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285
게시물 검색 폼
  • 운석당 雲石堂
    남구 백운동 참봉을 지냈던 함평이씨 이계환李啓煥이 일제강점기에 세운 운석당이란 정자가 있었다. 운석대雲石臺라고도 불렀다. 정자 주인 이계환이 지은 시에 이교泥橋가 나온 것으로 보아 백운동에 정자가 있었을 것이란 추정을 해볼 수 있다. 2007년 당시 주월경로당 최수흥 회장(81)의 고문서 자료에 1891년 참봉 이계환이 등장한다.백운은 밝고 따뜻하다는 의미의 난지실이란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한다. 난지실이란 좁은 골짜기마을 앞에 평평하게 펼쳐진 들이 있다는 의미이다. 난은 담이 없이 툭 터진 것을 말한다. 지실이란 좁은골짜기>좁은골>좁우골>종우골>종이골>지실로 변천하였다. 곧 좁은 골짜기마을 앞에 형성되었으므로 밖골>밖굴>박굴>백구름>백운白雲으로 변천하였다. 벽도마을은 본래 부동방면 벽도리로 난지실 바깥들에 형성되었으므로 바깥들>밖들>밝들>백돌이>벽돌이>벽도碧挑로 변천하였다. 진다리는 난지실 동쪽에 있는 마을로 진드리라고도 한다. 원래 의미는 긴들>진들>진드리>진다리로 변천한 지명으로 넓은들을 의미한다. 한자로 표기하면서 질다[泥]는 의미를 취하여 1789년 호구총수에 기록하기는 이교泥橋(=진다리)라고 할 때도 있었다. 곧 백운과 벽도, 진다리는 난지실과 관련하여 파생된 마을 이름이라 할 수 있다.2015년 미즈노 페이水野俊平 홋카이도상과대학 교수는 일본 학술진흥회의 지원을 받아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에 의한 한국지명·한국어 연구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1898년·1908년·1917년 제작된 일본의 고지도 3점(이하 1·2·3차 지도)을 비교해 광주광역시 일대의 지명 변화를 연구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1차 지도에선 음 표기 없이 한자로 泥橋(니교, 진흙 다리)라고 나온 곳이 2차 지도에선 표기가 申橋(신교)로 바뀌고 음은 ‘진다리’로 적혀 있다고 보고했다. 
    2020-03-13 | NO.90
  • 운암정
    서구 유덕동광주시 서구 치평동과 쌍촌동 사이의 영산강 구간을 일컫는 극락강변은 오래전부터 주변 초등학생 소풍지역으로 유명하고, 도시민들의 주말 휴식처로서 이용되고 특히 낚시터를 찾는 외지인들이 늘고 있다.강변에 낚시터가 유명했으며 광주향교의 『광주지』(1964)에 따르면 운암雲岩 정평태丁平泰가 생전에 유유자적하며 계묘癸卯년(1903)에 세운 정자 운암정雲岩亭이 유덕동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으나 사람들 사이에 이야기는 남아 있다.
    2018-05-23 | NO.89
  • 운암정 雲巖亭
    남구 양림동 사직공원 옛 팔각정의 이름이다. 지금은 1층 계단 흔적만 남아있다. 2013년 12월 20일, 광주 사직공원에 기존 팔각정(운암정) 전망대를 철거하고 설계공모를 통해 광주 공간 건축사사무소(대표 조성호)에서 출품한 ‘빛의 타워’ 전망대가 선정되어 2012년 12월 31일 착공 신축했다. ‘빛의 타워’ 전망대는 지하 1층, 지상 3층, 총면적 399.42㎡, 최고 높이 34.7m 규모로 전망탑, 문화카페, 전시공간, 옥상정원 등으로 꾸며졌다.천득염 전남대 건축학과 교수는 “팔각정은 1973년 완공돼 40여 년간 사직공원을 지켜온 건물이며 인근에 기독교 성지 유적이 있어 탐방객이 많으며 변변한 근·현대 건물이 거의 없는 광주에서 그나마 오랫동안 잘 보존해온 건물이 또 사라질 운명에 아쉽다”고 했다.또 “사직공원에 전망 타워가 적절한지, 현대적인 형태의 건물이 주변과 어울리는지를 살펴봐야 하고 세계적인 문화도시는 오래된 건물을 오랫동안 보존하려고 하는데 타워 건설은 시대정신이나 아시아문화중심도시의 정서와도 맞지 않다”라고 지적했다.
    2020-03-13 | NO.88
  • 운파재 雲坡齋
    광주 서방면(瑞坊面) 지금의 북구 풍향동에 있었다.이곳 운파재(雲坡齋)에서 김진현(金珍鉉, 1878∼1966)이 학문을 강구했다. 김진현이 쓴 운파기(雲坡記)가 그의 문집 운파유고(雲坡遺稿)에 남아 있다. 序 : 宋在直撰卷1賦 : 花卉賦謹呈李雙石丈(熙容), 擊壺放歌賦奉呈尹竹下(宗林), 夢遊楓岳賦寄高春坡(彦柱), 遊葛夏帛鈞?