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려/묘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28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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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자김공기삼기적비
- 광주시 광산구 대산동 대야마을1874년이 효자김공기삼기적비(효자김공기삼기적비)는 상산김씨 문중에서 관리한다. 吳東洙가 찬했다.
- 2018-12-01 | NO.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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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자박공현주열부창녕조씨기적비
- 광주시 광산구 선암동 선암마을 입구1962년선암마을 입구 연못인 선암제仙岩堤와 마을 방풍림이 식재되어 있는 선암방축仙岩防築이 조성되어 있었다. 마을 어귀에는 충주박씨 효자박공현주열부창녕조씨기적비(孝子朴公現柱烈婦昌寧曺氏紀蹟碑)가 동쪽을 향해 서 있었다.조씨 부인은 6.25 전란 때 자식이 없는 과부가 되어 시부모를 모신 열녀였다.
- 2018-11-29 | NO.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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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자사은처사오공효부유인풍산홍씨기행비
- 광주시 광산구 명도동 명곡마을, 가마마을1980년이 효자사은처사오공효부유인풍산홍씨기행비(孝子沙隱處士吳公孝婦孺人豊山洪氏紀行碑)는 나주오씨 문중에서 관리한다.
- 2018-12-01 | NO.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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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자운파고공기적비
- 광주시 광산구 광산동 토말마을1977년이 효자운파고공기적비(효자운파고공기적비)는 장흥고씨 문중으로 金潤東이 찬했다. 옛 황룡면 토말이다.
- 2018-12-01 | NO.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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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자유헌김해김공유적비
- 광주시 광산구 동곡동 하산마을孝子幽軒金海金公遺蹟碑는 월성 최윤환이 짓고 낙안 오동규가 쓰다.
- 2018-12-02 | NO.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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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자윤광훈 열부나주임씨 효열실적비
- 남구 노대동 노대마을과 구암마을 사이 도로변효자윤광훈 열부나주임씨 효열실적비비문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세상에 지극한 행동과 기이한 절개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참으로 적다. 행동이 진실로 백가지나 되지만 자식의 효행이 근본이 되는 것이며 절개를 지키는 것은 여자가 행실 중 가장 어려운 일이다. 