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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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야승-난중잡록1 ; 조경남(趙慶男)

대동야승-난중잡록1 ; 조경남(趙慶男)

임진년 상 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5월14일. 전라 감사 이광(李洸)이 또 근왕병 도합 10여 만을 동원하여 전주(全州)에 주둔하였는데 군량을 수송하는 자가 갑절로 늘어나다.

○ 군사를 징발하는 교지가 있었다. 당초에 조정이 송도(松都)에 머무르고 있을 때 호남과 영남에 교지를 내렸으나, 길이 막혀 전달되지 못하다가 이제와서야 본도에 도착한 것이다. 그 내용의 대략은, “왜적이 경기(京畿)에 가득 밀려 들어와 형편상 부득이 송도에 주차(駐箚)하면서 사방에 명령을 내려 왜적 토벌의 계획을 하게 하는 터이다. 경(卿)은 경상 우도에 은밀히 내통하여 경내(境內)의 군사를 총동원해 가지고 올라와 구원하도록 하라.” 하였다. 내린 교지는, 반 조각의 막종이에 잘게 써서 겨우 글자 모양을 이룬 것으로 시골집의 사사로운 편지 조각과도 같았으니, 백성으로서 그것을 본 사람 치고 눈물을 뿌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광이 그를 영남에 전송했다. 김수(金睟)가 안음(安陰)으로부터 함양(咸陽)에 가서, 방어사 조경(趙儆), 종사관 이수광(李睟光), 조방장 양사준(梁士俊) 등을 거느리고 함양으로부터 남원(南原)으로 향하니 그때 전라병사 최원(崔遠)이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에 와서 진을 쳤다.


18일. 김수(金睟)가 남원(南原)으로부터 전주(全州)에 갔는데, 이광(李洸)이 이곳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김수를 패군(敗軍)한 장수라 하여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니 김수 일행의 병마는 점점 도망쳐 흩어졌고 장병들은 각자 말을 끌고 가버렸다. 이윽고 김수도 이 광을 만나 약속하고 출발하다.


○ 순창(淳昌)과 옥광(玉果)의 군사들이 먼 곳에 가서 싸우는 것을 싫어한 끝에, 도리어 흉악한 음모를 꾸며 형대원(邢大元)과 조인(趙仁)을 맹주(盟主)로 추대하고는 노령(蘆嶺)을 근거지로 난동을 일으키다. 이윽고 본군(本郡)으로 군사를 돌이키고 향사당(鄕射堂)과 형옥(刑獄)을 불태우매, 군수 김예국(金禮國)이 단신으로 탈출하여 이광에게 달려가서 고하였다. 이광은 병사(兵使)에게 군령을 전달하여 군사를 전진시켜 토벌해서 잡으라 했는데, 그때 마침 담양 부사(潭陽府使) 이경린(李景麟)이 군사를 거느리고 전주로 가다가 반란을 일으킨 백성들한테 추격을 당하여 담양의 군사도 무너져 버리다.


19일. 이광이(李洸)이 전주(全州)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서울로 향하다. 군사 5만여 명은 이광이 통솔하였는데 전주 부윤과 나주 목사(羅州牧使) 등 수령 20여 명을 거느리고 익산(益山)으로 해서 충청도에 있는 내포(內浦)를 지나면서 진군하고, 군사 4만 8천여 명은 방어사 곽영(郭嶸)이 통솔하였는데 조방장 이지시(李之詩)와 김종례(金宗禮) 및 남원 부사(南原府使) 등 20여 명을 거느리고 여산(礪山)을 거쳐 충청도의 대로(大路)로 해서 진군하여서, 모두 진위(振威)에서 만나기로 약속하다. 김수(金睟)도 이광을 따라 내포로 향하다.


○ 본도 군량 수송의 수량은 감사의 분부에 따라 각 관아에서 인부 두 사람에 한 바리, 품관(品官)은 8명에 한 바리, 교생(校生)은 8명에 한 바리씩으로 한 것들과 공(功)을 세우려고 자진해서 군량 수송에 응모한 짐바리, 그리고 각 지방 관아의 수령과 여러 장병들의 개인적인 짐바리 등, 이루 헤아릴수 없이 많아 길에 잇달아 있다.


20일. 남원(南原)ㆍ구례(求禮)ㆍ순천(順天)의 군사 8천여 명이 전주(全州)에 와서 참전하다가 일시에 흩어져 마구 찌르는 창에 죽은 자들이 퍽 많았다. 이광(李洸)의 군관 옥경조(玉景祚) 등이 칼을 뽑아 후퇴하는 자들을 베어 죽이자, 무너져 가던 군사들이 옥경조를 에워싸고 전주까지 와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남원 부사 윤안성(尹安性)은 판관 노종령(盧從岭)에게 영(令)을 전하여, 흩어진 군사들을 타일러 모아 보내라고 했고, 구례 현감 조사겸(趙士謙) 등은 직접 본읍에 돌아가 군사들을 불러 모은 다음, 달려 돌아가서는 은진(恩津)까지 이르렀다. 전주ㆍ광주(光州)ㆍ나주(羅州)의 군사가 용안(龍安)에 도달해서 역시 일시에 흩어지자 수령 등이 길에서 불러 모아 봤지만, 무너진 군사들을 한데 모을 수는 없었다. 이광 역시 길에서 머뭇거리곤 하여 전진하기를 꺼리는 기색이 많았다.

24일. 이광(李洸)의 군대가 온양(溫陽)에 머물다. 충청 순찰사 윤선각(尹先覺)이 방어사 이옥(李沃), 병사 신익(申益)과 더불어 먼저 이미 이곳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다가, 이때에 와서 두 남도 순찰사와 같이 한때에 서울로 향하였다. 곽영(郭嶸)은 군대를 거느리고 공주(公州)를 지나 천안(天安)으로 향하였다.
26일. 대군이 다 진위평(振威坪)에 모이니 무릇 13만이다. 깃발이 해를 가리고 군량을 운반하는 대열이 1백여 리에 늘어섰다. 경호(京湖)의 피난민이 양떼를 몰고 가는 위세를 잘못 믿고 혹간 돌아와 모이는 자들도 있다.

○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이 또 전라도의 해군[舟師]에게 영남 바다에서 적을 토벌해 주기를 청하다. 6월의 좌수영 영리(營吏)의 고목(告目)에 보인다.

○ 전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다. 정인홍은 경상도 합천(陜川) 사람이다. 처음에 관군이 무너져 흩어지고 왜적이 멀리 몰아가 곧장 서울을 향하였으므로 대가가 서북으로 몽진하자, 정인홍이 전 좌랑(佐郞) 김면(金沔)ㆍ박성(朴惺)ㆍ곽추(郭趨) 및 그 제자들과 함께 의거를 모의하고 여러 읍의 사민에게 통문을 냈는데, 들은 자치고 분발하기를 생각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제자인 하혼(河渾)ㆍ조응인(曹應仁)ㆍ문경호(文景虎)ㆍ권양(權瀁) 등 막료들로 유사를 갈라 정해서 그들로 하여금 병사를 모으게 하고, 또 박이장(朴而章)과 문홍도(文弘道)에게 군량을 모아 마련하는 임무를 맡기고, 첨사 손인갑(孫仁甲)을 중위장(中衛將)으로 삼아 모집한 군대를 맡겼다. 손인갑이 초계(草溪)의 사막(沙幕)에서 전사하니, 현령 김준민(金浚民)으로 대신하게 했다가 오래지 않아 교체시켰다. 그후 전투에 임해서 장수를 정해 매복하고 습격하고 하는 것이 하나 둘로 계산할 수 없었다. 개산(開山)의 습격ㆍ언안(彦安)의 전승, 성현(星峴)과 정야(井野)의 포위, 단계(丹溪)와 가전(檟田)의 성공(成功) 같은 것들은 그 가운데서도 두드러진 것이다. 그러나 정인홍은 전승을 보고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대부분 보고하지 않아 군공(軍功)은 남의 맨끝에 있었으나 사실인즉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킨 가운데에서는 정인홍이 첫째였다. 김수(金睟)는 삼가(三嘉)ㆍ초계(草溪)ㆍ성주(星州) 및 고령(高靈)의 군대를 그에게 맡겼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왜적이 전라 감사를 칭호하여 의령(宜寧)의 정진(鼎津)으로 몰려 닥쳐오니, 곽재우(郭再祐)가 의병(疑兵)을 설치해서 그를 물리치다.

○ 전라 좌우도의 선비들이 의병(義兵)을 일으킬 것을 제창하다. 좌도는 전 부사인 첨지 고 경명(高敬命)을 대장에 모셨고,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와 학관(學官) 양대박(梁大樸)을 종사(從事)로 하고, 정랑(正郞) 이대윤(李大胤)과 정자(正字) 최상중(崔尙重)ㆍ양사형(楊士衡)ㆍ양희적(楊希廸) 등을 모량유사(募糧有司)로 삼았다. 우도는 전 부사인 김천일(金千鎰)을 대장으로 모셨다. 고경명은 광주(光州) 사람으로 전에 동래사(東萊府使)를 지냈고, 김천일은 나주(羅州) 사람으로 전에 수원사(水原府使)를 지냈다. 애초에 유팽로가 서울이 함락되어 거가가 서북으로 봉진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주야로 외쳐 울며 편안히 침식을 하지 못하고, 동지 양대박 및 양희적과 더불어 고경명을 찾아 가서 지방의 병사를 서둘러 일으켜 북으로 향해 근왕(勤王)할 것을 모의하니, 고경명은 그들이 먼저 생각해 낸 것을 기뻐하며 흔연히 그들을 따랐다. 즉일로 여러 읍에 격문을 돌려 추성(秋城)에 모이도록 불러 날을 정하고 깃발을 세웠다. 본도에서 의병을 제창한 것은 유팽로 등이 첫째였으므로, 호남에 삼창의(三倡義)라는 말이 생겼다.

6월 5일. 이광(李洸)이 선봉장 백광언(白光彦)을 시켜 용인(龍仁)에서 왜적을 탐지하게 하다. 왜적이 현의 북쪽인 북두문(北斗文)이라는 작은 산에 진을 쳤는데, 진은 미약하고 군사는 쇠잔하여 그 기세가 외롭고 약한 것 같았다. 백광언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이것은 영세한 왜적이니, 급히 공격하고 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하였다.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 율(權慄)이 방어사의 중위장으로 군중(軍中)에 있었는데, 이광에게 강력히 말하기를, “서울이 멀지 않고 큰 왜적이 앞을 막고 있는데, 작은 적과 다투어 교전해서 군사의 위세를 꺽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으나, 이광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곧 조방장 이지시(李之時) 및 선봉인 수령 등을 백광언에게 주어 전투를 독촉하였다. 백광언 등은 적이 눈앞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육박해 들어가 도전했는데, 묘시부터 사시에 이르기까지 적병이 잠복하고 나오지 않자, 오시에 이르러 아군이 해이해졌다. 이때 왜적이 풀 속에 엎드려 무릎으로 전진해 와 검을 휘두르며 일제히 일어나 아군 가운데로 쳐들어오니, 왼쪽에서 목 베고 오른쪽에서 찍어대고 하여 아군의 전사자가 부지기수였다. 이지시ㆍ백광언, 고부 군수(古阜郡守) 이윤인(李允仁), 함열 현감(咸悅縣監) 정연(鄭淵) 등이 모두 이 전투에서 피살되어 대군의 기세가 꺾였다. 이날 교지가 서해로부터 용인의 진중에 도달하여 경상좌우순찰사와 좌감사 이성임(李聖任)을 도로 합하게 하니, 길이 막혀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6일. ○ 전라도 의병장 행부호군 고경명(高敬命)이 여러 도의 수재(守宰) 및 사민(士民)과 군인 등에게 다음과 같은 격문을 급히 보냈다.


근자에 국운이 중도에 비색한 때문으로 섬 오랑캐가 밖에서 짖어대어, 처음에는 역적 양(亮)이 맹약을 어긴 일을 본받아 하더니 마침내는 오랑캐 오(吳) 나라가 중국을 먹어 들어오던 짓을 자행해서, 우리가 경계하고 있지 않은 틈을 타 허한 데를 짓이겨대고 멀리 몰고 들어와 ‘하늘을 속일 수 있다’고 여기며 마음대로 곧장 올라왔다. 장수의 절월(節鉞)을 가진 자는 기로(岐路)에서 서성대고 한 군(郡)의 인신(印信)을 찬 자는 수풀 깊은 속으로 도망가서 왜적을 군친(君親)에게로 돌려버렸다. 이것을 참을 수 있는가. 지존(至尊)으로 하여금 사직을 근심하게 하고서 네 마음이 편안한가? 어찌 생각하였으랴, 1백 년이나 휴양해 온 백성 가운데 어찌 의기 있는 사나이가 하나도 없으랴. 고군(孤軍)으로 깊이 들어간 것은 여진(女眞)이 본래 병법을 몰랐던 것이요, 중행(中行)을 매질하지 않은 것은 대한(大漢)이 본래 책략이 없었던 것이다. 장강(長江)이 급작스레 그 천연의 요해지를 잃어버려서 흉악한 칼날이 이미 신경(神京)에 육박한 것이니, 남조(南朝)에 인물이 없었다는 조롱은 진실로 가슴 아프거니와, 북군(北軍)이 날아서 건너왔다는 말은 불행하게도 근사하구나. 이제 우리 성상(聖上)께서는 태왕(太王)이 빈(邠) 땅을 떠나던 마음으로 명황(明皇)이 촉(蜀) 땅으로 갔던 일을 하셨으니 이는 대체로 역시 종묘사직을 위한 지극한 계획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사방의 지방관이 잠시 애쓰는 것은 기탄하지 않거니와 공락(鞏洛)의 놀란 먼지 속에 임금의 안색에 자주 깊은 진념이 나타났고, 민아(岷峨)의 위험한 잔도(棧道)로 푸른 일산[翠華]이 긴 노정을 멀리 갔다.