賦詩(五絶) : 題鶴峯高公(因厚)墓志感, 泉隱寺敬次勉菴松沙艾山日新諸先生板上韻, (二首)泉隱寺夜吟, 道界庵與龍淵工人酬酌, (三首), 出泉隱洞口, 除夜, 早春卽事(三首), 宿李雙石宅志感(五首), 奉贈金聖朝(宗洙 二首), 謹步權松山(在圭)寄詩(二首), 附原韻, 謹次崔愼窩(命煥)自銘韻, 附原韻, 贈別金容璹(三首), 宿三禮驛, 宿獒樹驛(二首), 無言, 朝春卽事(三首), 庭上穉松, 登瑞石, 庚戌之變以八吾寓憤白警(八首), 挽高松坡詞伯(光洙), 贈吾柳洞金志學, 淸陰亭上漫興(五首), 贈黃景涵(撤源), 和贈李省庵(載春, 三), 戱亭任安谷(昶宰), 呈奇三隱世伯(二首), 呈高後峯(在鍊二首), 呈宋三岡(在鶴, 二首), 呈李小南(會春, 二首), 呈高泥村(光維), 呈崔敬堂(允煥, 二首), 挽雲溪安君(鍾洛, 三), 次敬堂雲(弁小序), 憶鄭春史子春(仁澤), 奇希文(世稷)相訪告別贈詩詩(五律) : 雙溪樓用鄭圃隱先生板上韻, 拜沙溪金先生墓, 勿梁亭用淵齋宋先生板上韻, 聚斯堂逢迎金判書(甲洙), 題吳後石丈(駿喜)聳珍精舍, 寄贈鄭栗溪(琦), 贈別千鉉宗人, 次愛蓮亭韻, 幽興, 宿范善仲(瀅植)書齋, 寄鄭梅軒(持鉉), 懷李晩齋(啓萬)復用賀壽韻送呈, 寄安三谷(圭冕), 次金永台題安重根畵像韻, 贈吳君養庵(炳鎰), 追幀申義, 士(貞淳), 獒樹驛途中, 挽朴石陰(魯迷五首)挽高瑞菴(興柱三首), 挽金瑞允(容采), 挽鄭江山文(在舜), 挽李心齋(載午), 挽吳難窩文(繼洙), 挽高春坡(彦柱), 挽金松皐(澈鉉), 挽奇惺石(仁伯), 挽李蘭谷(淵宇), 挽奇雲岩(淑度), 挽朴梧軒(魯宣), 挽金正庵(錡洙), 挽金月圃(河柱), 挽奇道南公吉(老善), 挽金永斗詩(五言長篇) : 庭上紅桃花爛?感(幷小序), 煙霞亭附次韻(弦窩高光善, 三袈金恒洙), 奉呈鄭碧?丈(雲五), 奉呈吳後石丈山中途別十三雲, 附次韻, 讀南軒先生城南八詠志感, 附次韻, 課朱夫子載居自警(幷小序), 贈崔可雲(錫休), 次李白韻呈李博士(光秀), 挽李梧山丈(龍憲), 挽羅松岩(鍾宇), 挽金仁泉(容稷), 挽李省菴(載春), 挽高柳南(光永), 挽安西谷(圭相), 挽奇三隱(世伯), 挽柳梧谷(寅湜)詩(五言長篇) : 挽鄭君後松(寅柱), 寄崔愼窩性彦(命煥)崔仁齋士行(仁煥)詩(七言長篇) : 奉審先祖文正公雪庵筆蹟, 上鳳山精舍高弦窩丈十三韻, 附次韻, 挽奇春澤丈(東準), 挽梁老庵(孝默), 挽朴晩翠(升柱), 挽李晩齋(啓萬), 挽安竹軒(鍾烈), 和李果齋進山落熙坮韻, 戊辰除夜園兄主共坐憶東盧公愴然有作, 月坡題詠(金永萬), 寄呈柳居士(炳源)初度壽宴, 明鏡篇詩(七絶) : 光山盧氏節孝祠遺墟碑, 三山齋觀火後翫月有感, 三山齋雜詠, 諸生時負課先生口呼, 附先生次韻, 拈薇字韻有感, 登黃華樓, 漢陽志感, 慶會樓志感, 松都懷古, 拜先祖文正公(台鉉)墓, 過鷺梁望死六臣墓, 死六臣墓, 連山道中, 恩津道中, 遯巖書院拜謁四先生, 過楚山讀尤菴先生受命遺墟碑, 亢眉亭憶金判書(班鉉), 遯岩書院不遇藕觀(金在)夏博士(金敏洙), 奉審遯巖書院, 過南原志感, 道東廟奉審安晦軒影幀, 梧岡桐奉審崔勉菴影幀欽巨材水, 遊永守亭, 登多佳亭, ?南門贈金汝誠(珉鉉)金洛筍(容柱), 寒碧亭, 登漢陽城北岳, 過善竹橋志感, ?省齋奇公(參材)墓, 上松沙先生, 附答韻, 奉呈難窩先生(繼洙), 奉呈春潭奇先生(東準), 感慕題詠, 赤壁泛舟, 庚戌八月十五日夜, 庚戌冬人有示以新歷背題還送, 我本, 雪夜偶吟, 偶吟, 富春精舍呈遯齋文達煥, 次月講會韻, 光州公園安義士(重根)碑, 寄一枝齋奇士一(東萬), 用前韻題金晩隱準擧(永根)新寓(山居), 奉呈金葦南文(泳冀), 又呈葦南丈, 附次韻, 又上次上葦南丈, 附次韻, 宿博山?路贈梁老庵(孝默), 寄呈高畏堂(漢柱), 記夢韻, 丙戌除夜, 己丑除夜用唐人韻, 宿金參奉(?煥)家逢諸益(有題), 贈別鍾城友(李敏喆), 挑源村贈主人(奇宇變), 與珉鉉容柱宗留聚斯堂賦雙根梧, 鄭兄千翼(海鵬)卽幽有期和, 訪安慶伯(昌燮)不遇, 淚題哀, 與石?(永鍊)蘭山(永住)石亭(?洙), 奉呈養正齋(會甲), 諸宗泛舟遊赤壁, 登勿梁亭, 風詠亭詩會, 渡海後以一絶寄賢洙宗, 贈金梧岡(永喆), 過請溪題主翁(李喜憲)壁上, 與李敎翼過河南里題全道炳幽居, 到淨閣與宋恩植登耆英觀, 奉贈奇雲岩(洛度), 水諸名亭, 與李啓萬安圭冕安鍾基諸益沙村, 寄柳梧谷(寅植), 路上口呼, 黃澈源梁會甲梁佑承枉顧, 宿廣谷與奇觀燮奇近燮夜話, 訪金誠泉(銓)幽居, 次金月溪聚斯堂中憲示韻, 次金永斗坮石韻, 蘭心契(柳寅湜), 通安路上用山中對酌韻, 與金永斗金斗鉉夜話, 哀溪西崔君(太煥), 乙酉夏通安道中, 奉謝廬友文善贈我以杖, 惟聖契會贈鄭海圭金容鶴崔基柱, 和贈閔斯文(圭鎬), 採菊契東籬唱酬韻, 偶吟, 挽柳松石丈(昌秀), 哭高尼松(光瓚), 哭宗丈(在寔), 哀荷隱族(喜洙), 挽安淸深當(龍煥), 哭李夢軒丈(卿範), 哭李竹軒居士(啓龍), 挽邊山水軒(鎭壽), 挽鄭權中(淳衡), 挽李三山文(啓琮), 挽金直鉉, 挽文海史(仁煥), 挽廬聽溪(鍾九), 挽柳義迪, 挽金碧湖(肯鉉), 挽梁正齋(會甲), 挽金洛筍(容柱), 哭高南涯居(維相)靈?下, 挽崔蘭皐(興鎭), 挽金樓岩(容奎), 挽鄭石溪(大鉉), 悼鄭君小石(海述)詩(七律) : 幽居卽事, 宿元曉寺, 登瑞石, 八景師志感, 肅慕殿志感, 慶會志感, 過松都志感南固山城用鄭圃隱萬景坮韻, 追慕先祖?沃講郡大夫人, 聞崔勉庵絶穀對馬島, 高氏墓誌石還安, 哭沙雲金判書(玉鉉)靈筵, 聞宋淵齋仰藥大田驛, 到完山, 圃隱先生臨皐書院復說, 承裕齋韻, 記念碑, 六行當重修韻, 松內齋韻, 謹次光山廬氏日新齋韻, 眞泉祠遺墟堅碑韻, 咸陽祠韻, 次山吟洞全氏獨守亭韻, 長淵祠奉審文忠宣公影幀, 謹次醉歌亭原韻, 謹次瑞興金氏丹楓亭遺墟碑韻, 眉巖柳先生(希春)遺蹟保存, 謹次梧山亭原韻, 閣告成飮落, 謹次風泉坮韻, 謹次鳳山精舍原韻, 謹次雙石亭韻, 謹次崔公(有煥)小潭韻, 謹次梧潭精舍韻, 次朴炳海雙碧亭韻, 謹次慕龍坮韻, 奉和李雙石丈, 奉呈高悔齋文, 謹呈李松晩丈, 附次韻, 次玉山崔氏悅話齋韻, 尙好契會言志, 謹次朴後岩(遲東)高春坡(彦柱), 雪中梅花詩, 玄潭宗小祥夕泄哀, 金龍源慕窩韻, 元夕, 寒食, 次詠月亭韻, 謹次蓮坡亭韻, 謹次宣政薰觀善齋韻, 謹次寒松齋韻, 謹次晩翁亭韻, 謹次松灘韻, 謹次三山亭韻, 謹次徐台煥撫松亭韻, 謹次思勸堂韻, 次憔隱亭韻, 次荷隱亭韻, 謹次華隱韻, 謹次(金永國)?