백년 사이에 열녀 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백리(百里)거리에 한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 드물게 배출된다고 하지 않겠는가, 한 시대에 효자와 열녀가 함께 배출되는 것은 오히려 보기 드문 일이며 한 가문에서 효자와 열녀가 함꼐 배출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편이지만 어쩌다가 있기도 하는데 하물며 효자의 아내가 열부(烈婦)가 되었고 열부의 남편이 효자가 되는 경우는 오직 보기 드물 뿐만 아니라 듣기도 드문 일이다. 어느날 나의 벗 윤종림(尹宗林) 군이 책 한권을 가지고 백운동에 있는 집으로 찾아와 나에게 보이니 즉 함안 윤광훈(咸案 尹光訓)의 효행과 그 부인 나주임씨의 열행(列行)을 담고 있는 실록(實錄)으로 즉 종림(宗林)의 족(簇)선조 고비(考妣)가 되는 분이다. 이제 공께서 세상을 떠나 신지 100년이 되었다. 그 당시에는 예의(禮義)의 가르침이 폐지되지 않았고 오륜(五倫) 오상(五常)이 모두 끊기지 않았다. 이처럼 휼륭한 효행과 정열(貞烈)이 한 가문에서 배출되었건만 어찌하여 정려(旌閭)를 세우라는 나라의 명을 받지 못하였을까. 이제 사론(士論)과 향의(鄕議)로써 무너져 버린 천지의 법도와 끊어져버린 백성들의 도덕을 되찾으려 하니 아~ 마음이 아프기만 하다.공께서는 어려서부터 효도하고 근면하였기에 가정이 비록 가난하였지만 부모님께 맛있는 음식을 봉양하고 잠자리를 편안하게 하여 그 마음과 그 몸을 함께 봉양하였다. 이때 임씨부인(林氏夫人)의 내조가 지극하여 이것저것 신경을 쏟았다. 어머니 병세가 위독해지자 병에 좋다는 약품을 먼 곳까지 달려가 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매번 하느님꼐 기도를 하고 똥맛을 보아 병세의 차도를 짐작 해본 결과 점차 더 위독해지자 자신을 손가락을 깨물어 어머니의 입안에 피를 흘려 반일(半日)의 수명을 연장하기까지 하였다. 수명은 정해진 것이기에 마침내 구원할 길이 없었으며 장례를 치르는 예절은 한결같이 옛 예법을 준수하고 풀자리에서 잠을 자고 국물을 마시며 3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몸이 수척하여 마침내 질병을 얻어 일어나지 못하였고 자식이 없으니 조카 단(袒)을 아들로 삼았다.임씨부인은 본래 부도(婦道)를 잘 지킨다는 소문이 있었다. 남편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북두칠성(北斗七星)에 절을 올리고 남편을 대신하여 자기를 잡아가라고 하니 그 정성은 가히 하늘은 감동시킬만 하였건만 마침내 남편의 수명을 연장해 주지 않아 갑자기 죽어갔다. 시신을 거두어 혼인 때 입었던 의복을 입혀 입관(入棺)을 하였으며 장례를 마치고 제사를 모시는 일에 정성을 다해 봉행 하였다.영연(靈筵)을 철거하는 날 종족들에게 말하기를 남편 살아서의 의를 지키고 남편 죽어서는 절개를 지킬 것이며 나 죽은 뒤 일은 단이 있으니 족히 염려 될 것이 없다. 하시고 조용히 자진하여 공의 뒤를 따랐다. 아~ 공의 독실한 효행은 검루(黔屢)의 짝이 될 만 하고 유인(孺人)의 곧은 열행은 백주(栢周)의 짝이 될 만 하니 그 효행과 그 열행은온 부부들의 귀감이 될만한 일이요 어찌 함안윤씨가문에게만 찬사가 있어야 되겠는가. 요즈음 온통 세상은 도덕성이 무너져 부자간의 은혜와 부부간의 도리가 한결같이 새 집승과 같은 세상으로 변화하였다. 어린 후배들이 효도와 열행을 알 수가 없어 세상 도덕을 귀로 듣고자 해도 들을 수 없으며 눈을 씻고 보고자 해도 볼 수가 없다. 휼룡하기만 한 효행을 이제야 돌에 새기니 두루 일어보고 자식이 해애할 도리와 아내가 해야 할 도리를 알았으면 한다.世之有至行奇節蓋鮮矣行固百行而子孝爲本節具不一而女烈爲難百年而得一人焉不爲曠百里而得一人焉不爲罕苟於郡國或一時並出者猶爲罕見以一家而湃時共有者殆絶 無而僅有耳况又孝子之妻爲烈婦烈婦之夫爲孝子者非惟見之之罕柳亦聞之之罕也曰吾友尹君宗林袖一冊示余於白雲僑舍乃咸安尹公諱光訓孝行其夫人羅州林氏烈行之實錄則宗林之族先祖考妣也今距公之世己越百餘春秋矣當時禮敎不盡廢倫常不盡絶以若篤孝貞烈箤于一家者胡篤末蒙旌閭之典今以士論鄕議欲圃不朽於天綱嶊地維頹而民慈睪攵絶之今日乎吁其悲哉公從少孝勤家雖淸貧供甘旨安寢處志體俱養林夫人內助極備左右就養及先妣疾谷尤藥品饌材利病之物無遠不求每號天供禱嘗糞審症症漸危絶輒石斤指注血于口能延得半咎之回甦大限有定竟莫之救其喪葬之儀純終之道一遵古禮而寢若啜粥三年如一日柴毁骨立終成疾不起无嗣取姪坦爲子林孺人素以婦道著聞及公病篤拜斗析代誠可感天而竟未之延遂奄忽焉襲歛取婚聘時綠衣納于棺中殯葬祭尊彈誠奉行及撤靈筵語宗族曰生守義也死從節也後事事有坦在他無足慮俄而從容自裁竟下從焉盖其錄衣之納公棺者盖有所光定也噫公之篤孝可伍黔屢孺人之貞烈可疋柏舟其孝其烈爲夫爲婦傳咸安氏有辭者豈從耳哉今天下陸沈父子之恩夫婦之道一化爲鳥有後生少輩矇不知孝烈之爲0事世道駿欲則耳求聞而無聞也欲拭目求見而無見也猗此孝烈侍今而勒之石遍八時人之聸陰爲人子而不知養生送死之始終者爲人妻而不知
