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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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헌 김공(金公)의 신도비명

간이집 제2권 /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국가가, 아조(我朝) 선조(先祖)의 계보(系譜)가 무함을 받은 채로 중국 조정의 전책(典冊)에 실려 있는 것과 관련하여, 이를 해명하면서 고치려고 노력해 온 것이 무려 2백 년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황제의 윤허를 이미 받기는 하였으나 이를 개정하여 다시 간행하는 일은 아직 완결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이 임무를 띠고 중국에 건너가는 사신을 선발할 때에는 반드시 문학으로 이름난 인사 중에서 엄선하곤 하였다.

그러다가 만력 신사년(1581, 선조14)에 이르러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대사간(大司諫)으로 있으면서, 이 일을 전담할 사신을 다시 한 번 더 중하게 보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으므로,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있던 김공(金公)을 주청사(奏請使)로 삼아 파견하게 되었다. 이때 상이 유지를 내려 공이 직접 서장관(書狀官)과 질정관(質正官)을 뽑아 같이 가도록 허락해 주었는데, 그 결과 사문(斯文) 고경명(高敬命)과 내가 공과 함께 동행하게 되었다.

공으로 말하면, 학문에 널리 통하고 식견이 고매하여 문교(文敎)를 숭상하던 그 시대에 뭇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던 그런 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신의 일과 관련하여 문자를 작성할 적에는 반드시 나와 고 사문에게 자문을 구하려고 하였고 자기의 주장을 한 번도 내세운 적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물러 나와서는 그윽이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자기 주장보다는 항상 남의 의견을 들으려고 노력을 하니 이는 대신(大臣)의 도량이라고 하겠다. 아마도 공이 언젠가는 반드시 정승이 되고 말 것이다.” 하였다.

임오년(1582)에 복명(復命)을 하고 나서 또 식자(識者)들의 언론을 들어 보니 모두 말하기를, “공이야말로 고금(古今)을 통달한 데다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 만큼 뒷날 정승이 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율곡 공(栗谷公)이 특히 이러한 점을 극구 이야기하였다.

4월에 공이 특진관(特進官)으로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했다가 중풍(中風)이 발작하는 바람에 수레에 실려서 집에 돌아왔다. 이에 상이 내관(內官)을 보내 수시로 병증(病症)을 하문하고 호피(虎皮)를 지급하기까지 하였는데, 이날 밤에 그만 공이 세상을 뜨자 관곽(棺槨)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그러고 나서 얼마 뒤에 율곡 공이 경연 석상에서 아뢰기를, “김모(金某)는 재질이 뛰어난 데다 몸가짐이 청백(淸白)하였는데, 비록 크게 쓰이지는 못했으나 넉넉하게 휼전(恤典)의 은혜를 베푸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탄식하며 한참 있다가 이르기를, “어찌하여 일찍 말해 주지 않았는가.” 하고는,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영구(靈柩)를 호송(護送)하고 장례에 관한 일을 도와주도록 하였다.

공은 가정(嘉靖) 병술년(1526, 중종21)에 태어났으니, 세상을 떠난 해의 나이가 57세였다. 그해 모월(某月)에 모자(某子)가 연산현(連山縣) 모리(某里) 선영(先塋)의 모원(某原)에 안장(安葬)하였다.

그로부터 19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 공의 윤자(胤子)인 김장생(金長生) 씨가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선군(先君)께서 땅속에 묻히신 뒤로 가정 형편에 여유가 없었고, 또 병란(兵亂)을 당하는 바람에 비석을 세울 틈이 없었으므로, 마침내는 뒷사람들이 선군의 자취를 알 수 없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었다. 이제는 선군의 비명(碑銘)을 새겨야 하겠는데, 아무래도 그대가 써 주는 것이 제일 좋겠다.” 하였다.

나로 말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공으로부터 특별한 지우(知遇)를 받았던 몸이다. 그리고 나 자신도 함께 사신으로 갔던 때의 일에만 국한되지 않고, 망녕되나마 공을 상당히 깊이 알고 있다고 여기고 있는 터이다. 그러니 어떻게 감히 사양할 수가 있겠는가.


