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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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조번방지 2(再造藩邦志 二) - 화은(華隱) 신경(申炅1623~1653)

재조번방지 2(再造藩邦志 二) - 화은(華隱) 신경(申炅1623~1653)

이때에 각 도의 군사들이 여기저기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경기도에서는 본도 감사인 심대(沈岱)ㆍ전 사간 우성전(禹性傳)ㆍ전 정언 정숙하(鄭淑夏)ㆍ수원인(水原人) 최흘(崔屹)ㆍ고양인(高陽人) 이노(李魯)와 이산휘(李山輝)ㆍ전 목사 남언경(南彦經)ㆍ유학 김탁(金琢)ㆍ충의위 이일(李軼)ㆍ서얼 홍계남(洪季男)ㆍ선비 왕옥(王玉) 등이, 충청도에서는 전 제독관 조헌(趙憲)ㆍ중 영규(靈圭)ㆍ전 청주 목사 김홍민(金弘敏)ㆍ서얼 이산겸(李山謙)ㆍ선비 박춘무(朴春茂)ㆍ충주인(忠州人) 조덕공(趙德恭)ㆍ충의위(忠義衛) 조웅(趙熊)ㆍ보령 현감(保寧縣監) 이의정(李義精)ㆍ해미 현감(海美縣監) 정명세(鄭名世)ㆍ옥천 군수(沃川郡守) 권희인(權希仁) 등이, 전라도에서는 전 판결사 김천일(金千鎰)ㆍ첨지(僉知) 고경명(高敬命)ㆍ전 영해 부사(寧海府使) 최경회(崔慶會)ㆍ절도사 최원(崔遠)ㆍ선비 양산숙(梁山璹)ㆍ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ㆍ중 처영(處英)ㆍ좌수사 이순신(李舜臣)ㆍ우수사(右水使) 이억기(李億祺)ㆍ김제 군수(金堤郡守) 정담(鄭湛)ㆍ해남 현감(海南縣監) 변응정(邊應井) 등이, 경상도에서는 진보 현령(眞寶縣令) 임계영(任啓英)ㆍ현풍인(玄風人) 곽재우(郭再祐)ㆍ고령인(高靈人) 전 좌랑 김면(金沔)ㆍ합천인(陜川人) 전 장령 정인홍(鄭仁弘)ㆍ예안인(禮安人) 전 한림 김해(金垓)ㆍ교서관 정자 유종개(柳宗介)ㆍ초계(草溪) 선비 김대기(金大期)ㆍ군위(軍威) 교생 장사진(張士珍)ㆍ훈련원 봉사 권응수(權應銖)와 정대임(鄭大任)ㆍ본도 병사 박진(朴晋)ㆍ진주 판관 김시민(金時敏) 등이, 강원도에서는 조방장(助防將) 원호(元豪)ㆍ중 유정(惟政) 등이, 황해도에서는 제도초토사(諸道招討使) 이정암(李廷馣)ㆍ중화인(中和人) 김진수(金進壽)ㆍ황주인(黃州人) 황하수(黃河水)와 윤담(尹耼)ㆍ봉산인(鳳山人) 김만수(金萬銖)가, 평안도에서는 전 도사(都事) 조호익(曺好益)ㆍ종실 호성도정(湖城都正)ㆍ중 휴정(休靜) 등이 일어나서 혹은 의병이 되어 순절하고 혹은 고단한 군사로 적에게 대항하기도 하였다.


○ 심대(沈岱)는 본관은 청송(靑松), 자(字)는 공망(公望)인데, 사람됨이 강개하였다. 난리가 일어나자 항상 분히 여기며 사명을 띠고 출입함에 있어 평탄하고 험한 것을 피하지 아니하였다. 감사 권징(權徵)이 갈려가자 자청하여 대임이 되어, 순행할 때마다 먼저 공문을 평시와 같이 보내고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순행하여 조금도 적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다. 군사를 모아 스스로 영솔하고 서울을 수복하고자 전진한다고 외쳤다. 매일 사람을 성중에 보내어 군사를 모집해서 내응할 것을 약속하니, 성안 사람들이 난리가 평정된 뒤에 적에게 붙었다는 죄를 받을까 염려하여 연명으로 서장(書狀)을 만들어 심대의 군영 앞에 나아가 자진하여 안에서 내응하겠노라고 말하는 자가 하루에도 수백 수천 명이었다. 그들은 명목을, ‘약속을 듣기 위해서 왔다’ ‘군기를 수송한다’ ‘적의 정세를 보고한다’ 하고, 왕래가 줄을 이어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적군의 눈과 귀가 되어 우리의 동정을 살피는 자도 끼어 들었는데, 심대는 전혀 의심하지 않고 믿었었다. 하루는 삭녕군(朔寧郡)에서 군사를 점검하고 있는데 적이 이를 염탐하고 밤에 몰래 대탄(大灘)을 건너서 어둠을 타고 습격해 왔다. 심대가 놀라 일어나서 급히 피하였으나 적이 쫓아가 죽이었는데, 군관으로서 장(張)씨 성을 가진 사람이 심대를 몸으로 가리고 싸우다가 죽고 적은 이윽고 본진으로 돌아갔다. 경기 사람들이 그의 시체를 거두어 산속에 묻었는데, 뒤에 적이 심씨 집의 종으로 가장하고 머리를 풀고 곡을 하며 자기 주인 시체의 소재를 묻고 다니므로, 고을 사람들이 참으로 심씨 집 사람으로 여기고 무덤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더니, 적이 무덤을 파내어 시체의 머리를 베어 종루 거리에 걸어 두었는데, 50~60일이 되어도 얼굴빛이 생시와 같았다. 서울 사람들이 그 충의를 슬퍼하여 서로 재물을 거두어 지키고 있는 왜인에게 뇌물을 주고 걸어놓은 머리를 빼내어 급히 강화도로 보냈다가 적이 물러간 뒤에 시체와 함께 고향의 산에 돌아와 장사를 지냈다. 조정에서는 벼슬을 추증하고, 아들 대복(大復)은 음직으로 현감에 이르렀다.


○ 이산휘(李山輝)는 재치있게 대응하는 지혜가 있어 계략을 써서 적을 많이 사로잡았다. 하루는 도성 안의 적이 도성 밖으로 흩어져 나와 약탈을 하였다. 정토사(淨土寺)는 성의 서쪽으로 20리 떨어져 있는데 4명의 적이 절에 들어왔다. 이산휘는 중들과 서로 이리이리 하자고 약속을 하니, 중들이 다 승낙하였다. 그래서 4명의 왜적을 맞이하여 흔연히 법당에 끌어들여 자리를 펴서 앉힌 다음 급히 밥을 지었다. 왜적들은 후히 대접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의심치 아니하였다. 밥이 다 되어 중은 밥상을 공손히 바치고 노승 한 사람이 주인 자리에 앉아 왜적에게 먹기를 권하고 식사가 끝난 다음에 더운 물을 가져오도록 불렀다. 이때에 다른 중들은 이미 물을 펄펄 끓여 기다리던 참이라 4명의 중이 큰 바가지에 가득 담아서 들어오니, 왜적이 각기 자기 밥주발을 가지고 쳐다보고 물을 받으려 하였다. 여러 중들이 일시에 끓인 물을 얼굴에 급히 쏟으니, 적은 모두 땅에 엎어졌다. 여러 중들이 나무 몽둥이로 때려 죽여 그 머리를 베고, 시체는 끌어다가 절 뒤에 묻었는데, 그 눈을 보니 눈알이 모두 익었다. 이것은 비록 작은 지혜이지만, 임기응변은 이와 같았다.


○ 홍계남(洪季男)은 가장 용감하고 싸움을 잘하였는데, 단기(單騎)로 만군(萬軍) 속으로 달려들어가 적의 목을 베기를 마치 공을 던지듯이 하니, 천안(天安)과 안성(安城)의 경내에는 적이 감히 들어가지를 못하였다.


○ 조헌(趙憲)은 일찍이 서울에서 옥천(沃川)으로 물러나와 있었는데, 매양 조정에서 자신의 책략을 써주지 않기 때문에 울분으로 병이 되어 미친 듯이 바보같기도 하였다. 하루는 속리산에 놀러 갔었는데, 자리에 누워 슬피 울며 아침에 밥상을 들여도 먹지 않으므로, 중이 이상하게 여겨 까닭을 물어도 대답을 아니하였다. 뒷날에야 중 현지(玄智)에게 말하기를,


“전에 밤에 별의 변괴가 매우 심하여 시사(時事)를 알 수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하고서, 목놓아 통곡하니, 절의 중들이 모두 미치광이라고 생각하였다. 또 일찍이 대둔산(大芚山)에 놀러 갔었는데, 한 달 남짓 있으면서 독서는 일삼지 아니하고 매일 산골짜기에 가서 높이 올라 먼 곳을 바라보거나, 풀을 깔고 시냇가에 앉는 것이 일이었으니, 대개 마음속의 근심 걱정을 잊고자 한 것이요, 경치를 구경하며 날을 보내는 데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신이 떨어지면 자기 손으로 짚신을 삼아서 신고 중에게 빌리지 아니하였다. 보통 말을 하면서도 탄식하는 소리가 끊일 새 없었고, 밥상을 대할 적에도 때로는 수저를 내던지며 탄식을 마지 않으므로 중들은 그 뜻을 알아차리지를 못하였다. 하루는 중과 마주 앉아 식사를 하는데 조헌은 먼저 몇 숟가락을 뜬 다음 나머지를 네 사람 중에게 밀어주며 말하기를,


“명년에 반드시 왜란이 있어 내가 의병을 일으켜 근왕할 것이니, 오늘 이 밥을 같이 나누어 먹은 사람은 내가 기병하였다는 말을 들으면 곧 찾아와서 나와 죽음을 같이 하자.”


하니, 중들이 그 말을 이상하게 들으면서 거짓으로 그렇게 하겠노라고 승낙을 하였다. 그뒤 늘 기와와 돌을 밥광주리에 담아서 아내에게 날마다 산언덕을 오르내리게 하였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면,


“내가 이런 고생을 미리 익히려는 것은 나중에 피란을 하기 위해서이다.”


하였다.


신묘년(1591 선조 24) 가을 7월 7일에 조헌이 금산 군수(錦山郡守) 김현성(金玄成)을 찾아가서 영벽루(暎碧樓)에 올랐는데, 선비 박정로(朴廷老)가 그 자리에 있었다. 미시에서 신시 사이에, 홀연히 붉은 기운이 동방으로부터 일어나 세 갈래로 갈라져서, 한 줄기는 북쪽으로 향하여 하늘 끝까지 뻗치고, 한 줄기는 서쪽으로 향하여 길이가 하늘 반쯤에 달하고, 한 줄기는 남쪽으로 또 하늘 반쯤까지 뻗치었는데, 그 빛이 지상에까지 비치었다. 조헌이 살펴보고 이정로(李廷老)에게 말하기를,


“수길(秀吉)의 군사가 이미 움직이고 있으니, 명년 봄에는 반드시 이 붉은 기운처럼 대거 침략해 올 것이다. 나는 장차 모친을 모시고 공주(公州)로 피란할 터이니, 그대도 나를 따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 해 3월에 조헌은 옥천(沃川)으로부터 김포에 있는 아버지의 무덤에 와서 성묘하고 제문을 지어 제사하면서, 난리로 영원히 이별하게 된다는 뜻을 고하였다. 친구들이 괴이하게 여기고 마음속으로 믿지 않았으나 시험 삼아 난리가 나면 피할 만한 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조헌은,


“강화도의 마니산에 들어가면 면하게 될 듯하다.”


하였다.


4월에 그의 아내가 죽어 장사를 지내려 할 적에 친척과 손님들이 다 모였는데, 홀연히 하늘에서 천둥처럼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조헌이 크게 놀라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천고(天鼓) 소리이다. 적이 반드시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다시는 어쩔 수가 없다.”


하고 눈물을 계속 흘렸다.


이때에 이르러 호남ㆍ영남 지방에 격문을 내어 의병을 모집하니, 그의 문생인 전승업(全承業)ㆍ김절(金節) 등과 선비 장덕익(張德益)ㆍ신난수(申蘭秀)ㆍ고경우(高擎宇)ㆍ노응탁(盧應晫) 및 전 참봉(參奉) 이광륜(李光輪) 등이 조헌의 의리를 사모하여 다투어 모여들었다. 전에 대둔산(大芚山)에서 약속한 넷 중에 두 사람이 왔는데, 한 사람은 이미 죽었고 한 사람은 다리에 병이 나서 오지를 못하였다. 이에 좋은 달 좋은 날을 택하여 공주에서 군사 행동을 일으키니 정예 군사가 1천 6백이었다. 그때 왜적은 청주를 점거하고 방어사 이옥(李沃)의 군사는 무너졌다. 조헌이 정예부대를 이끌고 청주로 전진하여 곧장 성의 서문 밖을 공격하는데 승장(僧將) 영규(靈圭)와 합진하여 나갔다. 그래서 직접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종일 독전하니 적병이 크게 패하였다. 아군이 개미처럼 붙어 기어 올라가려는데 홀연히 한 줄기의 소나기가 서북쪽에서 몰려와 천지가 캄캄해지니 전사들이 추위에 떨었다. 조헌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옛 사람의 말에, ‘성패는 하늘에 달렸다.’ 하더니, 참으로 그렇구나.”


하고, 징을 울려, 조금 후퇴를 명하였다. 이날 밤에 한 여자가 적진에서 도망쳐 나와 말하기를,


“적병이 멀리 이쪽 군대의 위용을 바라보고서 모두 실색(失色)이 되어 ‘저 의병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앞으로 달려들며 꺾일 기세는 조금도 없으니 저들과 싸울 수가 없다.’ 하고, 곧 불을 피우고 깃발을 세워 군사가 지키는 것처럼 해놓고 쌓인 시체를 다 불태우고 병영을 비우고 밤에 도망하였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조헌 등이 진격하여 머무르고 방어사에게 청하여 미곡 수만 석을 곤궁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소와 말 수백 마리를 각 마을에 나누어 주어 농사를 짓게 하자고 하였으나, 이옥(李沃)이 듣지 아니하고 하는 말이,


“이미 순찰사와 의논하여 결정하였으니 이것을 남겨두었다가 적이 다시 점거할 때 쓰게 해서는 아니 된다.”


하고, 곡식을 다 태우고 가버리니, 군중에는 다만 현미 몇 곡(斛)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어찌할 계책이 없어 드디어 군사들에게 각각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추위를 막을 차비를 차리도록 하고, 결심하고 근왕하러 서쪽으로 떠났다. 온양에 이르렀을 때 금산의 왜적이 다시 기승을 부린다는 소식이 들리고, 또 순찰사와 사환이 와서 조헌에게 말하기를,


“국토가 모두 적의 수중에 떨어졌는데 오직 호서와 호남만이 병화에 빠지지 않았으니, 생각하건대, 하늘이 은밀히 그대를 도와 중흥을 이룩하고자 함이 아니겠는가?”


하니, 조헌은 자못 그렇게 여기고 공주에 돌아가 순찰사와 만났으나 의논이 또 맞지 아니하여 마음이 매우 괴로웠다. 순찰사는 다시 각 고을에 공문을 보내어,


“관군(官軍)으로서 제 마음대로 의병의 진에 참가하는 자는 처벌할 것이니, 각기 원대에 복귀하라.”


하니, 조헌의 막하에 있던 관군들이 모두 흩어지고 오직 7백 의사(義士)만이 종군을 희망하였다. 조헌이 이에 군대를 이동하여 금산(錦山)으로 향하는데, 장사(將士) 한 사람이 강력히 주장하기를,


“적이 을묘년 호남의 패전에 징계되었기 때문에 지금 금산을 점거하고 있는 자들은 모두 정예한 군졸인데다가 그 숫자가 수만이 넘는데, 어찌 우리같은 오합지졸로 당해낼 수가 있겠습니까? 마땅히 군사를 멈추고 형세를 관찰하면서 조정의 명령을 기다림이 옳겠습니다.”


하니, 조헌이 울면서 말하기를,


“군부(君父)가 지금 어디 계시는데, 감히 군사의 날래고 무딘 것을 따지겠는가. 군주가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는 것은 고금을 통해서 당연한 일이다. 나는 한번 죽는 것만 알뿐이다.”


하고, 드디어 의승(義僧) 영규(靈圭)와 연합하여 진격하였다. 또 전라 의병장 권율과 서로 날짜를 약속하고 적을 협공하기로 하였었는데, 권율이 편지를 보내어 기일을 변경하였으나 그 편지가 도착하기 전에 조헌은 이미 금산 성 밖 10리 떨어진 곳에 이르러 권율의 군사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적이 이 사실을 염탐해서 알고 몰래 군사를 출동시켜 아군이 진을 치기 전에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교대로 육박하여 왔다. 조헌은 군중에 영(令)을 내리기를,


“오늘은 오직 한 번 죽음이 있을 뿐이니, 죽고 살고 나아가고 물러감에 있어 의(義)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라.”


하니, 사졸들이 모두 명령에 복종할 뿐 아무도 감히 어기지를 못하였다. 오래도록 힘껏 싸웠는데, 적은 세 번이나 패하였다가 다시 합치고 아군의 화살이 다하자 적은 장막 안으로 몰려 들어왔다. 막하의 사졸 한 사람이 조헌을 붙들고 피하기를 청하니, 조헌이 웃으며 말하기를,


“장부가 죽을지언정 난리를 당하여 구차히 피할 수 없다.”


하고, 북채를 끌어잡고 더욱 급히 독전하니, 병사들은 모두 앞으로 달려가 맨주먹으로 서로 치면서도 오히려 열(列)을 떠나지 않고 마침내 조헌과 함께 전사하였다. 조헌의 아우 조범(趙範)이 죽음을 무릅쓰고 적중에 들어가 조헌의 시체를 찾아서 업고 옥천(沃川)으로 들어가서 나흘만에 염하였는데, 안색이 산 사람과 같고 노한 기운이 발발하여 눈을 부릅뜨고 수염이 꼿꼿이 섰으므로 그가 죽은 지 오래된 것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다.


○ 청주가 수복되기 전에 조정에서는 조헌이 기병(起兵)한 것을 듣고 다음과 같이 교서를 내려 선유하였다.


내가 밝지 못하여 물정을 살피지 못하고 충언을 알지 못하였도다. 나에게 진언(進言)하는 자들 중에 국가의 위망이 조석간에 달렸다고 하는 자가 있었는데, 내가 비록 그 말을 옳게 여기면서도 실로 깨닫지 못하였도다. 이제 우려할 것은 인심이 흩어지는 것인데, 다만 도적이나 외적만을 걱정하여, 성과 해자가 높고 깊으며 갑옷과 병장기가 튼튼하고 날카로우면 백성을 보위하고 국가를 편안히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민력(民力)을 다하여 이것만을 도모하였도다. 애써서 이룩한 성지와 갑병이 모두 적의 밑천이 되고 백성의 원망만 나에게 돌아올 줄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느냐. 종묘사직은 폐허가 되고 생령(生靈)은 다 죽었는데도 막아내지 못하였으니, 그 허물은 오로지 나에게 있도다. 오늘날 비록 천백 가지의 어려움을 겪을지라도 내 죄로 인정하고 감히 고통을 말할 수 없게 되었으니, 내 마음은 슬프도다. 다행히 천지 조종(天地祖宗)의 혼령에 힘입어 인심은 조국을 사모하고 백성은 나를 버리지 않아, 여러 곳의 충의들이 곳곳에서 적을 토벌하는데 너의 이름이 또한 그 중에 있으니, 내 심히 가상히 여기도다. 너에게 이미 봉상시 첨정을 제수하였는데 너는 알았느냐? 나의 쓰라린 마음은 전후에 내린 교서에 다 말하였거니와, 너는 나의 개과(改過)할 것을 인정하고 힘써 충의를 떨쳐 구물(舊物)을 회복하는 일에 힘쓰라. 요즘 오래 호중(湖中)의 소식을 듣지 못하니 마음이 답답하여 돌아가는 사신편에 나의 뜻을 알리고 아울러 본도의 적세(賊勢)는 어떠하며, 유진한 곳은 몇이고, 그 무리는 몇만이며, 그 기세가 전일에 비하여 어떠한지, 너와 같이 도적을 잡으려고 의병을 일으킨 자는 또 누구이며, 적의 목을 벤 전과는 얼마인지 탐지하기를 명하노라. 근래에 명 나라 군사가 강을 건너 바야흐로 적을 물리칠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가을날은 맑고 길은 건조하니 이때야말로 오랑캐를 사로잡을 때이며, 말은 살찌고 활은 굳세니 실로 적을 죽이기에 알맞은 때이로다. 철마(鐵馬)는 대정(大定)ㆍ청천(晴川)에 뻗치었고, 군함은 산동과 강절(江浙)에 줄지었으니, 죄악을 쌓아온 미친 오랑캐에게는 천벌이 마땅히 내려질 것이다. 경성과 황해도에 우리 의병 또한 많은데 계속 적을 베고 승전한 소식이 끊이지 않으며 인심이 분발하니, 이는 실로 국가 재건의 좋은 기회이로다. 너는 더욱 충성을 다하여 앞으로 나아감에 게을리 하지 말고, 인(仁)으로써 군사를 어루만지고 의(義)로써 용맹을 돋우어 기회를 보아 나아가서 만전을 기한다면 그 거룩한 일이 아니겠느냐. 본도의 전몰한 장지현(張智賢) 등 이하와 일신을 돌보지 않고 적을 토벌한 승려 처일(處一)ㆍ정억만(鄭億萬) 같은 무리에게는 이미 은상(恩賞)을 내리도록 하였으니, 너는 나의 이러한 뜻으로 그들에게 간절히 위로하라. 기묘한 계책을 많이 써서 후미를 공격하기도 하고 밤에 무찌르기도 하여,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라. 일로(一路)를 먼저 말끔히 숙청하고 와서 남군(南軍)을 도와 도성(都城)을 수복하여, 원릉(園陵)의 송백(松柏)이 뽑히지 않고, 도망간 노약자가 죽지 않게 된다면 오늘날의 으뜸되는 공로는 네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상과 관직이 나의 손에 달렸으니 산하를 두고 맹세하노라. 파천한 지 오래이나 극복할 길이 끝이 없으니, 성천(成川)의 서리와 이슬에는 종묘사직의 나부끼어 떨어짐을 민망히 여기고, 의주의 강과 늪에서는 장전(帳殿)의 쓸쓸함을 부치는도다. 고향을 생각하는 데는 귀천이 다를 것이 없으니, 돌아가고자 하는 생각이 마음속에 간절하도다. 너희들이 와서 내 수레를 맞이할 날을 발돋움하여 고대하노라. 말을 마치려 하니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나. 네가 마땅히 생각할 것이지만 지극히 슬프도다. 아! 부끄럽게도 묘당에서는 계책이 없으니 성사는 너희들의 힘에 기대하는 바이며, 어지러운 때에 충신을 알 수 있으니 공은 오늘날에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교시하니 자세히 짐작할 것으로 믿는다.


교서가 이르기 전에 조헌은 이미 죽었다. 조정에서 듣고 탄식하고 슬퍼하여 가선대부 이조참판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사를 추증하여 포장(褒獎)하였다. 그의 친구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鄭澈)이 제문을 지어 곡하였다.


나의 벗 여식(汝式 조헌의 자)은 공자(孔子)와 안자(顔子)를 배우고 가의(賈誼)와 굴원(屈原)을 사모하여, 곧음에 죽고자 하더니 마침내 절의에 죽었구나. 슬프다, 여식(汝式)이여!


이 싸움에서 조헌(趙憲)의 아들 조완기(趙完基)는 체격과 용모가 웅장하고 성품과 도량이 남보다 뛰어났는데, 전쟁에 패하게 되자 일부러 의관을 화려하게 입었으니 아버지를 대신하여 죽고자 한 것이다. 이에 적이 그를 주장(主將)으로 알고 그 시체를 찢었다.


○ 승장(僧將) 영규(靈圭)는 용력(勇力)이 있어 잘 싸웠는데 적을 만나면 먼저 나가 싸우니, 적은 모두 우수수 쓰러졌다. 조헌이 죽게 되었을 때 적의 포위를 뚫고 들어갔으나 조헌을 찾지 못하고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 이광륜(李光輪)은 자는 중임(仲任)인데, 천성이 효도하고 우애하며 강개하고 큰 뜻이 있었다. 수백의 무리를 이끌고 조헌의 의거를 성실하게 도우다가 마침내 함께 전사하였다. 우리 조정에서는 사헌부 집의를 추증하였다.


○ 봉사 임정식(任廷式)은 천성이 소박하고 정직하며, 활쏘고 말달리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척후병으로 밖에 나가 있다가 사태가 급한 것을 바라보고서 말을 채찍질하여 돌진해서 많은 왜병을 쳐 죽이고 전사하였다.


○ 선비 김절(金節)은 맨 먼저 조헌에게 종군하여 전공이 많았다.


○ 이려(李勵)는 고 영의정 이탁(李鐸)의 손자인데, 학문이 밝고 행실이 돈독했다. 조헌이 기병하였다는 말을 듣고 의병에 가담하였다. 또 만호 변계(邊繼)ㆍ온양 현감(溫陽縣監) 양응춘(楊應春)ㆍ봉사 곽자하(郭自河)ㆍ무인 김헌(金獻)ㆍ강인서(姜仁恕)ㆍ박봉서(朴鳳瑞)ㆍ김희철(金希哲)ㆍ정원복(鄭元福)ㆍ이인현(李仁賢)ㆍ이양원(李養元)ㆍ김인남(金仁男)ㆍ황삼양(黃三讓)ㆍ박춘년(朴春年)ㆍ한기(韓琦)ㆍ박찬(朴贊) 등은 모두 막하의 비장(裨將)으로서 먼저 나가 견고한 적진을 꺾기도 하고 혹은 용기와 충의를 떨치기도 하였다. 또 선비 박세진(朴世珍)ㆍ김선후(金善後)ㆍ박응길(朴應吉)ㆍ신경일(申慶一)ㆍ서응시(徐應時)ㆍ윤여익(尹汝翼)ㆍ박혼(朴渾)ㆍ조경남(趙慶男)ㆍ김충남(金忠男)ㆍ고명원(高明遠)ㆍ강몽조(姜夢祖) 등은 혹은 글로 혹은 행동으로 모두 조헌의 막하에서 같이 일을 하다가 이때에 와서 함께 죽었다. 뒤에 문인인 박정량(朴廷亮)ㆍ김승절(金承節)이 의사들의 뼈를 한곳에 모아 무덤을 만들고 의총(義塚)이라 불렀다. 장계곡(張谿谷 장유(張維)의 호)이 순의비(殉義碑)에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원한은 가을 하늘 속에 배어 답답함을 펴지 못하는데 / 恨入秋陰鬱不開
충사는 자취 없고 누런 먼지만 자욱하네 / 蟲沙無跡但黃埃
위급해서야 충언이 맞음을 알겠으며 / 時危始覺忠言驗
싸움은 패했어도 오히려 적세만은 꺾었도다 / 兵敗猶令虜勢摧
청산에 한 조각 비석만이 남아 / 一片靑山留琬琰
천년의 매운 절개 벽력을 울리는 듯 / 千年烈氣挾風雷
양공의 타루비를 논할 것이 무어랴 / 何論墮淚羊公石
길이 영웅들 슬픔 가누지 못하리라 / 長有英雄不盡哀


○ 조웅(趙熊)은 또한 용감한 선비였는데 말 위에 선 채로 창을 들고 달릴 수 있었다. 5백 명의 의병을 모아 충주에서 일어나 수없이 적을 죽이었다. 하루는 조웅이 깊은 안개 속에서 행군하는데 적이 방비가 없음을 틈타서 뒤를 엄습하였다. 조웅이 포위를 뚫고 나오다가 탄환에 맞아 말에서 떨어져 적에게 사로잡혔다. 적이 그의 수족을 잘랐으되 끊임없이 꾸짖으니 사지를 찢어 죽였다.


○ 김천일(金千鎰)은 자는 사중(士重)이요 그 조상은 광주인(光州人)이었는데, 그의 조부 때부터 나주(羅州)에 이사하여 와서 살았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가난하게 살다가 일재(一齋) 이항(李恒)의 문하에 출입하였는데, 독실한 뜻으로 힘껏 행하여 언제나 성현을 법도로 삼았다. 유일(遺逸)로서 천거되어 내ㆍ외직을 거쳤는데, 모두 직무를 잘 수행하였다. 대관(臺官)이 되어서는 자신을 돌보지 않는 말과 직간을 하였다. 용모는 보잘것 없고 키는 작아서 마치 입은 옷을 감당하지 못할 것처럼 보였으나 의로운 일에 당하여 용감함에 있어서는 비록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일지라도 꺾을 수 없었으니 충의로운 성품은 타고난 것이었다. 전직 부사로서 나주의 시골집에 은퇴하여 살았는데, 서울을 지키지 못하였다는 말을 듣고 목놓아 통곡하여 거의 기절하다가 다시 분연히 말하기를,


“내가 울기만 하면 무엇하겠는가? 나라에 환란이 있어 임금께서 파천하였는데, 나는 세신(世臣)으로서 어찌 새나 짐승처럼 도망하여 살기를 원해서야 되겠는가. 내 의거를 하여 전쟁에 나갔다가 강약(强弱)이 달라 대적할 수 없으면 죽음이 있을 따름이다. 이것이 나의 보답하는 길이다.”


하고는 글로써 고경명(高敬命)ㆍ박광옥(朴光玉)ㆍ최경회(崔慶會)ㆍ정담(鄭湛) 등에게 전란에 종사할 뜻을 전하니, 고경명(高敬命) 역시 그의 두 아들 고종후(高從厚)와 고용후(高用厚) 및 전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ㆍ선비 안영(安瑛) 등을 거느리고 담양부(潭陽府)로 와서 모였고, 의사(義士) 송제민(宋濟民)ㆍ양산룡(梁山龍)ㆍ양산숙(梁山璹)ㆍ임권(林權)ㆍ이광주(李光宙)ㆍ서정후(徐廷厚) 등도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6월 3일에 피를 입에 바르고 여러 사람들과 맹세를 하였다. 김천일(金千鎰)이 평소에 몸이 약하고 병들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흔연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내가 칼을 차고 말을 타니 거뜬하여서 날 것같다.”


하고, 이에 최경회(崔慶會) 등과 먼저 본군(本郡)의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였다.


○ 최경회(崔慶會)는 자는 우선(遇善)인데, 능성현(綾城縣)에 우거하고 있었다. 마침 모친상을 당하여 여막살이하며 예서(禮書)를 읽다가 김천일(金千鎰)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바로 뛰어들어가 일을 같이 하였다.


○ 고경명(高敬命)은 자는 이순(而順)이요, 광주인(光州人)이다. 문장에 능하고 뛰어난 재주가 있었는데 애매한 죄로 시골에서 나오지 않고 거주하고 있었다. 적병이 경내에 침입하여 우리 군사는 무너지고, 또 임금의 행차가 서쪽으로 파천하여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목놓아 통곡하였다. 이광(李洸)의 군사가 금산에 이르러서 해산하고 돌아가자 글을 보내어 준절하게 책망하였다. 이때에 와서 김천일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격문(檄文)을 여러 도(道)에 전달하고 잇달아 출병하였는데, 그 격문은 다음과 같다.


