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681건
-
- 박지효
- 박지효朴之孝(1553~?)의 본관은 충주이며 자는 자경子敬, 호는 육류정六柳亭이다. 1553년 서창면 절골마을에서 태어났다. 기대승에게 글을 배워 학문이 깊었으며 40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 막하에 들어가 활약했다. 고경명 등을 제향하는 포충사에 대해 1603년 그와 후손들이 사액을 청하여 포충이라는 이름과 편액을 받은 데 기여했다.1627년 정묘호란 때 김장생金長生이 삼남호초사三南號苕使로 광주에 내려와 그에게 모병유사의 책임을 맡기자 75세의 노구로 병사와 식량을 모으는 데 큰 성과를 올렸다. 전주에 피난중인 세자를 맞아들여 여산까지 호송하니 인조가 이를 칭찬하여 장례원사간掌禮院司諫, 사헌부임제司憲府臨製를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 2018-05-28 | NO.411
-
- 박천정
- 박천정(朴天挺), 湖節1上-069-1, 光州, 壬辰, 高敬命同倡-《호남절의록》(1799)
- 2020-04-02 | NO.410
-
- 박충렴
- 박충렴(朴忠廉), 湖節4中-045-2, 光州, 甲子, 林檜倡義-《호남절의록》(1799)
- 2020-04-02 | NO.409
-
- 박치도朴致道(1642∼1697)
- 박치도朴致道(1642∼169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순천. 자는 학계(學季), 호는 검암(黔巖). 광주(光州) 출신. 아버지는 진사 박충정(朴忠挺)이며 어머니는 고령(高靈) 신씨(申氏)로 신택(申澤)의 딸이다. 문장에 능하고 학업이 정치하여 1662년(현종 3) 20세 때 진사시에 급제하고 1668년(현종 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1680년(숙종 6) 지평에 이어 정언이 되어 절도정배(絶島定配)와 추록훈(追錄勳)을 신중히 처리하도록 상소하였다. 이듬해 도당록(都堂錄)에 오르고, 1682년 북평사(北評事)·부수찬·지평, 1683년 장령·부교리·헌납·집의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노론이 집권하자 남인의 우두머리인 윤휴(尹?)의 사사(賜死)를 앞장서서 주장하였다. 이로 인하여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배척되어 변방에 귀양갔다. 그 후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에 의해 남인 정권이 무너지면서 서용되어 형조참의, 능주목사 등을 지냈다. 민정중(閔鼎重)·김수항(金壽恒) 등과 깊이 사귀었다. 문집으로 《검암유고黔岩遺稿(검암집)》이 있다.
- 2020-09-23 | NO.408
-
- 박하형(朴夏炯)
- 박하형(朴夏炯, 1891~1971)의 자는 춘엽(春燁)이며 호는 송애(松厓)이다. 광주 서창면 사동리 출생이다. 후석 오준선의 문인으로 『松涯遺稿』 가 있다.
