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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시재(近始齋) 김 선생(金先生) 묘지명

갈암집 제25권 / 묘지명(墓誌銘)

근시 선생 김공이 돌아가신 지 93년이 지났는데, 어느 날 선생의 손자인 국자 상상(國子上庠) 면(愐)이 가전(家傳)을 가지고 와서 현일에게 말하기를, “황대부(皇大父)의 선한 덕과 행의(行誼)로 볼 때 마땅히 지(志)가 있어야 하는데, 처음에 국난(國難)이 평정되지 않아 장사 지낼 때 묘지명을 쓰지 못하였고, 그럭저럭 세월이 흘러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이러다가 마침내 사적이 인멸되면 유명(幽明)에 죄를 짓게 될까 두려우니 속히 묘에 명(銘)을 묻어 후손을 일깨우고 싶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어 아는 자가 더욱 적어졌으므로 지명(誌銘)을 부탁할 사람이 없는데, 그대만은 가정에서 익히 들어 필시 우리 조부의 일을 능히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니, 우리를 위해 지문을 써 주십시오.” 하였다. 현일이 일어나 절하고 사양하기를, “현일의 선인(先人)께서 일찍이 선생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셨으니, 공의 고모가 바로 나의 선비(先妣)이십니다. 선인께서 선생이 살아 계실 때 직접 뵙고 가르침을 받지는 못했지만 현자(賢子)들과 교유하면서 유풍(遺風)에 감화받은 것이 많았습니다. 현일이 다행히 선대의 중한 교분으로 인하여 그 끼치신 은택을 입고 우러러 존모하는 것이 일반 사람과 다르니, 오늘의 의리에 있어 진실로 감히 사양할 수 없는 점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먼 시골의 후생으로 학문이 보잘것없고 문장이 심히 비루하니 어떻게 덕행을 능히 기술하여 먼 훗날에 전할 수 있겠습니까. 감히 백번 절하고 사양합니다.” 하였는데, 상사군(上舍君)이 거듭 대의(大義)를 들어 책망하기에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마침내 그 가전에서 뽑고 내가 들은 것을 참고하여 아래와 같이 그 사적을 논차(論次)한다.


삼가 살피건대,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실로 신라 왕의 후손으로 신라가 쇠할 때 왕자 흥광(興光)이 국가가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광주(光州)로 피신하였으니, 이분이 바로 비조(鼻祖)이다. 고려 때 휘(諱) 길(吉)이 태조(太祖)를 도와 공을 세워 품계가 대광(大匡)이고 지위가 사공(司空)에 올랐다. 그 후 대대로 광주에 살았고, 여러 대에 걸쳐 재상을 지냈으므로 사람들이 그 사는 마을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불렀다. 국조(國朝)에 들어와 휘 회(淮)가 음성 현감(陰城縣監)을 지내고 졸한 뒤에 병조 참의에 추증(追贈)되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안동(安東)에 살았다. 이분이 휘 효로(孝盧)를 낳았는데, 성균관 생원으로 졸한 뒤에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또 예안(禮安)으로 옮겨 휘 연(緣)을 낳았는데,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이분이 휘 부의(富儀)를 낳았는데, 성균관 생원으로 퇴도(退陶 이황(李滉)) 노선생(老先生)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하는 대방(大方)을 들었다. 권씨(權氏)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을묘년(1555, 명종10) 2월 모갑(某甲)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의 휘는 해(垓)이고 자(字)는 달원(達遠)이다. 태어난 지 7일 만에 모부인(母夫人)이 돌아가시어 세모(世母) 하씨(河氏)의 손에서 자랐다. 조금 자라서 독서하고 행실을 닦아 고인(古人)의 학문에 뜻을 두었는데, 우뚝하게 일찍 성취하여 명성이 자자하니 제공(諸公)과 명인(名人)들이 모두들 탄복하고 허여하였으며 나이와 지위를 잊고서 더불어 사귀기까지 하였다. 그 전에 관찰공(觀察公)이 2남(男)을 두었는데, 장자가 부필(富弼)이니 별호(別號)는 후조당(後凋堂)이고 선생에게는 백부가 된다. 자식이 없어 선생을 자기 자식처럼 여기니, 선생이 그분이 살아 계실 때에는 효도를 다하였고, 돌아가시자 심상(心喪) 3년을 입었다. 만력(萬曆) 임오년(1582, 선조15)에 외간(外艱)을 당하여 묘 옆에서 시묘살이하면서 삭망(朔望) 때에만 내려와 궤연(几筵)에 전(奠)을 올렸고, 상을 마칠 동안 외부의 일에 간여하지 않았다.


