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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사 김공 정렬사 비(倡義使金公旌烈祠碑)- 계곡선생집 제13권 / 비명(碑銘) 9수(首)

만력(萬曆) 계사년(1593, 선조 26) 봄, 명(明) 나라 군사와 우리 군대가 진격하여 경성(京城)의 왜적에게 육박해 들어가자 경성의 왜적들이 남쪽으로 달아났다. 이에 창의사 김공이 군사를 거느리고 왜적을 추격하여 영남에 들어간 뒤 진주(晉州)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해 6월 갑진일에 왜적이 무리들을 총동원하여 진주를 포위하였는데, 9일 만에 성이 함락되면서 김공과 성을 지키던 여러 장수들이 모두 죽었다. 이에 선묘(宣廟)가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면서 공에게 좌찬성을 증직(贈職)하고 조제(吊祭)를 올리도록 명하였다.
그 일이 있고 난 14년 뒤에 호남의 인사들이 공을 위해서 나주(羅州)에 사당을 세웠는데, 사당을 낙성하고 나서 조정에 사액(賜額)해 줄 것을 청하니 정렬(旌烈)이라는 편액(扁額)을 내렸다. 그러고 나서 또 20년이 지난 천계(天啓) 병인년(1626, 인조 4)에 나주 인사들이 공의 사당에 희생(犧牲)을 묶어 두는 빗돌을 장차 세우려 하면서 나에게 글을 보내 공의 훈열(勳烈)을 기록하여 돌에 새기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앞선 임진년에 왜노(倭奴)가 대대적으로 쳐들어와 부산(釜山)을 결단내고 동래(東萊)를 함락시킨 뒤 북쪽으로 마구 짓쳐 들어오자 여러 성진(城鎭)들이 소문만 듣고도 저절로 무너져 버리는 상황에서 이일(李鎰)과 신립(申砬)의 군사마저 잇따라 패몰(敗沒)당하고 말았다. 이에 선묘가 계책을 결단하여 서쪽으로 피난을 떠나자 왜적이 마침내 경성을 함락시켰다.
이때 공은 전(前) 부사(府使)로서 관직을 떠나 나주의 전사(田舍)에 물러와 살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는 울부짖고 통곡하며 거의 까무러칠 정도까지 되었다가 이윽고 떨쳐 일어나면서 말하기를,
“내가 통곡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나라에 난리가 일어나서 군부(君父)가 파월(播越)하고 있는 때에 세신(世臣)인 내가 새처럼 뿔뿔이 흩어져서 목숨만 건지려고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나는 장차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난리 속으로 뛰어들 것이다. 가령 강하고 약한 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때는 오직 죽음이 있을 따름이니, 죽지 않고서는 나라에 보답할 길이 전혀 없다.”
하였다. 그리고는 글을 급히 보내 고경명(高敬命), 박광옥(朴光玉), 최경회(崔慶會), 정심(鄭諶) 등에게 이 일을 고하였는데, 의사(義士) 송제민(宋濟民), 양산룡(梁山龍), 양산숙(梁山璹), 임환(林懽), 이광주(李光宙), 서정후(徐廷厚) 등도 소식을 듣고 달려와 집결하였다. 이에 정예(精銳) 수백 명을 얻어 6월 3일에 삽혈(歃血)의 의식을 행한 뒤 군사들과 맹세를 하고 군대를 지휘하여 서쪽으로 나아갔다.
공은 본래 허약한 체질로 병든 몸이었으나 이때에 이르러서는 매우 기뻐하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내가 칼을 차고 말을 타니 기분이 쇄락하여 날아갈 것만 같다.”
하였다. 이때 마침 3도(道)의 근왕병(勤王兵)이 용인(龍仁)에서 궤멸되었으므로 군중(軍中)에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이에 공이 군사들에게 유시하기를,
“우리 군대는 의(義)를 위하여 일어났으니 오직 진격만 있을 뿐 후퇴는 없다. 가고 싶은 사람은 마음대로 떠나도록 하라.”
