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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공(文憲公) 고봉(高峯) 기 선생(奇先生) 신도비명 병서(幷序)

고봉전서(高峯全書)  보유  - 조순(趙淳)

고봉 선생이 서거하신 지 431년의 오랜 세월이 흘렀다. 우리나라에는 그동안 치란(治亂)과 흥망(興亡)의 자취가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지나갔고 왕조도 점차 쇠퇴하여 마침내 경술년의 국치(國恥)를 당하였으며 광복 후에도 국토가 양단되고 국론이 분열되어 마침내 내란을 초래하였다. 다행히 근년에 국운이 다소 진작되고 있으나 남북통일은 아직 되지 못한 채 이륜(彛倫)이 거의 상실되고 풍속도 갈수록 퇴패(退敗)하고 있다.

이때를 당하여 선생의 16대 주손(冑孫)인 성근(聖根) 씨가 선생의 묘도에 비를 세우려 하여 나를 찾아와 “비석을 세우는 일은 비단 선조의 학덕을 현창(顯彰)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유학의 유풍을 발양(發揚)하고자 하는 뜻도 있으니, 그것은 곧 유림들의 소망입니다.”라고 하면서 나에게 비명(碑銘)과 서(序)를 청하였다. 나는 천학이라 굳이 사양하였으나 청하는 뜻이 간곡하였고, 또 퇴계 선생의 주손 이동우(李東愚) 옹도 사양하지 말라고 권하기에 마침내 봉행하기로 결심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선생의 휘(諱)는 대승(大升), 자는 명언(明彦), 성은 기씨(奇氏)이니 행주(幸州) 사람이다. 행주에 고봉(高峯)이라는 속현이 있어 선생이 고봉으로 자호한 것이다. 기씨는 고려조에 무예로써 장상(將相)이 된 분들이 많았고, 조선조에 와서는 문필과 덕행으로 당시에 저명한 분들이 더욱 많았다. 선생의 고조 휘 건(虔)은 벼슬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세조(世祖) 때 청백리였으며,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증조 휘 축(軸)은 풍저창 부사(豐儲倉副使)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증직되었고, 조부 휘 찬(襸)은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부친 휘 진(進)은 그 아우 준(遵)과 함께 성리학으로 당세에 저명하였다. 아우가 기묘사화(1519, 중종14)에 화를 당하자 세상일에 뜻을 끊고 광주(光州) 고룡리(古龍里)로 물러나 거처하였다.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은(謝恩)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덕성군(德城君)에 추증되었다. 비(妣) 진주 강씨(晉州姜氏)는 사과(司果) 휘 영수(永壽)의 따님이며 문량공(文良公) 희맹(希孟)의 증손을 배필로 맞이하였다. 중종(中宗) 22년 정해년(1527) 11월 18일에 고룡리 송현동(松峴洞) 집에서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천품이 영민하고 비범하였으며 총명함이 월등하게 뛰어났다. 겨우 7, 8세의 나이 때부터 가정에서 수학하면서 《효경(孝經)》과 《소학(小學)》을 읽었는데 매일 새벽에 일어나 단정히 앉아서 글 읽기를 그치지 않았다. 조금 장성해서는 가정에서 공부하는 데에 지장이 많아 마침내 향리 서당에 나아가 더욱 부지런히 연구함으로써 이미 육갑과 사물의 쇠왕(衰旺)의 이치를 대략 통하였다. 12세가 되던 무술년(1538)부터 17세가 되던 계묘년(1543)에 이르기까지 사서삼경(四書三經), 《전한서(前漢書)》, 《후한서(後漢書)》, 《통감강목(通鑑綱目)》 등의 책을 두루 통하였고, 틈나는 대로 당송 고문(唐宋古文)도 읽었으며, 또 국조(國朝)의 전적을 널리 살펴보았는데 한 번 보기만 하면 통하여 막힘이 없었다.