정해년(1587, 선조20)에 천거한 자가 있어 광릉 참봉(光陵參奉)에 제수되었는데 나아가지 않았고, 무자년(1588)에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에 제수되자 사은숙배하였다. 이해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이듬해 여름에 비로소 출사(出仕)하여 승문원 정자에 보임(補任)되었는데, 얼마 안 있어 예문관 검열에 옮겨졌다. 겨울에 사원(史院)의 동료가 사초(史草)를 불사른 일에 연좌되어 파직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이때 역변(逆變)이 있었는데, 무고로 조사를 받다가 재신(宰臣)이 변호해 주어 벗어날 수 있었고, 관작을 삭탈당하여 전리(田里)에 돌아왔다. 이때부터 두문불출하고 조정의 시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으며 3, 4년간 지방에만 있었다.


임진년(1592) 여름에 왜란이 일어나 열흘 사이에 삼도(三都)가 모두 무너졌다. 선생이 종국(宗國)의 비상한 변란에 통분하여 창의(倡義)하여 향병(鄕兵)을 일으키고 동지(同志)를 규합하여 거느리고 의를 위해 목숨을 버릴 계획을 하였는데, 마침 학봉(鶴峯 김성일(金成一)) 김 선생(金先生)이 초유(招諭)의 명(命)을 받고서 도내에 격문(檄文)을 돌렸다. 선생이 답한 편지에, “도이(島夷)가 창궐하여 어가(御駕)가 파천(播遷)하였으니, 신민(臣民)으로서 통탄스러워 살아 있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합니다. 그러나 궁벽한 시골에서 한묵(翰墨)만을 일삼아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히지 못했으니 맨주먹만으로는 스스로 공을 이루기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나 충의(忠義)는 타고난 본성인지라 복수하려는 뜻이 간절하니, 천지에 맹세코 적을 토벌하는 의리를 펴겠습니다.” 하였다. 8월에 진군하여 안동에 이르니 열읍(列邑)의 의병들이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았다. 이에 빈객(賓客)을 안배(按排)하고, 용궁(龍宮)과 함창(咸昌)의 지경으로 진(陣)을 옮겨서 기회를 보아 적에 대응하여 공을 세우려 하였다. 계사년(1594) 1월에 명(明)나라 군대가 평양(平壤)을 수복하자 적이 철군하여 달아나니, 이에 승세를 타서 적을 사로잡고 참(斬)하여 상당히 많은 수급(首級)을 얻었고, 이로 인하여 적을 추격해서 남쪽으로 내려와 여러 군대와 밀양(密陽)에서 모였다. 5월에 단인(端人) 이씨(李氏)의 부음(訃音)을 듣고서 계모(繼母)는 늙고 자식은 어린데 형제가 없는 것을 염려하여 잠시 돌아가 가사(家事)를 상의하고 즉시 진(陣)으로 돌아왔다. 행군하여 경주(慶州)에 이르러 병이 나서 졸(卒)하니, 춘추가 39세였다.


부음이 이르자 전군(全軍)이 부르짖고 통곡하기를 친척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처럼 하였고,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들 탄식하기를, “선인(善人)이 죽었다.” 하였다. 이해 11월 경오일에 현(縣)의 서쪽 지례촌(知禮村) 계향(癸向)의 언덕에 장사 지내니,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의 묘와 같은 언덕이다. 이는 선생이 상락공의 외손이기 때문이다. 을미년(1595, 선조28) 가을에 상(上)이 선생의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순국(殉國)한 의리를 생각하여 특별히 승의랑(承議郞) 홍문관 수찬에 추증하였다. 천계(天啓) 병인년(1626, 인조4)에 상락공의 손자가 본도의 관찰사가 되어 강제로 선생의 묘를 파서 옮기게 하였다. 이듬해 2월에 재사(齋舍)의 뒤쪽 기슭에 임시로 이장했으나 마침 나라에 전란이 있어 길지를 가려 안장하지 못하였다. 전란이 안정되자 거음곡(居音谷) 신좌을향(辛坐乙向)의 언덕에 모셔 안장하니, 이때가 12월 모일(某日)이었다. 그 후 무신년(1668, 현종9)에 복인(卜人)의 말을 따라 또 송음동(松音洞) 유좌(酉坐)의 언덕에 이장하니, 이때가 4월 24일이었다.


