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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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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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효녀정석남실적비
    광주시 남구 진월동 201-2번지1960년대효녀 정석남 실적비(孝女鄭石南實跡碑)는 옥천사 경내에 위치해 있다. 옥천사에서 정석남이 전답과 임야를 기부하여 이것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보이며, 건립 시기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1960년대로 추정된다. 1980년대 동성고등학교 부지에 편입되어 비의 흔적이 없어졌다.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대체적으로 효도는 온갖 행동의 근원이기 때문에 남녀(男女)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다 우러러보니 불효를 하고 편안한 자도 있지 않았으며, 또한 효도를 하고 위태로운 자도 있지 않다는 것을 공통된 떳떳한 이치이다. 이러기 때문에 불효한 자식은 재앙을 받으며 약 천만명이나되는 효자에게 하늘은 반드시 보답이 있으니 감응이라는 이치가 있지 않을 것인가!아~ 하늘과 땅이 번복이 되고 육지가 바다가 되어 인간의 윤기가 끊겨 같은 씨족끼리 서로 죽이고 죽이니 이처럼 참혹한 때에 다행히 여사(女士) 한 분이 있었으니 성은 정(鄭)이요 이름은 석남(石南)이다. 동래(東來)정씨 정운선의 따님이며 어머니는 추계추씨(楸溪秋氏)이다.광주시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이 부모님을 잃었으니 아들 재장(載長)이도 운수 기박하여 일찍 죽었다. 아들 딸 혈육하나 없는 신세가 되었건만 하늘도 그를 보호해 주지 않았으니, 그 정성이 가엾기만 하다. 그러나 한결같은 효심은 조금도 쇠퇴하지 않아 친정 부모님 섬기는 마음으로 시부모를 섬기는데 마치 남편을 섬긴 것 같이 하였다. 일찌기 과부가 되어 혈혈단신인 그는 세상에 의지할 곳이 없었건만 시부모님이 죽자 10리밖 옥녀봉(玉女峰) 동쪽 자락에 안장을 하고 옥천사(玉泉寺) 주지에게 금호답(芩護沓) 3백평과 전(田) 8백평 산(山) 5백평을 바치고 옥천사로 하여금 영원히 향화(香火)를 끊어지지 않게 하였는가하면 묘(墓) 아래 비석을 세우기까지 하였다. 그 가엾기만한 정성을 하늘은 어찌하여 도와주지 않았을까.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여 칭송하지 않을 것인가.孝女鄭石南實蹟碑夫孝子百行之源也 高無論男女貴賤人皆仰之而未有不孝而安者亦未有孝而危者通理之常也是以不孝者惹災愆若萬千孝者則天必有報焉不有感膺之理裁嗚呼方令天地飜覆大界陸沈倫綱睪絶同族相殘如彼慘酷之秋幸有一女史姓鄭名石南東來鄭云先之女母楸溪秋氏生於光府早失怙恃自子裁長運命奇薄膝前金之一男女之血續而呱呱此凡生亦無所天之可保其精可謂惕矣然一孝心不衰雖若施孝於父母舅姑恨及於風樹己矣若事君子早年獨寡一辰單身闡顧一世無處可施母死昔年躬白歹無葬於祈外十里許玉女峰東麓口坐原托於玉泉寺住持而禁護畓三百坪田八百坪山址五百坪屬於本寺將營永世香火不絶親墓下亦以宛不離親之意將之意將古亥隧而立短碣表其陰則其實精可矜可慘天胡其然嗟裁不南行過者孰不嘖
