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68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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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동열 朴東說 광해군 3년(1611) 9월 13일∼광해군 5년(1613) 6월
- 박동열 朴東說 광해군 3년(1611) 9월 13일∼광해군 5년(1613) 6월박동열(1564∼1622)의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자는 열지(說之), 호는 남곽(南郭)·봉촌 (鳳村)이다. 대사헌 박응복(朴應福)의 아들이며, 유교 7신의 한 명인 박동량(朴東亮)의 형이다. 1585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고, 1594년 정시 문과 갑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다. 이어 정언·병조좌랑·사서 등을 지냈다. 1601년 홍문관의 수찬·교리를 거쳐 이조정랑에 올랐으며, 1603년 황주목사를 역임하면서 부역을 고르게 하고 민폐를 없애는 등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1606년 동부승지, 1607년 우부승지·예조참의·황해도관찰사를 거쳐 형조참의가 되었다. 1608년 충주목사, 1611년 대사성·예조참의를 거쳐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펼쳤으나 폐모론(廢母論) 을 적극 반대하다 파직되어 동생(박동량)과 함께 옥에 갇히게 되었으나, 병환으로 석방 되었다. 문집으로 『봉촌집((鳳村集)』이 있다.『금성읍지』에는 “신해(1611년) 9월 13일 도임하였고, 체직된 날은 기록되지 않았다.”고 되어 있으나 실록에 따르면 1613년 6월에 이임한 것임을 알 수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7 | NO.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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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래겸 朴來謙 순조 31년(1831) 1월∼순조 33년(1833) 5월
- 박래겸 朴來謙 순조 31년(1831) 1월∼순조 33년(1833) 5월박래겸(1780∼1842)의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자는 공익(公益), 호는 만오(晩悟)이다. 아버지는 박선호(朴善浩)로 지금의 경북 구미 출신이다. 1809년 증광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1812년 주서, 1816년 정언, 1819년 부사과, 1824년 은산현감, 1826년 교리, 1827년 장령, 1829년 헌납, 1830년 병조참지·승지를 지냈다. 1831년 1월 26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2월 5일 하직하고 도임하였다. 1833년 우승지, 1834년 좌승지, 1835년 의주부윤, 1838년 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신묘(1831년) 1월에 부임하였고 계사(1833년) 5월 8일에 우승지로 자리를 옮겼다.”고 기록되었다. 1837년에 세운 「행목사박후래겸선정비」가 나주목 객관 금성관 안에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7 | NO.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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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명손 朴命孫
- 박명손(朴命孫, ?)의 본관은 함양(咸陽)이고, 자는 자순(⼦順), 광주 출신이다. 아버지는 현령 박이공(朴以恭)이다. 1507년 증광시에 진사 합격하고, 1513년 계유 별시 문과에 3등 1위(탐화랑 探花郞)로 급제하였다. 1513년 검열을 시작으로 예문관 봉교,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헌납, 장령과 평안도 어사, 사헌부 집의를 거쳤다.1523년(중종18)에는 질정관(質正官, 의심스러운 일을 물어 바로 알아오기 위하여 중국에 가는 임시 벼슬)으로 발탁되는 등 여러 분야의 능력을 인정받아 나라 안팎에서 활동하였다. 1524년(중종19)에는 평안도에 어사(御史)로 파견되었다.1529년 7월에 나주목사에 부임하였지만 1530년 12월에 병으로 사직하였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금성읍지》에는 “기축년(1529) 7월에 도임하였고, 경인년(1530) 12월에 신병으로 체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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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배 朴培 세종 23(1441) 1월 4일∼세종 25년(1443) 9월 4일