전라도 의병장 절충장군 행부호군 지제교 고경명(高敬命)은 여러 도의 수재(守宰) 및 사민(士民)과 군인 등에게 삼가 급히 고하노라. 요사이 나라 운수가 중도에 비색(否塞 꽉 막혔다는 뜻)하여 섬 오랑캐가 밖에서 으르렁거리도다. 처음에는 역적 양(亮)이 맹약 어기는 것을 본뜨더니, 나중에는 춘추 때에 구오(句吳)가 주(周) 나라를 갉아먹던 짓을 함부로 하는도다. 우리의 경계가 소홀한 틈을 타서 허술한 데를 무찔러 쳐들어와서, 하늘도 속일 수 있다 하고 거침없이 북상하는도다. 장수들은 기로에서 배회하고 고을 수령들은 산골로 도망해 숨는도다. 임금과 어버이를 도적에게 버리고 있으니 어찌 차마 할 일이며, 임금으로 하여금 사직을 걱정하게 하는 것이 그대들에게 편안하겠는가. 백년 동안 길러놓은 백성으로서 어찌 한 명의 의기로운 남자가 없단 말인가. 외로운 군사로 깊숙이 들어왔으니 여진(女眞)의 본래 병법을 모르기 때문이요, 중행열(中行說)을 매질하지 못한 것은 한(漢) 나라가 대책이 없었기 때문이로다. 장강(長江)이 갑자기 천참(天塹)의 가치를 잃게 되니 오랑캐의 말굽이 이미 수도에 육박하였도다. 남조(南朝)에 사람이 없다는 비웃음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며, 북군(北軍)이 날아서 건넜다는 말이 불행히도 오늘과 비슷하도다. 우리 임금께서 태왕(太王)이 빈(邠)을 떠나던[去邠]심정으로, 명황(明皇)이 서촉(西蜀)으로 피난하듯하셨으니, 이 일은 종묘사직을 위한 지극한 계책에서 나온 것이므로 지방을 순회하는 것같은 잠깐의 노고쯤이야 꺼릴 것이 있으랴. 공락(鞏洛)의 풍진(風塵)에 놀란 왕의 얼굴에는 여러번 깊은 근심이 나타나고, 민산(岷山)과 아미산(峨眉山)의 험한 사닥다리 길에 취화(翠華 일산)가 먼길을 달리던 당 명황의 일과도 같도다. 하늘이 이성(李晟)같은 원로(元老)를 낳음은 난리를 숙청하는 일을 맡기고자 함이요, 조서를 육지(陸贄)가 기초(起草)하였듯이 애통하는 글이 또한 조정에서 내리었도다. 무릇 혈기(血氣) 있고 생명이 붙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인들 분통하여 죽고자 하지 않겠는가. 어째서 계획이 잘못되어 나라의 일이 이다지 어렵게 되었는가? 봉천(奉天)으로 피란 갔던 행차는 돌아오지 못하였는데, 상주(相州)에서 싸우던 송(宋) 나라 군사처럼 우리의 군사는 이미 무너졌도다. 저 오랑캐들이 벌떼처럼 독을 뽑는데, 이 악당들을 아직 잡아 죽이지 못하고 있도다. 적이 성안에서 숨을 붙이고 있으니 불붙은 장막 위에서 날고 있는 제비와 다를 것이 없고, 서울 지방을 점거하고 있으니 우리 안에서 날뛰는 원숭이와 같도다. 비록 명 나라 군사가 소탕할 날이 있을 것이나, 흉악한 무리가 당장 흩어져 달아남을 기대하기는 어렵도다. 고경명(高敬命)은 일편 단심의 만절(晩節)뿐이요, 흰 머리의 썩은 선비로다. 밤중에 닭소리를 들으니 국가의 고난함을 견딜 수 없어서, 중류(中流)에서 돛대를 치며 외로운 충성을 다짐하노라. 오직 개와 말이 주인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졌을 뿐이요, 모기가 산을 지는 미약한 힘을 따질 겨를이 없도다. 이에 드디어 의병을 규합하여 바로 서울로 향할 것이니, 소매를 떨치고 장단(將壇)에 올라 눈물을 뿌리며 여러 동지들에게 맹세하노라. 범을 치고 곰을 잡는 장사들은 우뢰같이 올라타고 바람같이 달려오며, 뛰어 올라타고 관문(關門)을 뛰어넘는 무리들은 구름같이 합하고 비오듯이 모이니, 협박을 당하여 호응하였거나 강제로 붙들려 온 것이 아니로다. 오직 신자(臣子)로서의 충의심이 다 같이 지성에서 나온 것이니, 국가의 존망이 달린 위급한 때에 어찌 감히 작은 제몸을 아낄 수 있으랴? 이름은 의병이라 하였으니 처음부터 어떤 직분에 매인 것이 아니요, 군사란 곧음으로써 씩씩한 것이니 강하고 약한 것은 논할 것이 아니로다. 여러 인사들이 의논하지 않고도 말이 같으며, 원근의 지방에서 소문만 듣고도 다같이 일어나는 형편이니 각 군의 수령들과 각지의 인사들은 충심이 어찌 임금을 잊을 것이며, 의리로써 마땅히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혹은 병기로 돕고, 혹은 군량으로 도우며, 혹은 말을 달려 진두에 앞장서고 혹은 쟁기를 놓고 논두렁에서 일어나서라. 힘이 미칠 수 있는 데까지는 오직 의(義)의 길로 나아갈 뿐이니, 임금을 위해 난리를 막을 자 있다면 나는 그와 더불어 함께 일어날 것을 맹세하노라. 생각하니 행궁(行宮)이 아득하다, 서토(西土)여! 그곳 풍속의 아름다움은 멀리 기자(箕子) 때부터 비롯되었고, 군사가 강하여 일찍이 수(隋)와 당(唐)의 백만 대군을 꺾었도다. 조정의 계획이 장차 정해질 것이니 국가가 어찌 한 구석에서만 있을 수 있겠는가. 패배해도 잘만 하면 망하지 않으니, 복덕성(福德星)이 바야흐로 오(吳) 나라 분야에 임했고, 깊은 근심에서 운수가 열리나니 사람들이 노래하며 한(漢) 나라를 더욱 생각하도다. 여러 호걸들이 시국을 바로잡으니 신정(新亭)에서 마주보고 울던 일은 없을 것이며, 백성들이 임금을 기다리니 서울로 돌아오는 임금 행차를 보게 되리로다. 마땅히 힘을 내어 앞장서기를 바라면서 마음을 터놓고 간절히 고하노라.


격문(檄文)이 이르는 곳마다 사대부들이 감격하여 울면서 분연히 궐기하였다. 고경명(高敬命)이 또 조정에 글을 올려 이광(李洸)의 죄를 따지고, 여러 고을 수령들과 더불어 의병을 거느리고 김천일(金千鎰)의 뒤를 이어 출동하면서 개연히 장단(將壇)에 올라 늙고 병든 것을 사양치 않으니, 응모하는 자가 날로 모여들었다.


고경명(高敬命)이 집에 있을 때, 천문(天文)을 관찰하고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금년에는 장성(將星)이 불길하니 장수는 반드시 불길할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금년에 반드시 횡액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는 사위 박숙(朴橚)에게 편지를 보내어 가족의 일을 부탁하고 전주에서부터 북으로 향하여 길을 떠났다.


그때에 의병이 모두 전라도와 충청도의 경계에 모였는데 여러 도의 군사가 모두 무너졌다는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김천일이 의병들에게 타이르기를,


“우리 군사는 의거한 것이니, 전진만이 있고 후퇴는 없다. 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마음대로 가라.”


하니, 모두가 감격하고 분발하여 아무도 몰래 도망하지 아니하고 흩어졌던 군사들도 점점 돌아왔다.


호서(湖西)에 당도했을 적에는 군사가 수천을 헤아렸다. 드디어 진군하여 수원에 둔(屯)을 치니 군세가 크게 떨치었다. 이에 장사들을 모아 이따금 출격하여 전과가 있었으며, 또 금령(金嶺)의 적을 습격하여 물리치고, 막하의 선비 양산숙(梁山璹) 등을 보내어 상소를 받들고 샛길로 행재소에 가게 하였다.


양산숙(梁山璹)은 자는 회원(會元)인데, 기묘 명현 홍문관 교리 양팽손(梁彭孫)의 손자요, 부윤 양응정(梁應鼎)의 셋째 아들이다. 일찍이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 출입하였는데, 시사(時事)가 날로 그릇됨을 보고 과거에 뜻을 버리고 나주(羅州) 삼향리(三鄕里)에 은거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수백 명의 의병을 모아 김천일(金千鎰)의 막하에 모였다. 이때에 지방의 장수들이 매양 의병의 활동을 저지하려 들고 적은 더욱 성하게 몰려들자 김천일은 보좌관들과 상의하여 강화(江華)로 들어갔다. 마침 전라 병사 최원(崔遠)도 본도의 군사 수만 명을 이끌고 중로(中路)에 이르렀는데, 군의 정세가 갑자기 크게 변하여 하루에 50명을 참수(斬首)하여 필사의 뜻을 보여도 오히려 중지시키지를 못하니 김천일(金千鎰)과 합군(合軍)하여 강화도에 들어가서 사졸로 하여금 건너가지 못하게 하고 해를 넘겨 애써 지키니, 굶어 죽는 자가 속출하였으나 그 뜻은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 신하로서 절개를 잃지 않은 사람은 오직 최원(崔遠)뿐이었다.


조정에서는 김천일(金千鎰)이 먼저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창의사(倡義使)라는 호를 내려 가상히 여겼다. 도망을 갔던 관리들도 김천일이 왔다는 말을 듣고 점점 모여들었으며, 경기의 백성들은 있는 곳마다 단결하여 모두 의병이라 칭하고 호응하였다. 김천일은 이에 군과 약속하고 강변에 목책을 만들어 세우고 전수(戰守)의 차비를 하였다. 이때에 왜적은 경성을 점거한 지 이미 오래이므로, 백성들이 피란을 했다가 서울에 많이 돌아와서 적과 섞여 살고 있었다. 김천일은 이에 결사대를 모집하여 성중에 잠입하여 순역(順逆)과 이해를 들어 효유하니, 사람들이 감동하고 기뻐하여 김천일에게 경비(經費)를 보내는 자가 수만이었고, 혹은 몰래 적을 죽여서 그 목을 바치기도 하며 자진하여 돌아오는 자가 또한 하루도 수백 명이나 되었고, 임시 막사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김천일이 때때로 출병하여 공격하니 강의 연안에 주둔하고 있던 적병이 잇달아 도망하였다. 김천일은 제장(諸將)을 거느리고 전선 4백 척으로 강을 거슬러 직상하여 양화도(楊花渡) 나루에서 북을 치면서 군사의 위세를 보이며 수길(秀吉)의 죄상을 들어 강위에 방을 써서 걸고 성안의 도적에게 도전하였으나, 적은 끝내 발동하지 않았다. 이를 증명하는 시가 있다.


열렬하다 창의공이여 / 烈烈倡義公
충분이 흰 태양을 꿰었도다 / 忠憤貫白日
여러 군졸을 규합하여 / 糾合百千卒
범과 이리의 소굴로 내달았도다 / 直趨虎豺窟
험준한 곳에 의거하니 천연의 요새요 / 據險天塹在
목책을 가설하니 용맹한 군사가 들어섰도다 / 設柵豼貅列
적장들이 서로 혀를 깨물면서 / 衆酋爭咋舌
화살 하나 감히 쏘지 못하도다 / 一矢不敢發


그때에 고경명(高敬命)의 군사는 여산(礪山)에 머물렀는데, 장차 이산(尼山)으로 향하려던 차에 조령의 적이 나뉘어 황간(黃澗)으로 향하여 금산(錦山)으로 넘어와서 군수가 전사하였으며 적세가 창궐하다는 소문을 듣고, 휘하의 사병들이 돌아가 본도를 구원하기를 청하였다. 고경명 역시 그렇게 여기고 드디어 진산(珍山)으로 병사를 옮겨 금산의 왜적을 치려 하였다.


이때에 정예 군사가 많이 응모하여 군사의 성세는 더욱 떨치었다. 전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가 고경명(高敬命)에게 말하기를,


“금산에 있는 적은 그 수가 수만(數萬)인데 우리 군사들은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하였으니 결코 막아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제군(諸軍)과 함께 힘을 합해 험준한 곳에 의지해 분산해 있다가 적이 교만하고 게을러지면 정예한 군사를 뽑아 사면에서 공격함이 옳을 듯합니다.” 하였다. 유팽로(柳彭老)는 한쪽 눈이 멀었고 용모가 잘 생기지 못하여 막하의 군사가 모두 업신여겨 끝내 그의 계책은 쓰이지 아니하였다.


○ 유팽로는 자는 군수(君壽)인데, 옥과현(玉果縣) 사람으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럽고 문과에 오른 지 수년이었으나 벼슬에 나아갈 생각을 아니하였다. 사람들이 벼슬하기를 권유하면,


“내가 벼슬을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억지로 이룰 수는 없는 것이다. 파리나 개처럼 작은 이익에 악착스레 구는 것은 나의 본심이 아니다.”


하였다. 세리(勢利)에 담박하기가 이와 같았기 때문에 세상 사람이 그의 어진 것을 모르고 홀대하였다. 완산(完山 전주)의 형세가 날로 위급하자 군사들이 모두 가서 구하고자 하므로 고경명은 부득이 군사를 나누어 금산(錦山)으로 향하였다. 그래서 방어사 곽영(郭嶸)과 언약하고 좌우익(左右翼)이 되어서 정예한 기병(騎兵) 수백을 내어 적의 소굴을 바로 공격하였으나 불리하여 후퇴하게 되었다. 고경명이 북을 울려 독전하니 모두가 죽음을 무릅쓰고 다투어 앞장서서 적을 토성 안으로 몰아넣고 성밖의 집들을 전부 불지르고, 또 진천뢰(震天雷)를 쏘아서 성안의 가옥들도 불태우니 성세가 매우 웅장하였는데, 적에게 사로잡힌 부녀자들이 힘껏 물을 길어 불을 끄고 적은 죽음을 무릅쓰고 돌출해 나왔으나 의병이 사면으로 에워싸고 공격하여, 적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감히 나오지를 못하였다. 그때 마침 해는 저물고 관군이 또 싸움을 도와주지 아니하고 성은 단단하여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으므로 군사를 물려 본진으로 돌아왔다. 이날 밤에 방어사가 사람을 보내서 다음날 합세하여 싸우기를 약속하였다. 고경명의 장자(長子) 종후(從厚)가 고경명에게 말하기를,


“아군이 승리하였으니, 이 승세를 지니고 군사를 완전히 후퇴시켰다가 기회를 보아 다시 나와 공격함이 옳겠습니다. 만약 많은 적과 대치하면서 들에 묵으면 밤에 습격을 받을 우려가 있습니다.”


하니, 고경명은 말하기를,


“네가 부자(父子)의 정으로 나를 걱정하느냐. 나는 싸워 죽을 따름이다.”


하자 종후(從厚)는 다시 말을 못하고 물러갔다. 방어사는 싸우지 않은 여러 장수들에게 벌을 내리고 다음날 다시 싸우도록 하였다. 이날 밤에 적이 과연 야간기습을 모의하였는데, 염탐하던 의병이 갑자기 냇가에서 사람과 말[馬]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밭 가운데 엎드려 나가 동정을 살피었다. 적병 중에 먼저 밭 가운데 매복하고 있던 자가 의병이 그들의 계획을 발각하였음을 알고 달아나버렸다. 다음날 방어사와 함께 진병하여 적진 5리쯤 되는 데까지 나아갔다. 고경명이 먼저 기병 8백여 명을 보내어 싸움을 걸자 적이 성을 비우고 나와서 바로 관군(官軍)에게 덤벼드니 영암 군수 김성헌(金成憲)은 말을 몰아 먼저 달아나고, 적이 또 광주(光州)와 흥덕(興德)두 진을 공격하니, 방어사는 멀리서 형세만 보고 흩어져버렸다. 고경명은 혼자 감당할 생각으로 군사들로 하여금 활을 잔뜩 당기고 기다리게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소리지르기를,


“방어사의 진이 무너졌다.”


하고 외치니, 의병의 진이 따라서 무너졌다. 고경명이 앉은 채로 일어나지 아니하고,


“나는 말타는 데 숙달하지 못하고 오늘 싸움에 패했으니, 오직 한번 죽음이 있을 따름이다.”


하였다. 막하의 군사 안영(安瑛) 등이 고경명을 말에 오르기를 청하면서,


“이번에 한번 후퇴하였다가 다시 뒷날 의거하기를 도모함이 옳습니다.”


하니, 고경명은,


“내 어찌 구차히 모면하랴. 그대는 빨리 빠져나가라.”


하였다. 휘하의 군사가 억지로 부축하여 말에 앉히었는데, 말이 달아나서 고경명이 말에서 떨어지니, 안영이 말에서 내려 고경명에게 말을 주고 도보로 따라갔다. 적이 급하게 달려들어 고경명은 위급하게 되었다. 종사(從事) 유팽로(柳彭老)는 말이 건장해서 먼저 빠져나가면서 그 하인을 돌아보고 대장이 벗어났느냐고 물으니, 아직 못 나왔다고 하자, 급히 말을 몰아 되돌아 들어가서 고경명을 따르고자 하니, 하인이 말고삐를 끌어잡고 울면서 말리었다. 유팽로가 듣지 아니하고 칼로 하인을 찍으려 하니, 하인이 부득이 말고삐를 놓고 그뒤를 따랐다. 고경명은 유팽로가 다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는 반드시 면하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빨리 달려 나가라.”


하니, 유팽로가 말하기를,


“내가 어찌 차마 대장을 버리고 홀로 살기를 도모하겠습니까.”


하였다. 적이 경명에게 달려드니 유팽로와 안영이 자기 몸으로 막아 가리다가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 안영(安瑛)은 자는 원서(元瑞)인데, 기묘 명류 홍문관 교리 안처순(安處順)의 증손이고, 판서 이후백(李後白)의 외손이다. 남원에 살았는데 부모에게 지극히 효도하였다. 이때에 바야흐로 남원에 있었고 어머니는 서울에 있었는데, 길이 막혀 생사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강화도로 들어가 어머니의 생사를 알아보려고 하였는데,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막하에 들어갔다. 막하의 제생들이 큰 소리만 치면서 그를 깔보았지만 안영은 아무 말 없이 대오에 따랐을 뿐이었다. 싸움에 패하자 제생(諸生)들은 일시에 흩어져 달아났으나 안영만은 가지 아니하였다. 그때 고경명의 둘째 아들 고인후(高因厚)는 무사를 거느리고 앞줄에 서서 화살 속을 드나들다가 군사가 무너지자 말에서 내려 걸상에 의지하고 인솔한 대열을 정돈하여 돌격전을 벌이다가 힘이 다하여 죽었다.


고경명의 장자(長子) 고종후(高從厚)가 경명의 시체를 수습하여 산사(山寺)에 임시로 장사지내고, 다시 흩어진 무리를 수습하여, 복수군(復讐軍)이라 호칭하였다. 이보다 앞서 고경명 등이 양산숙(梁山璹)을 행재소에 보내었는데, 그가 돌아올 때 왕은 친히 불러보고 이르기를,


“돌아가면 고경명 등에게 말하여 빨리 국가를 회복하여 나로 하여금 너희들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날이 있게 하라.”


하고, 고경명에게 공조 참의 지제교 겸초토사의 벼슬을 제수하고 다음과 같은 글을 주어 위로하였다.


내가 임금 노릇을 잘못하여 백성을 편안해 살 수 있게 하지를 못하였도다. 첫째로 인화(人和)를 잃었고 또 오랑캐를 막는 데 실패하여 나라를 잃고 서도로 파천하여 의주에 물러나온 지 이미 달을 넘겼도다. 종묘사직이 빈 터가 되고 생령(生靈)이 죽었으니, 아아! 이 무슨 일인가. 그 죄는 오로지 나에게 있으니 실로 한없이 부끄럽도다. 서남(西南)은 멀고 아득하여 소식을 들을 길이 없었는데, 이번에 이광(李洸)의 군사가 용인에서 무너졌다고 들리니 다시는 남쪽을 바라며 구해 주기를 기대하던 생각을 할 수 없게 되었도다. 그런데 이에 양산숙(梁山璹) 등이 해상과 육지를 거쳐 이곳에 진달하여, 너 고경명(高敬命)과 김천일 등이 의병 수천을 규합하여 본도 절도사 최원(崔遠)의 병마(兵馬) 2만과 함께 수원에 나와 둔을 쳤다고 하니, 나같이 부덕(不德)한 사람이 어찌 이처럼 사력을 다하는 사람들을 얻게 되었단 말인가? 우리 조종(祖宗) 2백 년의 깊고 두터운 인택(仁澤)이 인심을 감격시킴이 지극한 것이니, 내 매우 기쁘도다. 그래서 곧 양산숙(梁山璹) 등을 군중(軍中)으로 돌려보내니 너희들은 나의 고충을 자세히 알기 바라노라. 내가 즉위한 지 25년이 되었다. 비록 인덕(仁德)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고 혜택이 아래까지 다하지 못하였으며, 지혜는 물정을 살피지 못하고 정사는 실수가 많았으나 내 본심만은 언제나 백성을 사랑하고 구제하는 일을 본의로 알았다. 근년에 들어 변방에 소란이 많고 군정(軍政)이 느슨해진 것을 보면서도 도리어 생각하기를, ‘성과 해자가 높고 깊으며 갑옷과 병기가 굳고 날카로우면 오랑캐와 도적을 막을 수 있다.’ 하고, 중외(中外)에 신칙하여 방비를 튼튼히 하도록 하였으나, 성이 높을수록 국세는 날로 줄고, 참호가 깊을수록 백성의 원망은 날로 더해져서 뽕잎 떨어지듯 기왓장 부서지듯이 이 지경이 될 줄이야 실로 헤아리지 못하였도다. 더구나 궁중을 엄밀하게 단속하지 못하여 백성을 속이고 작은 이익을 취했으며, 왕자(王子)는 산택(山澤)의 이권을 독점하고 백성은 생업을 잃었으니, 백성이 나를 원수로 여긴들 내가 무슨 할 말이 있으랴. 이미 유사에게 명하여 모두 다 혁파하고 반환하도록 하였지만, 이러한 것들을 어찌 내가 다 알고 있었겠는가? 알지 못한다는 것도 나의 허물이니,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후회한들 어찌하랴. 차라리 스스로 희생이 되어 천지와 종사(宗社)와 백신(百神)의 신령에게 사죄하고자 하노라. 내가 손가락을 깨물며 후회하기를 이미 이와 같이 하였으니, 바라건대, 네 사민(士民)들은 내가 잘못을 고치고 새로운 정치를 계획하도록 허락해 주기 바라노라. 나의 실덕(失德)은 대략 개진(開陳)하였거니와, 이번 재난은 실로 뜻밖의 일이로다. 무지하고 흉악한 왜적이 천자의 나라를 칠 꾀를 생각하고, 나에게 역당이 되라, 길을 빌리자 하기에, 내 의리를 들어 거절하였더니, 흉악한 짐승같은 마음으로 나의 큰 덕을 저버리고 작은 원망을 맺으려고 하는도다. 내 생각하건대, 종묘사직이 망하고 신민은 버릴지라도 군신(君臣)의 직분은 천지가 살피는 바이니, 대의를 우주에 밝히고 흉중을 태양 아래에 드러내어 천지신명에게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고자 할 따름이기에, 그대로 있을 수 없어서 천조(天朝)에 호소하였도다. 황제께서 성명(聖明)하시어 나의 지극한 뜻을 살피고, 요동 총병관 조승훈(祖承訓)을 보내어 유격장군과 마병(馬兵) 1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을 공격하고 서울의 적을 소탕하고자 하였고, 또 강소(江蘇)와 절강의 선봉군사 6천 명이 조석을 앞두고 강을 건너올 것이며, 본도의 병마 또한 수만 명이 모였으니, 천자의 위엄과 성세가 미치는 곳에 군사는 마땅히 더욱 분발할 것인데 하물며 궁지에 몰린 오랑캐는 죄악이 이미 극도에 달하여 천벌이 당연히 가해져야 할 것이다. 평양의 왜적은 기세가 이미 꺾이어 섬멸을 당하게 되었도다. 맑은 가을이 다가오고 태백성(太白星)이 바야흐로 높으니, 군대의 위용이 있는 곳에 살기(殺氣)는 순해지고, 충의가 향하는 곳에 어느 적인들 이기지 못하랴. 너희들은 이미 경기 땅에 있으니, 형세를 살펴 군사를 합쳐서 서울을 수복하기 원하노니! 네가 힘쓰지 않으면 내 또 누구를 의지하랴. 군량이 모자라면 경기ㆍ호남에 있는 창고의 것을 네 마음대로 가져다가 공급하고, 군기(軍器)가 다하면 경기ㆍ호남의 병장기를 네 마음대로 가져다 쓰면서 각기 힘쓰도록 하라.


이제 고경명에게 공조 참의를 제수하고 초토사의 관직을 더하며, 김천일에게는 장예원 판결사에 올려 창의사(倡義使)를 더하고, 박광옥(朴光玉) 등 이하에게는 각기 차등 있게 관직을 올려주노라. 너의 충의를 생각하면 작상(爵賞)을 바라는 것이 아니지만, 내가 그대에게 은혜를 베풀 일은 이밖에 다른 길이 없으니 받아줄 것이며, 더욱더 힘쓰기를 바라노라. 용만(龍灣) 한 구석에 국운(國運)이 어렵게 버티고 내 땅 경계는 끝났으니, 나는 장차 어디로 돌아갈꼬. 인정(人情)이 이미 끝에 달했으니, 이치가 당연히 수복되기를 그리워할 것이다. 가을 기운이 잠깐 일어나니, 변지(邊地)의 날씨는 일찍 차도다. 장강(長江)을 바라보니 또한 동으로 흐르는데, 돌아가고자 하는 일념(一念)은 강물처럼 도도하구나. 교시가 이르면 너희 신민들은 반드시 나의 뜻을 가련하게 여기고 슬퍼할 것이다. 슬프다! 하늘이 이성(李晟)을 낸 것은 성궐(城闕)을 다시 회복할 날을 기대하게 한 것이고, 날마다 장준(張俊)을 바라는 것은 원릉(園陵)이 무사하다는 기별을 기다림이라. 하루 빨리 이 간절한 소망에 부응하여 이슬과 서리를 맞는 나의 고통을 면하게 하기를 바라노라. 이에 교시하노니 자세히 알기 바라노라.


양산숙(梁山璹) 등이 고경명(高敬命)의 군진에 돌아오니, 고경명은 이미 죽었었다. 양산숙이 이에 교서를 반포하여 선유하니, 남은 군사와 백성, 억센 장수와 완악한 졸개까지도 울지 않는 이가 없으니 사람들이 당 덕종(唐德宗)이 봉천(奉天)에서 내린 애조(哀詔)에 비유하였다. 양산숙은 이에 강도(江都)로 돌아가 김천일의 군진에 들어갔다.


고경명은 폐거(廢居)하고 있던 사대부로 하루아침에 의기를 떨쳐 군사 훈련을 제대로 받지 않는 무리를 불러 모았으니, 일은 비록 이룩하지 못하였으나 의열(義烈)은 빛나 두터운 봉록을 먹는 계획없는 관리들이 부끄럽게 될 것이다. 조정에서는 고경명의 죽음을 듣고 탄식하며 애석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임금도 역시 슬퍼하여 고경명에게 자헌대부 예조판서 겸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춘추관성균관사의 증직을 내리도록 명하고, 고인후(高因厚)에게는 예조 참의를, 유팽로(柳彭老)에게는 사간원 사간을, 안영(安瑛)에게는 장악원 첨정을 증직하여 광주(光州)에 사당을 짓게 하고, 포충사(褒忠祠)라고 사액하여 세시(歲時)마다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고을의 선비와 백성들이 또한 모두 분향하고 술을 올렸으니, 그의 충의에 감동하였기 때문이다. 고종후(高從厚)가 의병을 다시 모아 여러 도(道)에 격문을 돌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력 20년(1592, 선조 25) 월 일, 복수 의병장 전 임피 현령(臨陂縣令) 고종후(高從厚)는 피눈물로 머리를 조아려 재배하고 열읍 의병청(義兵廳)의 제공들과 여러 군자들에게 삼가 고하나이다. 고자(孤子)는 하늘에 사무치는 통분을 설욕하기 위하여 기병하여 절에 있는 종들의 장수가 되었습니다. 여러 곳에 흩어져 살고 있어 그 수가 실로 많으나 열읍을 두루 다니기는 나로서 너무도 겨를이 없으므로 다만 관리의 힘만을 의뢰하고 있는 형편이라 행군할 시기를 놓칠까 걱정이 됩니다. 그래서 가슴속에 맺힌 원한을 가지고 감히 당세(當世)의 의사(義士)들에게 고합니다. 혹시 문서나 장부에 유의하여 사리(事理)에 방해됨이 있지나 않기를 바랍니다. 비록 계책상 부득이한 일이긴 하나 역시 죄는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고자(孤子)는 집이 본래 가난하여 왕통(王通)의 헐어빠진 움막집이 있을 뿐이요, 성품조차 소활하여 자공(子貢)과 같은 재산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도적만은 잊을 수가 없어서 이에 감히 금혁(金革)의 변례(變禮 긴급한 경우 예를 변경함)로 상복을 벗고 군대에 나선 것인데 호걸로서 대열에 참여한 사람이 없으니 누구와 더불어 국가의 원한 깊은 원수를 갚을 수 있겠습니까? 재물이 부족하면 군사를 모을 수 없고, 병기가 날카롭지 못하면 적을 누를 수가 없습니다. 큰소리로 울부짖으며 감히 안공(顔公)처럼 미곡(米糓)을 애걸하고 맨 땅에 빈 손으로 일어나니, 조적(祖逖)처럼 병기 만들기가 어렵습니다. 군사들이 배를 주리게 되면 어찌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겠습니까? 땅을 밟고 하늘을 이고 사는 이상 결코 제 한 몸이 잘되기를 꾀하는 것이 아니요, 맨주먹을 휘두르고 칼날을 무릅쓰니 천리(千里)를 싸워 나가기는 어려울 것같습니다. 오직 죽은 이를 위하여 한번 씻고자 함인데, 어찌 힘있는 분들이 가만히 앉아 바라만 볼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우리 한 도(道)의 제장(諸將)들이 누군들 나라의 백성이 아니리오. 단에 올라 피로써 맹세하니, 혹은 죽은 어버이에게 의기를 허락하고 어깨를 치고 소매를 끌어잡는 사람 중에는 역시 고자(孤子)에게 연분이 있습니다. 비록 얼굴을 대해 보지는 못했지만 소리만은 서로 접속되고 있는 처지이니, 백세(百世)나 떨어져도 감응이 있는 자도 있는데 하물며 같은 시대에 태어났음에 있어서랴. 이번 6월의 군대 출동은 결사적 계획에서 나온 것입니다. 몸소 먼저 무부가 되어 비록 훈업(勳業)을 생전에 다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인륜을 유지해서 그 의열은 죽은 뒤에 더욱 빛날 것이니, 이는 한 집안의 사론(私論)이 아니요, 백세의 공론(公論)이라 하겠습니다. 저 길가는 나그네도 눈물을 흘리거늘 하물며 선비들에 있어서 어찌 슬픈 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의(義)를 사모하고 인(仁)을 힘써 행한다면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베풀기를 좋아하여야 할 것입니다. 수전노가 되기보다는 남의 급한 것을 구해 주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비는 자식을 가르치고 형은 아우를 격려하니 어찌 월(越) 나라가 진(秦) 나라 여윈 것을 바라보듯하겠으며, 현(縣)이 다르고 군(郡)이 다르다 하여 저들은 우리와 관계가 없다고 여기지를 마십시오. 사해(四海)는 모두 우리의 형제들이니 한 말의 곡식도 오히려 방아찧어 나누어 먹을 수 있고, 작은 고을이라도 충신이 있다하였으니 한 세상을 속여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옛말에도 있으니 여러분은 들으십시오. 한 삼태기의 흙이 산이 되고, 한 치의 쇠붙이도 사람을 죽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각자가 자기 힘에 따라 할 것이니 어찌 다 구비하기를 바라리오. 글로써 성의를 드러내지 못하고 여기에서 말을 마치겠습니다. 악의의 전[樂毅傳]을 읽으면 반드시 책을 놓고 울 것이며, 노숙(魯肅)이 창고를 털어주듯 하면 소문을 듣고 일어날 것입니다. 자산과 기계를 내어 서로 도와주시려고 하시면 여러분은 성명을 이어 서명하소서.


○ 격문이 이웃 고을에 전해지자, 사인(士人)과 무졸(武卒)들이 눈물을 뿌리며 의리를 사모하고 모여 들었다. 그 중에서 드러낼 만한 사람으로는, 정자(正字) 오빈(吳玭)이 있었는데, 광주(光州) 사람으로 의기를 자부하여 일찍이 고씨(高氏) 문중의 충효를 흠모하다가 이에 종사(從事)가 되었고, 김인혼(金麟渾)은 진원(珍原) 사람으로 하서선생(河西先生) 김인후(金麟厚)의 종제(從弟)인데, 담력과 꾀가 있어 막하의 참모가 되었으며, 오유(吳宥)는 보성(寶城) 사람으로 처음에 원수의 막하에 있다가 의리를 사모하여 와서 부장이 되었다.


그때에 권율도 본진의 군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근왕하러 갔다. 처음에 권율이 용인(龍仁)으로부터 본진에 돌아와서 이광(李洸)의 명령을 기다리며 말하기를,


“주장(主將)이 응당 분부가 있을 것이니, 군대의 대열을 정리하고 기다리라.”


하였더니, 오래되어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권율이 개연히 말하기를,


“종묘사직이 잿더미가 되고 왕이 파천해 계시는데 신하로서 어찌 국가의 멸망을 편안히 앉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있으랴?”