하자, 군사들 모두가 감격하여 분발하면서 몰래 도망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무너진 군사들도 점차 공에게 돌아와 호서(湖西)에 이를 무렵에는 수천의 병력을 확보하게 되었는데, 마침내 수원(水原)에 진격하여 진(陣)을 치면서부터 군세(軍勢)가 조금씩 떨쳐지기 시작하였다.
공이 장사(壯士)를 모집하여 간간이 나가서 왜적을 치게 한 결과 수확을 상당히 거두었으며, 또 금령(金嶺 용인(龍仁)의 속원(屬院))의 왜적을 습격하여 패배시키기도 하였다. 그리고는 막하(幕下)의 양산숙(梁山璹) 등을 보내 소(疏)를 받들고 사잇길로 가서 행재(行在)에 보고하게 하였다.
당시 번곤(藩閫)의 제수(諸帥)들이 의병의 사기를 저상(沮喪)케 하는 경우가 많았고 또 왜적의 공격이 갈수록 심해지자 공이 장좌(將佐)와 계책을 정하고는 병력을 이동시켜 강화(江華)로 들어가서 근거지를 삼았다. 이에 도망쳐 숨어 있던 관리들도 공의 도착 소식을 듣고는 비로소 조금씩 나왔으며 각 부대의 관군들도 많이 와서 모였다.
그러자 공이 여러 군사들과 약속을 단단히 하고서 강 연안에 목책(木柵)을 세우고 함선(艦船)을 배치하는 등 공수(攻守)에 대한 대책을 완비하였는데, 기보(畿輔)의 사민(士民)들 역시 곳곳에서 단결하여 모두 의병이라 칭하며 공을 응원하였다.
이때 양산숙 등이 행재(行在)에서 돌아와 공을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로 임명하고 창의사(倡義使)의 호(號)를 내리는 조정의 명을 전하였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행조(行朝 행재소와 같은 말임)의 명령이 양호(兩湖)에 하달되기 시작하였다.
왜적이 경성을 오랜 기간 점거하자 피난갔던 도성 백성들이 많이들 경성에 돌아와 왜적들과 섞여 살게 되었다. 공이 이에 결사대를 모집하여 도성 안으로 잠입시킨 뒤 순역(順逆)과 이해(利害)의 도리를 가지고 타이르게 하니, 도성 안의 백성들이 모두 감격하여 열복(悅服)하면서 수만 명이나 공에게 정성을 바쳐 왔다. 그런가 하면 왜적을 몰래 죽여 군전(軍前)에 헌괵(獻馘 적을 죽여 왼쪽 귀를 잘라 바치는 것)하기도 하고, 스스로 몸을 빼쳐 공에게 돌아오는 자의 숫자가 날마다 1백 명을 헤아렸다. 그 결과 엄려(庵廬 군대 막사)가 사방에 온통 들어차면서 땅이 비좁아 더 이상 받아들일 공간이 없을 정도까지 되었다.
공이 때때로 병력을 출동시켜 강 연안에 둔(屯)치고 있던 왜적을 습격하자 적들이 서로 잇따라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공이 이에 여러 장수들과 몽충(蒙衝 적선(敵船)에 돌입하는 옛날 전함의 이름) 4백 척을 거느리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곧바로 진격하였다. 그리고는 양화도(楊花渡)에서 북치고 함성을 지르며 군세(軍勢)를 떨친 뒤 수길(秀吉)의 죄상(罪狀)을 내걸어 도성 안의 왜적들을 자극시켜 나오게 하려 했으나 성안의 왜적들은 끝까지 감히 움직이려고 하지를 않았다.
이듬해 정월, 명 나라 대장인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평양(平壤)을 수복한 뒤 개성부(開城府)로 진격하여 주둔하면서 장차 경성의 왜적을 토벌하려고 하였다. 이에 공이 거리와 지세(地勢) 및 왜적의 정형(情形)을 상세히 갖추어 제독에게 보고하는 한편, 선유봉(仙遊峯)으로 진군하여 제독을 성원(聲援)하면서 간간이 군대를 나누어 내보내 적의 기세를 꺾곤 하였다. 왜적이 날로 형세가 궁박해지자 그만 도성 안의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하고 집을 다 불태운 뒤 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망쳤다. 이에 공이 장좌(將佐)를 거느리고 도성에 들어가 종묘(宗廟)의 구허(舊墟)에 자리를 잡았다.