- 박배 朴培 세종 23(1441) 1월 4일∼세종 25년(1443) 9월 4일박배(?∼1448)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문헌은 확인이 어렵다. 실록에 의하면 1424년 3 월에 소윤(少尹) 벼슬을 하였으며, 1431년 사복시 관원, 1433년 호군, 1436년 3월 첨지중추원사로 삼았다. 1441년부터 1443년까지 나주목사를 거친 후 1446년 7월에는 충청도 처치사가 되었는데, 1448년 충청도 처치사로 재임 중 사망하였다. 『금성일기』 「신유년 1441년」에 “신임 목사 통정대부 박배가 신유(1441년) 1월 4일에 도임하였고, 「계해년 1443년」에 ”목사 박배가 9월 4일 사표를 내고 서울로 갔다.”라 되어 있다. 『금성읍지』에는 “신유(1441년) 1월 4일 도임, 계해(1443년) 9월 4일에 사임 상경하였 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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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봉주
- 박봉주(朴鳳柱, 1868~1936) 호(號)는 초은(樵隱). 조선(朝鮮) 때 진사가 된 후 음보(蔭補)로 이조참판(吏曹參判)․장례원경(掌禮院卿)에 이르렀다. 1868년(고종 5)∼1936년 9월 29일. 일제 강점기 관료. 호는 초은(樵隱)이다. 본적은 전라남도 광주부(光州府) 남정(南町)이다.서창 동북쪽, 발산마을 뒷등에 조선말 이조참판을 지낸 박봉주 대감 저택터가 있다.1899년(광무 3) 12월 홍문관시독(弘文館侍讀)을 시작으로 1907년(융희 1)까지 중추원의관‧비서원승‧내장원경‧봉상사제조‧사직서제조‧궁내부특진관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920년 송정금융조합 조합장, 1921년 호남물산주식회사 이사, 1923년 조선기업주식회사 상무이사와 전남번영회주식회사 사장 등을 지냈다. 1921년 4월부터 1924년 4월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로 활동하였다. 1922년 전라남도 유도창명회(儒道彰明會)를 발기하고 부회장을 맡았다. 1923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 광주지부를 발기하고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신일본주의를 내걸고 참정권 운동을 펼친 국민협회 전라남도지부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29년 유교단체 대성원(大聖院) 전라남도 총지원장을 지냈다.*확인이 필요함
- 2018-07-17 | NO.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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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사룡(박사용)
- 1. 湖節3下-170-2, 光州, 壬辰, 大駕扈從 -고정헌, 《호남절의록》(1799)2. 박사룡(朴士龍)은 광주(光州) 출신으로 자는 운보(雲甫), 호는 송창(松窓)이다. 본관은 순천으로 정국공신 순성군(順城君) 박이검(朴而儉)의 후손이다. 부친은 부장 박효항(朴孝恒)인데, 정사공신 순원군(順原君) 파주목사 박효립(朴孝立), 부장 박효관(朴孝寬), 女 (하시우夏時雨), 女 (박치화朴致華), 박효생(朴孝生)의 동생(처남)이다.박사룡은 고봉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친상 때 묘소 인근에서 초막 생활을 하여 효자로써 부역을 면제받았다. 임진란에 창의하여 의곡을 모집하는 데 앞장 서서 나주에 의곡도청을 세운 의곡장 기효증(奇孝曾, 1550~1616)의 휘하에서 행재소로 조납(漕納)하였다. 또한 대가(大駕)를 호종하여 호성원종훈(扈聖原從勳)의 녹권에 올랐다.지평 임위(林瑋)가 행장을 썼다.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장서각 《湖南節義錄》, 1799, 高廷憲禮. *주의 : 경북 영주 출신의 박사룡(朴士龍, 1563:명종 18~1657:효종 8). 자는 군언(君彦)이며 본관은 반남박씨로 어모장군 박담수(朴聃壽)의 여섯째아들. 1603년(선조36)에 무과 급제하여 벼슬이 만호를 거쳐 호군에 이르고, 만년에 가선계(嘉善階)에 올랐다. 망와(忘窩) 김영조(金榮租),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부훤(負暄) 황시(黃是) 등과 교분이 깊어 함께 수창(酬唱)했다.이 인물과 동명이인으로 거의 같은 시기의 사람이어서 자료에 혼동이 생길 수 있다.<선무원종공신> 동명이인 자료(https://blog.naver.com/win2u/221482864700)에 보면 광주의 박사룡은 부장으로 3등 102쪽 10행 4순번에 있고, 영주의 박사룡은 정로위(定虜衛<㝎)로 3등 146쪽 5행 3순번에 있다.*수정 2024.11.12.