하늘이 낸 이성(李晟)이 적을 숙청한 것은 바로 원로(元老)에 힘입었고, 조서를 초한 육지(陸贄)의 애통한 말은 또 성조(聖朝)에서 내렸다. 무릇 혈기를 가지고 생명을 지닌 자라면 그 누가 분개하고 죽으려 들지 않겠는가. 어찌하랴! 사람의 모의가 좋지 않아 국보(國步)의 간난(艱難)이 잦았도다. 봉천(奉天)의 거가(車駕)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상주(相州)의 군대가 이미 무너졌으며, 준동하는 저 벌이나 전갈 같은 무리[蜂蠆之醜]에게 고래나 상어 같은 힘으로 목을 베는 것이 아직도 늦어지고 있다. 그러나 성문에 임시로 쉬고 날아도는 것이 어찌 장막의 제비와 다르겠으며, 외람되이 기보(畿輔)에 버티고 있으니 그 날뛰는 것이 울 안의 원숭이와도 같다. 비록 하늘의 군사가 소탕해버릴 때가 있기는 하겠으나 역시 그 흉악한 무리가 뛰어 달아나기는 기대하기 어렵다. 나 고경명은 단심과 만년의 절개를 가지고 머리가 희어지도록 썩은 선비[腐儒]로 살아왔으나, 밤중의 닭소리를 듣고는 국가의 다난함을 견디지 못하여 중류(中流)에 뜬 배의 노를 치면서 스스로 외로운 충성을 허락하였노라. 한갓 개나 말이 주인을 그리는 정성을 품고 모기나 등에[虻]가 산을 지려 드는 것같이 턱없는 힘을 헤아리지 않고, 이에 의병을 규합하여 곧장 서울로 지향하고자 옷소매를 떨치고 단에 올라 눈물을 뿌리며 여럿과 맹세했다. 곰을 치고 표범을 끌어대는 군사들이 우레같이 세차고 바람같이 날며, 수레를 뛰어넘고 관문을 건너뛰는 무리가 구름같이 합치고 비같이 모였으니, 이는 대개 핍박한 후에 응하여 억지로 나가게 한 것이 아니고 오직 신하로서 충의에 찬 마음이 다 함께 지극한 본성에서 우러난 것이니, 존망의 위기에 임하여 감히 미미한 몸을 아끼겠는가. 군사는 의로써 이름 지었으니 본래 벼슬[職守]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군대는 곧은 것으로 말미암아 씩씩해지는 것이지 취약한가 견고한가를 따지는 것은 아니어서, 대소의 군대들이 모의하지 않고도 뜻을 같이하였고, 원근의 장정들이 소식을 듣고서 다 함께 분발했다. 아아! 우리 여러 군[列郡]의 수재(守宰)들과 여러 길[諸路]의 사민(士民)들의 충성이 어찌 임금을 잊었겠는가. 의리상 마땅히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할 것이다. 혹은 병기(兵器)와 의장(儀仗)으로 도와 주고 혹은 양식으로 구제해 주며, 혹은 말을 달려 군사의 행렬 앞을 가고 혹은 쟁기를 놓고 밭에서 분기하여 힘이 미칠 만한 것을 헤아려 오직 의로운 데로 돌아가 임금을 고난으로부터 막아낼 수 있다면, 나는 그대들과 함께 일어나기를 원하는 것이다. 멀리서 생각하건대, 행궁(行宮)은 서쪽 땅에 멀리 있으나 묘당(廟堂)의 대계(大計)가 장차 정해지리니, 왕업(王業)이 어찌 한쪽에 치우쳐 안정할 것이랴! 잘 패[敗宮]하면 망하지 않나니 복덕(福德)이 바야흐로 오(吳) 나라 분야에 임했고, 깊은 근심으로 열어 주니 노래하고 읊조리는 데 더욱 한가(漢家)를 생각하게 된다. 호걸스럽고 준일한 인물이 시세를 바로잡을 제 신정(新亭)에서 마주보고 우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고, 부로(父老)들이 임금을 기다리니 곧 구도(舊都)에 임금이 돌아오는 것을 보리라. 생각하건대 마땅히 힘을 내서 앞서 나가야 할 것이므로 이상 마음속을 털어놓고 고하노라.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 전라도 의병장 행부호군 고경명이 삼가 제주절제사 양공(楊公) 그때 양대수(楊大樹)가 본주의 목사였다. 의 휘하에 치고(馳告)하나이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섬 오랑캐가 침략을 자행하여 임금께서 몽진하였는데, 지존으로 하여금 홀로 근심하게 해 놓고 처자를 보호할 계책만 먼저 생각하여 왼발을 들여다보고 먼저 응하니 그 누가 사직을 지키는 마음을 가졌겠소. 흥원(興元)의 거가는 돌아오지 않았는데 상주(相州)의 군대는 이미 무너져서, 이수(伊水)와 낙수(洛水)의 적을 빨리 소탕하여도 아직 회복할 기약은 멀었고, 군량은 버려져 도리어 원수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다행히 하늘의 뜻이 끊어지지 않았으면 그래도 국사를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 고경명이 이에 의로운 깃발을 들고 요사한 무리를 숙청하러 나서자 소식을 듣고 그림자같이 모여들었는데 대부분 형초(荊楚)의 기특한 인재들이고, 예리한 무기를 들고 먼저 나서는 중에는 또한 연조(燕趙)의 검객도 들어 있습니다. 다만 한스럽기는, 보졸의 발[足]이 될 것이 없어 말을 채찍질하여 양(良)을 찌를 것을 바라기 어려운 것입니다. 멀리 생각건대, 바다 동쪽의 탐라(耽羅) 땅은 중국의 기북(冀北)과 다름이 없어서 골짜기를 뛰어넘어 다니며 사냥을 할 뿐만 아니라 전투 행진에 따라다녀 또한 목숨을 의탁할 만하다 하니, 만약 그곳에서 나는 말을 바닷배에 가득 실어 보내 주신다면 우리 군대의 위용이 크게 드러나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귀관께서는 임금의 은혜를 깊이 받아 해역(海域)을 전제(專制)하고 계시니 글로써 호소하면 응당 한 곳의 여론을 일으킬 것이며, 팔뚝을 걷어올리고 외치면 어찌 10실(室)의 마을에 충신(忠信)한 사람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만약 장사 중에 나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또 그러한 인간의 상정을 막지 말기를 바랍니다.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고종후(高從厚)가 대신 지은 것이다.


○ 전라도 의병대장 장하사(張下士), 전 현령 고종후(高從厚)ㆍ권지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 유팽로(柳彭老) 등이 충청ㆍ경기ㆍ황해ㆍ평안 4도의 여러 읍의 수재 및 향교(鄕校)ㆍ당장(堂長)ㆍ유사에게 다음과 같이 삼가 재배(再拜)하고 통문(通文)하다.


외람되게 생각하건대, 섬 오랑캐가 불공함으로 임금께서 멀리 파천하고 7묘(七廟)가 재가 되어버렸으며 만백성이 도탄에 빠졌으니, 이는 진실로 고금에 있어 본 일이 없던 변고이고, 충신(忠臣)과 의사(義士)가 몸을 버려 나라에 보답할 때입니다. 그러나 방진(方鎭)의 중신(重臣)들은 관망하면서 머뭇거려, 군사를 징집하는 교지가 한두 차례 내린 것이 아닌데도 한 사람도 머리를 북으로 향하고 적과 싸워서 죽은 자가 없습니다. 오늘날의 사대부는 조정을 저버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외람되이 생각하건대, 호남은 본래 군사가 정예한 것으로 일컬어져 왔었는데, 근왕군이 겨우 금강(錦江)에 도달하자 도성이 함락되고 거짓말이 멀리 퍼졌으며 주장(主將)은 여러 사람의 의론을 널리 물어 볼 겨를도 없이 급히 진을 파하라는 영을 내려 10 만의 무리가 까닭 없이 그냥 돌아가버리고 온 도의 민심이 흉흉하여 흡사 미친 듯한 물결이 마구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두 번째의 군사 모집에 가서는 하천한 백성과 지극히 우매한 자들이 그 명령에 따르지 않으니 컴컴한 방안의 근심은 차마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사직의 복과 조종의 위령에 힘입어, 무너져 달아났던 병졸들이 매일같이 모여 와 군의 성세가 크게 진작되어 혹시나 궁금(宮禁)을 숙청하여 거가를 맞이할까 바랐더니, 사람의 모의가 좋지 못하였고 하늘이 내리는 앙화가 가시지 않아서 적은 수의 적이 겨우 나타나자 대군이 또 무너지고 군량을 버려 도리어 원수 왜적의 도움이 되었으니, 아아! 우리 역대 성군께서 수백 년 동안 함양한 나머지에 어찌 적개심에 찬 신하가 한 사람도 없습니까! 공론이 아래에 있는 것을 옛사람이 이미 불길하다고 하였으나, 황폐한 풀섶에서 의병을 창도하는 것은 역시 계략상 부득이했음을 알 것입니다. 군부(君父)가 환난 가운데 놓여져 있는데 그 밖의 일을 돌아볼 겨를이 있겠습니까. 거듭 생각하건대, 영남과 양호는 진실로 우리 동쪽 나라의 근저(根柢)입니다. 그런데 영남인즉 의병이 일어나기는 하였으나 중간이 왜적의 굴혈에 막혀 있어서, 곧장 서울에 올라가 근왕(勤王)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호서 1천 리의 땅엔들 어찌 의기 있는 사나이가 없었겠습니까마는, 왜적들이 죽이고 빼앗는 여세에 겁을 집어먹고 역시 자신을 구해낼 겨를조차 없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오늘날 중외에서 믿는 것은 호남 한 도에 있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 막부(幕府 대장 있는 곳)에서 만 번 죽고서라도 기어이 관철해 낼 계획을 세우고 한 지방의 여러 사람을 격려한 결과, 민심은 왕실을 생각하고 열사들이 운집하여 보병과 기병의 수효가 이미 5만 2천에 이르러 바야흐로 북쪽으로의 길을 멀리 몰고 들어가 요사한 왜적의 무리를 소탕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1천 리의 길에 양곡을 운반하는 일은 사사로운 힘으로는 해내기 어렵습니다. 만약 의를 좋아하는 여러 군자들이 힘을 합해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면 비상한 큰 공이 어찌 한 사람의 손에서 다 나올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이 나라의 땅 치고 임금의 땅 아닌 곳이 없습니다. 양호(兩湖)의 군사는 이 나라를 부흥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제공께서는 함께 나라를 위해 따라 죽을 뜻으로 분발하고노적가리를 가리켜 내주던 의기를 다해서 각기 미곡을 내어 군의 식량을 도와 주신다면, 능히 양주(揚朱)와 묵적(墨翟)을 막겠다고 말하는 자 역시 성인(聖人)의 무리일 것입니다. 또 생각하건대, 산골짜기가 험준하고 평탄한 것과 도로가 우회하고 곧고 한 것은 그 고장의 군사가 가리켜 인도하지 않는다면 역시 창졸간에 당하는 곤란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그 고장의 사람을 모집해서 우리 군의 기세를 돋구게 해 주신다면, 비단 종묘 사직의 깊은 수치를 한바탕 씻어버릴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부자 형제로 창이나 화살에 죽은 이들 역시 황천 속에서 눈을 감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일은 비록 어리석은 백성이라 할지라도 다 마음 아파하고 걱정하겠거늘, 하물며 여러 고을의 수재(守宰)들은 다 나라의 은혜를 받았는데 어찌 차마 근왕군의 곤란[秦瘠]을 좌시하겠습니까. 반드시 옷소매를 떨치고 일어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남의 밥을 먹으면 남의 일을 위해 죽는다.” 했거니와, 만약 소식을 듣고 강개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오는 자가 있다면, 원하건대 소반의 피를 입에 찍어 바르고 함께 왕의 일에 종사하겠거니와 혹 한 끼 양식과 자재를 군 앞에 수송해 주어도 역시 한 가지 도움이 될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해서와 관서는 비록 도로가 통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마는 각각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모집해서 사잇길로 해서 나와 차례로 전해서 일각도 지체하지 않는다면 원근에서 그 소문을 듣고 혹 그것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 통문이 도착한 날 여러 고을 향교의 당장과 유사는 각각 한 통씩 베껴서 경내의 선비들에게 전해 그들로 하여금 모르는 사람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정기록》에 나온다.


○ 고경명과 김천일(金千鎰), 양산숙(梁山璹)과 곽현(郭玄)을 시켜 출사표(出師表)를 받들고 서해로 해서 행조(行朝)로 보내다. 그때 적병이 5, 6도(道)에 가득 차 있었고 경기와 황해가 더욱 심했기 때문에 서쪽으로 가는 길이 끊겼었는데 이때에 와서 비로소 수로가 통하게 되었다.


15일. ○ 좌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 전주(全州)로 나아가 진을 치고 의병을 불러 모았으며, 이어 본도의 여러 고을에 글을 보내 이르다.


대장이 급히 구원을 요청하기 위한 것이다. 국가의 일이 이러한 극단에 이르렀으니 오늘의 소망은 오직 의병을 일으키는 데 있는데, 불러 모인 수효는 수백에 불과하다. 비록 강개(慷慨)에 찬 뜻이 당당하여 범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성세가 떨치지 않으니, 관군이 조력하는 것이 아니면 만전지계가 아닌 것 같다. 조전군(助戰軍)은 다소를 불구하고 단지 정예한 것을 택하고 전일 낙오한 사람을 극력 불러모아 충의로써 타일러 주야를 불문하고 급히 구원하러 보낼 것이다.


○ 전라 감사 이광(李洸)이 김수(金睟)와 더불어 전주로 도망해 돌아오다. 김수는 곧 함양(咸陽)으로 향하여 이어 거창에 도달하니, 그때 김성일(金誠一) 역시 본현에 머물러 있었다.



○ 전라 병사 최원(崔遠)이 군사 2만여 명을 동원하여 본도 우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군사 2천과 함께 근왕군으로 서울로 향하다.


○ 도원수(都元帥)가 팔도에 전한 격문은 다음과 같다.