이때 마침 공에게 왜적을 추격하라는 조정의 명령이 떨어졌는데, 공이 바야흐로 병석에 누워 있는 몸이었으나 이 명령을 듣고는 벌떡 일어나 말하기를,
“내가 이제 죽을 곳을 얻게 되었다.”
하였다. 당시 공이 거느리고 있던 부대 모두를 제수(諸帥)에게 뺏긴 상황에서 그래도 겨우 남아 있던 수백 명만을 이끌고 공이 남쪽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왜적은 그때 산과 바닷가에 근거지를 설치하고서 장차 서쪽으로 호남을 넘보려 하고 있었는데, 제군(諸軍)은 대부분 그 예봉(銳鋒)을 피하려고 다른 곳에 진을 친 채 몸을 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공은 생각하기를 ‘호남이야말로 나라의 근본이 되는 지역인데, 진주(晉州)는 실로 호남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곳이다.’ 하고는, 진주를 지켜 호남으로 가는 길을 차단하겠다고 청한 뒤 회보를 기다리지 않고 곧장 진주로 들어갔다.
그런데 진주는 그야말로 여지없이 결딴난 상태여서 성지(城池)나 기계(器械) 모두 믿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공은 절도사(節度使) 최경회(崔慶會), 황진(黃進) 및 복수장(復讐將) 고종후(高從厚), 의병장 장윤(張允) 등과 함께 죽음으로써 지킬 것을 약속하였다.
며칠이 지나자 왜적의 유병(遊兵)이 벌써 성의 동쪽에 나타났는데 공이 정기(精騎)를 출동시켜 격퇴하였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왜적이 대거 이르러 성 주위에 목책을 둘러 세우더니 보병과 기병이 곧장 성문 앞까지 육박해 왔는데, 공이 경노(勁弩)를 그들 위에 퍼붓게 하니 적들이 근접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왜적이 대나무를 엮어 큰 방패를 만든 뒤 그 가운데에 포혈(砲穴)을 끼워 넣고는 성을 공격해 왔으나, 우리 군사 역시 임기응변으로 대처하였다. 이번에는 왜적이 또 토산(土山)을 쌓고는 그 산 위에 망루를 세워 성안을 내려다보면서 포환(砲丸)을 비오듯 쏘아 대었다. 이에 공도 성안에다 이를 마주 보는 토산을 쌓고는 대포를 발사하여 토산 위에 세운 왜적의 망루를 부숴 버렸다. 그리고 마침 적장(賊將) 몇 사람이 성 동쪽의 산마루에서 모이는 것을 공이 탐지하고는 몰래 대포를 발사하여 두 번째 앉은 자를 맞춰 쓰러뜨리기도 하였다.
공은 평소 다리에 병이 생겨 걷지를 못했는데 가마를 타고 성을 돌아다니면서 낮이나 밤이나 조금도 쉬지 않았다. 그리고는 손수 죽을 쑤워 성첩(城堞)을 지키는 군사들을 먹여 주곤 하였으므로 군사들이 모두 감격하여 더더욱 목숨을 바칠 각오를 새롭게 하였다.
