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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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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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방사유허비
    편방사(片坊祠) 유허비(遺墟碑)는 <광주읍지>에 따르면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음기(陰記)가 있다.최초의 경렬사는 인조 22년(1644)에 현재 광주광역시 동구 동명동 74번지에 편방사(片坊祠)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었다. 이곳은 정지 장군이 말년에 낙향했던 곳이 광주목 편방면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경렬공 정지 장군만을 모시다가, 1718년에 그의 9대손인 금남군 정충신을 비롯하여 설강(雪江) 유사(柳泗), 송설정(松雪亭) 고중영(高仲英), 구성 전상의, 송암(松菴) 유평(柳坪), 고중영의 아들 구암(龜岩) 고경조(高敬祖), 시은(市隱) 유성익(柳聖翊) 등을 추가하여 8현을 모셨다고 유허비에 기록되어 있다. 때문에 이 경렬사를 팔현사(八賢祠)로 불렀다. 그러던 중 경렬사는 1868년(고종 5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毁撤)되었다. 1893년(고종 30년)에는 그 자리에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지게 되었다. 지금은 경열사 경내로 옮겨졌다.이후 일제강점기 때인 1921년에는 정지 장군의 문중에서 나주 노안면(老安面) 금안리(金鞍里)에 이 사우를 다시 설치하여 경열사라 이름 하였다. 현재에는 나주경렬사(羅州景烈祠)라는 이름으로 전라남도 기념물 제196호로 지정되어 있다.
    2018-06-18 | NO.44
  • 평택임씨 삼강유허비/ 정려각
    광주시 광산구 탑동길 93(지산동 277-1 탑동마을 )1915년이 평택임씨삼강유허비(平澤林氏三綱遺墟碑)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전사한 임영수(林英秀)와 그 아들 임계(林桂) 그리고 남편에게 절의를 지킨 아내와 며느리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비갓을 갖춘 화강암제로 되어 있고, 현재 평택임씨문중 소유이다. 비문은 기우만(奇宇萬)이 짓고, 후손 임철주(林哲周)가 썼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무랑(宣務郞) 임영수(林英秀)가 중심인물이다. 그의 가계에 대해 언급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려 때의 명신(名臣)인 충정공(忠貞公) 임언수(林彦脩)가 그의 선조이고, 조부인 임백근(林百根)은 현령(縣令)이었으며, 부친 임휴(林畦)는 의행(義行)으로 천거되어 침랑(寢郞)에 제수되었으나 정국이 어지러워 벼슬길을 달가워하지 않고, 손수 소나무, 대나무, 잣나무를 심고는 ‘삼청(三淸)’으로 자호(自號)하였다.무관(武官)인 임영수(林英秀)는, 계사년(1593년)에 경성(京城)에서 순국하게 되고, 그의 아들 임계(林桂)는 복수를 생각하던 차에, 정유재란(1597년)이 발발하자 이복남(李福男)의 막하에 들어가게 된다. 결국 그는 용성(龍城 남원)에서 왜군을 막다 성이 함락되어 전사한다. 임계(林桂)의 어머니가 이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남편이 죽었는데도 죽지 않은 건 자식이 있기 때문이었다. 자식도 아버지를 이어 죽었는데 나 또한 남편을 따르겠다.”하고는 자진(自盡)하였다. 며느리도 같은 날 자진한다. 이후 ‘이괄(李适)의 난’ 때 임계(林桂)의 아들인 임광윤(林光胤)의 명으로 그의 두 아들 임은(林嶾)과 임두(林㞳)는 공주(公州)까지 인조(仁祖)를 호종(扈從)하였으며, 병자호란(1636년)이 일어나자 임광윤(林光胤)은 군사를 모집하여 가던 중에 화의소식을 듣고 돌아왔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남편이 순국했다고 아내가 따라서 죽는 것은 권장할 만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충(忠)과 효(孝)는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덕목으로 사회를 유지하는 기초적인 것이다. 이 〈평택임씨삼강유허비(平澤林氏三綱遺墟碑)〉에 새겨진 금석문을 통해 4대에 걸친 집안의 사연을 알 수가 있었다. 우리는 평택임씨(平澤林氏) 집안의 희생에 대한 보답을 해줘야 한다. 보답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사실을 기억해주고 그 집안이 자긍심을 갖도록 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집안의 희생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되기에 엄숙한 마음으로 이러한 일을 전하고 기념해야 할 의무가 있다.