- 2018-06-14 | 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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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자정계흥지려 / 孝子鄭啓興之閭
- 광주광역시 광산구 평동 봉정마을에 1875년 鄭啓興의 효행의 뜻을 기리고자 羅州鄭氏門中에서 건립한 정려이다.봉정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관동면 수각리(水閣里) 봉정리(鳳亭里) 평지리(平地里) 오동촌(五洞村)을 합하여 법정리인 나주군 평동면 지정리(地亭里)로 하였다. 1949년 광산군으로 되었다가 1988년 광주직할시 승격때 광산구 평동출장소 관내 지정동 제14통 봉정부락이 되었다, 평지(平地)와 봉정(鳳亭)의 끝글자를 합하여 지정(地亭)으로 한것같다. 희여치산(希汝峙山) 아래의 오동촌(五洞村)을 합하여 봉정이라 한다.산세와 물이 좋아서 오래전부터 마을이 생성된 것 같다. 마을주민 대부분이 주로 1차산업에 종사하며 수박, 무등이 유명하다.
- 2020-03-02 | NO.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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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자죽우당남평문공봉기기적비
- 광주시 북구 청풍동 209-5 청품쉼터1959년효자죽우당남평문공봉기기적비(孝子竹友堂南平文公鳳歧紀積碑)는 무등산 청품쉼터에 있다. 문봉기의 자(字)는 성우(聖遇), 호(號)는 죽우당(竹友堂). 조선시대 때 전적(典籍)을 지냈다.
- 2018-10-22 | NO.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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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자증통훈대부사의사정정덕방지려
- 광주시 동구 운림동 1691937년이 효자증통훈대부사의사정정덕방지려(孝子贈通訓大夫司儀寺正鄭德邦之閭)는 서산정씨정려 내內에 있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정리중)
- 2018-11-11 | NO.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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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자참봉배공묘갈명병서
- 광주시 서구 풍암동 운리마을미상이 효자참봉배공묘갈명병서(孝子參奉裵公墓碣銘幷序)
- 2018-12-01 | NO.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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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자천선당광산김선진행적비