- 2020-08-08 | NO.407
-
- 박해량(朴海量)
- 박해량(1850~1886)의 본관은 순천, 자는 도겸(道謙), 호는 율수(聿修)이다. 광산구 하남동(장수리)이 거주지이다. 박해량의 호는 율수재聿修齋로 고산 임헌회, 중암 김평묵, 면암 최익현, 노사 기정진 등에게서 학문을 터득했으나 36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업적을 많이 남아 있지 않으나 탐라耽羅, 흑산黑山 등지에 유배생활을 한 1874~1876년간의 기록으로 귀양 중인 면암 최익현과 함께 하면서 경서에 대한 토론과 시국에 대한 이야기 등을 나눴다.그 당시 실정을 빠짐없이 기록한 실록인 <해상일기海上日記>는 면암 최익현이 제주도와 흑산도에 유배되었을 때 그를 따라가서 수학한 내용이 주를 이루는 일기로, 1874년 2월 10일부터 4월까지, 1875년 4월 20일부터 10월 3일까지, 1876년 2월 7일부터 1876년 6월 23일까지의 3기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일기는 1873년 겨울에 면암선생이 제주도에 안치되자, 그 다음해인 1874년 2월 10일에 장성에 사는 김효환(金孝煥)과 함께 선생을 뵈러 제주도에 가는 것부터 시작하고 있다. 3월 1일에 제주도 무주포(無注浦)에 도착하고 다음날 면암선생의 배소에 들어가 인사하였으며, 그 다음날 집지하고 배우길 청하여 계사(繫辭) 등을 배웠다. 그러다가 4월 3일에 조천관에서 배를 타고 집에 돌아온 것에서 일기는 일단락된다.두번째 일기는 1875년 4월 20일에 면암선생이 사면되어 집에 돌아가는 길에 방문해준 것에서 시작한다. 이때 선생을 배행하고 장성 노사 기정진선생에게 찾아가고, 함께 올라갔는데 29일 성환역에 도착했을 때는 장성의 기우번과 기우만이 선생을 알현하기도 했다. 5월 1일에 동작진을 건너 2일에 선생의 집인 가거(嘉菃)에 도착했고, 15일부터 서울에서 선생이 있는 거곡(菃谷)을 오고가며 주역의 괘사, 격몽요결, 태극도설, 경재잠, 맹자 등을 공부하고, 모르는 것은 선생에게 편지를 써서 질문하고 답을 받았으며, 8월 23일에 경무대(慶武臺)에서 구일제(九日製) 시험을 보았다. 9월 22일에는 내려와서 임헌회(任憲晦)선생에게 지알(贄謁)하고, 수학하며 10월 3일까지 기록되어 있다. 세번째는 1876년 2월 7일에 면암선생이 마항점(馬項店)에 행차한 것부터 시작되는데, 면암은 척화(斥和)를 주장하며 도끼를 지고 대궐 앞에 엎드렸다가 체포되었고,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가 선생을 배종하고 배소인 흑산도로 향해간 것이다. 27일에 다경진에 도착하고, 윤5월 2일에 관청도에 정박하였으며, 4일에 우이도에 닿았다. 5일에 화가가 와서 선생의 진영을 그리려고 하자 선생이 꾸짖으며 허락을 하지 않았으나 15일에 영정이 완성되었다. 노사선생이 문목에 대해 답장을 보내온 것을 베껴서 선생에게 바치자, “이 어른의 언론은 어찌 이리도 매양 명백한 것인가.”라고 하였고, 이밖에도 유소(儒疏)나 이전의 큰 사건 등에 대해 선생의 의견을 들었다. 장무(瘴霧)가 자주 끼자 선생이 돌아갈 것을 권유하기도 하였으며, 6월 23일 아침에 동쪽에 청기(靑氣)가 일어남을 보고 왜란이 있을 것을 예측하고, 일기는 끝을 맺는다. 6권 3책으로 1909년 아들 박원동이 간행. 책머리에 기우만의 서문, 시 58수, 서 60편, 기 1편, 제문 4편 등이 수록되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그의 대한 기록은 노사문집蘆沙文集의 연보를 비롯한 최익현의 율수재행장聿修齋行狀에 “외모의 풍채가 뛰어나고 사색辭色의 기운이 온화하며 어버이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고 시문의 착상이 속 빠르며 글씨의 필법이 대단하다.장모풍영(狀貌風盈) 사색온윤(辭色溫潤) 사친지효(事親至孝) 작문부시수우입취(作文賦詩隨遇立就) 필법주건(筆法遒健)”고 표현했다.면암선생문집 부록 제2권 연보(年譜), 병자년(1876년) 윤5월 선생 44세 때 기록에 보면 “문인 박해량(朴海量)이 정심사(淨心寺) 중 인찰(寅察)· 춘담(春潭)을 데려 와서 뵙고 선생의 초상을 그려 포천 본댁으로 모시고 갔다. …(중략) 이제 또 화승(畵僧)을 데려와서 선생의 초상을 그리고, 3개월 동안 모시다가 돌아갔다. …(후략)” 1880년 노사선생 襄禮 때 참석하였다.광산구 장수길 33에 면암 최익현이 제주도와 흑산도 유배 때 지성으로 보살핀 제자 박해량(朴海量)과 그의 아들이자 의병으로 활약한 박현동의 강학 공간인 율수재(聿修齋)가 있다. 『聿修齋遺稿』 가 있다.부 : 朴鼎鉉조 : 朴聖洛증조 : 朴達鎭외조 : 兪致福처부1 : 林基休처부2 : 金盧休
- 2020-03-06 | NO.406
-
- 박현규 朴顯圭 철종 10년(1859) 6월 20일∼철종 11년(1860) 2월 7일