三綱遺墟碑銘 幷序 湖南爲忠義淵海而平澤林氏爲一指平澤氏爲忠義古家而宣務家又其一指宣務公諱英秀忠貞公彦脩忠簡公成味父子爲高麗名臣寔公六世以上祖百根縣令淸白爲治解紱歸山以終厥世考畦進士薦行義授寢郞昏朝政亂不樂仕進手種松竹栢自號三淸宣務公薦宣傳至部將癸巳殉義于京城子處士桂志切復讐當於丁酉赴李福男幕領兵入龍城城陷立慬妣吳氏聞變曰夫死不死爲有子子又繼父而死吾亦從夫遂自縊子婦鄭氏曰舅死於國姑死於夫夫死於父吾何獨生同日縊死子光胤崩迫累絶廬墓終制自號寸草堂盖自傷於春暉莫報也以上庠主推太學掌議昏朝疏斥廢母浩然歸田里甲子逆适之變遣二子嶾㞳扈 駕至公州丙子典義餉聞媾成痛哭而還士林立祠錦江浚孫將立石於遺墟魯升魯駿俾宇萬記其蹟嗚呼三綱爲極天罔墜底道理其關重於世敎者何如而其生也一門又一里又一家何其偉哉寒山一片雖林氏之私而其補風化豈少助也哉銘曰臣死君爲忠子死父爲孝婦死夫爲烈所在各盡其道胚胎三綱篤生寸草聳珍之南錦江之濱山明水麗生長有村水不忍廢地不忍荒立石而頌碑曰三綱不墜之義古有今亡反今而白是樹風聲 歲乙卯陽復月 日 幸州奇宇萬 謹撰 辛巳十月 日 宗後孫 哲周 謹書 十二世孫 一周 十四世孫 漢京 謹竪
    2018-06-11 | NO.43
  • 필문이선제부조묘
    광주시 남구 원산동 535-1필문이선제부조묘는 조선초의 문신인 필문(蓽門) 이선제(李先齊.1390-1453)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다. 나라에 공훈세운 것을 기리어 신주를 영원히 모시도록 하는 부조지전(不祧之典)으로 건립한 사당이 부조묘이다.광주시 민속자료 제7호이다. 1843년(중수). 부조묘는 포충사 뒤쪽 산기슭에 있으나 원래의 위치에서 50여m 왼쪽으로 옮겨온 것이다. 필문은 광주 대촌(大村) 출신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세자빈객(世子賓客),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등을 역임하였고, 문종(文宗)때는 정인지(鄭麟趾) 등과 『高麗史』편찬에 참여 하였다.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에 돌아와서는 후진 양성은 물론 이 고장에 향약(鄕約)을 베풀어 미풍양속(美風良俗)을 이루는데 모범이 되었다. 이곳 이외에도 강진의 수암서원 오현당(秀巖書院 五賢堂)과 죽산사(竹山祠)에 배향되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앞마루를 둔 맞배집이다. 앞마루는 반폭칸으로 개방하였으며, 툇마루를 놓았다. 공포( 包)는 쇠서 하나를 내어 가운데에 연꽃무늬를 둔 초익공(初翼工)으로 위부분에 용머리 장식을 하였고 마루의 대들보 쪽에는 구름무늬로 처리하였다. 가구(架構)는 고주(高柱) 5량형(梁形)으로 되어 있으며, 도리(道理)는 장혀(長舌)를 받친 국도리를 걸쳤다. 그리고 마루 기둥의 주심도리(柱心道理) 외기둥 위는 납도리를 사용하였고, 두심도리 장혀와 창방 사이에는 소로(小累)를 둔 원반(原盤)을 하나씩 놓았다. 막돌초석 위에 정면만 민흘림 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사각기둥을 세웠다. 마루 밑은 호박돌 위에 동바리 기둥으로 처리하여 바람이 잘 통하도록 밑벽막이 없이 개방하였다. 문은 쌍여닫이 문으로 띠살문이며, 겹처마이다. 고설삼문(高設三門)과 양측의 맞담 위에 기와를 얹어 담을 돌렸으며, 뒤쪽은 언덕으로 둘러 싸여 있다. 부조묘의 뒷산 언덕에 필문의 묘(墓)와 묘비(墓碑)가 있으며, 이곳에서 500여m 떨어진 도로변에 그의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마을 앞에는 필문이 심은 괘고정(掛鼓亭)이라 불리는 수령(樹齡) 600여년의 노거수(老巨樹)가 있어 유서 깊은 이곳의 유래를 상상하게 한다.필문 이선제는 자는 가부 본관은 광주이다. 광주 대촌 출신으로 밀직제학이었던 이홍길의 손자이며 일영의 아들로서 세종1년(1419)에 문과에 급제하고 1423년 고려사를 개수할 때 사관으로서 앞서 정도전 등이 편찬한 고려사가 당시 이색 이인복 등의 급경록에 의존함으로써 사실과 다른 점이 많다고 지적하여 그 부분은 원전에 따르게 했다.세종13년(1431)집현전 부교리로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태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형조와 병조의 참의 강원도 관찰사 예조참의 등을 지냈고 세종30년 (1448) 호조참판으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해 집현전 부제학 정찬손, 우찬성, 김종서, 이조판서 정인지와 함께 고려사 개찬을 관장하였으며 뒤에 세자빈객, 예문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말년에는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에 돌아와서 후진 양성은 물론 이 고장에 향약을 베풀어 미풍양속을 이루는데 모범이 되었다. 이곳 이외에도 강진의 수암서원 과 죽산사에 배향되었다.고설삼문과 양측으로 맞담위에 기와를 얹은 담을 돌렸다. 부조묘의 뒤쪽 산언덕에 필문의 묘와 묘비가 있다.*수정 2023.11.21
    2018-06-15 | NO.42
  • 필문이선제신도비명