선생은 타고난 자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의용(儀容)과 풍도(風度)가 근엄하였다. 그 학문은 참으로 알고 실천하여 성현의 바른 문로(門路)를 얻었다.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는 그 힘을 다하였고, 선조를 받듦에 있어서는 그 정성을 다하였다. 집안을 다스리는 데에 법도가 있어 내외(內外)가 분명하였고, 친지와 향당(鄕黨)에 대해서는 돈독하고 화목하며 공경하고 겸양하는 도리를 다하였다. 길흉(吉凶)에 경조(慶弔)할 때 예를 빠뜨림이 없었고, 궁핍한 자를 구휼할 때에도 그 힘을 아끼지 않았는데, 일찍이 말 1필을 출연(出捐)하여 궁핍한 벗의 급함을 구제해 주었다. 취사(取捨)를 신중히 하고 응대(應對)를 삼갔으며, 남의 작은 허물을 용납하고 남의 선을 말하기를 좋아하였다. 교제하는 데 구차하지 않아 사귐이 오래되어도 공경하였으니, 비지(賁趾) 남치리(南致利),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 송소(松巢) 권우(權宇),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존재(存齋) 곽준(郭䞭)과 도의(道義)로 사귀면서 책상을 마주하여 강론하고 편지로 왕복한 것이 함께 수양하고 절차탁마하는 데 도움되는 것 아님이 없었다.


사는 집 남쪽에 작은 서재를 열고 현판을 근시(近始)라고 하고서 날마다 거기에서 독서하며 경훈(經訓)을 깊이 연구하고 예서(禮書)를 널리 상고하여 그 요체를 궁구하고 그 차이점을 바로잡았으며, 역대의 치란과 흥망의 자취를 모두 이해하고 통달하였다. 그리고 천문(天文), 지지(地誌), 병법(兵法), 군율(軍律), 의술(醫術), 복서(卜筮)의 설까지도 모두 그 근원과 지류를 섭렵하여 그 대체를 알았다. 학자(學子)가 찾아와 배움을 청하면 그 재품(才品)에 따라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항상 퇴도(退陶)의 문하에 나아가 직접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고, 퇴도 선생의 남은 자취를 정리하고 실추된 서업(緖業)을 이어서 사문(斯文)을 흥기(興起)시키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려운 세상을 만나 병들어 죽었으니, 어찌 후학의 무궁한 한이 되지 않겠는가.


처음에 퇴도 선생이 〈사단칠정변(四端七情辨)〉을 짓자 근세의 대유(大儒)라고 불리는 자들이 이기(理氣)는 호발(互發)이 없다는 설을 주장하면서 노선생(老先生)에 대해 의리(義理)가 분명하지 않다고 기롱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선생이 설(說)을 지어 변론하기를, “천지(天地)에 가득 차고 고금(古今)에 유행(流行)하는 것은 이기일 따름이다. 사람의 한 몸은 이(理)와 기(氣)를 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사단(四端)이 발(發)하는 것에 대해 기(氣)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 주(主)가 되는 것이 이(理)이기 때문에 이발기수(理發氣隨)라고 하는 것이고, 칠정(七情)이 발하는 것에 대해 이(理)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 주가 되는 것이 기(氣)이기 때문에 기발이승(氣發理乘)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성현이 그 서로 떨어지지 않는 가운데서 서로 섞이지 않는 묘(妙)를 집어내서 말하였는데, 근세에 일종의 의론이 반드시 이와 기를 합쳐서 하나로 만들어 노선생이 주장한 이발기발(理發氣發)의 설을 가리켜 잘못되었다고 하니, 이는 이 설이 실로 주자(朱子)에게서 근본한 것이요, 노선생을 욕하는 것이 바로 주자를 욕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것이다.” 하였다. 이것이 그의 식견이 진실되고 사설(邪說)을 종식시키 데 도움되는 것이니, 어찌 근세의 유자(儒者)들이 발돋움하여 미칠 수 있는 것이겠는가. 글을 짓는 데 꾸미는 것을 일삼지 않아 평이하고 진실하며 온후하고 전아하였고, 가리키는 뜻이 명백하였다. 시(詩)는 혼후(渾厚)하고 담박(淡泊)하여 그분의 됨됨이와 같았다. 평생 저술한 것이 대부분 병화(兵火) 중에 산실(散失)되었고 약간 권만 집에 보관되어 있다.


단인 이씨는 본관이 진성(眞城)인데, 조부는 휘가 의(漪)이고, 부는 휘가 재(宰)이며, 퇴도 선생에게는 질손녀(姪孫女)가 된다. 성품이 온화하고 정숙하며, 선생의 배필이 되어 부덕(婦德)에 어긋남이 없었고, 선생보다 한 달 먼저 졸하였으니, 향년 42세였다. 처음 장사 지낼 때부터 세 번을 이장하도록 모두 합장하였다.