- 광주시 남구 원산동 916-8 황산사 아래1956년황산사 아래 천선당 김선진행적비가 있다. 김해김씨 문중에서 건립했다. 행적의 내용은 노조모와 편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여 향리의 효자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라는 점이다. 풍적비 옆에는 풍산홍씨 실적비도 함께 세워져 있다.효행비 내용은 다음과 같다.김선진 효자는 홀로된 어머니를 모실 때 겨울에는 따뜻하게 하고 여름에는 서늘하게 하였으며 어머니의 명령이 있으면 거역하는 일도 없었고 게을리하지도 않았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어버이를 모시는 정성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항시 비통하게 여기며 눈물을 흘렸고, 애절하지 아니할 때가 없었다.14세에 평택임씨 석주(錫周)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부인은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의 후손으로 법도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단정하고 얌전하여 김효자와 좋은 배필이었다. 효성으로 시부모를 섬기니 집안 모두가 화목하며 얌전한 며느리라는 칭송이 높았다. 그 뒤 남편은 부인에게 어머니 봉양을 당부하고 현와(弦窩) 고선생(高先生)을 찾아가 2년여 글공부를 하였다.효자는 23세에 태학생(太學生)으로 성균관에 들어가 학업을 닦으면서 훌륭한 선비들과 함께 어울렸으니 이는 자신의 문견(聞見)을 넓히려는 것뿐 아니라 어머니의 열행을 표창하고자 하는 성심이 있었기 때문이다.서울시내 큰 선비님들 모두 다 김효자의 효성에 감동되어 찬양하는 글을 써 주었으며 원근(遠近)을 막론하고 선비 모두 다 홍씨(洪氏)의 특별한 열행을 알게 되었고 각 고을 향교 통문과 각처 서원에서 보내 온 글은 한권의 책이 되었다.김문발이 세운 부용정(芙蓉亭)이 타인의 소유가 된 것을 김효자가 단독으로 완원시켰으며 또한 해마다 7월 백중이 되면 쌀 두어 섬으로 온 마을 궁핍한 분들에 나누어주었다. 1944년에는 일본 사람이 교묘한 계획으로 물품을 이용하여 민간인들에게 이익을 착취하는데 도청 군청 면사무실까지 모두 동화가 되었다. 김효자가 단독으로 거역 파괴운동을 전개하여 이 부정을 신문에 기재 보도하였으니 이는 모두 다 김효자 30년 전 일로 어머니 명령을 받들어 거행한 것이다. 세상 모두가 대의남자(大義男子)로 칭찬하였건만 불행하게도 단명하여 34세의 나이로 1949년 11월 2일에 죽었다. 하늘은 어찌하여 수명을 주는데 인색하였을까 김효자가 겨우 청장년 시절을 살았지만 그 의로운 행동은 노성(老成)한 사람 같았다. 그 어머니는 지금도 70의 나이로 건강을 누리고 있으며 선조님의 부용정 역시 아무 탈이 없고 관리 도적 행위도 없으니 기타 제반 일은 가히 미루어 짐작하겠다. 아~ 김효자로 하여금 지금까지 생존하게 하였다면 행정가들 본을 받아 변화하였을 것이니 어찌 몸을 닦고 행동을 독실히 하는 선비라고만 하겠는가.<원문>省以日溫淸如時一經慈候之命則勿逆勿怠恒時悲痛者幼孤不能盡誠於嚴君皇靡逮讀主衰蓼莪之淚省楸顔丁不及其返而息無時不切十四歲?平澤林錫周之女琴湖諱亨秀后生長于壺則之門端莊幽閒德配君子誠孝事舅姑堂內和集皆以貞婦稱君自後奉偏慈命負?于弦窩高先生門二十一杖策于鹿洞書院責課數年二十三復往從太學生于成均館學業成家遍遊於長德宿儒之門非直以博吾聞見以其慈候表彰之誠心也京鄕鴻碩皆感君誠孝而贈之以?善之筆用是遠近士友皆知洪氏特節之行各郡通狀及散處院宇兪文積以卷軸監司公所築漆石芙蓉亭爲人所執君濁0金額而還完且每歲百種之節以白米數石賑恤鄕里之窮之歲甲申日人以巧?之物品欲取利于民間自郡道廳以至各面室皆和同之君獨力拒破之大運動元解至於新聞記載此皆君三十前事而奉行親命者也世皆以大義男子稱之不幸短命以三十四己丑十一月二日切其奈天壽何可欲者君之生世也?逾壯年其行義之起越乎老成如許孝烈之親化疾尙今康寧七十而先祖芙蓉亭天然無患冠賊之行肆見?而破之諸盤從可推矣噫使君至今在世則行政者取法不法者見化豈徒爲修身篤行
- 2018-06-15 | NO.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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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자통정대부서산정공봉서지려