    필문이선제신도비명은 광주시 남구 원산동 대로변(대촌사거리와 포충사 사이 도로변)에 있다. 필문이선제유허비와 함께 1957년에 세웠다.光國佐理功臣嘉善大夫行吏曹參判藝文館提學問知春秋館事世子左副賓客慶昌君  贈正憲大夫曺判書藝文館大提學蓽門先生李公神道碑  際 聖朝啓運英碩雲興贊成右文之治類多以經論謨譙章翰詞頌假鳴於一時其能游心理域率履法門循聖賢之塗轍而進則訃君以當道退則倡學一方俾來者有可繼焉盖亦十不二三矣時則有若慶昌君蓽門先生李公者其庶乎爲先覺於草昧之世而不洋於行藏之正其學足以有爲其功足以開後者乎先生諱先齊字家父蓽門號也其先新羅之金也至麗祖時有諱宗金以功賜今姓封光山入傳而日珣白翰林以忠贈尙書左僕射是生奇丹陽府今 贈密直副使生弘吉密直提學生日映府使贈兵曹參判娶密直副使草溪鄭允吉之女以共武甲子生公干光之泥館山下幼而眉字淸瀅神采照人寡言笑重作止儼乎有成人儀屆就傳穎悟絶倫博經史通大義旣而嘆曰人之性天也非學無以知性知天下知性天無以爲人遂慨然有求道之志閒權楊村梅軒先生兄弟者遂邃性理之學從之難疑講質渙然有得踐行米篤而所适益精徵蔚有斯文之望莊憲王甲午府策選第一由翰施玉著歷敭淸華亞長銓曺賓客 曺筵啓沃論思懇懇於出治之本嘗啓曰今之言者以富國强兵爲先務然此覇政之餘習人君正必正朝延百官萬寐則國安有不富兵安有不强又曰古者擇士入學學成然後論之論定然後宮之今不擇賢否不論高下槪取功今文詞之未望其謀國之無缺不亦難乎又言宜選有德之士置之儲宮興之起居出入如莊嶽之聽齊語則此宗杜生靈無疆之福時上勵勵精圖治虛心采納春注日深倚以公輔繪公像於御屛以龍之甲辰遭外艱丙午居內憂時喪紀廢壞百日卽吉公獨行三年之制哀毁踰節情文兩旨造主立祠一依於禮人多化之嘗爲藝文館提學鄭麟趾金銚望等受命撰麗史錄光國勳封慶昌君退老于鄕上疏請陞光山爲洲牧建喜慶堂選一鄕文學地淫之士別爲需籍以獎育又立約于鄕倣藍田遺意春秋會集而勸規之於光之士皆敦尙經行民俗丕變爲湖南之純享年七十一而經葬于萬山洞亥原後 贈吏曹判書藝文館大提學高齎峰先生敬命以先生存倡學之功嘗疏請陞享聖廡而不報識者恨焉士林立祠宇康津之秀巖以俎頭祀之者淸心堂詞元玄孫履素齊仲虎來孫東巖發南溪洁從享焉其數之垂于家者遠而不替德之入于人者以以不忘斯可以觀矣配貞夫人寶城宣氏節度使仲吉女生五男始元判中樞調元吏議 贈禮判翰元校理贊元修撰享元副提學孫曾而下詵善詵然不可勝紀先生之墓久闕神道之刻后孫承鎰以其門父老之命走四百里于伽倻之西徵銘於鐘錫今距先生將五百年劫灰屢晹文獻寢泯其徵言懿蹟固有不可得以悉孝矣謹據夫性齊許文靈公傳之狀與後孫承愚之錄最其槪而爲之銘曰郁郁文化莊靈之世號爲鄧隆來汝 王佑蓽門不閉風雲之從其稱差覇學不貴藝沃于宸哀王肅不舍罘罳有繪贊我笙鏞衣冠孲孲損護孝悌湖學螵螵陽海之老有會有詣載篤于耶歸歸箇箇鳳翥邁以奕厥宗千載起懦光山麗君子攸宮湖天不夜湖樹不髮孰識其功 通政大夫前議政府參贊弘文館 經筵官兼侍講院書筵官苟一郭鐘錫撰 文正公眉叟 許先生穆集篆 丁酉  三月日立
    2018-10-21 | NO.41
  • 하남정씨 락토당계양재 양세 유허비
    광주시 서구 유촌동 373-2 1995년하남정씨 락토당계양재 양세유허비河南程氏樂土堂桂陽齋兩世遺墟碑는 정광현 정극화 부자의 유덕을 기리는 비석이다. 하남정씨대종회가 관리하고 있다. 1995년에 태인 박래호朴來鎬가 짓고 장흥 高光烈이 썼다. 서구 유덕동주민센터에서 2백여미터 떨어져 있닌 낙류정 입구 뒤편에 있다.정광현程光顯(1524~1595)의 자는 중본仲本이며 호는 락토당이다. 중국 송나라 伊川의 후손으로 부친은 정세존程世存, 모친은 광산 김기남金麒南의 딸이다. 선조 때 사마시에 급제하여 성주군사로 재직할 때 이몽룡의 ‘촛농 떨어지는 곳에 백성들의 눈물도 떨어지고[燭㴃落時民㴃落]’의 시구를 좌우명으로 삼고 청렴 행정을 펼쳤다. 이임 때 지색紙索뿐인 여장이 군민들을 감격케 하여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다. 모리배들의 무고로 향리에 돌아와 락토당樂土堂을 세우고 남전여씨향약과 백록동학규를 실천하였다. 정극회程克和(1556~1618)는 락사당의 둘째 아들로 호가 계양재桂陽齋이다. 자는 관부寬夫이다. 기암畸庵 정홍명鄭鴻鳴 등과 학문을 완성하였으나 임진왜란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의곡을 모아 운송하여 국토 수복과 왜적 소탕에 전력을 다하여 충성을 바쳤다. 선조가 그 전공을 가상히 여겨 공조참판에 증직하였다. 후손들이 뜻을 모아 조상의 우국충정을 기리는 유허비를 세웠다.
    2018-05-25 | NO.40
  • 하동정씨2효1열정려각
    광주 북구 자라봉로 17(양산동)1864년, 1905년(2005년 중건)이 하동정씨2효1열정려각(河東鄭氏2孝1烈旌閭閣)은 양산동 양지마을(청암아파트 옆) 내에 위치에 있다. 송월당松月堂 정윤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859년(철종 9) 명정되어 그해 효자정려를 세웠다. 당초 목조와가로서 소슬 대문이었다. 은월隱月 정재요와 그의 처 밀양박씨의 효열을 기리기 위하여 1894년(고종 31)에 명정되어 1905년에 세웠다. 양산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정려각 인접지가 높아져서 침수가 우려되어 2005년 옛 정려각을 복원하고, ‘정윤길 정려각’, ‘은월정재요밀양박씨효열각 / 隱月鄭在堯密陽朴氏孝烈閣'을 합하여 ‘하동정씨 2효, 1열 정려각’을 중건하였다.중건된 정려각 내부에는 증 효자 성균진사 통훈대부 사헌부 지평 정윤길 지려(贈 孝子 成均進士 通訓大夫 司憲府 地平 鄭潤吉 之閭), 효자 동몽교관 조봉대부 정재요 지려(孝子 童蒙敎官 朝奉大夫 鄭在堯 之呂)와 열녀 정재요 처 숙부인 밀성박씨 지려(烈女 鄭在堯 妻 淑夫人 密城朴氏 之閭)라는 복원된 정려(열녀) 편액이 걸려 있다.