- 박현규 朴顯圭 철종 10년(1859) 6월 20일∼철종 11년(1860) 2월 7일박현규(1798∼1869)의 본관은 고령(⾼靈)이며, 자는 세경(世卿)이다. 할아버지는 담양 부사 박영수(朴英秀), 아버지는 경모궁령(景慕宮令) 박상영(朴尙榮)이다. 1828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1833년 동몽교관, 1836년 부사과·사복주부, 1837년 호조좌랑, 문화 현령, 1840년 영천군수, 1843년 장흥부사, 1845년 해주판관, 1846년 황주목사, 1849년 고원군수, 1855년 부평부사, 1856년 진주목사·봉산군수, 1858년 충주목사를 지냈다. 1859년 5월 1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6월 4일 하직하고 6월 20일 부임하였 다. 1859년 11월 2일 나수하라는 전교가 있었다. 진주목사 때 결렴(結斂)한 수효에 관한 일이었다. 『금성읍지』에는 “기미(1859년) 5월 1일에 충주목사에서 옮길 것을 제수 받고, 6월 4일에 임금을 사조하고, 6월 20일에 부임하였으며 경신(1860년) 2월 7일에 진주목사 때의 일로 파직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11 | NO.405
-
- 박현동(朴玄東)
- 박현동(朴玄東, 1886~1962)은 광산구 장수길 33(독립운동 당시 주소 全南 光州郡 瓦谷面 相村)번지의 강학공간인 율수재(聿修齋) 뒤에 있는 살림채에서 율수재 박해량(朴海量, 1850~1886)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06년 4월 부친의 스승인 최익현(崔益鉉)이 의병을 일으키자 적극 참여했으며, 그 이후에도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그후 체포되어 1910년 3월 2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유형(流刑) 5년형을 언도받았다. 그는 병오, 정미, 무신 호남창의기군대장을 맡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2020-03-09 | NO.404
-
- 박형린 朴亨鱗 중종 31년(1536) 4월∼중종 33년(1538) 8월 상경
- 박형린 朴亨鱗 중종 31년(1536) 4월∼중종 33년(1538) 8월 상경박형린(?∼?)의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자는 지구(之衢) 또는 희운(希雲)이다. 할아버지는 박소종(朴紹宗), 부친은 선무랑 북청교수 박눌(朴訥)이다. 1507년 식년시 진사, 1516년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형 박거린(朴巨鱗), 동생 박홍린(朴洪鱗)·박붕린(朴 鵬鱗)·박종린(朴從鱗)까지 다섯 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향오린(鄕五鱗)이라 불렸 다. 1521년에 예조낭관 때 승지와의 갈등으로 의금부에 투옥되어 곤욕을 치렀다. 1536년 4월에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1538년 8월에 체직되었다. 1548년에는 원주목사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병신(1536년) 4월에 도임하였고, 중국 사신이 가져갈 잡물을 가지고 서울로 갔는데 임술(1538년) 8월에 체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403
-
- 박호수 朴鎬壽 헌종 3년(1837) 4월 13일∼헌종 4년(1838) 2월 28일
- 박호수 朴鎬壽 헌종 3년(1837) 4월 13일∼헌종 4년(1838) 2월 28일박호수(1798∼1848)의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경(美京)이다. 아버지는 호조판서 박종보(朴宗輔)이고 박종익(朴宗翊)에게 입양되었다. 1817년 경외유생 유학에 선정, 1818년 음직으로 희릉참봉, 1820년 빙고별검, 1821년 장악원 주부·사복시 판관·한성주부·남평현감, 1823년 신계현령, 1825년 신천군수, 1828년 함흥판관, 1830년 종척집사· 서흥부사, 1834년 부사과, 1837년 3월 23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4월 13일 부임하 였다. 1838년 2월에 세곡(稅穀)과 선가(船價)에 대한 이로 해임 논의가 있었고 2월 29 일 어버이의 병이 위중하여 내려갈 수 없어 억지로 임소(任所)로 돌아가게 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니 개차하라는 전교가 있었다. 1842년 활인별제·수원판관, 1846년 돈녕도정, 1847년 형조참의·경주부윤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정유(1837년) 4월 13일에 부임하였고 무술(1838년) 2월 28일에 상경한 후 체직되었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7 | NO.402
