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유 張維 인조 7년(1629) 9월 15일∼인조 8년(1630) 8월장유(1587∼1638)의 본관은 덕수(德⽔)이며,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 또는 묵소(默所)이다. 할아버지는 목천현감 장일(張逸), 아버지는 판서 장운익(張雲翼)이며, 우의정 김상용(⾦尙容)의 사위로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와 예조판서 장선징(張善澂)의 아
서창억새축제에서 백일장에 참가하셨나요?이날 열린 백일장에서 일반부 대상(광주서구청장상)에 김혜윤 씨(금호동)의 ‘오빠의 탯줄’이, 청소년부 대상(광주시교육감상)에 세품기독학교 6년 장유나 학생의 ‘가을이 온다’가 각각 차지했다. 또 별도로 공모전을 통해 사전 접수한 서구마을이야기 부문은 정소진 씨(방림동)의 ‘
광주광역시에서 전해 내려오는 조선 중기 선조 때의 공신 정충신의 비범한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조선 후기 인조(仁祖)[재위 1623~1649] 때의 공신인 정충신(鄭忠信)[1576~1636]의 어린 시절의 비범함을 알 수 있는 세 가지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들은 당시 광주목사이던 권율 장군과 관련되어 있다. 1981년에 광산군지편
1. 머리말이 책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시문집 《고산유고(孤山遺稿)》를 번역한 것이다.고산은 주지하듯이 일찍부터 국문학계의 주목을 받아 왔다. 특히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비롯한 일군의 시조(時調) 작품에서 보여 준 뛰어난 문학적 성취는, 그를 송강(松江) 정철(鄭澈,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논(論)을 씀1. 머리말이 책은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1527~1572)의 문집과 저술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4책으로 출판한 것이다. 《고봉집(高峯集)》은 1989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국역하여 펴낸 바 있다. 1970년에 간행된 석인본을 대본으로 한 기왕의 국역서
1. 저자기대승(奇大升) : 정해년(1527, 중종22)~임신년(1572, 선조5).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ㆍ존재(存齋)이며, 본관은 행주(幸州)이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2. 가계3. 행력중종 22년(정해 1527년, 1세) ◦ 11월 18일, 광주(光州) 소고룡리(召古龍里) 송현동(松峴洞)에서 태어나다.중종 28년(계사 1533년, 7세)
고봉전서(高峯全書) 보유 - 조순(趙淳) 고봉 선생이 서거하신 지 431년의 오랜 세월이 흘렀다. 우리나라에는 그동안 치란(治亂)과 흥망(興亡)의 자취가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지나갔고 왕조도 점차 쇠퇴하여 마침내 경술년의 국치(國恥)를 당하였으며 광복 후에도 국토가 양단되고 국론이 분열되어 마침내 내
이식(李植) 택당(澤堂)공의 휘는 대승(大升), 자는 명언(明彦)이니 세상에서 고봉(高峯) 선생이라 칭하기도 하고 혹은 존재(存齋)라고도 칭한다. 기씨(奇氏)는 관향이 행주(幸州)인데, 행주는 지금 경기도 고양군(高陽郡)에 예속되어 있다. 선대는 고려 때에 현달하여 장상(將相)과 훈척(勳戚)을 배출한 문벌의 융성함이 국
만력(萬曆) 계사년(1593, 선조 26) 봄, 명(明) 나라 군사와 우리 군대가 진격하여 경성(京城)의 왜적에게 육박해 들어가자 경성의 왜적들이 남쪽으로 달아났다. 이에 창의사 김공이 군사를 거느리고 왜적을 추격하여 영남에 들어간 뒤 진주(晉州)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해 6월 갑진일에 왜적이 무리들을 총동원하여 진주를
농사를 권장하고 농서를 구하는 구언 전지에 대한 배의 등 27명의 상소문 - 정조 22년 무오(1798) 11월 30일(기축) 농사를 권장하고 농서(農書)를 구하는 윤음을 내렸는데, 거기에 이르기를,“내년 기미년은 바로 선왕께서 적전(籍田)에서 친히 밭을 간 해이다. 50년 간을 임금
김 장군 전[金將軍傳] - 서하집 제14권 / 전(傳) : 이민서(李敏敍, 1633~1688). 장군의 이름은 덕령(德齡)이고, 자는 경수(景樹)로, 광주(光州) 석저촌(石底村)의 사람이다. 아버지 붕섭(鵬燮)과 조부 익(翊)은 재행(才行)이 있었으나 모두 현달하지 못하였다. 집안이 대대로 유업(儒業)에 종사하였으니, 장군도 어릴 적
이지덕(李志德, 1739~?) - 명고전집 제5권 / 서(書) : 명고(明皐) 서형수(徐瀅修)이지덕(李志德, 1739~?)의 자는 대여(大汝)이고 1777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거주지는 광주(光州)였다. 이 진사(李進士)는 명고가 22세 때인 1777년(정조1) 이후에 쓴 편지 〔答李進士, 志德〕 에서 나온다. 명고보다 10세 연상이다.이 편
기우용문현 에게 답함 신축년(1841, 헌종7) 2월〔答奇羽用 文鉉○辛丑二月〕 - 매산집 제16권 / 서(書) :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1776~1852)학궁(學宮)은 수선(首善)하는 곳이므로 사양함을 예(禮)로 여기는데, 사양함은 나이가 많은 이를 높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연향(宴享)할 때에
김충장유사서(金忠壯遺事序) - 홍재전서 제9권 / 서인(序引) 2 : 정조대왕(正祖大王, 1752~1800) 공동산(崆峒山) 북쪽의 차가운 바람 끝, 또는 연(燕), 조(趙)의 비장한 노래 여운처럼 쓸쓸하고 비통하면서도 그래도 그것이 한 개인이나 한 가정의 문헌(文獻)이 되어 버리고 말아서는 안 될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그러
동몽교관 증 사헌부 지평 권공 행장(권필) - 명재유고 제43권 :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선생의 성은 권(權)씨이고 휘는 필(韠)이다. 자는 여장(汝章), 호는 석주(石洲)이며 안동(安東) 사람이다. 문충공(文忠公) 근(近)의 6세손이다. 조부 승지 휘 기(祺)는 아들 둘을 두었으니, 장남 벽(擘)은 관직이 참의에 이르
정금남에 대한 만시 십이 운[挽鄭錦南 十二韻] - 계곡선생집 제29권/ 오언 배율(五言排律) : 장유(張維 1587~1638)서석산(瑞石山)의 수려한 기운 한 곳에 모여 / 瑞石鍾靈秀출중한 영재가 세상에 나왔어라 / 英才出等夷높은 나무 옮겨 앉아 굳센 깃털 다시 닦고 / 遷喬刷勁翮천리마 뒤에 붙어서 앞질러 멀리 치달렸지 / 附驥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의 시문집 <계곡집>기옹이 떠나려 하면서 시를 남겨 주기에 차운하여 작별하는 시를 짓다[畸翁將去有詩留贈 次韻以別] 하늘 끝에 각자들 풍진 세상 떠돌다가 / 天涯淪落各風煙여기에서 만나 보고 곧바로 이별인가 / 此地相逢卽別筵혼자 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