    2018-11-12 | NO.39
  • 하동정씨효열문
    광주시 서구 풍암동 짚봉산 중턱짚봉산 중턱에는 효열하동정씨행적비와 해봉경주김공기정효자비가 있다. 이 효열문은 30여 년 전에 월산동구 밖 염주마을 가는 길에 세워져 있다가 1998년 5월 짚봉산으로 옮겨 새롭게 단장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효는 만고불세의 시대정신이요. 우리 민족 고유의 덕목임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을 고무찬양하는 것은 당연한 우리의 의무일 것이다. 해봉은 모친의 열효정신을 이어 효행에 남다른 모범을 보인 빛나는 행동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해봉의 효자비는 월산동구 밖 염주 마을 가는 길에 삼십여 년 전 세워졌으나 도시개발의 진행에 따라 건물에 가려 초라한 모습으로 변해 이전이 시급하였으니 오늘에 결실을 맺어 선영하에 모친 정씨 열효비와 함께 아담한 새 모습으로 태어나니, 죽마고우의 한 사람으로서 기쁜 마음 누를 수 없어 이에 몇 마디 적는다. 서기 1998년 5월 1일 이장범 적음
    2018-12-06 | NO.38
  • 하천 고운 묘역
    광주시 남구 압촌동 산 23-1의병장 고경명의 조부 하천霞川 고운高雲 묘소로 가기 전에 재실 송산재松山齋가 있다. 고운(1479∼1530) 본관 장흥. 자 종룡從龍, 호 하천霞川이다. 그의 아들은 대사간 고맹영高孟英, 손자는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다.묘역에는 2기의 묘가 앞뒤로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앞쪽 묘는 고운, 묘 뒤쪽은 고운의 부친인 자겸自儉 묘이다. 고운은 중종 14년(151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조광조 등과 친교가 있어 기묘사화 때 화를 입어 벼슬을 잃고 고향으로 내려 왔다가 중종 25년(1530)에 세상을 떠났다. 후에 형조좌랑에 추증됐다.
    2018-12-12 | NO.37
  • 한씨유허 비문
    광주시 남구 송하동 송산마을 ‘구산굴(송산마을 뒤 골짜기)’의 바위아래의 이야기와 관련한 것으로 보이는 금석문이 남구 송하동 송산마을 ‘구산굴(송산마을 뒤 골짜기)’의 바위에 새겨져 있다. 바위 위에는 폭 40cm, 길이 125cm 크기의 직방형(直方形)으로 비석모양을 파고 세로 2줄로 글귀를 새겼다. 금석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韓氏墓下非族子孫百年遺墟他人勿居현재 이 글귀가 새겨진 바위 인근이 2001년 당시 제2순환도로 3구간 1공구 공사구간에 해당되기 때문에 훼손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이에 대한 이야기는 송산마을은 현재 송암공단이 자리한 계곡의 안쪽에 위치한 동네로 서쪽의 솔묏재를 넘으면 서구 풍암동으로 갈 수 있는 고개 아랫마을이다. 이 마을은 옛날 청주 한씨의 집성촌이었다고 하는데, 당시의 상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내려 온다.이 마을이 청주 한씨의 자자일촌을 이루고 있었을 때, 마을살림은 매우 빈한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도승이 찾아와 묏자리 하나를 잡아주면서 “나중에 어떤 거지가 오더라도 절대 박대하지 말아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묏자리가 지금 ‘한목사(韓牧使)의 묘’라고 알려진 곳으로 호랑이 형국의 목부분이라고 한다. 그리고 묘를 쓰고 난 후 한씨들은 잘 살게 되었다.그런데 어느 날 걸승이 망태를 짊어지고 동냥을 하러왔다. 머슴이 주인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어보니 주인은 “나쁜 놈이니 쇠똥이나 가득 넣어주어라” 하였다. 분부대로 쇠똥을 넣어주니 걸승은 “이렇게 하지 말라고 했거늘” 하면서 한목사의 묘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주인은 아차 싶어서 걸승을 찾아보라고 했는데 순식간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사실 그 걸승은 묏자리를 잡아준 그 도승으로 한씨들의 행동을 보고 묏자리 위에 있는 호치바위(호랑이 이빨바위, 병풍바위라고도 함) 2개중 한 개를 흔들어 부러뜨려버렸다. 이후 한씨들은 망하여 곳곳으로 흩어져버렸고, 후손들이 성묘를 와서도 묘 쪽을 보고 인사만 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제보, 김경숙(남, 57), 한한길(남, 62)(2001년)>
    2018-06-14 | NO.36
  • 함평이씨기성군신도비
    광주시 북구 각화동1937년箕城君 神道碑는 시조 언彦의 11세손인 이긍 기성군파로 1937년 敏龍, 敏璿(민선),敏性,啓翼,啓宗 주간하에 후손의 성력으로 건립했다.1997 문중 회장 이윤범李玧範을 중심으로 후손들의 성력으로 각화동 경외로 옮겼다. 
    2018-12-04 | NO.35
  • 함풍이씨효열정려