    2018-06-13 | NO.31
  • 효부고성이씨기행비
    광주시 남구 노대동 707번지 신기마을 뒤편 양양재(洋洋齋) 1984년이 효부고성이씨기행비(孝婦固城李氏紀行碑)는 원래 남구 노대동 노대마을과 구암마을 앞 사이 들판에 비각을 갖추어 1984년에 세웠다. 비석의 내용은 김해김씨 집안으로 시집을 와서 행한 효행 사실을 국한문 혼용체로 기록되어 있다. 장흥 위계도가 찬하고 신천 강인환이 글씨를 썼다. 이 비석은 도시개발로 인해 양양재로 옮겼다.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광주 사는 김해김씨 김호송(金鎬松) 늙은이가 벽부산(霹富山)에 있는 나의 집을 찾아와 그 아내 고성 이씨의 행적을 이렇게 말씀하였다. 나의 처가 17세에 나의 집으로 출가하여 공경히 시어머니의 뜻을 계승하였다. 어머니의 생모 즉 나의 외할머니 밀양박씨가 아들이 없었으므로 우리 어머니가 모셔와 봉양을 하였다. 박씨가 풍병을 만났는데 20년간을 부축하여 기거(起居)하도록 하였는가 하면 똥 걸레를 빨고 목욕을 시키는 일까지도 이씨가 항상 담당하였다. 나의 어머니 해주최씨(海州崔氏)가 나이 50에 정신이 혼미하여 자신을 감당하지 못하고 또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니 더러워진 요, 이불과 의복을 세탁하여 수시로 바꿔 주었는 데 엄동설한에는 그 손등이 찢어졌다. 또 나의 어머니께서 간혹 굶주린다고 하실까 두려워하여 고기를 잡아 봉양을 할때 사내들도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자 나의 처(妻)가 말하기를 자녀(子女)의 신분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하고 4년동안을 하루와 같이 하였다. 자식하나 없어 락(樂)을 부칠 곳이 없는 사람이나, 먹을 것이 없는 가난에 시달린 사람들을 따스하게 감싸아 조금도 개의치 않았으니 나 또한 그를 위로 해주고 싶다. 방언(方言)에 이르기를 아내의 덕화를 언급하는 것은 왕이나 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오직 나는 이 경우와는 다르다. 내가 능히 할 수 없는 일을 그대가 능히 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그대의 정성에 감동되어 글 한편을 써 줄 것을 요청한다고 하였다. 나 역시 그 애기를 듣고 감동되어 사양하지 않고 써 줄 것을 허락하였다.光州老大 金海金鎬松이 訪余于霹菩山中之 寓舍하야 道其妻 固城李氏之行하여 日君이 十七世에 歸于吾家하여 敬承姑之志하고 及吾母之母 密陽朴氏가 無嗣하니 吾母迎而養焉하다 朴氏嬰風痺하야 二十年을 起居須人하니 滫瀡與屍溲洗滌을 君이 常擔之하고 吾母海州崔氏年將八十에 昏耄하여 不能自持하고 又不省事하니 衾褥衣服之泗穢를 隨時易之할세 常隆冬에 手軍皮裂하며 且恐吾母之或有飢寒色하야 求胞而供之하니 人有難之者어든 君日女子의 分上에 當爲之事라하고 四年을 如一日하다. 渠無一子而無寄樂이나 但茹苦耐艱을 怡然不介意하니 吾亦慰之하다 諺에 云하되 言妻德은 爲狂이라하나 然이나 惟吾則異於是하야 吾之所不能을 而君이 能爲之하이 是以로 吾感君之誠하야 請爲數行文이라하여 늘 余亦聞而感之하야. 不辭而諾之하다. 噫리 當今象族之制散하야 子而不承其文하고 婦而不養其始어늘 惟李氏는 不然하야 遠及姑之母하니 是는 可以爲一世楷範矣라 安得李氏之行하야 以警夫澆俗混世之爲婦女子者하노라