당초에 왜추(倭酋) 수길(秀吉)이 제로(諸路)의 왜적들 모두가 공을 세우지 못하는 것을 분하게 여긴 나머지 사신을 보내 꾸짖었는데, 이에 왜적의 장수들이 반드시 유명한 도회지 하나를 결딴냄으로써 수길의 인정을 받고자 하였다. 그래서 이 전투에서 성이 오래도록 떨어지지 않는 가운데 죽은 왜적들의 수가 엄청나게 많았는데도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에 오래도록 비가 내려 성곽의 흙이 질퍽해진 나머지 곧잘 무너져 내렸고, 또 대장 황진(黃進)과 장윤(張允) 등이 적탄에 맞아 잇따라 전사하였으므로 성안의 사기가 많이 저하되었다. 그러자 왜적이 더욱 병력을 증강하여 급하게 성을 공격해 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고함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가운데 육박전을 벌이며 다투어 성 위로 올라왔는데, 성안에는 화살과 돌이 다 떨어져 오직 대나무 창으로 치고 찌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왜적이 마침내 승세를 타고 난입해 들어와 성이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공은 촉석루(矗石樓) 위에 있었는데, 좌우에 있던 사람들 모두 흩어져 없어지고 오직 장남인 상건(象乾)과 막하(幕下)의 양산숙(梁山璹) 등 편비(褊裨)와 친병(親兵) 10인만이 공의 옆에 있으면서 떠나지 않았다. 이들이 울부짖으며 말하기를,
“일이 끝장났으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하자, 공이 온화한 기색으로 말하기를,
“의거를 일으키던 날에 나는 이미 죽기로 결정을 하였다. 다만 너희들이 애달프기만 하구나.”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 북쪽을 향해 절을 하고, 먼저 병기(兵器)를 물속에 던져 넣은 뒤, 아들 상건과 서로 부둥켜안은 채 누대(樓臺) 위에서 강물로 몸을 날렸다. 이때 공을 따라 죽은 장좌(將佐)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이 전투를 치른 뒤로 왜적 역시 힘이 다하여 감히 다시는 호남을 넘보지 못하게 되었다.
명 나라의 지휘(指揮) 오종도(吳宗道)가 평소부터 공을 경복(敬服)해 오다가 공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사신을 보내 글을 지어서 제사를 올리게 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비통하였다. 그리고 총독(總督) 형개(邢玠) 역시 ‘충성스럽고 굳센 그 혼백, 늠름하게 앞에 보이는 듯하다.’고 공을 칭송하였다. 이렇게 해서 공의 충의(忠義)가 천하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군자는 말한다. ‘공이 맨 먼저 대의(大義)를 부르짖으며 국난에 뛰어든 것으로 말하면 안노공(顔魯公)보다도 못할 것이 없고, 강도(江都)에 웅거하면서 행조(行朝)와 연락을 통했던 것으로 말하면 설경선(薛景仙)이라도 더 나을 것이 없다. 그리고 외로운 성을 사수(死守)하여 강성한 오랑캐의 길목을 차단하였고 몸은 죽었으나 적들 역시 기진맥진하여 호남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게 한 것으로 말하면 그 일이 장회양(張睢陽)의 경우와 그대로 들어맞고, 부자(父子)가 함께 죽어 충효(忠孝)를 이룬 것으로 말하면 또 변성양(卞成陽)의 경우와 여합부절(如合符節)한다.’라고.
공의 휘(諱)는 천일(千鎰)이요, 자(字)는 사중(士重)이다. 그 선조는 광주(光州) 사람인데 나주(羅州)에 옮겨 온 지 2대가 되었다. 공은 어려서 고아가 된 뒤 일재(一齋) 이항 선생(李恒先生)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뜻을 독실히 하고 실천을 힘쓰면서 무슨 일이건 성현(聖賢)을 자신의 법도로 삼곤 하였다. 유일(遺逸)로 천거된 뒤 내외의 직책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모두 걸맞게 임무를 수행하였고, 특히 대관(臺官)으로 있을 때는 강직한 자세로 할 말을 과감하게 다하였다.
공의 생김새로 말하면 풍채가 그다지 탐탁스럽게 보이지 않아 옷 무게도 이겨 낼 것 같지 않았으나 의리에 용맹스러운 점은 분육(賁育 진(秦) 나라 무왕(武王) 때의 용사였던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을 말함)이라 할지라도 그 뜻을 뺏을 수가 없었다. 충의(忠義)의 정신을 천성적으로 품부받은 위에 학문으로 또 보완을 하였으니, 전(傳)에서 말한 바 ‘지사(志士)와 인인(仁人)은 자기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룬다.’고 한 경우가 바로 공에게 해당되는 말이라고 하겠다. 그러니 하나의 절조(節操)만을 가지고 공을 평가한다면, 이는 공을 제대로 아는 자가 아니라고 할 것이다.