樂亭韻, 謹次碧湖亭韻, 次金相英伯堂韻, 次漢南韻, 次金聖弼大人聾菴韻, 次梁氏三綱碑韻, 次碩湖齋韻, 次晩歸亭韻, 次弘海亭韻, 謹次河東鄭氏石湖鄭韻, 次正閣亭韻, 次朴洛圭大人竹圃亭韻, 次李春燮大人尼南韻, 敦義堂韻, 次大峯韻, 次桂峯韻, 次桂峯齋韻, 次金讚大石川韻, 次洪灌植石堂韻, 次崔龜榮素隱韻, 誠庵吳孝子, 孝婦鄭氏, 謹次耕雲亭, 謹次夢岩韻, 謹次鳳愚堂韻, 謹次養浩齋韻, 次安聖煥晩悔韻, 次柳德烈友石韻, 次盧炳鉉靜溪堂韻, 次龍山亭韻, 次石湖亭韻, 謹次石溪亭韻, 謹次金棕坤大人百忍齋韻, 贈別鄭小谷(淙元)韻, 謹次池參奉(應鉉)鵬南韻, 送李敦稷(啓翼)乏漢城, 次松亭祠韻, 次松圃亭韻, 次惺堂韻, 次杏隱亭韻, 吳一默大人觀瀾亭韻, 次鄭安錫松隱韻, 次張安燮?庵亭韻, 次徐南洙愛菊韻, 次姜琪洙鎭南閣韻, 次金基炫松塢亭韻, 次崔福煥農隱韻, 次金壽鉉石湖韻, 次金奉鉉石汀韻, 次金剛煥山河齋韻, 次朴重彦溪堂韻, 次裵鍾寀松溪韻, 次朴俊相西圃韻, 金琬洙愼菴韻, 謹次鄭仁植瑞石軒韻, 次朴奏求學山書室韻, 安炯淳敬庵韻, 春秋契講信團會, 戊辰重陽?配六先生於高山, 宿金谷李權淳家塾拈韻栗和, 祠時與嶺南士友感吟, 與諸益登風詠亭, 三同契韻, 送高成夫?耽羅, 過李載炅居, 贈曹國賓鎬, 寄呈翼齋高兄(在鵬), 晩松在雅會, 附次韻, 贈別金肯樵(源大), 松沙先生文集刊所言志, 澹對軒送ㅇ李果齋(敎宇)?嶺南, 附次韻, 龍湖在范氏范氏花愁契會韻, 丁卯除夕與諸益述懷于, 澹對軒與諸益?話, 明倫堂, 用前韻贈李在三(宏圭), 本鄕大祭後與多士有題, 戊子歲正朝志感, 壬辰除夕守歲于校堂, 和(尹宗林, 宋在鶴)古木詩, 寄呈金熙駿, 苑? 植書齋夜話, 風詠亭詩會韻, 淸陰亭雅會, 明倫堂僉詞伯下謹呈, 呈鄭南崗(淳煥), 呈朴?山(淳永), 呈朴晩翠(升柱), 呈尹竹下(宗林), 贈瀛州宗(賢洙), 省菴李載春幽居公韻, 附次韻, 鳳谷書齋?話, 樵隱亭詩會韻, 忠院薇菊詩社韻, 雲林堂詩會韻, 生朝有成, 譜所次默溪(兢洙)韻, 附原韻, 寄贈金汝擎(承柱), 薇菊詩社秋會韻, 忠孝堂薇菊契韻, 送韓子衡?耽羅, 會鄭石溪(大鉉), 和朴裵卿(淇靑)書齋團會, 題金晩隱(永根)新萬幽居, 己未端午日吾山亭詩會韻, 淸陰亭雅會, 淸深堂續會, 蓮坡亭開會, 鄭盤溪道允(志昶)來訪, 明倫堂餞春會, 別朴仁?(炳壽), 高柳南(光永)來訪?話, 次甲世均野隱亭韻, 秉天祠詩會, 明倫堂?話, 與吳北坡(東洙)?話, 訪通峴精舍(朴魯烈, 朴日圭)?話, 贈別金斗鉉, 和(李啓翼柳寅湜李啓昊 詩以寄情, 謹次金相熙大人回甲韻, 謹次梁玄齋(在淸)丈回甲韻, 次金松隱(胡潭)回甲韻, 次崔鍾涉重牢宴韻, 次邊竹史(東?)壽宴韻, 謹賀金學山(永丈)回甲韻, 謹賀鄭後圃(袒鉉)壽宴韻, 謹次崔忍在(仁煥)壽筵韻, 謹金三賀翁(恒洙)壽韻, 謹賀金蓮坡(詩樂)回甲韻, 謹次鄭石溪(大鉉)回甲韻, 次李敦學(重權)回甲韻, 謹次李梧村(啓翼)壽宴韻, 次吳敬庵(炳南)回甲韻, 謹次金後松(哲鎬)回甲韻, 次朴弘海(璋柱)回甲韻, 次朴月皐(哲鎬)壽席韻, 次李晩齋(啓萬)壽筵韻, 次金永基回甲韻, 謹賀任安谷(昶宰)壽宴韻, 謹賀安三谷(主冕)壽筵韻, 次盧君毅堂(軫永)壽韻, 次安君雲溪(鍾洛)壽韻, 次高後峯(在鍊)壽宴韻, 奉和宋述庵(在晟)壽宴韻, 次盧春岡(文永)壽韻, 挽曹參奉(有煥), 挽梁玄齋文(在淸), 挽廬蘇海文(鍾龍), 挽鄭文(志永), 挽鄭文(雲五), 挽李靑皐文(承鶴), 挽李雙石文(熙容), 挽安瑞軒文(圭容), 挽崔山史(基亮), 挽吳道淵(根厚), 挽文元公宗孫(容壽), 挽金克齋(貞洙), 挽尹岩?(喜祥), 挽李梧村(啓翼), 挽鄭南岡(淳煥), 挽朴弘海(璋柱), 挽崔仁齋(仁煥), 挽朴?山(淳永), 挽奇湖上元用(洛度), 挽韓貞履大人頑齋, 挽尹後村(喜周), 挽鄭友(鳳柱), 挽吳道湖(東洙), 挽朴月皐(哲鎬), 挽宋三岡(在鶴), 挽高松湖(在淵), 挽范竹翠(瀅植), 挽安三谷(圭冕), 挽安述齋(鍾基), 挽柳溪韻(炳源), 挽鄭梅軒(持鉉)卷2書 : 上松沙奇先生(宇萬戊戌), 附答書, 上松沙先生疏(庚), 附答書, 上松沙先生(甲辰), 附答書, 上松沙先生(丙午), 附答書, 上松沙先生(庚戌), 別紙數條近課數篇, 附答書, 上松沙先生(辛亥), 附答書, 附答書, 上弦窩高先生(光善), 上弦窩先生, 上弦窩先生, 上弦窩先生, 上石陰朴先生(魯述), 附答書, 上春潭奇先生(東準), 上春潭先生, 上春潭先生, 附答書, 上浮海安先生(秉宅), 上浮海先生, 與鄭丈(雲時), 與鄭碧?丈(雲五), 上金參判(喆鉉), 上金參判, 上金參判, 上金參判, 上金參判, 上金參判, 上金參判, 答金參判, 上雙石李文(熙容), 答雙石李文, 附答書, 上雙石李文, 上李雙石安浮海文, 上雙石李文, 上金玄潭文(珉鉉), 上李三山文(啓琮), 答松翊憲, 上金葦南文(泳翼), 答金葦南文, 答金博士(敏洙), 與金博士, 答金博士, 答金博士, 與金郡守(永燾), 答金議官(永淑), 與高翼齋(齋陽), 與鄭栗溪(琦), 附答書 與高畏堂(漢柱), 答金主事, 答金主事, 與金主事, 答金主事, 答金主事, 與金三?