군대를 일으키는 데 있어서는 곧아야 씩씩해진다. 바야흐로 왜적을 토벌하는 계획을 넓히고 의가 병들기 전에 서둘러야 하니, 감히 근왕하는 일을 늦추겠는가. 무릇 우리 동지들은 각기 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생각건대, 우리 국가는 신성한 임금이 계승하여 거듭 밝아 태평세월이 계속되어 누누이 백성들에게 인정(仁政)의 은택이 젖어 있고, 음우(陰雨 위험한 일)에 앞서 선처하여서 수천 리 땅에 옥촉(玉燭 계절 따른 기후)이 고루 조정되어 2백 년 동안 금사발[金甌 국가의 계승된 왕실]에 흠이 없었으므로 장차 안으로는 태평하고 밖으로는 안정되기를 기대하였더니, 도리어 문관은 안일에 흐르고 무장은 장난으로 여기게 되었다. 준동하는 저 바다섬의 간악한 오랑캐는 사실 천지간의 추악한 종자로, 처음에는 중국에 감정을 품고서 하늘을 쏘는 활을 당기려고 하다가 끝내는 우리나라에 앙화를 전가시키고 감히 사람을 씹는 부리를 놀렸다. 요(堯) 임금을 보고 짖는 개가 진(秦) 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하는 격으로, 저녁 봉화가 겨우 한궁(漢宮)에 도달하였는데 요사한 독기는 이미 상령(商嶺)을 둘러쌌다. 장강(長江 양자강)의 험한 요새를 잃어버렸으니 진실로 군대의 율법이 엄하지 않은 때문이었고, 임금이 몽진하였으니 조정의 계획이 길하지 않았음을 넉넉히 볼 수 있다. 종묘와 사직이 재로 타버리고 조정과 저자가 변천하였으며, 심한 독이 여염에 두루 미쳤고 더러운 소문이 원근에 뚜렷이 드러났다. 귀신과 사람의 분노가 이미 극도에 도달하였으니, 군부(君父)의 원수를 잊을 수 있겠는가.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여러 성이 흙같이 무너지는데 오직 성문을 열고 맞이해 절할 줄만 알고 뭇 장수들은 담이 떨어졌으니 누가 용기를 내어 먼저 나설 수 있겠는가. 우리가 고수하겠다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저들이 멀리 몰고 들어오는 위세를 도와 주었으니, 주여숙(柱厲叔)이 이것을 보았다면 어찌 예전에 알던 사람을 기다릴 것인가. 만일 안진경(顔眞卿)이 다시 살아난다면 마땅히 무슨 꼴을 할 것인가. 하물며 지금 저 왜적들은 미쳐 날뛰고 교만하고 게을러져 있으며 들떠 붙어 살고 외로이 매달려 있다. 힘은 이미 싸우고 공격하는 데 지쳐버렸으니 그 기세는 반드시 오래 가기 어려울 것이고, 욕망은 오직 약탈에만 있으니 뜻도 또한 알 수 있는 것이다. 한실(漢室)을 생각하는 이들은 앞다투어 노래를 바치고 적에게 붙었던 자도 또한 대부분 헤어졌으니, 이미 죽을 길에 놓인 도적이 되어버려 구차하게 살아날 꾀도 지니지 못하게 되었음에랴. 세성(歲星 5성의 하나, 목성(木星))이 기(箕 별자리 이름)의 분야를 지키니 복덕(福德)이 내릴 징조가 있음을 알겠고, 큰 하늘이 송(宋)을 도우니 어찌 나라를 회복하는 데 기약이 없으랴. 지금 나는 외람되이 추곡(推轂 대장에 임명하는 의식)하는 은혜를 받들고 흉적을 제거하는 책임을 전적으로 위임 받아 여러 도의 도순찰사를 겸임하여 군사 3천을 거느리고 이달 10일에 행재소를 배사(拜辭)하고 곧장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서 수레를 뛰어 넘던 날랜 사람들은 태반이 장교로 편입되었고, 관서의 장수를 넘어뜨리던 인재가 다 부오에 예속되어 있어 3군의 사기가 점차 진작되고 만민의 마음이 약간 소생했다. 이는 진실로 한 나라의 신자(臣子)가 마음을 합하고 힘을 다해 몸을 잊고 순국할 때인 것이다. 생각건대, 각 도의 관찰사와 절도사들은 혹은 지방의 전권을 장악하고 혹은 병권을 위임 받아 한 도에서 많은 군대를 가지고 있으니, 어찌 막고 보호하는 정성을 잊을 것인가. 서방(西方)에 미인(美人)을 바라볼 때에 드는 생각이 눈물을 뿌리는 아픔에 간절할 것이다. 의당 범이나 사자 같은 군대를 거느리고 뱀이나 돼지 같은 무리를 함께 쓸어내야 할 것이다. 수미(首尾)로 협공하여 번갈아 기각(掎角 두 편에서 서로 잡아당겨 협공으로 포획함)의 태세를 이루고 동서로 함께 진격하여 입술과 이와 같이 지원한다면, 구멍에 든 개미가 된 격이니 도망칠 수 있겠는가. 솥 안에 든 물고기가 된 형편이니 뭉글어뜨릴 것이다. 아래 옷을 찢어 발을 싸매고서라도 어찌 천리길의 수고를 꺼릴 것인가. 머리를 풀어 헤친 채 갓을 매어 쓰고서라도 한 집안을 구하는 데에 서둘러야 할 것이다. 각기 세상에 보기 드문 은혜를 갚고 힘써 비상한 공훈을 세울 것이니, 힘쓸지어다. 시기를 놓치지 말도록 하라. 때는 두 번 얻기 어려우니. 운운.


그때 김명원(金命元)이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흩어진 군사들을 거두어 순안(順安)에서 왜적을 막고 있었다.

23일. ○ 이 광(李洸)은 전주에서 본주(本州) 사람 문관(文官) 이정란(李廷鸞)을 주의 수성장(守城將)으로 하여 이웃 읍의 군사를 모아 계엄을 펴고 왜적의 변란에 대비하게 하였고, 또 남원(南原)에 전령하여 군사를 모아 성을 지키게 하였다. 그때 본부(本府)의 선비들이 흩어진 군졸을 모집하여 향병(鄕兵)이라 칭하고 전 목사 정염(丁焰)을 장수로 추대하였다.

○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 전주로부터 여산(礪山)으로 향발하여 비밀리 장병들과 의논하기를, “금산과 무주의 왜적이 이미 용진(龍鎭)으로 향했으니 이것은 틀림없이 전주와 남원에 뜻이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대군이 본진(本鎭)을 다 떠나가야 할 것이니 노약자만을 남겨서 수비시킬 것이다. 우리 군대가 진산(珍山)으로부터 그 자들이 생각하지 않은 곳으로 나가 나머지 무리들을 다 죽여버리고 뒤쫓아 추격하면, 그 왜적들은 전진해도 거점을 얻지 못하고 후퇴해도 돌아갈 곳이 없어 중도에서 낭패하여 스스로 황산(荒山)의 패전을 초래할 것이다.” 하고, 군사를 이끌고 은진(恩津)의 연산(連山)을 향해서 떠났다. 같은 진의 군량색(軍糧色)을 고목(告目 천한 사람이 높은 이에게 올리는 글)하기를, “가지고 있는 군량은 여산군(礪山郡)에서 수납(輸納)하겠나이다.” 하였다. 색리(色吏)는 남원의 색리이고 군량은 남원의 군량이다. 대체로 의병을 돕는 일은 각 읍이 다 그러했다. 대장의 행차가 22일 전주를 떠나 23일 여산에 머물렀다. 당일 도부(到付)한 금산의 전통(傳通)에, 옥천(沃川)의 양산현(陽山縣)을 분탕질한 왜적이 본군을 지향해 와 진을 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24일 동군(同郡)의 전통에는, 10리 거리에 진을 칠 것이라 했고, 서울의 왜적은 신립(申砬)과 윤두수(尹斗壽)가 각각 좌우 대장이 되어 1천여 명을 잡았다는 것이었으며, 여산군수가 구전(口傳)한 내용은 의병이 은진ㆍ연산ㆍ금산으로 지양한 것과 우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행차와 병사(兵使)가 일시에 직산(稷山)으로부터 진위(振威)로 향한 것이었다.

○ 전라도 의병장 행 부호군(行副護軍) 고경명(高敬命)이 본도 도순찰사(都巡察使) 절하(節下 순찰사를 말한 것)에 다음과 같이 격문을 발송하다.

섬 오랑캐가 난리를 일으켜 임금의 행차가 멀리 순행길을 떠나시니 중외(中外)에서 믿는 것은 오직 호남(湖南)밖에 없는데, 겨우 군사를 일으키라는 어명(御命)을 받들자 갑자기 근왕(勤王)하는 군대를 해산하라고 하니 절하의 마음 속에는 반드시 어떤 계획이 있어서 그렇겠지만 절하의 실지 행동에 있어서는 납득될 만한 것이 없지 않습니까. 조정의 명령은 비록 막혀 끊어졌다 하더라도 한 도내의 물의도 역시 두려운 것이외다. 지난번 용인(龍仁)에서 무너진 것은 실로 선봉장이 패전한 때문이었으나 절하가 주장(主將)이 되어 있는 이상 그 책임을 모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절하는 오늘의 입장에 있어 어떻게 계획하시렵니까? 행여 지나간 실패를 잘 수습하여 주상전하의 남쪽에 대한 근심을 덜어드림으로써 기왕의 허물이 씻겨지고 새로운 업적이 역사에 찬란하게 된다면, 비단 성조(聖朝)에서 난리를 다스리고 정상으로 돌려놓는 기초일 뿐만 아니라 절하에 있어서도 역시 화가 복이 되는 날일 것이외다. 본도 의병이 당초 북도로 향해서 난리를 평정시키고 전하의 행차를 모셔 오려고 했었는데, 길에서 들으니 윤 정승[尹左相]이 서ㆍ북의 정병을 거느리고 서울에 머물러 있는 적을 토벌한다 한즉, 북방의 일은 염려가 없음이 거의 보증됩니다. 그러나 호서(湖西)의 적이 금산(錦山)으로 들어오는데, 방어할 군사가 아직도 용계(龍溪)에 주둔하고 한 사람도 다짐하며 앞서 나오는 자가 없으니, 절하가 이 시기에 있어 진정 병력을 널리 모집하여 형세를 크게 벌리지 않으시면 가엾은 우리 호남 한 지방 백성들은 모두 적의 칼날에 목숨을 빼앗기고 말 것이외다. 그렇게 되면 절하는 위로 국가를 회복하지 못하고 아래로 강회(江淮)를 보장(保障)하지 못하고 있다가, 하루아침에 적이 다 쓰러지고 전하께서 돌아오시어 교서(敎書) 한 장을 내려 사방에 포고한다면, 비단 호남 사람들만 천지간에 용납되지 못할 뿐 아니요 절하 역시 무엇으로써 충성을 바치고 허물을 보상하겠습니까. 절하가 혹 저 왜적이 워낙 사나워서 맞붙어 싸우기 어렵다고 군사를 나누어 험한 곳을 지켜 쳐들어오는 적을 막고 때로 기병(奇兵)을 내어 그 날카로운 기세를 꺾어 버리면, 적의 성집이 경망하고 조급한지라 지구전은 계속하지 못할 것이니 열흘이 넘지 않아서 큰 공을 이룰 수 있는 것이외다. 다 같이 왕의 신하가 되어 나랏일을 함께 하는지라, 피차의 사이가 있을 수 없고 형세를 서로 의지하는 처지니, 각자 소견을 자세히 참작해야 할 것인즉 부디 계획을 잘하여 후회를 끼침이 없기 바랍니다.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고종후(高從厚)가 지었다.

임진년 6월 일 만력(萬曆 명(明) 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20년 전라도 의병대장 행 부호군 고경명(高敬命)은 해남(海南)ㆍ강진(康津) 두 고을의 사군(使君)으로 있는 의병장 휘하에 다음과 같은 격문을 보냈다.
나 고경명은 전일 추성(秋城 담양(潭陽))에서 의거(義擧)하던 당시에 가슴속의 끓는 피를 편지 한 장에 쏟아서 각 읍 수령에게 두루 고하여 함께 어려운 고비를 극복해 나가자고 호소했으나, 정성이 사람을 감동하지 못해서 아무리 외쳐도 반응이 없으니 초야의 인생이 다만 빈주먹만 두들길 뿐이어서 무기와 군량의 뒷받침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던 참이었습니다. 이윽고 들은즉 격문을 받아 보고서 정병을 내어 응원해 준 사람은 호남 50주(州) 중에 유독 두 고을의 원님이 있어, 그 소문이 미치는 곳마다 사기가 백배나 더함과 동시에 정의의 군사를 기다려서 적의 무리를 쓸어버리려 했던 것이외다. 그런데 뜻밖에 병사(兵使)가 격문을 띄워 부르고 있으니 앞으로의 거취가 자유스럽지 못할까 깊이 염려됩니다. 지금 금산의 왜적이 청진(淸鎭)의 왜적과 형세가 서로 연접되어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이 자유로우므로, 한 부대는 이미 용담(龍潭)을 함락시키고 또 한 부대는 무주(茂朱)를 함락시켜 세 군데 소굴을 만들고서 완산(完山 전주(全州))을 침범하기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완산 고을은 비단 호남 지방의 근본이 될 뿐만 아니라 진전(眞殿)을 모신 곳으로서 실로 우리 성조(聖朝)의 발상지이므로, 나 고경명은 의기(義旗)를 그쪽으로 돌이켜 적의 칼날을 방어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본즉 저 왜적이 본래 잔꾀가 비상한데다 진산(珍山)의 병력은 극히 약하니, 만약 적으로 하여금 진산ㆍ연산(連山) 같은 험하고 좁은 곳을 넘어서서 은진(恩津)ㆍ여산(礪山) 같은 평탄한 길로 돌진하게 한다면 어찌 다만 호남만 앞뒤로 공격을 받을 뿐이겠습니까. 금강(錦江)의 군사마저 장차 동요가 될 것이외다. 그래서 호서(湖西)가 불통되고 적의 세력이 치성하면 호남의 군량을 어떻게 수원(水原)에 수송할 것이며, 이때 본도 병사 최원(崔遠)ㆍ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이 군사를 거느리고 수원에 주둔하였다. 조정의 소식을 어떻게 사방에 전달하겠습니까. 이에 군사를 옮겨 진산으로 들어가서 금산(錦山)에 있는 적의 후방을 공격하여 용담ㆍ무주의 적으로 하여금 뒤를 돌아보는 염려를 버리지 못하게 하고, 서서히 두 고을 군사를 기다려서 곧장 적의 굴혈을 엄습하여 흉악한 무리들로 하여금 나아가나 물러가나 근거가 없게 만들어 놓으면, 국가를 보전하는 상책이 될 뿐만 아니라 이 역시 완산부(完山府)를 구원하는 하나의 좋은 계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공들이 지금 만약 예전 상도만을 고수하고 변통할 줄을 모른다면 나 고경명 역시 군사는 외롭고 힘은 적어서 선뜻 움직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호남의 적도 쉽게 전제(剪除)할 수 없고 수원의 아군이 혹시라도 또 시일만 허송하게 될 것입니다. 병사가 거느린 군사는 모두 호남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만약 적의 무리가 오늘에 아무 지대를 통과하고 내일에 아무 현(縣)에 침입한다는 소문을 듣는다면, 식량은 공급되지 않고 군의 정세는 흉흉할 것이니, 이야말로 목전에 닥친 위급이라 비록 지혜있는 자가 아니라도 짐작하고 남음이 있을 것이외다. 그렇다면 두 원님이 합세해서 금산의 적을 치는 것은 다만 호남을 보장하는 계책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병사를 위하여 서로 응원하는 꾀도 될 것입니다. 옛 사람의 말에, “장수가 밖에 있어서는 경우에 따라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않을 수 있다.” 하였으니, 이는 일의 기미에 임하여 융통성이 있는 것을 귀하게 여김이요, 마치 교주고슬(膠柱鼓瑟 변통할 줄 모른다는 뜻)하듯이 외곬으로 나가는 것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병사가 멀리 천리 밖에 있어 이 도리를 알지 못하고 지극히 위급한 처지에 빠졌으니, 어찌 가까운 데 있는 적을 버리고 후회를 남겨서야 되겠습니까. 사사로운 생각으로는, 두 원님이 위로 수원의 기한에도 미치지 못하고 아래로 금산의 약속도 돌아보지 않는다면 뒷날의 공론이, “적의 칼날을 도피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하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스스로 계획을 잘해서 남의 비난을 듣지 말도록 하시오.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고종후(高從厚)가 지었다.