- 광주시 동구 운림동 5691937년이 효자통정대부서산정공봉서지려(孝子通政大夫瑞山鄭公鳳瑞之閭)는 효자 통정대부 서산정공봉서지려(孝子通政大夫瑞山鄭公鳳瑞之閭)는 서산정씨 정려각내에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비문 정리중)粤昔 英孝大王丁巳之歲湖南断御史李永益以光州鄭瑞孝行若共妻田氏孝烈雙行若其 德邦孝行事請旌褒以其曾孫東鉉奔走而暴之也竟蒙允, 賜ft復其嗟乎伊來年間子姓弱未遑建設迺於丁丑之秋公六世砰 以其王考萬在遣託承命於其祖母河ǐ鄭氏出遺財將設 閻與其宗孫 錫及郷浦i 別擇瑞 山下武陽之地樹礎以石材藥之侈其旌使鄭賢九鄭潤 莞謁余以記之辭不獲照拨 綱錄及光2誌閱其狀公字賢擧號晚梧官通政大夫以其孝也孫系出瑞山高FR壁::功臣都僉讀端山君諡喪,烈公諱仁鄕后淸白吏吏曹判祺諱珣十一世孫高祖諱有伸蚊樞曾祖諱得祥祖諱萬弼,諱朝海嘉妣貞夫人全州李氏秀女公以肅廟庚寅二月九日生卒於州窮丁亥十二月二1,六日亨年五十四歲葬於德林山先を下負乾原 碣初配水原崔氏致大女無育繼配秋城田氏萬鐘女擧三男二女男長曰德孝男時民次ㄩ德悌男浜民五氏次日德邦男喆民彦民福民女敏哲文哲奎南平人 ǐ耽津崔宗勳以下: 之惟貝鉉福民2R男也公生潁悟在匍匐,2,跪足飲乳絶不啼哭室堂無烂歳惟嬉疾走仆地被親責.自其後行步安祥終身疾走六歲失持俯伏床下哀哭競殒九歲小學2团抗應對進退之節毫無 錯晨昏之省自有定刻里人之以鄭小學 六歲而冠以敬身爲箴俗有百會 1而公獨然處髮初無虧損家甚貧菽水難繼公肃則耕漁以供甘旨夜則侍親讀書面目。手足胴坻自不知勞侍親齊湞史不雖手執,,剉2煎之一不委他夜不解带呼天願保及其危篤其妻淑夫人田氏斫指進血幸得甦明年親病又篤田氏ㄡ斫指進血以廷三日意遭娘夫婦哀毁斐至減性公盧墓三会 寺????繡衣金順掩足從造虞見其實行嘉而餽之公以哀毁成崇屢年呻吟郤而田氏連裂五指灌血以廷三日之命公託田氏以教育子女言訖而逝田氏恤在郎欲下城了指六年在天成扶持哀懇行往坐臥緊不捨田氏不能自我以効遺也忍 十年自成藥00餌。効而至絶德邦斷指進血甦而廷三日德邦居喪易,,主亦盧墓三年繃衣李公勉昇邡鳴呼有是夫而有足婦有是父是母而有是乎卓行異蹟,詳萃一家所以系人口林州守之篤直根句寔啓前後相繼加之以肖孫束鉉額而暴之竟有是 命又有萬,在之孝思經營遺滷未果而歿喪若孫重其遺不私其道財而紈 中以玄怷没阿錫昞冕之輩ffi其但 綱欲堡却有三孝烈之門巍然若靈光以警萬目奚獨爲鄭氏之幸其亦有補於世散云爾嘉善大夫巫文館1 提學原任何閣檢校待敎世子宮侍講院檢校說書藝文館檢校制誥完山李範錫撰ill政大夫行侍俎亮侍倂違城徐丙斗書並篆
- 2018-11-11 | NO.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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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자함안윤공광훈 열부유인나주임씨 효열실적비
- 광주시 남구 행암동 9, 구남마을 광유재 앞1986년효자함안윤공광훈열부유인나주임씨효열실적비(孝子咸安尹公光訓 烈婦孺人羅州林氏 孝烈實蹟碑)는 1986년에 세웠다.관산 고광열이 글을 짓고 전주 이학용이 글씨를 썼다.
- 2018-06-11 | N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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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석오준선묘역
- 광주시 광산구 본동로 158오준선吳駿善(1851~1931)의 본관은 나주(羅州), 자(字)는 덕행(德行), 호(號)는 후석(後石)이다. 현재의 광산구 삼도동 도림에서 출생하였다. 기정진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방대한 분량의 저술인 <후석유고>를 남긴 한말 유학자이다. 특히, 그는 1910년 망국 직후 일제가 지급한 이른바 은사금(恩賜金)을 거부하였으며, 용진정사(湧珍精舍)를 지어 1917년부터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한말 의병장의 열전-기삼연, 고광순, 김준, 전수용-을 저술하였다. 그가 사망한 후 후손들이 이곳에 그를 안장하였다. 후석 오준선 묘역은 나주오씨의 제각인 빙설당 주변에 자리하고 있다.
- 2018-12-02 | NO.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