삼가 살펴보건대, 공은 휘(諱)가 계휘(繼輝)요 자(字)는 중회(重晦)이다. 김씨는 광주(光州)에서 비롯되었는바, 신라(新羅) 왕자(王子)의 먼 후예들로서, 고려(高麗) 초에서부터 본조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의관(衣冠)을 배출하였다.


공의 고조인 휘 국광(國光)은 좌의정에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이요, 증조인 휘 극뉵(克忸)은 대사간이다. 조부인 휘 종윤(宗胤)은 진산 군수(珍山郡守)로 병조 참의를 증직받았고, 고(考)인 휘 호(鎬)는 지례 현감(知禮縣監)으로 이조 판서를 증직받았다. 정부인(貞夫人)을 추증받은 비(妣)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공조 정랑 휘 광원(光元)의 딸이다.


공은 서너 살이 되던 때에 벌써 문자를 알았고, 7, 8세 때에 문의(文義)를 통했으며, 15세 이전에 경사(經史)를 거의 모두 독파하였다. 조금 더 장성해서 제서(諸書)를 두루 살펴볼 때에는 열 줄을 동시에 읽어 내려갔으며, 한 번 눈을 스치기만 하면 문득 기억하곤 하였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경우 사건에 따라 교대로 바뀌어 나타나는 열국(列國)의 인명(人名)처럼 사람들이 기억하기 어렵다고 난색을 표하는 것까지도 종신토록 분명히 알아 틀리는 적이 없었다.


그리고 사장(詞章)에 있어서도 별로 힘을 들이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무슨 글이든지 민첩하게 지어내곤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또 사륙문(四六文) 같은 것은 마치 돈 많은 상인(商人)이 자기 돈을 꺼내어 쓰듯이 전고(典故)를 자유자재로 인용하는 가운데, 잘 지으려고 하지 않는데도 지어내는 것마다 자연스럽게 기막힌 솜씨를 선보이곤 하였다.


무신년(1548, 명종3) 한 해 중에 정시(庭試)와 과시(課試)에서 잇따라 장원(壯元)을 하였으므로 직부전시(直赴殿試)의 명이 내려졌는데, 과시를 통해 직부전시하는 전례(前例)를 열어 놓을 수는 없다는 언관(言官)의 반대에 부딪친 나머지, 기유년(1549) 봄에 다시 정시에서 장원을 차지한 뒤에야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시(殿試)에서 을과(乙科)로 급제한 다음에 권지 승문원정자(權知承文院正字)가 되었다가 곧바로 사가독서(賜暇讀書)의 대상으로 뽑혔는데, 이때에도 청반(淸班)의 경력이 없다는 이유로 취소되었다가, 뒤에 옥당(玉堂)에 몸을 담게 된 뒤에야 다시 사가독서를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일화는 모두 공의 성망(聲望)을 드높이는 데에 더욱 일조(一助)를 하였다.


그사이에 양모(養母)의 상(喪)을 당했으며, 상복을 벗은 다음에 부정자(副正字)를 거쳐 추천으로 사국(史局)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검열(檢閱)을 거치고 나서 곧장 홍문록(弘文錄)에 뽑히는 영광을 안았으며, 정자(正字)를 거쳐 박사(博士)에 이른 다음 부수찬(副修撰)으로 승진하였는데, 이때부터는 비록 다른 곳으로 옮겨지더라도 항상 지제교(知製敎)의 직책을 겸대(兼帶)하게 되었다.


당시로 말하면 을사사화(乙巳士禍)를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서 사람들이 언론 활동을 꺼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진강(進講)할 때에도 장구(章句)를 분석하는 수준을 넘지 못하였는데, 공이 홀로 고사(故事)를 인용하고 시무(時務)를 간절히 진달하면서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일을 자신의 책무로 여겼으므로, 사신(史臣)도 공을 진정한 학사(學士)라고 일컬었다.