4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광계(光繼)는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냈고, 유행(儒行)이 있었다. 차남은 광실(光實)이고, 3남은 광보(光輔)인데 성균관 생원이었다. 4남은 광악(光岳)이다. 큰사위는 찰방(察訪) 박회무(朴檜茂)이고, 둘째 사위는 사인(士人) 유암(柳嵒)이다. 막내딸은 우리 선군(先君)께 시집왔는데, 선군의 휘는 시명(時明)이고, 성은 이씨(李氏)이고, 일찍이 능서랑(陵署郞)을 지냈다. 교관(敎官)이 자식이 없어 광실의 아들 렴(????)을 후사(後嗣)로 삼았다. 광실은 5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초(礎), 려(礪), 렴(????), 선(????), 빙(砯)이다. 딸은 모두 시집가서 사인의 처가 되었는데, 사위는 권계(權), 오익훈(吳益勳), 이민표(李民標)이다. 생원이 3남을 두었는데, 장남 면(愐)은 진사(進士)이고, 차남은 이(怡)이고, 3남은 근(慬)이다. 딸이 여섯인데, 장녀는 사인 정시태(丁時泰)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생원 변지두(邊之斗)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사인 조병(趙頩), 금이석(琴以晳), 이홍지(李弘至), 권경(權暻)에게 시집갔다. 광악이 3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정(䂻), 영(碤), 성(????)이고, 딸은 사인 김인(金????), 생원 채익하(蔡翊夏), 사인 강명(姜????)에게 시집갔다. 찰방이 1남을 두었는데, 이름이 료(炓)이다. 유암은 아들은 없고, 딸만 하나 있는데 사인 정억(鄭億)에게 시집갔다. 우리 선비(先妣)께서 일찍 돌아가셨는데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상일(尙逸)인데 참봉을 지냈고, 딸은 사인 여국헌(余國獻)에게 시집갔다. 렴이 또 아들이 없어 선의 아들 순의(純義)를 후사로 삼았다. 내외의 손, 증손, 현손을 합치면 90여 명이다.


아, 선생의 타고난 아름다운 자품과 학문을 좋아하는 독실함으로 볼 때 만약 더 오래 살아서 대업(大業)을 마쳤더라면, 나아가서는 이 백성들에게 은택을 입히고 물러나서는 후세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어떠하였겠는가. 불행히 성년(盛年)에 세상을 떠나 하늘이 수명을 조금도 연장시켜 주지 않았으니, 슬프다. 비록 그러나 그 남아 있는 것을 미루어 보면 사람으로 하여금 사(私)를 잊고 나약함을 분발시켜 도(道)를 보호하고 사설(邪說)을 물리치게 하는 공이 있으니, 끝내 불행하지만은 않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아, 선생이시여 / 嗟惟先生
정성스럽고 신중하며 단정하고 진실되도다 / 誠愼端慤
지키시는 지조가 엄하고 / 持守之嚴
실천함이 독실하였도다 / 踐行之篤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 謹謹其孝
또 지극히 충성스러웠도다 / 蹇蹇其忠
문재(文才)가 있고 무재(武才)가 있으며 / 有文有武
훌륭한 말씀과 큰 공이 있도다 / 有言有功
전에는 차분하게 / 伊昔從容
시서를 읽고 법도가 있더니 / 詩書法度
강개하게 전장에 임하여서는 / 慷慨臨戎
그 용모가 굳세었네 / 其容曁曁
또한 논저가 있어 / 亦旣論著
사설(邪說)을 막았도다 / 式遏詖淫
선현(先賢)에 빛나는 공로가 있으니 / 于前有耀
어찌 오늘날만을 다행스럽게 한 것이겠는가 / 不寧幸今
그 시종을 살펴보면 / 循厥始終
후인으로서 어찌 서운하고 부끄럽지 않겠는가 / 奚憾奚愧
명을 지어 밝게 드러내서 / 銘以昭之
후세를 일깨우노라 / 以覺來世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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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남구역사문화인물간행위원회(2015) 역사를 배우며 문화에 노닐다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Ⅰ 인물과 문헌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마을(동)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민속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21) 양림 인물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동구문화원(2014) 광주광역시 동구 마을문화총서 Ⅰ 광주동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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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서구문화원(2014) 서구 마을이야기 광주서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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