선생은 평소에 자신을 수양하기 위한 학문인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었으며 명성이 실제를 능가하는 것을 몹시 꺼렸다. 〈과정기훈(過庭記訓)〉을 지어 부과(赴科)의 해를 논하여 이르기를 “벼슬길의 풍파는 참 두렵고도 두려운 것이니 자기의 뜻을 시행하기도 전에 화가 이미 따른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주자는 조정에 벼슬한 기간이 겨우 40여 일이었으니, 학자들은 또한 반드시 이것을 알아야 한다. 진실로 뜻을 행하고자 한다면 한 고을을 맡아 다스리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하였다. 숙부 덕양공(德陽公)이 이미 기묘사화를 당하고 또 계속하여 을사사화가 이어져 선생은 더욱 벼슬길에 나아갈 뜻이 없었다.

마침내 노산(蘆山)에 서실을 짓고 글 읽기를 부지런히 하며 성명(性命)의 묘리에 침잠하고 천리와 인간의 이치를 연구하여 격물치지(格物致知)ㆍ성의정심(誠意正心)과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논한 《대학(大學)》의 도리와 천명솔성(天命率性)ㆍ무성무취(無聲無臭)의 경지를 밝힌 《중용(中庸)》의 이치를 정밀히 분석하며 빈틈없이 힘씀으로써 스스로를 수양하고 사람을 다스리는 방도를 이미 몸에 갖추었다.

23세이던 기유년(1549, 명종4)에 비로소 과거에 응시하여 사마시(司馬試)를 보아 진사(進士)ㆍ생원(生員) 양시에 입격하였고, 32세이던 무오년(1558)에 문과(文科) 을과(乙科) 제1인(第一人)으로 입격하였다. 이때부터 14년간 허다한 관직을 두루 지냈는데 당시 조신들의 임명과 승진이 자주 변경되고 고관과 말직의 임기도 너무 짧아서 관리들이 뜻을 펴기가 어려웠다. 선생도 관직을 제수받고 체직됨이 역시 많았으니, 36세이던 임술년(1562, 명종17)에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이 되었다가 휴가를 얻어 남쪽 고향으로 돌아왔고, 37세이던 계해년(1563)에는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호당(湖堂)에 들어갔고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弘文館副修撰兼經筵檢討官)이 되었으며, 38세이던 갑자년(1564)에는 경연에 입시하고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었으며, 39세이던 을축년(1565)에는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되었다. 40세이던 병인년(1566, 명종21)에는 예조 정랑(禮曹正郞)과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역임하였으며, 41세이던 정묘년(1567)에는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과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를 역임하였고, 원접사(遠接使)의 시종관(侍從官)으로 관서(關西)에 가서 중국 사신을 맞이하였다. 42세이던 무진년(1568, 선조1)에는 홍문관(弘文館)ㆍ직제학(直提學)ㆍ좌승지(左承旨)ㆍ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였으며, 44세이던 경오년(1570)에는 남쪽 고향으로 돌아왔다. 45세이던 신미년(1571)에는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과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역임하였다. 46세이던 임신년(1572)에는 대사성ㆍ대사간(大司諫)ㆍ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올랐으나 병으로 체직되었다. 10월 3일에 사직하고 남쪽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천안(天安)에 도착하여 발병하였는데, 태인(泰仁)에 도착하여 병이 더욱 심해졌다. 매당(梅堂) 김점(金坫)의 집에 도착하였을 때 국왕이 선생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특별히 어의를 보내 약을 가지고 달려가 구원하게 하고, 또 어찰(御札)을 보내 위문하게 하였으나 어의가 미처 도달하지 못하였다. 10월 30일에 장자 효증(孝曾)에게 유언을 남기고 11월 1일에 별세하니, 향년 46세였다.

부음이 조정에 보고되자 국왕은 몹시 슬퍼하였으며 수의(襚衣)를 추가로 보냈으며, 경사(京師)의 사대부들은 모두들 슬퍼하고 애통해하며 종남산(終南山)의 선생의 우사(寓舍)로 가서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곡하였다. 이듬해 2월 8일에 나주(羅州) 치소(治所) 북쪽 오산리(烏山里) 통현산(通峴山) 광곡(廣谷) 묘좌유향(卯坐酉向)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선조 23년인 경인년(1590)에 광국 공신(光國功臣)에 책록되고, 수충익모광국 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에 추증되었으며, 덕원군(德原君)에 봉해지고, 문헌(文憲)이란 시호를 받았다.