하고, 경내의 자제 5백여 명을 거느리고 또 이웃 고을에 격문을 전하여 1천여 명을 더 얻어서 경상도 경계로 나아갔다가 남원의 백성들이 집과 부락을 불태우고 관아의 창고를 약탈한다는 말을 듣고 권율이 곧 남원으로 이동하여 인심을 안정시키고 난민을 단속하였다. 순찰사 이광(李洸)이 남원에서 군사를 일으켜 권율을 임시로 본도의 도절제사(都節制使)라 칭하고, 제군(諸軍)을 독려하여 난동하는 것을 막게 하였다. 권율이 사기(士氣)를 안정시키고 격려하니 군의 위세는 날로 성하고, 제장은 부서(部署)를 정하여 배치하는데 모두 법도가 있었으며, 은혜와 위엄을 함께 시행하니 호령은 명확하고 엄숙하며, 진중에 임하여 군사와 맹세할 적에는 의로운 빛이 얼굴에 나타나니 사졸들이 용기를 떨쳐 명령을 어기는 자가 없었다. 곧 군대를 이현(梨峴)으로 이주하였다. 이때 영남의 적세는 매우 창궐하여 곧장 전라도를 공격하여 군병을 나누어 쳐들어왔다. 은 적세가 심히 성하다는 말을 듣고 영(嶺)을 의지하여 진을 굳건히 하고 군사를 엄밀히 단속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하루는 잿마루에서 적과 만나자 군사를 풀어서 급히 공격하였다.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은 용맹이 삼군(三軍)에 으뜸이었는데, 돌격전을 벌이다가 적의 탄환에 맞아 후퇴하니 온 군사가 기세가 꺾여 투지가 없이 칼을 감추고 머리를 싸고 슬슬 달아나므로 군중이 흉흉하였다. 저녁때 왜적은 우리 군사가 지친 틈을 타서 우리의 성채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권율이 칼을 빼어 크게 호통을 치며 직접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독전하니, 사졸들이 모두 용감하게 달려 나가 성위에 뛰어올라 힘껏 막아내는데, 모두가 일당백(一當百)으로 싸웠다. 이에 부르짖는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 화살과 돌은 빗발치듯 하니 적이 감당하지 못하고 드디어 갑옷을 벗어버리고 시체를 끌고 달아났는데, 땅에 버려진 군수 물품과 병장기가 낭자하였고 피는 흘러 길을 덮었다. 왜적이 다시 호남을 엿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호남을 근본으로 삼아 국가의 보장(保障 울타리)이 되었으며, 수년 사이에 동서(東西)로 나누어 군비를 공급하여 끊어지지 않게 한 것은 권율의 힘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서 목사가 관청에 이르기 전에 본도의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권율이 방어사로 하여금 대신 이치(梨峙)를 지키게 하고 자기는 직접 전주에 이르러 도내의 군사 만여 명을 출동시켜 서쪽으로 서울로 향하였다. 이때 왜적의 괴수 행장(行長)은 이미 평양을 빼앗아 성을 점거하고 있었고, 장정(長政)은 황해도를, 융경(隆景)은 개성부를, 평수가(平秀嘉)는 제추(諸酋)를 독솔하여 대병을 이끌고 경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병사를 풀어놓아 사방을 약탈하므로 서로(西路)가 이미 막혀 근왕하는 여러 장수들은 모두 강화도에 들어가 강을 요새로 적병을 피하고 있었다. 주상께서 의주에 계신다는 말을 듣고서 여러 장수들을 불러 말하기를,


“지금 평양 이남은 모두 적진인데 서울은 근본이 되는 땅이니, 서울을 먼저 수복하기만 못하다. 그리고 행장(行長)의 뒤를 끊어서 동쪽을 돌아보며 의심하게 하여 마음놓고 서진(西進)하지 못하도록 하면 적들이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지금 만약 강도(江都)로 들어간다면 적에게 약함을 보이는 것이다.”


하고, 드디어 수원의 독성(禿城)에 진주하였다. 주상께서 권율이 독성에 진주하였다는 말을 듣고 차고 있던 칼을 풀어서 급히 내려보내며 이르기를,


“제장들 중에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이 칼로 다스려라.”


하였다. 권율은 주상의 명을 받고 날로 사졸을 독려하니, 평수가(平秀嘉)는 그 병세가 매우 날카로움을 꺼려 수만의 군대를 세 진으로 나누어 오산역(烏山驛) 등지에 진을 치고 왕래하며 도전하였다. 권율은 성벽을 단단히 하고 굳게 지키며 교전하지 아니하고 간혹 기병(奇兵)을 보내어 적을 대응하여 가는 곳마다 적의 날카로운 기세를 꺾었다. 적의 계책은 완전히 실패되어 약탈할 곳조차 없게 되자 며칠 뒤에 병영을 불태우고 밤에 도망하고, 기내(畿內)의 여러 왜적도 차례로 성안으로 들어가버리니, 이로부터 서로(西路)가 통하게 되었고 여러 군(郡)의 의병이 소문을 듣고 봉기하여 일시에 메아리처럼 호응하였다. 지금에 와서 중흥의 공을 논하자면 권율이 으뜸이라 하겠다.


○ 이순신(李舜臣)도 가리포(加里浦)에서 전라도 좌수영(左水營)에 달려가서 군사를 훈련하고 병선을 정돈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적병이 이미 육지에 내려 여러 군(郡)이 모두 무너졌다는 소문을 듣고 별다른 계책이 나지 않으므로 노량(露梁) 어귀에 배를 배열하여 적의 오는 길목을 막고 성을 수축하여 지키고자 하다가 또 본도를 굳게 지켜 한산(閑山) 어귀를 엿보지 못하게 하려고도 하여 결정을 짓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순천 부사(順天府使) 권준(權俊)과 광양 현감(光陽縣監) 어영담(魚泳潭)이 글을 띄워 일어나고, 또 자신이 달려와서 바다로 내려갈 계획을 힘껏 찬동하였다. 녹도 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과 이순신의 군관(軍官) 송희립(宋希立)이 발분하여 죽음을 걸고 힘을 다할 것을 자원하며 강개한 언사로 이순신에게 말하기를,


“적이 이미 영남을 격파하고 승승장구하니 그 기세가 반드시 수륙으로 닥쳐올 것인데, 공은 어찌 이다지 신중하기만 하십니까? 공이 출전하시면 정운(鄭運) 등이 선봉으로 나가겠습니다.”


하였다. 이순신은 정운(鄭運) 등의 이와 같은 태도를 보고 크게 기뻐하여 5월 초 4일 수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가려면서도 결정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경상 우수사 원균은 적의 세력이 큰 것을 보고서 감히 출격하지 못하고, 전선 백여 척 및 화포(火砲)와 군기를 바다 속에 다 던지고 수하의 비장(裨將) 이영남(李英男)ㆍ이운룡(李雲龍) 등을 거느리고 네 척의 배에 타고 곤양(昆陽) 해구(海口)로 가서 육지에 올라 적을 피하고자 하니, 수군 만여 명이 모두 흩어져서 수습할 수 없었다. 이영남(李英男)이 간언하기를,


“공이 왕명을 받아 수군절도사가 되었는데, 군사를 버리고 육지로 나갔다가 후일 조정에서 죄를 내릴 때 어떻게 해명하겠습니까? 전라도에 청병하여 적과 한번 싸워 이기지 못한 뒤에 도망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원균이 옳게 여기고 이영남(李英男)을 시켜 이순신에게 가서 청병을 하도록 하였다. 이순신은,


“각기 분계가 있는데 만약 조정의 명령이 없이 어찌 감히 마음대로 월경(越境)할 수 있겠는가.”


하고 사절하였다. 원균이 다시 이영남을 보내어 청하기를 무릇 오륙 차나 왕래를 하였다. 이영남이 다녀올 때마다 원균은 뱃머리에 앉아서 멀리 바라보며 통곡하였다. 그뒤 이순신은 배 40여 척을 이끌고 한산도(閑山島)에 나와서 원균의 군사와 함께 옥포(玉浦)에 이르니 앞바다에 적의 전함 30여 척이 있는데 사면을 장막으로 두르고 백기와 홍기를 세우고 바다 가운데 정박하고 있고, 유격병을 분산시켜 해안에 올라가서 가옥을 불태워 연기와 불꽃이 산에 가득하였다. 왜적이 우리 군사가 갑자기 나타난 것을 보고 일시에 배에 올라 급히 노를 저어 나와 해양 중에서 이순신의 군사와 교전하게 되었다. 이순신 등은 군사들을 독려하여 적선에 육박하여 화통(火筒)과 화전(火箭)을 바람을 따라 일시에 쏘아대니 적선 36척이 불타고 바다 물결이 모두 붉었다. 왜적은 패하여 물러갔으나 정운(鄭運)이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에 아군은 징을 쳐서 철수하고, 다음날 다시 싸우기로 약속하였다. 때마침 서쪽에서 온 사람이 왕이 서행(西幸)하였다고 전하므로 이에 각 군은 본진으로 돌아왔다. 승첩한 소식이 행재소에 알려지니 백관이 옷깃을 여미고 서로 축하하며 이순신을 가선대부로 올려 포장하였다. 하루는 이순신의 꿈에 백발의 늙은이가 이순신을 깨워 일으키면서 ‘적이 왔다.’ 하는 것이었다. 이순신이 벌떡 일어나 급히 전함 23척을 거느리고 노량(露梁)에서 원균과 만났는데, 적이 과연 이순신의 배를 엄습해 오므로 이순신이 북을 울려 교전하여 적선 한 척을 불태우고 사천(泗川) 바다 가운데로 쫓아가니 멀리 해상에 산이 하나 보이고 백 명의 왜적이 장사진(長蛇陣)을 치고 그 밑에 11척의 연안을 따라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이때에 아침 조수는 이미 밀려가고 항구의 물은 얕아서 배가 전진할 수 없으므로 이순신이 말하기를,


“이곳은 물이 얕고 바다가 좁아서 배를 돌리기 어려우니 거짓 물러나는 척하고 적을 유인하여 바다의 넓은 곳에 이르렀을 때 큰 배로 돌아서서 치면 승전할 수 있다.”


하니, 원균은 분이 나서 바로 쫓아가 공격하고자 하였다. 이순신이 말하기를,


“공이 병법을 모릅니다. 그렇게 하여서는 반드시 패합니다.”


하고, 곧 소라를 불고 기를 휘둘러 후퇴하였다. 1리를 못 가서 적이 배를 타고 쫓아왔다. 이윽고 좁고 험한 길목에 다다르자 이순신이 북은 한번 크게 쳐 여러 배가 일제히 돌아서서 바다 가운데에서 늘어서니, 바로 적선과 수십 보의 거리에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이순신이 본영에 있을 적에 늘 왜구를 근심하고 새로운 법으로 따로 배를 만들었으니 위에 판으로 덮어 마치 형상이 엎드린 거북과 같고, 노를 젖는 자는 그 안에 있는데 여장(女墻 성위의 얕은 담)이 가로막힌 것 같으며, 좌우 전후로는 화포(火炮)를 많이 싣고 종횡으로 출입하여 베짜는 북과도 같고 물오리 같기도 하였다. 이때에 와서 이순신이 거북선으로 돌진시켜 먼저 적진을 시험하고 적선 12척을 불사르니 남은 왜적이 멀리 바라보며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질렀다. 한참 싸우고 있는데 적의 탄환이 이순신의 어깨에 맞아 등을 관통하였으나, 이순신은 여전히 활과 화살을 쥐고 독전하였는데 전쟁이 끝나고서야 사람을 시켜 칼끝으로 철환(鐵丸)을 파내니, 온 군사들이 비로소 알고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당포(唐浦)까지 추격하였는데 또 적선 20척이 강 언덕에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그 중에 큰 배가 한 척 있는데 위에는 층루를 설치하고 밖으로는 붉은 비단 장막이 드리워졌는데, 적의 괴수 한 사람이 금관을 쓰고 금의(錦衣)를 입고서 모든 적병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순신이 제장으로 하여금 노를 저어 바로 돌격하게 하고, 순천 부사 권준(權俊)은 아래서 위를 쳐다보며 화살을 쏘아 그 괴수를 명중시키니, 왜적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온 군사가 환성을 올리고 해가 저물자, 사량(蛇梁) 앞바다로 회진(回陣)하였다. 군중에서는 갑자기 밤에 놀라 소란을 피웠으나 이순신은 꼼짝 않고 누웠다가 한참 뒤에 방울을 흔들게 하니, 군중이 안정되었다. 얼마 아니되어 다시 당항(唐項) 앞바다로 나갔는데 전라 우병사 이억기(李億祺)가 전선 25척을 거느리고 왔다. 제장들이 외로운 군사로 깊이 들어간 것을 염려하던 차에 이억기의 군사가 오니, 모두 기운이 더욱 났다. 이튿날 모든 군사가 바깥 바다로 나가니 적은 당항 앞 포구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순신이 먼저 순찰하는 배를 보내어 형세를 탐지하게 하였더니 초선이 겨우 바다 어귀에 나가자마자 곧 신호포를 쏘아 적이 있음을 알리므로 여러 군사가 일시에 노를 급히 저어 고기 꿰미처럼 잇달아 나아가 소소강(召所江)에 이르니 적선 26척이 항구에 벌여 있었다. 그 중에 큰 배 한 척은 3층으로 판각(板閣)을 짓고 밖에 검은 비단 장막을 드리웠으며, 앞에는 푸른 일산이 세워졌는데 멀리 장막 안을 보면 은은히 시립(侍立)하고 있는 모양이 보여 그가 두목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몇 번 결전도 하지도 않고 이순신이 거짓 패한 체하고 물러나니, 층각 있는 큰 배가 아군이 물러가는 것을 보고 돛을 올리고 바로 따라왔다. 모든 군사가 양쪽에서 공격하여 날랜 기운으로 적을 무너뜨리니, 적의 괴수가 화살에 맞아 죽고 왜선 백여 척을 불태우고, 적병 백여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물에 빠져 죽은 자도 매우 많았다. 기별이 행재소에 알려지니, 이순신은 자헌대부로, 이억기(李億祺)는 가선대부로 올렸다. 이를 증명하는 시가 있다.


흉적이 바다 가운데 출몰하는데 / 鯨鯢出沒海之央
그 사나움을 누가 한 손으로 막아내랴 / 狂浪誰能一手障
눈물을 뿌리며 배에 오르니 하늘 또한 노하는데 / 洒泣登舟天亦怒
중류에서 노를 저으니 해도 빛을 감추었네 / 中流擊楫日無光
백우선을 휘두르니 삼군이 출동하고 / 暫揮白羽三軍動
금투구를 쓰니 여러 요귀가 숨구나 / 乍着金兜衆妖藏
고개 돌리니 동한 땅에 날랜 장수 있어 / 回首東韓飛將在
웅장한 이름은 천고에 빛나리 / 雄名千古汗靑芳


그때에 적이 또 경상우도로부터 전주 경내에 들어오니 김제 군수 정담(鄭湛)과 해남 현감 변응정(邊應井)이 관군을 규합하여 이끌고 극력 막아서 종일 크게 싸워 적병을 많이 사살하였다. 적이 물러가려는데 때마침 해가 저물고 화살이 다하였다. 적이 다시 공격을 시작하니 두 사람이 힘을 다하여 전사하자, 군사가 드디어 크게 무너졌다. 다음날 적이 전주성 밖에 이르니 관리들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려 하는데 본 고을 사람 전 전적 이정란(李廷鸞)이 입성하여 이속(吏屬)과 백성들을 거느리고 성첩을 굳게 지키면서 성밖에다 가짜 병사들을 많이 만들어놓고, 낮에는 깃발들을 벌여놓고 밤이면 횃불을 늘어놓아 전후의 봉우리 위에 출몰하니 적이 몇 바퀴를 돌아보고는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 또 김덕령(金德齡)은 광주(光州)에서 나왔는데, 자는 경수(景樹)요, 뛰어난 용맹이 있어서 나는 새가 넘어가지 못하고 원숭이가 오르지 못하는 곳도 몸을 솟구쳐 넘기를 평지 밟듯이 하며, 그가 타는 백마도 그 사람같아 하루 천리를 달리고 가는 곳마다 승전하고 포위를 뚫고 전진에 뛰어들기를 마치 사람이 없는 곳에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왜적들이 서로 돌아보고 어이없이 놀라며 부르기를, ‘비장군(飛將軍)이다’ 하고, 그가 지나는 곳에는 모두 칼을 거두고 피하며 감히 교전하지 못하니, 위세와 명성이 크게 떨쳐, 용사와 무부들이 구름과 안개처럼 모여들었다. 드디어 그는 군사를 이끌고 영남에 진입하였는데, 적들이 듣고 여러 곳에 유둔한 적병을 거두어 한 곳에 합쳐 대군(大軍)을 만들어 가지고 항거하였다. 그는 좌의병(左義兵) 진보 현감(眞寶縣監) 임계영(任啓英)과 서로 구원군이 되었다.


○ 현풍(玄風)의 곽재우(郭再祐)는 김덕령(金德齡)이 온 것을 보고서 또한 집안의 종들과 지방의 호걸들을 이끌고 가재(家財)를 전부 내어 군비에 제공하여 정진(鼎津)을 견고히 지키면서 많은 적을 베니 적이 자못 두려워하며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 불렀다. 적이 의령(宜寧) 땅을 넘보지 못한 것은 사람들이 곽재우(郭再祐)의 공이라 말하였다.


○ 김면(金沔)은 죽은 무장(武將) 김세문(金世文)의 아들인데, 거창(居昌) 우척현(牛脊峴)에서 적을 막고 여러 차례 적들을 물리쳤다. 조정에서 본도의 우병사로 발탁하였는데 오래 못 가서 군중에서 전사하였다.


○ 유종개(柳宗介)가 전사하니 예조 참판을 증직하였다.


○ 장사진(張士珍) 역시 군위(軍威)에서 의병을 일으켜서 적을 매우 많이 죽이니, 적이 두려워하여 장장군(張將軍)이라 부르며 감히 그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였다. 하루는 적과 서로 만나 군사를 풀어 추격하는데, 적이 복병을 하고서 유인하였다. 장사진이 승전한 기세로 밀고 나가다가 갑자기 복병한 왜적에게 빠졌으되 오히려 큰소리를 치면서 힘껏 싸웠다. 화살이 다하고 해는 저물었는데, 적 하나가 돌진하여 와서 장사진의 한 팔을 쳐서 자르니, 장사진은 한 쪽 팔로 분격하다가 드디어 말에서 떨어져 전사하였다. 조정에서 수군절도사를 증직하였다.


○ 처음에 박진(朴晋)이 밀양(密陽)에서 돌아와 산골에 들어가 충의군(忠義軍)을 비밀리 규합하여 동서로 출몰하여 가는 곳마다 적을 쳐서 무찌르고 시종 한결같은 절개로 절대로 굽히지 않아, 여러번 위태로운 일이 있었지만 피하지 아니했다. 조정에서는 전 병사(兵使) 이각(李珏)이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하여 바로 잡아 죽이고 박진(朴晋)을 대신 병사로 삼았다. 그때에 적병은 사방에 가득하여 행조(行朝)의 소식이 남방에 통하지 않는 지 이미 오래되니, 인심이 동요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더니, 박진이 병사(兵使)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흩어졌던 백성이 차차 모여들고, 수령은 이따금 산곡(山谷) 사이에서 나타나 일을 맡으니, 비로소 조정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효순(韓孝純)ㆍ이수일(李守一) 등이 선비와 백성을 규합하여 적의 길을 끊은 것도 역시 박진에게 의뢰하였다. 박진은 한편으로 군사를 수습하고 한편으로 급히 조정에 보고하니, 조정이 이로 인해서 적의 정세를 탐지할 수가 있었다. 주상께서 감탄하여 말하기를,


“박진의 행동을 보면 곧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 같으니 박진이 만약 죽는다면 나라 일이 잘못될 것이다. 그래서 박진같은 사람이 어찌 허무하게 죽을 이치가 있겠는가마는 의당 형세를 관찰하여 나가야 할 것이다.”


하여, 그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말하던 중에 넘쳤다. 또 활과 화살을 내리니 박진은 특별한 은혜에 감격하여 마음과 힘을 다해서 마침내 도내의 장사들을 수습하여 점차 진형을 갖추었다. 한 도의 끊어졌던 기맥을 다시 소생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적군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한 것은 박진의 공이었다. 박진은 전 봉사 권응수(權應銖)ㆍ정대임(鄭大任) 등을 시켜 향병(鄕兵)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영천(永川)에서 적을 포위하였는데, 군사들이 적을 두려워하고 나아가지 못하였다. 두 사람 모두 담력과 용기가 있어 당장 몇 사람을 베고 몸을 빼어 나가 사졸들의 앞장을 서니 사졸들이 다투어 성을 넘어 들어가 크게 싸웠다. 적은 이기지 못하고 창고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명원루(明遠樓)에 올라가기도 하였다. 아군은 불을 놓아 공격하니 타죽은 자가 매우 많아 냄새가 멀리 밖까지 풍겼으며, 살아남은 왜적은 경주(慶州)로 도망쳤다. 이뒤로부터 신녕(新寧)ㆍ의흥(義興)ㆍ의성(義城)ㆍ안동(安東) 등지의 왜적은 모두 한 지역에 모였으니, 좌도(左道)의 군읍들이 보전하게 된 것은 영천(永川) 싸움의 공이었다. 이에 박진은 좌도 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경주(慶州) 성 아래에 육박하였다. 적이 몰래 북문(北門)으로 나와 대비하기도 전에 엄습하니, 박진의 군사는 놀라고 소란해져서 안강(安康)으로 돌아왔다. 이날 밤에 다시 결사대 1천여 명을 모집하여 성 밑에 잠복하고 있다가 여러 발의 진천뢰(震天雷)를 성안에 쏘아 여기저기 여러 곳에 떨어뜨렸다. 적이 무엇인지 모르고 다투어 모여들어 서로 밀치면서 구경하다가 갑자기 포가 자연 그 안에서 폭발되니,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 철편(鐵片)이 별처럼 부서지면서 맞아 쓰러지는 대로 즉사하였다. 여기저기에서 모두 폭발되니 한 포에 맞아 죽은 자가 거의 3천여 명이나 되었고, 맞지 않은 자라도 한참이나 쓰러졌다가 일어나니 적들은 놀라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원인을 알지 못하고 모두 신명(神明)이 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드디어 서생포(西生浦)로 도망하였다. 박진은 드디어 경주에 입성하여 수만여 석의 곡식을 얻었다. 사실이 알려지자 박진을 가선대부, 권응수(權應銖)는 통정대부로, 정대임(鄭大任)은 예천 군수로 올려 포상하였다.


진천뢰(震天雷)는 예전에 없던 무기인데, 군기시의 화포장(火砲匠) 이장손(李長孫)이 새로 창안해 낸 것이다. 마름쇠와 철편(鐵片) 등을 인화(引火) 장치와 함께 하나의 원구(圓球)로 만들어 대완구(大碗口)에 실어서 불을 던져 발사하면 5백~6백 보를 날아서 땅에 떨어진 지 한참만에 불이 그 속에서 일어나 폭발한다. 왜적이 이것을 가장 두려워하였는데, 지금 그 제작이 어떠한지 모르니 가탄할 일이다.


○ 적의 한 부대가 다시 해현(海縣)을 돌아나와 진주를 포위하였다. 판관 김시민(金時敏)은 목천(木川) 사람인데, 무과에 올랐고 재략(才略)이 있고 말타고 활쏘기를 잘하였다. 이때 마침 성안에 있었는데 성을 굳게 지킬 계획을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성을 버리고 달아날 생각을 하니, 김시민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을 군중(軍中)에서 맹세하고, 감히 떠난다고 말하는 자는 목을 베라고 호령하였다. 그리고 경내의 사민(士民)들을 수습하여 성에 들어오게 하여 남녀를 섞어 대오를 짜고 병장기를 설치하고 깃발을 세웠는데, 적이 성 아래까지 이르러 몇 겹으로 포위하니 형세는 새알을 깨는 것과 같이 위태로웠다. 김시민은 아내와 함께 직접 술과 음식을 가지고 성을 돌아다니며 군사들에게 먹이고 밤낮없이 분투하니 사람들이 모두 감격하여 죽기로 싸웠다. 적은 대패하여 갑옷을 벗어버리고 무기를 끌고 달아나 감히 다시 진주를 엿보지 못하였다. 이 공으로 김시민은 진주 목사에 올랐는데 그 전투에서 날아온 탄환에 맞아 일어나지를 못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교서를 내려 본도의 군민(軍民)을 선유하였다. 교시는 다음과 같다.


군신(君臣)은 천지(天地)의 상경(常經)이요, 충의는 인도(人道)의 대절(大節)이니, 이는 본래 가지고 있는 사람은 권면할 필요조차 없다. 하물며 영남은 신라 때부터 터전을 잡아 부로(父老)는 효제(孝弟)를 행하고 자제는 시서(詩書)를 익혔도다. 비록 난리를 겪은 뒤일지라도 어찌 분발하는 무리가 없겠는가. 중악(中岳)에서 달밤에 맹세하니 김유신(金庾信)의 칼은 절로 칼집에서 벗어나왔고, 한산(漢山)에서 적을 꺾을 때는 실로 몸에 꽂힌 화살은 고슴도치와도 같았도다. 전에 왜적이 처음 닥쳐왔을 때는 이상하게 한 사람도 창의(倡義)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는 장신(將臣)들이 형세를 살피기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니, 실로 사민(士民)들에게는 뜻밖의 일이었도다. 다투어 놀라 흩어지려 하니 불러모으기가 어려웠는데, 지금 열읍은 텅 비어 한 지방이 깨졌도다. 백성은 어육이 되어 재생을 도모하지 못하고 창고는 잿더미가 되어 손을 쓸 수가 없도다. 내가 서쪽으로 옮겨온 뒤로 이미 남쪽에 대한 희망이 끊어졌더니, 어찌 너희들이 앞장서서 군사를 규합하고 고심하여 적을 토벌하며 의기가 하늘에 뻗치고 열사들이 호응하게 될 줄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말린 밥을 모아 양식으로 삼으니 백성을 괴롭혀 모은 쌀 창고는 텅 비었고, 대를 깎아 활을 만드니 무기고의 병기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정진(鼎津)에서 군사가 출동하자 도망가는 적병이 정신을 잃었고, 무계(武溪)에서 접전했을 때는 떠내려가는 시체가 강에 찼었다. 관군은 어찌하여 번번이 무너지고 의병은 어찌하여 줄곧 승첩하는가. 관군이 두려워하는 것은 형벌인데, 형(刑)이 시행되지 못하고, 의병이 맺어진 것은 의(義)인데 의는 물러나기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과 해자를 만드는 공사를 그만두고 민력을 후히 기르며, 절진(節鎭)을 봉하는 일을 그만두고 군사의 마음을 굳게 단결시킬 줄을 미리 알았던들 떠다니는 혼령들이 어찌 동래(東萊) 들녘에 흩어지며, 독한 칼끝이 어찌 평양성에 이를 수가 있었으랴. 내가 밝지 못한 때문이니 후회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이번에 본도의 배지인(陪持人 지방 관아의 장계를 가지고 서울로 가던 사람) 강만혼(姜萬渾)이 돌아가는 길에 한 장의 과인의 잘못을 서술한 교서로 천리 밖의 내 마음을 전하였으나, 바다와 산을 무사히 거쳐서 진중에 선포가 되었는지 모르겠도다. 이에 최원(崔遠)의 군중에 부탁하여 나의 뜻을 설명하여 알리노니, 적정을 계속 염탐하라. 너희들이 나의 글을 볼 것이니, 나의 회포를 어이 다하랴. 성천(城川)의 이슬과 서리에 종묘사직의 쓸쓸함을 민망히 생각하고, 의주 강가에 장전(帳殿)의 소슬함을 부치는도다.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은 귀천이 다를 것이 없으니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조석으로 간절하도다.


천조(天朝)에서 가엾게 여겨 맹장들에게 명령을 내렸으니 명 나라 군사가 이르는 곳에 산악도 빛을 띠우리라. 가을날은 맑고 길은 마르니 바로 오랑캐를 사로잡을 때요, 말은 살찌고 활은 굳세니 실로 적을 줄일 시기로다. 철마(鐵馬)는 대정(大定)ㆍ청천(晴川)에 뻗치었고 군함은 등래(登萊)ㆍ강절(江浙)에 줄지었도다. 미친 오랑캐가 죄악을 쌓았으니 천벌이 내려져야 할 것인데, 하물며 우리의 의병과 열사들이 경기ㆍ황해ㆍ충청도에서 일어났음에랴. 곳곳에서 적을 베고 날로 전과를 올리니, 실로 천지가 말없이 도와주기 때문이며 이는 바로 국가 재건의 기회로다. 바라노니 그대들이여! 더욱 정충(精忠)을 힘쓸지어다. 듣건대 김성일(金誠一)은 거창에 주둔하고 한효순(韓孝純)은 영해(寧海)를 지킨다 하니, 각기 좌ㆍ우도 관찰사 등의 호칭을 내리고 대소의 의병장들은 차등에 따라 관직을 내리노라. 너희들은 절제(節制)의 지시를 듣고 또한 서로 계획을 짜내서 돌아가는 적을 맞아 쳐서 그 후미를 공격하라. 적이 머물고 있는 곳을 염탐하여 병영을 야습할 것이니, 멀리서 통제하기 어려우므로 기회를 관찰하는 것은 너희들에게 맡기노라. 김인갑(金仁甲)이 물에 빠져 죽은 것을 슬퍼하여 판서를 추증하고, 이형(李亨) 등의 전사를 슬퍼하여 아들 하나에게 벼슬을 주노라. 상과 관직을 어찌 상관하며 옥과 비단을 어찌 아끼랴. 영남 지방을 먼저 숙청하고 하루 빨리 나를 맞이해 주기 바라노라. 내 말을 마치고자 하니 눈물이 먼저 떨어지도다. 내 어찌 잊겠는가. 너희들은 힘쓸지어다. 아! 예악의 나라에서 바다 오랑캐의 기운을 쓸어내고, 산이 숫돌처럼 되고 바다가 가는 띠가 되도록 봉토를 나누어 받는 영광을 누리도록 할지어다. 교시하니 자세히 알기 바라노라.


교서가 이르자 군민(軍民)은 감격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 모두 발분하여 힘쓸 것을 생각하였다. 그때에 황해도(黃海道)와 평안도(平安道)에는 적병이 가득 차 있었는데, 연안(延安) 고을이 고립되어 위험이 더욱 심하였다. 이조 참의 이정암(李廷馣)과 아우 이정형(李廷馨)이 함께 개성(開城)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는데 임진강의 군사가 무너지자 급히 연안(延安)으로 달려갔다. 부중(府中)의 호걸 송덕윤(宋德潤)ㆍ조광정(趙光廷)이 백여 명의 무리를 모아서 맞이하면서,


“공이 예전에 이 땅에 은혜를 베푸셨으니, 여기에 머물러서 우리를 살려주시오.”


하니, 이정암은 웃으며,


“내가 죽을 자리를 얻었도다.”


하고, 바로 입성하여 5백 명을 얻어 효유하고 또 이르기를,


“누가 나를 위해서 사문(四門)을 지키겠는가? 누가 성위에 올라서 적이 참호에 접근 못하도록 막겠는가? 누가 군량을 관리하고 누가 병장기를 수선하겠는가?”


하며, 각자의 재주에 따라서 부서를 나누고, 포(礮)를 돈대(墩臺)에 모아놓고 그 옆에는 솥을 늘어놓았다. 늙은이와 어린이조차도 다 일에 힘쓰고, 사람들이 다 직무에 착실하였다. 하루는 적의 추장 장정(長政)이 재령(載寧)ㆍ신천(信川) 등 여러 고을을 약탈하고 해주(海州)를 함락시킨 뒤, 3천의 군사로 강음(江陰)의 왜적과 합세하여 총출동해 쳐들어오니 성안에서는 크게 겁을 내어 진을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도 있었다. 정암이 말하기를,


“나는 군사들과 백성들과 더불어 생사를 같이 하기로 약속하였다. 백성을 죽음에 빠뜨리고 나 혼자 살기를 도모할 수는 없다. 겁이 나는 자는 마음대로 성을 나가라. 붙잡지 않겠다.”


하니, 온 군사들이 모두 죽기로써 지킬 것을 다짐했다. 해는 이미 기울고 적병은 세 겹으로 에워쌌는데 갑자기 한 적장이 성밖을 두루 돌아보고 성루를 만지며 지나다가 수문장 장응기(張應祺)가 쏜 화살에 가슴을 맞고 죽으니 적병은 기가 죽어 감히 가볍게 나오지 못하고, 서쪽 성에서는 비충(飛衝)을 만들어놓고 성안을 내려다보는 것을 대포로 때려부수니, 불화살이 난발하였다. 성 둘레에는 초가집이 많이 있어 인심이 흉흉해지더니, 홀연히 회오리바람이 크게 불어 연기와 화염이 성밖을 휩쓰니 적은 어찌할 수가 없어 막사를 철거하여 참호를 메우고 성위로 개미같이 기어올랐다. 이정암이 할 수 없음을 알고 쌓아놓은 풀섶 위에 앉아 아들 이준(李濬)에게 이르기를,


“성이 함락되면 스스로 불타 죽겠다.”


하니, 듣는 자가 감격하여 울고 한 마음으로 다 같이 죽을 힘을 다하였다. 혹은 큰 돌을 던지고 혹은 끓는 물을 끼얹고 혹은 불탄 재를 날리며 싸우기를 4일이나 하였는데, 적도 사상자가 반이 넘었다. 이날 밤에 적이 도망을 가려고 시체를 끌어다 다 불태우고 다음날 아침에 포위를 풀고 달아났다. 아군은 추격하여 적의 머리 18개를 베고 소와 말 90여 필과 군량 1백 30여 석을 빼앗았다. 조정에서는 처음에 이정암이 포위당하였다는 말을 듣고 상하가 모두 놀랐는데, 승첩문이 도착해서도 다만 적이 어느날 포위하고 어느날 물러갔다고만 적고 장황한 말은 한 마디도 없으니, 의논하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적을 물리치기는 쉬워도 공로를 자랑하지 않기는 어렵다.”


하였다. 주상께서 특히 가선대부 본도 도순찰사(本道都巡察使)를 명하고, 문무 장관(文武將官)들은 모두 이정암의 절제(節制)를 듣게 하고 제장(諸將) 이하는 차등에 따라 상을 주었다.


○ 전년에 신각(申恪)이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있을 때, 조헌(趙憲)이 왜구(倭寇)가 장차 쳐들어올 때는 연안은 반드시 지켜야 할 땅이지만, 성중에 물이 없는 것이 걱정이라 생각하여, 신각에게 편지를 보내어 북신당(北神堂)의 물을 성중에 끌어들여 방비할 준비를 하라고 하였더니, 이때 와서 그의 힘을 입었다.