    광주시 남구 사동 63-2번지. 1830년하동정씨 문중에서 鄭浩直의 처 咸豊李氏의 孝烈을 기리기 위해 1830년에 건립하였다. 정려는 정면 측면 1칸의 골기와 팔작 지붕으로 되어 있다. 주초는 덤벙주초 위에 원주기둥을 세웠으나 주초석은 남쪽 1개에 연화문이 조식되어 있고 북쪽 1개는 석탑의 옥개석을 덮어 놓았다. 연화문 덤벙주초는 석등의 기단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정려각 내에는 효열이씨 정려기와 제효열질부이씨 정려병서의 제액이 걸려있다.기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아~ 우리 가문에 효열부 이씨(李氏)는 즉 함평이씨 기성군(箕成君)의 후손으로 참봉벼슬을 한 희명(熙明)의 7대손 유학(幼學) 정호직(鄭浩直)의 아내이다. 그는 어버이를 섬기는데 노력을 다하였고 남편을 위해 죽었다. 조정으로부터 정여(旌閭)를 세우라는 특명이 있었으며, 그 효열(孝烈) 사례를 뭇 선비들의 글에서 유감없이 찬양하고 있으니 더 이상 찬양문은 필요하지 않다.옛날 나의 아버지 효행(孝行)역시 선비들의 찬양하는 글이 한권의 책을 이루었으며 누차 조정에 천거도 하였건만 아직까지도 포양하라는 어명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자손들의 억울한 마음일 뿐이다. 이제 이 효열이 조상께서 남기신 얼을 자손이 계승하는 그 결과에 하늘의 보답이라는 이치를 어찌 알 것인가! 이와같은 효열 사례에 나 같은 사람도 더욱 관심이 있는데 더구나 그 친 자질(子姪)들이야 언급할 것도 없다. 일찍 죽어간 이씨 두 아들이 상당한 학문과 지식이 있어 이부인(李夫人)의 효열 사례를 상세히 기록해 두었건만 불행하게도 일찍 죽었으니 한탄하고 애석한 느낌을 감당할 수 없다. 이거하여 늙고 옹졸한 내가 이 우(右)와 같이 전말(顚末)을 기록한다.경인년 (1830) 10月에 정민영 기록함.題孝烈侄婦李氏旌閭幷書嗚呼惟我孝烈侄婦李氏卽咸豊箕城君之浚參奉熙明七代孫幼學啓鐸之女學生鄭浩直之妻也盖其事親竭力爲夫立節特夢棹稧之 命而孝烈之蹟巳悉於名鄕諸公之贊跋不必架疊而昔我先考孝行於士林聯狀搢縫序跋積成卷軸屢登也報尙未蒙褒揚之 典是乃子孫之抑爵者也今此孝烈安知非祖貽孫述漑根食實之理哉余於是尤有闕興感狀德之記在他人猶曰難愼大况親子侄之門乎夭逝兩子頗有文識渠差生存錄其事序蹟而遭此不幸可不歎惜玆以老拙略記顚末絶以詩曰 維友咸應自身修畵閣蘬然瑞石顯命盡三綱尙禀禀行兼四德儘悠悠漫籤汗簡私門寶爭咏上碑廣世休永使吾家惟戀闕세軒流水亙千秋庚寅冬十月 日 四叔父 鄭旻濚 識
    2018-06-13 | NO.34
  • 해광송선생지천
    광주시 북구 무등로 1040(화암동)이 해광송선생지천(海狂 宋先生支阡)은  《송자대전》과 《해광집》에는 海狂處士宋公墓表로 기록되었고, 이 해광송선생지천은 석곡수원지 위 관광도로 동쪽에 있던 묘비를 옮겼다.호남에는 옛날부터 으뜸가고 위대하며 어질고 뛰어난 선비들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세상을 잘못 만나 포부를 가진 채 그것을 실현시켜 보지 못하고 죽어 오래도록 뜻있는 선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로는 해광처사(海狂處士)만한 사람이 없다.처사의 휘(諱)는 제민(齊民)이요, 자는 이인(以仁)으로 홍주(洪州)사람이다.왜구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찌르고 죽이는 것을 그치지 않고 왕가의 무덤마저 파헤치는 일이 생긴 데 통분하여 수만언(數萬言)이나 되는 긴 상소를 올렸었다. 그 문장이 호방하고 거침없었으며 그 내용에 있어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바다를 바라보고 원수를 생각하여 바른 의기가 솟아오르도록 하였다. 공의 원대한 계책은 이전에 당했던 원수를 잊고 우호 관계를 맺는 것을 욕된 일로 생각하여 백성을 보호하고 병사를 기르는 일을 핵심으로 보아 간간이 기이한 책모를 내었다.또 그것을 가지고 책 한 권을 내었으니 《와신기(臥薪記)》라는 책이었다. 도를 담당한 지방관에게 그 책을 상진(上進)했으나 그 지방관은 내용에 껄끄러운 부분이 있음을 이유로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이에 공은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 세상을 잊고 한편으로는 농사를 짓고 다른 한편으로는 학생들을 가르쳤고 또 그런 선생에게 맞지 않는 일들을 중한 일로 생각하고 열심히 전념했다. 스스로 ‘해광(海狂)’이라는 자호를 지었다.그가 죽고 나서 사위 석주(石洲) 권필(權韠)이 한사(漢師)에서 천리 길을 멀다 않고 와서 통곡하고서는 공의 탁월했던 평생의 언행들을 종이에다 기록하기를 “우리 장인어른은 명성이 후세에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하였다.처사는 가정(嘉靖) 28년에 태어났으며, 성미가 얽매임이 없었다. 9살 때 난리가 생겼다는 끔찍한 소문을 멀리서 듣고 맨발로 피난길에 올랐는데, 발이 아프고 기운이 다한 데다 먹지 못한 날이 5일이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모시는 데 효성을 다하였다. 상을 당하자 죽만을 먹으며 3년 동안 통곡하였다.후에 성현(聖賢)들의 책을 읽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역경(易經)》에 조예가 깊었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을 좇아 배웠는데 토정 선생은 ‘한 글자에도 만 가지로 변하는 이치가 존재한다.’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이에 공은 그 가르침의 뜻을 끊임없이 깊이 생각하였다. 