선생은 조정에서 벼슬할 때 항상 근본에 힘쓰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강상(綱常)을 세우고 어진 이를 높이고 사악함을 물리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았다. 경연 석상에서 아뢴 말씀의 대요(大要)는 《논사록(論思錄)》 상ㆍ하권에 기록되어 있는데, 후일 정조대왕(正祖大王)이 읽고서 감탄하여 “지금 이 글을 탐독하면서 밤이 이미 깊어지고 촛불이 누차 바뀌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였으니, 야대(夜對)를 10번 하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하였다.

명종(明宗) 갑자년(1564) 2월 13일에 선생이 아뢰기를 “국가의 안위는 재상(宰相)에게 달려 있고 임금의 덕이 성취되는 것은 경연(經筵)에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덕이 성취된 후에야 어진 재상을 알아서 임용할 수 있으니, 경연의 역할이 재상보다도 더 중요합니다.” 하였고, 또 언로(言路)를 열고 직간(直諫)을 받아들이는 대방(大方)을 반복하여 설명하였다.

41세이던 정묘년(1567)에 조강에 입시하였을 때 상주(上奏)하였는데, 그 대략에 “조광조(趙光祖)와 이언적(李彦迪)에게 일체(一體) 표창한다면 시비가 분명해지고 인심이 흥기할 것입니다.” 하였고, 또 “노수신(盧守愼), 유희춘(柳希春), 정황(丁熿)은 모두 학문이 높은 유신(儒臣)으로 오랫동안 적소(謫所)에 있었으니 지금 비록 방면되어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나이가 이미 6, 7십 대에 이르렀으니 의당 기용(起用)ㆍ발탁(拔擢)하여 어진 이를 등용하는 도를 다해야 합니다.”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조석(朝夕)으로 시강(侍講)하면서 아는 것은 모두 말하지 않음이 없었고 말을 하면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어, 반드시 임금을 요순(堯舜)처럼 만들어 이상 정치를 만회하고자 하였다. 사도(邪道)를 물리치고 정도(正道)를 부지하는 데 있어서는 말이 더욱 적절하였으며 그 고심과 지극한 정성은 군주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경연의 강의는 경사(經史) 일반으로부터 우리나라의 역대 사론(史論)에 이르기까지 그 논지가 처음부터 끝까지 명쾌하여 천인성명(天人性命)의 이치와 국가흥망(國家興亡)의 귀감을 설파하였다. 당시 많은 인재들이 진출하여 경국제세(經國濟世)에 급급하여 논의가 분분하였으나 선생은 뜻을 세우고 현신(賢臣)을 구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함을 주청하였으니, 그 뜻은 근본을 바르게 세우는 데 두고 교화를 먼저 하고 법제를 뒤로 하는 것이었으므로 개혁의 의논과는 별로 뜻이 맞지 않았다.

선생은 일찍이 세상 물정에 어두운 학자라고 자평(自評)하였으나 그 출처(出處)와 진퇴(進退)의 절도를 살펴보면 모두가 성현(聖賢)의 법도에 맞았다.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남쪽 고향으로 돌아갈 때 한강의 배 안에서 어느 선비가 묻기를 “사대부로서 조정에 들어가 행동하는데 평생토록 지켜야 할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선생이 답하기를 “기(幾)ㆍ세(勢)ㆍ사(死) 세 글자면 충분히 해 나갈 수 있습니다.” 하였다. 그 뜻은 군자의 출처는 먼저 그 기미를 살펴 의리에 어긋남이 없어야 하고, 때를 알고 형세를 살펴서 구차한 일이 없어야 하고, 목숨을 걸고 도(道)를 잘 행하기를 기약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곧 고금의 인인(仁人)과 지사(志士)가 관직에 임하는 대방(大方)이요, 오활한 유자(儒者)의 말이 아니다.