○ 앞서 강원도 조방장 원호(元豪)가 여주(呂州 여주(麗州))로부터 본진에 귀환하였는데, 적병이 원주ㆍ충주ㆍ양주ㆍ광주(廣州) 등지에 출몰하므로, 원호(元豪)가 그들의 태만함을 틈타서 두 번 이겼다. 처음에 구미포(龜尾浦)에서 섬멸하였고, 또 이천 부사(利川府使) 변응성(邊應星)과 합병하여 배에 사수(射手)를 싣고 안개가 끼었을 때에 마탄(馬灘)에서 요격하여 많은 적병을 죽였다. 이로 인하여 원주로 가는 왜적의 길이 끊기었다. 순찰사 유영길(柳永吉)이 또 원호를 재촉하여 급히 진격하도록 하니 원호는 이미 연승을 하였기 때문에 적을 가볍게 보는 마음이 있었다. 적이 그가 올 것을 미리 알고 복병을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원호가 모르고 진격하다가 복병이 갑자기 덤벼들어 드디어 여기에서 죽었다.


○ 또 조호익(曺好益)은 창원(昌原) 사람인데, 훌륭한 뜻과 행실이 있었다. 남에게 무함을 당하여 온 집이 강동(江東)으로 이사를 왔는데, 가난이 날로 심하여 생도들을 가르치며 20여 년이나 살았으나 지조가 더욱 굳었다. 임금의 거가(車駕)가 평양에 이르러서 그의 죄를 용서하고 불러 의금부 도사로 임명하였다. 평양이 포위되자 그는 강동(江東)으로 가서 군사를 모아 평양을 구하고자 하였다. 평양은 이미 함락되고 군민이 모두 흩어지자 조호익은 다시 행재소로 돌아왔다. 중국 군사가 강을 건너오리라는 말을 듣고 그는 군사 수백 명을 이끌고 상원(祥原)에 출진하여 흩어져 노략질하는 적을 요격해서 많은 적을 베었다. 조호익은 활 쏘고 말 달리는 데는 익숙하지 못하였는데 다만 충의로 군사의 마음을 격려하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 이때에는 온 나라가 병란을 피하느라 마치 끓는 솥안에 있는 물고기같이 위급하여, 선문(禪門)의 중들도 모두가 달아났다. 이때에 청허선사(淸虛禪師) 휴정(休靜)은 묘향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승니(僧尼)들이 서산대사(西山大師)라고 존칭한 사람이다. 속성(俗姓)이 최씨(崔氏)이니 그 본관은 전주이다. 행실이 고매하고 율법이 엄하며 석가의 경전에 달통하고 문장에도 능하여, 조정의 사대부들과도 두루 사귀었다. 그의 뛰어난 제자들이 나라에 널려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문도 1천 5백 명을 규합하여 칼을 짚고 주상을 행재소에 가서 뵈었다. 상이 이르기를,


“국난이 이러하니 네가 구제할 수 없겠는가?”


하니, 대사가 눈물을 흘리고 절하면서,


“국내의 승도로서 늙고 병들어 소임을 맡을 수 없는 자는 있는 곳에서 분향수도(焚香修道)로 신의 도움을 기도하도록 하고, 그 나머지들은 다 모집해 와서 전장에 나가고자 합니다. 신들이 비록 속세를 떠났으나 국내에서 태어나 성상(聖上)의 은혜와 길러주심을 입었사오니, 어찌 한번 죽는 것을 아끼겠습니까. 원컨대, 충성을 바치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크게 기뻐하여 일국도대선사 팔도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一國都大禪師八道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의 칭호를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그의 무리를 이끌고 순안(順安)의 복흥사(伏興寺)에 주둔하고 팔로(八路)의 사찰에 격문을 전하니, 건장하고 용감한 승려들이 오지 않는 자가 없었다. 휴정(休靜)의 높은 제자 처영(處英)은 지리산에서 일어나 권율의 막하에 들어갔고, 유정(惟政)은 금강산에서 일어났다. 유정(惟政)은 호는 송운(松雲) 또는 사명산인(四溟山人)이라고 하였다. 용모가 호걸스럽고 수염을 깎지 아니하였으며, 성품과 도량이 넓고 불전(佛典)에도 달통하였다. 이때 그는 표훈사(表訓寺)에서 강경(講經)을 하고 있었는데, 적병이 산중에 들어오자 중들이 다 도망하였으나, 유정만은 가부좌하고 움직이지 않으니 적이 보고 감히 달려들지 못하고, 어떤 자는 합장하여 경례를 드리고 가기도 했다. 근왕의 교서와 휴정(休靜)의 격문이 산중에 이르자, 유정은 불탁(佛卓) 위에 펴놓고 여러 중을 불러놓고 읽으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효유하니, 산중의 중 7백여 인이 다 일어나 서쪽으로 근왕하러 떠났는데, 평양에 이르러서는 그 무리가 천여 명이 되었다. 성의 동쪽에 주둔하여 순안(順安)의 군사들과 서로 긴밀히 구원하는 병력이 되었다. 이를 증명하는 시가 있다.


국가는 다난하고 파도도 거센데 / 邦家多難海波驚
옥련은 휩쓸려 압록강에 머물렀네 / 玉輦飄□鴨水營
어디 군사가 위급함을 구제하겠으며 / 何處蚍蜉能濟急
충의로운 맹세 몇 사람이나 할 것인가 / 幾人忠義更同盟
지금껏 은택은 다같이 입었으니 / 由來恩澤曾均被
나라 생각은 유나 선이 다를 수가 있으랴 / 却喜儒禪不異情
묘향산 휴정대사를 보아라 / 請看香山靜老宿
계도(중이 가지는 작은 칼) 휘두르는 곳에 장삼옷이 가볍도다 / 戒刀揮處衲衣輕


○ 7월. 중국 조정의 부총병(副總兵) 조승훈(祖承訓) 등이 차례로 강을 건너왔다. 상은 접반사 유성룡을 보내어 동강(東江)에서 맞이하여 의주로 왔는데, 유격 사유(史儒)를 선봉으로 삼아 가산(嘉山)으로 진격하였다. 병조 판서 이항복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조 장군은 조급하고 지모가 부족하니, 반드시 성공하지 못하리라.”


하였다. 조승훈이 가산에 이르러 우리 나라 사람에게 묻기를,


“평양의 적이 이미 물러간 것이 아닌가?”


하니 물러가지 않았다고 대답하자, 조승훈이 술잔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빌기를,


“적이 아직 있음은 반드시 하늘이 나에게 큰 공을 이루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이날 순안(順安)에 이르렀는데, 삼경에 수십 리를 행군하고 조승훈과 사유는 더 진군하려고 의논하였다. 군중에 왕만자(王蠻子)가 있었는데 점을 잘 친다고 하였다. 조승훈이 물으니, 왕만자는,


“오늘이 가장 좋은 날입니다. 물러서지 마시오.”


하였다. 조승훈이 그렇게 여기고 진격하여, 새벽에 성밑에 이르렀다. 군사를 지휘하여 성을 부수고 조승훈이 칠성문(七星門)으로 들어갔는데, 성내가 길이 좁고 굽은 골목길이 많아서 말이 잘 나갈 수가 없었다. 적이 험준한 곳에 의지하고 조총을 마구 쏘아대니, 철환(鐵丸)이 비오듯 하였다. 사 유격(史游擊)이 앞장서서 육박전을 벌여 군마가 많이 죽었다. 사유(史儒)가 성위에서 활을 쏘니, 적이 그가 장령(將領)인 것을 알고 일제히 총을 쏘아 사유는 탄환에 맞아 땅에 떨어지고 대조변(戴朝弁)ㆍ천총 장국충(張國忠)이 또한 탄환에 맞아 죽었다. 조승훈과 마세륭(馬世隆)은 부상을 입고 후퇴하였는데, 마세륭은 말에서 떨어져 죽고 후군(後軍)으로 진흙 속에 빠져 나오지 못한 사람은 모두 적에게 피살되었다. 조승훈은 군사가 무너지자 하룻밤에 2백 리를 달려 안주성(安州城) 밖까지 와서야 말을 세우고 역관 박의검(朴義儉)을 불러 말하기를,


“내 오늘 적을 많이 죽였다. 불행히 사유격이 전사하였고, 천시(天時)가 불리하여 큰비가 와서 진흙탕이 되어 적을 섬멸치 못하였으니, 마땅히 군대를 더 보태서 다시 나가리라. 너희 재상은 동요하지 말고 부교(浮橋)도 철거하지 말라.”


하고는, 말을 마치자 달려 이강(二江)을 건너 공강정(控江亭)에 주둔하였다. 조승훈은 전쟁에 패한 뒤로 간담이 서늘하여 적이 추격할까 두려워 이강(二江)을 건너려고 이처럼 급히 달렸던 것이다. 접반사 유성룡과 종사관 신경진(辛慶晋)이 가서 위로하고 양식과 찬을 실어 보냈다. 조승훈이 공강정에 이틀을 머무는데 밤낮 계속 큰비가 오고 군사는 들판 가운데 노숙하니, 의복과 갑옷이 다 젖어 모두 조승훈을 원망하므로 부득이 요동으로 퇴환하였다. 조승훈의 군사가 패하자 적은 더욱 교만하여져서 우리 군중(軍中)에 글을 보내왔는데, 양떼를 가지고 한 호랑이를 치는 격이라는 말이 있었으니, 양은 명 나라 군사에 비유하고 호랑이는 자신들을 비유한 것이다. 또 말하기를,


“일본의 해군 10여만 명이 다시 서해로부터 올 터인데 대왕(大王)의 행차는 이로부터 어디로 가겠는가?”


하였다. 적이 본래 수륙으로 합세하여 승전한 기세를 몰아 서쪽으로 쳐들어오려고 하였는데, 이미 이순신에게 저지당하여 나오지 못한 것이다. 이순신은 또 이달 초 6일에 원균(元均)ㆍ이억기(李億祺) 등과 노량(露梁)에서 모였는데, 적선 70여 척이 견내량(見乃梁)에 머물고 있는 것을 알고 바로 배를 정비하고 바다로 나갔다. 적은 우리 군사의 세력이 큰 것을 보고 배를 돌려 입항(入港)하였다. 항구에는 원래 70여 척이 길게 줄을 지어 진을 치고 있었는데, 항구가 좁고 물이 얕은데다가 숨겨진 섬들이 많아서 돌아 나오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이순신은 군사를 조금 내보내서 적을 유인하니, 적이 보고서 전부 나와서 추격하여 왔다. 아군은 싸우기도 하고 후퇴하기도 하여 한산도(閑山島) 바다까지 끌고 나와서 배를 돌려 접전하는데, 기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불화살과 화포를 함께 발사하였다. 적이 기세가 꺾이어 조금 후퇴하자 장수와 군사들이 소리를 지르고 분발하여 적선 63척을 불태우니, 남은 적 4백여 명이 배를 버리고 해안에 올라 도망하였다. 여러 장병이 안골포(安骨浦) 앞바다까지 진군하였을 때 또 적선 40여 척이 있었다. 그중에 3척은 층루를 세웠는데 여러 배가 차례로 줄을 지어 정박하였다. 적은 이미 여러번 패한 터라 적접 충돌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앞에는 얕은 항구를 의거하고 뒤로는 견고함을 지고서 감히 나오지를 못하므로 이순신은 군사들을 독려하여 교대로 공격하였다. 해가 저물고 안개가 사방에 깔렸는데 남은 적 20여 척이 밤을 타서 항구를 빠져 달아나므로 추격하여 1백 50여 명을 베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수없이 많았다. 이에 군공과 명성은 크게 떨치었고, 정헌대부로 진급되었다. 승전한 뒤 이순신은 문득 제장을 경계하며,


“자주 승리를 하면 교만하기 쉬운 법이니 제장은 삼가라.”


하였다. 이때 적이 여러번 호남을 엿보고 소란을 피우니, 이순신은, 국가의 군수물자가 모두 호남에 의지하고 있으니 호남이 실패하면 국가는 망한다고 생각하고, 지혜를 다하고 사려를 깊이하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서 드디어 적의 한 팔을 자르니, 행장(行長)이 비록 평양을 빼앗기는 하였으나 감히 더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 조 총병(祖摠兵)이 강을 건너 돌아가서 요동 총병 양소훈(楊紹勳)에게 보고하기를,


“조선이 반역하여 전쟁중에 조선의 한 진영이 적에게 가담하였기 때문에 패전하였습니다.”


하니, 양소훈은 공문을 보내어 책망하였다. 산해관 주사(山海關主事) 장동(張棟) 역시 양승훈의 말을 신용하고 조선을 계속 의심하였다. 병부에서는 금의도지휘사(錦衣都指揮使) 황응양(黃應暘)을 보내어 의주에 가서 사실을 다시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왕은 그를 중강(中江)에서 맞이하였다. 황응양이 왜의 서신을 얻어 증거를 삼고자 하므로 예조 판서 윤근수가 적이 대동강에서 보낸 서신을 두 장이나 보였으나 황응양은 믿지 아니하였다. 이항복이 서울에 있을 때 이미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염려하고 신묘년(1591, 선조 24) 통신사 등에게 준 왜의 서한을 가지고 있다가 그 편지를 보이니, 황응양이 가슴을 치며 크게 통탄하고 주상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아뢰기를,


“귀국의 사정이 이러한데도 중국의 의심을 면하지 못하고, 중국을 대신하여 병화를 입었는데도 도리어 악명을 입으니, 천하에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조선을 위하여 사실을 해명하겠습니다.”


하고, 즉시 돌아가 병부 상서 석성(石星)에게 고하기를,


“조선의 임금과 신하가 초야를 헤매이며 나라와 함께 몸이 없어질 망정 천자의 은혜를 저버리지 아니하였으니, 군사를 일으켜서 구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니, 석성이 듣고 마음에 감동되어 이에 군사를 출동시켜 구원하기를 청하게 되었다. 이때 중국에서는 의논이 일치하지 아니하였다. 혹은 압록강을 굳게 지켜 그 변동을 관망하자고 하고, 혹은 이적(夷狄)끼리 서로 치는 것은 으레 있는 일이므로 중국이 구원할 필요가 없으니, 마땅히 압록강을 기키고 무력을 드러내서 시위하자 하고, 혹은 외번(外藩)이 나라를 잃게 되었으니, 우리가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기도 하였다. 석성은 또 화약과 적을 막아낼 병기를 먼저 주자고 하니, 과도관(科道官) 등이 상본(上本)하여, ‘병기와 화약을 외국에 주는 것을 금지한 것은 고황제의 법이니, 어길 수 없다.’ 하자, 석성이 다투어 말하기를,


“고황제(高皇帝)가 말씀하신 외국이란 워낙 멀리 있어서 명색만 속국이지 그 나라의 흥망이 중국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일은 국내의 일과 같은데, 만약 왜가 버젓이 조선에 살면서 요동을 침범하고 산해관에 이르게 된다면 경사(京師)가 진동할 것이니, 이는 곧 배와 가슴에 있는 병과 같은데, 어찌 예사로 논할 수 있으랴. 만일 고황제께서 오늘날에 계신다 하더라도 의심없이 반드시 내려줄 것이다.”


하였다. 그때에 사은사 신점(申點)이 옥하관(玉河館)에 있었는데 석성이 중정(中庭)에 불러들여 요동의 변을 보고한 문서를 꺼내 보였다. 신점이 크게 통곡하고 일행과 함께 조석으로 간절히 애원하고 매일같이 아문(衙門)에 이르러 강력히 원병을 요청하였더니, 황제는 문무 대신ㆍ구경(九卿)ㆍ와도(科道) 등 관(官)이 모여 여러 가지를 의론하도록 명하였다. 그 논의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력 20년 7월 일, 먼저 해당 병부의 제본(題本)에, ‘특별히 대신 경략을 섬서(陝西) 각 진에 보낼 것과 군사를 거느려 왜노를 칠 것 등에 관하여 성지(聖旨)를 받들기를, ‘보낸 대신이 부(府)ㆍ부(部)ㆍ와도(科道) 등의 관에 도착시켜서 회의하고 와서 말하라.’ 하셨습니다. 각 아문에 이문(移文)하여 통지하는 것 외에 근래 해당 섬서독무 제신(諸臣)들의 주보(奏報)에 적의 형세가 군색해져서 멸망할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경략을 보낼 필요가 없는 듯하다는 것과 왜가 조선을 범한 일에 대해서는 근래 요동 독무관의 자문에, ‘조선 팔도를 이미 다 차지하고, 또 인민을 어루만지며 쌀과 포목을 흩어주어서 항복하도록 꾀니 하는 짓이 헤아릴 수 없다.’는 것과 전항(前項)에 정왜문무대신(征倭文武大臣)을 보내야 할 것인지의 여부는 응당 속히 모여 의논하되, 본월 18일 5부(府)ㆍ9경(卿)ㆍ과도관이 궐문에 일제히 나아가 공동으로 회의한 것에 따르시리라 생각됩니다. 해당 후군도독부 장부사태부 겸태자태부 정국공(後軍都督府掌府事太傅兼太子太傅定國公) 서문벽(徐文璧)ㆍ중군도독부 장부사 정원백(中軍都督府掌府事靖遠伯) 왕학례(王學禮)ㆍ좌군도독부 장부사 오계작(吳繼爵)ㆍ우군도독부 장부사 숭신백(崇信伯) 비갑금(費甲金)ㆍ전군도독부 장부사 영강후(永康侯) 서문위(徐文偉) 등의 의논에는, ‘왜가 우리 울타리인 조선을 이겼으니 출병하여 구원하는 것이 진실로 좋은 방책입니다. 그러나 꼭 매우 급박하고 절실한 때에 모름지기 헤아려서 행해야 합니다.’ 하고, 해당 이부 상서 손농(孫鑨)ㆍ시랑 진우폐(陳于陛)의 의논은, ‘정왜대신을 보내는 것은 진실로 지력(智力)으로 치는 것이 상책이지만 우리 군사는 지형에 익지 못하고 군량을 계속 대기 어려우니, 적진에 깊이 들어가는 것을 가벼이 의논할 수 없습니다. 본 병부의 2좌(佐)에 1원(員)을 더 두되, 병기(兵機)에 익히 단련한 자를 구해서, 일이 없으면 본 병부에서 조도(調度)하고, 일이 급하면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하여 제로(諸路)의 응원이 되게 하소서.’ 하고, 호부 상서 양준민(楊俊民)의 의논은, ‘강해(江海)가 넓고 멀어 험하고 평탄함을 헤아리기 어렵고 마초(馬草)와 군량을 마련하기 어려우니 윤조(綸詔 중국 황제의 조서)를 내시어 조선의 신민(臣民)에게 선유하여 의병을 모집하여 옛 나라를 광복하게 하기만 못합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는 본디 화기(火器)가 없고, 산동 순무(山東巡撫)에서 제조한 것이 자못 많다고 들었는데, 필요한 수량을 나누어주소서.’ 하고, 호부 시랑 노유정(盧維楨)의 의논은, ‘대신은 모름지기 왜의 사정을 익히 알고 본디 홍제(弘濟)에 우수한 자를 얻어야만 바야흐로 보내기를 의논할 수 있습니다.’ 하고, 예부 시랑 한세능(韓世能)의 의논은, ‘조선을 은혜로 어루만질 것이고, 군사를 동원하여 구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며, 또 절직(浙直)에는 총병을 설치하여 남병(南兵)을 제압하게 하고, 진강(鎭江)에는 총병을 설치하소서.’ 하고, 형부 상서 손비양(孫丕揚)의 의논은, ‘연해의 독무에 비왜칙서(備倭勅書)를 두어 그 지역을 구획하여 나누어 막게 하되, 순천(順天) 10로에는 유병영(游兵營)을, 보정(保定) 6부(部)에는 민기병영(民奇兵營)을, 산동에는 비왜위(備倭衛)를 두어, 왜와 싸운 경험이 있는 장수들을 다시 뽑아서 수전(水戰)을 가르치도록 하소서.’ 하고, 공부 상서 증동형(曾同亨)의 의논은, ‘경략(經略)을 다시 설치한다면 평일에 총독을 설치한 의의가 무엇이겠습니까. 인민은 적고 관리만 많으면 반드시 일을 그르치게 될 것이니, 계요총독부(薊遼總督府)에 비왜칙서를 증설하는 것이 편의하겠으며, 예전의 전례에 비추어 병부 시랑 1원을 증설하소서.’ 하고, 도찰원 좌도어사(都察院左都御史) 이세달(李世達)의 의논은, ‘정왜 대신을 파견하는 것은 의리에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만, 시세를 헤아려서 시행함이 차례가 있어야 합니다. 왜노가 실컷 노략질하였으니, 오래지 않아 반드시 돌아갈 것이요, 만약 그대로 평양 등지에 있게 된다면 다만 앞서 분부대로 명령을 행할 뿐이니, 요동 무진장(遼東撫鎭將)이 먼저 병마(兵馬) 2개 부대를 출동시키고 다시 2개 부대를 첨가하되, 지모와 용맹이 있는 장관(將官)을 가려 군량을 많이 싸 가지고 그 경내에 바로 들어가서 조선 각 도의 용장ㆍ정병과 협동하여, 기회를 살펴 협력하여 적을 쳐부수기를 도모하고, 혹은 각 부근에 복병시켰다가 맥없이 돌아가는 것을 쳐부순다면 이기지 못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왜노로 하여금 조선의 개성과 평양을 차지하게 하여 그대로 주저앉아 떠나지 않고, 국왕이 이미 와서 내국(內國)에 붙으면 저 백성들이 임금이 없어 인심이 붙일 곳이 없어질 것입니다. 반드시 국왕에게 선유하여 저들 가운데 충의로운 배신으로 하여금 왕의 자제 중에 어진 이를 가려서 권서국사(權署國事)하게 하여, 여러 모로 각 도의 호걸들을 소집해 협력하여 근왕하게 하여 빨리 회복하도록 한 뒤에 우리의 선견 대장(先遣大將)이 정병을 거느리고 수륙으로 아울러 진격하여 섬멸한다면 실로 또한 어려울 것이 없을 듯합니다. 또 모름지기 선견 대장이 사용해야 할 병마와 선척과 마초나 군량을 어디서 준비하겠습니까? 반드시 다 넉넉해야만 장수를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계획으로는 요좌 진무에서 빨리 행할 것 뿐이니, 적당한 사람을 많이 차출하여 속히 조선에 가서 왜노의 거주를 정탐하여 수시로 빨리 보고하게 하여 진지(進止)를 결정하소서.’ 하고, 통정사(通政使) 두기교(杜其驕) 등의 의논은 ‘문무 대신은 재주와 명망이 충실한 자를 살펴서 5부와 첨서(僉書)의 반열을 떠나지 못하게 하고, 마땅한 사람을 추천하여 쇄약(鎖鑰)을 삼가면 요좌 봉강(封疆)의 경계로 인하여 구해낼 방도가 있으며, 또 조선이 제 나라를 회복할 마음을 격동시킬 수 있습니다.’ 하고, 대리시경(大理寺卿) 조세경(趙世卿) 등의 의논은 ‘조선이 공손히 순종한 지 오래였는데, 하루아침에 왜노의 짓밟음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즉시 수신(帥臣)을 보내어 정벌하여, 망국을 보존하고 번방을 튼튼히 하는 것이 또한 좋은 계책이지만 왜노가 조선을 새로 깨뜨리려는 속셈도 다 알기 어려우니, 관(官)을 보내어 정벌하는 것은 가벼이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고, 이과도급사(吏科都給事) 이여화(李汝華) 등의 의논은 ‘대신이 적진 깊이 들어가서 정벌하는 것은 지형에 익숙하지 못하여 군량을 이어 대기 어려우므로 형세가 반드시 보낼 수 없습니다.’ 하고, 하남 도어사(河南都御史) 부호례(傅好禮) 등의 의논은 ‘왜노가 금과 비단이나 자녀들을 도모하지 않고 조선을 점거하고 있으니, 반드시 딴 뜻이 있는 듯합니다. 하물며 관백(關白)이 필부로 나라를 빼앗고 또 많은 나라를 아울러 차지하여 드디어 조선을 깨뜨렸으니, 이 또한 강적이므로 문무 대신 경략을 보내야 하나 저들의 지경에 깊이 들어가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한 것 등을 살펴보았습니다. 온전한 것으로써 승리를 취하는 것은 제왕의 군사요, 저들의 망할 것을 밀어서 우리의 보존할 방법을 튼튼하게 하는 것은 천조의 의리입니다. 모름지기 해당 조선의 주보(奏報)에 왜의 기세가 창궐하다 하니, 신들의 관직이 본 병부에 속해 있으므로 의리에 쳐 없애야 할 것입니다. 하물며 이미 우리에게 공손히 순종하는 속국을 함락하고 우리의 가까운 울타리를 거두어서 큰 멧돼지나 긴 구렁이처럼 탐욕에 한정이 없습니다. 만약 저들로 하여금 깊이 뿌리가 박히도록 한다면 반드시 화가 우리 중국에 미칠 것입니다. 신들이 애초에 특별히 문무 대신을 보내어 군대를 드날려 정벌하자는 의논은 우리의 작은 나라를 사랑하는 인덕(仁德)을 드러낼 뿐 아니라 또 저들이 내지(內地)를 범하려는 생각을 중지시키는 것이니, 병(兵)은 미리 소문내는 것을 귀히 여기는데 대개 의도하는 것이 있습니다. 도로를 알기 어렵고 마초와 군량을 계속 공급하기가 어렵다는 것으로 말하면 신하들의 의논한 내용이 진실로 이유가 있는 의견이지만, 조선 국왕이 우리에게 목숨을 맡기고 구원을 매우 급하게 바라는 것을 생각하면, 저들이 길을 인도할 것이니 도로를 알기 어려운 걱정은 없으며, 저들이 군량을 마련할 터이니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것도 어려운 걱정은 없습니다. 또 담당 신하들이 일찍이 정예 인원을 보내어 평양 깊숙히 들어가서, 왜노가 인민을 불러모아 안심시키고 병장기를 정돈하면서 20여만 명이라 하는데 실제로도 수만 명임을 직접 보고 왔으니, 이러한 상황을 어찌 가벼이 볼 수 있겠습니까. 다만 요동 진무가 이미 군사를 내어 가서 응접하니 특별히 문무 대신을 보내는 것에 대하여 기다려야 할 듯하다고 한 것은 요동 진무로서도 당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 신하들이 의논드린 것에 의거하여 말한다면, 사람마다 나라에 대한 계책이 충성스럽기는 같습니다. 그 안에 조선에 선유하여 의병을 소집하는 것같은 것이 망국을 진작시키는 으뜸가는 계책이니, 바라옵건대, 윤음을 내리시어 달려 보내어 한편으로 조선 국왕에게 직접 알려 팔도의 배신(陪臣)에게 격문을 전달하여 근왕병을 크게 모집하여 구업을 회복하도록 빨리 도모하게 하고, 우리는 강병을 더 보내어 함께 섬멸을 도모하소서. 왜노가 만일 먼저 도망친다면 우리도 깊이 들어갈 필요가 없고, 만일 군대를 거둬모아 웅거하면서 조선을 멸망시키려고 우리와 겨룬다면 하늘의 토벌을 크게 드러내어 단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때에 가서 크게 군대를 징발하여 문무 대신을 특별히 보낸다면 이부ㆍ공부가 의논한 대로 병부 시랑 1원을 더 설치하여 왜의 일을 오로지 처리하게 하자는 것이요, 이는 곧 신들이 말한 경략대신을 선임해야 한다는 것이거니와, 좌도어사 이세달이 청한 대신을 선임하여 강병을 거느리고 수륙으로 함께 진격하게 하자는 것은 바로 신들이 말한 무신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오니, 제신들의 의논이 신들과 같지는 않으나 그 뜻은 처음부터 서로 합치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신들이 예부와 이부 및 보정(保定)ㆍ산동 독무에게 공문을 보내어 일체 조회한 대로 시행하게 하소서.’


○ 성지(성지)를 받았는데, 다음과 같다.


조선이 왜의 침입으로 함몰되어 국왕이 매우 급하게 구원병을 요청한다. 이미 많은 관원의 회의를 거쳤고, 너 병부에서도 정보를 엿들어 실정을 알아냈으니, 곧 해야 할 일을 헤아려서 빨리 가서 구하고, 늦추어서 소용없게 되어 도리어 우리 변경에 해를 끼침이 없게 하라. 관을 설치하고 장수를 보내는 일에 관해서는 모두 의논드린 대로 하라. 잘 알았노라.


○ 병부에서 곧 먼저 원임 유격장군 장기공(張奇功)을 차임하여 은 2만 냥을 가지고 우리 나라에 보내주어서 마초와 양식을 사들여서 군량을 대게 하고, 또 흠차통령 절직조병 신기영 좌참장(欽差統領浙直調兵神機營左參將) 낙상지(駱尙志)를 보내는데 남병(南兵) 3천 명을 거느리고 의주 압록강 가에 둔을 치게 하였다.


낙상지는 호는 운곡(雲谷), 절강(浙江) 여요현(餘姚縣) 사람인데, 힘이 아주 뛰어나 천 근의 물건을 들 수 있으므로 낙천근(駱千斤)이라 불렀다. 또 황차통령남북조병(皇差統領南北調兵) 원임 부총병(原任副摠兵) 사대수(査大受)에게 보군(步軍) 3천 명을 거느리고 먼저 압록강을 건너가서 행궁을 호위하게 하였다. 사대수는 요동 철령위 사람이니, 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梁)의 가정(家丁)이다. 날래고 씩씩하며 싸움을 잘하여 공을 여러번 세워 총병관에 이르렀다. 증명하는 시가 있다.


비호같은 장사들 압록강 건너오니 / 羆虎先驅渡鴨江
바다의 사나운 왜적들이 일시에 항복하리 / 鯨鯢海若一時降
황은이 넓고 넓어 하늘과 같아 / 皇恩浩蕩同天覆
다시 살아난 쇠잔한 백성 두 줄기 눈물을 흘리네 / 肉骨殘氓涕淚雙


○ 8월 1일. 순찰사 이원익(李元翼)ㆍ순변사 이빈(李薲) 등은 수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순안(順安)에 유둔(留屯)하고, 별장(別將) 김응서(金應瑞) 등은 용강(龍江)ㆍ삼화(三和)ㆍ증산(甑山)ㆍ강서(江西) 4개 읍의 군대를 거느리고 20여 개의 둔을 만들어 평양 서쪽에 진을 치고, 김억추(金億秋) 등은 수군을 거느리고 대동강 하류에 진을 쳐서 서로 지켜주는 형세를 만들었다. 그날 이원익 등이 제장들과 약속하고 일제히 진격하는데 평양성 북쪽으로부터 홀연히 적의 선봉을 만나 갑자기 맞닥뜨려 적 20여 명을 쏘아 죽였는데, 얼마 못 가서 적의 대군이 이르러 군졸이 놀라 무너지고 강변의 용사들 또한 손실이 많아 드디어 순안에 돌아와서 둔쳤다. 그때 중국 조정에서 바야흐로 나와 구원할 것을 의논할 적에 마침 섬라국(暹羅國) 사신이 와서 공물을 바쳤는데, 이 의논을 듣고서 도와서 왜국병을 멸망하고자 하였다. 병부에서 곧 제독주사(提督主事)의 게보(揭報)에 따라 상본(上本)하기를,


“섬라국왕 사신 악바라(握叭喇)가 군사를 독려하여 왜의 소굴을 소탕하기를 원하는 등의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성지를 다음과 같이 받았다.


오랑캐 나라 사신이 말한 내용에 의거하면 충의를 자세히 알 수 있으나, 일이 중대함에 관계되니 돌아갈 때 양광 총독(兩廣摠督)에게 가는 이문(移文)을 가지고 가게 하되, 일에 능숙한 관원 한 사람을 별도로 뽑아 오랑캐 나라 사신과 동행시켜 조선에 가서 조정의 덕의를 선유하고 회문(回文)을 가지고 와서야만 바야흐로 거행할 수 있다. 그 나머지는 모두 의논드린 대로 하라.


○ 병부에서 성지에 의하여 선유하고, 또 절강 사람 심유경(沈惟敬)을 유격장군으로 삼아 보내왔는데, 천자의 명을 받들고 압록강을 건너와서 왕과 의주에 모여 덕음을 선유하였다. 심유경은 절강 사람이라 하기도 하고 복건(福建) 사람이라 하기도 하였다. 그 아비가 장사하러 일본에 왕래하였기 때문에 일본의 일을 잘 알았다. 또 스스로 말하기를,


“가정 연간에는 절직총독(浙直摠督) 호종헌(胡宗憲)의 수하에 있었는데, 간첩을 사용하여 왜인을 많이 독살하여 왜국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고 조정에 글을 올려 이로 인하여 나오게 되었고, 왜적의 실정을 정탐하는 것도 편의대로 처리할 것을 허락받았다.”


하였다. 그달 25일에 심유경이 순안에 도착하여 건산(乾山)에 올라 평양성을 바라보고 곧 통첩을 써서 자기 집 안사람 심가왕(沈嘉旺)에게 주었는데, 심가왕이 누런 보자기에 싸서 등에 짊어지고 말을 타고 곧장 달려서 보통문(普通門)을 거쳐 들어가서 적에게 힐문하기를,


“무슨 까닭으로 우리 속국에 깊이 들어와서 감히 천자의 군사에 항거하는가?”