○ 재상(宰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올리다.

양산(梁山)ㆍ밀양(密陽)이 연달아 함락된 뒤로 적의 군사가 승세를 타서 이미 거침없이 몰고 갈 기세가 있다는 것을 듣고, 식자 계급에서는 적들이 우리의 허점을 찔러 곧장 올라갈 것을 근심하여 간담이 써늘하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순찰사(巡察使)가 나주(羅州)에 있을 적에 사람들이 모두 하루빨리 군사를 이끌고 서울로 들어가서 응원해 줄 것을 바랐고 광주 목사(光州牧使) 정윤우(丁允祐) 역시 순찰사를 보러 가서 빨리 근왕(勤王) 길에 나가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으나, 순찰사가 막연히 들으며 염려하지 아니하니 정 공이 민망히 여기며 그저 물러 나오고 온 도내 사람들은 한갓 두 주먹만 움켜쥐며 통분해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징병하라는 교지가 내리자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온 도내 군사를 모두 일으켜 일제히 여산(礪山)으로 치닫게 하였는데, 집합 일자는 너무 촉박하고 겸하여 장맛비가 열흘에 걸쳐 내렸습니다. 그러자 각 읍의 수령들은 기약에 뒤졌다는 꾸지람들을 받을까 두려워서 길에서 마구 몰아쳐 밤낮 없이 달리는지라 군사들은 배고픔과 목마름이 자심하여 스스로 길가에서 목을 매어 죽는 자까지도 있었으니, 그 괴로운 형상이 이처럼 심했습니다. 그러나 감히 원망하고 배반하지 않는 것은 모두 근왕(勤王)의 일이 시급하여 정의로써 군사를 일으킨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순찰사가 공주(公州)에 당도하여, 서울이 지켜지지 못하고 임금께서 서도(西道)로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 한 군관(軍官)을 시켜서 손에 전령패(傳令牌)를 가지고 말을 달려와 외치게 하기를, “진을 파하라. 진을 파하라.” 하니, 모든 군사가 아연하지 않는 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두 수령이 공주로 달려가서 순찰사를 보고 진을 파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말했으나, 순찰사가 듣지 않았습니다. 이에 모든 군사가 한꺼번에 모두 흩어져 함부로 욕하고 길에 가득히 들어차서 모두 하는 말이, “순찰사는 근왕에 전력할 뜻이 없으면서 다만 우리들만 괴롭힌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부터 군중들이 모두 짜증을 내며 비로소 해산할 생각이 나자 마치 물이 내리 쏟아지듯 하여 억제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 후 두 번째 군사를 징집하게 되자 여러 고을의 군사 중에 도중에서 무너져 흩어진 자가 서로 잇달았으며, 비록 더러 불러서 집합시키기도 했으나 막 집합시켜 놓으면 바로 무너져 그렇게 하기를 두 번 세 번 가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광주로 말하면 박광옥(朴光玉) 군과 더불어 흩어져 도망간 군사를 분주히 개유(開諭)하고 수습해서 천자(賤子)인 고종후(高從厚)와 고인후(高因厚)로 하여금 나누어 거느리고 수원(水原)의 전소(戰所)에 가서 광주 목사에게 교부(交付)하게 하였습니다. 이때에 순찰사는 도중에서 머뭇거리며 모든 군사를 돌려 진위(振威)에 당도하여 4, 5일 동안 유숙하노라니 사람은 모두 비를 맞고 서 있었습니다. 용인(龍仁) 싸움에 이르러 왜적의 군사는 수도 적고 형세도 궁해서 산마루 험한 곳에 진을 치고 울을 막아 스스로 방위하고 있는데, 충청도 순찰사ㆍ절도사의 병력과 전라도 순찰사ㆍ방어사의 병력이 수효가 십만으로 헤일 만하니 그런 조그마한 무리쯤이야 족히 깃발 한 번 휘두르면 박멸할 수 있었을 것이어늘, 불행히도 백광언(白光彦) 등 여러 사람들이 적을 경솔히 여겨 먼저 올라가다가 한꺼번에 진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대부대가 아직 건전한 이상 승리를 거두는 것이 어렵지 않았는데, 갑자기 3명의 왜적이 앞장서서 곧장 전진하는 것을 보고서 충청 절도(忠淸節度)의 군사가 먼저 무너지고 여러 진이 계속 무너져 화약ㆍ총통(銃筒)ㆍ전마(戰馬)를 모두 적에게 버려두었습니다. 나 고경명이 몸소 전사(戰士) 4, 5명을 만나본 바 매우 자상히 말하는데 마치 약속이나 한 것같이 모두 동일하며, 장성 현감(長城縣監) 백수종(白守宗)이 하는 말도 역시 전사들과 서로 같았으니, 고금 천하에 싸우다 패한 자가 퍽 많지만 이와 같이 통분하고 애석한 일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순찰사는 겨우 몸만 빠져 나와서 충청도 내포(內浦)를 경유하여 임피(臨陂)에 당도하자 곧 도내 열읍에 공문을 띄워 정병을 징발하여 바닷길로 임진(臨津)에 도달하려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소란하여 선뜻 명령에 응하지 아니하니 비록 억압하여 몰아댄다 해도 마침내는 반드시 전과 같이 분산될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순찰사가 지금 태인(泰仁)에 있으면서 의논할 일이 있다고 칭탁하고 격문(檄文)을 띄워 좌수사(左水使) 이순신(李舜臣)과 무주(茂朱)의 조방장(助防將) 이계정(李繼鄭)을 불러 모두 태인에 모이게 하였는데, 태인은 좌수영(左水營)과의 거리나 무주와의 길이 모두 너무 머니, 오늘날 적병이 국내에 밀어닥쳐 변란이 숨 한 번 쉴 만큼 짧은 시간에 달려 있는데 순찰사가 의논한다는 일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나 고경명이 이때 전주에 있으면서 이계정이 달려 가는 것을 보고 또 각관(各官)에서 전달한 보고를 얻어 본즉, 왜적이 무주의 속현(屬縣)에 들어와 민가를 불태웠고 적의 배 두 척이 또 순천(順天)에 침범하여 온 경내가 계엄 속에 들었으니, 대개 왜적이 우리나라 사람을 이용하여 간첩으로 삼기 때문에 빈틈을 타서 몰래 들어온 것입니다. 순찰사의 전후 처사를 더듬어 보면, 실로 그 의도가 무엇을 하려고 함인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도사(都事) 최철견(崔鐵堅)ㆍ부윤(府尹) 권수(權燧)를 만나본즉, 이때 최철견은 전라 도사가 되었고, 권수는 전주 부윤이 되었다. 역시 순찰사의 의도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하니 괴이한 일이요, 통분할 일입니다. 당초 병사(兵使) 최공(崔公)이 의병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얼굴에 나타내며, 도울 수 있는 일이면 힘을 다했습니다. 그때 순찰사가 다른 지방으로 나가 있었기 때문에 병사는 순찰사에게 공문을 보내 각 고을의 남은 무기를 의병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의병을 일으킨 후로 약간의 무기를 지나는 여러 고을에서 얻었으나 대개는 묵고 헐어서 쓰지 못할 물건들이며 그나마 수효도 많지 않아서 일행 중에 군관(軍官)까지도 다 갖지 못했는데, 하물며 싸우는 마당에 쓸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듣자니 순찰사가 용인에서 패전한 후부터는 매양 본도의 인심이 고약하다고 트집을 잡으며 오직 도망친 군사들에게만 허물을 돌리어 뒷날 자신을 합리화할 계책을 하고 있다가, 마침내 의병이 한 번 일어나서 모집에 응하는 자가 구름같이 모이는 것을 보고서 순찰사가 마음이 몹시 달갑지 않아서, “군고(軍庫)를 함부로 열었다.” 하고 명목을 잡는데 까지 이르고 있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요 두려운 일입니다. 무릇 수령 가운데 의거에 따르기를 원하는 이도 역시 많으나 순찰사에게 간섭을 받아[掣肘] 끝내 의병 노릇을 할 수 없게 되고 수령들도 또한 순찰사의 행동을 본받은 자가 있어 다방면으로 저해하여 의거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좌절시켜서 심지어 의병 모집에 응한 자의 처자를 잡아다 가두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래도 다시 종군을 하고 떠나려고 하지 않으니 진실로 슬픈 일입니다. 요즘에 각 도의 근왕군(勤王軍)은 한 번도 왜적과 더불어 싸운 일이 없이 양경(兩京)을 잿더미로 만들었으며, 마침내는 적이 무서워서 임금을 버리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취화(翠華 임금의 수례)가 길을 떠나 멀리 함경도[咸關]로 순행하고 계시니 구구히 기대할 바는 오직 의병을 한 번 일으키는 데 있거늘, 순찰사의 뜻이 이와 같고 조정은 천리 밖에 떨어져 있어 대궐 문앞에 나아가 호소할 길이 없은즉, 원한을 품고 스스로 불칙한 죄망에 걸려 죽을까 심히 두렵습니다. 믿는 바는 먼 데나 가까운 데나 모두 소문을 듣고 호응하여 힘세고 날랜 자들이 발이 부르트도록 쉬지 않고 모여들고 있으니, 오직 벌판에 나아가 눈물을 뿌리며 이 심정을 밝힐 것을 생각할 따름입니다.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는 것은 고금의 정론이니, 성공하고 못할 것은 계산할 바가 아닙니다. 오직 바라건대 상공(相公)은 비생(鄙生)의 일편단심을 통찰하시어 곡단(曲端)과 같이 원통하게 죽지 않도록 하여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태헌(苔軒)의 수초(手草)로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가을 7월9일. ○ 이광이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을 남원(南原)의 수성장(守城將)으로 임명하였는데, 권율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남원을 지키면서 도내 각 읍에 공문을 띄워 이광이 근왕(勤王)하는 데 오지 않은 죄상을 들어 공격하기로 하였다.

10일. 전라좌도 의병대장 고경명(高敬命)이 금산(錦山)에서 적을 토벌하다 패하여 전사하다. 하루 앞서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과 군사를 합하여 좌ㆍ우익을 만들어 금산 성문 밖 10리 지점에 나가 진을 쳤다. 고경명이 먼저 날랜 기병 수백 명을 발동하여 들락날락하며 적을 쏘아대는데, 군관 김정욱(金廷昱)이 말에서 낙상하여 후퇴해 달아나자 적의 군사가 그 기회를 타서 육박하므로 우리 군사가 차츰 퇴각했다.
석양 무렵에 이르러 적병이 성 안으로 들어가므로 고경명이 재주 부리는 사람 30여 명을 시켜 성 밑으로 토성(土城) 들어가게 하고, 성 밖의 관사와 민가를 모두 불태웠다. 또 진천뢰(震天雷 대포(大砲))를 쏘아 성 안의 창고를 불태우니, 적에게 사로잡혀 간 부녀자들이 물을 길어다 불을 껐다. 해가 저물자, 각기 군사를 거두어 진을 치고 지켰다.

이튿날 동틀 무렵에 관군ㆍ의병 여러 진이 적의 처소로 진격하였다. 고경명은 추촌(楸村) 앞산에 웅거하여 진지를 정하고 곽영은 사직당(社稷堂) 뒷산에 머물러 결진하여, 관군은 북문에서 싸우고 의병은 동문에서 싸웠다. 적의 무리가 마침내 진지를 비우고 나와 고함치는 소리가 하늘에 연이어지니, 형세가 바람 앞에 불길과 같았다. 먼저 관군에게 덤벼드니, 선봉장 영암군수(靈嵒郡守) 김성헌(金成憲)이 말을 달려 먼저 달아났다. 적이 인하여 광주(光州)ㆍ흥덕(興德) 등의 진을 육박하니, 곽영이 관망하다 도망해 달아났다. 의병의 진도 따라서 무너지고, 고경명 및 그 아들로 문신인 고인후(高因厚)와 종사관 유팽로(柳彭老), 장서기(掌書記)인 유학 안영(安瑛) 등이 다 죽었다. 고경명의 큰 아들 전 현령 고종후(高從厚)는 무너져 흩어질 적에 아버지와 아우가 죽은 것을 알지 못하고 무너지는 군사 속에 끼어 나왔기 때문에 죽지 않았다.