    2018-06-14 | NO.30
  • 효부의령남씨열녀광산김씨지려 / 孝婦宜寧南氏烈女光山金氏之閭
    1740년 宜寧南氏와 光山金氏 두 부인의 孝烈行의 뜻을 기리고자 晋州河氏門中에서 목조와가로 건립
    2020-03-02 | NO.29
  • 효열녀 유인 광산이씨정려 중건기적비
    광주시 서구 금호동 702-37
    2018-12-19 | NO.28
  • 효열녀광산이씨정려 / 孝烈女光山李氏旌閭
    광주광역시 서구 금호동1892년 光山李氏의 孝烈行의 뜻을 기리고자 유림들의 천거로 순종이 命旌하여 목조와가로 지은 정려
    2020-03-02 | NO.27
  • 효열부고령신씨기적비
    광주시 광산구 사호동 원사호마을1983년이 효열부고령신씨기적비(孝烈婦高靈申氏紀蹟碑)
    2018-12-01 | NO.26
  • 효열부김해김씨기적비 / 孝烈婦金海金氏紀蹟碑
    광주광역시 광산구 오선동1765년 金海金氏(朴孝東의 妻)의 孝烈의 뜻을 기리고자 儒林들의 뜻을 받들어 門中에서 석조로 건립
    2020-03-02 | NO.25
  • 효열부동래정씨사적비
    광주시 광산구 동호동 본촌마을1982년이 효열부동래정씨사적비孝烈婦東萊鄭氏事蹟碑는 동호동 본촌마을에 위치해 있다. 계산 유인경이 모친 동래정씨의 효열을 알리는 내용으로 1980년에 세웠다. 비문은 이상복이 썼으며, 비의 건립은 증손 유내현이 했다. 다른 기록에는 1988년 나주 나성균이 찬하고  자 노학, 손 원철이 세웠다 한다.桂山 柳公寅敬孝行碑文孝는百行之本으로百行이非孝不立이요萬行이非孝不行이니이에孝를讚美치아니하리요 舊錦治之北章本坊에한孝子가났으니公의姓은柳요貫은文化요諱는寅敬이요字는子賢이요 號는桂山이니始祖는高麗開國功臣大承公諱는車達이요中祖는 端廟郞臣西山先生諱는自湄요壬亂功臣諱希達의九世孫이며章錫命輔興潛基永은高曾祖稱의諱요子는珪烈桂烈이요 孫은在月과傍孫은在沃이요曾孫은乃鉉이요玄孫은浩瑩浩雄浩傑이며外孫은蔚山金堯雲靑松沈相德錦城羅昌柱豊山洪鍾款慶州李鳳載光山金伯訓이로다公은生甫八歲에父親基永公이患憂危重하여母親東來鄭氏가石斤指注血枚口延壽祈願함을보고公이또한쇠망치로破指注血하여甦生캐하니孝童으로名聲이振世하나數年後에父親喪을當하여昊天罔極哀痛하고疊疊山中梁山幽谷十里許의元堂墓所에呼哭徘徊하다가黃昏에歸家하면白虎가護衛하였으니 可謂出天之孝로다幾年後에桂峰山下癸坐原에緬奉하고墓下에서平生을居廬하였으며詩書에能하여京鄕各地의名士와詩文을交流하였고偏母를至誠으로奉養하다가親患10年에侍湯如一로以盡其誠하고母親別世에哀毁骨立하여侍墓三年에盡其情禮하니子孫이濡梁家訓하여孝孝承承하도다1918年戊午七月十五日享壽六十八歲로考終于寢하시니鄕里는咸하였고儒林은이行蹟을羅州와後에光山郡誌에登載하였도다이碑를墓下에세우니後人이여 矜式하소서西紀1982年 壬戌 2月 10日 曾孫乃鉉세움 慶州 李相福 글씀
    2018-11-18 | NO.24
  • 효열부문화류씨실적비
    광주시 광산구 덕림동 고암마을, 경위도좌표: N 35˚10´52.8″, E 126°40′36.5″  1944년이 효열부문화류씨실적비(孝烈婦文化柳氏實跡碑)는 문화류씨 문중에서 관리한다. 柳寅瑗이 찬했다.