하였다. 적의 추장 행장(行長)은 곧 절강 포로 장대선(張大膳)을 시켜 와서 서로 모여 의논할 것을 청하니, 심유경이 29일에 단기(單騎)로써 만나기로 했다. 행장은 또 심유경에게 글을 보내기를,


“가정 연간에 중국 조정의 장단(蔣丹)이란 자가 우리 일본을 유인하여 화친을 약속하고 공물(貢物)을 통하게 하겠다 하고는 복병을 하였다가 우리 사절을 남김없이 죽이더니, 오늘날 중국 조정에서 온 자도 장단의 옛일과 같은 짓을 하려는 것이나 아니오?”


하니, 심유경이 말하기를,


“중국 조정은 속국이 망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 군사를 보내어 와서 구원하려는 것이다. 너희 나라가 만약 마음을 고쳐 군대를 풀고 돌아간다면 일본의 백성들도 다 같은 우리 백성이니 중국 조정에서는 평등하게 보아 똑같이 사랑할 것이다. 어찌 속임수를 써서 백성의 목숨을 해치겠는가?”


하였다. 행장은 이를 믿고 기일이 되어 산밑에 진영(陣營)을 벌려 놓았다. 심유경이 가려는데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겨 만류하는 자가 많으니 심유경은 웃으며,


“저들이 어찌 나를 해칠 수 있겠는가?”


하고, 집안 하인 서너 명을 데리고 떠나 왜의 진영 안에 들어가서 행장ㆍ조신(調信)ㆍ의지(義智)ㆍ현소(玄蘇)ㆍ종일(宗逸) 등과 만나보았다. 우리 군사가 대흥산(大興山) 꼭대기에 올라 바라보니, 왜군이 매우 많고 창칼이 서릿발처럼 번뜩이며, 심유경이 말에서 내려 진영 속으로 들어가는데 왜적들이 사면을 에워싸서 잡힐 듯하였다. 심유경이 중국 조정에서 백만 대군으로써 국경에 와서 진치고 있으니 너희들의 목숨이 조석에 달렸다고 큰소리치고, 또 현소를 꾸짖기를,


“하늘은 생명을 살리는 것을 좋아하는데, 너는 이미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면서 어찌 반역하는 오랑캐를 좇아서 우리 속국을 무찌르느냐?”


하니, 현소가 머리를 조아리며,


“중국에 중봉조사(中峯祖師)의 4대손이 있었으니, 사명선사(四明禪師)라고 하였습니다. 가정(嘉靖) 18년에 나의 스승이 중국에 들어가서 사명선사를 뵈옵고 제자가 되었는데, 천자께서 그 멀리서 온 것을 가상히 여기시고 가사 한 벌을 하사하셔서 여태까지 보존하고 있습니다. 소승(小僧)은 의발을 계승하였기에 중국을 향하여 순종하려는 정성이 없지 않았는데 어찌 감히 역적을 도와 몹쓸 짓을 하겠습니까. 본국이 중국 조정과 오랫동안 끊어졌으므로 조선에 길을 빌려 봉공(封貢)을 구하고자 하는데, 조선이 도리어 군사를 집결하여 우리를 막기 때문에 오늘의 사태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저만의 죄이겠습니까?”


하였다. 심유경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미 정성껏 순종할 것을 생각하였다면 중국 조정에서 어찌 봉공(封貢)을 아껴서 멀리 있는 오랑캐의 소망을 끊어버리겠는가?”


하니, 행장의 무리가, “네 네.” 하였다. 이에 평양성 서북쪽 10리 밖에 표목(標木)을 세웠는데, 사람들은 모두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었다. 해가 저물어서야 돌아오는데 왜군들이 그를 매우 공순하게 전송하였다. 이튿날 행장이 편지를 보내어 문안을 드리고 또 말하기를,


“대인께서 서슬이 푸른 칼날 속에 계시면서도 안색이 변하지 않으시니, 비록 일본 사람일지라도 해칠 수 없었습니다.”


하니, 심유경이 대답하기를,


“그대는 당조(唐朝)에 곽 영공(郭令公 곽자의(郭子儀))이란 분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는가. 단기로 회흘(回紇)의 10만 군진 속에 들어가서도 두려워 위축되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그대를 두려워하랴.”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내가 돌아가서 성황(聖皇)께 보고하면 처분이 계실 것이다.”


하였다. 이에 9월 29일에 요동으로 돌아가서 내각(內閣)ㆍ본병(本兵)에 자세히 보고하니, 명하여 각(閣)ㆍ부(部)ㆍ구경(九卿)ㆍ와도(科道)에 회의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성지를 받들어, 실직(實職)으로 유격장군 서도지휘첨사(署都指揮僉事)를 제수하여 경략의 수하에 보내어 위임하여 쓰게 하였다. 그때 심유경이 돌아간 뒤 50일이 지나도 오지 않자 왜가 의심하여 큰 소리치기를,


“설날에는 압록강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겠다.”


하고, 적진으로부터 도망쳐 돌아온 백성도 있었는데 모두,


“적이 성을 공격하는 기구를 크게 수리한다.”


하여, 사람들이 모두 매우 두려워하였다.


11월 6일. 심유경이 다시 강을 건너왔는데, 병부에서 차부(箚付) 심유경에게 주어 왜군에게 타일러서 전군이 물러가게 하고 또 조선의 성곽과 토지와 왕자와 배신(陪臣)을 돌려주면 납관(納款)하는 일과 철병(撤兵)하는 것을 허락하겠거니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백만 대군으로써 가서 쳐 없애겠다고 하였다. 심유경이 왜군의 진영에 들어가서 며칠 동안 머물다가 돌아왔으며, 또 작은 모자 수만 개를 왜병들에게 고루 나누어 줌으로써 군대 수효가 많고 적음을 알아내어 장차 제독에게 보고하여 두 배의 군사로 치게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중국 대병(大兵)은 오히려 나오지 않아 조정에서는 다시 배신(陪臣) 심희수(沈喜壽)ㆍ윤근수(尹根壽)ㆍ정곤수(鄭崑壽) 등을 잇달아 보내서 원병 요청을 매우 급하게 하였는데, 사신의 행차가 서로 잇달아 길에 엮어놓은 듯하였다. 천자가 군사 출동을 이미 허락하니 병부 상서 석성(石星)이 정곤수 등을 화방(火房)에 불러들여 사태를 직접 물으니, 어떤 이는 눈물을 흘려 마지 않았으며, 행인사 행인(行人司行人) 설번(薛藩)을 보내와서 칙서를 받들어 유지를 내리게 하였다. 그 칙서는 다음과 같았다.


그대 나라가 대대로 동번(東藩)을 지켜 본래부터 공순하게 섬겼고, 의관(衣冠)과 문물이 낙토(樂土)로 불리었도다. 근래에 들으니, 왜노들이 창궐해서 함부로 침략질하여, 왕성(王城)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평양을 노략질하여 점거하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 온 나라 안이 시끄러워졌으며, 국왕은 서쪽 바닷가로 피난하여 초야에서 떠돌아다닌다 하는데, 이렇게 몰락된 것을 생각하면 짐의 마음이 매우 측연하도다. 어제 급박함을 알리는 소식을 전하니, 이미 변신(邊臣)에게 칙명을 내려 군사를 내어 구원하게 하였고, 또 문무대신 2원(員)을 보내어 요양(遼陽)의 각 진(鎭)의 정병 10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적을 치는 것을 돕게 하였으니, 그대 나라 병마(兵馬)와 앞뒤로 협공하여 흉악한 왜노를 쳐 없애서 씨도 남지 않게 하기를 기약하라. 짐은 천명(天命)을 받았으니 중화와 사이(四夷)의 임금이다. 바야흐로 만국이 다 편안하고 사해가 조용한데, 보잘것 없는 저 왜놈들이 감히 함부로 날뛰는도다. 다시 동남 해변의 여러 진(鎭)에 칙명을 내리고 아울러 섬라국(暹羅國)ㆍ유구국(琉球國) 등에 선유하여 수십만 명의 군사를 모집하여 함께 일본을 쳐서 바로 그 소굴을 쳐서 부수리라. 힘써 왜적으로 하여금 항복하게 하여 바다 난리가 편안해진다면 관작과 후한 은전을 짐이 어찌 아끼겠는가. 이제 특별히 행인사 행인 설번을 차임해 보내어 칙서를 가지고 가서 그대 국왕에게 효유하노라. 그대 국왕은 조종 대대로 전해온 기업(基業)을 생각해야 하는데, 어찌 차마 하루아침에 가벼이 버릴 수 있겠는가. 빨리 치욕을 씻고 흉적을 제거하여 구국(舊國)의 광복을 힘껏 도모해야 하며, 다시 그대 나라의 문무 신민에게 각각 임금에게 은혜 갚는 마음을 굳게 하고 원수 갚는 의리를 크게 분발하도록 효유하라. 대개 선세(先世)의 영토를 회복하는 것은 큰 효도이고 군부의 환난을 급히 구하는 것은 지극한 충성이 되는 것이다. 그대 나라 군신(君臣)은 본디 예의를 알고 있으므로 반드시 짐의 마음을 본받아서 먼저 구물(舊物)을 회복하여, 국왕으로 하여금 개가를 부르며 환도(還都)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니, 이에 종묘사직을 보전하고 번방을 길이 지켜 짐의 먼 지역을 걱정하고 작은 나라를 사랑하는 뜻을 위로하라. 공경할지어다.


칙서가 이르니,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압록강 가에서 맞이하는데 목놓아 통곡하고, 신하들도 모두 통곡하니, 설번이 여러 말로 위로하였다. 왕이 설번에게 이르기를,


“왜노들이 상국을 범하려 하므로 소방(小邦)이 의리로 거절하다가 이런 참화를 당하게 되었소. 중국 조정에서 만약 왜노의 서계를 보면 그 사이의 실상을 알 것이오.”


하니, 설번은


“조정에서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하고는, 칙서를 반포한 뒤에 곧 돌아갔다.


○ 설번은 호는 앙병(仰屛)이요, 광주부(廣州府) 순덕현(順德縣) 사람이다. 기축년에 세 번 진사시에 장원을 하였으며, 얼굴이 엄숙하고 말이 민첩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또 사람을 보내어 요양(遼陽)까지 뒤따라가서 글을 올려 진정하니, 대략 이러했다.


소방(小邦)의 군병이 순안(順安)에서 군영을 치고 서쪽 통로를 가로막은 자 및 관군과 의병이 여러 곳에 나누어 둔친 자들이 모두 여름부터 가을을 보내게 되어 군사는 쇠잔하고 말은 지치며, 먹을 것은 없고 병장기는 낡았으며 더구나 옷은 없는데 추위는 닥쳐 아침저녁에 무너질 형세입니다. 적은 바야흐로 튼튼한 성에 웅거하고 창고를 독차지하여 먹을 것이 넉넉하고 날카로운 기세를 길러, 기회를 봐서 튀어나올 계획을 하고 있으니 소방의 상황이 하루가 더욱 급합니다. 이보다 앞서 누차 급함을 아룀이 한두 번만이 아닌 이유는 혹 중국 원병이 제때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서 장황스럽게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7월 24일 병부가 제본(題本)을 올려 성지를 받들기를, ‘조선이 왜노의 침략을 받아 함락되고 국왕이 원병을 청함이 더욱 급박하다. 그런데, 이미 많은 관원들의 회의를 거쳤고, 네 병부에서 득실을 탐지하였으니, 곧 행해야 할 일을 헤아려서 빨리 가서 구원하고 늦추어서 소용이 없게 되어 훗날 우리 변경의 폐해를 끼침이 없도록 하라.’ 하였는데, 소방의 임금과 신하들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모두 소생할 날이 멀지 않았고 이 왜적을 멸망시킬 수 있다고 여겨 바야흐로 양곡을 쌓아두고 도로를 말끔히 닦아 목을 세워 몹시도 원병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여태까지 출사(出師)의 기일도 정해지지 않아 죽음을 앉아 기다리고 있사오니, 매우 답답하옵니다. 순안에 주둔한 군사가 정말 피약하기는 하나 오히려 힘껏 적을 막아 끓어서 지금 4개월이 되었으므로, 혹시 요양(遼陽)의 군사가 의주 및 탕참(湯站) 등지에 머물게 되고, 남병(南兵)의 포수 5~6천 명이 당도하여 며칠내로 압록강을 건너와서 성세(聲勢)를 벌이게 되면 협력하여 적을 섬멸하여 전승을 거두어서 위로는 황제의 작은 나라를 구휼하시는 인덕(仁德)을 펼 수 있고 아래로는 저희 나라의 끊어지게 된 목숨을 연장할 수 있으며, 앉아서 세월을 보내가며 대군이 오기를 기다려서 마침내 중국 조정에서 구제하는 지역을 밟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일의 시기가 매우 급박하므로 죽음을 무릅쓰고 간청하오니 지극히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나이다.


설번이 이 글을 보고 회보하기를,


“천자께서 이미 나가 구원할 것을 허락하시어 대군이 귀국에 도착하게 되었으니, 과히 염려하지 마시고 적을 멸망시킬 기일을 기다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 병부에서 정곤수 등이 돌아올 적에 마가은(馬價銀) 3천 냥을 주어 궁면(弓面)ㆍ화약 등을 사가지고 가서 군수물자를 돕게 하였다.


또 병부 우시랑 겸우첨도어사(兵部右侍郞兼右僉都御史) 송응창(宋應昌)을 흠차경략계요 보정 산동 등처 방해어왜군무(欽差經略薊遼保定山東等處防海禦倭軍務)로, 병부 직방청리사 원외랑(兵部職方淸吏司員外郞) 유황상(劉黃裳)ㆍ병부 직방청리사 주사 원황(袁黃)을 모두 흠차찬획 방해어왜 군무(欽差贊畫防海禦倭軍務)로 삼아 요동에 머물러서 모든 장수들을 절제(節制)하게 하였다.


송응창은 호는 동강(桐岡)이며, 항주(杭州) 우위적(右衛籍) 인화현(仁和縣) 사람이다. 가정 을축년에 진사에 올랐다. 일찍이 영하(寧夏)를 정벌한 공으로써 은 30냥과 모시 2표리(表裏)를 상으로 받고, 공에 준하여 승직(陞職)하였는데 이때에 조정에서 추천하여 조선에 관한 일을 전적으로 맡게 하였다.


유황상(劉黃裳)은 자는 현우(玄于), 호는 태경(太景), 하남(河南) 여녕부(汝寧府) 광주(光州) 사람이다. 만력 갑술년에 진사에 올랐는데, 천성이 매우 허탄하였다.


원황(袁黃)은 자는 곤의(坤儀), 호는 요환(了丸), 절강 가흥부(嘉興府) 가선현(嘉善縣) 사람이다. 만력 병술년에 진사에 올랐고 천성이 부처를 좋아하여 몸가짐을 중처럼 하였고, 일로(一路)의 관참(館站)에 표하차관(標下差官)을 두어 폐단을 금하니, 사람들이 매우 편리하게 여겼다.


○ 또 전군도독부 도독 동지가태자소보(前軍都督府都督同知加太子少保) 이여송(李如松)을 흠차제독 계요보정 산동등처 방해어왜군무 총병관(欽差提督薊遼保定山東等處防海禦倭軍務摠兵官)으로 삼아 3개 영장을 거느리고 전진하여 정벌하게 하였다.


이여송(李如松)은 호는 앙성(仰成), 요동(遼東) 철령위(鐵嶺衛) 사람이다. 아버지는 태자태보 중군도독부 좌도독 광녕총병관 영원백(太子太保中軍都督府左都督廣寧摠兵官寧遠伯) 이성량(李成梁)이다. 이성량의 조부는 본래 우리 나라 이산군(理山郡) 사람으로 독로강(禿魯江)에서 살았는데, 어떤 일로 사람을 죽이고 부부가 철령위로 도망쳐 들어가서 그대로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변방에서 공을 세워 비로소 유격장군이 되었다. 이성량은 음직으로 지휘사가 되고, 오랑캐를 쳐부순 공으로 험산참장(險山參將)이 되어 땅 천리를 개척하여 오보(五堡)를 세워서 훈작(勳爵)을 받게 되었다. 이성량은 천성이 침착하고 엄숙하며, 지모가 많고 전투를 잘하며, 오랑캐들이 두려워하고 심복하여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사모하였다.


이여송의 아우 여백(如栢)ㆍ여장(如樟)ㆍ여매(如梅)ㆍ여오(如梧)ㆍ여정(如楨)이 모두 벼슬이 총병에 이르러 금의옥대(錦衣玉帶)가 집안에 번쩍이고, 막사(幕士)나 가정(家丁)으로 도독 및 2품의 장군이 된 자 10여 명이 굽실거리며 성심으로 섬겨 노예와 같으니 세상에서는 분양왕(汾陽王) 곽자의(郭子儀)에게 비유하였으며, 또 당시의 명장 남당(南塘) 척계광(戚繼光)과 명성이 비슷하였다. 그래서 중국 조정에서도 의지하여 동북쪽의 쇄약(鎖鑰)으로 삼았다. 이여송의 어머니 숙씨(宿氏) 또한 여자 중의 배도(裵度)ㆍ곽자의(郭子儀)였다. 장수 집안에 태어나서 변방 일에 잘 알고 천성도 엄정하며, 장사(將士)를 더욱 잘 다스렸다. 요진(遼鎭)에 있을 적에 해마다 한 번씩 철령위에 돌아왔는데, 지나는 곳의 요새와 성곽의 완전하고 허술한 것, 군대의 정예하고 피폐한 것, 거마와 깃발의 정숙하고 어지러운 것 등을 살피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모든 진영의 비장들이 부인을 영원백과 다름이 없이 경외하였다. 여섯 아들 중에 다섯이 그의 소생인데 부귀가 모두 지극하였지만 자기 자신은 오히려 여자가 할 일을 지켰으며, 모든 며느리들은 담비갖옷이나 비단옷이 매우 많았지만 그녀의 생일에는 반드시 다 청포(靑布)같은 물품을 바치게 하여, 검소하기에 힘써야 함을 보여 주었으니, 이 또한 학문하는 사대부들도 어려운 것인데, 하물며 부인으로서 이와 같음에 있어서랴. 사람들이 따를 수 없는 일이다. 나이 겨우 40때에 영원백에게 소실을 두기를 권하여 예쁜 색시 왕씨(王氏)를 구해서 바치고는 자신은 여행을 하면서 왕씨로 하여금 사랑방을 차리게 하였다. 또 여러 자녀 및 며느리들로 하여금 왕씨를 자기처럼 대우하게 하고, 만약 조금이라도 마음에 맞지 않게 하면 그 자녀들에게 꾸중하기를


“왕씨는 내가 데려다놓은 사람이다. 왕씨를 업신여기면 이는 나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너희들 마음에 편안하겠느냐.”


하였다. 여러 아들들이 이미 고관 대작이 되었으되 조금이라도 교만하고 사치스러운 자가 있으면 곧 어린애처럼 땅에 엎드려서 매를 맞게 하였으나 감히 방자한 자가 없었다. 딸 하나가 소씨(蘇氏)에게 시집을 갔었는데, 그 남편과 사이가 나쁘자, 어린 아들이 가서 그 누이 편을 들어주었다. 부인이 듣고 크게 성내어,


“네가 이미 출가하였으면 이는 집을 나간 사람인데, 너희들이 문벌(門閥)의 성대함을 믿고 도리어 네 남편에게 거만을 피움이 이와 같은가.”


하고, 곧 아들을 불러 뜰에 꿇어앉히고 종아리를 수십 대나 때리니, 그 딸이 울면서 호소하였다.


그러나 부인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네가 지금부터는 네 남편과 시부모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면 나를 볼 생각을 말라.”


하였으니, 그 교훈의 엄정함도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이여송 등이 잘 지켜 마침내 큰 공훈을 세웠으며, 부인이 복록을 누리는 것이 모두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여송은 대대로 장수 집안이어서, 병법을 익히 알고 사람을 사랑하고 어진 선비를 사귀었으며, 용모가 괴걸(魁傑)하고 도량이 너그러우며, 행군하고 진치는 데에는 단속을 적절하게 하니 지나는 곳마다 편하게 여겼다. 신묘년(1591, 선조 24) 여름에 토관총병 유동양(劉東暘)이 발승은(哱承恩) 등과 영하(寧夏)를 점거하고 오랑캐가 반란하여 형세가 매우 창궐하였다. 발승은은 바로 항복한 호인(胡人) 발배(哱拜)의 아들이다. 부자가 사납고 전투를 잘하여 흉노병을 여러번 패하게 하였으므로 벼슬이 총병에 올라 두 군영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정(家丁) 역시 수천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순무도어사(巡撫都御史) 당형(黨馨)이 매양 억제하니, 발승은 부자가 달마다 주는 양식을 주지 않는다는 것으로 대중을 격동하여 난을 일으켰는데, 관군이 누차 패하여 버티지 못하였다. 이여송이 총병 소여훈(蕭如薰)ㆍ상거경(常居敬)ㆍ심사효(沈思孝)ㆍ요계가(姚繼可)ㆍ마귀(麻貴)ㆍ유승사(劉承詞)ㆍ이여장(李如樟)ㆍ양문부(楊文孚)ㆍ이영(李寧) 등을 거느리고 10만 군사로 소탕해 내니, 곧 이여송의 관직을 도독동지(都督同知)로 승진시키고, 음직으로 자식에게는 금의위 지휘동지(錦衣衛指揮同知)의 관직을 세습시키고, 상으로 은 1백 냥과 대홍저사(大紅紵絲) 4표리(表裏)를 받았는데, 군사를 돌릴 겨를도 없이 또 동쪽을 정벌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래서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경(北京)으로 달려갔다가 그대로 요동을 향하여 모든 장수를 분담시켜 왜를 정벌하였다.


정왜 부총병관서 도독첨사(征倭副摠兵官署都督僉事) 이여백(李如栢)을 중협대장(中協大將)으로 삼았다. 이여백은 호는 배성(背城), 제독의 아우인데, 친병(親兵) 1천 5백 명을 거느리게 하였다. 정왜부총병관서 도독첨사 양원(楊元)을 좌협장군(左協將軍)으로 삼았다. 양원은 호는 국애(菊厓), 정요좌위(定遼左衛)의 사람이다. 처음에는 송경략(宋經略) 중군(中軍)이었는데 끌어와 친병 2천을 거느리게 하였다. 정왜부총병관 도지휘사(征倭副摠兵官都指揮使) 장세작(張世爵)을 우협대장(右協大將)으로 삼았다. 장세작은 호는 진산(鎭山), 광동 우위(廣東右衛) 사람이다. 친병 1천 5백 명을 거느리게 하였다. 3영을 나눈 뒤에 모든 장수를 3영에 분속하였다. 흠차협수선부 동로통령 전영병도지휘사(欽差協守宣府東路統領前營兵都指揮使) 임자강(任自强)은 자는 체건(體乾), 호는 관산(冠山), 대동(大同) 양화위(陽和衛) 사람인데, 선부병(宣府兵) 1천 명을 거느리게 하고, 흠차통령계요 준화참장(欽差統領薊遼遵化參將) 이방춘(李芳春)은 자는 응시(應時), 호는 청강(晴岡), 북직례(北直隷) 대명부(大名府) 평로위(平虜衛) 사람인데, 마병(馬兵) 1천 명을 거느리게 하였다. 그는 말타며 활쏘기가 장기여서 행군하다가 새를 만나면 문득 몸을 뒤집어 달리면서 쏘아 잡았다. 군사를 아주 엄하게 대하고 상벌을 즉시 처결하여 부하들이 애모하였다. 흠차유격장군(欽差游擊將軍) 고책(高策)은 호는 대정(對庭), 산서(山西) 천성위(天城衛) 사람인데, 마병 2천 명을 거느리게 하고, 흠차통령산동 추반경략표하어왜방해 유격장군(欽差統領山東秋班經略標下禦倭防海游擊將軍) 전세정(錢世禎)은 호는 삼지(三池), 남직례(南直隷) 소주부(蘇州府) 오강현(烏江縣) 사람인데, 마병 1천 명을 거느리게 하니, 호령이 엄정하고, 흠차통령가 호소송조병 유격장군(欽差統領嘉湖蘇松調兵游擊將軍) 척금(戚金)은 호는 소당(蕭塘), 산동(山東)등주위(登州衛) 사람인데, 자칭 남당(南塘) 척계광(戚繼光)의 일가라 하고 어떤 이는 그의 손자라 한다. 그에게 보병 1천 명을 거느리게 하였다. 흠차통령선부 중영병유격장군(欽差統領宣府中營兵游擊將軍) 주홍모(周弘謨)를 군사 1천 명을, 흠차통령계진 유격장군(欽差統領薊鎭游擊將軍) 방시휘(方時輝)는 산서 울주위(蔚州衛) 사람인데, 마병 1천 명을, 흠차하양 유격장군(欽差河陽游擊將軍) 고승(高昇)은 마병 1천 명을 거느리게 하고, 흠차건창 유격장군(欽差建昌游擊將軍) 왕문(王問)은 호는 의유(義儒), 의리와 용맹이 남보다 뛰어나고 몸가짐을 매우 바르게 하여 지나는 곳마다 편안하다 하였다. 그는 마병 1천을 거느리게 하였다. 이 아홉 장수는 모두 이여백이 통솔하게 하였다.


흠차통령 요양 원임 부총병(欽差統領遼陽原任副摠兵) 왕유익(王有翼)은 호는 심헌(心軒), 하남(河南) 언능적(鄢陵籍) 사람이니, 마병 1천 2백 명을, 흠차통령계진조병 원임 부총병(欽差統領薊鎭調兵原任副摠兵) 왕유정(王維貞)은 삼만위(三萬衛) 사람인데, 마병 1천여 기를, 흠차의주위 진수참장(欽差義州衛鎭守參將) 이여매(李如梅)는 호는 방성(方城), 제독의 아우인데 마병 1천여 기를, 흠차요진 조병참장(欽差遼鎭調兵參將) 이여오(李如梧)는 또한 제독의 아우인데 마병 5백여 기를, 흠차요동 총병표하영 영이병 원임참장(欽差遼東摠兵標下營領夷兵原任參將) 양소선(楊紹先)은 전둔위(前屯衛) 사람인데 마병 5천여 기를, 흠차진수요동동로부총병(欽差鎭守遼東東路副摠兵) 손수염(孫守廉)은 호는 고촌(古村), 철령위 사람인데, 마병 1천여 기를, 흠차통령보진건준조병 유격장군(欽差統領保眞建遵調兵游擊將軍) 갈봉하(葛逢夏)는 마병 2천여 기를 거느리게 하니, 이 일곱 장수를 모두 양원(楊元)이 통솔하게 하였다.


원임 부총병 조승훈(祖承訓)은 평양에서 패하여 파직되어 충군이 되었는데 백의로 종군하여 공을 세우게 하고, 흠차통령 절강유격장군 오유충(吳惟忠)은 호는 운봉(雲峯), 절강 금화부(金華府) 의오현(義烏縣) 사람인데 보병 1천 5백 명을, 부총병 왕필적(王必迪)은 남병(南兵) 1천명을, 흠차통령 창평우영병참장(欽差統領昌平右營兵參將) 조지목(趙之牧)은 마병 1천 기를, 흠차통령남북 조병탁주참장(欽差統領南北調兵涿州參將) 장응충(張應种)은 마병 1천 5백 기를, 흠차통령 산서영 원임참장(欽差統領山西營原任參將) 진방철(陳邦哲)은 보병 1천 명을, 흠차제독표하 통령대동영병 유격장군(欽差提督標下統領大同營兵游擊將軍) 곡수(谷燧)는 대동위(大同衛) 사람인데 마병 1천 기를, 흠차보정 유격장군(欽差保定游擊將軍) 양심(梁心)은 마병 1천 기를 각각 거느리게 되니, 이 여덟 장수를 모두 장세작이 통솔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청용 장관(聽用將官)이 그 부류가 또한 많았다. 유격장군 왕수신(王守臣)은 호는 덕헌(德軒), 요동 삼만위(三萬衛) 사람인데, 조승훈과 평양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패하여 돌아갔는데, 이때에 와서 다시 나왔고, 흠차통령 요동조병 기보양영 관전보부총병(欽差統領遼東調兵騎步兩營寬典堡副摠兵) 동양정(佟養正)은 자는 자충(子忠), 호는 몽천(蒙泉), 요동위 사람이니, 만력 경진년에 무과 진사하였고, 의주에 와서 머물었다. 통령대령영병 원임참장(統領大寧營兵原任參將) 장기공(張奇功)은 요동 사람으로 심유경과 서로 사이가 좋았는데, 심유경이 행장(行長)과 서로 만나보고서 행장을 놓아 돌려보냈다는 것을 듣고 발을 구르며 탄식하기를,


“만약 한 명만이라도 복병하였다가 잡았으면 군사 한 명 수고하지 않아도 될 것인데, 이런 기회를 놓쳤으니, 애석하다.”


하였으니, 대개 심유경의 본심을 몰랐던 것인데, 이때 와서 마병 1천 기를 거느리고 왔다.


흠차진정 유격장군(欽差眞定游擊將軍) 조문명(趙文明)은 마병 1천 기를, 흠차섬서 유격장군(欽差陝西游擊將軍) 고철(高徹)은 마병 1천 기를, 흠차통령요동좌영조병 원임 부총병 서도독동지(欽差統領遼東左營調兵原任副摠兵署都督同知) 이평(李平)은 호달(胡㺚)사람인데, 영원백 이성량(李成梁)이 그의 모습을 기이하게 여겨 거두어 자기 아들로 삼았으며, 공을 쌓아 이 관직에 이르렀는데, 마병 8백 기를 거느리게 하였다. 흠차산서 유격장군 시조향(施朝鄕)은 마병 1천 기를, 요동도지휘사 사첨사(遼東都指揮使司僉使) 장삼외(張三畏)는 요동 삼만위 사람인데, 의주에 와서 머물면서 군량과 마초를 오로지 관장하게 하였고 몸가짐을 간략하게 하여 사람들이 매우 편의하게 여겼다. 책사(策士) 사용재(謝用梓)는 호는 용암(龍巖), 절강 소흥부(紹興府) 여요(餘姚) 사람인데, 태학사 사천(謝遷)의 손자라 자칭하였는데, 참장 낙상지(駱尙志)를 따라 나왔다. 수비(守備) 웅정동(熊正東)ㆍ이대간(李大諫) 등도 청용(聽用)으로서 왔다. 대간은 호는 북천(北泉) 절강 가흥부(嘉興府) 수수현(秀水縣) 사람인데, 압록강가에 와 있었다. 또 원임 하간부동지(原任河間府同知) 정문빈(鄭文彬)ㆍ산서(山西) 노안부(潞安府) 호관현(壺關縣) 지현(知縣) 조여매(趙如梅) 등은 군량과 마초를 전적으로 관장하게 하였다. 조여매는 호는 초암(肖庵), 요동 철령위사람인데, 제독과 가장 친하여 군사(軍事)를 모두 함께 상의하였다. 제독이 부대 편성을 마치고, 세 영장을 전진하게 하고, 또 사대수(査大受)를 선봉으로 삼고, 갈봉하를 행궁 호위의 군사를 대신 거느리게 하고, 제독은 스스로 표하장관 원임 참장 도지휘사 방시춘(方時春), 영원백의 가정(家丁) 원임 참장 이영(李寧), 원임비어(原任備禦) 한종공(韓宗功)ㆍ이봉양(李逢陽) 등을 거느리고 잇달아 전진하였는데, 정병이 4만여 명이요 용장이 60여 명이며, 군호를 10만이라 하고 통원보(通遠堡)까지 와서는 유둔(留屯)하고 전진하지 않았다. 조선에서 집의 이호민(李好閔) 등을 보내어 제독에게 다음과 같이 정문(呈文)하였다.