공의 사당은 나주 행정 소재지 서쪽 옥정봉(玉井峯)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내가 일단 대략이나마 공의 시말(始末)을 기술하였는데, 여기에 초사체(楚辭體) 1장(章)을 함께 묶어 신령을 영송(迎送)하는 나의 뜻을 덧붙이면서 이 시도 아울러 새기도록 부탁하였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영산강 연안 옥정봉 언덕 / 榮之滸兮玉之岡
공의 사당 위엄 있게 버티고 섰네 / 儼奕奕兮公之堂
잘 익은 술에 맛있는 안주 / 椒漿兮蕙殽
각종 제기(祭器)도 향기롭게 진설됐네 / 陳瑤勺兮薦芬芳
노기 띤 공의 머리칼 관을 찌르고 / 公誰怒兮髮衝冠
한 손엔 큰 칼 또 한 손엔 도끼날 번뜩이도다 / 慫雄劍兮翼戚揚
신령스런 분위기 하늘가에 감돌면서 / 橫天宇兮揚威靈
음침하게 구름 끼며 흙비 내리네 / 雲曀曀兮霾光
아 기다렸던 공께서 오시는가 / 望公兮公來
바람 불어오며 장막이 흔들리네 / 靈風肅兮帷房
씩씩하고 굳센 영웅의 모습 / 孔武兮且毅
앞뒤 좌우로 발걸음 옮기도다 / 紛或前兮或旁
안주도 굳어지고 술도 맑아지는 사이 / 肴旣昲兮酒旣淸
환락 못다 누린 채 강개한 빛 띄우더니 / 懽未極兮慨慷
잠시도 지체 않고 홀연히 사라지니 / 歘去兮不少留
하늘 문만 휑하니 환하게 열렸어라 / 天門闢兮皇皇
공에게 상제 명하시길 남방을 보호하며 / 龔帝命兮芘南土
못된 놈 때려잡고 악귀(惡鬼) 쫓아 버리라고 / 斮䲔鯢兮捎獝狂
난국(蘭菊) 향기 그윽한 봄철과 가을철에 / 春蘭兮秋鞠
풍성하고 향기나는 제사를 올리리니 / 牢有腯兮廩有薌
천추 만세토록 / 千秋兮萬歲
기꺼이 공의 고향 찾아와 주시라 / 公無斁兮公之鄕
[주-D001] 안노공(顔魯公) :
노군공(魯郡公)에 봉(封)해진 당(唐) 나라 안진경(顔眞卿)을 말한다.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 평원 태수(平原太守)로 있으면서 그 지역을 온전히 지켰고, 의병을 모집하여 토벌하면서 하삭(河朔) 제군(諸郡)의 맹주(盟主)로 추대되었다. 뒤에 이희열(李希烈)이 반란을 일으키자 초유(招諭)하러 갔는데, 그의 회유를 듣지 않고 역적이라고 꾸짖다가 목졸려 죽었다. 《舊唐書 卷128》
[주-D002] 설경선(薛景仙) :
당 나라 현종(玄宗) 때 진창 영(陳倉令)으로 있었는데, 마외(馬嵬)에서 양국충(楊國忠)이 죽음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괵국부인(虢國夫人 양 귀비(楊貴妃)의 언니)이 진창으로 도망쳐 오자 추격하여 죽였으며, 뒤에 무리를 이끌고 부풍군(扶豐郡)을 수복하여 행조(行朝)와 통하게 한 공로로 부풍 태수(扶豐太守)가 되었다. 《舊唐書 卷10》 《新唐書 卷138》
[주-D003] 장회양(張睢陽) :
안녹산의 난 때 회양성(睢陽城)을 지키다 죽은 장순(張巡)을 말한다. 회양 태수 허원(許遠)과 함께 성을 지키며 적장 윤자기(尹子琦)와 싸워 몇 번이나 물리쳤으나, 몇 달이나 고수하다가 중과부적에 식량마저 떨어진 상태에서, 그의 명성을 시기한 임회 절도사(臨淮節度使) 하란진명(賀蘭進明)이 고의로 구원병을 보내지 않는 바람에 성이 함락되면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舊唐書 卷187》
[주-D004] 변성양(卞成陽) :
진(晉) 나라 성양(成陽) 사람으로 소준(蘇峻)의 반란 때 맞아 싸우다 전사한 변호(卞壺)를 말한다. 진 나라의 육군(六軍)이 패한 상태에서 수백 인을 이끌고 고전(苦戰)하다 마침내 죽었는데, 두 아들 진(眕)과 우(盱)가 아비의 죽음을 목격하고 서로 적진 속으로 뛰어 들어가 함께 해를 당하고 말았다. 변문 충효(卞門忠孝)의 고사로 전해져 온다. 《晉書 卷70》
[주-D005] 지사(志士)와 …… 이룬다 :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6] 안주도 …… 사이 :
한참 시간이 흐른 것을 말한다. 시간이 지나면 안주도 굳어지고 술 윗부분이 맑아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열자(列子)》 권3 주목왕(周穆王)에 “술도 아직 맑아지지 않았고 안주도 굳어지지 않았다.[酒未淸 肴未昲]”라는 표현이 있다.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 중 한 사람인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의 시문집 《계곡집(谿谷集)》을 국역한 것이다. 이 책의 대본은 36권 18책의 목판본으로, 원집(原集) 34권, 만필(漫筆)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제(表題)는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이며, 판심(版心)은 ‘계곡집(谿谷集)’으로 되어 있다.