    2018-12-01 | NO.23
  • 효열부문화유씨행적비
    광주시 남구 대촌동(이장동) 복수마을1964년장흥고씨 문중에서 건립한 효열부 문화유씨 행적비는 이장동 복수마을에 있다. 장흥고씨 문중에서 1964년에 건립한 비석이다. 비문은 김준식이 편찬하고 김정회가 썼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몸소 효도와 열행을 실천하여 천만년 강상(綱常)을 책임하고 아름다운 풍속을 세워 한 시대의 이목을 집중시킨 사람이 있었으니 최근 고재열의아내 문화류씨이다.아~ 아침햇살에 기러기 노래하였건만 부부의 정을 느낀 것은 반년도 채 못되었고 저녁 노을에 까마귀 우니 천만년 사별이라는 흉측한 소식이 갑자기 알려졌다.누가 알았을까 16세 어린 나이 꽃다운 세월인데 희미하고 아득하기만한 억천(億千)의 고통을 잘 견디어 낼 줄이야, 여자의 삶을 저 연약한 풀과 티끌과 같다는 뜻으로 개가할 것을 깨우쳤건만 자식이 없는 홀어미의 비웃음거리가 되어버렸고, 그리하여 가을 서리가 내린 매서운 날씨와 같은 아낙네의 정조는 마침내 사방 사람들의 숭앙하는 대상이 되었으니, 그 열행이야 말로 그 결과가 어떠한가, 의지하며 살았던 친정부모님을 이별하고 돌아와 자식 잃은 시부모를 모셨네. 이 한 몸 처절한 생각을 온전히 감추어 버리고 넉넉한 오로지 두 분 시부모 마음을 편안하도록 잘 섬겼으며, 아침 음식을 장만하기 위하여 등불을 밝히고 길쌈을 하였으며, 낮에는 곡소리를 대신하여 시부모와 이야기를 하였다네, 시부모가 돌아가시자 조카를 세워 승중손(承重孫)으로 삼았다.무너져 간 가정을 들추어내어 끊긴 가문을 계승하였고, 제물을 깨끗이 준비하여 흠향하도록 하였다오, 죽은 시부모 섬기기를 생존 했을 때와 같이 하였다. 큰 행동이 여기에 있었으니 사소한 행동은 가히 추측된다. 그 효도하는 것이 또 이다지도 대단하다. 그런데 이러한 한 분에게 보답하여야 하는 하늘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사람에게 준 자품은 이처럼 풍부하였건만 그 사람에게 준 수명은 어찌 이다지도 인색하다는 것인가. 아~ 큰 기강이 이미 무너졌고 염치가 모두 죽어버렸다. 여인들이 실절(失節)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생이별하는 것을 잘 하는 일이라고 한다.우리의 의관(衣冠)은 오랑캐의 복장 속으로 빠져버렸고 인류(人類)는 짐승으로 변화해버렸다. 이와같은 시대에 국정을 도울만한 자손을 보내어 홍문관(洪文館)에 돌아가게 했고, 대중을 깨우치는 쇠방망이를 빌려 오랑캐를 일깨우는 북을 울렸으며, 이미 소용돌이친 광란(狂瀾)을 되돌렸고 장차 무너져 버릴 인간의 기강을 확고히 심어놓았으니, 바닷물이 마른다 해도 돌이 녹아버린다 해도 이분의 공적은 가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요 하늘같이 땅같이 장구(長久)한 이분의 공적을 기필코 묻혀버리지 않을 것이다.그분에게 수명을 주는데 인색한 것은 그분에게 사후의 복을 많이 누리게 하고자 했던 것이니 이제야 하늘의 뜻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감히 고증없이 이 글을 썼겠는가. 세상 여론에 의해 이 글을 서술한 것이다.1964년 10월 15일 영광 김준식 짓고안동 김정회 쓰다躬烈孝而任萬古之網常樹風聲而集一世之觀廳者近古高君在烈夫人文化柳氏是月嗚呼贋雝旦浹半襈之情思烏啼夕暉忽報千古之凶信誰知二人妙少之光陰能抵億于迷范之塵劫唆披弱州車巫塵之諷可啞匹婦之無知繫此秋霜烈日之威竟爭四隣之仰止其於爲烈也何如也若夫歸訣倚門之爺孃還侍西河於姑舅渾藏悽絶一巳之思專事寬譬而堂之心朝供因於續燈書哭代以唯諾逮尊章之下世立滋子而承重擧廢而繼絶精禋而致享事死如事生事之如事存六經在此細節可推其於爲孝也又何如哉然而不能無說於報施之天稟其姿之何若是其豊而賦其命之何若是嗇也噫大防之壤廉耻道喪以失節爲當然以生離爲能事衣冠淪於世服人類化爲素翔于時也送相國之孫而歸弘文之門借警衆之鐸而鳴膺犭犬之鼓回狂瀾于旣倒植人紀於將瀡海可枯石可爛斯功不可抹夫之長地之久斯蹟必不扌垔嗇其命乃聃以厚其餉於是乎知天意之攸在矣敢無稽而饒筆舌依輿論而述銘章 歲在甲辰冬十月旣望 靈光 金駿植 撰 安東 金正會 書2018.11.28. 수정
    2018-06-15 | NO.22
  • 효열부밀양박씨기행비
    광주시 북구 대촌동 953(대촌식당 맞은편)1969년이 효열부밀양박씨기행비(孝烈婦密陽朴氏紀行碑)는 邊時淵 짓고 李炳玹 쓰다.