조선국 배신(陪臣) 사헌부 집의 이호민(李好閔) 등은 적(賊)의 모계를 헤아릴 수 없고 사세가 더욱 급박하여 빨리 대병을 진출시켜 먼저 힘을 발휘해서 승리를 거두어 주시기를 바라는 일로 말씀드립니다. 이달 13일에 요동도사 군정첨서 관둔 도지휘사(遼東都司軍政僉書管屯都指揮使) 장(張)의 패문(牌文)을 받았으며, 흠차경략 계요보정산동 등처 어왜군무 병부 우시랑(欽差經略薊遼保定山東等處禦倭軍務兵部右侍郞) 송(宋)으로부터 근간에 부총병관(副摠兵官) 동양정(佟養正)의 품칭(稟稱)에 의하면 왜노가 군사를 거느리고 중화(中和)ㆍ토성(土城) 등지를 침입 점령하였다고 하고, 또 심유경(沈惟敬)의 품칭(稟稱)에 의하면 왜노가 조공 왕래를 청원하고 애걸한다고 하는 등의 정황이 각각 병부에 도착하였습니다. 여기에 의거하면 왜노가 거짓으로 조공 왕래를 빙자하고 비밀리에 토성을 공격하는 것이 분명히 우리 군사를 늦추려는 것임을 알 수 있으니 마땅히 왕래를 금지하고 엄하게 조사 힐문하여야 하기에 이 패문을 올리는 것이니 본관은 조선 국왕에게도 알려서 병마(兵馬)를 긴요한 곳에 많이 설치하여 서로 서로 힐문하게 하며, 만일 심유경 본인이나 혹 그의 보내는 사람, 혹 가정(家丁)으로 저들 주둔지에 있는 자가 평양(平壤)으로 가서 소식을 전하는 것이나, 혹 가솔 가운데 중국으로 달아 돌아오는 자를 만나면 곧 조사 나포하여 병부로 보내어 사실을 캐어 처리하게 할 수 있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거듭 유시를 받고, 국왕의 전지도 함께 받들었는데, 그 긴급한 소관사는 이미 경략과 병부의 전령에 의하여 이렇게 시행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요동에 치보(馳報)하고, 본국의 급박한 사정을 들어 제독(提督)과 경략 두 노야(老爺) 앞에 드리고, 빨리 진병(進兵)하여 주시기를 청하게 되어 이 직책을 받들기로 위임을 받고 나왔습니다. 살펴보면 왜적의 흉모가 저희 나라에만 있지 않습니다. 지금 이미 저희 나라를 다 함락하고 평양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형세와 언사가 더욱 어긋나 그 계획이 그만두고 말 것이 아니니, 말 한 마디로 군사를 풀어 돌아간다고 하니 단정코 이럴 이치가 없습니다. 전일 심 유격(沈游擊)이 재차 적진에 가서 저들과 화친에 대한 의논을 하였는데, 그 사실을 비밀로 하여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은폐(銀幣)를 가지고 갔으며 또 10명의 왜노를 대동하고 경사(京師 명나라 서울)로 가는 것을 허락하고, 또 두 관원을 보내어 대마도로 갔으니, 저희 나라 군신들이 모두 해괴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유격은 해를 가리키면서 다른 일이 없다고 하니 그저 믿고 바라는 심정에 감히 의심을 하지는 못하고 이것은 반드시 일을 안전하게 성취하려는 것이라고 하니 천조의 조정 계책도 반드시 저들의 의논을 따라 춘추(春秋)의 수치로 삼는 일을 행하지 않을 것이 보장되므로 의심을 품은 채 믿음을 지키면서 성공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겨울철도 그럭저럭 지나 섣달이 다 가게 되었으니, 적을 토멸할 시기가 이미 십 중 아홉은 잃어버린 것으로 온 나라가 다 같이 민망히 여깁니다. 지금 송 경략의 유시를 받아 적으로 하여금 군사를 늦추고 겨울을 지나게 할 계획임을 알게 되니, 저희 나라에서는 비로소 전일에 조정 계획을 우러러 믿었던 것이 허사가 아니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또 어르신의 은덕으로 겨우 해관(海關)을 지나자 벌써 깊은 곳을 찔렀으니 탄복하는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생각하오면, 저 도적은 유격이 기한이 지나도 이르지 않는 것을 보고 현저하게 그것을 구실삼아 서쪽으로 나올 염려가 있는데, 근일 또 도순찰사 김명원(金命元)의 급보를 보면, 심 유격의 가정 왕귀(王貴)라는 자가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유격을 따라 적진에 들어가서 보았는데 적의 추장 평행장(平行長)이 유격을 향하여 본국 통사(本國通事) 김덕회(金德澮)가 유격을 이간하려고, 명(明) 나라 군사가 기회를 노려 장차 오니 반드시 살해당할 것이라고 하면서 나를 권하여 먼저 거병(擧兵)해서 서쪽으로 향하기를 권하며, 검을 들고 죽기를 청하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지금 유격을 보니 그것이 간사하고 허황된 것임을 알 수 있으니 이와 함께 일반통사 김덕회(金德澮)가 옥에 갇힌 원인도 알게 되었습니다. 또 본도 순찰사 홍세공(洪世恭)의 급보에 의하면 그 중 안변(安邊) 등의 부(府)에 나갔던 초탐(哨探) 군인의 계속되는 급보인데, 왜적이 경성(京城)에 있던 무리들을 끌어내어 병력을 증가해서 살인과 약탈을 마음대로 행하는데 혹은 각처로 끼어 들고 혹은 진영을 들어 나가는 것이 목적은 본도의 양덕현(陽德縣) 지방을 향하려는 것으로서 봄철이 가까워지는데, 적의 모계가 더욱 깊어간다고 합니다. 생각하면 저 왜적이 원래 간첩이 많아서 우리 형편을 잘 알고 또 김덕회가 이미 기만당한 일로 잡혀서 갇히게 되었으니, 온갖 계교를 염탐해가면서 실익과 공을 얻으려고 반드시 못할 짓이 없을 것입니다. 안변의 왜적이 역시 말하기를, ‘양덕 지방으로 향하려 한다.’고 하니 모계(謀計)를 합하여 서쪽으로 향하는 것은 의심 없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왜적이 중화(中和)ㆍ토성(土城)을 침공하니, 이곳 진영은 전투를 제일 잘하기로 이름이 났으니 먼저 군사를 합하여 이곳을 취한 것으로써 어찌 뒤쪽의 근심을 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루 아침에 돌진해 나와서 우리 편이 머뭇거리고 있는 기회를 틈탄다면 어찌 군병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군병이 원래 약하고 또 늙어서 막아낼 수가 없는데 각지의 물자와 마초는 도리어 적의 소유가 되니 그 사세가 정말 급박합니다. 낮은 관직에 있는 제가 어르신께서 이미 군병을 출발시킨 것을 모르고 사람을 보내 급박한 형편을 고하고, 당일로 어르신의 큰 군대 깃발이 앞에 서서 나가고 군사의 성세가 빛남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저희 나라의 급한 형편을 어르신께서 먼저 살피신 것을 알게 되어 우러러 바라보며 감격합니다. 곧 물러가서 저희 임금께 보고하려고도 합니다만 적이 밀려들어 조석을 보전하기 어려운 이 지경에서 날도 저물었기에 감히 입을 들어 몇 말씀 드립니다. 다시 속히 전진하여 주소서. 엎드려 바라건대, 어르신께서는 이미 큰 명을 받들어 저희 나라를 구제하시게 되었으니, 다시 속히 출동하시고 머무는 일이 없게 하여 주십시오. 기회가 누설되기 전에 나가고, 먼저 발동하여 남을 제어하는 계책을 생각하여 크게 황제의 위엄을 떨쳐주시면 이만한 다행이 없겠나이다. 긴급한 사기(事機)에 관련하여 차질을 가져오는 일은 없을까 해서 다시 번거롭게 글을 올려 청원하오니 자세히 살펴 시행하시기를 엎드려 빕니다.


제독이 올린 글을 보고, 정월에 진병하기로 허락하고서도 오히려 전진하려 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또 이조 판서 이산보(李山甫)를 보내어 제독의 군문으로 달려나가서 속히 군사의 출발을 청하였는데, 말과 태도가 간절하며 말할 때마다 눈물이 따라 떨어졌다. 제독이 술과 음식을 갖추어 대접하려 하니 이산보(李山甫)가 말하기를,


“군부(君父)께서 풀속에 계신데 의리상 차마 성례(盛禮)의 대접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고, 뜰 아래로 내려와서 통곡하니 제독이 감동하여 12월 25일에 강을 건넜다. 깃발이 1천 리에 펄럭이고 징과 북소리가 서로 들렸다. 우리 나라 백성들이 이 광경을 보고 즐거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상이 여기서 제독과 더불어 접견하여 극진히 위로하고 이어 눈물 흘리며 이르기를,


“황상의 망극한 은혜를 입어 대인을 만나보게 되었습니다. 저희 나라의 실낱같은 운명을 대인에게 부탁할 뿐입니다.”


하였다. 제독이 손을 들어 사례하며 말하기를,


“이미 황명(皇命)을 받았으니 어찌 죽기를 사양하겠습니까. 또 저희 선대는 본래 귀국 사람인데 제가 나올 때 부친이 역시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귀국 일에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사례하여 마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의주에는 예전부터 전해오는 이런 노래가 있었다.


막좌리 벌이 강물에 무너질 때 / 莫佐里坪盡爲江水所破
백마 장군이 마이산에서 오리라 / 當有白馬將軍從馬耳山出來


이른바 막좌리 벌이라는 것은 의주의 서쪽 성밖 땅으로서 성중 사람들이 여기서 농사짓는데 바로 인산보(麟山堡)에 연접되었으며, 마이산은 의주 통군정(統軍亭)과 마주 대한 곳으로 중국 지역이다. 이때 압록강 물이 점점 남쪽으로 옮겨 큰 들을 거의 다 파고 들어가서 의순관(義順館) 문앞에 이르러 나루터가 되었으며, 제독의 탄 말이 백마였으니, 그 말이 과연 맞았다. 또 증명하는 시가 있었다.


장군 한번 나오자 번개 빛 날으는데 / 將軍一出電光飛
흰 말 금 안장에 붉은 비단 옷이네 / 白馬金鞍赤錦衣
천자의 명을 받은 장수는 구름밖에 우뚝히 임하였고 / 玉節高臨雲外逈
천자의 군대가 저 멀리 해뜨는 곳을 가리키네 / 天戈遙指日邊歸
흉중의 병법에는 온전한 적이 없는데 / 胸中韜略無全敵
막하의 웅장한 군사는 호랑이 위엄 갖추었네 / 帳下雄兵藉虎威
압록강 머리에 북소리 진동하니 / 鴨綠江頭雷鼓震
동쪽 사람들 이마에 손 얹고 깃발을 바라보구나 / 東人加額望旌旗


○ 계사년 정월 1일. 흰 기운 세 줄기가 서북쪽에서 하늘로 뻗쳐 태양을 가로 건너질렀는데 곁에 쌍무지개가 있어 세 겹을 둘러싸니 사람들이 모두 웅장한 군사의 기운이 적을 이길 형상이라고 하였다.


○ 4일. 명 나라 대군이 숙천(肅川)에 당도하며, 선봉 부총병 사대수(査大受)를 시켜 먼저 순안(順安)으로 가서 왜노를 속여 말하기를,


“명 나라에서 이미 화친을 허락하였고, 심유격이 또 온다.”


하니, 여러 왜노들이 모두 기뻐하였으며, 현소(玄蘇)는 이런 시를 올렸다.


부상에 전쟁 그치고 중화에 복속하니 / 扶桑息戰服中華
사해 구주가 다 같은 한 집이라네 / 四海九州同一家
기쁨이 넘치는 그 기운 세상의 눈 다 녹이니 / 喜氣忽消寰外雪
천지의 봄 아직 이른데 태평화 필 것이네 / 乾坤春早太平花


왜노 추장 행장(行長)이 이에 소장(小將) 평호관(平好官)ㆍ길병패삼랑(吉兵覇三郞) 등 왜노를 보내어, 20여 명의 왜노를 거느리고, 통사(通事) 장대선(張大膳)과 함께 순안(順安)에 와서 심 유격(沈遊擊)을 맞이한다고 하는데, 실은 허실을 엿보려는 것이었다. 제독이 이에 부총병 사대수(査大受)ㆍ유격장군 이영(李寧) 등에게 격문을 보내어 유인하여 함께 술을 마시게 하고 군사를 장막 뒤에 숨겼다가 여러 왜노가 술이 취하자 이영 등이 잔을 들고 호령하니 복병이 갑자기 나타나 여러 왜노를 쳐서 거의 다 없애고, 또 길 추장과 호관을 잡았고 나머지 세 사람은 도망해 갔다. 적진 중에서는 이때에야 대군이 온 것을 알고 크게 소란하여 그치지 않았다. 제독이 이영(李寧) 등을 군령으로 처단하여 두루 보이니, 군중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찬획(贊畫) 유황상(劉黃裳)ㆍ원황(袁黃)이 급히 압록강을 건너와서 왕을 통군정(統軍亭)에서 만나 뵙고 물러나 글을 지어 우리 나라 백성들에게 이렇게 선유하였다.


너희 나라는 본래부터 문물이 발달하고 대대로 충정(忠貞)이 돈독하였다. 근래에 왜이(倭夷)가 무도하여 오랫동안 침략해 와서 너희 군신을 수풀 속에 있게 하니 계속 떠돌아다녀 그 곤궁함이 어떻겠느냐. 우리 대명(大明) 황제께서, 너희가 2백 년 동안 신하의 예절을 부지런히 지킨 것을 생각하여 만금의 비용을 아끼지 않고 장수를 명하여 정벌하게 하였다. 너희 나라에는 어찌 종실(宗室)로서 중임을 받고 충분(忠憤)이 분발할 이가 없을 것인가. 어찌 고을 관장으로서 지방을 지키며 강개히 목숨을 내놓을 이가 없을 것인가. 어찌 충신으로서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가 욕된다는 생각을 품을 이가 없을 것인가. 어찌 의사(義士)로서 몸을 바쳐 나라에 보답할 생각을 일으킬 이가 없을 것인가. 마땅히 하늘같은 큰 위엄이 진동하는 기회를 타서 빨리 의병을 불러모아 각기 한 부대씩의 군사를 이끌고 함께 구벌(九伐)의 뜻을 펴야 할 것이다. 지금 왜이(倭夷)가 강한 양 날뛰지만 그 세력이 반드시 멸망될 것이요, 너희 나라가 비록 미약하지만 그 세력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니 서로 계획을 세우라.


먼저 천도(天道)로 논하자면 조선은 분야(分野)가 석목(析木)의 자리이다. 지난해 목성(木星)이 인방(寅方)으로 돌았는데 일본이 와서 범하니 이것은 우리가 세성(歲星)의 빛을 받았는데 저들이 침노하는 것으로 하늘을 거슬러 행하는 일이니 비록 강하나 반드시 약해질 것이다. 이것이 첫째 이유이다. 왜의 천성이 추운 것을 두려워하는데, 금년은 음(陰)이요, 풍목(風木)이 하늘을 맡고 양명(陽明)이 금을 마르게 하여 처음 기운이 되며, 입춘 후에도 20~30일 간이나 찬기운이 소멸되지 않는 것이 즉, 천시를 이용할 만하다. 이것이 둘째 이유이다. 너희 나라 군신이 모두 이 성에 모였는데, 새벽에 일어나 기운을 바라본즉 아름답고 왕성하여 비단이나 일산같다. 왕성한 기운이 우리에게 있으니 세력이 반드시 회복될 것이다. 이것이 셋째 이유이다.


다음 인사로 논하자면, 대국의 웅병(雄兵)이 범과 곰같으며, 무적의 대포가 한번 쏘면 1천 보(步)를 나가는데 저들이 자기 힘을 생각하지 못하니 힘없는 가루가 되고야 말 것이다. 이것이 첫째 이유이다. 경략(經略) 송(宋)은 깊은 계책과 함축 있는 모계를 귀신도 헤아리지 못하며, 제독 이(李)는 일편단심 충성심으로 온갖 전투에 용맹을 떨친 이로 옛날 명장의 기풍이 있다. 두 관직이 원래부터 충성과 절개를 가졌는데, 이제 동심 협력하여 이 도적을 섬멸하여 천자께 보답하려 하니, 두 나라의 군사를 합하여 이 궁한 도둑을 몰아내는 것은 떨어지는 것을 흔드는 것과 같다. 이것이 둘째 이유이다. 관백(關白)이 강포하여 위로 그 임금을 위협 제어하고 아래로 그 민중을 학대하여 하늘이 망하게 하려고 하여 우리에게 손을 빌리는 것이다. 이것이 셋째 이유이다.


어제 국왕을 뵈니, 거동이 침착하고 용모가 준위(俊偉)하여 형세가 반드시 중흥할 것이며, 너희 나라에서 전후에 보낸 여러 사절이 천조(天朝)에 군사를 청하는데 성의가 간절하고 측은하며 눈물이 비오듯하여 신포서(申包胥)가 초(楚) 나라의 사정을 울며 호소하던 뜻과도 유사하다. 임금과 신하가 이러하니 어찌 끝내 침체하고 곤궁하기만 할 것이며, 순(順)으로 역(逆)을 치는데 무슨 공이나 이루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넷째 이유이다.


왜노의 믿는 것은 조총이다. 그러나 세 번 쏜 후에는 계속 쏘기 어려우며, 그 군사가 많지만 강한 자는 얼마 안 된다. 앞에 있는 1백~2백 명만 죽이면 나머지는 모두 바라만 보고도 도망해 갈 것이니, 지금이야말로 이길 수 있는 기회요, 바로 지사(志士)가 공을 세울 때이다. 천조의 명령이 우리 나라나 너희 나라를 물론하고 누구나 평수길(平秀吉)ㆍ평수차(平秀次) 및 중 현소(玄蘇)를 사로잡거나 베는 자가 있다면 사람마다 은 1만 냥을 상으로 주고 백작(伯爵)을 봉하여 대대로 계승하게 하고 평수가(平秀嘉)ㆍ평수충(平秀忠)ㆍ평행장(平行長)ㆍ평의지(平義智)ㆍ평진신(平鎭信) 등 이름 있는 여러 추장을 사로잡은 자는 은 5천 냥을 상으로 주고 대대로 지휘사를 계승하게 하며, 그 아래의 사로잡은 자에게는 각각 상여의 등급이 있게 하였다. 너희 나라 신민이 이때에 군중을 모아 함께 큰 공을 세운다면 본국의 사직을 회복할 수 있고, 또 천조의 후한 상을 탈 수도 있으며, 쇠한 나라의 유민(遺民)으로서 집안을 일으키는 시조가 될 것이니, 어찌 빛날 일이 아니겠는가. 여러 도의 신민과 의병으로 이미 일어난 자는 다시 전진하고, 아직 일어나지 못한 자는 속히 불러모아, 혹은 협력해서 왜노의 세력을 좌절시키고, 혹은 그 해이하게 돌아가는 것을 공격하며, 혹은 군량 운반을 계속하되 모든 조처를 수시로 모두 편리할 대로 하게 하라.


조정에서 선전관을 나누어 보내어, 이 선유문을 가지고 주야로 여러 곳에 분포하며, 제독은 대군을 거느리고 계속 전진하였다. 안주(安州)에 이르러 성의 남쪽에 진영을 설치하니 군대의 깃발과 위용이 정제되고 엄숙하여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체찰사 유성룡이 제독에게 보기를 청하니 제독이 들어오라고 하였다. 유성룡이 동헌으로 나가니 제독이 의자를 마련하고 서로 접대하였는데, 유성룡이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며 이어 소매 속에서 평양 지도를 내어놓고 형세와 병마가 들어갈 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제독이 다 보고서 붉은 먹을 묻혀 붓으로 그곳들을 점찍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적은 조총만을 믿는데 우리는 대포를 사용하여 모두 5~6리쯤 나아가니 적이 어찌 당해내리오.”


하였다. 유성룡이 물러나왔는데, 제독이 시 한 수를 부채 폭에 써서 유성룡에게 보내었다. 그 시는 이러하였다.


군사를 거느리고 밤중에 강을 건너니 / 提兵星夜渡江干
삼한이 편안치 못해서라네 / 爲說三韓國未安
임금께서 날마다 군사 오는 소식 기다려 / 明主日懸旌節報
신하들은 밤에도 술잔을 들지 못하였네 / 微臣夜釋酒杯歡
봄 들어 살벌한 기운에 마음이 오히려 장대한데 / 春來殺氣心猶壯
이 요사한 기운을 제거하니 등골 벌써 싸늘하리 / 此去妖氛骨已寒
담소간의 큰 소리가 승산이 아니지만 / 談笑敢言非勝算
꿈에도 언제나 말타고 달린다네 / 夢中常憶跨征鞍


유성룡이 백상루(百祥樓)에 있다가 이 시를 받아 보고, 읊으며 되새겨보기를 한참 동안하였다. 이날 밤 삼경에 문득 제독의 휘하 사람이 군중의 비밀 약속 세 조목을 가지고 와서 보이는데, 그 성명을 물으니 말하지 않고 갔다. 이튿날 제독이 활을 당겨 줄을 울리며 곧 두어 명 기병으로 달려 순안(順安)으로 나가고, 여러 군중에서도 연일 뒤따라 떠나갔다.


○ 6일. 명 나라 군사가 바로 평양성 밖에 이르러, 여러 장수들을 부대별로 나누어서 사면으로 둘러쌌다. 왜적 1만여 명이 벌려 섰는데, 앞에는 사슴뿔 모양의 나무 울타리를 둘러치고, 방패를 끼고 검을 휘두르며 형세가 매우 창궐하였다. 또 한 왜장은 왜적 4~5천 명을 거느리고, 대장기를 세우고 북을 달고 치고 소라를 불고 징을 두들기면서 성중을 순찰하고 여러 적들을 지휘하였다. 또 본성 안팎에 험한 시설을 하여 형세가 아래서 위로 공격하기 어려웠다. 평양성 북쪽 모란봉(牧丹峯) 위에는 적 2천 명이 있는데 청백색의 깃발을 세웠으며, 거마목(拒馬木)을 벌여 설치하고, 북치고 떠들어대며 함성을 올리면서 대기하고 있다. 그런데 그 봉우리가 높이 솟아서 형세가 제일 요긴하였다.


제독이 이에 남방 군사 1지대(枝隊)를 보내어 모란봉 길을 따라 나가며 올려칠 것같이 하니, 우리 나라에서도 승병으로 그 형세를 돕게 하였다. 적이 높은 곳에 올라가서 포를 쏘자 우리 군사들이 거짓 물러가는 체하니 적이 비로소 고개를 넘어서 따라왔다. 명 나라 군사가 무쇠 방패를 버리고 가니 적이 다투어 가졌는데 명 나라 군사가 다시 공격하여 얼마를 베고 노획하였다. 적이 물러가 봉우리 위에 머물자 제독이 징을 쳐서 군사를 거두어 군영으로 돌아와서 유진(留陣)하였다. 이날 밤 인시(寅時)에 왜 3천여 명이 함매(銜枚)하고 가만히 나와서 총병 양원(楊元)ㆍ총병 이여백(李如栢)ㆍ도지휘사(都指揮使) 장세작(張世爵) 등의 세 진영을 공격하였는데, 세 진영 장수가 각기 그 병사를 통솔하여 힘써 싸워서 죽여서 격퇴하였다.


○ 7일. 밤에, 적병 약 8백여 명이 다시 이여백의 진영을 공격하였는데, 명 나라 군사들이 일시에 기와 등불을 없애고 거마목(拒馬木) 아래서 일제히 불화살을 쏘니 대낮같이 밝았으며 적이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 8일. 이른 새벽에 제독이 분향하고 날을 점쳐 길한 괘를 얻었다. 부대별로 여러 장수를 억제하여 적의 수급(首級)을 베는 일이 없도록 효유하여, 3면을 공격 포위하되 동쪽 1면을 비워두게 하고, 오유충(吳惟忠)에게 맡겨 모란봉을 공격하여 가만히 서남쪽을 취하게 하되, 왜가 고려 군사를 쉽게 여기므로 조승훈(祖承訓)을 시켜 거짓으로 복장을 모방하고 잠복하여 기다리게 하였다.


제독이 전령을 끝내고, 밥을 먹고 장비를 갖춘 다음 세 영(營)의 장수들과 함께 나누어 각기 소속 장병을 거느리고, 성밖 서북쪽을 둘러싸서 진을 칠성(七星)ㆍ보통(普通)ㆍ함구(含毬) 세 문밖에 벌였다. 적은 성위에 홍백색의 깃발을 세우고 항전하는데, 제독의 수하 병사 2백여 기(騎)가 성 아래까지 나가서 오가며 지휘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힘을 다할 것을 생각하였으며 진시(辰時)에는 여러 군병들을 나누어서 차례로 점차 나아갔다. 제독의 군영에서 먼저 대포를 쏘고, 각 진에서도 각종 화기를 일시에 함께 쏘니 메아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산악이 모두 움직이는 듯하였다. 큰 들판이 캄캄해지고 연기와 불길이 하늘에 닿으면 수십 리나 퍼져나가는데 불화살이 공중으로 퍼져나가는 모양이 베를 짜는 것같았다. 불길이 세고 바람이 급하여 바로 성안으로 향해 치달리니, 숲이 다 불탔으며, 먼저 밀덕(密德) 토굴을 불태워 거의 다 불붙었다.


제독이 여기서 여러 군사를 북을 쳐 호령하여 성으로 올라갔는데, 적이 가까운 거리에 엎드려 많이 총환을 사용하고, 끓는 물과 돌덩이로써 죽기를 각오하고 막아 지켰다. 또 긴 창과 큰 칼을 사용하여 밖으로 날을 가지런히 하니 총총한 모양이 고슴도치 털과 같았다. 명 나라 군사들이 차츰 물러서자, 제독이 직접 겁내어 물러서는 사람 하나를 베어서 여러 군사들에게 돌아가며 보이고, 몸을 날려 바로 앞으로 나가서 크게 외치기를,


“먼저 성위에 올라가는 자는 은 50냥을 상을 주겠다.”


고 하니, 여러 군사들이 북치고 고함을 치며 일제히 나아갔다. 용맹을 뽐내며 성으로 다가가서 마패(麻牌)를 지고, 창을 들고 서로 섞여 올라가며 혹은 총을 쏘고 포를 놓으며 혹은 성가퀴를 지키는 적을 쳐 찌르니 적이 당하지 못하고 차츰 물러가게 되었다. 제독이 몸을 날려 먼저 올라서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일제히 올라갔다. 부총병 낙상지(駱尙志)가 함구문(含毬門)에서 창을 들고 몸을 솟구쳐 성첩을 잡고 올라가는데 적이 성가퀴 위에서 큰 돌을 굴려 떨어뜨려 그 배를 맞추었지만 낙상지는 끄덕하지 않고 크게 외치며 뛰어올랐다. 또 절강(浙江) 군사가 적의 깃발들을 뽑아버리고 명 나라 군중의 깃발을 세우니 적병이 감히 버티지 못하였다. 우리 나라 관군도 따라 들어가며 베고 사로잡은 적이 적지 않았다. 적이 바야흐로 남쪽을 고려 군사라고 하여 가볍게 여겼는데, 조승훈이 위장했던 것을 벗어버리고 명 나라 군사의 투구와 갑옷을 드러내니, 적이 급히 군사를 나누어 막는데 조승훈이 용맹을 뽐내며 나아갔다. 장세작 등은 칠성문을 따라 대포로 문루를 쳐부수고 군사들을 정돈하여 들어가고, 이여백 등은 함구문을 경유하여 들어가며, 양원은 보통문을 경유하여 들어가서 승리한 기세로 앞을 다투어 나아갔다. 유격장 오유충은 탄환에 맞아 가슴이 뚫려 피가 흐르고 다리가 부었지만, 분발하며 큰 소리로 싸움을 독려하였다. 제독은 탔던 말이 포환에 맞아 죽어 독약이 온 몸에 풍기는데, 말을 갈아타고 달려나가다 참호 속에 빠져 코끝에서 불이 나지만 군사를 휘동하여 오히려 나아가니 군사 한 명이 적 백 명을 당해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사면으로 쳐서 죽이니 적의 무리가 무서워서 장막 속으로 달려 들어갔는데, 또 불화살을 사용하여 거의 다 불태웠다. 진중에서 머리 벤 수가 1천 2백 85급인데 그 중에는 평수충(平秀忠)ㆍ평진신(平鎭信)ㆍ종일(宗逸) 등 25명이 있었다. 생포한 것이 2명인데 통사 장대선(張大膳)도 있었다. 말 2천 9백 85필을 노획하고, 왜의 기구 4백 52건을 얻었으며, 본국에서 포로되었던 남녀 1천 2백 25인을 구출하였다. 불에 타 죽은 적이 몇만 명은 되는데, 피비린 냄새가 10리는 퍼지며 그 밖의 성에서 떨어지고 물에 빠진 적이 셀 수 없이 많았다.


행장 등이 남은 적을 거느리고 달아나서 풍월정(風月亭) 토굴로 들어갔는데, 제독이 시초(柴草)를 독려하여 운반하게 하여 사면에 쌓아놓고, 불화살을 사용하여 일시에 함께 불태워버리려 하였다. 그런데 칠성문ㆍ보통문과 모란봉의 왜적이 모두 여러 토굴을 차지하고 있어 갑자기 어찌할 수 없으며 왜적은 굴 속에서 벌집처럼 구멍을 많이 뚫고 총알을 비오듯 쏘아대니 명 나라 군사들이 쓰러지는 자가 잇따랐다.


제독이 군사를 수습하여 본영으로 돌아와서 여러 군사들을 밥 먹이고, 통사 장대선을 보내 행장에게 효유하여 말하기를,


“우리 병력으로 단번에 섬멸할 수 있지만 차마 인명을 다 죽일 수는 없어 네가 살아갈 길을 열어주니 너는 속히 여러 추장들을 거느리고 원문(轅門 진영에 설치한 문)에 나와서 나의 약속을 들으라.”


하였다. 행장이 대답하기를,


“저희들이 물러나 돌아가겠으니 뒷길을 차단하는 일이 없게 하여 주시오.”


하니, 제독이 허락하고 통역관으로 우리 나라에 알리어 한쪽의 복병을 철수하게 하였다. 그리고 비밀리 이영ㆍ조승훈ㆍ갈봉하(葛逢夏) 등에게 명하여 요로에 매복토록 하였다. 밤중에 행장이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도망해 갔는데 이영 등이 요격하여 3백 59급을 베고 2명을 생포하였다. 중화(中和)ㆍ황주(黃州) 등지에 군영을 설치했던 왜적은 평양의 포소리를 듣고 먼저 이미 도망쳤다.


그때 순변사 이일(李鎰)이 별장 김응서(金應瑞)와 더불어 함구문으로 들어갔다가 얼마 후에 성밖으로 물러나와 유둔(留屯)하였는데, 이때에 와서야 적이 도망해 돌아간 것을 알았으나 또한 뒤따라 추격하지 않았다. 제독이 이것을 나무라고 또 이일이 장수 재목이 아니고 이빈(李薲)에게 그 소임을 맡길 만하다고 하였다. 조정에서 좌의정 윤두수(尹斗壽)를 보내어 이일의 죄를 문책하는데, 군법을 시행하려 하다가 얼마 후에 놓아주고 이빈으로 대신 그 군사들을 거느리게 하였다.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李時彦)과 김경로(金敬老) 등이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고 싸우지 않으며 이시언은 굶주리고 병들어 낙후한 자 60여 명만 베었으므로 체찰사 유성룡이 베려고 하였는데, 제독이 중지시키며 말하기를,


“그 죄가 죽어야 하겠지만 적을 아직 멸하지 못하였으므로 한 명의 무사도 아껴야 한다.”


하면서, 백의로 종군하게 하였다. 황주 판관 정엽(鄭曄)만은 행장의 뒷길을 끊어 90여 급을 베고, 중도에서 또 30여 급을 베었다.


제독이 이미 평양에서 승전하니 여러 군사들이 다투어 가며 왜적의 물건을 빼앗았는데, 전세정(錢世禎)만이 군사들을 단속하여 물건을 취하지 않았다. 제독이 평양에 머물고 또 좌협(左協)대장 장세작(張世爵)과 선봉장의 총병 사대수(査大受) 등을 명령하여 진병하게 하고, 또 유성룡과 접반사 이덕형(李德馨)으로 급히 앞으로 나가서 마초와 양곡을 마련하도록 독려하고 부교(浮橋)를 만들게 하였다.


조정에서는 또 호조 판서 이성중(李誠中)을 전임으로 하여 좌랑 김계현(金繼賢)과 이자해(李自海)를 거느리고 군중 일행을 따르며 군량과 마초를 주관하게 하고, 또 박충간(朴忠侃)을 독촉하여 수송 관계를 주관하여 보살피게 하고, 또 분호조판서(分戶曹判書) 권징(權徵)을 보내 종사(從事) 황치경(黃致敬)과 권협(權悏)ㆍ중추부 경력(中樞府經歷) 신암(申黯)을 데리고 강화(江華) 교동(喬桐)으로 들어가서, 공사간의 저장 물자를 다 징발하여 군량을 보태고 이어 충청ㆍ전라도의 해상 수송을 독려하게 하였다. 또 사간원 정언 극중(黃克中)을 보내어 작업을 감찰하게 하고, 의정부 우의정 유홍(兪泓)으로 여러 가지 사무를 총독하게 하되 모두 주야로 독촉하여 시각을 지체하지 못하게 하였다. 명 나라 조정에서는 또 흠차 경리 정왜양향 호부산동 청리사 주사(欽差經理征倭糧餉戶部山東淸吏司主事) 애유신(艾維新)으로 이달에 강을 건너 양곡 운반을 독촉하게 하였다. 애유신의 호는 시우(時宇), 하남(河南) 개봉부(開封府) 난양현(蘭陽縣) 사람으로서 만력 병술년에 진사가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양곡 운송이 제때에 되지 않는다고 하여 검찰사 김응남(金應南)과 호조 참판 민여경(閔汝慶)ㆍ의주 부윤 황진(黃璡)을 곤장을 때리니 가는 곳마다 모두들 부들부들 떨었다.