이때 윤원형(尹元衡)이 서얼(庶孼)을 허통(許通)하는 일에 대한 의논을 제기하면서 자신의 작품인 양 떠벌려 대었지만, 사실은 이를 논한 차자(箚子) 역시 공의 손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다가 간원(諫院)의 정언(正言)에 임명되면서부터는 더욱 강개(慷慨)한 심정으로 일을 논하였는데, 가령 심정(沈貞)의 직첩(職牒)을 돌려주지 말라고 강력하게 쟁집한 일 같은 것은 올곧은 도를 행했던 고인(古人)의 풍도를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천거를 통해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가 곧이어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추천을 받고 이조 좌랑(吏曹佐郞)이 되었으니, 이때가 을묘년(1555, 명종10)이었다. 이에 이르러서는 한 시대의 화려한 명성을 한 몸에 한껏 누리게 되었다고 할 수 있었는데도, 공은 김공 홍도(金公弘度) 등과 함께 오로지 격탁 양청(激濁揚淸 악을 물리치고 선을 장려하는 것을 말함)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권세 있는 간신에게 크게 미움을 받게 되었는데, 공과 동시에 조정에 진출한 이들 가운데 형편없는 자들이 또 비루하게 대접받는 자신들의 처지를 계속 유감스럽게 생각해 오다가 그사이에서 화(禍)를 덮어씌우는 꾀를 꾸며 내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한 시대의 명사(名士)들이 귀양살이를 하기도 하고 파직당하기도 하였는데, 공 역시 도성문 밖으로 쫓겨난 뒤 연산(連山)의 선영(先塋) 아래로 물러 나와 거처를 정하고는 적막한 방 안에 틀어박혀 마치 그렇게 일생을 마치려는 것처럼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계해년(1563, 명종18)에 이르러 조정이 익개(益改)하는 거조(擧措)를 취함에 따라 공이 직첩(職牒)을 돌려받게 되었고, 또 잇달아 옛 관직에 서용(敍用)하라는 명이 내려졌는데, 이때 공은 부친상을 당해 복을 입고 있는 중이었다.


갑자년(1564)에 상복을 벗고 나서 곧바로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를 제수받았으며, 이후 예조 정랑, 성균관 직강 및 이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이처럼 조정에서 공을 특별히 대우하는 것이 예전과 같았으므로, 함께 복관(復官)된 이들도 감히 바라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뒤로 제시(諸寺)에서는 첨정(僉正)을 한 번, 정(正)을 세 번 역임하였고, 양사(兩司)에서는 사간(司諫)과 집의(執義)를 역임하였고, 성랑(省郞 의정부 당하관)으로는 검상(檢詳)과 사인(舍人)을 역임하였고, 관직(館職)으로는 응교(應敎)와 전한(典翰)과 직제학을 역임하였다.


명묘(明廟)의 상(喪)을 당할 무렵에 세자(世子)를 책봉할 뜻이 아직도 없었으므로 조야(朝野)에서 근심을 하면서도 감히 나서서 말하는 이가 없었다. 이에 공이 전한(典翰)으로 있으면서 차자(箚子)를 올리려고 하였는데, 부제학(副提學)이 병을 핑계 대고는 회피하였다. 그렇지만 결국은 다른 동료들과 함께 진달하며 논하였으므로, 물정(物情)이 하기 힘든 일을 하였다고 여겼다.


병인년(1566) 중시(重試)에 을과(乙科) 제일명(第一名)으로 급제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당상관임)의 품계에 오르고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 공이 시험장에 제출한 표문(表文)은 한 조정 안에서만 걸출한 것이었다기보다는 당송(唐宋) 명가(名家)의 문집에서 찾아본다 할지라도 그들이 한 걸음 뒤로 양보해야 할 그런 수준의 것이었다.


그런데 직제학으로 있다가 당상관으로 승진하는 것이 관례였던 점에 비추어, 신은(新恩)을 받으면서 직제학을 아울러 겸대하게 된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들이 공을 위해서 불만족스럽게 생각했는데도, 공은 그런 말을 듣고서 한번 웃어넘길 따름이었다. 그 뒤로 우부승지(右副承旨)와 좌부승지(左副承旨), 행 호군(行護軍), 대사성(大司成), 수 황해도관찰사(守黃海道觀察使) 등의 직책을 출입하였다.


기사년(1569, 선조2)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신미년(1571)에 상복을 벗고 나서 또 행 호군, 이조와 예조의 참의, 좌부승지와 우부승지, 대사간(大司諫)을 출입하고 사은사(謝恩使)로 경사(京師)에 다녀왔다.