이후 그렇게 깊이 생각하던 도중 서석산(瑞石山)에 들어가 정좌(靜坐)에 들었다가 마침내 깨우쳐서 말하길 “이는 낙서법(洛書法)을 두고 한 애기니 주자(朱子)가 말한 ‘조기변수지용(肇其變數之用)’이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그러나 이 말을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였다. 공은 직접 생업에는 종사하지 않고 편한 대로 하기를 즐겼다.하지만 예에 대해서는 대단히 조심하여 날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사당에 알현하고 부부가 서로 외출하거나 집에 들어올 때 마주 절하여 배웅과 마중을 하였다. 남자 종은 내정(內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고 여자 종은 공이 직접 물건을 주거나 받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여러 아들들을 가르침에 있어 대단히 엄격하여 비록 딸이라도 반드시 《소학》, 《효경》, 《열녀전》을 외워야 했으니 석주 권필의 아내가 어렸을 적에 이상의 글들을 공부하는 데 조금이라도 태만함이 보이면 걱정이 되어 꿇어 앉혀 놓고 “내가 좀 안 본다고 게을리 하면 되겠냐?”라고 나무라곤 했다.공의 고모가 먼 곳에 거처하고 계셨는데 공은 반드시 한 달에 두 번은 가서 살펴 드리곤 하였다.한번은 공이 사당에 있는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어 바다의 섬들을 두루 둘러보고자 했다. 마을 사람들은 사당을 대단히 근신하는 태도로 섬기고 있어서 공의 행동에 놀라 다투어 공을 제지하였다. 공은 마을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았는데 그때 갑자기 인부들 가운데 많은 자들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 이에 공이 글을 지어 하늘을 책망하여 말하길 “나무를 쪼개 배를 만드는 일은 헌원씨(軒轅氏) 때부터 있었던 일이다.”라고 하자 죽었던 사람들이 모두 그 자리에서 살아났다. 배가 다 만들어지자 그것을 타고 바다로 들어갔는데 여러 차례 바람을 만나 거의 뒤집힐 뻔하고, 사나운 호랑이가 무리를 지어 큰 소리로 울부짖어도 공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 섬에 다다랐으나 배는 부서져 돌아갈 길이 끊겨 7일 동안을 먹지 못했는데도 죽지 않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배가 멀리서 나타나 다가왔는데 공은 이때에도 기쁜 기색을 조금도 나타내지 않았다.왜구가 다가오자 양산룡(梁山龍), 양산숙(梁山璹) 등과 기의군(起義軍)을 조직하였다. 의병대의 간부들로 추대 받은 자들은 건재 김천일, 중봉 조헌, 제봉 고경명 등의 여러 현자들이었다. 당시 충용 김덕령이 상을 당하여 집에 있었는데 공의 중표제(中表弟)가 되었다. 공이 집에서 나와 의병대를 이끌라고 북돋았다. 또 공은 제주도에 들어가서 준마를 구해다가 충용에게 주었다. 충용이 이에 격려 받아 몸을 일으켜 의병대를 이끌자 적들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또 공은 왜적과 맞싸우는 관군진영에 가서 천병(天將) 양총병(楊總兵)을 만나 보았다. 본래 양 총병은 공이 왜적의 첩자가 아닌가 오해하여 공에게 해를 가하려고 하였었다. 더군다나 공이 민간인인데도 전쟁사(戰爭事)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태연자약한 것을 보고 양 총병은 더더욱 의심하였다. 감찰(監察) 민순(閔恂)이 마침 양 총병의 군영에 왔다가 급히 양 총병에게 “이분은 동국고토(東國高士) 송(宋) 아무갭니다.”라고 고했다. 양 총병은 놀라 일어나 직접 포승줄을 끌러 주고 자리로 모셔와 왜적과 싸울 때 사용할 책략에 대해 물었다. 공이 말하길 “병가에서는 지형 상 우세한 위치를 점하는 것을 좋은 책략이라고 생각한다. 급히 진을 옮기라.”라고 했다. 하지만 양 총병은 공의 말을 듣지 않았고 조금 후 과연 패하였다. 공은 병이 위독하게 되자 주위에서 시중을 들던 사람들에게 부축해서 일어나도록 해달라고 하여 의관(衣冠)을 바로 하고 북쪽으로 향해 무릎을 꿇고 앉아 공경의 뜻을 표한 후 죽었다. 이때가 만력 임인년(壬寅年) 2월 27일이었다. 묘는 광주 서석산 능성동(綾城洞) 간향(艮向)의 평평한 곳에 썼다.공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증조부는 기손(麒孫)으로 관직은 현감이었고, 조부는 구(駒)로 관직은 사헌부 감찰이었다. 공의 돌아가신 아버지는 정황(庭篁)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를 지냈으며, 돌아가신 어머니는 김씨였고 그 아버지는 윤경(允敬)이었다.공이 처음에 아내로 맞은 여자는 박씨였는데 눌재(訥齋) 상(祥)의 손녀요. 감역(監役)을 지낸 민고(敏古)의 딸이었다. 이어서 얻은 부인은 김씨니 무공낭(務攻郞) 대형(大亨)의 딸이다. 공은 자녀를 넷 두었는데 타(柁)는 박씨 소생으로 대단히 효성과 우애가 있었다. 왜적이 침입해 왔을 때 잡혀 배에 실렸었는데 틈을 타 왜구의 칼을 빼앗아 쳐 죽였다. 거의 다 죽였을 때에 한 왜적이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쳐 다른 왜적들에게 알리고 다른 왜적들을 데려오니 타는 이에 스스로 바닷물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두 딸의 남편들은 양원용(梁愿容)과 김극순(金克純)이다. 