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 영조 23년 정묘(1747) 10월 2일(기미)호남 양전사 원경하가 호남의 형편에 대하여 상소하다호남 양전사 원경하(元景夏, 1698~1761)가 상소하였다. (원경하는 여주 출신으로 영조의 조력자이자 정조의 스승이다) 대략 이르기를,“신이 호남의 형편에 대하여 그윽이 우견(愚見)이 있어 감히 이를 덧붙여
고경조(高敬祖, 1528~?)의 본관은 장흥(長興)이며, 자는 이원(貽遠), 호는 구암(龜巖)이다. 조부는 형조좌랑(刑曹佐郎)을 지낸 고운(高雲), 부친은 고중영(高仲英)이고,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사촌이다. 김지달(金之達)의 딸인 영광김씨(靈光金氏)와의 사이에서 4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고성후(高成厚), 차
고운(高雲, 1479~1530)의 본관 장흥(長興). 자 종룡(從龍). 호 하천(霞川). 아들은 대사간 고맹영(高孟英), 손자는 선조 때의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다.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조광조(趙光祖) 등과 친교가 있어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파직된 적이 있었으나 후에
박광옥 朴光⽟ 선조 25년(1592) 9월 7일∼선조 25년(1592) 12월 박광옥(1526∼1593)의 본관은 음성(陰城)이며, 자는 경원(景瑗), 호는 회재(懷齋)이다. 아버지는 사예 박곤(朴鯤)으로 광주 출신이다. 1546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했다. 광주 선도면(船道⾯)에 집을 지어 개산송당(蓋⼭松堂)이라 이름하고 문하생들
조유성 趙惟誠 선조 2년(1569) 8월 13일∼*선조 3년(1570) 말조유성(1526∼1575)의 본관은 순창(淳昌)이며, 자는 중실(仲實)로 아버지는 성균 생원을 지낸 조수억(趙壽億)이다. 1555년 식년시에서 생원시 을과 1위, 문과 갑과 2위로 동시에 급제하고, 사헌부감찰로 서장관이 되어 연경에 갔을 때 심부름하는 사람이 길에서 죽
사진이 없던 시절의 옛 역사인물의 초상을 후손들의 사진과 그림 작업으로 협업해 복원한 전시회가 열려 관심을 끈다.이번 전시회에서 초상을 복원하는 방법의 하나로 후손들의 사진을 찍고 이를 합성 몽타주한 다음에 다시 그림 작업을 시도한 작품을 선보인다는 것이다.광주 서구문화원이 광주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마련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 전해 내려오는 기대승과 고경명에 관한 이야기. 고경명(高敬命)[1533~1592]이 기대승(奇大升)[1527~1572]을 찾아갔으나 만나 주지 않자 자신의 서운한 감정을 시로 적어서 표현하였고, 기대승이 고경명의 시를 읽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사죄하면서 교유 관계를 시작하였다는 이야기이다. 1985년 광
광주 목사 죽음 영공이 경양의 방죽에서 고기 잡는 것을 보고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차운하다〔光牧竹陰令公觀漁景陽坊築有詩 次韻〕비단 나무 서리에 잎이 지는데 / 錦樹經霜葉脫枝성 서쪽의 더딘 모임을 한하네 / 城西此會恨差遲촌에 일 없고 정무에 짬 많으니 / 村居無事政多暇태수가 출유해도 백성은 모르네 / 太守出遊
대동야승-난중잡록1 ; 조경남(趙慶男)임진년 상 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5월14일. 전라 감사 이광(李洸)이 또 근왕병 도합 10여 만을 동원하여 전주(全州)에 주둔하였는데 군량을 수송하는 자가 갑절로 늘어나다.○ 군사를 징발하는 교지가 있었다. 당초에 조정이 송도(松都)에 머무르고 있을 때 호남과 영남에 교지를
기언 별집 제25권 / 구묘문(丘墓文) 선생은 성은 박씨(朴氏)이고 휘는 광옥(光玉)이며 자는 경원(景瑗)이다. 그 선조는 본래 음성인(陰城人)이다. 4세조 태학 생원 계양(繼陽)으로부터 비로소 광주(光州)에 살았는데 자손들이 드디어 광주인이 되었다.선생은 천성이 지극하였다. 태어나 일곱 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
25년(임진, 1592) - 고경명○ 6월. 삼도(三道)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패하여 이광 등이 본도로 돌아갔다.(중략)○ 전 부사 고경명(高敬命)은 광주(光州)에 살다가 적이 도성에 침입하였다는 사실을 듣고,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할 것을 도모하고 글을 지어 도내(道內)의 백성들에
만력(萬曆) 계사년(1593, 선조 26) 봄, 명(明) 나라 군사와 우리 군대가 진격하여 경성(京城)의 왜적에게 육박해 들어가자 경성의 왜적들이 남쪽으로 달아났다. 이에 창의사 김공이 군사를 거느리고 왜적을 추격하여 영남에 들어간 뒤 진주(晉州)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해 6월 갑진일에 왜적이 무리들을 총동원하여 진주를
간이집 제2권 /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국가가, 아조(我朝) 선조(先祖)의 계보(系譜)가 무함을 받은 채로 중국 조정의 전책(典冊)에 실려 있는 것과 관련하여, 이를 해명하면서 고치려고 노력해 온 것이 무려 2백 년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황제의 윤허를 이미 받기는 하였으나 이를 개정하여 다시 간행하는 일은 아직
무등산한시선무등산에 대한 한시를 옛 문헌 속에서 찾아내어, 시대 순으로 편집하고 번역한 책이다. 우리나라 스물 두 번 째 국립공원인 무등산은 남쪽 지방의 대표적인 명산으로, 예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탐방하고 있다.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의 시문집에서부터 현대 의재 허백련의 시문집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옛 문
금사사에 열흘 머무른 것이 / 十日金沙寺고국을 생각하는 마음 삼년과 같이 길게 하누나 / 三秋故國心밤 밀물은 새벽 바람을 흩뜨리는데 / 夜潮分爽氣돌아오는 기러기 떼는 슬픈 소리를 보내오네 / 歸雁送哀音오랑캐가 나타나니 자주 칼을 보게 되고 / 虜在頻看劍훌륭한 사람이 죽었으니 거문고를 끊고자 하노라 / 人亡欲斷
“지난 500년, 1천년의 역사 속에서 광주가 얼마나 중요했던 곳인가!” 광주 서구문화원이 마련한 2021문화유산아카데미 7월 강좌 연사로 나선 조상열 대동문화재단 대표가 화두로 내건 첫 마디였다.우리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지역문화의 올바른 가치정립을 위해 ‘역사 속의 광주와 광주사람’이라는 주제로 26일 초청된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좌찬성 최경회(崔慶會) 등에게 시호와 포상의 은전을 내려 주기를 청하는 전라도 생원 이만영(李萬榮) 등의 상소 - 영조 1년 을사(1725) 9월 10일(갑진) 맑음 전라도 생원 이만영(李萬榮) 등이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예로부터 제왕이
옥과 현감 송명흠이 올린 김인후ㆍ유팽로 등의 사액을 청하는 상소 - 영조 32년 병자(1756) 4월 14일(신해) 옥과 현감(玉果縣監) 송명흠(宋明欽)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중략>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김 인후는 높은 자질과 바른 학문으로서 효릉(孝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