계유년(1573)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오르면서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그 뒤로 행 대사간을 네 차례, 대사헌을 세 차례나 출입하였다. 또 평안도와 전라도 관찰사로 나가기도 하였고, 공조와 형조의 참판 및 행 상호군(行上護軍),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냈으며, 예조 참판으로 있을 때는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와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겸임하였다.


영남 지방은 본래 땅이 넓고 물화(物貨)가 풍성하기로 이름난 곳인 데다 또 바야흐로 갑술년의 병적(兵籍) 정리 사업을 행하느라 분주하기만 하였다. 그런데 공이 이 지방을 안찰(按察)하면서부터는 첩소(牒訴)를 물 흐르듯 판결하여 항상 시간에 여유가 있었으므로, 저녁 시간은 내내 간편한 복장으로 지팡이를 짚고 소요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어떤 일이나 수량에 대한 명목과 관련하여 한번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들은 아무리 시간이 오래 지나더라도 미세한 사항까지 잊어버리는 적이 없었으므로, 이민(吏民)들이 공의 신령스럽고 밝은 식견에 탄복하였다.


그러다가 관서(關西) 지방을 안찰하게 되었는데, 당시에 그곳은 정축년의 기근(饑饉)과 역병(疫病) 사태로 바야흐로 신음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에 밤낮으로 구제할 방책을 강구하고 방편을 세워 구료(救療) 사업을 벌이면서 기필코 사람들을 살려 내고 집집마다 온전하게 될 수 있도록 힘쓰느라 수염과 머리가 모두 하얗게 변하기까지 하였다. 공이 정사(政事)에 능하면서도 민첩하게 처리하고 부지런히 뛰어다닌 것이 이와 같았다.


인순왕후(仁順王后 명종(明宗)의 비(妃))의 상(喪)을 당했을 때, 왕후가 일찍이 조정에 임하여 청정(聽政)한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라는 상의 하교(下敎)에 따라, 군신(群臣)이 삼년복(三年服)을 입는 문제에 대해서 의논을 하게 되었다. 이때 공이 대사간의 직책을 행하고 있었는데, 이 일과 관련하여 대사헌인 유희춘(柳希春)에게 말하기를, “이 일이 한번 잘못 정해지고 나면 간쟁해서 바로잡기가 무척이나 어렵게 될 것이다.” 하고는, 즉시 합사(合司)로 복합 상소(伏閤上疏)를 올려 ‘왕후의 상(喪)에는 원래 정해진 예법(禮法)이 있다’고 논한 결과, 그 의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그 뒤에 지평 민순(閔純)이 계청하기를, “졸곡(卒哭) 후에는 송 효종(宋孝宗)이 행한 전례에 따라 백관(白冠) 차림으로 정사를 보셔야 합니다.” 하자, 조정에서 의논드리기를, “현관(玄冠 흑색의 관)에 오대(烏帶 흑색의 띠) 차림으로 정사를 보아야 한다는 기록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실려 있어 조종조(祖宗朝)에서 줄곧 그렇게 행해 왔으니, 경솔하게 바꿔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공과 율곡 공(栗谷公)은 “변통해야 할 때에는 근고(近古)에 행했던 예법을 따라야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당시 의정(議政)이었던 사암(思庵) 박순(朴淳)과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도 여기에 동의하였으므로, 마침내 이 의논이 채택되었다.


인성왕후(仁聖王后 인종(仁宗)의 비(妃))의 상을 당하여 복제(服制)를 의논할 때, 영상(領相) 권철(權轍)이 ‘송 고종(宋高宗)이 원우황후(元佑皇后)를 위해 입었던 상복의 예(例)’를 인용하며 전하의 상복을 자최 장기(齊衰杖朞)로 정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공이 의논을 주도하며 아뢰기를, “명묘(明廟)께서 이미 인묘(仁廟)의 뒤를 이었고 전하께서 또 명묘의 뒤를 이었는데, 일단 후사(後嗣)가 된 이상에는 그 아들이 된다고 할 것이니, 삼년상을 행하는 것이 원래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이로써 그 의논이 마침내 정해지게 되었다.


