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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옥- 나주 목사(羅州牧使) 박공(朴公) 묘표

기언 별집 제25권 / 구묘문(丘墓文)


선생은 성은 박씨(朴氏)이고 휘는 광옥(光玉)이며 자는 경원(景瑗)이다. 그 선조는 본래 음성인(陰城人)이다. 4세조 태학 생원 계양(繼陽)으로부터 비로소 광주(光州)에 살았는데 자손들이 드디어 광주인이 되었다.


선생은 천성이 지극하였다. 태어나 일곱 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곡읍(哭泣)과 거상(居喪)을 잘하여 이름이 알려졌다. 장성하여서는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겼고 집에 거처하고 제사를 받드는 일에 예절을 매우 잘 지켰으므로 사람들이 더욱 훌륭하게 여겼다.
21세에 상상(上庠)에 올랐다. 가정 연간에 향학(鄕學)을 보수할 당시 선생이 학규(學規)를 지었고 재물을 출연하여 학전(學田)을 늘렸으며, 가숙(家塾)을 세워 생도(生徒)를 가르치니 제자가 날로 찾아왔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 장례를 치르고 나서 죽만 먹으며 곡을 하여 거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목사(牧使) 최응룡(崔應龍)이 예(禮)를 따르도록 권면하여 반혼(返魂)하여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우리 선조가 즉위하여 재주와 학식이 있는 선비를 불러 쓸 적에, 대신(大臣)의 천거가 있어 내시 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었다. 3년 만에 종부시 주부에 올랐다가 얼마 뒤 운봉 현감(雲峯縣監)에 보임되었는데, 부임하기 전에 갑과(甲科)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므로 기사관(記事官)을 겸하였다.
임소에 도착해서는 고을의 학교를 증수(增修)하여 여분의 곡식 수백 곡(斛)을 내어 제생(諸生)의 비용에 제공하고, 고을의 자제들을 선발하여 날마다 학교에 거처하면서 공부하게 하였다. 떠난 뒤에는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그 치적을 비(碑)에 새겨 세워두고 기념하였다. 뒤에 잇달아 호남과 호서의 도사(都事)가 되었다.


기묘년(1579, 선조12)에 들어와 예조 정랑이 되었고 기주관(記注官)을 겸하였다. 1년 만에 사헌부 지평으로 옮겼고, 조금 있다가 성균관 직강이 되었다. 여름에 종사관에 차임되어 중국에 가서 성절(聖節)을 하례하였으며, 돌아와서는 다시 지평에 제배되었다. 여러 번 승진되어 통례원 상례(通禮院相禮)가 되었고 편수관을 겸하였다.


계미년(1583)에 영광 군수(靈光郡守)로 나갔다. 다음 해에 불러서 성균관사예 지제교를 삼았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3년 만에 다시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나갔다. 선생은 고을을 맡아 다스릴 때에는 반드시 사대부를 예우하였고, 정사의 요체를 논하여 오로지 학교를 일으키는 일을 우선으로 삼았다.
기축년(1589, 선조22)에 다시 들어와 사예(司藝)와 사섬시 정(司贍寺正)이 되었고, 조금 있다가 태상시로 옮겨졌는데 병환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임진년(1592) 여름에 왜적이 침략해 와 군현(郡縣)들이 모두 무너졌다. 왜적이 상주(尙州)를 함락하자, 선생이 목사 정윤우(丁允祐)를 만나 말하기를,


“적이 만약 새재를 넘으면 서울이 위급하게 될 것입니다. 공은 어찌 방백(方伯)을 설득하여 서둘러 군사를 이끌고 곧바로 기전(畿田)으로 달려가 서울을 호위하지 않습니까.”


하니, 정윤우가 옳게 여겨 즉시 선생의 계책을 따랐다. 관군(官軍)이 잇달아 패배하여 함몰되고 왜적이 승승장구하였다. 5월에 임금이 이미 서쪽으로 피난한 데다 또 호남의 군사가 공주(公州)에서 패배하니, 인심이 크게 혼란하였다. 선생이 김천일(金千鎰), 고경명(高敬命) 등과 군사를 일으켜 왜적을 칠 계획을 세우고 약속(約束)을 이미 정했는데, 고경명이 담양(潭陽)에서 군사를 일으켰으나 선생은 병환 때문에 시행하지 못하고 자제들을 모집하고 군량을 마련하고 무기를 갖추어 병세(兵勢)를 도왔다. 김천일이 선생에게 글을 보내기를,


“대군(大軍)이 일단 출병했으나 바탕이 튼튼하지 않으면 믿을 데가 없습니다. 용병(用兵)의 승패는 오로지 족하(足下)에게 달렸습니다.”