○ 9일. 명 나라 군사 선봉이 이미 대동강을 건너 남쪽으로 나오는데, 나뭇가지가 길을 막아 통행할 수 없었다. 유성룡 등이 이리저리 돌아 빨리 나와 군사들 앞으로 나오는데 중화에 들려 황주에 이르니 밤이 벌써 3경은 되었다. 이때에 적병이 겨우 물러가고 경내가 황폐해지고 공허한데 민중들이 보이지 않으니 어찌할 수가 없었다. 급히 글을 황해 감사 유영경(柳永慶)에게 보내어 수운을 독촉하게 하고, 또 글을 평안 감사 이원익(李元翼)에게 보내어 김응서(金應瑞) 등이 거느린 군사 중에 싸움을 할 수 없는 자들을 뽑아서 평양으로부터 지고 이고 뒤를 따라 황주까지 보내도록 하였다. 또 평안도 세 현(縣)의 곡식을 배로 실어 운반하되 청룡포(靑龍浦)에서 황해도로 운송하게 하였는데, 일이 미리 준비가 있은 것이 아니라 임시로 갑작스럽게 하는 것인데 대군이 뒤를 따라왔지만 군량을 제대로 공급하여 겨우 무사하게 되었다. 선봉 마군(馬軍)이 뒤를 따라 계속 떠나서 개성부(開城府) 땅 청석동(靑石洞)에 이르렀는데, 그곳은 험하고 좁으며 좌우쪽에 절벽이 하늘에 닿게 높이 서고 가운데로 외길이 통한다. 적 수백 명이 모여 있다가, 명 나라 군사들은 바라보고 달아나 숨으며 감히 맞서 싸우지 못하므로 추격하여 30여 급을 베었다. 중협장(中協將) 이여백이 드디어 개성을 빼앗으니 적의 무리 수만 기(騎)가 임진강을 건너 경성으로 도망해 돌아왔다.


○ 19일. 명 나라 군사가 동파탄(東坡灘)을 경유하여 얕은 곳을 걸어서 건너 추적 습격하니 적의 무리가 크게 무너졌으며 진중에서 1백 65급을 베어 얻었다. 우리 나라 방어사 고언백(高彦伯)도 와서 협공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평안ㆍ황해ㆍ강원ㆍ경기 4도가 함께 회복되고 함경도만이 청정(淸正)이 막아 지키는 곳이 되었는데, 개성이 격파되니 그 역시 경성으로 빨리 돌아왔다. 왕이 평양으로 향하여 떠나려 하여, 누각에 올라 의주 백성들을 효유하고 모든 부역을 감면하고 또 전세(田稅) 곡식을 하사하여, 서쪽으로 명 나라 서울을 향하여 망궐례를 행하고 떠났다. 승장(僧將) 휴정(休靜 서산대사)이 용사 1백 명을 선발하여 거느리고 와서 대가(大駕)를 맞이하니 제독이 문첩(文帖)을 보내어 칭찬하고 권장하였는데 그 중에는 ‘나라를 위하여 적을 치는데 충성이 태양을 꿰니 흠앙하는 마음 금할 수 없다.’ 라는 말이 있었다. 또 아래와 같은 시를 지어주기도 하였다.


공리를 도모하는 뜻이 없었고 / 無意圖功利
도선을 배우는 데 전심하였네 / 專心學道禪
국사 급하다는 말 지금 듣고서 / 今聞王事急
총섭이 산에서 내려오셨네 / 摠攝下山巓


○ 경략(經略 송응창)이 평양의 승전 소식을 듣고서 지휘사 황응양(黃應暘)을 보내어 면사첩(免死帖 죽이지 않는다면 증명서)을 가지고 가서 서울 안의 왜노에게 붙었던 백성들을 불러내려 하는데, 안주(安州)에 이르러 왕을 뵙고 국왕의 교서를 청구하였다. 상이 잠시 장막 뒤로 들어가서, 이호민(李好閔)을 불러 교서를 지어 드리라고 하니 이호민이 구상할 겨를이 없이 즉시 초안을 작성하여 드렸는데 황응양이 이를 가지고 떠나갔다. 그 교서에 이렇게 말하였다.


아아, 너희들 경성의 민중들아! 성천자(聖天子)의 밝으신 명을 공경히 듣고 소동하는 일이 없을지어다. 성천자께서 우리 한 나라 지역이 죄없이 저 미친 도적의 핍박을 당하여 도탄에 빠져서 조석간에 다 없어지게 될 것을 불쌍히 여기사 빛난 위엄으로 천자의 군대를 명하시어 구제하게 되었다. 경략 계요 보정 산동 방어왜군무 병부시랑(經略薊遼保定山東防禦倭軍務兵部侍郞) 송응창(宋應昌)과 제독계요 보정 산동 방해 어왜군무 도독부도독동지(提督薊遼保定山東防海禦倭軍務都督府都督同知) 이여송(李如松)이 병마 5만을 거느리고 이미 금년 정월 8일 계해에 평양을 진공하여 하루아침이 다 지나기 전에 성을 함락시켜 불사르고 적을 남김없이 베었으며, 획득한 수급과 갑옷ㆍ마필ㆍ기계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병기가 가리키는 곳에 군사가 머물지 않고 풍운이 빛을 움직이고 귀신이 넋을 잃었다. 남은 추위는 숙살(肅殺)하는 위엄을 돕고, 새 봄은 양화(陽和)의 은택과 화합하니, 산을 들어다 새알을 누르는 것으로도 그 성공의 쉬움을 그대로 비유할 수 없도다. 황해도에 유둔하였던 적이 영채(營寨)를 불태우고 밤에 도망가니 어느 누구도 감히 왕사(王師)를 막을 자는 없을 것이다. 뇌성같은 호령과 대쪽을 가르는 것같은 형세로 며칠내로 저 경성에 이르게 될 것인데 너희들 경성에서 예전부터 생육(生育)하던 백성은 술과 광우리 밥을 가지고 길 양쪽에 서서 맞아 위로하는 것이 황해도의 백성들이나 다름 없을 것이니 내가 구태여 번거롭게 말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생각하면, 너희 어리석은 백성들이나 노약자로 적 속에 있는 자들은 혹시라도 겁내고 박절한 중에서 살기를 꾀하려 할지도 모르지만 이는 구멍의 개미가 살려고 달아나는 격이요, 노둔한 말이 구유의 콩을 잊지 못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진실로 애통한 일이다. 또 포로가 되어 자력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자도 출몰하면서 적정을 정찰하고 주선하면서 틈탈 기회를 생각할 것이니 너희들의 실정을 보고 듣는 것은 나만이 아니라 성천자께서도 아마 불쌍히 여기고 근심하실 것이다. 지금 지휘사 황(黃)이 삼가 은덕의 뜻을 받들어 가서 경성의 백성들을 불러 위무하고 너희들의 죽은 목숨을 살려줄 것이니 내가 무슨 많은 말을 하리오. 오직 성천자의 은덕의 뜻을 받들어 선포할 따름이다. 우리 성황제의 천지의 부모같은 은덕이 우리의 다 끊어진 목숨을 연장하여 주시고, 다시 우리의 다 엎어진 세업을 회복하여 주시고 그 깊은 인덕(仁德)의 남은 은택이 적에게 얽매어 있는 백성들에게 함께 미치니, 천지의 함육(涵育)해 주시는 은혜를 무슨 말로 칭송할 수 있으랴. 저 산하를 돌아보니 오직 눈물이 소매를 적실 뿐이로다. 교서가 이르는 대로, 너희들 민중으로서 저들에게 유인되어 잘못을 범한 자는 서로를 거느리고 명령하는 곳으로 돌아와서 후회하는 일이 없게 할지어다.


황응양이 떠난 다음 왕이 평양으로 돌아와서 제독을 접견하고 사례하며 위로하고 효유하였으며, 또 제독에게 나아가서 서울을 회복할 것을 청하니 제독이 허락하였다. 대개 서울은 우리 나라의 도회지로, 왼쪽에는 강원도, 오른쪽에는 황해도, 동쪽은 경상도, 남쪽은 전라도가 있으며 함경도와 충청도가 서로 호응하는 형세로 되어 있어 천연의 요지를 차지하였는데, 명 나라 군사가 잇달아 이겨서 또한 적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가지니 사람들이 매우 근심하였다. 제독이 먼저 사대수(査大受)를 보내어 앞길을 정찰하고 제독도 자신이 이어 떠나서 25일에 개성부에 들어왔다.


이보다 앞서 적의 추장은 평양에서 패한 것을 분개하고 또 혹시라도 서울 안의 사람들로서 내응이 있는가 의심하여 있는 대로 찾아내어 종루(鍾樓)에서 한강에 이르는 사이에 수만 여명을 늘어앉힌 다음 긴 칼을 빼어들고 남녀를 논할 것 없이 차례로 나가며 베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목을 늘여 칼을 받고 감히 도망하여 흩어지는 자가 없었다. 한 사람이 함께 앉은 자에게 말하기를,


“아무래도 죽을 것인데 도망해 달아나면 살아날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니, 곁에 앉은 자들이 모두 중지시키며 말하기를,


“오활한 생각을 하지 말라. 반드시 큰일 날 것이다.”


하였다. 그 중 혹 듣지 않고 일어나서 달아나 살게 된 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모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낙지(樂地)에 나가기나 하는 듯하니, 인심이 정상이 아닌 것이 이러하였다. 적은 또 여염집을 거의 다 불태웠으며 여러 곳에 유둔하였던 적이 모두 서울로 모여들어 명 나라 군사에 항거할 것을 모의하였다.


우리 나라의 체찰사 이하가 잇달아 진병할 것을 제독에게 청하였는데, 제독이 여러 날을 지체하다가 27일에야 새벽에 덕진(德津)을 경유하여 내려가서 파주에 진영을 설치하였다. 어두운 새벽에 적 수백이 나와서 미륵원(彌勒院) 앞 들판에 진을 치자 사대수가 고언백(高彦伯)과 더불어 수백 기병을 거느리고 진격하여 적 1백 30급을 베고 달려가서 제독에게 품의하여 말하기를,


“적이 이미 기가 죽었으니 빨리 진군하기를 바랍니다.”


하니, 제독이 휘하 수십 인과 더불어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나왔다. 삼협 대장들이 역시 휘하 병사 수십 명을 데리고 서로 뒤를 이어 달려나왔다. 제독이 혜음령(惠陰嶺)을 넘다가 말에서 떨어져서 낯을 상하였는데 다른 말을 바꾸어 타고 앞으로 나오니 여러 장수들도 용맹을 뽐내며 앞을 다투어가며 적진을 바라보고 나왔다. 여기서 제독은 그 군사를 지휘하여 두 날개를 만들어 가지고 앞장섰다. 적이 깃발을 여현(礪峴)에 벌여 세우고 적은 군사를 유인하여 거짓 패하여 달아나면서 진흙 수렁 가운데로 끌어들이니 그만 진흙 속으로 빠져서 말이 나가지 못하였다. 왜적이 그때는 산의 후면에서 산으로 올라와서 진을 치는데 몇 만여 명이며, 칼날이 번쩍번쩍 번득이고 깃발이 해를 가렸다. 명 나라 군사들이 바라보고 모두들 겁을 집어먹었다. 좀 있더니 적의 무리가 검을 휘두르며 나와서 두어 겹으로 둘러싸는데, 제독의 거느린 군사는 모두가 북방의 기병이라 화기(火器)는 없고 단검만을 가졌다. 적병이 앞으로 다가들며 진영을 돌격하고 좌우로 휘둘러 치니 사람과 말이 모두 쓰러지고 감히 그 칼날을 당해낼 자가 없었다. 제독이 형세가 위급한 것을 보고, 장사들을 독려하여 죽기를 각오로 싸우기를 사시부터 오시까지 하였다. 금갑옷을 입은 왜장이 바로 제독을 치니 거의 몸에 미치게 되었는데, 지휘사 이유승(李有昇)이 자기 몸으로 막아 가리면서 두어 왜노를 베고 마침내는 탄환에 맞아 말에서 떨어져서 왜노들에게 사지를 찢기게 되었다. 이유승은 요동 철령위(鐵嶺衛) 사람으로 용력이 비상하고 항상 제독을 따라 좌우에서 떠나지 않았는데 여기서 죽었다. 좀 있다가 이여백(李如栢)ㆍ이영(李寧) 등이 양면으로 막아 협격하고, 이여매(李如梅)가 옆에서 금 갑옷 입은 왜적을 쏘아 죽였는데 때마침 양원(楊元)이 대군을 거느리고 겹겹이 둘러싼 적을 공격하니 왜적이 그만 물러갔는데, 명 나라 군사 중에 정예 병력이 많이 죽었다. 하늘에서는 또 큰 비가 내렸는데 서울 가까운 평지에 논두둑이 많고 얼음이 녹아 진흙에 깊이 빠지니 말이 달릴 수가 없어 사람과 말이 서로 밟고, 기구 및 갑옷과 창들은 길위에 흩어져 깔렸다. 여기에 왜는 산악을 등지고 한수(漢水)를 앞에 놓고 구슬 꿰미처럼 포진하고 널리 비루(飛樓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적을 쏠 수 있는 시설)를 세우고 조총을 구멍속에서 쏘아 수시로 사람을 죽이니 명 나라 군사가 그만 퇴각하였다. 날이 저물어서 제독이 파주에 돌아왔는데, 노상에서 원수(元帥)의 깃발을 보고는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을 보전하여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고 하였으며, 이유승의 사위 왕심(王審)을 불러보고 크게 통곡하며 말하기를,


“호남아(好男兒)가 나를 위하여 죽었다.”


고 하였다. 우리 나라 사람들을 보고는 비록 패전한 것을 숨기지만 정신과 기운이 매우 상실되었다. 밤에, 이유승의 죽음을 생각하며 아침까지 통곡하고는 이튿날 동파(東坡)로 퇴군하려 하였다.


체찰사 유성룡ㆍ우의정 유홍(兪泓)ㆍ도원수 김명원(金命元)ㆍ부원수 이빈(李濱) 등이 제독의 장막 아래 이르러 뵙기를 청하니 제독이 장막 밖에 나와 섰고 여러 장수들이 좌우 쪽에 벌여 섰다. 유성룡 등이 말하기를,


“저희들이 들으니 노야(老爺)께서 장차 서쪽으로 돌아가시려 한다는데, 노야의 깊은 의사가 어디 있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만일 작은 실패로 경계를 삼는다면 아마도 옳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승패는 병가의 상사(常事)이니 형세를 보아서 다시 진격하여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경솔하게 움직이려 하십니까?”


하니, 제독이 말하기를,


“내가 어제 많이 적을 죽였으니 불리한 일은 없습니다. 다만 이곳에 비가 와서 진창이 되어 군사를 주둔하기에 불편합니다. 그래서 동파로 돌아가서 군사들을 쉬어 가지고 다시 나아가려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유성룡 등이 일제히 한 목소리로 말하였지만, 제독이 이미 초안을 작성한 주본(奏本 황제에게 올리는 글)을 내어보였다. 그 중에는,


“적이 도성에 있는 자 20여 만이니 중과부적입니다.”


한 것이 있고, 끝부분에 가서는 말하기를,


“신이 병이 심하니 다른 사람으로 소임을 대신함을 청합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깜짝 놀라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적병이 매우 적은데 어찌 20만이 될 수 있습니까?”


하니, 제독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알 수 있으리오. 그것은 당신네 나라 사람이 말한 것이오.”


하였는데, 이는 칭탁하여 말한 것이었다. 명 나라의 여러 장수 중에도 장세작(張世爵)과 이여백(李如栢)이 더욱 제독에게 퇴병하자고 권하였는데, 유성룡 등이 굳게 다투며 물러가지 않으니 매우 화를 내며 발로 이빈을 걷어차며 물러가라고 소리치는데, 언성과 기색이 매우 사나웠다.


이때 큰 비가 연일 와서 도로가 통하지 못하고, 적은 또 길가의 여러 산을 불태워서 벌거숭이가 되어 쑥 한 포기가 없으며 게다가 마역(馬疫)이 겹쳐서 수일 사이에 거꾸러져 죽은 말이 만 필이나 되었다. 이날 세 진영의 장수가 임진강을 도로 건너 동파역(東坡驛) 앞에 진쳤다. 이날에는 동파에서 또 개성부로 돌아오려 하자, 유성룡이 또 힘써 다투며 말하기를,


“대군이 한번 물러가면 적의 기세가 더욱 교만하고 원근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임진강 이북도 보전하지 못할 것이오니, 원컨대 좀 멈추어 기회를 보아 움직이소서.”


하니, 제독이 거짓으로 허락하였는데, 유성룡 등이 물러갔다. 그런데 제독이 그만 말을 달려 개성으로 돌아가고 여러 진영도 차례로 물러갔으며, 부총병 사대수와 유격장군 관승선(毌承宣)만을 머물러 천여 명 군사를 거느리고 임진강을 지키게 하였다. 유성룡 등이 이후로 사람을 보내어 다시 진군하기를 청하니, 제독이 느슨하게 대답하기를,


“하늘이 개고 길이 마르면 진군하여 정벌하여 초토하겠다.”


고 하였는데, 사실은 그럴 생각은 없었다. 증명한 시가 있었다.


벽제관에서의 한 번 실패에 / 一自碧蹄䘐
웅장한 기개 속으로 사라졌네 / 壯志乃暗消
도리어 기미 계책에 / 還將羈縻計
왜노의 세력만 교만해졌다네 / 徒使奴勢驕
중국 10만 군사가 / 漢家十萬師
말 잘하는 유세객만 못하다네 / 不如說舌饒
머리를 돌이켜 신성한 도읍 바라보니 / 回首望神都
살기가 하늘 높이 뻗쳤네 / 殺氣干雲霄


대군이 개성부에 이르러 매우 오래 있었는데 군량이 이미 다 되었다. 오직 수로를 따라 마른 풀을 강화도에서 가져오고, 또 배로 충청도와 전라도의 마초를 운반하여 조금씩 도착하였는데, 오는 대로 다 떨어지니 그 형세가 더욱 급하였다. 하루는 여러 장수들이 양식이 모자란다고 구실을 삼아 제독에게 회군을 청하니 제독이 매우 성내었다. 체찰사 유성룡ㆍ호조 판서 이성중(李誠中)ㆍ경기좌도 감사 이정형(李廷馨) 등을 뜰 아래에 꿇리고 큰소리로 힐책하며 군법을 가하려 하였는데, 유성룡이 다만 사죄하기를 마지 않고 눈물을 흘릴 뿐이니, 제독이 민망히 여기며 명 나라의 여러 장수들에게로 화를 돌려 말하기를,


“너희들이 예전 서하(西夏)에 종군하였을 때에는 군중에서 수일 동안 밥을 먹지 못하고도 감히 돌아가자고 말하지 못하였는데 끝내는 큰 공을 이루었다. 지금 조선에 와서 우연히 수일간 양식을 대지 못하였는데 어찌 감히 문득 돌아가자고 하느냐. 너희들은 가려면 가라. 나는 적을 멸하지 않고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요, 오직 말가죽으로 시체를 싸서 가지고 갈 뿐이다.”


하니, 여러 장수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다. 유성룡 등이 사례하고 물러나와서 시기에 맞지 않게 양곡을 방출한 죄로 개성 경력(經歷) 심예겸(沈禮謙)을 곤장으로 때렸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전라도에서 바다로 수송해 오는 쌀과 콩 2만 2천여 석과 황해도에서 수송해 오는 마초 수만 석이 후서강(後西江)에 닿아서 겨우 무사하게 되었다. 이날 저녁에 제독이 총병 장세작을 시켜 유성룡 등을 불러 위로하고 또 군사(軍事)를 의논하였다.


이때 전하는 말이 청정(淸正)이 또 양덕(陽德)ㆍ맹산(孟山)으로 빙 둘러 와서 몰래 평양을 습격하려 한다고 하였다. 제독이 벌써부터 서쪽으로 돌아갈 마음이 있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큰 소리로,


“평양은 근본이 되는데, 만일 여기를 지키지 못하면 대군이 돌아갈 길이 없으니 구원하지 않을 수 없다.”


고 하면서, 드디어 여러 군사들에게 일제히 물러갈 것을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평양으로 향하고 유격장군 왕필적(王必迪)만을 머물러 개성부를 지키게 하며 이덕형에게 조선 군사가 세력이 외롭고 구원병이 없으니, 함께 강 북쪽으로 돌아가서 적에게 승세할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유성룡이 이때 동파에 있다가 종사관 신경진(辛慶晋)을 보내어 달려가서 제독을 보고, 퇴군할 수 없다는 의사를 진술하여 말하기를,


“선왕의 분묘가 모두 경기 지역에 있는데, 적의 수중에 떨어져 있어 신(神)과 사람의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니 차마 버리고 갈 수 없는 것이 하나요, 경기 이남의 남은 백성들이 날마다 왕사(王師)가 오기를 기다리는데, 문득 왕사가 물러갔다는 말을 들으면 다시 굳건한 뜻을 가지지 못하고 서로 무리를 거느리고 적에게로 돌아갈 것이 둘이요, 우리 나라 강토를 한 자ㆍ한 치도 용이하게 버리지 못할 것이 셋이요, 장사(將士)가 비록 힘은 약하지만 지금 바야흐로 천병(天兵)을 의지하여 함께 나가 취할 계획을 하는데, 한번 철군의 명령이 내렸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모두들 원망하고 분개하여 사방으로 흩어져갈 것이 넷이요, 한번 물러가면 적이 그뒤를 따라 갈 것이니 비록 임진강 이북이라도 온전할 수 없는 것이 다섯입니다.”


하였는데, 제독이 그 말을 듣고 아무 말 없이 떠나갔다. 조정에서 좌의정 윤두수(尹斗壽)를 보내어 퇴병하지 말 것을 청하였는데 제독이 역시 듣지 않으니 윤두수가 간절하게 사연을 말하며 동쪽으로 나가기를 청하면서 눈물이 말할 때마다 떨어지니 제독이 민망히 여기는 안색을 지었으며, 그래서 우는 각로(閣老)라는 칭호가 생기게 되었다.


진사 태현(太玄) 심조환(沈朝煥)이 이러한 동쪽에서의 사실을 듣고 두 수의 율시(律詩)를 지어 탄식하였다. 그 첫번째 시는 이러하다.


들리는 말 요양 수자리에 / 聞說遼陽戍
위태롭고 혈전도 많다네 / 羈危血戰多
오랑캐 진영이 새날개처럼 벌리자 / 虜營分鳥陣
중원의 군사들 큰 물결에 휘말렸다네 / 漢卒偃鯨波
험한 곳에 들어가는 일 병법의 비밀인데 / 入阻鞱鈴祕
떠도는 글은 도로에 잘못 전해지네 / 飛書道路訛
장군님 어려움도 많으니 / 將軍自辛苦
유세하는 그 사람 끝내 어떨런지 / 說舌竟如何


그 두번째 시는 이러하다.


오랑캐 항복 받는 계획 아직 이루지 못했는데 / 伏羌圖未上
비방하는 광주리의 글 의심할 일 많구나 / 謗篋摠堪疑
말을 잃은 것이 어찌 복은 되지 않으며 / 失馬寧非福
제후 봉한 곳에 운수가 기구하지 않으리라 / 封侯數不奇
나라의 많은 재물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데 / 國脂流海甸
전쟁에 죽은 시체 강가에 처참하다네 / 戰骨慘江垂
여러 경영하는 일들 / 多少經綸事
빈말만으로 부질없이 끌어가려나 / 空談謾欲持


○ 2월. 병부에서 제문(題文 명 나라에서 관원이 공사로 황제에게 아뢰던 글의 일종)을 올려 청하여 내고(內庫)의 은 3천 냥을 내어보내어 조선의 공로가 있거나 공사에 죽은 인원에게 주게 하였다. 조선에서 왜를 막아 공로가 있거나 공사에 죽은 관원들은 그 충성과 용맹을 칭찬할 만하니 상품을 고루 나누어주라는 성지(聖旨)를 받들어 거행하였다. 그리고 다시 국왕에게 전유하기를,


“각도 장령을 엄하게 독려하여 힘써 회복을 도모해서 중국에서 구원하는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또 흠차 순안요동 겸관해방군무 감찰어사(欽差巡按遼東兼管海防軍務監察御史) 주유한(周維翰)과 흠견 분수요동영원 겸둔전산서 포정사우포정사(欽遣分守遼東寧遠兼屯田山西布政司右布政使) 한취선(韓取善) 등을 보내어 군사를 감찰하고, 흠차 통령천귀 한토관병 참장(欽差統領川貴漢土官兵參將) 유정(劉綎)과 원임(原任) 참장 허국충(許國忠) 등으로 계속 구원하게 하였다.


주유한은 호는 도우(鞱宇)인데 북직례(北直隷) 하간부(河間府) 부성현(阜城縣) 사람이며, 만력(萬曆) 경진년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평양으로 왔는데, 성품이 간결하고 정중하여 우리 나라 사람들과 서로 접촉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명 나라 사람들도 꺼려하였다. 한취선은 호는 성암(惺菴)인데 산동 제남부(濟南府) 치천현(淄川縣) 사람이다. 만력 정축년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며, 사람됨이 매우 정직하였다. 유정은 자는 자신(子紳)이요, 호는 성오(省吾)인데, 강서(江西) 남창부(南昌府) 홍도현(洪都縣) 사람이다. 사천(四川)ㆍ파촉(巴蜀) 지방 군사 5천 명을 거느렸는데 그 중에는 해귀(海鬼) 수십 명이 있으니 그 종족이 남번(南番)에서 생장하여 낯빛이 아주 새까매서 귀신같으며, 바다 밑으로 잠수하여 다녔다. 또 키가 큰 사람이 있으니 형체가 두 길은 되는데 말을 탈 수가 없어 수레를 타고 왔다. 또 미후(獼猴)로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타고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데 적진중에 들어가서 말 굴레를 풀어놓기도 하였다. 허국충은 남방 군사 포수 1천 명을 거느렸는데, 머리에는 흰 사모두건을 쓰고 몸에는 소매가 짧은, 우리 나라 나장(羅將)의 옷같은 것을 입었는데 색깔은 적ㆍ백ㆍ청ㆍ황색을 사용하였으며, 불화살ㆍ대포ㆍ창ㆍ칼의 기술을 잘 사용하는데 모두 왜노보다 나았으며 잇따라 강을 건너서 왔다.


이때, 대군이 이미 서쪽으로 물러갔기 때문에 왜노의 여러 추장들이 경성에서 그 세력을 합하여 형세가 더욱 성하였다.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이 수원 독성(禿城)으로부터 휘하 정병 4천 명을 나누어서, 전라도 절도사 선거이(宣居怡)로 선봉장을 삼았는데, 자신은 조방장(助防將) 조경(趙儆)의 군사 2천 3백 명을 거느리고 양천(陽川)을 경유하여 진군하여 고양(高陽)의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진을 쳤으며, 선거이는 금천산(衿川山)에 영채를 설치하여 멀리서 도움을 주었다. 전라도 소모사(召募使) 변이중(邊以中)이 역시 정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양천산에 주둔해 있으면서 자신이 감독 제조한 화차(火車) 3백을 나누어서 권율의 진중으로 보내었다. 서울 안의 왜적이 권율의 군사가 적은 것을 탐지하고 마음에 두지도 않으며, 발끝으로 차서 거꾸러뜨릴 계획으로 군사들을 다 거느리고 나왔다.


○ 12일. 새벽에 정탐군이 보고하기를,


“적이 좌우익(左右翼)으로 나뉘어서 홍색과 백색의 깃발을 가지고 본영을 향하여 온다.”


하였다. 권율이 군중에 명령하여 높은 곳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5리쯤 거리에 있는 들판 언덕 위에 적의 무리가 이미 가득 찼는데, 선봉 백여 명의 기병이 어느 사이에 점점 가까이 오더니 잠시 후에는 수만여 명의 군사가 들판을 덮어오는데 모두 홍기와 백기를 등에 지고 황금 일산을 펴들었으며 귀신의 얼굴, 짐승의 형상으로 심히 괴이하게 분장한 자가 본영을 둘러싸고, 맨 나중에는 많은 군사로 계속 나와서 두세 겹으로 둘러쌌다. 권율이 곧 군중에 전령하여 식사를 하게 하고 활 잘 쏘는 군사들을 뽑아 내려다보이는 곳에 배치하고 화살을 내려 쏘기를 비오듯 하였다. 또 용사들을 뽑아 돌을 던져 공격하며 계속하여 화차에서 석환(石丸)을 쏘고 또 각종 화기를 발사하니, 적이 진영을 세 곳으로 나누어 한편으로 군사들을 쉬게 하면서 번갈아 가며 나왔다. 권율이 검을 빼어들고 싸움을 독려하였는데 묘시에서 유시에 이르는 동안에 적이 아홉 번 진출하였다가 아홉 번 다 퇴각하였다. 그리고는 마초 묶음을 가지고 바람을 따라 불을 놓아 우리 성채를 불태우는 것을 성중에서 물을 부어 구원하였다. 처음 승군장(僧軍將) 처영(處英)으로 승군 1천 명을 거느리고 서북쪽에서 있는 근처의 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때 와서 승군이 좀 물러가니 적이 크게 외치며 밀고들어와 온 군사가 휩쓸렸다. 그런데 권율이 스스로 검을 휘두르며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니 모두들 칼날을 무릅쓰고 육박해 나가며 싸우자 적이 지탱하지 못하고 일시에 달아나 흩어졌다. 그리고 시체를 네 무더기로 모아놓고 마초를 모아 불태우니 냄새가 10리나 퍼졌다. 우리 군사들이 싸우면서 머리 벤 수가 1백 10급이요, 왼쪽 귀가 두 개이며, 빼앗은 활ㆍ살ㆍ투구ㆍ갑옷ㆍ칼ㆍ총 등 병장기가 모두 7백 27건인데, 살아남은 왜적은 통곡하면서 성으로 돌아갔다.


총병 사대수(査大受)가 이때 임진강에 있으면서 왕래하며 정찰 탐지하다가 권율이 크게 승첩한 소식을 듣고 와서 보았는데, 진영을 정돈하여 기다리니 깃발들이 선명하고 병장기가 정밀하고 예리하며, 호령이 엄숙하고 부서 대열이 어지럽지 않으니 사대수가 공경하여 대접하며 감탄하여 말하기를,


“권씨 집안 군대는 다른 진영과 특별히 다르다. 외국에도 장수다운 장수가 있다.”


하였다. 경략 송응창(宋應昌)은 자문을 본국에 보내고, 포상을 시행하게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왜노(倭奴)가 조선 왕국을 꺾어 함락함으로부터 삼도(三都 한양ㆍ개성ㆍ평양)와 여러 군현이 모두 소문만 듣고 달아나고 흩어지며 한 명의 영웅호걸도 의병을 일으켜 큰 국난을 배제하고 맡은 지역을 지켜 회복을 도모하는 자가 없으니, 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할 만하였다. 유독 전라도 관찰사 권율이 외로운 성을 막아 지키면서 민중들을 불러모으고 자주 특이한 모계를 써서 때때로 큰 적에게 항거하였으며, 근일에는 다시 모래를 주머니에 모아 양식인 척 속여 왜를 유인하여 와서 모이게 하고 공격하여 섬멸하였으니 이는 바로 왕국이 위급할 때의 충신이요, 중흥의 명장이다. 지금 붉은 비단 네 필과 백금 50냥을 상으로 주어 충성과 용맹을 권장하게 한다.


송 경략은 또 우리 나라로 하여금 작위와 녹봉을 더하여 본국의 대신ㆍ관료들을 깨우치게 하였으며, 병부 상서 석성(石星)은 글을 올려 이렇게 아뢰었다.


조선 여러 도(道) 중에서 홀로 전라도에서 정사를 펴고 명을 거행하는 배신(陪臣) 권율이 외롭고 위태로운 곳을 지켜서 강경한 적을 항거하였으니 권장하고 상을 주는 전례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황제의 전지에,


“조선은 강국이다. 지금 전라도에서 참획한 수가 많은 것을 보니, 그 나라 백성은 아직도 진작시킬 만하다. 짐이 매우 가상히 여기는 일이니 해부(該部)에서는 알라.”


하였다.


이리하여 병부에서 홍로시(鴻臚寺) 관원을 보내어 선유하고 상여한 물건이 매우 많았다. 이 후로 명 나라 조정에서는 문무 대소 장수와 관원이 권율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반드시 말하기를,


“이 사람이 전일 행주에서 승전보를 아뢴 이인가?”


하며, 반드시 문서를 보내어 은근한 뜻을 표시하였으며, 우리 나라에서도 자헌대부로 승진시켜서 상을 주었다. 그것을 증명하는 시가 있다.


순찰사 훌륭한 이름 바다 지역을 진동하여 / 巡察英名動海區
군사 이끌고 바로 올라와 왕도를 진압했네 / 提兵直上壓王都
창을 비껴 든 장한 기운은 적을 삼킬 수 있고 / 橫戈壯氣能呑敵
피를 마셔 맹세하는 영웅의 마음은 한 몸을 버리기로 하였다네 / 歃血雄心在殞軀
황제의 글이 내려오니 삼군이 흥기하고 / 天書旣下三軍躍
옥으로 장식된 검을 반포하자 모든 장교들 나와 절하네 / 玉劍纔頒列校趨
큰 공훈 깃발 날려 사직을 보존하니 / 勳合旂常存社稷
능연각(공신의 화상을 모시는 곳)에 훗날 새 화상이 걸리겠네 / 凌煙異日掛新圖


이 제독이 행군하여 평산(平山) 보산역(寶山驛)에 이르러, 행주에서 승첩한 소식을 듣고 군사를 후퇴한 것을 뉘우치면서 이여백(李如栢)을 책망하여 말하기를,


“큰일을 지체하여 지금까지 성공하지 못한 것이 모두 너 때문이다.”


하니, 대개 이여백이 그 서울 진공을 중지하자고 하였던 것이다. 제독이 여기서 장세작(張世爵)으로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다시 개성부로 가서 양곡을 모아 저장하여 기다리게 하고 제독은 인하여 평양으로 돌아가서 성안에 머물러 주둔하였다.