이 판본은 인조 21년(1643) 전라도 광주(光州)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초간본이다. 이후 중간(重刊)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중간본은 간행되지 않은 듯하다. 그러므로 국역 대본으로 삼은 이 책에는 저자에 관한 행장ㆍ연보ㆍ제문ㆍ만장(挽章)ㆍ유사(遺事) 등의 부록 문자가 전혀 수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저자의 생애 및 교유 관계를 살펴볼 만한 자료가 적다. 지금까지 저자의 행장 및 묘갈명 병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행히 황경원(黃景源)이 지은 묘지명 병서와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신도비명 병서가 남아 있어 저자의 생애를 개략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2003) 광주 향토사 연구 (사)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
광주광역시 동구청(2021) 동구의 인물2 광주광역시 동구청
광주시남구역사문화인물간행위원회(2015) 역사를 배우며 문화에 노닐다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Ⅰ 인물과 문헌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마을(동)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민속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21) 양림 인물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동구문화원(2014) 광주광역시 동구 마을문화총서 Ⅰ 광주동구문화원
광주문화관광탐험대(2011~16) 문화관광탐험대의 광주견문록Ⅰ~Ⅵ 누리집(2023.2
광주문화원연합회(2004) 광주의 다리 광주문화원연합회
광주문화원연합회(2020) 광주학 문헌과 현장이야기 광주문화원연합회
광주문화재단(2021) 근현대 광주 사람들 광주문화재단
광주북구문화원(2004) 북구의 문화유산 광주북구문화원
광주서구문화원(2014) 서구 마을이야기 광주서구문화원
광주시립민속박물관 옛 지도로 본 광주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04) 국역 光州邑誌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13) 영산강의 나루터 광주시립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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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0) 1896광주여행기 광주역사민속박물관
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1) 광주천 광주역사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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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서 외(2015) 광주의 옛길과 새길 시민의 소리
정인서(2011) 양림동 근대문화유산의 표정 대동문화재단
정인서(2011) 광주문화재이야기 대동문화재단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2016) 광주 역사문화 자원 100(上,下)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천득염(2006) 광주건축100년 전남대학교출판부
한국학호남진흥원(2022) 광주향약 1,2,3. 한국학호남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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