하였다. 당시에 권율(權慄)이 광주(光州)를 맡고 있었는데, 수성(隋城 수원(水原))에서 패전한 뒤로 항상 분한(憤恨)을 품고 날마다 군현에 격문(檄文)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니, 흩어졌던 군사들이 차츰 호응해 왔다. 선생이 부로들을 나누어 보내 이웃 고을들을 깨우쳐 설득하여 수천 명을 모으니, 권율이 매우 기뻐하였고 일마다 반드시 선생에게 자문하였다. 7월에 판교(判校)에 제배되었고, 조금 있다가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옮겨졌다. 선생이 말하기를,


“비록 신병이 위중하나 의리로 보아 사직할 수는 없다.”


하였다. 나주에 이르러 고생을 참고 견디면서 인심을 단합시키는 데에 힘썼다. 흩어졌던 병사들을 모아 다시 왜적을 공략하려고 계획을 다 세웠는데, 신병이 위독해져서 사직하고 돌아왔다.


그해 10월 병오일에 세상을 떠나니, 사람들이 모두들 애석하게 여겼다. 죽음을 앞에 두고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라고 유언하였다. 윤달 정유일에 곽(槨)을 쓰지 않고 운동(雲洞)에 장사 지냈다. 운동은 선대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선생은 덕성과 기량이 매우 두텁고 컸다. 온화하면서도 엄격하였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친애하게 하면서도 경외하게 하였다. 사람을 대할 때에는 일찍이 남의 허물을 말한 적이 없으며 남의 선행을 드러내기를 좋아하였다. 옳지 아니하면 남에게서 받지도 않았고 남에게 주지도 않았다. 그 학문이 늦게 이루어졌는데, 《주역(周易)》과 예경(禮經)에 더욱 마음을 썼고 또한 널리 배워 두루 달통하였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옥계(玉溪) 노진(盧禛), 사암(思庵) 박순(朴淳)같이 학덕(學德)을 갖춘 여러 원로들에게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검소함을 좋아하여 누차 고을을 다스리면서도 음식을 잘 차려 먹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것에 대해 말했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나는 음식이나 밝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하니, 그 사람이 부끄러워하며 감복하였다.


일찍이 운동에 숭본당(崇本堂)을 건립하고 노복을 그곳에 붙여 분묘의 제사를 돕게 하였으며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는 종족의 자제들을 인솔하고 신의(信義)를 강론하고 예(禮)를 행하였다. 고을 사람들과 약조를 세울 때에는 한결같이 풍속을 두텁게 하고 인륜을 돈독히 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다.
그 거처하는 방의 편액(扁額)을 회재(懷齋)라 하였으므로 배우는 이들이 회재 선생이라 불렀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9년 뒤에 남방(南方)의 학도들이 사당(祠堂)을 세우고 계속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선생은 위로 3세 때부터 광주(光州)에 살았다. 큰아버지 붕(鵬)은 한림(翰林)을 지냈고 아버지 곤(鯤)은 사예(司藝)를 지냈다. 선생이 남주(南州)에서 중망(重望)을 얻어 명족(名族)으로 이름이 났다. 어머니 윤씨(尹氏)는 본관이 해평(海平)이며, 경안도 찰방(慶安道察訪) 윤인(尹仁)의 손녀이다.


선생은 명나라 세종 가정 5년인 우리 중종 21년(1526) 1월 기유일에 태어나 명나라 신종 만력 21년인 우리 선조 26년(1593)에 세상을 떠났다. 나이 68세였다. 선생은 아들이 없고 사위 네 사람이 있는데, 예조 정랑 유사경(柳思敬), 사인(士人) 노사첨(盧士詹), 김융지(金隆址), 선교랑(宣敎郞) 임협(林悏)이다. 지금 노사첨과 유사경은 후손이 끊어졌고, 외손인 전(前) 상주 목사(尙州牧使) 임타(林㙐), 전 익위사 시직(翊衛司侍直) 임위(林㙔), 사인 김기(金圻)는 모두 많은 자손을 두었다.


[주-D001] 21세에 상상(上庠)에 올랐다 : 
상상은 국가 설치 대학을 가리키며, 상상에 올랐음은 사마시에 합격하였음을 뜻한다. 박광옥(朴光玉)은 1546년(명종1) 식년시에서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다. 《司馬榜目》
[주-D002] 음식이나 밝히는 사람 :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음식을 밝히는 자는 사람들이 천박하게 여긴다. 작은 것〔口腹〕을 기르느라 큰 것〔心志〕을 잃기 때문이다.” 하였다.
[주-D003] 3세 : 
이 묘표의 앞부분에 “4세조부터 광주에 살았다.”라고 하였으니, 오류이거나 아니면 ‘4세조’를 제외한 대수(代數)를 말하는 것인 듯하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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