    2018-11-13 | NO.21
  • 효열부영천이씨송적비
    광주시 광산구 본량동 풍숙마을(남산동)1984년이 효열부영천이씨송적비(孝烈婦永川李氏頌績碑)는 광산구 본량동 풍숙마을의 북쪽 끝 얕은 산자락에 1984년에 세웠다. 대리석 비각이 갖추어져 있으며 오석에 비문을 음각으로 새겼다.孝烈婦 永川李⽒는 永陽郡 ⼤榮의 后인 惠⺠院主事 秉夏의 女로 ⻄紀 1912年 壬⼦正⽉⼆⼗⽇에 潭陽郡 ⼤⽥⾯ ⼤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孝誠이 ⾄極하여 定省의 節을 다하고 ⿇絲紅⼯에 四德을 兼備하였는데 年⼗九에 羅州 吳龍烈에게 出嫁하였으니 곧 羅城君 諱 ⾃治의 后인 ⼠⼈ 準⽄의 ⼦婦이다. 孝烈婦는 婚禮만을 겨우 마치고 新⾏前에 突然 그 夫君이 臥病했다는 消息을 듣고 바로 달려가서 斷指注⾎을 하고 百⽅으로 加療를 하였으나 마침내 他界하고 말았다. 孝烈婦는 그로부터 ⻝飮을 全廢하고 下從하려고 자리에 누웠으나 媤⽗⺟님의 懇切한 開諭로 옳게 여기어 바로 일어나서 事親奉先의 節을 다하는 한편 紡績을 爲業으로 하여 家勢를 隆昌시켰다. 그후 媤⽗⺟께서 千年을 다하니 ⼀遵禮制로 遂從의 節을 다하였다. 한편 孝烈婦에게 天⾏으로 遺⾎이 있어 ⽣男을 하니 사랑으로 잘 기르고 가르치니 ⽂⺟나 孟⺟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아들 點敎는 자라서 孝烈婦의 뜻을 어김없이 그 家業을 이었으니 孝烈婦의 맺힌 한이 풀렸다. 이 事情을 안 光州鄕校典校 朴夏構와 光州儒道會⻑ 朴種道와 光州 慕聖會 鄭海英 등의 鄕儒가 薦擧하니 ⻄紀 ⼀九⼋⼆년 光⼭郡守 朴炯寅의 表彰을 받은 바가 있었다. 그후 모든 公議가 孝烈婦의 ⾏績은 可謂 ⼤冬松栢이요 昏街明星과 같다고 稱頌을 아기지 않았다. 아, 처음의 뜻을⼋⼗平⽣ 變함 없이 그대로 행하였으니 凜烈의 氣가 九曲에 畜積된바 아니면 어찌 이와 같으리요. 從⼦敎喆 珍敎 亨喆이 抱狀하여 孝烈婦의 ⾄⾏ 卓節은 始終이 예에 變함이 없으며 지금에 부끄러움이 없으나 때가 옛과 달라 旌褒를 물음이 없으니 누가 이를 거두어 光金明珠를 滄海沙礫의 사이에 묻히지 않게 할 것인가. 그러나 고을의 여러 입에 새겨졌으니 어찌 永世不泐⼒함이 아니겠는가⻄起 ⼀九⼋四年 甲⼦ 正⽉ ⽇ 羅州 吳國烈 撰甲⼦ 三⽉ ⽇ 晋州 鄭忠燮 書
    2018-11-10 | NO.20
  • 효열부유인경주이씨기실비
    광주시 남구 석정동 570-12015년이 효열부유인경주이씨기실비(孝烈婦孺人慶州李氏紀實碑)는 학교법인 송원학원 고제철의 맏며느리로 남편이 6.25 전쟁으로 1953년 전사하였고 슬픔을 이기지 못해 음독하였다가 회생하여 1년여를 와병 중에 1954년 운명했다.고제철 송원학원 이사장 주관으로 이 비를 세웠다.