(恒洙), 與金三?, 附答書, 與金三?, 與金三?, 附答書, 與金晉洙, 與梁正齋(會甲), 與梁正齋, 附答書, 答梁正齋, 答梁正齋, 答梁正齋, 答梁正齋, 答梁正齋, 答梁正齋, 與黃景涵(澈源), 與鄭三三公益(友源), 答梁晦山(鎰默), 與奇子述(觀燮), 與崔性彦(命煥)崔士行(仁煥), 與梁行元(孝默), 與金性筍(容籍), 答奇見吾(淑度), 與奇見吾, 與奇見吾, 與金春齋(永來), 與高大一(秉柱), 答高大一, 答金容稷, 答安子用(圭冕), 答韓子衡(均度), 與崔士行(仁煥), 與李敬稷(啓翼), 與鄭益三(大絃), 與金圭洙, 答金龍源, 答金汝擊(永住), 答金汝擊, 答金汝擊, 答金汝擎, 與李致萬(敎一), 與金德潤(永喆), 答宋聲天(在鶴), 答宋聲天, 與崔德善(允煥), 與崔德善, 與金學山(永文), 答李鴻擧(敎翼), 答宋聖範(箕浩), 答高在鳳, 與金堯元, 答李元一(啓萬), 答李元一, 慰金容德, 答金相熙, 與奇慶, 慰金永權, 與朴炳海, 答金永國, 與金國贊(永贊), 與柳炳員, 答金源弼, 答金相俸, 答金璟鉉, 與朴仲豪, 與盧士中(軫永), 與奇公吉(老善), 與奇公吉, 與朴夏炯, 與安公善(吉煥), 與高喜聖(喜鎬), 與奇公彬(老章), 後錄, 與奇公彬, 答邊時淵, 與李容穆, 答金箕斗, 答金永遠, 與舍姪(永銓), 答永銓, 答永銓, 答永銓, 答家姪(永和), 南康書院儒會所, 光州鄕校儒會所, 連山大同譜所, 同門同志僉座下, 與良苽里崔氏護喪所, 與沙村襄禮所, 附答狀, 與鳳凰洞護喪所花樹錄 : 上判書(珏鉉)書, 附答書, 附聚斯堂僉座下, 上判書, 附聚斯堂僉座下, 上京宗中, 附聚斯堂僉座下, 上都有司(珏鉉), 附答書, 附都有司珏鉉書, 上都有司, 附答書, 上都有司, 附答書, 上都有司, 附答書, 上都有司疏, 上郡守(喆鉉), 上都有司, 與玄潭(珉鉉)卷3序 : 諸君子陪松沙先生旺嶺南序, 澹對軒講會序, 光山盧氏世德錄序, 義城金氏兩世宗錄序, 惟聖契序, 三山採藥契序, 風詠會?事, 風俗契序, 講誼契序, 三益契序, 蘭心契序, 事一契序, 鎭南閣序, 歸家日贈韓子衡序, 贈盧君(軫永)序, 贈安君(鍾洛)序, 觀水有述贈金容圭序, 與於詩贈金容鶴序記 : 始祖壇重修記, 敬慕齋記, 花潭祠聽之齋記, 金剛山記, 思誠齋記, 松隱記, 思誠齋記, 竹圃記, 蓮坡亭記, 梅庭小記, 竹圃亭記, 梧隱記, 石溪亭記, 月溪記, 三岡記, 杏隱亭記, 正庵記, 惺堂記, 愚軒記, 月圃記, 竹軒記, 石湖亭記, 把蘭亭記跋 : 題伊川先生謝王佺期贈丹詩後, 聚斯堂序記後?, 先祖文正公筆蹟刊行跋, 謹題語錄解後, 謹題四禮便覽後, 題歷代編年後, 題一?先生頭流詩後, 成梅竹題伯夷詩後, 書?畢先生牧丹詩後, 崔挾亭孤舟詩跋, 謹題學圃山水圖後, 謹題華西帶銘後, 書高夫人宗行錄後, 書鄭儒人孝烈宗行錄後, 題孝烈婦崔氏薦狀後, 養浩齋遺稿跋, 松亭遺稿跋, 光州鄕校誌跋, 咸平李氏家乘跋, 景仰契案跋, 秉天祠慕賢案跋, 遊勿梁亭因自警題板後, 採薇歌後弟題奉呈吾後石丈卷4雜著 : 讀河西先生贈人詩, 讀退溪先生耘草詩, 讀栗谷先生擊蒙要訣, 尊周解, 日新解, 勸王解, 儒釋辨, 公私辨, 人物辨, 言行辨, 得失辨, 爵祿辨白刃蹈難辨, 上智與下愚不移論, 以齊王猶反手論, 五覇假仁論, 民爲貴論, 紫荊說, 奉審夫子遺像, 薪膽錄, 三山齋陪松沙先生隨疑問目, 附先生答, 庚戌記事, 以八吾憂憤有警詞, ?仰亭上感想, 不日坮, 安義士射殺伊藤博文, 答澹對軒儒會所通文, 答風詠亭詩會, 答長者洞書齋講會文, 仁圃說, 應夫子解, ?矩說贈盧君文永, 西瑞說贈盧君斗永, 梧山解, 荷隱亭贊祭文 : 祭松沙奇記先生文, 再祭松沙先生文, 祭日新鄭先生文, 祭瑞軒安公文, 祭春潭奇先生文, 祭弦窩高先生文, 祭翠軒金公(永晩)文, 祭三從兄盤皐公(琪鉉)文, 祭玄潭處士金公(珉鉉)文, 祭梧隱金公(圭洙)文, 祭鵬南池公(應鉉)文, 祭婦男李敎翼文, 祭梧谷柳友(寅湜)文, 始祖王子公壇碑改修告由文, 始祖王子公壇碑改修後告由文, 義庵金公(基命), 築壇設享文, 石泉金公(成銀)遺蹟設位告由文, 三角山祈雨祭祝文, 敬慕齋上梁文, 追邃齋上梁文卷5碑文 : 義庵金公(基命) 忠義碑, 石泉金公(成銀)遺蹟碑, 靜山安公(鍾連)遺蹟碑, 孺人崔氏烈行碑, 密陽孫氏二孝一列記宗碑, 笑蓉山下同心契記念碑墓碑銘 : 愼庵崔公(溫)墓碣銘, 樵山盧公(景○)墓碣銘, 愛栢堂丁公(大瑾)墓碣銘, 海隱金公(載?)墓碣銘, 槐軒崔公(相華)墓碣銘, 靜岡金公(炯禹)墓碣銘, 寒松齋李公(應相)墓碣銘, 烈婦孺人裵氏(金榮斗妻)墓碣銘墓表 : 松隱金公(鎭文)墓表, 槐窩處士(珪漢)墓表, 靖菴盧公(典奎)墓表, 副護軍金公(斗錫)墓表, 暘谷廬公(錫文)墓表, 愚齋李公(光鎬)墓表, 盤溪處士(龍學)墓誌, 野隱廬公(錫興)墓表, 蓮堂金公(永鍾)墓表, 溪雲金公(南洙)墓表, 悔菴柳公(福根)墓表, 慕軒李公(鉉周)墓表行錄 : 柱山處士府君(文術)行錄, 晩悔府君(鳴漢)行錄, 附性潭文席下問目, 附文席答辭, 盤巖處士(玉鉉)行錄, 東廬公(允鉉)行錄行狀 : 芷川先生金公(公喜)行狀, 碧紗道察訪金公(繼陸)行狀, 橘隱金公(聖雨)行狀, 佳泉處沙金公行狀, 梧月齋府君(針)家狀, 雪山齋李公(敏植)行狀, 耕隱崔公(淳)行狀 晩圃府君(在華)家狀 芝山處士金公(鍾?)行狀, 雙石處士李公(熙容)行狀, 蓮溪金公(永尊)行狀, 心泉崔公(永煥)行狀, 盤皐公(琪鉉)行狀, 秋潭金公(圭煥)行狀傳 : 烈婦金孺人(朴泰相妻)傳, 烈婦崔氏(丁寬燮妻)傳卷6附錄 : 景儒字說, 景儒病愈來見識喜示意, 景儒奉賀, 神交說贈雲坡子序, 雲坡記, 採菊契序, 書門人篇後, 東籬詩軸序, 附詩軸, 附次壽韻, 輓詞, 行狀(崔南鎭撰), 墓碑銘, 跋(崔泳喆撰) 『운파유고(雲坡遺稿)』는 6권 2책 석인본으로 1978년 조카 영만(永滿)이 편집하고 간행하였다. 권1에는 부(賦)와 시(詩)가, 권2에는 서(書)와 화수록(花樹錄)이, 권3에는 서(序), 기(記), 발(跋)이 수록되어 있으며, 권4에는 잡저(雜著), 제문(祭文), 권5에는 비문(碑文), 묘표(墓表), 행록(行錄), 행장(行狀)이, 권6에는 부록이 수록되어 있다.