○ 그 후 고종후가 이적(李適)에게 답장을 냈는데 다음과 같다.

섬 오랑캐가 난리를 꾸며 임금께서 멀리 파천해 계시니 한 집안의 삼 부자가 함께 벼슬에 오른 이상, 재주는 비록 천박하나 차마 앉아서 국가가 전복되는 것을 볼 수 없어 도내 인사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것입니다. 저 고종후는 죽은 아우와 더불어 먼저 본주의 무너진 군사들을 개유시켜 거느리고 가서 수원(水原)의 진에 부속시키고, 장차 평양으로 향하려 하다가 길이 막혀 돌아왔습니다. 죽은 아우는 와서 담양[秋城]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날에 참여했고, 저 고종후는 여산(礪山) 중로에서 병이 들어 고생하다가 와서 태인현(泰仁縣)을 거쳐 폐한 금구현(金溝縣)에 당도하여 인원을 모집하는 한편, 바닷길로 격문을 제주도에 전하여 사슴 쫓는 빠른 말을 보내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죽은 아우는 선친(先親)을 모시고 전주[完山]로 향하여 남원 일대의 군사와 회합하고 저 고종후는 김제(金堤)ㆍ임피(臨陂) 등 고을을 경유하여 군사를 모집하고 군량을 수합해서 여산에 모이기로 기약했습니다. 죽은 아우는 또 전주로부터 휘하(麾下) 용사를 거느리고 진안(鎭安)ㆍ무주(茂朱) 등지에 복병하여 영남에서 침범하는 적의 군사를 막았고, 선친은 여전히 전주에 머물러 변을 대기하였던 것입니다. 얼마 안 되어 무주에 침범했던 적병이 도로 영남으로 향한 연후에야 비로소 군사를 정돈하여 북으로 올라갈 계획을 하고 삼 부자가 여산(礪山)에 모여 호서(湖西)ㆍ경기(京畿)ㆍ해서(海西)에 격문을 띄워 평안도에 전달되게 하고서 길을 떠나 은진(恩津)에서 유숙하고 장차 이산(尼山)으로 향하려 하는데, 황간(黃澗)ㆍ영동(永同)의 적이 금산(錦山)을 넘어왔다는 말을 듣자 휘하 군사들이 모두 돌아가서 본도를 구원하려 하였습니다. 상의한 끝에 연산(連山)으로 나가 주둔하여 험하고 굳건한 지대를 점령함으로써 양호(兩湖)의 군사와 양식을 바탕 삼아 서서히 적의 형세를 관찰하여 남으로 내려가든지 북으로 올라가든지 하자 하고, 마침내 연산으로 향하여 두 길을 보려고 했습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전주부의 형세가 날로 급하므로 부득이 군사를 옮겨 진산군(珍山郡)으로 들어갔다가, 진산에서 금산으로 들어가서 방어사와 군사를 합하여 좌우익을 만들어, 의병이 종일토록 고전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적에게 밀려 10여 리를 후퇴해 달아났다가 도로 적병을 토성(土城)에서 제압하여 성 밖의 객사(客舍)를 불태우고 진천뢰(震天雷)를 써서 성 안의 창고를 연소시키니, 적에게 사로잡혀 간 부녀자들이 힘을 합해 물을 길어다 불을 껐습니다. 관군이 만약 힘을 합하여 격전했다면 싸움이 하루도 다 걸리지 않았을텐데, 관군이 힘을 쓰지 아니하고 또 해가 저물자 싸움을 중지하니 방어사가 진산 군수를 보내 내일의 일을 의논하였습니다. 저 고종후가 부친께 말씀드리기를, “오늘은 우리 군사가 이득을 보았으니 이 이긴 기세를 타서 군사를 온전히 하여 회군했다가 형세를 보아 다시 와서 들락날락하며 적을 곤란하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적과 대치하여 이 밤을 묵는다면 밤중에 적이 쳐 들어올 염려가 있습니다.” 하였더니, 부친께서 말씀하시길, “너는 부자의 정으로써 내가 죽을까 두려워하는 모양이나, 나는 국가를 위하는 일인데 한 번 죽은들 무엇이 유감되랴.” 하시므로, 저 고종후가 감히 더 말씀드리지 못하고 물러났으며, 방어사는 이날 저녁에 여러 장수들 중에서 힘껏 싸우지 아니한 자를 치죄하였습니다. 적들은 이날 밤에 의병의 진영을 침범하기로 모의하고 있었는데 복병해 있던 우리 장교가 듣자니, 사람이 물 건너는 소리가 나므로 한 졸병을 보내 밭 가운데서 기다려 보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먼저 와서 밭 가운데 잠복해 있던 왜적이 이를 보고서 자기들의 계획이 의병에게 발각되었다고 여겨 마침내 후퇴해 달아났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진격하였는데, 적의 떼가 갑자기 자기 진을 비우고 몰려와 우리 방어진(防禦陣)의 여러 장수에게 덤벼드니, 영암 군수(靈嵒郡守) 김성헌(金成憲)이 대번에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나서 한 번도 맞서지 못하고, 광주(光州)ㆍ흥덕(興德) 두 진도 모두 포위를 당하자 방어진은 바라만보고 무너졌습니다. 의병의 큰 진은 방어진과 서로 바라보며 마주 진치고 있었으므로 이미 그들이 후퇴해 달아난 것을 알고, 오히려 단독으로 적을 당할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싸움에 나간 의병이 관군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드디어 퇴각해 달아나 중군진으로 들어와서 진중이 소란했으나, 아직도 든든히 마음을 갖고 대기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사람이 뒤에 와서 방어진을 바라보고 문득 놀라며 외치기를, “방어가 퇴각해 달아났다.” 하자, 의병의 진이 드디어 무너져 흡사 거센 물결이 가로지르는 듯하여 다시 억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의병의 진이 무너지지 않았을 때 선친은 맨 가운데 계셨고 저 고종후는 한쪽 가에 있었으며, 죽은 아우는 독전소(督戰所)로부터 와서 한쪽 가에 있었는데, 무너질 때 저 고종후의 말이 가시덤불에 걸려 넘어져서 말을 다시 굴레 지어 가노라니 여러 군은 이미 멀어져서 그 뒤를 따라 달려갔습니다. 그래서 부자 형제를 서로 잃고 홀로 구차히 살아서 오히려 말하고 밥먹으니 천지에 죄를 진 몸이라, 날로 신의 꾸지람을 기다릴 따름입니다. 선친이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말타기가 익숙하지 못하니 불행히 싸우다 패하면 오직 죽는 것밖에 없다. 우리들이 성공하고 못하는 것에 국가의 안위가 매여 있으니 어찌 한 몸의 화와 복에 그칠 따름이랴.” 하셨습니다. 군사가 무너지던 날 말에서 떨어져서 말이 빨리 달아나니 모시고 가던 유생(儒生) 안영(安瑛)은 작고한 판서(判書) 이후백(李後白)의 외손인데 말에서 내려 자기의 말을 바치고 걸어서 따라가다가 안영도 역시 적의 손에 죽었습니다. 종사관(從事官) 유팽로(柳彭老)가 건장한 말을 타고 먼저 나와서 그 종에게 묻기를, “대장이 포위망을 벗어났느냐?” 하니, 종이 답하기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였습니다. 유팽로가 즉시 고삐를 돌려 말을 채찍질하여 선친을 난군(亂軍) 속에서 시종하니, 선친이 돌아보고 말씀하시기를, “나는 반드시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먼저 나가지 않는가.” 하자, 유군이 대답하기를, “내 어찌 대장을 버리고 구차히 살려 하겠습니까?” 하고, 여러 번 말해도 선뜻 가지 아니하고 종시 보호했던 것입니다. 아! 통분하외다. 불초한 몸이 능히 전장에서 죽지 못하고 유독 두 열사로 하여금 선친과 같은 날에 죽게 하였으니 천지간에 한 죄인이라, 통곡밖에 무슨 말을 하리까. 아우는 뒤에 떨어져서 이미 무너진 군사를 정돈하려 하다가 진에서 죽었고, 군사들은 모두 먼저 달아나서 다행히 함께 죽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의병과 승군(僧軍)의 조력을 얻어 시체를 수습해 왔으며 선친도 변을 당한 즉시 몰래 산중에 매장했다가 역시 의병과 승군의 주선을 입어 입관(入棺)해 와서 두 상(喪)은 이미 고이 장사지냈으니 불초는 비록 죽어도 유감은 없습니다. 병든 몸이 항상 하루도 보전 못 할까 염려했었는데, 변란이 생긴 후에는 죽음을 기약하고 4월 이후로는 노상 말 위에 있었으며 비를 무릅쓰고 들판에서 잔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끝내 의병을 수행하다가 이 대고(大故 선친의 상(喪)을 말함)를 만나니 친구들이 모두 장사를 치루기 전에 죽지나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완악한 목숨이 조금 연장되어 무사히 장사를 치렀습니다. 이와 같이 구차히 산 것은 병든 어머님과 어린 아우를 위하려는 생각이요, 또 죽은 아우의 4남 1녀를 길러 그들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다만 병의 뿌리가 깊이 박혀 한 번 발작하면 비록 편작(扁鵲 중국 전국 시대의 명의(名醫))이라도 역시 손을 들 수밖에 없습니다. 호남의 의병이 두 번째 일어난 것은 대개 선친이 남긴 서업(緖業 사업)으로 인한 것이며, 용감한 군사와 건장한 말은 바로 선친이 제주도에 격문을 보내어 불러온 것입니다. 저 고종후가 그 군사를 따르려고 하니, 친구들이 모두 말하기를, “슬픔을 머금고 병든 몸을 부지하라. 반드시 죽어서 유익할 것이 없다.” 하며, 또 생각해 보니 이 몸이 한 번 죽으면 아버지의 친상(親喪)과 아우의 시체를 수습하는 일이 아우나 조카로는 외롭고 약하여 해내기가 어려우므로 참고 기다렸습니다. 장사를 지낸 다음날 영위(靈位)에 곡하고 떠나 의병의 도청(都廳)으로 가서 여러 친우와 일을 같이 하여 선친의 소원을 조금이나마 풀어 드릴 생각이며,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처분에 맡길 뿐입니다. 어버이 원수를 갚지 못하고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면 살아서 무엇하리까. 다만 한 번 분명하게 죽는 것이 원입니다. 운운. 부자 형제가 함께 전진(戰陣)에 있다가 패전을 당하여 서로 잃고 홀로 구차히 목숨을 유지하여 지금까지 천지의 사이에 숨을 쉬고 있으니 신명이 용서하지 못할 바라, 오직 한 번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지금 보내주신 편지를 받들어, 어머니를 모시고 적을 피하여 온 집안이 평안하심을 알았습니다. 저 고종후는 처자에 힘입어 보전하고 있으나 한결같이 비감할 따름입니다. 쇠한 병으로 본시 편한 날이 없었는데 또 이 대고(大故)를 만나니 비록 조금이나마 완악한 목숨을 연장하여 어머니와 아우를 보전하고 또 죽은 아우의 고아들을 기르고 싶으나, 기력이 끝내 지탱하지 못할 것을 스스로 두려워합니다. 부자간의 슬픔이란 남에게 말할 수 없거니와, 죽은 아우는 본시 활 쏘고 말 달리는 기술이 없었는데 한갓 구구한 충의로써 옷소매를 털고 일어나서 노상 건장한 군사를 거느리고 홀로 진의 전면을 담당하며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그는 노상 말하기를, “오늘날 일은 비록 제 몸을 희생하고 가족을 함몰시킬지라도 오히려 후회할 것이 없다.” 하여, 친한 이들은 대개 다 들었습니다. 그는 군사가 무너지자 뒤에 남아 목숨을 바쳤는데 무상한 이 몸은 홀로 몸뚱이를 보전하였으니, 못[池] 가에 봄 풀이 나면 혜련(惠連)의 꿈을 누가 꾸며 비바람 치는 한 밤중에 옛 언약을 어디서 찾으리오.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간장이 무너지나 그 영특한 모습은 눈앞에 완연합니다. 곧장 저승으로 따라 가고 싶으면서도 오히려 말하고 밥 먹으니 무슨 사람이라 하리까.