무인년(1578) 연간에, 왕자의 숫자는 갈수록 늘어만 가는데도 세자(世子)를 아직도 정해 놓지 않아 바깥에서 말들이 분분하게 일어났으므로, 공이 대사헌으로서 입시하여 건의하기를, “왕자가 이미 장성하였으니, 학식과 덕행이 뛰어난 인사를 사부(師傅)로 삼아 보도(輔導)의 책임을 맡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으니, 이는 상의 뜻이 빨리 정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어떤 이는 이에 대해 상의 노여움을 살까 겁을 내면서 편지를 보내 극력 주장하지 말라고 권하기까지 하였으나, 공은 이를 준열하게 꾸짖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이 하루는 친히 정사(政事)에 임하여 이조(吏曹)에 분부하기를, “될 수 있으면 순후(醇厚)한 사람을 골라서 쓰고, 교격(矯激 고집이 있고 괴팍스러운 것)한 사람은 쓰지 말도록 하라.” 하였는데, 공이 이 말을 듣고는 근심스러운 기색을 띠면서 말하기를, “성상의 분부는 물론 지극히 타당하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나약하고 아첨을 잘 하는 사람은 순후하다는 이름을 얻기가 쉬운 반면에, 강직한 성격을 지닌 사람은 교격하다는 비방을 늘 받게 마련인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 해가 되는 점이 오히려 많아지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하였다.


이때 벼슬길이 혼탁해진 나머지 자신의 주견도 없이 남에게 빌붙으며 탐오(貪汚)를 일삼는 무리들이 중외(中外)에 줄을 잇고 있었다. 이에 공이 사헌부에서부터 먼저 수십 명을 도태시키고 나서 위에 아뢰었는데, 이 중에는 권세가의 친속(親屬)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공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소리가 일어나게 되었다.


공이 예법(禮法)에 의거하여 잘못을 바로잡고 현재의 일을 걱정하여 길이 후환이 없도록 하는 것을 보면 계고(稽古 지난 역사를 거울로 삼아 대처하는 것)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충분히 알 수가 있었는데, 이와 함께 앞뒤를 돌아보지 않고 결단을 내려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려 한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


그런데 10여 년 전부터 사림(士林) 사이에는 동(東)이니 서(西)니 하는 설이 행해지고 있었다. 대개는 전배(前輩)를 서(西)라 하고 후배(後輩)를 동(東)이라 하였는데, 그다지 시비(是非)를 가릴 것도 없건마는 서로들 엎치락뒤치락하는 일이 없지 않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공과 같은 사람은 자연히 서인(西人)에 속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시배(時輩)가 공의 명망을 중히 여기고서 실제로 서로들 놓아주지 않으려 하는 일이 또 벌어지곤 하였다.


하지만 공 자신은 사람들을 대할 적에, 평소에 그 그릇을 아꼈던 사람이 혐의(嫌疑)에 특별히 걸리거나, 기릴 만한 선행(善行)만 있고 특별히 끊어 버려야 할 과오가 없는데도 한때 공격을 받게 된 경우에는, 어느 한편을 따라서 부화뇌동하는 일이 결코 없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언지(言地)에 있는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여 혼자서라도 논계(論啓)하여 바로잡기도 하고, 그들과 함께 같은 동네에 살며 예전처럼 정답게 어울려 노닐기도 하였는데, 그러면서도 상대방과의 인간 관계 때문에 정당하게 공무(公務)를 집행하지 못하는 폐단은 아예 있지를 않았다.


공은 천성적으로 매우 높은 자질을 타고나 견식(見識)이 고매하였으며, 누가 보아도 그야말로 ‘큰 것을 먼저 확립해 놓은 사람[先立其大者]’이라고 할 만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거지를 보면 소탈하기만 하였고, 언어 역시 해학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었으며, 괜히 위엄을 갖추려는 기색은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집안에서의 행실은 사람들이 하기 어려워하는 바가 있었다. 부모님을 모실 때에는 한껏 즐겁도록 해 드렸으며,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를 행할 때에는 오직 예법에 맞게 하였다. 그리고 여러 아우들과 우애롭게 지내면서 시종일관 간격이 없었고, 그들의 자녀를 모두 자신의 소생처럼 여겨 의식(衣食)에 사정(私情)을 두지 않았으며, 봉록(俸祿)을 받으면 번번이 나누어 주곤 하였다. 홀로 된 누이가 심질(心疾)을 앓고 있다가 일찍이 뜻밖의 변고를 당하였는데, 그때에도 가지고 싶은 대로 가재(家財)를 갖고 가게 하여 끝내 환심을 얻은 일도 있었다.