    2018-12-01 | NO.19
  • 효열부최씨의적비
    광주시 남구 월성동 573. 학촌마을1978년이 효열부최씨의적비(孝烈婦崔氏懿蹟碑)는 김종억(金鍾億)의 처로 효열의 사실을 기록한 비이다. 광산김씨 문중에서 관리한다.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옥은 그 자체가 부서질지라도 그 흰빛은 변하지 않은 것이요, 대나무는 그 자체가 불에 탈지라도 그 절계를 훼손하지 않는다. 최씨 부인의 곧은 절계는 더 더욱 독실하여 마치 가을 서리와 밝은 햇빛과 같았기에 이웃 마을까지 감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부인의 성은 최씨이고 본관은 탐진이다. 부상(富相)의 딸로 장경공 사전(思全)의 후손으로 1904년(甲辰) 8월 8일 광주시 동곡면 신기마을 본가에서 태어났다. 그 자질은 정숙하였고 심성은 인자하였기에 친정에 있으면서 어버이를 섬길 제 효도하였으며 네 가지 덕목까지 갖추고 있었다.나이 겨우 16세에 김씨 가문으로 출가하여 시부모 섬기기를 친정 부모를 섬기듯하여 혼정신성(昏定晨省)을 멈추지 않았으며, 몸에 필요한 물건과 입맛에 맞는 음식은 항상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시부모께서 병석에 눕자 근심 걱정을 하며 탕약을 지성으로 끌이고 북두칠성에 시부모의 수명 연장을 기원하였으나 갑자기 내외분의 초상을 당하여는 땅을 치며 애통하며 예절에 맞게 장례를 마치었다.남편을 모시기를 지극히 정중한 모습으로 하였으며 화려한 몸치장은 좋아하지 않았고 경솔한 태도는 조금도 없었기에 가정은 화목하였으며 세상사람들은 현철한 여인이라 칭송하였다.남편 김종억의 호는 석은(石隱)이며 본관은 김해(金海)이니 문민공 탁영(이름은 馹孫)의 후손인 계곤(桂坤)의 아들로 1897(丁酉)년에 동곡면 침산리 본가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타고난 자품이 인자하고 성품이 관대하여 어버이를 섬길 제 어버이의 뜻을 잘 따랐으며 부인 최씨와 서로 더불어 봉양하는 도리와 초상때 장례를 모시는 절차를 의논하여 정성과 예의를 다하여 마침으로 마을 사람 모두가 우러러보았다.남편이 1940(庚辰)년 봄에 우연히 질병을 얻어 탕약의 효험이 업자 부인은 목욕 재계하고 자신을 남편대신 데려가라고 하늘에 축원하였다. 천명이란 대역하기 어려운 것이기에 홀연히 타계하니 4월 14일이요 향년 44세였다.최씨 부인은 땅을 치며 불러보았건만 따라갈 수 없는 길이기에 어린 자식들을 생각하고 차마 그 뒤를 따르지 않았다. 장례를 모시는 모든 절차를 반드시 옛 예법을 따라 광주시 대촌면 월성리 학촌 앞산 자좌에 안장하였다. 그 당시 부인의 나이 37세에 하늘같은 남편을 잃고 애통함을 억누르며 자녀를 양성 교육하여 혼인할 때를 잃지 않았으며, 그 가문을 잘 보호하면서 40년 가까이 정렬을 지켜왔으니 어찌 순시간에 남편의 뒤를 따라간 아낙네들보다 더 낳지 아니한가?하늘과 땅의 위치가 바뀌고 더러운 풍속이 세상에 가득하여 오륜(五倫) 삼강(三綱)이 무너져버린 이때 부인은 굳굳이 정절을 지켰으니 앞에서 이른바 옥이 부서지고 대나무가 불에 타더라도 그 흰빛은 변하지 않고 그 절계는 훼손되지 아니한다는 것이 이 최씨를 두고 지적한 것이 아닌가!