또 별지(別紙)에,

우리 온 집안이 무예(武藝)를 배우지 않은 것은 여러 사람들이 다 아는 바입니다. 오직 구구한 충의로써 인심을 격동해 일으키려는 것이었는데, 죽은 아우는 본래 의기에 찬 남아라 죽음을 결심하였습니다. 일찍이 적병이 조령(鳥嶺)을 넘은 뒤로 의병을 불러일으키고자 하여 형제가 함께 격문을 지었는데 그 대략에, “조령은 평탄한 길과 다름이 없고 한강(漢江)은 넓이가 허리띠 하나 만하니, 이때를 당하여 국가의 안위는 비록 대신에게 달렸지만 이처럼 방심해서 되겠는가. 모두 싸움터에 나가서 죽어야지.” 하였고, 또 이르기를, “2백 년을 이 땅에서 옷 입고 밥 먹은 것은 모두 여러 선왕이 생성(生成)해주신 은덕인데, 수천 리 예의(禮義)의 나라에 어찌 남자다운 사람 하나가 없단 말인가.” 하였으며, 그 끝 구절은 죽은 아우가 단독으로 지은 것인데 이르기를, “저놈들이 몰려들면 노중련(魯仲連)처럼 동해(東海)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전단(田單)이 제(齊) 나라를 도로 찾듯 하는 일을 바랄 뿐일세.”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역시 그 마음가짐을 징험해 알 수 있습니다. 격문이 완성되었으나 여러 친구들은 응종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본도 관군이 아직 온전하니 나라를 위해 싸우는 데는 군사가 모자랄 염려가 없으며, 서로 좋아하지 않는 자가 혹시 군사 일으킨 것을 가지고서 모함한다면 어찌하랴.” 하고, 우리 온 가족도 역시 이르기를, “격문을 띄웠으나 호응하지 않으면 유익은 없고 도리어 해가 있을 것이다.” 하여, 마침내 일을 중지하였습니다. 이광(李洸)이 금강(錦江)에서 군사를 후퇴한 뒤로 인심이 흉흉하여 장차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나주(羅州)의 김천일(金千鎰) 영공(令公)이 편지를 보내 다짐하며, 격문을 돌려 그 군사를 혁파한 연유를 들어 죄를 성토한 다음에 의병을 일으키려 한다 하였습니다. 저 고종후의 일가가 답보(答報)하기를, 순찰사가 나랏일에 성실하지 못한 것은 진실로 죄가 있다 하겠으나 이와 같이 처리한다면 사체에 어긋날 염려가 있으며, 더구나 순찰이 방금 다시 거사하는 마당에 있어 도내 선비들이 말을 모아 성토한다면 순찰이 도내를 호령할 수 없게 되는 동시에 군(軍)과 민간이 복종하지 않을 염려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김천일은 이광과 사돈 간이 되므로 절실히 권하여 순찰사로 하여금 최후의 효과를 거두도록 선도하여 과연 순찰사가 군사를 일으켰는데, 각 읍 백성들이 모두 말하기를, “금강(錦江)에서 아무 까닭 없이 진을 파하고서 지금 무엇하자고 다시 군사를 일으켜 백성을 괴롭히려 하는가.” 하며, 곳곳마다 흩어져 도망가 있었습니다. 국가에 대한 근심이 실로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므로 각 읍 관리와 선비들이 함께 설유하여 간신히 떠나 보냈으나, 도중에서 계속 없어져 산중으로 들어가기만 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의병을 일으킬 계획으로 한편으로는 민심을 진정시키고 한편으로는 대군을 계속 원조하려 하였습니다. 삼도(三道)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무너지고 의병은 격문을 돌려 북으로 올라가면서 근거지인 전주를 구원하려 하다가 금산에서 실패하였으니, 비록 공은 세우지 못했지만 당시에 만약 의병이 없었던들 호남 지방이 어육(魚肉)의 화를 입게 되었을 것은 왜놈이 들어왔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김천일 영공이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약속했으나 그 군사는 다만 나주(羅州) 한 고을에서만 징발하였기 때문에 먼저 출발하게 된 것이요, 가친은 몸소 다니며 여러 고을의 군사를 수합했기 때문에 맨 뒤에 출발하였습니다. 가친이 일찍이 편지에 이르기를, “적이 어찌 하루인들 호남을 잊으랴. 대개 반드시 근왕(勤王)하는 의병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기다리는 모양이다.” 하였습니다. 김 영공은 이미 북쪽으로 향하여 지금 강화(江華)로 들어갔고, 선친은 군사를 호서(湖西)에 머무르게 했던 초기에 본도에서 경보가 있어 조정에까지 멀리 가지 못하고 땅속에서 한을 품게 되었으니 아! 원통합니다. 선친께서 일찍이 가족에게 말씀하시기를, “금년에 천문[天象]을 본즉 장성(將星)이 좋지 아니하니 장수에게 반드시 이롭지 못한 일이 있으리라.” 하였으니, 그러고 보면 가친은 의병을 일으킬 때부터 이미 반드시 죽을 것을 각오하셨던 것입니다. 지난 해 7월에 선대에서 손수 심은, 집 앞의 큰 나무 두 그루가 바람에 뽑혔고, 금년 5월에 본 고을 객사(客舍) 향소문(鄕所門) 앞에 선 수백 년 된 고목이 또 바람에 뽑혀 향소문을 눌러서 문이 부서지고 담이 무너졌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괴이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어찌 알았겠습니까. 본 고을에서 의병을 먼저 일으켜서 내 한 집만 유독 그 화를 받을 것을. 아! 원통합니다. 이광이 두 번째 군사를 일으킬 적에 격문을 우리 집에 부탁하므로 우리 형제가 합작해서 글월을 이루어 보냈는데 도착하기 전에 다른 사람의 격문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는 다만 그가 과오를 인증하고 죄를 보상하여 국가에 충성을 다하기만 원했는데, 그가 도리어 의병에게 감정을 품고 선친이 국사에 몸바친 뒤에 장계를 올리면서 사실과 틀리게 했으며, 함께 죽은 여러 사람의 사적도 또한 자세히 기록하지 아니한 채 조정에 올렸으니, 조정에서 어찌 이 경위를 다 알 수 있으리까. 아! 원통합니다. 또 생각하건대, “태조(太祖)께서 대업을 창건하신 것은 실로 하느님의 뜻을 받드신 것이다. 압록강(鴨綠江)에서 군사를 돌이켜 대의가 천하에 빛났고 황산(荒山)에서 왜적을 무찔러 공덕이 강역을 덮었으니, 신령은 끝내 반드시 힘입을진대 은택을 어찌 잊을쏜가.”라는 이 글월은, 그 당시 격문 가운데 든 것인데 사람들에게 두루 알리고자 하여 아울러 기록해 올립니다. 이상은 모두《정기록》에 나온다.

○ 그 후 3년 만에 동궁(東宮)에서 치제(致祭)하였는데, 그 제문은 다음과 같다.

만력 22년 갑오년(1594, 선조 27) 정월 20일 기해(己亥) 왕세자(王世子)는 삼가 신하 익위사 부솔(翊衛司副率) 이희간(李希幹)을 보내어 증직 판서(判書) 고 공(高公)의 영에 제사를 드립니다. 대략(大略) 취해 읊은 3천 수의 시는 몇몇 곳에 벽사롱(碧紗籠) 있던 예전에 지은 것이요, 편의한 방략(方略) 12조목은 2번이나 고향에 남긴 사랑이로다. 국가의 다난한 때를 당하여 충의를 외치며 전장에 나섰구려. 옷소매를 걷고 일어서니 무부(武夫)들도 입이 닫히고 기가 눌리며, 당상에 올라 맹서하니 3군이 팔목을 내밀며 죽음을 결단했지요. 군중은 공을 맹주로 추대했고 사람들은 공의 의거를 흠모했소. 조정에서 군사를 훈련한 지 30년에 적을 토벌하는 것은 도리어 서생(書生)에게서 나왔고, 국가가 선비를 기른 지 2백 년에 충성을 바친 것을 다행히 이번에야 보았도다. 어찌하여 장성(長城)이 갑자기 무너졌는가. 마침내 일목(一木)이 지탱하기 어려웠구려. 혈전(血戰)을 벌여 천금의 몸을 범의 입에 몰아넣었고, 남아란 죽을 자리에 죽는거라, 7척의 몸을 홍모(鴻毛)보다 가벼이 여겼소. 큰 공을 중도에서 포기하고 장한 뜻을 품은 채 순절하다니, 일의 성패는 운명이니 다시 말해 무엇하리. 하늘이 착한 사람을 보답한다는 것을 누가 과연 측량하리까. 한 집안에서 나랏일에 죽은 자가 세 분이라, 1개월 사이에 화를 받은 것이 가장 혹심했소. 죽어도 썩지 않아서 영령의 상기도 남아 있으리니, 혼이여! 알거든 다 흠양하시라. 《정기록》에 나온다.

○ 그 후 윤근수(尹根壽)가 다음과 같이 서(敍)를 지었다.

아! 이 책은 임진왜란의 초기에 참의(參議) 고 공이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킬 적에 쓴 격문과 통문(通文) 및 왕복한 편지 등을 모아 만든 것이다. 글이 참의의 수필이 아니면 임피(臨陂) 형제의 수필로서, 한 집안 충의의 사연이 모조리 들어 있어 열렬한 기백이 말 밖에 넘치니, 아! 공경할 만한지고. 사라지는 강상(綱常)이 이에 힘입어 보존되었으며 직언(直言)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실천에 옮겼으니, 이야말로 신하가 국난에 임하여 절개를 다하는 행동을 권장한 것이 자못 무궁하다 하겠다. 아! 공이 그 아들과 함께 국가를 위해 싸우다 죽은 것은 실로 변성양(卞成陽 변호(卞壺))과 같은데, 문장으로 말하자면 변성양은 전하는 것이 없이 장원 급제한 몸으로 적의 손에 순절하였다. 공은 또 문신국(文信國 문천상(文天祥))과 같은데, 문신국의 두 아들은 다만 길 가에서 병들어 죽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또 공의 두 아들이 전후로 순절한 것에 비할 것이 아니니, 공의 한 집에서 이루어진 것이 어찌 보기 드물만큼 우뚝 뛰어났다고 이르지 않겠는가. 승명각(承明閣 옥당(玉堂))에 있을 적에는 사가(賜暇)를 받아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고, 노란 인끈을 띠고 큰 고을 맡아서는 청렴 결백으로 소문이 났으며, 가마귀 떼 같은 군사로 날래고 강한 적과 항거하여서는 다만 대의로써 격려했노라.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는지라 뜻과 같이 되지 않았으니, 몸을 던져 순절하여 마침내 충절로써 나타났네. 공이야말로 한 세상의 전인(全人)이 아니겠는가. 세상에서 날마다 문인(文人)더러 실용성이 적다고 헐뜯는 자가 많으나, 이를 보면 어찌 잘못된 생각이었다고 뉘우치지 않겠는가. 옛날 나일봉(羅一峯)이 문문산(文文山)의 첩(帖)에 발(跋)을 쓰면서 스스로 이르기를, “글자 하나에 눈물 한 방울이라.” 하였는데, 이 기록을 읽는 자는 글자 글자마다 울움이 터질 것이니 글자 하나에 눈물 한 방울 정도가 아니다. 을미년(1595, 선조 28)에 내가 영남(嶺南)을 다녀오다 봉성(鳳城)에 머물렀는데, 공의 아들 유후씨(由厚氏)가 나를 공의 지기지우(知己之友)라 하여 객관(客館)으로 찾아와 보고 이 책을 보이면서 책 이름을 지어 달라고 청하므로 나는《정기록(正氣錄)》이라 쓰고 아울러 서문의 청탁마저 허락했다. 그러나 이내 이루지 못하고 여러 해를 지나는 동안에 유후씨도 역시 세상을 떠났으니 슬픈 일이다. 지금 그 아우 용후씨(用厚氏)가 또 예전의 청을 거듭하는데 내 어찌 감히 죽은 이에게 허락했던 것을 이제 와서 그만두겠는가. 더구나 이로 인해 감개 무량한 바 있으니, 《정절집(靖節集 도잠(陶潛))》ㆍ《문산집(文山集 문천상(文天祥))》 등을 간행하게 한 것이 특명에서 나왔으며 바로 병란 직전의 일인즉, 성상의 깊으신 생각으로 오늘날이 있을 것을 짐작하시고 미리 절의를 배양하기 위해 생각한 것같이 되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과 서로 합치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라 하겠는가. 이 《정기록》이 세상의 교화에 관계되는 것이 실로 《문산집》 등과 더불어 나란할 것이니, 어찌 한 집안에만 수장하는 데 그쳐서야 되겠는가. 난리가 평정되고 의논이 문사(文事)에 미친다면 신하를 위해 충성을 권하는 것이 이 책보다 앞설 것이 없으니, 판각해서 세상에 반포하기를 나는 공수(拱手)하고 기다리는 바이다. 만력 기해년(1599, 선조 32) 10월 □일 수충공성 익모수기 광국공신 보국숭록대부 해평부원군 겸지 경연사(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輔國崇祿大夫海平府院君兼知經筵事) 윤근수(尹根壽)는 서(敍)함. 《정기록》에 나온다.