선생의 학문의 연원을 살펴보면 등과(登科)하던 해인 무오년(1558, 명종13)에 서울로 가던 도중 태인(泰仁)을 지나면서 일재(一齋) 이공(李公 이항(李恒) )을 배알하고 〈태극도설(太極圖說)〉을 논하였다. 당시 선생의 학문은 거의 대성(大成)의 영역에 도달해 있었지만 선생으로 하여금 진일보하여 승당입실(升堂入室)의 경지에까지 올라 일세(一世)의 유종(儒宗)이 되게 하신 분은 실로 퇴계(退溪) 선생이었다. 두 선생은 그해 경사(京師)에서 만났는데 한 번 보고도 십년지기(十年知己)와 같았다. 퇴계가 고봉에게 준 편지에 “무오년(1558, 명종13)에 도성에 간 일은 극히 낭패스러운 일이었으나, 다행스러웠던 것은 우리 명언(明彦)을 만났기 때문이다.” 하였다. 그 후로 두 선생은 겨우 두 차례 상면하였지만 사제(師弟)의 예는 조금도 해이하지 않았다.

고봉은 탁월하고 명확한 자질로 행동거지는 오직 도산(陶山)을 본보기로 삼았고, 조정에서 경륜을 펼 때도 역시 오직 퇴계를 준칙으로 삼았다. 그 천품은 간결하고 사람을 쉽게 용납하지는 않았으나 오직 퇴도(退陶)에게는 성심(誠心)으로 열복(悅服)하였으며, 퇴계 역시 선생에게는 극진히 추허(推許)하고 항상 사석(師席)을 사양하였다. 매번 은미한 말이나 깊은 뜻이 담긴 글을 만날 때마다 항상 선생에게 질문하였으니, 다른 문인들은 여기에 참여할 수 없었다. 예법(禮法)과 사단칠정이기(四端七情理氣)의 논설에 관해서는 선생이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심오한 경지에 나아갔으니, 퇴계도 누차 자기의 의견을 버리고 선생을 따랐으며 독보적인 관점과 이론을 가졌다고 허여하였다.

퇴계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선조가 묻기를 “조신(朝臣)들 중에 누가 학문으로 저명한가?” 하였다. 그 당시 많은 영재들이 조정에 가득하였으므로 실로 거명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퇴계는 아뢰기를 “기모(奇某)는 글을 박람하였고 성리학에도 뛰어난 조예를 가졌으니 참으로 달통한 선비라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선생의 수명은 지명(知命)인 50세에 이르지 못하였으나 그 학문과 행적의 대요는 문집에 실려 있다. 《시문집(詩文集)》6권과 《주자문록(朱子文錄)》4권, 《논사록(論思錄)》 상ㆍ하권, 《양 선생 왕복서(兩先生往復書)》3권, 《사칠ㆍ이기 왕복서(四七理氣往復書)》 상ㆍ하편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그 문장은 수식을 일삼지 않고 기력이 웅장하고 법칙이 준엄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발분망식(發憤忘食)하게 한다. 달통한 선비의 학풍이 생기 있고 약동하여 볼만하였기에 당세의 명사와 후학들의 저술 중에 선생에 관련된 것이 극히 많았으니,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 이이(李珥) )은 선생의 대하(大河)가 흐르는 듯한 문장과 구름을 넘는 듯한 기상을 찬양하였으며, 사암(思庵) 박 문충공(朴文忠公 박순(朴淳) ), 택당(澤堂) 이 문정공(李文靖公 이식(李植) ), 계곡(谿谷) 장 문충공(張文忠公 장유(張維) ), 우암(尤庵) 송 문정공(宋文正公 송시열(宋時烈) )은 모두들 선생이 이 나라의 대유(大儒)요 세상의 사표(師表)임을 칭송하였다.