    2020-05-23 | NO.87
  • 원모정기〔遠慕亭記〕 - 운양속집
    원모정기〔遠慕亭記〕 〕 - 운양속집 제3권 / 기(記) : 김윤식(金允植, 1835~1922)서석산(瑞石山)은 아득히 드넓게 휘감아 솟아 올라 우뚝하니 광주(光州)의 진산(鎭山)이 되었다. 예로부터 이름난 이들과 통달한 선비들이 이 고을에서 많이 배출되었는데, 가까운 옛날로 거슬러 살펴보면 재략이 뛰어난 금남(錦南)과 충성스럽고 용맹한 석저(石底)가 모두 한미한 처지에서 떨쳐 일어나 후세에 명성을 드리웠다. 이른바 ‘땅이 신령스러우면 호걸이 난다’는 말이 참으로 그렇지 아니한가? 듣자니 정씨(鄭氏)의 선조인 휘(諱) ◯◯가 진주(晉州)에서 이곳으로 호적을 옮기고 서석산 아래 터를 잡아 집을 지었는데, 이곳에 분묘가 있다고 한다. 후손들이 번성하여서 해마다 제사가 끊어지지 않는다. 지금 정씨의 여러 종족들이 함께 계획하여 냇가에 정자를 세우고 원모정(遠慕亭)이라 편액을 달았다. 아마도 선조의 덕을 잊지 않고 효성의 뜻을 바치려는 것이리라. 그들이 사람 편에 내게 기문을 부탁해왔다.나는 지난 경신년(1860, 철종11) 가을에 호남을 유람하면서 서석산 삼황봉(三皇峯)에 오른 적이 있었는데, 시원한 바람 아득히 흘러가는 구름에 가슴이 맑게 확 트이면서 회고의 상념에 젖어들었다. 내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 산의 맑은 기운은 고금에 다를 바 없으니 여기 분명 광황 이인(光黃異人)이 있었을 터인데 지금 만나볼 수는 없는 것인가?”라고 하면서 한참을 서성였다. 그게 지금으로부터 61년 전의 일인데, 정씨의 정자 기문이 내 손에서 나오게 되었으니, 이제야 비로소 알겠구나! 지난날 만나 보기를 소원했던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 아니었을까. 어렴풋한 중에 미리 정해진 듯하니 참으로 우연이 아니다. 오랜 뒤에도 잊지 않고, 선조 사모하는 정성을 정자에 기탁하였다면 그 자손이 많고도 어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손이 많고 어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그 선조가 쌓았을 덕 또한 알 만하다. 이 산에 영(靈)이 있다면 반드시 덕을 지닌 가문에 아름다움을 모아 주었을 터인데, 그것이 혹 정씨 가문 아닐까?[주-D001] 금남(錦南) : 정충신(鄭忠信, 1576~1636)으로,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晩雲), 봉호는 금남이다.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북방 여진족에 대해 항상 경계하고 방비할 것을 주장했으며, 지략과 덕을 갖춘 명장으로 명성이 높았다. 이괄의 난 때 공을 세워서 금남군(錦南君)으로 봉해졌다.[주-D002] 석저(石底) : 김덕령(金德齡, 1567~1596)으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수(景樹), 시호는 충장(忠壯), 광주(光州) 석저촌(石低村)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웠지만 모함으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주-D003] 땅이 …… 난다 : 인물의 걸출함은 대개 땅의 영수(靈秀)한 기운으로 인한다는 것으로, 광주의 신령한 땅 기운이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는 근본이 되었음을 말한다.[주-D004] ◯◯ : 저본에 두 글자가 빠져 있는데, 고의로 뺀 것인지 잘못하여 누락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주-D005] 광황 이인(光黃異人) : 광황은 중국 광주(光州)와 황주(黃州) 일대를 말한다. 소식(蘇軾)의 〈방산자전(方山子傳)〉에 “방산자는 광주 황주 지역의 은자이다. …… 나는 광주 황주 지역에 이인(異人)이 많다고 들었는데 종종 거짓 미친 체하고 남루한 의복을 걸치고 있어서 만나볼 수 없었다. 방산자는 혹시 그들을 만났던 것인가?〔方山子光黄間隠人也……余聞光黄間多異人 徃徃陽狂垢汙 不可得而見 方山子儻見之與〕”라고 했다. 방산자는 송나라 진조(陳慥)인데 자는 계상(季常)이다. 만년에 광주 황주 일대의 기하(岐下)에 은거했다. 소식(蘇軾)이 봉상첨판(鳳翔簽判)으로 있을 때 그와 서로 알았다. 또 광황 이인으로서 유명한 은사(隱士)인 장감자(張憨子)가 있다. 그는 뚱뚱하고 바보스럽게 생겼으나 매우 총명하여 천문지리며 유불도 및 병법에 모두 밝았다. 홀로 구라산(九螺山) 연하동(烟霞洞)에 은거했다. 소식이 황주로 귀양 가 기정(歧亭)에 갔을 때 그의 기운이 범상치 않은 것을 보고 그를 관부로 불렀는데, 그 또한 흔연히 약속에 응해 서로 만났다. 그러나 끝내 한마디 말도 하지 않다가 홀연 떠나 버렸다. 장감자가 세상을 떠난 후에 기정의 명사 주유거(周維柜)가 구라산으로 찾아가 보았더니 바위에 그가 새긴 시 한 수만 적혀 있었다고 한다.