타 이외의 공의 다른 세 아들 장(檣), 익(榏), 즙(楫) 및 석주 권필에게 시집간 딸 그리고 양효용(梁孝容)에게 시집간 딸은 둘째부인 김씨의 소생이다.장(檣) 역시 행적이 기이한 인물이다. 그는 부모를 모시고 왜구를 피해 산속에 들어갔다가 적이 부모가 숨어 있는 곳에 가까이 오니 숲 속에서 나와 다른 방향으로 도망쳐 유인했다. 따라서 왜적들에게 잡혔지만 부모가 해를 당하지 않도록 할 수 있었다. 잡혀서 일본으로 들어간 후 적장이 그를 아껴 미녀 세 사람을 아름답게 분장시켜 송장에게 마음대로 고르도록 했다. 하지만 송장은 끝내 받지 않고 이후 일본에 온 조선 사신을 따라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이상과 같은 행적은 형 타와 함께 석주 권필이 기록한 글에 기재되어 있다. 송타의 손자 후(堠)는 진사였다.공은 본래 당시의 세상사를 다스리는 데 관심이 있었으나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안 이후로는 공부를 그만두고 제민(齊民)이 되어 스스로 자를 ‘사역(士役)’이라고 짓고 평생을 지냈다.아! 공이 가지고 있는 포부와 재능으로 세상에서 쓰임을 받았었다면 틀림없이 그가 이룬 사업은 볼만 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러지 못한 채 그냥 죽었으니 하늘이 공을 낳았던 뜻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러나 그가 작성하였으나 결국 왕에게까지는 전달되지 못한 상소 속에는 공이 품고 있던 대의가 명백히 드러나 있으니 해옹(海翁)이 말한 “하늘 아래 땅 위에 떳떳한 백성은 당장 가시적인 보답을 받지 못해도 만세가 지난 후에 틀림없이 보답을 받아 세상에 그의 떳떳한 행적이 게시(揭示)되어 사람들이 알게 된다. 또한 그럼으로써 왜 나라에 가서 고국에 대한 애국심을 망각한 채 다시 군신관계를 맺은 흐리멍덩한 자들을 부끄럽게 한다.”라는 얘기가 공의 경우에 적합하다. 또한 그렇게 생각할 때 공도 이 세상에 백 년 동안 허망하게 왔다 갔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다.옛날 한문공(韓文公)이 딸을 이름난 사람에게 시집보내고서는 사돈집 사람의 묘비를 써 준 일이 있었지만 석주 권필을 사위로 맞아 권필이 공의 행적을 기록함으로써 공이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게다가 공의 행적은 사실 석주 권필과 같은 명인이 훌륭한 문장으로 써서만이 아니라 그 행적 자체로 지금과 이후에 혁혁히 빛날 수 있으리라! 비록 그렇지만 석주 권필이 없었다면 이와 같이 오늘날 공의 행적이 밝혀질 수 있었겠는가. 내 경우 이렇게 공의 묘표(墓表)를 쓰게 된 이유는 장(檣)의 손자 규(奎)와 진곡(眞谷) 박상현(朴尙玄)이 와서 간곡히 묘석(墓石)에 새길 글을 써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에 썼다. 송시열이 짓고, 기우만이 쓰다.湖南古多魁偉賢俊之士其不遇而抱負以死長爲志士之痛者又無如海狂處士者也處士名濟民字以仁洪州人當倭寇創殘之餘痛憤陵寢之變上疏數萬言其文汪洋放肆使人望洋而其義正其猷遠益以忘讐修好爲辱保民養兵爲要而間有奇謀異策出於意表者又爲一冊子名曰臥薪記請於道臣以進則道臣格不聞遂乘舟入海與世相忘耕鑿訓誨高尙其事自號曰海狂益旣歿而女壻權石洲韠自漢師千里來哭錄其平生言行之卓卓者書在紙上曰庶幾吾舅名不沒於後世也處士生於嘉靖己酉負氣不羈九歲其考凶音遠至徒步卽發足繭氣竭不食者五日事母夫人至孝反喪歠粥三年後讀聖賢書最湥於易從李上亭之菡游土亭謂曰有一字萬變之理公潛思不置後至瑞石山入靜乃悟曰此洛書法豈朱子所謂肇其變數之用者耶然他人莫得其詳也公不事生産樂弛置自便然甚謹於禮日必早起謁廟夫婦必相拜出入迎送男僕不敢入內庭與女僕不親受授敎諸子甚嚴雖女子必通小學孝經列女傳石洲內子少時氣或惰慢則惕然危坐曰豈可以暗昧惰行乎姑母遠居必一月再往省嘗欲斬祀木爲舟徧游海島邨人事祀甚謹爭來止之公不聽忽役夫多立死者爲文以責之曰刳禾爲舟制自軒轅死者皆立蘇舟成遂入海遇風幾覆者數又猛虎群吼而略不怖嘗之一島舟敗路絶不食七日而猶不恒死忽有船自遠而至而亦無喜色倭寇至與梁山龍山璹等謀起義旅所推者金健齋千鎰趙重峯憲高齊峯敬命諸賢也時金忠勇德齡丁憂在家公中表也公勉起之又入濟州求駿馬以授之忠勇旣起.賊不敢近又往見天將楊總兵元楊疑其爲倭諜將加害公神氣自若楊固異之矣關監察純適在楊營急告曰此東國高士宋某也楊驚起自解縳引坐問策公曰兵家以得地形爲策急宜移陣楊不聽俄而果敗公疾革命左右扶起正衣冠北向長跪而卒是萬曆壬寅二月二十七日也墓在光州瑞石山綾城洞艮向之原公之系曰曾祖麒孫官縣監祖駒司憲府監察考庭篁文科正字妣金氏其考允敬也公初娶朴氏訥齋先生祥之孫監役敏古之女繼媲金氏務功郞大亨女男女各四人柁朴出也甚有孝友行倭寇時被執載船乘機奪倭劒擊殺之殆盡有一倭投海而泅率衆倭以來遂自投水二女壻梁愿容金克純也檣楫榏及女適石洲及梁孝容者金出也檣亦奇士奉父母避倭山谷賊迫父母所匿自林藪出走故爲倭所得以免其父母旣入日本賊將愛之妝美女三人使自擇終不肎受後從信使歸國與兄柁俱載石洲所記柁孫爲進士公始以濟物濟時爲心旣知其不能則於其名去偏傍爲齊而字曰士役益曰士不能得時行志則寧爲編戶服田以供賦役而已何必獻賦求仕哉此公之平生始卒也噫以公之志之才爲世所用則其事業必有大可觀者而只恁麽死了天之所以生公者抑可意歟.然其未達之疏大義炳然晦翁所謂天經地義民彛萬世必報者昭揭宇宙亦以愧夫南渡委靡之君臣公亦不可謂虛過百來年者也昔韓文公以女嫁名人刻人之墓公之以意氣相感得石洲爲壻亦足以畱名況其赫赫者著見於今與後自耶雖然微石洲烏能闡發如此哉檣之孫奎介於朴眞谷尙玄來請墓石之文云時崇禎栴蒙赤奮若孟春恩津宋時烈述奇宇萬記
    2018-11-12 | NO.33
  • 홍주송씨효행비
    광주시 서구 용두동 구룡마을1982년이 홍주송씨효행비(洪州宋氏孝行碑)는 위계도가 찬했다.
