신(忠臣之神)’이라고 쓰고, 제사의 의식은 축문이 있으며 - 축문은 본릉의 한식절 수향(受香) 때 같이 싸 가지고 감 -, 제품(祭品)은 밥 한 주발, 소탕(素湯) 한 대접, 나물과 과일 각 한 소반, 술 한 잔이고, 제
광주(光州)의 고경민(高敬民) - 해상록(海上錄) 제1권 : 사인(士人) 정희득(鄭希得, 1575~1640)의 피로 기록(被虜記錄) 8월 5일 임자경(林子敬)의 편지를 받았다. 자경은 이름이 득제(得悌)로 나주(羅州) 사람이다. 창원(昌原)에 있을 때 배 위에서 잠시 얼굴을 마주하고 헤어졌는데, 임군이 왜국 경도(京都)에 있으면서 인
조선시대 선비들이 붓으로 직접 필사하여 문집을 간행했던 것처럼 72편의 시를 붓으로 직접 쓰고 각 시마다 어울리는 회화를 덧붙인 육필시화집이 시와사람에서 발간되어 눈길을 끈다.우리에게 <장미원>, <밑불>, <배중손 생각> 등으로 널리 알려진 김종 시인의 육필시화집 《독도우체통》이 시와 사람에
光州의 3·1運動 광주지방에는 개화기 때부터 예수교가 들어와 있었고, 1903(光武 7)년에는 금동(錦洞)교회가 설립되었으며, 1908(隆熙 2)년에는 숭일학교가 개교되었다. 뒤이어 수피아여학교와 제중(濟衆)의원 등 교회사회기관의 설립으로, 사회발전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신문화의 영향으로 3·1운동이 일어날 무렵에
고경명의 후손으로 전남 담양군 창평면 정곡리에 살고 있던 고재붕(高在鵬, 1869~1936)의 유서석기(遊瑞石記)에 초연루(超然樓)가 등장한다.유서석기는 그의 나이 27세 때인 1895년 4월 여름에 정자앙(子仰 鄭海隣)과 함께 서석산을 오른 뒤에 슨 글이다. 이 글에는 원효암에서 김안중(金晏仲), 고경좌(高敬佐) · 김선명(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