    2020-12-31 | NO.86
  • 원풍정(願豊亭) 소해정(蘇海亭) 만주사당(晩洲祠堂) 경의재(景義齋 )
    북구 소해로 11 (일곡동)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은 조선 시대 광주목 석제면에 속했고, 호구총수에 일곡촌(一谷村)이 기록되어 있어 지명의 유래가 오래되었음을 보여 준다. 그래서 전통적 문화가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일신재나 그중에 구한말 일대의 선비들이 구국의 일념으로 머물렀던 유서 갚은 곳이다. 원풍정(願豊亭)과 소해정(蘇海亭). 만주사당(晩洲祠堂) 이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20리 거리에 있다. 원풍정은 1817년에 최초로 건립되었지만 1912년 여름의 태풍으로 건물 전체가 붕괴되자 농암 노재규(1836~1920)가 이듬해에 중건했다. 앞면 3칸 옆면 3칸의 골기와 팔작지붕 건물이다. 원풍願豊이라 한 것은 나라를 위하여 풍년을 원한다는 주자의 ‘우국원풍憂國題豊’의 뜻에 따라 지었다. 농암정聾岩亭이라고 부른다. 건립자의 아호가 농암이다. 농암이란 어지러운 이 세상의 온갖 시비를 아니 듣기 위해 귀먹은 농자처럼 행세하며 살아간다는 뜻이다. 원풍정은 일곡근린공원과 일신초등학교 사이의 사거리에서 일곡마을로를 따라 일곡 자연마을의 평지와 한새봉 산이 맞닿은 곳까지 500여m 쯤 가야 한다. 왼쪽 길가에 절효사가 있고 일곡마을로의 오른쪽에는 소해로 길로 100여m 쯤에 만주사가 있다. 만주사 내에서 원풍정이 한 단 위에, 소해정으로 부르던 경의재는 한 단 아래에 각각 있다.심석재 송병순과 송사 기우만의 기문이 있고 난와 오계수의 상량문이 있다. 광주목사 김경규의 제액과 광주목사 민영직, 녹실 정해만의 차운이 있다. 노재규의 저서에 <소해문집蘇海文集>이 있다. 그의 스승인 연재 송병선은 제주祭酒에 기용된 뒤 서연관, 경연관, 대사헌을 지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이의 부당함을 왕에게 상소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음독 자결하였다. 소해정은 만주사 강당으로 사용, 경의재라고 개칭하여 오늘날 만주사 경의재라고 부르는 곳이다.서원 사우와 함께 정자나 누각, 문중의 재실들도 누정들은 사림들의 학문 연마의 장소이거나, 문풍을 기르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이에 비하여 후기의 그것들은, 반드시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문중적 기반 위에 존속한 것들이었다. 이곳 경의재.소해정(景義齋 = 蘇海亭), 만주사도 그런 역할을 했던 유산의 산실이다.*만주사양반사족들이 자기가 사는 촌락을 배경으로 신분과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동시에 이는 양반사족층의 체제유지적 노력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만주사는 1959년 연제(淵濟) 송병선(宋秉璿), 소해(蘇海) 노종용(盧種龍)을 배향하는 사우(祠宇)이다. 노종룡의 문인과 고을 유림이 그와 그의 스승 송병선의 유풍을 추모하여 1944년 일곡동에 만주사를 세웠다. 소해 노종용(1856~1940)은 1856년에 대촌관내 양촌마을에서 출생하였다. 치운(致雲)이요, 호는 소해(蘇海) 또는 면수(勉修)ㆍ농아(聾啞)며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1856년(철종 7) 광주 일곡동(日谷洞)에서 농암(聾岩) 노재규(盧在奎)의 아들로 태어났다.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과 송병선 문하에서 학문에 뜻을 두어 존경을 받았다. 그는 스승인 연제 송병선이 자결한데 뒤이어 면암 최익현이 일제에 잡혀 대마도에서 단식으로 순절하니 통곡(痛哭)으로 예장(禮葬)을 마친 후 스승의 유지를 받들고 척사위정(斥邪衛正)의 대의로서 누차 상소(上疏)를 올려 오적(五賊)을 물리치고 나라를 보전하려고 하였다.이러한 듯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스스로 세사(世事)를 끊고 광주 일곡동에 내려와 도의(道義)의 교(交)를 맺어 학문을 논하는 한편, 후진양성에 힘쓰다 소해문집(蘇海文集)을 남기고 1940년에 세상을 떠났다.경의재=소해정(景義齋 = 蘇海亭)은 원풍정과 같은 경내의 한 단 낮은 위치에 있으며 정자를 소해라 명명한 것은 주인 노종룡(盧鍾龍)이 그의 아호인 '소해蘇海'를 본따서 붙여진 것이며 임금이 존경한 덕망 높은 재상 노수신(盧守愼·1515~1590)이 방계 선조로 그의 덕의를 본받기 위해 소해정(蘇海亭)이라고 정하고 1930년에 준공된 정자이다. *경의재정자는 정면 5칸에 측면 3칸의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경의재란 현판을 가지고 있으며 내실에 쪽마루를 두었다. 주련은 석촌 윤용구가 썼으며 고광선, 노상익, 기우만 등 당대의 유명 문인사들이 시, 기문을 무려 46개의 현판을 남겼다.소해(蘇海)에서 경의재(景義齋)로 바뀐 것은 1965년에 노종룡(盧種龍)의 아들 노진영이 정자를 경내에 있는 만주사의 강당으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면수재(勉修齋)라고도 부르고 있다. 내부에는 고광선, 정봉현 기동준 기와 시판에 거액되어 있다. 그중에 홍주인(洪州人) 설암(雪庵) 송근묵(宋謹默 1856~1937)은 이렇게 감흥을 알리고 있다.기개있는 높은 인격 좋은 때를 못만나서/숨어 살며 의(義) 지키니 이 골짝이 마땅하네.세상일 안들으니/그 마음 편안하고 / 면수(勉修)로 이름하여 도(道)로서 기약했네.흰 머리늙은 나이 서로 모아 대화하고 / 푸른 옷깃 한가한 날 시를 함께 의논했네.선정(先亭)이 지척(咫尺)이라 감회가 특수하니/풍년을 원하면서 그 뜻을 알리었네 경의재란 선친의 절의를 숭모(崇慕)한다는 의미로서 이 정자의 용도가 유락휴식(遊樂休息)처가 아닌 강학처소(講學處所)로 변한 것이다.광주시 일곡동은 도시화로 일곡주택지구로 개발되면서 산전벽해란 말이 어울리게 변화됐다. 일곡지구 일곡도서관 옆 산아래 주택단지 안쪽으로 자연부락 일곡동 515번지 일신중학교 뒷쪽 산자락에는 전통기와로 지어진 여러채가 보인다. 일대는 주민들이 매일 산책하는 길목이다. 이 일대에는 일신재,절효사.영원정.묘룡대 같은 유서 깊은 목재 건축물이 사연을 담고 도시민들에게 많은 위안을 주고 있다. 그러나 만주사을 비롯 그 어디에도 대한 이정표 하나 없어 찾기 어렵다. 문화유산도 홍보가 그 가치를 더한다는 사실을 관계기관에서는 알아야 할 것 같다.*참고 : 한국매일(2012) 南道 정자기행(222)
    2020-02-26 | NO.85
  • 월소루 月小樓