권율은 여기서 군사를 이동하여 서쪽으로 올라와서 제도(諸道)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및 부원수 이빈(李薲)과 더불어 파주산성을 근거하여 지키고, 방어사 고언백(高彦伯)ㆍ이시언(李時言)과 조방장(助防將) 정희현(鄭希賢) 등은 유격장이 되어 해유령(蟹踰嶺)을 차단하여 막으며, 의병장 박유인(朴惟仁)ㆍ윤선정(尹先正)ㆍ이산휘(李山輝) 등은 오른쪽 길을 따라 경릉(敬陵)ㆍ창릉(昌陵) 사이에 복병하고 각기 그 군사로 출입하며 유격전을 벌이되 적이 많이 나오면 피하고 싸우지 않으며, 적게 나오면 그뒤를 따라 요격하였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과 경기 수사 이빈(李蘋), 충청 수사 정걸(丁傑), 전 전라 병사 최원(崔遠)은 강화도에서 배를 타고 용산(龍山) 서강(西江)을 따라 혹은 물러가고 혹은 나오면서 적의 세력을 분산시켰다. 충청도 순찰사 허욱(許頊)은 이미 윤선각(尹先覺)을 대신하여, 권율과 더불어 서쪽으로 올라와서 양성(陽城)에 있었는데, 다시 본도로 돌아가서 수호하면서 적의 남쪽으로 공격해 올라오는 세력을 방비하게 하고, 양근 군수 이여양(李汝讓)도 용진(龍津) 상류에 있으면서 적의 여기 저기로 날뛰는 것을 방어하니 우리 나라 병세가 매우 장엄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벤 적의 머리를 모두 개성 남문 밖에 매달아놓으니 명 나라의 참장 여응종(呂應鍾)이 보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조선 사람들이 지금은 적의 머리 취하기를 공 놀리듯 한다.”


하였다. 하루는 적이 동대문으로 나와서 크게 산골짜기를 수색하였는데 양주(楊州) 적성(積城)에서 대탄(大灘)에 이르는 동안에 아무런 전과가 없자 약탈을 마지 않았다. 총병(總兵) 사대수(査大受)가 적이 습격하여 올까 두려워하여 유성룡 등을 멀리 피하게 하며 또 거느린 용사 수십 명을 나눠 보내어 와서 호위하게 하며 밤을 새워 경비하였다. 이때 적이 행주의 패전을 보복하려 하여 화군(火軍)을 거느리고 서로(西路)를 따라 나와서 광탄(廣灘)에 이르니 파주산성과는 수십 리 떨어졌다. 군사를 주둔하고 나오지 않으며 오시에서 미시에 이르기까지 공격하지 않고 도로 물러갔는데, 이렇게 하기를 세 번 정도 하고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이때 적이 경성을 차지한 지 이미 2년이 지나 적병의 칼날이 미치는 곳에 천리 사이가 텅 비어 있고 백성들은 농사를 짓지 못하여 거의 다 굶어 죽었다. 서울 성안의 남은 백성들이 갖은 고생으로 붙들고 이끌며 메고 지고 와서 우리 군중으로 들어왔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사 총병이 말타고 가다가 노상에서 어린 아이가 죽은 어머니의 젖을 먹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기고 거두어 군중에서 기르며 우리 나라 사람을 보고 하는 말이,


“왜적이 아직 물러가지 않았는데 백성들이 이렇게 되었으니 앞일을 어찌 할 것인가.”


하며, 또 탄식하여 말하기를,


“하늘이 걱정하고 땅이 슬퍼할 일이다.”


하였다.


마침 남방의 양곡을 실은 배가 강언덕에 와서 정박하고 전라도 소모관(召募官) 안민학(安敏學)도 겉곡식[皮糓] 10만을 모집하여 배로 수운하니, 곧 전 군수 남궁제(南宮悌)를 감진관(監賑官)으로 임명하여 솔잎으로 가루를 만들어서 솔잎가루 열 홉에 쌀가루 한 홉을 섞어 물에 타서 마시도록 하였지만 사람은 많고 곡식은 적어서 살아난 사람이 얼마 안 되었다. 중국 장수도 역시 불쌍히 여겨 군량 30석을 나누어 주었지만 백의 하나도 미치지 못하였다. 하루는 밤에 큰 비가 왔다. 굶주린 백성들이 좌우쪽에 있으면서 슬피 부르는 소리가 처량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여기 저기에서 쓰러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경상우도 감사 김성일(金誠一)이 역시 전 전적(典籍) 이노(李魯)를 보내어 체찰사부(體察使府)에 급한 사정을 고하며 말하기를,


“전라 좌도의 곡식을 가져다가 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여 구제하고 또 봄갈이 씨앗으로 사용하려 하는데 전라 도사가 구제미로 꾸어주려 하지 않으니 나누어주게 하여 주십시오.”


하므로, 체찰사부에서는 공문을 체찰부사 김찬(金瓚)에게로 보내었다. 김찬이 이때 호서(湖西)에 있었는데, 전라도로 급히 가서 직접 남원 등지의 창고를 열어 1만 석을 영남으로 옮겨 구제하게 하였다. 대저 경도(京都)에서 남변(南邊)까지는 적병이 가로질러 있고 인민들은 산위에 오르고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서 밭 갈고 심은 곳이 없으니, 적으로 하여금 다시 수개 월간만 물러가지 않게 하였더라도 백성이 다 없어졌을 것이다.


제독이 앞서 병을 칭탁하고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게 하기를 청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서울의 적이 20여 만이다.’ 하고, 또 ‘관백(關白)이 배를 띄워 들어가 침범한다.’는 설이 있는 등 극히 장황하니 경략이 이를 듣고서 3월에 원임(原任) 계진 동협부총병 후부서도독첨사(薊鎭東恊副摠兵後部署都督僉事) 왕승은(王承恩)과 통령 유격장군 지휘동지(統領游擊將軍指揮同知) 왕여징(王汝徵)ㆍ중군 기고(中軍旗鼓) 장구경(張九經) 및 수영 참장(隨營參將) 소국부(蘇國賦)ㆍ원임 통판 심사현(沈思賢)ㆍ감생(監生) 도량성(陶良性)ㆍ유격장군 오종도(吳宗道) 등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 안주(安州)로 나와서 주둔하였다.


왕승은은 대녕(大寧) 전위(前衛) 사람인데 얼마 안 되어 사사로이 관아에 소속된 말을 팔아먹은 사실로 경략의 규탄을 받아 파직되어 갔으며, 왕여징은 마ㆍ보병 2천 명을 거느렸는데 경략이 정주(定州)ㆍ영원(寧遠) 등지에 나누어 주둔하게 하였다. 장구경은 호를 봉죽(鳳竹)이라 하였는데, 하남(河南) 수양부위(睢陽府衛) 사람이요, 심사현은 자는 방달(邦達), 호는 사천(沙川)이라 하였는데 절강(浙江) 소흥부(紹興府) 여요(餘姚) 사람이다. 도양성은 호는 양오(養吾)인데 절강 건주부(虔州府) 진운현(縉雲縣) 사람이며, 오종도는 자는 여행(汝行), 호는 석루(石樓)인데 절강 소흥부 산양현(山陽縣) 사람으로 무진사(武進士) 출신이며 오래도록 우리 나라에 주둔하여 깊이 사정을 잘 알아 상사(上司)에 자세히 설명하였다. 경략이 급히 제독에게 격문을 보내어 기회를 타서 진병하게 하고 또 부총병 동양정(佟養正), 중군 왕승은 등을 나누어 보내어 가서 철산(鐵山) 해안에 봉화대를 설치할 만한 곳을 살펴보게 하였다. 철산군 땅에 이르니 고을 사람이 화문석(花紋席)을 주었는데 동양정이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후에 일이 있어 파직되었다. 태현(太玄) 심백함(沈伯含 조환(朝煥)의 자)이 〈의동정개가(擬東征凱歌)〉 여덟 수를 지어 경략에게 주었다.


큰 조개는 누르고 고래는 날으는 혈전의 전장에 / 蜃壓鯨飛血戰場
군사 백만이 요양을 지났네 / 干戈百萬度遼陽
쌍무지개 밤에 비치니 요사한 기운이 조용하여 / 雙虹夜照妖氛靜
넓은 바다의 새로운 광명 붉은 해가 비치네 / 滄海新回赤日光


주나라 기자 봉했던 옛 제후 나라에 / 周箕封國古諸侯
강산을 회복하니 계책도 장하구나 / 恢復山河屬壯猷
대장은 아홉 관문 지나 용맹한 장병 몰고 가는데 / 大將九關駈虎豹
중원의 1만 기병은 준마로 달리네 / 中原萬騎控혁騮


적우전 날려 궁성에 승전 보고하는데 / 分飛赤羽報丹서
팔도의 금과 꼴로 천자의 군대에 공급한다네 / 八都金蒭供六師
행장 등 다투어 와서 씩씩한 위용을 엿보아 / 行長爭來窺虎步
오랑캐 임금이 직접 와서 용기에 절하리 / 夷王親自拜龍旗


말을 달려 티끌 일으키는 중원 장수 영웅인 것이 / 蹀馬吹塵漢將雄
관군들 일제히 모란봉에 오르네 / 官軍齊上牧丹峯
악당의 시체들 모아 큰 무덤을 만들고 동주로 표할 것이 / 封鯨作觀標銅柱
동해 넓은 물결에 큰 바람 보리 / 東海洋洋覽大風


압록강 물 깊은데 밤에 무기를 씻는 것이 / 鴨綠江深夜洗兵
중국의 조두소리 점성 곁에서 들리네 / 漢家刁斗傍苫城
오랑캐 물결 참담한데 교만한 기색 없으니 / 夷波慘惔無驕色
천자의 분부가 옥경(신선이 거처한다는 곳)에 있다네 / 天子分付在玉京


붉은 색 큰 깃발에 해 떨어지자 자색 기운 어두워지는데 / 日落紅旗紫氣昏
금인과 옥대 진영의 문에 가득하네 / 腰金拖玉滿轅門
온 군사 번개치듯 변방에 바람이 이니 / 全軍電掃邊風逐
여러 격서 날으는 곳에 바다 위의 해라도 삼키네 / 列檄雄飛海日呑


오랑캐 척후 모두 가요 부르니 / 夷方斥堠盡歌謠
말하는 선비 말이 없고 싸우는 군사 쓰러지네 / 說士無言戰士消
다시 동쪽 위세로 북벌을 엄히 하니 / 更遣東威嚴北伐
두 손으로 일월 받들어 남조를 향한다네 / 雙擎日月向南朝


작인 높이 달고 준여(군기의 일조)를 지나는데 / 鵲印高懸度隼旟
위엄을 선양하니 위타서 보내지 않으리 / 宣威不遣尉佗書
전라도 경상도에 장책 행하니 / 全羅慶尙紆長策
만세토록 요황이 황제 계신 곳을 향하리 / 萬歲要荒拱帝居


경략이 또 군자금을 청하니 천자가 다시 형금(冏金) 20만 냥을 내주어 군비에 보태게 하고, 흠차 사험군공 병부무선 청리사주사(欽差査驗軍功兵部武選淸吏司主事) 가유약(賈維鑰)을 보내어 안주(安州)에서 공을 조사하고 군사를 위로하였다. 가유약은 자는 무경(無扃)이요, 호는 지백당(知伯堂)인데 북직례(北直隷) 순천부(順天府) 준화현(遵化縣) 사람이다.


이때 평수가(平秀嘉)가 용산창(龍山倉)을 점거하였는데 쌓인 곡식이 수십만 석이요, 경성으로 그들의 소굴을 삼았다. 제독이 이에 이영(李寧)ㆍ조승훈(祖承訓) 등으로 1만 명 기병을 거느리고 개성에 주둔하게 하고, 양원(楊元)을 명하여 평양에 진을 치고 대동강을 점검하여 군량길을 잇게 하며, 이여백(李如栢)은 보산역(寶山驛) 등지에 주둔하여 도움을 주도록 하며 사대수(査大受)는 이전 그대로 임진강을 지키게 하고, 제독 자신은 몸소 동서로 살펴보면서 조절하였다.


또 비밀리 사대수를 시켜 결사대를 모아 샛길로 나가서 용산에 쌓인 곡식을 불태우게 하니 왜적이 식량이 결핍하여 동남쪽 여러 고을로 나가 노략질하여 마음대로 빼앗으니 땅굴 속에 감추었던 미곡까지 모두 파내어 가져가게 되었다. 또 가평(加平)ㆍ포천(抱川)으로 향하고 깊숙히 춘천까지 들어가서 불을 놓고 빼앗기를 거의 다하였다. 청정(淸正)은 또 졸병을 천여 명 혹은 수천 명씩 나누어 보내어 노략질하기를 마지 않으며 서울 주위 군읍에는 무덤까지도 파내니 보기에도 참담하고 가슴이 아파 통곡할 만한 일이었다. 증언하는 이런 시가 있다.


사람 사는 연기 천리간에 거칠고 쓸쓸해지니 / 人煙千里莾蕭瑟
귀신이 울고 원망하는데 밤에는 도깨비 불만 푸르르구나 / 鬼哭神怨夜燐靑
긴 끈으로 오랑캐를 얽어맨다고 부질없이 말하지만 / 浪說長纓堪繫虜
깨끗이 맑게 하는 공 누가 다시 창명을 진정하나 / 廓淸誰復鎭滄溟


제독이 철병할 의사를 가지면서도 근심에 잠겨 결정을 못하였는데 군막 중의 선비 정문빈(鄭文彬)ㆍ조여매(趙如梅)가 역시 화친하기를 권하고 군사 파하는 것을 주장하였다. 병조 판서 이항복이 처음 제독을 중강(中江)에서 맞이하고 돌아와 왕께 아뢰기를,


“제독의 군사가 기율이 있으니 반드시 이 도적을 격파할 것입니다. 다만 막하에 정문빈과 조여매 두 사람이 일을 주장하니 방해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과연 그대로 되었다. 그런데 두 사람 역시 경략에게 규탄을 당하였다. 대개 평양을 극복할 때는 그 기세가 매우 성하고 다시 개성에서 싸워 형세가 대쪽을 가르는 것같았는데, 두 사람이 중간에 있으면서 그 마음을 동요시켰으며 벽제(碧蹄)에서 패전하게 되자 기운이 크게 꺾였다. 또 이 역에 와서 군사를 상실하고, 질병이 성행하니 여기서 두 사람의 모계를 받아들여 급히 휴식하여 판을 매듭지으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왜적 역시 양식이 결핍되고 군사는 종기가 많이 생겼다. 또 명 나라 군사가 다시 호준포(虎蹲砲) 등의 대포 및 전차를 강위에 벌여놓고 전세가 날로 커지니, 적의 추장 행장(行長)이 평양에서의 패전을 경험 삼아 돌아갈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때마침 창의사 김천일(金千鎰)의 군중에 이신충(李藎忠)이라는 자가 자청하여 서울에 들어가서 적정을 탐지하다가 두 왕자 및 장계군(長溪君) 황정욱(黃廷彧) 등을 만나보고 돌아와서, 적이 화친할 의사가 있음을 말하면서 왕자의 글 및 황정욱 등의 장계를 내놓았다. 그 장계 등은 모두 두 본이 있는데 진본 장계에서는 적중의 사정을 자세히 쓰고 또 그 언문으로 자세히 적었으며, 위본 장계에는 적이 말하는 대로 썼는데 그 중에는 관백 전하라는 말도 있으며 또 신(臣) 자를 쓰지 않았으니, 그 계교가 대개 임시방편으로 적을 속이려는 의사에서 나온 것인데 스스로 주위 사람이 비밀리 엿보는 데 빠져들어가는 줄을 깨닫지 못한 것이었다.


창의사 김천일이 이신충의 전하는 글을 얻고 또 용산에서 수군이 적의 추장과 통화(通和)하는 글을 얻었는데 모두 체찰사에게 보냈다. 체찰사는 다만 위본 장계 한 건을 등록하여 행재소에 계달하고 또 말하기를,


“신하로서 차마 듣지 못하고, 말할 수 없는 말이 있습니다.”


하였다. 또 왜적의 글로 사대수(査大受)에게 보이니 사대수가 곧 가정(家丁) 이경(李慶)을 시켜 평양에 달려 보고하였다. 조정에서는 황정욱 등이 적에게 절개를 잃고 또 의심할 만한 일이 있다고 여겨 침을 뱉으며 더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어 후일 국문하는 단서를 열어놓았다. 이것은 모두 일찍이 철원에서 격서(檄書)를 전할 때에 사성 황신(黃愼)이 붓을 들고 지은 내용 중에,


“묘당에서 힘써 금(金) 나라와의 화친을 주장하니 진회(秦檜)의 고기를 먹어야 하고, 간신이 제일 먼저 촉(蜀)으로 행행(行幸)할 것을 주장하였으니 국충(國忠)의 머리를 베어 매달아야 한다.”


하였는데, 그 뜻이 실은 누구를 가리킨 대상이 있었기 때문에 체부(體府)에서는 이 말을 듣고 원래 벌써부터 원한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에 와서 모함하는 흔적이 있는 것을 사람들이 바로잡지 못하였다. 그런데 당시의 일은 은미하고 굴곡된 실정을 자세히 알기 어려웠고 사람들의 말 역시 믿을 수 없었다. 이후로 전쟁과 화친 두 가지의 일로 서로 논란하고 변명이 있었으니 명 나라 조정에서도 잘 분간하지 못하였다.


만력(萬歷) 20년 임진 6월부터 21년 계사 3월까지 도합 2년간이다.


[주-D001] 조경남(趙慶男) : 
원문에는 이름의 경(慶)이 경(敬)으로 되었으나 《한양 조씨 족보(漢陽趙氏族譜)》에 의거하여 경(慶)으로 고침. 또 원문에는, “선비 박세진(朴世珍)…… 조경남(趙敬男)…… 모두 조헌(趙憲)의 막하에서 같이 일을 하다가 이때에 와서 함께 죽었다.” 하였는데, 조경남은 조헌의 문인으로 종군(從軍)한 적은 있으나 임진왜란 때 전사하지 않고 1641년(인조 19)에 병사(病死)하였다.  
[주-D002] 충사(蟲沙) : 
전쟁터에서 죽은 군사들을 말함. 《포박자(抱朴子)》에 “전장에서 죽은 장교들은 원학(猿鶴)이 되고 군사들은 충사(蟲沙)가 되었다.” 하였음.
[주-D003] 양공(羊公) : 
진(晉)의 태산(泰山) 남성(南城) 사람 양호(羊祜)를 말함. 선정을 베풀어 인심을 매우 얻었으며, 그가 죽은 뒤에 백성들이 평소에 늘 오르던 현산(峴山)에 비를 세웠는데, 그 비를 바라보고 모두 눈물을 흘려 타루비(墮淚碑)라 불렀다.
[주-D004] 맹분(孟賁)과 하육(夏育) : 
모두 옛날의 용맹한 사람.
[주-D005] 양(亮) : 
금(金)의 황제. 임금을 죽이고 자리를 빼앗았으므로 역적 양이라 하였다. 송(宋)과의 맹약(盟約)을 어기고 송(宋)을 치다가 중도에서 자기의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주-D006] 외로운 …… 때문이요 : 
여진족이 군사로 송(宋)에 깊이 쳐들어갔을 때 송의 장수가, “여진이 본래 병법을 모르는구나.”라고 하였다.
[주-D007] 중행열(中行說) : 
한 문제(漢文帝) 때의 환관(宦官). 흉노(匈奴)에게 사신으로 갔다가 항복하여 본국을 해치므로 가의(賈誼)가 임금에게 “신이 흉노를 쳐서 중행열의 등에 매를 치겠습니다.” 하였음.
[주-D008] 남조(南朝)에 …… 비웃음 : 
금(金) 나라가 군사를 거느리고 송(宋) 나라에 쳐들어가서, “남조[宋]에 사람이 없구나, 이 지방을 지켰더라면 내가 강을 건너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주-D009] 북군(北軍)이 …… 말 :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진(陳) 나라에 수(隋) 나라 군사가 창졸간에 침입하는 것을 보고 북군(北軍)이 강을 날아서 건너왔다고 놀랐다.
[주-D010] 빈(邠)을 떠나던 : 
태왕(太王)은 주 문왕(周文王)의 조부인 고공단보(古公亶父). 처음에 빈(邠)에 살았는데 적인(狄人)의 침입을 받자 빈을 버리고 기산(岐山)으로 옮겼음.
[주-D011] 명황(明皇)이 …… 피난하듯 : 
명황(明皇)은 당 현종(唐玄宗)의 시호.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만나 서촉(西蜀)으로 피난하였음.
[주-D012] 이성(李晟) : 
당 덕종(唐德宗) 때 사람. 당(唐)의 역적 주자(朱泚)가 장안(長安)을 함락하고 덕종(德宗)이 봉천성(奉天城)으로 파천하였을 때 이성(李晟)이 주자를 쳐부수고 서울을 회복하니, 덕종이 기뻐하여, “하늘이 이성을 낳은 것은 사직(社稷)을 위해서요 짐(朕)을 위함이 아니로다.” 하였음.
[주-D013] 육지(陸贄) : 
당 덕종(唐德宗) 때 사람. 당 덕종이 주자(朱泚)의 난을 피해 봉천(奉天)으로 파천하였을 적에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종행(從行)하여 많은 조서(詔書)를 지었는데, 그가 기초한 조서를 보고 장수와 군사들이 느껴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주-D014] 봉천(奉天)으로 …… 행차 : 
당 덕종(唐德宗)이 주자(朱泚)의 난을 피해 봉천성(奉天城)으로 갔던 일을 말함. 여기서는 선조(宣祖)가 서쪽으로 파천한 것을 비유한 말.
[주-D015] 밤중에 …… 들으니 : 
진(晉) 나라 조적(祖逖)이 유곤(劉琨)과 같이 잠을 자다가 밤중에 닭 울음 소리를 듣고 유곤을 발로 차서 깨우며, “난리가 나겠구나, 공을 세워보세.” 하였다.
[주-D016] 중류(中流)에서 …… 치며 : 
진(晉) 나라 조적(祖逖)이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면서 중류(中流)에서 돛대를 치며 말하기를, “중원(中原)을 회복하지 않고는 돌아오지 않겠다.” 하였다.
[주-D017] 복덕성(福德星)이 …… 임했고 : 
옛날에 복덕성(福德星)이 있는 나라를 침범하면 침범한 나라가 망한다는 말이 있다. 복덕성이 오(吳) 나라 분야(分野)에 있을 때에 진(秦) 나라가 침범하였다가 몇 해 뒤에 오 나라는 회복되고 진 나라는 망하였다.
[주-D018] 신정(新亭)에서 …… 울던 일 : 
진(晉) 나라가 외래 민족에게 중원(中原)을 잃고 강동(江東)으로 옮겨 갔을 때에 여러 사람들이 서로 보며 울매, 왕도(王導)가 말하기를, “힘을 다하여 회복할 생각은 않고 울기만 하는가.” 하였다.
[주-D019] 왕통(王通) : 
수(隋) 나라 때의 유학자(儒學者). 벼슬하지 않고 제자를 가르치는 데 힘썼다. “선인(先人)이 남겨준 헌 집이 있으니, 벼슬하지 않겠다.”고 한 말이 있다.
[주-D020] 자공(子貢) : 
춘추(春秋) 때 위(衛) 나라 사람으로, 공자(孔子)의 제자로 말을 잘하고, 또 식화(殖貨)에 능하여 집에 천금을 두고 노(魯) 나라와 위(衛) 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주-D021] 안공(顔公) : 
당(唐) 나라의 안진경(顔眞卿)을 말함. 안진경이 평원 태수(平原太守)로 있을 때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이 있을 것을 미리 알고 성을 개축하고 참호를 파고 또 미리 미곡을 많이 저축하여, 난리를 대비한 일이 있다. 〈걸미첩(乞米帖)〉이 있다.
[주-D022] 조적(祖逖) : 
진 원제(晉元帝) 때의 사람. 군사를 이끌고 강음(江陰)에 주둔하여 병기(兵器)를 제작한 일이 있다. 그는 이곳에서 2천여 명의 군사를 얻어 진군하였다.
[주-D023] 어찌 …… 바라보듯 : 
춘추시대(春秋時代) 열국의 하나인 월(越)은 중국의 남방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을 중심으로 한 지방이고, 진(秦) 나라는 서북방으로 지금의 섬서(陝西) 지방이다. 두 나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양국 사이에 직접적인 이해 상관이 없음을 말한다.
[주-D024] 작은 …… 있다 : 
《논어(論語)》 공야장편(公冶長篇)에, “공자가 이르기를, ‘작은 고을이라도 반드시 구(丘 공자의 이름)처럼 충신(忠信)한 사람은 있으나 구처럼 학문을 좋아하지는 못한다’[子曰十室之邑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라고 하였다.
[주-D025] 악의(樂毅) : 
전국(戰國) 때 연(燕) 나라 장수. 연 소왕(燕昭王) 때 조(趙)ㆍ초(楚)ㆍ한(韓)ㆍ위(魏)ㆍ연(燕) 5개국의 군사를 거느리고 제(齊)의 70여 성을 함락하였다. 뒤에 소왕의 아들 혜왕(惠王)이 즉위하자 파직되어 망명하였음. 《사기열전》에 있음.
[주-D026] 노숙(魯肅) : 
삼국시대(三國時代) 오(吾) 나라 사람. 재산이 많았는데 난리중에 어려운 사람을 많이 구제하였다. 오(吳)의 장군 주유(周瑜)가 양곡을 필요로 하자, 미곡 3천 곡(斛)이 쌓인 곳간을 가리키며 흔쾌히 주유에게 주었다.
[주-D027] 무계(武溪) : 
강 이름. 한(漢) 나라 마원(馬援)이 남쪽 오랑캐를 무계(武溪)에서 격파하였다.
[주-D028] 차부(箚付) : 
장관이 관원을 보낼 때 공문서를 주는 것.
[주-D029] 구벌(九伐) : 
《주례(周禮)》에 의하면 옛날 천자는 여러 나라의 불법 무도한 죄악행위를 징계하는 방법으로 그 죄악의 종류에 따라 생(眚)ㆍ벌(伐)ㆍ단(壇)ㆍ삭(削)ㆍ침(侵)ㆍ정(正)ㆍ잔(殘)ㆍ두(杜)ㆍ멸(滅) 등 9개 정벌이 있었다고 한다.
[주-D030] 석목(析木)의 자리 : 
옛날 중국에서는 국가의 위치를 하늘에 있는 별들의 방위에 응하여 분야(分野)를 정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중국의 연(燕) 나라와 함께 동쪽 석목성(析木星)의 위치에 해당하는 자리가 된다는 것이다.
[주-D031] 풍목(風木)이 하늘을 맡고 : 
목(木)은 방위에 있어서 동쪽이 되고 4계절에 있어서 봄이 되니 동방은 음양의 기운이 비로소 움직이고 만물이 생겨나는 것을 의미하고, 맹춘(孟春) 즉 음력 정월의 동풍은 겨울의 동결(凍結)을 해소하며 만물의 생동을 돕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동방 나라의 이른 봄을 의미하는 말이 되는 것이다.
[주-D032] 신포서(申包胥)가 …… 호소하던 뜻 : 
옛날 중국에서 오(吳) 나라가 초(楚) 나라를 침공하였는데 초 나라 신하 신포서(申包胥)가 진(秦) 나라에 사절로 파견되어 가서, 울며 사정을 호소하면서 구원병을 간청하여 결국은 오 나라의 침략군을 격파하고 국가의 기초를 튼튼히 한 일이 있었다.
[주-D033] 거마목(拒馬木) : 
거마(拒馬)는 말[馬]을 막는다는 뜻으로, 옛날 적군을 방어하는 시설의 일부를 말하는 것인데, 나무를 앞에 차(叉) 자 형으로 세운 것.
[주-D034] 함매(銜枚) : 
옛날 전투시 군사들이 소리없이 행진하게 하던 한 방법인데, 마치 말에 재갈을 물리듯 입에 나무 막대를 물리고 행군하였다.
[주-D035] 분호조판서(分戶曹判書) : 
분조(分曹) 즉 분정부(分政府)의 호조 판서를 말하는 것이다. 임진왜란 중 왕과 정부 일행이 북으로 의주(義州)를 향하여 피난가는 도중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세자 즉 광해군(光海君)으로 따로 일부의 정부 대신들을 데리고 분정부를 조직 강원(江原)ㆍ경기도 지방을 중심으로 임시 전수(戰守), 민정의 일을 별도 시행하게 하였는데, 분조라고 하여 육조의 관원을 따로 임명하고 집무하게 하였다.
[주-D036] 비방하는 광주리의 글 : 
비방하는 광주리의 글은 옛날 중국의 전국(戰國) 시대에 위(魏) 나라 장수 악양(樂羊)이 중산(中山) 땅을 치고 돌아와서 그 공을 말할 때에 임금 문후(文侯)는 광주리에 가득찬 그를 중상하는 글을 보이니, 악양은 그제야 자기의 세운 공이 많은 사람들의 중상을 받아주지 않은 임금의 힘에 의한 것임을 알고 감사하였다는 것이다.
[주-D037] 말을 잃은 것이 : 
진(秦) 나라 때 변방에 한 늙은이가 말을 기르다가 잃은 것이 다시 복이 되어 나갔던 좋은 말을 데리고 들어오고, 그후에도 그 말로 인하여 화와 복이 반복되었지만 그 주인 늙은이는 이러한 일시적인 화와 복에 모두 태연하여 화복을 인간 생활의 상사로 알고 지냈다는 것이다. ‘새옹지마’의 고사임.
[주-D038] 용기(龍旗) : 
두 마리의 용을 그린 큰 깃발로 용기(龍旗), 교룡기(交龍旗)라고도 하는데 천자의 깃발이다.
[주-D039] 동주(銅柱) : 
구리 기둥을 세워 국경을 표시한다는 것인데, 중국 한(漢) 나라 때 마원(馬援)이 남쪽의 먼 나라 교지(交趾)를 정벌하고 구리 기둥으로 경계 표시를 하였던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주-D040] 점성(苫城) : 
옛날 노(魯) 나라 땅 즉 지금 산동성의 한 지방이었다. 전국시대 제(齊) 나라에서 노 나라를 칠 때에 계씨(季氏)의 가신 점이(苫夷)라는 사람이 양호(陽虎)의 무모한 행동을 억제하여 이곳에서 패전을 면한 일이 있었다.
[주-D041] 작인(鵲印) : 
중국 한(漢) 나라 때 장호(張顥)라는 사람이 양(梁) 나라 정승이 되었는데 까치와 비슷한 새가 날아와서 땅에 앉으려 하므로 사람을 시켜 잡으니 한 개의 돌로 화하였으며, 그 돌을 깨뜨리니 충효후인(忠孝侯印)이라고 새긴 금인(金印)이 나왔다고 한다. 따라서 어진 신하의 이적(異蹟)을 작인(鵲印)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주-D042] 위타서(尉佗書) : 
위타(尉佗)는 한(漢) 나라 진정(眞定) 사람인데 원래 성명은 조타(趙佗)였으며, 남해위(南海尉) 임효(任囂)가 죽은 다음 직무를 수행하면서부터 위타로 부르게 되었다. 세력이 커져 일시는 장사(長沙) 등지를 공략하고 남월(南越)의 무제(武帝)로 자칭하기도 하였는데 한 나라 문제가 육가(陸賈)를 보내어 그 무도함을 책망하니 위타가 사죄하며 한 나라의 신하가 되었다.
[주-D043] 요황(要荒) : 
요황(要荒)은 천자 도읍지에서 먼 지방을 말하는 것이다. 즉 중국에서는 본토 밖 5백리 되는 곳을 번복(藩服)이라 하고 거기서 다시 5백리 밖을 유복(綏服), 유복에서 5백리 밖을 요복(要服), 요복에서 5백리 밖을 황복(荒服)이라 하였다는 것인데 여기에 말하는 요황은 곧 요복ㆍ황복의 의미이니 중국에서 가장 먼 지방의 나라를 의미하는 말이다.
[주-D044] 진회(秦檜) : 
진회(秦檜)는 중국 송(宋) 나라 말기의 유명한 간신이다. 금(金) 나라와의 화친을 적극 주장하여 송 나라의 중흥을 방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충신 악비(岳飛)를 죽이고, 장준(張浚)ㆍ조정(趙鼎) 등을 찬축(竄逐)하고 정권을 마음대로 하여 결국 송 나라를 위망의 지경에 이르게 하였는데, 여기서는 임진왜란 때 우리 나라 조정에서 일본과 화친을 말하는 자를 이 진회에 비유한 것이다.
[주-D045] 국충(國忠) : 
중국 당(唐) 나라 현종 때 양태진(楊太眞) 즉 양귀비의 족형 양국충(楊國忠)인데,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자 먼저 촉(蜀) 땅으로 피난갈 것을 주장하였으며, 피난 도중 마외역(馬嵬驛)에서 금군(禁軍)들에게 살해되었다. 여기서는 임진왜란의 발생과 함께 왕에게 피난을 건의한 대신들을 양국충에게 비유한 것이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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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득염(2006) 광주건축100년 전남대학교출판부
한국학호남진흥원(2022) 광주향약 1,2,3. 한국학호남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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