- 2020-04-02 | NO.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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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사옥 朴師沃 정조 3년(1779) 4월 29일∼정조 4년(1780) 12월 20일
- 박사옥 朴師沃 정조 3년(1779) 4월 29일∼정조 4년(1780) 12월 20일박사옥(1721∼1795)의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자는 계심(啓⼼)이다. 아버지는 통훈대부 나주진관 병마절제도위 박필시(朴弼時)이다. 1741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1758 년 희릉참봉, 1760년 사옹봉사, 1762년 의영직장, 1763년 와서별제, 1764년 의금부 도사, 형조정랑, 1765년 은진현감, 1773년 서흥부사, 1775년 황주목사, 1777년 충주 목사를 역임하였다. 1779년 3월 21일 나주목사에 부임하였다. 이후 1783년 서원현 감, 1792년 부호군, 1793년 동돈녕, 1794년 가선대부, 부총관을 역임하였다. 『금성읍 지』에는 “기해(1779년) 4월 29일 도임하였고 경자(1780년) 12월 20일에 사직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5 | NO.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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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상 朴祥 중종 22년(1527) 4월∼중종 24년(1529)
- 박상 朴祥 중종 22년(1527) 4월∼중종 24년(1529)박상(1474∼1530)의 본관은 충주(忠州)이며,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로 기묘 사화 때 화를 입은 기묘명현 중 한 사람이다. 할아버지는 선천군수 박소(朴蘇)이고, 아버지는 진사 박지흥(朴智興)이다. 동생 박우(朴祐)는 문과에 급제하고 대사성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이 영의정 박순(朴淳)이다. 1496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01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로 보임 받고 관직을 시작했다. 승문원 교검, 시강원 사서, 병조좌랑을 지내고 1505년 외직으로 전라도사를 지냈다. 1506년 사간원 헌납, 한산군수로 옮겼으나 부모 봉양을 위해 임피현령으로 나아갔다. 1511년 수찬, 응교를 거쳐 담양부사에 부임했다. 1515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를 주장하다 남평의 오림역(烏林驛)으로 유배되나, 이듬해 방면되어 의빈부 도사, 장악첨정, 순천부 사를 역임하였다. 1519년 선공감정을 거쳐 상주와 충주의 목사, 사도시 부정이 되었 다. 1526년 문과 중시에 장원하였지만 1527년 나주목사로 좌천되었고, 1529년 병으로 사직하고 1530년 사망하였다.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저서로는 『눌재집』이 있다. 『금성읍지』에는 “정해(1527년) 4월에 도임하였고, 기축(1529년)에 고향으로 돌아갔 다.”는 기록이 있다. 시호는 문간(⽂簡)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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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선홍
- 박선홍朴墡洪(1926~2017)은 근대도시 광주의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무등산을 연구하고 집필해 광주학의 기초를 다진 동시에 무등산의 산증인이다. 광주상공회의소 재건과 중흥에도 공로가 크다. 1952년부터 1993년 퇴직하기까지 서구 농성동의 광주상공회의소에서 사무국장과 상근부회장을 지내며 지역사회 산업 및 경제 발전에 공헌했다. 환경운동가로 전 무등산공유화재단 이사장이기도 했던 박선홍은 1955년 광주 최초의 산악회인 ‘전남산악회’를 결성한 그는 창립 멤버로서 무등산보호운동을 이끌었다. 이어 1989년 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 2001년 무등산공유화재단 설립을 주도하며 누구보다 무등산을 아끼고 사랑했다. 2001년 무등산 공유화 운동은 10만여명이 참여해 약 16만평을 매입하고 이를 광주시에 기증하면서 무등산 난개발을 막았다. 50세이던 1976년 무등산의 유래.전설.경관을 정리한 인문지리지인 『무등산』 초판을 낸 뒤 2011년 증보판(7판)을 냈다. 무등산의 역사, 문화, 지리 등을 기록한 이 책은 직접 무등산을 돌면서 일일이 조사하고 찾아내 기록한 책으로 무등산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 무등산에 대한 남다른 박선홍의 사랑과 노력 덕분에 2013년 광주 무등산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박선홍은 향토사학자로 자신이 나고 자란 도시에 대한 다각도의 기록을 『광주 100년』(1994년)에 담아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후반에 이르는 근 1세기에 이르는 광대한 광주의 이야기를 기혹했다. 근대 광주의 역사.문화.지리 등이 이 한권에 책에 수록된 것이다. 『광주 100년』은 이후 사료 가치를 인정받아 일본어판이 출간되었다. 2012년 『무등산』과 『광주 100년』의 지적재산권을 광주문화재단에 기증했다.지역 최초로 보이스카우트를 창립, 청소년 사회교육과 리더십 지도에 힘썼고 광주민학회 이사장과 조선대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지역사회에 헌신했다. 광주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만들어 소외계층 돕기에도 앞장섰다. 대통령 표창, 국민포상, 철탑산업훈장, 광주시민대상, 대한민국 산악대상 환경상을 받았다.