    동구 금남로1가 (소빈헌 서쪽) 월소루는 ‘산은 높고 달은 작다’는 강산풍월江山風月을 뜻하는 누각이다. 1699년 광주목사로 부임한 여윤汝尹 한성우 韓聖佑(1633~1710)가 지금의 민주의 종각 옆 건물 상무관 주변에 소빈헌笑嚬軒과 함께 건립했다. 이후 1701년 전라감사, 1702년에는 전라도관찰사로 재임하는 등 전라도와의 인연은 깊다.오서梧墅 박영원朴永元 (1791~1854)이 어느 날 광주에서 묵으며 ‘발창평숙광주發昌平宿光州라는 시에서 월소루는 동헌 하모당何暮堂 서쪽 10보 지점에 있었다고 말한다. 박영원은년부터이듬해까지전라도관찰사로있어이무렵시를지었던것으로보인다.또 서쪽을 높여 한 채의 작은 누각을 짓고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 ‘산이 높으니 달이 작다[山高月小]’라는 뜻을 취해 월소루라 이름하였다. 이 건물은 고작 3칸짜리에 불과해 이런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1877년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옛 상무관 주변엔 하모당, 그곳에서 채 열 걸음을 떼기도 전에 소빈헌과 월소루, 그리고 회화나무 바로 곁에는 한말 때까지 서기청書記廳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2020-03-13 | NO.84
  • 월파장서루 月坡藏書樓
    광산구 서봉동월파장서루는 화정(花汀) 박원국(朴源國)이 지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노사 기정진이 쓴 기문이 전하고 있어 조선말 서양세력의 침략기에 지어진 정자로 보인다. 《광주읍지》(1879, 1924)에서는 주의 서쪽 36리에 있다. 승정원 일기 고종 14년 정축(1877)  8월 21일에 보면 조선시대에도 불우이웃돕기 성금내면 벼슬을 주었다고 하는 내용에 광주의 유학 박원국(朴源國)ㆍ박원홍(朴源弘)이 각각 돈 1500냥을 내어 낭관郎官의 첩지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광산구 서봉동에 월파장서루 터가 있으며 강골마을에 고인돌 7기, 서봉마을에 고려 후기의 문신인 한사기(1257~ ?)를 제향하는 사당인 봉강재鳳岡齋 등이 있다. 원래 광산군 소지면所旨面에 속한 지역으로 지금은 광산구 어룡동 관할이다. 처음에는 봉황새가 사는 곳이라 하여 서봉리라 하였다가 뒤에 서봉사란 절의 명칭을 따 서봉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450여년전 창녕조씨 조관중이 화순군 동면에서 옮겨와 개촌하여 정착한 지역으로 수령 수백년을 헤아리는 팽나무 노거수가 마을 앞에 서 있다. 마을에서 좀 떨어진 곳에 ‘새터’라는 곳은 한말 때 본 마을에 살던 조기환과 파평윤씨, 밀양박씨 세가구가 옮겨와 마을이 생성되었다. 강동(일명-강골)이란 두 뜸으로 된 마을이 있는데 약 2백여년 전에 형성되었다. 그 앞을 흐르는 황룡강이 깊고 넓으며 ‘강골모퉁이’라는 산골에 옛날 월파대라는 아름다운 누정이 있어 눌재 박상, 송천 양응정, 송강 정철 등의 자주 찾아왔다고 전해진다. 월파대가 월파장서루를 말한 듯 하다.
    2020-03-13 | NO.83
  • 월파정(月波亭)
    전남 나주 월파정(月波亭), 평동면의 박국보(朴國輔)가 지어 지냈던 곳이다.지금은 사라지고 1935년에 편찬한 조선환여승람에 전하고 있다. 평동면은 1949년에 삼도면과 본량면, 평동면을 광산군으로 이속시키고 지금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평동을 말한다.  “월파정 아래에 목란의 배를 띄우리라 月波亭下泛蘭舟” 했듯이 달빛이 물결에 흘러가는 모습의 월파정(月波亭)이 있었던 곳은 물가였음을 알 수 있다.  
    2020-03-13 | NO.82
  • 월호정
    서구 극락강변월호정月湖亭은 광주향교의 『광주지』(1964)에 따르면 서쪽 극락강변에 월호처사 최학崔㶅이 지냈던 곳으로 현와 고광선이 찬기를 남겼다. 그러나 지금은 그 위치를 가늠할 길이 없다.
    2018-05-23 | NO.81
  • 육오당 六吾堂
    육오당(六吾堂)은 조선 후기의 학자·의병이었던 기의헌(奇義獻, 1587~1653)이 고룡리(古龍里), 현재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 용동 마을에 '나의 식(食), 천(泉), 의(衣), 천(天) , 명(命), 년(年)의 6가지의 대해 순리(順理)대로 사는 삶을 살겠다며 이름하고 지어 은거했던 곳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기의헌의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사직(士直), 호는 기은(棄隱) 또는 육오재이다. 고봉 선생의 종손으로 가학에 이미 연원(淵源)이 있었다. '동심인성(動心忍性)' 네 글자에 공부를 깊이 하였으며, 《주역》을 파고들어 《계몽전의(啓蒙傳疑)》를 가장 오래도록 읽었다.1627년 강홍립(姜弘立) 한윤(韓潤)이 청나라 군사를 인도하여 침입해 오자 거의도유사(擧義都有司)가 되어 군사를 모집하고 군량미를 조달하였다.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또 거의도유사로 군사를 이끌고 청주까지 갔다가 강화되었다는소식을 듣고 통곡하였다. 절의와 기개가 뛰어났다. 특히 그는 주역(周易)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을 깊이 연구하였다.저서인 《기은유고(棄隱遺稿)》에 시(題六吾堂(三言), 六吾堂續題(五言七首)를 남겼다.
    2020-04-28 | NO.80
  • 율리전사 栗里田舍
    광산구 계안길 27-17 (율리전사)   석음 박노술(1851~1917)은 율리전사를 짓고 제자를 양성하였다. 율리栗里는 중국 진대晉代 도연명陶淵明이 살던 마을로 ‘귀거래사하는 삶’의 의미이다. 계안마을로 들어가는 직선 막바지의 왼편에 정남향의 기와집이 율리전사이다. 박노술은 밤나무 밭이 있는 계안마을의 초가에서 경사經史를 통독하고, 심성이기心性理氣를 탐구했다. 전사田舍의 안채는 앞면 5칸 옆면 2칸의 와가 한 채가 뒤쪽에 위치해 있고 그 곁에 창고가 있다. 1933년에 띠집으로 중창했고, 1962년에 군비 지원을 받아 개와로 개량했다.조선 후기의 학자로 안호 박제방의 손자이자 관어헌 박양동의 아들이다. 부친에게 수업하고 노사 기정진에게 집지執贄하여 학문을 이루었다. 한때 현량賢良의 물망에 올라 편전便殿 어시御試의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국치를 당하여 풍천지통風泉之痛을 이기지 못해 북망통곡北望痛哭의 나날을 보냈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송사 기우만의 의병활동에 참여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두문불출하였고 일제가 보내온 은사금을 거절하였다. 계안마을에 풍천대를 짓고 망곡望哭하려 했으나 이를 이루지 못했다. 후일 춘파 박일규가 1920년에 축성하였다. “천지가 다 무너져도 나의 본심은 변할 수 없으며 나라가 부서지고 이 한 목숨 죽는다 해도 조국에 대한 나의 의리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天崩地陷 心不可變 國破身亡 義不可失]”이 글은 장성헌병대에서 써 던진 시구로 널리 퍼졌다. 당시에 많은 감동과 호응을 일으켰던 그의 격서檄書가 송병직의 <존화록尊華錄>과 그의 <석음유고石陰遺稿> 등에 전한다. 율리전사栗里田舍 및 석음유장石陰遺庄이라고 쓴 고당 김태규의 편액이 중앙 정면에 걸려있다.