부인이 1남 3녀를 양육하였는데 아들 준수(俊洙)는 일찍이 죽었고 딸은 삭령 최순환(崔淳煥) 전주 이성한(李星漢) 청주 김동영(金東英)의 아내가 되었다. 외손자인 현호(鉉鎬) 현관(鉉官)은 최씨의 소생이고, 동채(東彩)와 동주(東柱)는 이 서방 소출이며, 이열(利烈)은 김서방 소출로 나머지 손자들은 기록하지 않는다.아~부인의 효열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한 것이기에 그 사위들이 협력하여 비를 세우기로하고 최순환을 나에게 보내어 비문을 부탁하였다. 나는 누차 사양하다가 하는 수 없이 우와 같이 대략 기록하고, 무너져간 풍속을 바로잡는데 보탬이 되게 하고자 새기도록 하였다.1978년 1월 하순 월성(月城) 최윤환(崔允煥) 짓고송파(松波) 임종일(林鍾日) 쓰고1978년 3월 일 세우다.
    2018-06-17 | NO.18
  • 효열부풍산홍씨실적비
    광주시 남구 원산동 961-81956년 이 효열부풍산홍씨실적비(孝烈婦豐山洪氏實蹟碑)는 황산사 아래쪽 도로변에 위치해 있다. 김해김씨 문중에서 건립한 비석이다. 주변은 대리석의 돌기둥을 세워 돌담장을 둘러 비석을 보호하고 있다.효열부 풍산홍씨 실적비는 아들인 김선진행적비와 같이 원산마을 황산사 바로 밑 도로변에 있다.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듣는 바에 의하면 풍산홍씨는 친정에서 효도하는 마음으로 시부모를 섬기니 시부모가 말하기를 며느리가 나를 잘 섬긴다며 그 남편을 경계하니 그 남편은 매우 사랑하여 마음에 들어하였다. 1922년에 부인의 나이 겨우 22세에 남편이 갑자기 괴질에 걸렸다. 부인께서 밤낮없이 의원을 모셔와 약을 지어 다리는 것을 일삼았으며 똥을 맛보아 그 차도를 징험하였다. 단을 만들어 새벽마다 정화수를 올리고 하늘에게 축원을 하였으며 그가 운명을 하려하자 그는 손가락 피를 남편의 입안에 주입시켜 거의 끊어져 간 수명을 되살아나도록 하는 것이 누차였다.그는 장차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부인에게 부탁을 하여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충효와 절행을 지켜온 가문인데 자신의 대에 미쳐 멈춘 것 같습니다. 이제 내가 불행하게 될 것 같으므로 집안 일을 부인에게 부탁하니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홀어머니와 젖먹이 고아를 잘 보살펴 뒷날 계승을 끊어지지 않게 한다면 지하에서나마 눈을 감겠습니다. 하고 곧 바로 운명을 하였다. 부인은 정신을 잃고 땅에 넘어져 기절하였다가 다시 살아난 것은 남편의 뒤를 따라 가려든 마음이 죽어간 남편께서 임종시 부탁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부인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장례를 치르고 제사를 모시는 일까지도 하나 하나를 예절에 맞게 하여 조금도 부족됨이 없게 하였다. 