-
- 박희수
- 박희수(朴希壽), 湖節3下-135-1, 光州, 壬辰, 大駕扈從-《호남절의록》(1799)
- 2020-04-02 | NO.401
-
- 박희수
- 박희수朴希壽(1540~?)는 본관이 충주이며 자는 덕로德老이고, 호는 회헌懷軒이다. 1540년 서창동 절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박상의 손자이고 김해부사 박민제朴敏齊의 아들이다. 회재 박광옥의 문인이며 벼슬은 1577년(선조 10) 음보蔭補로 후릉참봉厚陵參奉이 되고, 1592년 임진왜란 때 호남에서 박광옥 고경명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의주 행재소를 왕래하면서 군량을 조달하였다. 이 공로로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 사포서사포司圃署司圃의 직을 받고 형조좌랑에 이르렀고 함열현령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워 원종공신으로 녹훈되었다.
- 2018-05-28 | NO.400
-
- 방명달
- 방명달(房明達), 湖節4下-135-1, 光州, 丁卯, 高循厚同倡-《호남절의록》(1799)
- 2020-04-02 | NO.399
-
- 배구 裵矩 태조 2년(1393) 1월 9일∼태조 2년(1393) 9월 17일
- 배구 裵矩 태조 2년(1393) 1월 9일∼태조 2년(1393) 9월 17일 배구(?∼?)의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중방(仲⽅), 호는 압교(鴨橋), 아버지는 자헌대부 공조판서 배진손(裵晉孫)이다. 최영장군과 더불어 왜적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서해도 안렴사, 대호군을 제수 받았다. 1386년에 서북해도안렴사겸쌍성총관에 올랐다. 조선조에 들어 청주부사, 길주의 내승자목소제거(內乘孶牧所提擧)를 지냈다. 『금성일기』 「계유년 1393년」에 “목사 배구가 1월 9일 도임하였다가 10월 17일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고, 『금성읍지』에 “계유(1393년) 1월 9일 도임, 동년 9월 17일에 교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398
-
- 배응경 裵應褧 선조 30년(1597) 3월∼선조 30년(1597) 11월
- 배응경 裵應褧 선조 30년(1597) 3월∼선조 30년(1597) 11월배응경(1544∼1602)의 본관은 성산(星⼭)이며, 자는 회보(晦甫), 호는 안촌(安村)이다. 할아버지는 증 형조참의 배유(裵裕)이고, 아버지는 종사랑 배무원(裵茂元)이다. 1573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76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아들 배상익(裵尙益)도 문과에 급제하였고 전라도사를 지냈다. 정랑을 거쳐 청도군수로 재직하던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대항하여 싸웠다. 군사 1000명을 모아 ‘야격군(野 擊軍)’이라 하고 박경전(朴慶傳)을 대장(代將)으로 삼아 왜적 수백 명을 포획하였다. 이때의 전공으로 통정대부로 승진하였다. 1595년 10월 순천부사가 되었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 좌의정 김응남(⾦應南)의 천거로 3월에 나주목사가 되어 금산을 수비하였 다. 그러나 감사 황신(⿈愼)의 무고로 투옥되었다가, 우찬성 심희수(沈喜壽)와 부마(駙 ⾺) 서경주(徐景霌) 등의 상소로 곧 석방되었다. 1601년 2월에 대구부사가 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사직하였다. 예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안촌집(安村集)』과 『임진 록(壬⾠錄)』이 있다. 『금성읍지』에는 “정유(1597년) 3월에 도임하였으나 동년 11월에 체포되어 갔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황신의 무고로 투옥될 때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7 | NO.3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