    2020-03-13 | NO.79
  • 율수재(聿修齋)
    율수재는 면암 최익현이 제주도와 흑산도 유배시 지성으로 보살핀 제자 율수재 박해량(朴海量, 1850~1886)과 그의 아들이자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박현동(朴玄東, 1886~1962)의 강학 공간이었다. 최익현이 써준 <율수재기>가 남아 있다. 亡友道謙 朴海量 遺居 澹對舊遊少一人 圖書遺宅見心眞 堪憐剩得栽培力 竹子梧孫取次新 / 松沙先生文集卷之一광산구 하남동 장수마을 서쪽 방향에 있는 율수재는 지금은 재각으로 사용되고 있다. 원래는 박해량이 1886년 초당을 지었으나 사후에 아들 박원동朴源東이 부친의 뜻을 기리기 위해 1897년 중건하고 이후 손자 박선규朴璿珪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율수재에서 수학한 박해량의 제자였던  장흥(長興) 니산(尼山) 고광열(高光烈)이 지은 시에서 이곳의 의미가 잘 나타나 있다.시례(詩禮)로서 이은 공가(公家) 세를 이어 전해가니율수라는 이름이 숨김없이 분명하네.노사선생 문하에서 깊은 학문을 연구하고면암 배소(配所 유배지)에서 높은 이름 얻었도다.선세 무덤 침소(瞻所)하며 그 옆에다 집을 짓고강반(江畔)에서 어초(漁樵)하며 그의 마음 즐겼도다.뒤를 이은 아들 손자 모두 함께 어질어서부조(父祖)의 뜻 이어받아 옛 선업을 이었도다.정자는 도리석초, 도리기둥의 평기와 팔작지붕으로 앞면 6칸 옆면 2칸으로 오른쪽 2칸과 왼쪽 한 칸이 대청마루 거실로 꾸며져 있다. 좌측 거실의 옆에 별도의 한 칸 다락이 설치되어 있고 중앙의 2칸이 판자마루로 터져있다. 칸마다 위 아래로 열고 닫는 벽괘용壁掛用 새살창문이 달려있고 중앙의 2칸 마루를 제외한 좌우의 거실 3칸이 모두 벽이 아닌 칸막이 밀창으로 되어있다.율수재는 목사를 지냈던 송석松石 송기로宋綺老의 판각이 정면에 걸려있고 아들 박원동(朴源東)의 원운을 비롯한 최익현의 기문과 니산 고광열, 문인 김도병金道炳과 박동규朴東奎 등의 차운이 벽에 걸려있다. 아들 박원동이  지은 율수재 원운(原韻)에서 이 정자의 의미가 서려있다.백당(栢堂)께서 남긴 유업(遺業) 율수(聿修)께서 전수하니아름다운 이 방명(芳名)이 백세까지 이어가리면로배소(勉老配所) 찾아감이 어제처럼 생각되고노옹(蘆翁)에게 수학(修學)함이 여러 해가 되었도다.한이 없이 깊은 도원(道源) 어느 곳에 찾을 손가넘쳐흐른 맑은 덕음(德蔭) 별유천(別有天) 이뤘도다.아름다운 그 가성(家聲)이 이제부터 높아지니어리석은 이 불초(不肖)가 어찌 감히 이어갈고.1900년 쓴 최익현이 쓴 기문에는 “이 집의 이름을 율수聿修라 함은 글자 그대로 그 이름을 돌아보고 그 뜻을 생각하며 학문의 이치를 연구하여 스스로의 몸을 닦아 일으키고 또 선대의 유업을 이어 미래의 후진을 깨우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2020-03-09 | NO.78
  • 은항정 銀缸亭
    광산구 박호동 (박뫼마을) 판관 박중윤朴仲允은 당시 황룡강변에 정자를 짓고 큰 잉어 한 마리를 그의 밥을 나눠 먹여 기르며 살았다.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지낸 송천 양응정(1519~1581)의 장인이다. 어등산 산허리에 박호마을이 있는데 박산리와 호송리를 합해 부르는 명칭이다. 박호동에 가면 용기재[龍起峙]란 땅이름이 있다. 박뫼에는 ‘은항정’이란 땅이름이 구전으로 전해온다. 지역 사람들은 옛 정자 인근에 은행나무가 있었거나 또는 샘이 은항아리의 물처럼 맑다고 해서 은항정이라 지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이곳 사람들은 이 동네에 살던 죽산박씨 박중윤 판관이 살 때 은항리에 잉어를 기르던 정자로 생각한다. 지금도 은항정 옛터 샘이 있고 이 마을을 서당골이라 부른다. 다른 기록에는 양공정이라 하는 데 양응정의 정자라 해서 梁公亭이라 부른 것 같다.하루는 박중윤이 낮잠을 자는 데 꿈에 잉어가 하늘에 오를 때가 되었으니 강물에 놓아달라고 현몽해 그 꿈에 따랐더니 용이 되어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다. 이때부터 천등산天登山이라 부르던 박뫼 뒷산은 잉어가 하늘로 올라간 산이라 하여 어등산魚登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때 잉어용이 넘어간 고개가 용기재이다.박중윤의 사위인 양응정이 옮겨와 살면서 그의 해박한 식견으로 사람들을 감복시켰기 때문에 박자를 써서 박산으로 마을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2020-03-13 | NO.77
  • 읍취정 挹翠亭 2
    북구 비엔날레로 133-1 (용봉제) 학암 안희직(1556~1618)은 읍취정을 지어 향사우鄕士友들과 끊임없이 학문을 닦고 연구했으며, 산수를 좋아하고 세파에 흔들림 없이 자기 수양에 힘썼다는 내용이 조선환여승람(1935)에 기록되어 있다. 문혜공文惠公 안원형安元衡의 후예로 조봉대부朝奉大夫 종부시직장宗簿寺直長의 관직을 역임하고 1570년대 서구 매월동에 입향 개촌하여 살아오다 북구 삼각산 아래 변봉마을로 이주했다. 본래는 광주군 와지蛙只면이었으나 1957년 동제 실시에 따라 신룡동, 태봉동 등으로 개편되었다가 1983년 용봉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당시 마을 이름을 적취笛吹, 적불, 저불이라고 불렀다. 적취란 연유는 장원급제하여 금의환향할 때 지방관아에서 피리 불며 영접한 것이 영광으로 승화된 것을 뜻한다. 저불이라 부른 것은 한문의 뜻글자와 한글의 소리글이 합쳐져 적불이 저불로 구전된 것이다.급속한 도시발전에 따라 1994년 변봉마을 앞 용봉천 복개공사로 세심보洗心洑가 없어지고 용봉지구 구획정리사업으로 세심정洗心亭과 읍취정揖翠亭도 자취를 감추었다. 2008년에 죽산안씨 참의공파 문중토에 변봉마을 터비 및 죽산안씨문중유래비를 세웠다. 일제강점기 때 농용수를 해결하기 위해 자력으로 축조한 용봉제저수지龍鳳堤貯水池와 봉곡마을 외곽의 변봉마을 앞 시정나무만 한 그루 외롭게 남아있다.
    2020-03-13 | NO.76
  • 광주광역시
  • 한국학호남진흥원
  • 사이버광주읍성
  • 광주서구청
  • 광주동구청
  • 광주남구청
  • 광주북구청
  • 광주광산구청
  • 전남대학교
  • 조선대학교
  • 호남대학교
  • 광주대학교
  • 광주여자대학교
  • 남부대학교
  • 송원대학교
  • 동신대학교
  • 문화체육관광부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광주문화예술회관
  • 광주비엔날레
  • 광주시립미술관
  • 광주문화재단
  • 광주국립박물관
  • 광주시립민속박물관
  • 국민권익위원회
  • 국세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