평소 집안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아, 선조들이 물려준 재산 외에는 한 사람의 노비(奴婢)나 한 이랑의 전장(田庄)도 늘린 것이 없었다. 그러고는 오직 만년에 이르러서 집 뒤에다 두 칸짜리 집을 짓고 늘 기거하였는데, 사람들이 너무 누추하다고 비웃을 정도였다. 그리고 안독(案牘)이나 집기(什器) 같은 것도 앉은 자리에 따라 구차하게 설치하였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면 다시 수습하지 않았으며, 어떤 때는 그냥 놔두고서 있는지 없는지 물어보지 않는 일조차 있었다.


공은 제일류(第一流)의 인물이었는데도 자신을 자랑하며 거드름을 피운 적이 없었다. 그리고 현재(賢才)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한 정성에서 우러나와, 허심탄회하게 자신을 낮추고 그들에게 관심을 쏟으면서 연령이나 직위 따위는 아예 아랑곳하지 않았다. 또 사람들에게서 훌륭한 점을 조금이라도 보게 되면 반드시 칭찬하며 드날리게 해 주었고, 좋지 못한 점을 듣게 되면 귓가로 흘리고서 듣지 않은 것처럼 하였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공은 종척(宗戚)과 향당(鄕黨) 사이에서 특히 후덕스럽게 대하였으므로, 유식한 이들은 그 의리에 감복하였고 무식한 자들도 그 인덕(仁德)을 사모하였다.


공은 견문이 넓은 데다가 기억력이 또한 비상하였는데, 틈이 나는 대로 산천(山川), 도리(道里), 성읍(城邑), 병식(兵食) 등의 형세와 명실(名實)이라든가 인물의 현회(顯晦 벼슬과 은둔 등 명암에 관한 일)와 씨족(氏族)의 원류(源流) 및 연대(年代)의 멀고 가까움 등에 대해서, 우리 동방은 물론이고 나아가서는 광대한 천하의 일까지 모두 가슴속에 정리해 두고서, 마치 촛불 아래에서 하나하나 숫자를 계산해 내는 사람처럼 입으로 술술 말해 주고 손바닥으로 가리켜 보여 주곤 하였으며, 법령의 연혁(沿革)이나 고실(故實)이 기재되어 있는 것들 역시 무슨 책 몇 면(面)에 나와 있는지 잘도 기억해 내곤 하였다. 그래서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처럼 견문이 많아 별로 사람을 인정해 주지 않았던 분까지도 극구 찬탄하며 공과 벗으로 지내는 것을 즐겨하였던 것이었다.


공은 어떤 사람이나 어떤 일과 관련하여, 뒤에 어떻게 될 것인지 반드시 알아맞히는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멀고 가까운 일을 막론하고 한번 말을 하면 그 말이 적중되곤 하였다. 이는 마치 양유기(養由基)가 활을 쏘는 것이나 동방삭(東方朔)이 점을 치는 것과도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찬탄을 금치 못하였다. 그래서 공이 세상을 떠나자 노성(老成)한 이나 후진(後進)이나를 막론하고 한 시대의 영귀(靈龜)와 보감(寶鑑)을 잃게 되었다고 슬퍼하였으며, 임진년 이후로 공사(公私) 간에 도적(圖籍)이 모두 병화(兵火)로 소진된 상황에서 막상 일을 당했을 때에는 공의 옛날 일을 생각하며 애석하게 여기는 것이 더욱 끝이 없었다.