배위 정부인 함풍 이씨(咸豐李氏)는 보공장군(保功將軍) 휘(諱) 임(任)의 따님으로 19세에 선생에게 시집와서 선생을 받드는 데 시종 어김이 없었고, 홀로된 25년 동안 자녀들에게 이록을 구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경계하였다. 병신년(1596, 선조29) 8월 18일에 집에서 별세하시니, 향년 67세였다. 선생의 좌측에 안장하였다.

3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 효증(孝曾)은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이고, 차남 효민(孝閔)은 전력부위 충좌위 부사과(展力副尉忠佐衛副司果)이고, 삼남은 효맹(孝孟)이며, 딸은 울산(蔚山)의 김남중(金南重)에게 출가하였다. 효증은 연은전 참봉(延恩殿參奉) 김점(金坫)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 정헌(廷獻)은 현감이며, 장녀는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承旨)를 지낸 한양(漢陽)의 조찬한(趙纘韓)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낸 청주(淸州)의 한이겸(韓履謙)에게 출가하였다. 효민은 참봉(參奉)의 남원(南原) 양홍도(梁弘度)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영헌(齡獻)이고, 차남은 동헌(東獻)이며, 장녀는 생원(生員)의 고령(高靈) 박동휘(朴東煇)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함양(咸陽)의 여공준(呂貢俊)에게 출가하였다. 효맹은 승지인 광주(光州) 정엄(鄭淹)의 딸에게 장가들어 후사가 없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효민과 효맹은 중도에서 적을 만나 죽었고, 김씨에게 출가한 딸과 며느리 양씨와 정씨는 적에게 겁박을 당하였으나 굴하지 않고 모두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선생의 후예들은 호남(湖南)에서 많은 선비들을 배출하였는데, 문학으로 국가의 원기(元氣)가 되기도 하고 무관으로 국가의 보장(保障)이 되기도 하였다.

선생께서 별세하신 지 7년 되던 해에 호남의 유림들이 고마봉(顧馬峯) 아래에 사우(祠宇)를 지었는데, 효종(孝宗) 5년에 월봉서원(月峯書院)으로 사액되었고, 고종(高宗) 5년에 훼철되었다가 광복 후 서기 1991년에 광주시(光州市) 광산구(光山區) 광산동(光山洞)에 복원되었다. 아, 길고 아득한 500년 세월 동안 선생의 학덕(學德)은 우리나라에 견줄 이가 없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뛰어난 자질은 / 超詣之資
생이지지에 가까웠도다 / 近於生知
잠심하여 고요히 생각함은 / 沈潛幽思
칠팔 세 아이 적부터였도다 / 自髫齔時
나이 십오 세에 / 志學之年
이미 대성을 기약하였으며 / 已期大成
경학의 뜻과 역사의 관점 / 經義史觀
달통하고 분명하였도다 / 達通分明
격물치지 수신제가의 수양을 / 格致修齊
일신에 두루 갖추었고 / 備於一身
치국평천하의 큰 뜻은 / 治平大志
시종 순일하고 진실하였다 / 始終純眞
조정에서 직임을 맡아서는 / 立朝莅職
그 모습이 훌륭하고 영특하고 / 羽儀俊英
경연에서 강론할 때는 / 經筵侍講
그 논설이 종횡무진하였도다 / 論說縱橫
만조의 신료들은 / 滿朝臣僚
갱장에 뜻이 있었지만 / 意在更張
공의 대본은 / 公之大本
항상 강상을 중히 여기셨으니 / 恒重綱常
어진 이를 추천하고 사악한 이를 물리치며 / 推賢斥邪
극히 공명정대하셨다 / 至正大中
세상에 나갈 때나 물러날 때나 말할 때나 침묵할 때나 / 出處語默
한결같이 퇴옹을 준행하였고 / 一遵退翁
서신의 왕복은 / 書信往復
그 정의가 평생 변함이 없었다 / 情誼平生
성리의 학설은 / 性理學說
독보적 발명이었고 / 獨步發明
사단과 칠정에 대한 논변도 / 四七論辯
한편으로는 넓고 한편으로는 치밀하였으니 / 淹博精緻
통유의 풍치와 인격을 / 通儒風標
조야가 모두 우러렀으며 / 朝野仰止
오직 기세사만을 / 惟幾勢死
행신의 대방으로 삼으셨도다 / 行己大方
창졸의 순간이라도 / 造次顚沛
몸가짐과 행실을 엄중하게 지켰으니 / 操履嚴守
사림의 아망은 / 士林雅望
별 중에 북두성과 같았다 / 如星有斗
맹자의 말씀대로 천명을 순하게 받으셨으며 / 順受天命
백세에 향기를 남기셨도다 / 百世遺香