    2018-12-01 | NO.32
  • 효녀정석남실적비
    광주시 남구 진월동 201-2번지1960년대효녀 정석남 실적비(孝女鄭石南實跡碑)는 옥천사 경내에 위치해 있다. 옥천사에서 정석남이 전답과 임야를 기부하여 이것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보이며, 건립 시기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1960년대로 추정된다. 1980년대 동성고등학교 부지에 편입되어 비의 흔적이 없어졌다.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대체적으로 효도는 온갖 행동의 근원이기 때문에 남녀(男女)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다 우러러보니 불효를 하고 편안한 자도 있지 않았으며, 또한 효도를 하고 위태로운 자도 있지 않다는 것을 공통된 떳떳한 이치이다. 이러기 때문에 불효한 자식은 재앙을 받으며 약 천만명이나되는 효자에게 하늘은 반드시 보답이 있으니 감응이라는 이치가 있지 않을 것인가!아~ 하늘과 땅이 번복이 되고 육지가 바다가 되어 인간의 윤기가 끊겨 같은 씨족끼리 서로 죽이고 죽이니 이처럼 참혹한 때에 다행히 여사(女士) 한 분이 있었으니 성은 정(鄭)이요 이름은 석남(石南)이다. 동래(東來)정씨 정운선의 따님이며 어머니는 추계추씨(楸溪秋氏)이다.광주시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이 부모님을 잃었으니 아들 재장(載長)이도 운수 기박하여 일찍 죽었다. 아들 딸 혈육하나 없는 신세가 되었건만 하늘도 그를 보호해 주지 않았으니, 그 정성이 가엾기만 하다. 그러나 한결같은 효심은 조금도 쇠퇴하지 않아 친정 부모님 섬기는 마음으로 시부모를 섬기는데 마치 남편을 섬긴 것 같이 하였다. 일찌기 과부가 되어 혈혈단신인 그는 세상에 의지할 곳이 없었건만 시부모님이 죽자 10리밖 옥녀봉(玉女峰) 동쪽 자락에 안장을 하고 옥천사(玉泉寺) 주지에게 금호답(芩護沓) 3백평과 전(田) 8백평 산(山) 5백평을 바치고 옥천사로 하여금 영원히 향화(香火)를 끊어지지 않게 하였는가하면 묘(墓) 아래 비석을 세우기까지 하였다. 그 가엾기만한 정성을 하늘은 어찌하여 도와주지 않았을까.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여 칭송하지 않을 것인가.孝女鄭石南實蹟碑夫孝子百行之源也 高無論男女貴賤人皆仰之而未有不孝而安者亦未有孝而危者通理之常也是以不孝者惹災愆若萬千孝者則天必有報焉不有感膺之理裁嗚呼方令天地飜覆大界陸沈倫綱睪絶同族相殘如彼慘酷之秋幸有一女史姓鄭名石南東來鄭云先之女母楸溪秋氏生於光府早失怙恃自子裁長運命奇薄膝前金之一男女之血續而呱呱此凡生亦無所天之可保其精可謂惕矣然一孝心不衰雖若施孝於父母舅姑恨及於風樹己矣若事君子早年獨寡一辰單身闡顧一世無處可施母死昔年躬白歹無葬於祈外十里許玉女峰東麓口坐原托於玉泉寺住持而禁護畓三百坪田八百坪山址五百坪屬於本寺將營永世香火不絶親墓下亦以宛不離親之意將之意將古亥隧而立短碣表其陰則其實精可矜可慘天胡其然嗟裁不南行過者孰不嘖
    2018-06-13 | NO.31
  • 효부고성이씨기행비
    광주시 남구 노대동 707번지 신기마을 뒤편 양양재(洋洋齋) 1984년이 효부고성이씨기행비(孝婦固城李氏紀行碑)는 원래 남구 노대동 노대마을과 구암마을 앞 사이 들판에 비각을 갖추어 1984년에 세웠다. 비석의 내용은 김해김씨 집안으로 시집을 와서 행한 효행 사실을 국한문 혼용체로 기록되어 있다. 장흥 위계도가 찬하고 신천 강인환이 글씨를 썼다. 이 비석은 도시개발로 인해 양양재로 옮겼다.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광주 사는 김해김씨 김호송(金鎬松) 늙은이가 벽부산(霹富山)에 있는 나의 집을 찾아와 그 아내 고성 이씨의 행적을 이렇게 말씀하였다. 나의 처가 17세에 나의 집으로 출가하여 공경히 시어머니의 뜻을 계승하였다. 어머니의 생모 즉 나의 외할머니 밀양박씨가 아들이 없었으므로 우리 어머니가 모셔와 봉양을 하였다. 박씨가 풍병을 만났는데 20년간을 부축하여 기거(起居)하도록 하였는가 하면 똥 걸레를 빨고 목욕을 시키는 일까지도 이씨가 항상 담당하였다. 나의 어머니 해주최씨(海州崔氏)가 나이 50에 정신이 혼미하여 자신을 감당하지 못하고 또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니 더러워진 요, 이불과 의복을 세탁하여 수시로 바꿔 주었는 데 엄동설한에는 그 손등이 찢어졌다. 또 나의 어머니께서 간혹 굶주린다고 하실까 두려워하여 고기를 잡아 봉양을 할때 사내들도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자 나의 처(妻)가 말하기를 자녀(子女)의 신분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하고 4년동안을 하루와 같이 하였다. 자식하나 없어 락(樂)을 부칠 곳이 없는 사람이나, 먹을 것이 없는 가난에 시달린 사람들을 따스하게 감싸아 조금도 개의치 않았으니 나 또한 그를 위로 해주고 싶다. 방언(方言)에 이르기를 아내의 덕화를 언급하는 것은 왕이나 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오직 나는 이 경우와는 다르다. 내가 능히 할 수 없는 일을 그대가 능히 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그대의 정성에 감동되어 글 한편을 써 줄 것을 요청한다고 하였다. 나 역시 그 애기를 듣고 감동되어 사양하지 않고 써 줄 것을 허락하였다.光州老大 金海金鎬松이 訪余于霹菩山中之 寓舍하야 道其妻 固城李氏之行하여 日君이 十七世에 歸于吾家하여 敬承姑之志하고 及吾母之母 密陽朴氏가 無嗣하니 吾母迎而養焉하다 朴氏嬰風痺하야 二十年을 起居須人하니 滫瀡與屍溲洗滌을 君이 常擔之하고 吾母海州崔氏年將八十에 昏耄하여 不能自持하고 又不省事하니 衾褥衣服之泗穢를 隨時易之할세 常隆冬에 手軍皮裂하며 且恐吾母之或有飢寒色하야 求胞而供之하니 人有難之者어든 君日女子의 分上에 當爲之事라하고 四年을 如一日하다. 渠無一子而無寄樂이나 但茹苦耐艱을 怡然不介意하니 吾亦慰之하다 諺에 云하되 言妻德은 爲狂이라하나 然이나 惟吾則異於是하야 吾之所不能을 而君이 能爲之하이 是以로 吾感君之誠하야 請爲數行文이라하여 늘 余亦聞而感之하야. 不辭而諾之하다. 噫리 當今象族之制散하야 子而不承其文하고 婦而不養其始어늘 惟李氏는 不然하야 遠及姑之母하니 是는 可以爲一世楷範矣라 安得李氏之行하야 以警夫澆俗混世之爲婦女子者하노라
    2018-06-14 | NO.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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