○ 비문(碑文)은 유명 조선국 증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판의금부사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행 통정대부 공조참의 지제교 겸 초토사 고공 신도비명(有明朝鮮國贈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行通政大夫工曹參議知製敎兼招討使高公神道碑銘)이라 하다. 만력 임진년(1592, 선조 25)에 나라에 왜난(倭難)이 있자 참의 고공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온 절개를 나타냈다. 이윽고 십여 년이 지났으나 신도비문이 아직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하루는 공의 자제 용후(用厚)가 나를 찾아보고 청하기를, “선친이 공의 형제와 종유한 바 있으니 선친이 나랏일에 몸을 바친 전말은 공께서 분명히 아는 바이므로, 감히 공의 비문 한 장을 얻어서 이 사적을 묻히지 않게 하는 것이 원입니다.” 하고, 또 그 자당의 명을 말하였다. 아! 공의 사적을 이야기하면 눈물이 나며 슬픔이 그지없으니, 내 비록 글은 잘 못할망정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왜적이 크게 몰려와 침범할 즈음에 공은 광주(光州) 향리에 있었다. 우리 군사가 싸울 적마다 무너져 조령(鳥嶺)의 요새를 잃어버리게 되었는데 호남 순찰사가 왕실(王室)을 호위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공은 홀로 아들 고종후(高從厚)ㆍ고인후(高因厚)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했다. 이윽고 또 임금께서 서도로 파천하시고 도성(都城)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공은 밤낮으로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순찰사가 근왕병(勤王兵)을 영솔하고 금강(錦江)에 당도하자 서울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허둥지둥 진을 파하여 온 도내 인심이 흉흉하였다. 공이 순찰사에게 편지를 보내어 뒤에라도 잘하도록 책망했는데 말이 진지하고 절실했으나 반성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공은 국가가 기울어 가는 것을 통분하게 여기고, 나주 사람 전 부사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흥복(興復)할 것을 계획하며 편지 왕래가 많았다. 공은 맨 먼저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5월 무자일에 담양부(潭陽府)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옥과(玉果) 사람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 등이 공을 추대하여 맹주(盟主)로 삼으니, 공은 본시 군사면에 익숙하지 못하지만 개연히 장단(將壇)에 오르며 늙고 병든 것으로써 사양하지 않았다. 그리고 도내에 격문을 발송하여, 모집에 응한 자가 날마다 모여 들었다. 6월 기해일에 공이 담양부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나섰다. 이때 삼도(三道)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무너져 호서(湖西)ㆍ호남이 더욱 흔들렸는데 유독 공을 의지하여 자중했다. 공은 전주로부터 군사를 정돈하여 북으로 올라가 여산(礪山)에 당도하자 손수 격문을 초하여 여러 도에 고하여 관서(關西)로 도달하게 했다. 공이 장차 이산(尼山)으로 향하려 하는데, 적이 황간(黃澗)으로부터 금산(錦山)으로 넘어올 때 군수가 패전하여 죽었으므로 적의 형세가 더욱 성하다는 소식을 듣자, 부하 군사들이 앞다투어 돌아가 본도를 구원하고자 하였고 공도 역시 그렇게 여겼다. 7월 경신일에 공이 마침내 군사를 진산(珍山)으로 옮겨 금산의 적을 치려 하는데, 날랜 군사로 모집에 응한 자가 갈수록 많아서 군(軍)의 기세가 더욱 떨쳤다. 병인일에 드디어 장병들에게 부서를 정하여 금산으로 들어가서 방어사 곽영(郭嶸)과 더불어 좌ㆍ우익이 되었다. 공이 먼저 정병 수백 기(騎)를 보내어 곧장 적의 소굴로 내닫게 하였는데, 그들이 적에게 눌려 후퇴하게 되었다. 공이 북을 울려 싸움을 독려하니, 군사들이 모두 죽음을 걸고 싸워 도로 적병을 토성(土城)에서 제압했다. 성 밖의 관사(館舍)를 불태우고 또 대포를 쏘아 성 안을 연소시키자 기세가 올랐다. 적이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해 나오므로 의병이 사면으로 포위 공격하니 적은 사상자가 많아서 감히 더 나오지 못했다. 마침 날이 저물고 관군이 또 싸움에 조력하고자 아니하였으며, 토성이 두텁고 완전하여 졸기에 무너뜨릴 수 없으므로, 마침내 퇴군하여 진으로 돌아왔다. 이날 저녁에 방어사가 사람을 보내어 명일에 협력하여 싸울 것을 약속하니, 공의 맏아들 고종후가 공에게 말하기를, “오늘 우리 군사가 이득을 보았으니 이 승리의 기세를 가지고 군사를 온전히 하여 돌아갔다가 기회를 살펴 다시 나와 적을 곤란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며, 적과 대치하여 들에서 잔다면 혹시 야습(夜襲)을 당할까 염려됩니다.” 하자, 공이 말하기를, “너는 부자의 정으로써 나 죽는 것을 두려워하느냐. 나는 나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이 직분이다.” 하다. 이날 밤에 적이 과연 침범하기를 모의하고 몰래 나와 복병을 설치하려 하다가 순라군(巡羅軍)에게 발각되었다. 이튿날 정묘일에 공이 방어사와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는데, 공은 적과 5리쯤 떨어져서 진을 머물러 방어의 진과 마주 보게 되었다. 공이 8백여 명의 기병을 보내어 싸움을 걸어 미처 어울리지 못했는데, 적이 자기네 진지를 비우고 몰려 나와 먼저 관군에게 범하니 방어사 관하 장수 김성헌(金成憲)이 말을 채찍질하여 먼저 도망갔다. 적이 광주(光州)ㆍ흥덕(興德) 두 진을 덮치니 방어의 진이 그 바람에 따라 무너지므로 공은 단독으로 담당할 계획을 하고 군사로 하여금 모두 자신만만하게 가지고 대기하게 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갑자기 외치기를, “방어의 진이 무너졌다.” 하니, 의병의 진도 따라서 무너졌다. 공은 진작부터 하는 말이, “나는 말타기가 익숙하지 못하니 불행히 싸움에 패하면 오직 한 번 죽음이 있을 뿐이다.”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좌우에서 공더러 말을 타고 뛰라고 청하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구차히 죽음을 모면하려 하겠는가.” 하였다. 공의 부하가 공을 부축하여 말에 올려 앉혔는데, 공은 이내 말에서 떨어지고 말은 빠져 달아나므로 공의 부하 유생(儒生) 안영(安瑛)이 말에서 내려 공을 태우고 자기는 도보로 시종했다. 공의 종사관(從事官) 유팽로(柳彭老)가 탄 말은 몹시 날래서 먼저 나오게 되어 그 마부에게 묻기를, “대장이 벗어났느냐?” 하자, 마부가 벗어나지 못했다고 대답하였다. 유팽로가 문득 말을 몰고 도로 난병(亂兵) 속으로 들어가 공을 모시니, 공이 돌아보고 말하기를, “나는 반드시 면하지 못할 것이니 너는 빨리 벗어나라.” 하니, 유팽로가 대답하기를, “제가 어찌 차마 대장님을 버리고 살 길을 찾겠습니까.” 하였다. 적의 칼날이 마침내 공에게 미쳐 공이 결국 죽고 유팽로는 제 몸으로 공을 막다가 다 함께 죽었으며, 안영도 죽었다. 공의 둘째 아들 고인후(高因厚)가 무사(武士)를 거느리고 앞 줄에서 화살과 돌 속을 출입하다가 군사가 무너지자 말에서 내려 그 부하들을 정제하고 진에서 전사했다. 근처 고을 백성들은 공이 패했다는 말을 듣자 노소간에 모두 짐을 짊어지고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우리들은 이제 다 죽었다.” 하며, 곡성이 들판에 진동하였다. 진은 무너졌으나 군사들이 공의 생사를 모르고 차츰 와 모였는데, 마침내 공이 전사했다는 사실을 알고 모두 울부짖으며 해산했다. 남도 백성들은 알건 모르건 간에 다 서로 조문하며 원통하게 여겼다. 공이 백발 늙은 서생으로 국가가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정의를 부르짖고 일어서서 호남 의병의 선창이 되자, 비록 어리석고 조급한 군졸이나 산중에 도피한 자들이 모두 소문을 듣고 다투어 모여들어 한 달 이내에 의병의 수효가 수천 명에 달했으니, 대개 공의 의기가 지성에서 우러나서 남을 감동시킬 만했기 때문이다. 공이 임진년(1592, 선조 25) 봄에 천문(天文)을 쳐다보고 집안 사람에게 말하기를, “금년에 장성(將星)이 좋지 않으니 장수에게 반드시 불리한 점이 있을 것이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공은 진실로 생사의 이치에 밝음과 동시에 의거하는 날부터 벌써 목숨을 던질 것을 결정했던 것이다. 마침내 금산에 있는 왜적을 토벌하게 되자 사위 박숙(朴橚)에게 편지를 주어 집안일을 부탁하였으니, 공이 처사한 것을 보면 대개 본래부터 마음을 결정했던 모양이다. 왜적이 금산에 웅거해 있을 적에 병권을 장악한 문신ㆍ무신의 장수들이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방황하고 있는데, 유독 공은 일의 성패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친히 범의 소굴로 들어가서 적과 더불어 혈전(血戰)을 벌여 몸을 나라에 바쳐 순절했다. 비록 승첩을 올려 공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공이 순절한 후로 공이 전장에 나가 죽는 것을 보고서 적을 공격하는 자가 계속해 일어났기 때문에, 적이 비록 여러 번 이겼으나 사상자가 역시 반을 넘었으며 군사를 거두어 가지고 밤에 도망했은즉 국가에서 호남을 보유하여 뒷날 국토를 회복하는 근거지가 된 것에 대하여 그 공이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공의 체백(體魄)이 몰래 금산 산중에 묻혔었는데, 적의 군사가 가로막고 있어 바로 곧 거두어 묻지 못하고 8월 모일에야 그 아들 고종후(高從厚) 등이 의병ㆍ승병(僧兵)을 청하여 공의 시체를 발굴해 내서 무릇 40여 일만에 비로소 염습했다. 성상께서 용만(龍灣)에 계시던 날에 공이 의병을 일으켜 온다는 말을 들으시고 기뻐하는 빛이 얼굴에 가득하여 공에게 공조참의 겸 초토사(工曹參議兼招討使)를 제수하고 글월을 내려 위로했는데 그 글월에, “열읍(列邑)을 지휘하여 모든 것을 조달해서 도성을 회복하게 하라.” 하신 말이 있었다. 이때에 공조 좌랑(工曹佐郞) 양산숙(梁山璹)이 행재소(行在所)로부터 남으로 돌아오게 되자, 성상께서 면대하여 타이르시기를, “돌아가거든 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에게 말하라. 그대들이 하루빨리 강토를 회복해서 나로 하여금 그대들의 얼굴을 볼 날이 있게 하라.” 하였는데, 벼슬이 전달되기 전에 공은 이미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이 사실이 보고되자 성상께서는 매우 슬퍼하시고 관작을 위에 있다. 추증하도록 명령했으며, 뒤에 다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의 증직을 내렸다. 공이 순절하자 순찰사는 예전 혐의로써 심지어, “어두운 밤에 군사를 몰고 가다가 군사가 무너져 죽었다.” 하며, 공을 모함하여 장계를 올렸는데 그 이후 이정엄(李廷馣)이 순찰이 되어 공을 표창하여 나랏일에 죽었다는 장계를 올렸다. 그 글에, “고 모는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켜 근왕(勤王)에 나섰으며 몸소 적의 진지에 들어가 적과 혈전을 벌이다가 불행히 패하여 부자가 함께 죽었다.” 하여, 비로소 그 실상을 파악했다고 한다. 을미년(1595, 선조 28) 여름에 유사(有司)를 명하여 정문(旌門)을 세우게 했고, 신축년(1601, 선조 34) 가을에 문생 전 현감 박지효(朴之孝) 등의 상소로 인하여 특명으로 광주에다 사우(祠宇)를 건립하게 하여 액호(額號)를 포충사(褒忠祠)라 내리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고 이어 봄가을로 제향을 받들어 대대로 끊어지지 말게 하라고 했으니, 아! 이로써 군신 간의 의를 볼 수 있다. 공의 휘(諱)는 경명이요, 자(字)는 이순(而順)이며, 파계는 제주(濟州)에서 나왔는데, 그 선세에서 장흥(長興)으로 관향(貫鄕)을 받아 장흥 고씨가 되었다. 가정(嘉靖) 계사년(1533, 중종 28) 11월 30일 무진일에 태어났으며, 아들 6형제를 두었다. 맏아들은 고종후인데 정축년(1577, 선조 10)에 무과(武科)에 급제했으며 상차(喪次)로부터 군사를 일으켜 아비의 원수를 갚기로 맹서하고 영(嶺) 밖에서 전전(轉戰)하여 싸우다가 진주성(晉州城)이 함락되자 강에 빠져 죽었다. 그 후에 도승지(都承旨)의 증직을 내렸다. 그리고 그 다음은 곧 고인후이니 기축년(1589, 선조 22)에 문과에 급제했으며 공을 따라 함께 진중에서 죽어 예조 참의(禮曹參議)의 증직을 내렸다. 운운. 윤근수(尹根壽)는 찬(撰)함.

○ 그 후 또 치제하였는데 그 제문은 다음과 같다.

만력 31년 계묘 8월 모일에 국왕(國王)은 신하 호조 정랑(戶曹正郞) 조엽(趙曄)을 보내 판서 고경명의 영(靈)에 제사한다. 영은 성화(聲華)가 일찍부터 드러나고 재주와 학식이 다 우수하며, 문필은 천 사람보다 뛰어나고 가슴속에 수만 군사가 들었었네. 선(先) 조정에 뽑히어 무오년(1558, 명종 13)에 문과 했다. 여러 번 장솔(張率)의 벼슬에 옲겼고, 중간에 이르러 침체되어 안진경(顔眞卿)의 얼굴을 보지 못했도다. 하루아침에 왜적이 침입하자 여러 고을이 파도처럼 휩쓸려서 곽주영(郭州營) 안에 성유(成裕)처럼 모두 밤에 도망을 치니 수양성(睢陽城) 안에 장순(張巡)마냥 사수할 자 누구던가. 유독 의기를 분발하여 군사를 모아서 목숨을 바쳐 나라에 보답하려고 맹서했네. 성지(城池)나 무기가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으니, 어느 누가 몰아치는 오랑캐를 막아내리오. 먼 데나 가까운 데나 크나 작으나 모두 호응하니, 실로 의열(義烈)을 먼저 외친 때문이로다. 외로운 충성을 스스로 허락하는데 한 번 죽는 것이 어찌 어려우랴. 정의의 군사란 강한지라, 순(順)과 역(逆)이 이미 구별되었다. 곧은 편은 언제나 씩씩한 법이라, 많고 적은 것으로 어찌 따지리오. 피를 마시고 단에 오르며, 주먹을 들고 칼날을 무릅썼네. 싸움을 잘못한 탓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과연 알기 어려운 법이라오. 죽을 곳을 얻었으니 글 읽는 선비더러 담력 없다 이르지 마오. 충효(忠孝)의 대절(大節)은 부자(父子) 세 사람일세. 매양 묘소를 수축할 겨를이 없어 한이더니, 이제 영을 모실 곳이 있음을 기쁘게 여기네. 사당 모양이 매우 엄숙하니 족히 절개 굳은 장부의 기풍을 상상할 만하고, 향화(香火)가 해마다 끊어짐이 없으니 한 고을 선생으로 제사하는 정도가 아니외다. 이는 조정에서 거행한 것이 아니라, 바로 선비들의 주선에서 나왔구려. 절개를 천추(千秋)에 표시하고자 하니 사당이 어찌 편액(扁額)이 없을쏜가. 포충(褒忠)이란 두 글자를 내리니 실상과 이름이 서로 알맞네. 시골 마을이 찬란하여 빛이 나니 어찌 조청헌(趙淸獻 조림(趙林))의 이표(里表)에 비할 뿐이랴. 길손이 손으로 가리키며 눈물을 떨어뜨리니 반드시 현산(峴山)의 귀부(龜趺 양고(羊祜)의 비석돌)만이 아니로세. 제사를 드리기 위해 조관(朝官)을 보내는데 관작을 추가(追加)함에 있어 판서(判書)가 오히려 부족하오. 천운이라 어찌하리, 정충(精忠)은 구천에서 다시 보기 어려우리니, 혼이여! 돌아와서 박한 제물이나마 한 잔 술에 흠양하시라. 모두《정기록》에 나온다.