공의 배필인 정부인(貞夫人)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참찬(參贊) 휘 영(瑛)의 딸이다. 공보다 7년 늦게 태어나서 공보다 24년 먼저 죽었는데,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 김장생(金長生)은 학행(學行)의 소유자로 현재 안성 군수(安城郡守)로 있는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조대건(曺大乾)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딸은 진사(進士) 정기명(鄭起溟)에게 출가하였는데, 일찍 죽었다.


측실 소생으로 4남 2녀가 있다. 아들은 김의손(金義孫), 김연손(金燕孫), 김경손(金慶孫), 김평손(金平孫)인데, 김연손은 일찍 죽었다. 여서(女婿)인 윤경남(尹敬男) 역시 일찍 죽었고, 차녀는 승지(承旨) 김상용(金尙容)의 첩(妾)이 되었다.


손자인 김은(金櫽)은 일찍 죽었고, 다음은 김집(金集)으로 진사이며, 다음은 김반(金槃)이다. 여서(女婿)는 서경휼(徐景霱)이고, 다음은 한덕급(韓德及)이다. 얼손(孽孫)으로는 손자가 셋, 손녀가 하나인데, 모두 어리다. 외손자는 정운(鄭沄)이고 여서는 윤홍국(尹弘國)이다. 기타의 어린 손(孫)과 증손은 여기에 싣지 않는다.


경자년(1600, 선조33)에, 공이 일찍이 광국 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던 일을 감안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로 추증하였으니, 이는 관례에 따른 것이었다.


내가 이상과 같이 서술한 다음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지어 슬픔을 부치는 바이다.



몸은 옷무게도 이기지 못할 듯하였으나 / 體若不能勝衣
뜻은 외물에 흔들림이 없었고 / 而志非物移
도량은 사람들이 엿볼 수 있는 바가 아니었네 / 量非人窺
말은 겨우 입 밖으로 내놓는 듯하였으나 / 言若僅能出口
만좌의 담론을 모두 굴복시켰고 / 而滿座之談屈
조정 가득 분분한 의논 결판내었네 / 盈庭之議決
위대한 사업 이루시리라 잔뜩 기대하였는데 / 蓋方期公於事業之上
공의 행적 드러내는 비명을 짓게 되다니요 / 而遽形公於文字之中
내가 어찌 걸맞게 써 드릴 수 있으리까 / 安能有以稱
끝없는 슬픔만 부칠 따름이외다 / 寄哀於無窮


[주-D001] 익개(益改) : 개과천선(改過遷善)의 뜻이다. 《주역(周易)》 익괘(益卦) 상사(象辭)의 “풍뢰가 익이니, 군자는 이 점괘를 보고서 선을 보면 그쪽으로 옮겨 가고 허물이 있으면 고치느니라.[風雷益 君子 以 見善則遷 有過則改]”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D002] 큰 것을 …… 사람 : 먼저 큰 마음 자리를 확고하게 정해 놓았기 때문에 자그마한 이목(耳目)의 유혹 따위에는 결코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맹자가 대인(大人)을 설명하면서 표현한 말이다. 《孟子 告子上》

[주-D003] 양유기(養由基)가 …… 것 :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장군 양유기가 백 보 떨어진 거리에서 버들잎을 활로 쏘아 백발백중했다는 고사가 있다. 《史記 卷4 周本紀》 한 무제(漢武帝) 때 동방삭이, 엎어 놓은 사발 속에 든 물건을 점쳐서 알아맞혔으며, 추아(騶牙)가 출토되었을 때 흉노가 귀순하리라는 것을 알았다는 고사가 있다. 《史記 卷126 滑稽列傳》 《漢書 卷65 東方朔傳》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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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남구역사문화인물간행위원회(2015) 역사를 배우며 문화에 노닐다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Ⅰ 인물과 문헌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마을(동)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민속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21) 양림 인물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동구문화원(2014) 광주광역시 동구 마을문화총서 Ⅰ 광주동구문화원
광주문화관광탐험대(2011~16) 문화관광탐험대의 광주견문록Ⅰ~Ⅵ 누리집(2023.2
광주문화원연합회(2004) 광주의 다리 광주문화원연합회
광주문화원연합회(2020) 광주학 문헌과 현장이야기 광주문화원연합회
광주문화재단(2021) 근현대 광주 사람들 광주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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