서기 2003년 계미 4월 일,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학술원 회원(學術院會員)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서울특별시장 후학(後學) 풍양(豊壤) 조순(趙淳)은 삼가 짓다.



후학 진원(珍原) 박경래(朴景來)는 삼가 번역하다.


[주-D001] 승당입실(升堂入室) : 
실(室)은 방이고 당(堂)은 대청마루이다. 도의 심오한 경지에 들어감을 뜻한다. 공자가 제자 자로(子路)의 경지를 두고 말하기를 “당에는 올랐고 아직 실에는 들어가지 못했다.〔升堂矣 未入於室也〕”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論語 先進》
[주-D002] 생이지지(生而知之) : 
태어나면서부터 이치를 아는 매우 뛰어난 자질을 말한다. 애공(哀公)이 정사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혹은 태어나면서 이것을 알고, 혹은 배워서 이것을 알고, 혹은 애를 써서 이것을 아는데, 그 앎에 이르러서는 똑같습니다. 혹은 편안히 이것을 행하고, 혹은 이롭게 여겨 이것을 행하고, 혹은 억지로 힘써서 이것을 행하는데, 그 성공함에 미쳐서는 똑같습니다.〔或生而知之 或學而知之 或困而知之 及其知之 一也 或安而行之 或利而行之 或勉强而行之 及其成功 一也〕” 하였다. 《中庸章句 第20章》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2003) 광주 향토사 연구 (사)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
광주광역시 동구청(2021) 동구의 인물2 광주광역시 동구청
광주시남구역사문화인물간행위원회(2015) 역사를 배우며 문화에 노닐다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Ⅰ 인물과 문헌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마을(동)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민속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21) 양림 인물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동구문화원(2014) 광주광역시 동구 마을문화총서 Ⅰ 광주동구문화원
광주문화관광탐험대(2011~16) 문화관광탐험대의 광주견문록Ⅰ~Ⅵ 누리집(2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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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립민속박물관 옛 지도로 본 광주 광주시립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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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2014) 광주산책(상,하) 광주문화재단
김정호(2017) 100년 전 광주 향토지명 광주문화원연합회
김학휘(2013) 황룡강, 어등의맥 16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4) 광산의 노거수, 어등의맥 17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5) 광산나들이, 어등의맥 18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6) 설화와 전설, 어등골문화 21호. 광산문화원
김학휘(2018) 광산인물사, 어등의맥 21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9) 마을사이야기, 어등골문화. 광산문화원
남성숙(2017) 전라도 천년의 얼굴 광주매일신문
노성태(2016) 광주의 기억을 걷다 도서출판 살림터
노성테.신봉수(2014) 사진과 인물로 보는 광주학생독립운동 광주문화원연합회
박규상(2009) 광주연극사 문학들
박선홍(2015) 광주 1백년 광주문화재단
정인서(2016) 산 좋고 물 맑으니-광주의 정자 광주문화원연합회
정인서 외(2015) 광주의 옛길과 새길 시민의 소리
정인서(2011) 양림동 근대문화유산의 표정 대동문화재단
정인서(2011) 광주문화재이야기 대동문화재단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2016) 광주 역사문화 자원 100(上,下)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천득염(2006) 광주건축100년 전남대학교출판부
한국학호남진흥원(2022) 광주향약 1,2,3. 한국학호남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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