○ 송제민(宋濟民)의 격문은 다음과 같다.

삼가 나 송제민(宋濟民)이 지난달 23일에 의병장을 따라 수원산성(水原山城)에 당도하여 5일 동안 머물렀는데, 서울에 있는 적이 아직 치성하고 청주(淸州)ㆍ진천(振川) 등지의 유동하는 적이 역시 날뛰는데 외로운 군사로 깊이 들어가면 군량을 수송하지 못할 염려가 있었으므로, 온 진중이 모두 비생(鄙生)을 추천하여 충청도로 가서 의병을 모집하여 길을 막고 있는 적을 소탕하고, 구원 오는 군사를 통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와서 충청도의 사우(士友)들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한 바 20일 사이에 정병 2천여 명을 얻어서 공론에 따라 전 도사(都事) 조헌(趙憲)을 추대하여 좌의대장(左義大將)을 삼아 황간(黃澗)ㆍ영동(永同) 이하의 적을 방어하게 하고, 전 찰방(察訪) 박춘무(朴春茂)를 우의대장(右義大將)으로 삼아 금강(錦江) 이상의 적을 방어하게 하려던 것이었는데, 일을 미처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금산(錦山)의 패보(敗報)를 들었으니 시운인가, 천명인가, 그렇지 않으면 인사(人事)를 제대로 극진히 하지 않은 탓인가. 말을 돌이켜 남쪽으로 돌아와 의병이 흩어지기 전에 다시 또 소집해 볼 계획이었는데, 은진(恩津)에 당도하자 비로소 대군이 흩어져 어찌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아! 사람이 누군들 죽음이 없으리오만 죽을 자리를 얻어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섬 오랑캐가 한창 극성을 부리던 날을 당하여 강병과 용장들도 역시 모두 관망하지 않으면 달아나서 구차스레 목숨을 유지하는데, 고제봉(高霽峰)은 유아(儒雅)한 문관으로서 본시 군사면에 대한 일을 알지 못했으나 하루아침에 군중의 추대를 받아 문득 장단(將壇)에 올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임금에게 보답했다. 그 아들은 아비를 따라 죽어서 충성과 효도가 아울러 한 집안에 났으니 죽어도 영화가 남아서 열렬한 빛이 있는지라, 사람마다 한 번 죽음은 있는데 고제봉은 유독 그 도리를 다하고 그 자리를 얻었으니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만 깊이 애통할 일은 임금님께서 서도를 순행하시고, 종묘와 사직이 잿더미가 되었으며, 조선 7도가 모두 흉한 왜적에게 유린을 당했는데 오직 호남 한 도만이 아직까지 다행히 보전되었으니 국가를 회복할 기본이 실로 이곳에 있거늘, 장수는 태만하고 군사는 교만하여 걸핏하면 무너져 흩어지고 마는 것이다. 대개 창의한 후부터 인심이 비로소 진정되어 모두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번 싸워 패하자 의기가 꺾여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빠져 도리어 나태한 장수와 교만한 군사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아! 저 완악하고 패역한 군졸들이 공(功)을 좋아하고 이욕을 탐내어 유익하면 나가고 해로우면 피하는 것은 본시 그들의 제 몸을 꾀하는 상투 수단이라, 무엇을 책하며 무엇을 나무라겠는가마는, 일찍이 호남은 예의의 지방으로 선왕이 휴양(休養)해 주신 은혜에 젖은 지가 수백여 년인데 평시에 선비라 자칭하여 인의(仁義)를 자랑하는 자들도 이미 공명만 탐내어 피하기를 꾀하며, 수천의 굳센 졸병들도 일시에 무너져 흩어져서 한 사람도 장수의 죽음을 막아낸 자가 없으니 이 어찌 무식한 무리들의 웃음거리만이랴. 실로 흉한 오랑캐에게 부끄럼이 될 것이다. 아! 피를 입에 바르고 장수에게 다짐하던 추성(秋城 담양)의 부정(府庭)이 저기 있고, 마음으로 천지 신명에게 맹서하여 밝은 해가 내리비침이 저러하니 모르겠도다. 장차 무슨 면목으로 천지간에 용납을 받을 것인가. 아! 인의가 마음에 박힌 것은 실로 하늘에서 받은 바라 다른 사람이나 나나 마찬가지이니 진실로 피차의 다름이 없지만, 물욕에 팔리어 그 본심을 상실한 자가 간혹 있으니 사람의 형상을 하고 짐승의 마음을 지닌 자도 역시 있을 것인 즉, 충성과 효도를 어찌 사람들 모두에게 책할 수 있으랴. 그러나 이 왜적을 토벌하는 일은 역시 불충하고 불효하는 자들도 함께 원하는 바이니, 어찌 충신이나 의사의 사사로운 원수일 뿐이겠는가. 이미 당한 바를 들어 말하면 남의 처자 자매를 잡아다가 열 놈이 다투어 간음하여 죽게 하는 일이 잇달아 일어나고, 부형을 찔러 죽이고 아이들을 삶아 죽이며, 동네 인가를 불태우고 재물을 약탈하며, 남의 소와 말을 몰아가고 남의 노복을 부려먹으며, 좋은 전답을 탈취하고 남의 선산을 헐어 버리어 궁흉 극악(窮兇極惡)이 천지에 가득 차니 무고한 백성들이 난을 피해 도망가다 길가에 넘어지고 구렁창에 빠져 죽어 그 수효가 몇천만 명인지 헤아릴 수 없는 정도다. 요즘 7도(道)가 탕진되고 또 5고을이 함락되었는데, 그 5고을은 실로 호남의 함곡관(函谷關) 같은 존재로 사방이 막혀서 산을 의지해 험하고 굳건하니 이쪽에서는 공격하기 어려운 점이 있고, 저 왜적놈들은 팔을 내뻗는 편리함이 있다. 이 형세를 따지면 이미 쉽고 어려운 차이가 있으며, 우리 군사는 이제 막 꺾이어 사기가 □저상되고 적은 이미 승세를 탔으니 왜의 세력은 저절로 확장될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웅현(熊峴)의 혈전(血戰)에 힘입어 적의 기세가 조금 꺾였고 전주가 방비 태세를 갖추고 있으므로, 놈들이 힘을 요량하여 스스로 물러가니 형세가 몰아 쫓아낼 가망이 있다. 호서(湖西)의 의병이 은진(恩津)ㆍ연산(連山)ㆍ진안(鎭安)ㆍ옥구(沃溝)를 옹위하여 수비하는 품이 질서가 있고, 대장 조헌(趙憲), 참장(參將) 이천준(李天駿)이 시대에 부응하는 인물로서 천심을 측정하고 시국을 관찰하여 적을 요량해서 승리를 결정하여 옛사람에게 못지 않다. 형세상 놈들이 서쪽으로나 북쪽으로 달아나지는 못할 것이며 반드시 무주(茂朱)를 경유하여 동으로 영남을 향해 도망갈 것이나, 김(金)ㆍ곽(郭) 두 장수가 군사를 쓰는 것이 귀신과 같아서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할 것이니 반드시 영(嶺)을 넘어서지 않으려 들 것이며, 중국 군사 5만 명이 우리 근왕(勤王)의 군사와 함께 천지를 뒤흔들며 북으로부터 남으로 내려오면 송도(松都)ㆍ한양(漢陽)에 있는 적의 도망병과 충청도에 있는 적의 남은 부대가 내리 밀려서 돌아갈 길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금산(錦山)의 적과 합세하여 서ㆍ남으로 충돌하되 궁지에 빠진 신세라 죽음을 걸고 달려들 것이니, 후퇴하기 좋아하는 장수로 무너지기 잘하는 군사를 몰아친다면 어찌 반드시 지탱할 것을 보장하랴. 이것이 실로 호남 부로(父老)와 사민(士民)들의 막대한 근심거리인 것이다. 아! 옛사람은 천하의 백성을 나의 동포로 삼았는데 하물며 우리 본도 선비들은 조상 때부터 이 땅에서 태어나고 이 땅에서 살았으니 선인들의 혼백이 깃들여 있는 곳이요, 부모 처자가 편안히 살던 곳이요, 형제 자손들이 생식(生息)한 곳이요, 이웃 친구들과 교유하던 곳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변을 만나 오랑캐 놈들의 신첩(臣妾)과 노복(奴僕)이 된다면 이 이상의 욕됨이 있겠는가. 한 번 죽는 것이 오히려 영광일 것이다. 더구나 흉한 참변이 계속되어 골육과 친척이 함께 적의 손에 도륙됨에 있어서랴 기왕 죽을 바에야 오히려 적과 싸워서 죽는 것이 낫지 않은가. 이제 만약 한 번 싸움을 피하고 반드시 살 길을 찾고자 할진대 그 살 길을 마침내 얻지 못한다면 오늘날 같은 참화가 있을 뿐이요, 그렇지 않고 한 번 싸움을 결심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꼭 죽을 이치도 없는 것이며 결국 참혹한 화를 면하고 길이 무궁한 복을 받을 것이니, 이는 모두 절박하여 결코 그만둘 수 없는 거사이다. 어찌 반드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이 우러난 연후에만 그러하겠는가. 아! 배를 함께 타다 물에 빠지면 서로 건져주는 것은 호(胡)와 월(越)도 한 마음이라 했는데, 무릇 한 도(道) 안에서 함께 사는 우리로서는 실로 배를 같이 탄 형세로서 서로 물에 빠질 염려가 조석에 임박했으니, 비록 호ㆍ월의 사람이라도 부득불 마음과 힘을 일치하여 어려움을 면해야 하겠거늘 하물며 산천의 기품(氣稟)이 서로 흡사하고 학문의 취향도 서로 같아서 실로 형제의 의(義)가 있은즉 옛사람이 이른바 막연한 동포라는 말 따위에 그칠 바가 아니다. 무릇 우리 도내 각읍 부로(父老)들은 아비가 그 자식을 권장하고 형이 그 아우를 권면하여 지조와 절개를 가다듬고 다시 의병을 일으켜 흉한 칼날을 막아서, 위로 임금의 원수를 갚고 사람과 귀신의 분을 씻으며 아래로 부모를 봉양하고 처자를 보전하여 길이 그 가업을 편안히 하면 천만다행일 것이다.

○ 호성감(湖城監)이 양호(兩湖)에서 군사를 수합하여 2천여 명을 얻어 아산(牙山)을 경유하여 서해(西海)로 배를 타고 행재소(行在所)로 향하여 근왕(勤王)의 길을 떠나다.

○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이 남원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진안으로 향하다가, 순찰사가 다시 나누어준 군사를 진산(珍山) 이현(梨峴)으로 전진시켜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 등과 더불어 험한 곳에 웅거하여 복병을 설치하다.

○ 금산의 적 수천여 명이 진산(珍山)에 들어와 불을 지르고 약탈하니 이현(梨峴)의 복병장(伏兵將)인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 동복 현감 황진 등이 군사를 독려하여 막아 싸웠다.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금 퇴각하는 바람에 적병이 진채(陣寨)로 뛰어드니 우리 군사들이 놀라 무저지는지라, 권율이 칼을 뽑아들고 후퇴하는 아군을 베며 죽음을 무릅쓰고 먼저 오르고 황진도 역시 상처를 움켜쥐고 다시 싸워 우리 군사 한 명이 백 명의 적을 당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적병이 크게 패하여 기계를 다 버리고 달아났는데 30여 명을 베었다.


○ 좌의병(左義兵) 진중의 사자(士子)들이 흩어진 군사 8백여 명을 소집하여 전 화순 부사(和順府事) 최경회(崔慶會)를 추대하여 맹주(盟主)로 삼고 금월 26일 광주에서 기고(旗鼓)를 세웠는데, 골(鶻) 자로 장표(章標)를 만들었다. 우도(右道)로부터 군사를 모아 남원으로 향하면서 우의병(右義兵)이라 일컬었다. 거사하던 날에 여러 군(軍)에 다음과 같이 통시(通示)하였다.

한 사람을 상 줌으로써 천만 사람을 권하는 것이다. 지금 의병의 패전에 유학(幼學) 안 영(安瑛)은 그 주장이 탄 말이 놀라는 것을 보고서 자기가 탄 말을 주장에게 주어 대신 타게 하고 도보로 포복(匍匐)하다가 달갑게 죽음을 당했으며,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는 왜적의 칼날이 어지럽게 번쩍일 때 노복들이 모두 달려나가 적의 칼날을 피하라고 간청하자, 성내어 거절하며 말하기를, “내가 만약 달아난다면 주장을 어느 곳에 두겠느냐.”하고, 그 주장의 노복이 다 흩어져서 말이 전진할 수 없음을 보자 자기 종을 명하여 주장을 보호해서 나가게 함과 동시에 자신이 뒤를 따라 적을 막다가 갑자기 칼에 맞아 죽었다. 아! 인심이 극도로 어지러운 이즈음을 당하여 임금을 배반하고 나라를 잊어버리며 목숨을 탐내어 구차히 살아가는 것이 곳곳마다 다 그러하고, 윗사람에게 친히 하며 어른을 위해 죽는 일은 전혀 들을 수 없는데, 이 두 사람은 이익을 꾀하거나 공을 계산하는 마음이 없어서 마침내 목숨을 버리고 의(義)를 취하여 분연히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만약 급급히 그 절의(節義)를 드러내어 한때의 이목(耳目)을 솟구치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꺾여진 사기를 일으켜 세우며 무너진 강상(綱常)을 붙잡을 수 있으랴. 일이 시급하지 않은 것 같지만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하니, 바라건대 각 읍 향교(鄕校)ㆍ향소(鄕所)에 각각 부물(賻物)을 거두어 되는 대로 사람을 시켜 그 집에 조문하고, 의거(義擧)한 뒤에 그 해골을 거두어 제사를 드리고 말미를 갖추어 위에 아뢰어 정문을 세워 의기를 고무시키도록 하라.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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