- 2018-05-28 | NO.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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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동(朴成東)
- 1894년의 동학운동 때는 동학의 핵심인물 3인 중의 한 사람인 손화중(孫華仲)이 광주에서 봉기할 때 박성동(朴成東)은 광주접주로 1894년 10월 전라도 광주에서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에 참여하여 4천명의 농민을 이끌었다는 기록이 있다. -백년약사(상권)또 1894년 3월 말에 있었던 백산대회에 강대열, 박성동, 김우현 등이 농민군을 이끌고 참석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이미 광주에도 적지 않은 교도들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 2020-03-06 | NO.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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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숙
- 박숙(朴橚)의 본관은 함양(咸陽)으로 전력부위(展力副尉) 를 지냈다. 전력부위는 조선시대 무신 종9품의 품계이다.湖節1上-079-2, 光州, 壬辰, 高敬命同倡 -《호남절의록》(1799)고경명의 장녀는 사인(士人) 박숙(朴橚)에게 출가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은 박충렴(朴忠廉), 자는 효원(孝原)이다.고경명의병장은 1592년 5월 23일 유팽로·양대박 등과 담양의 추성관에서 회동을 갖고 추성창의(秋成倡義)를 합의하여 5월 29일 의병을 일으켰다. 추성창의란 의로운 일을 위하여 결기를 모은다는 뜻이다. 이 자리에는 고경명·고종후(高從厚)·고인후(高因厚) 3부자, 고경명의 조카 고성후(高成厚), 사위인 노석령(盧石齡)·박숙(朴橚)이 참여하였다. 고경명 장군이 금산의 왜적을 치게 되자 사위인 박숙(朴橚)에게 편지를 보내어 가족을 부탁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움을 준비한 것으로 읽혀진다.
- 2020-04-02 | NO.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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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숙무 朴叔楙 성종 25년(1494) 10월 29일∼?
- 박숙무 朴叔楙 성종 25년(1494) 10월 29일∼?박숙무(1426∼1495)의 본관은 음성(陰城)이며, 자는 윤진(胤陳)이다. 함흥차사로 알려진 충민공 박순(朴淳)의 손자이며, 증참판 박흔(朴昕)의 아들이다. 문음으로 관직에 올랐다. 형은 문과에 급제하고 도승지와 대사헌을 지낸 박숙진(朴叔蓁), 동생 박숙달(朴叔 達)과 박숙창(朴叔暢)도 문과에 급제하였다. 1467년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한 공로로 사헌부감찰이 되었고, 1471년 장례원 사의를 지냈다. 1473년 고양군수로 진휼을 잘하여 우등으로 체임되었으며, 1492년 사도시 부정을 거쳐 1494년 10월 29일 나주목사에 부임하였다. 사헌부의 반대가 계속 있었으나 성종이 들어주지 않았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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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승남
- 박승남(朴承男)의 본관은 반남(潘南)으로 교리(校理) 박맹지(朴孟智)의 후손이다. 부는 순릉참봉(順陵參奉) 박임(朴?)이고 자는 사옹원직장(司饔院直長) 박행(朴荇)이다.판관으로 김천일과 함께 진주성 전투에 참가했다. 경남 진주의 창열사(彰烈祠)에 배향되어 있다.湖節1下-100-2, 光州, 壬辰, 金千鎰同殉 -《호남절의록》(1799)
- 2020-04-02 | NO.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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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시생 朴始⽣ 단종 1년(1453) 1월 6일∼세조 2년(1456) 11월 6일 상경
- 박시생 朴始⽣ 단종 1년(1453) 1월 6일∼세조 2년(1456) 11월 6일 상경박시생(1389∼?)의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아버지는 전 광흥창부사 박양기(朴陽奇)이 다. 생원으로 1414년 알성시 을과에 급제하여 1427년 병조좌랑, 1435년 지청도군사를 역임하였다. 1431년 완성된 『태종실록』 편찬 작업에 편수관 중 기사관(記事官)으로 참여하였다, 또 김종직의 『점필재집(佔畢齋集)』 이준록 상(彝尊錄 上) 「선공사우 제삼 (先公師友 第三) 」편에 “박시생 밀양인인데, 공(김종직)과는 동갑(同甲)에다 같은 마을에 살았다. 일찍이 광주(廣州)와 나주의 목사를 지내고, 검공조참판(檢⼯曹參判)으로 작고하 였다.”라 되어 있어 광주목사와 검공조참판을 지낸 것을 알 수 있다. 『금성일기』 「계유년 1453년」에 “목사 중직대부 박시생이 1월 6일 도임하였다.”와 「병자년」에 “전임 목사 박시생이 가선 검교 호조참판이 되어 상경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금성읍지』 에는 “계유(1453년) 정월 6일에 도임하였고, 병자(1456년) 11월에 가선대부 검교 호조참판이 되어 상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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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양동(朴陽東)
- 박양동(1829~?)의 본관은 순천이다. 자는 이숙(而淑)이며 호는 관어(觀魚)이다.부 : 朴濟邦조 : 朴懿鉉증조 : 朴聖洌외조 : 金堯欽처부1 : 高濟儒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
- 2020-02-27 | NO.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