시조부 시조모님 초상을 당하여서는 몸이 수척하도록 서러워하며 괴연을 받드는데 옛 제도를 따랐다. 시어머니에게는 가려운 곳을 긁어주기도 하고 눌러주기도 하며 좋은 약을 일찍이 떨어지지 않았다. 평소 가족끼리 이간질하는 말이 없었으며 시집을 보내고 장가를 보내어 분가시킬 때는 최대한 인정을 쏟았다. 그 시어머니 초상을 치른 나머지 전답은 모두 팔아 없어졌고 부채는 계산할 수 없었다. 부인께서 밤이 새도록 베를 짜고 바느질을 하여 두어 해에 부채를 모두 청산했는가 하면 문중 토지를 되찾아 종가에 환원하고 남에게 압류된 산지는 거액을 주고 되찾았다. 젖먹이 고아가 점차 성장하자 책을 짊어지어 현화 선생에게 보내면서 항상 경계하라며 말하기를 과부의 자식을 보고 듣는 것이다하여 벗을 삼지 않으려 하니 너는 모름지기 행동을 독실히 하여 동료들에게 좋은 심덕과 진실을 보이라고 하였다.그는 집안에서 더 은의(恩義)를 베풀면서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접대하는 도리에 일찍이 게을리하지 않았다. 해마다 마을 굶주린 자들에게는 많은 쌀을 주어 구원을 하였고 아들을 위해 독서실을 지어 이름하여 청제헌(晴霽軒)이라 하였다. 아들 선진(善鎭)이 장성하여 두아들과두 딸을 두었는데 딸은 나주 오근구(吳根求)에게 시집을 갔으며 다른 남매는 아직 어리다.선진이 서울에 유명한 학자들을 찾아가 학문을 토론하고 노닐면서 가풍을 잘 계승한 부인께서도 매양 그 말을 잘 따랐으며 자유로 하지 않았다. 감사공(監司公) 김문발이 세운 칠석동에 있는 부용정이 남에게 소유권을 빼앗겼는데 아들 선진을 명하여 단독으로 거액을 지불하고 되찾으니 온 집안에 화목을 다지는 기운이 가득하였다. 고을 또는 도내선비들이 올린 천장(薦狀)에서 한나라진효부와 영여(令女)의 지극한 행동에 비유하였으며 성균관을 비롯 각 향교또는 서원에서 많은 찬양문을 제출하였다.<비문 원문>之素聞移孝事舅姑姑姑曰善事我敬戒夫子子子甚宜之歲壬戌夫人年才二十二其夫忽羅奇疾夫人不擇晝夜以迎醫合藥爲事舍置餘事嘗糞以驗其差劇湯藥必親手晨昏井花設壇以木兄天及其隕絶以脂血注口幾絶還甦如是者累矣知其將不免囑夫人曰吾家是忠孝節行之家及於身而止今也不幸以家事托夫人善養五王父母與偏慈及乳孤而不絶後嗣則地下之目庶幾可暝奄然而終夫人蒼黃顚制?地氣絶而還甦盖下從之意不勝亡夫臨終之託也初終葬祭一一稱禮而少無遺憾後當王舅姑憂衰毁之節?尊之奉遵古制偏慈在堂抑搔撫問藥餌之供未嘗之絶平日嫂叔??庭無間言嫁娶分戶極稱人情及其哭偏慈也比於前喪尤極備禮疊故之餘田地盡沒負債無弄晨夜績織裁縫不過數載而淸了素來遺業沒數還復宗家山地之見執者以巨額復完家度稱敍乳孤漸長使之負?于弦窩先生門常自戒來力曰寡婦之子非有見焉不與爲友汝須節勵篤行使朋?有好德之實也其於堂內尤盡恩義奉祭接賓之道未嘗懈惰雖在鄕憐之餓每多賑恤之爲子別築讀書之室曰晴霽軒善鎭長成有二男二女女出嫁爲羅州吳根求室餘幼善鎭從京鄕有名之家學業克承家庭夫人每從其所言不自專監司公所築漆石芙傭亭見奪於人命善鎭濁金額而遺復家中雍睦和氣滿室鄕道士林薦狀擬以漢陳孝婦令女之行至成均館各鄕校祠宇儒會所贊湯之狀昏奉 2018.11.28. 수정
    2018-06-15 | NO.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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