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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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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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호재(養浩齋)
    광주광역시 북구 석곡동에 양호재(養浩齋) 정한겸(鄭漢謙)이 지어 지냈던 곳이다.   1935년에 충남 공주(公州)의 유학자인 이병연(李秉延, 1894∼1977)이 편찬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 전하고 있다. 양호(養浩)는 ‘호기를 기른다.(養浩氣), 즉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2020-03-13 | NO.120
  • 여재각
    만산마을 뒤. 1960년. 광산이씨문중 건립. 여재각은 원산동 만산마을 뒤편에 있다. 광산이씨 문중에서 1960년에 건립한 문중의 재실이다. 건물은 세멘트 기단위에 정평 주초를 놓고 정면 4칸 측면 1칸의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재실내에는 여재각이란 현판 이외에는 별다른 제액은 없다. 여재각에서는 병조 판서 이일영(李日暎), 필문 이선제(李先齊), 양심당 이시원(李始元), 세심당 한원(翰元)의 분암(墳庵)으로 이들을 제향(祭享)한다. 제일은 매년 음력 10월13일에 지낸다. 원주의 기둥에 쓰여진 주련(柱聯) 문구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祖宗衣履曹藏處(조종의이조장처)   선조의 옷과 신발 함께 이곳에 저장하고子姓羹牆永慕時(자성갱장영모시)   자손들이 사모하며 길이 여기서 추모하네!俎豆千年長不替(조두천년장부체)   제사를 천년 동안 길이 폐하지 않고箕裘百世永相傳(기구백세영상전)   가업을 백세가 다하도록 길이 서로 전하리!止門宛甫客聲在(지문완보객성재)   문 닫고 채전 일구니 손님이 찾고入室油然孝弟生(입실유연효제생)   방에 들어오니 효제마음 솟는구나!
    2018-10-21 | NO.119
  • 연당 蓮堂
    주의 북쪽 10리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10리에 있다. 기록에는 김용구金龍久가 지었으며 근래에 폐철되었다고 해 일제강점기 초기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정자 이름으로 볼 때는 주변에 연꽃이 만발한 연못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2020-03-13 | NO.118
  • 연로정 延老亭
    박상현은  광산구 진곡동에 1667년(헌종8) 39세 때 연노정(延老亭)을 짓고 우헌(寓軒)이라 자호하고 고요함에 만족하였다. 그는 경전에 널리 통하였으며 특히 대학에 밝았으며 주희(朱熹)의 학문을 근본으로 삼았다.   사헌부장령으로 추증됐던 우헌寓軒) 박상현朴尙玄(1629~1693)은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경초(景初)로 박수림(朴遂林)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봉산이씨(鳳山李氏)로 이부민(李傅敏)의 딸이다. 의기(義氣)의 대학자로 송시열은 그를 모년지기(暮年知己)로 허여하였다고 한다. 손재(遜齋) 박광일(朴光一)의 아버지로 송시열에게 보내 학문을 배우게 하였다. 1685년(숙종11) 겨울, 호남 암행어사 김만길(金萬吉)이 행의(行誼)로 조정에 천거(薦擧)였다. 학문과 강론에 출중해 영조(英祖)로부터 "과연 나의 스승의 자손이구나" 하며 어제어필를 하사 받으며 절충장군검지중추부사에 오른 박광일의 장손 만회재(晩晦齋).창암(蒼庵) 박휘진(朴徽鎭 1705 숙종 31~1790 정조 14)의 증조부다.그는 1667년(현종 8) 배를 타고 망명해온 명나라의 유민 90명을 조정에서 체포하여 청나라로 돌려보내자, 이를 개탄하는 시를 짓고 당세에의 뜻을 끊어버렸다. 그뒤 태극도설(太極圖說). 통서(通書). 황극경세(皇極經世). 역학계몽(易學啓蒙) 등의 성리서를 깊이 연구하여 음양소장도(陰陽消長圖)를 저술하였다.저서로는 <우헌집寓軒集>이 있다. 송시열과의 편지, 만시挽詩와 제문祭文 등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등 송시열과의 관계를 강조했다. 1780~1790년대 경에 활자로 발행한 초간본은 전하는 것이 없다. 1889년에 송기노宋綺老에게 발문을, 1898년에 후손 박태동朴泰東, 박협동朴協東 등이 송근수宋近洙에게 서문을 받아 상하 2책을 5권 2책으로 나누어 목활자로 중간하였다. 문집은 5권 2책으로 권두에 송근수의 서문과 총목록이, 권1은 시, 권2~4는 편지글, 권5는 잡저로 음양소장도陰陽消長圖 등이 실려 있다. 권말은 권상하權尙夏가 지은 묘갈명, 이희조李喜朝가 지은 묘지명이 실려 있다. 시천(詩川) 이후원(李厚遠)이 이곳에 들려 연로정(次韻寄題 延老亭)시와 연로정 팔경(延老亭八景)을 읊었다.연로정 8경(次潛岳從兄延老亭八景韻)을  초산귀운(楚山歸雲), 입암낙조(立巖落照), 진천취연(眞泉炊煙,) 천황모우(天皇暮雨), 인산원취(仁山遠翠), 강탄어화(江灘漁火), 정하오송(亭下五松), 사주면로(沙洲眠鷺)라고 쳤다.그 중에 정자 아래 다섯 그루의 소나무를 두고 시를 지었다.  
    2020-03-13 | NO.117
  • 연일정 蓮逸亭
    광산구 임곡동 (연동마을)   옛 동곡면 본덕리 연동蓮洞마을에 연일蓮逸 박민용朴玟容이 노후를 보냈던 연일정이 있었다. 연동마을은 밀양박씨와 고성이씨가 들어오면서 일명 ‘도래’라 했다. 마을 앞에 연방죽이 있다하여 연꽃 연蓮자를 취하여 연동이라 불러 지금에 이른다. 1957년에 오쌍근 吳雙根 이 편찬하여 간행된 <호남속수기아집湖南續修箕雅集(單)>에 박민용의 '고산제중수운'이 수록되어 있다. 기아(箕雅)’라는 명칭은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노래(詩歌)라는 뜻이다.  
    2020-03-13 | NO.116
  • 연파정 蓮坡亭
    북구 하백로29번길 24 (매곡동)   광주민속자료 제3호로 지정되어 있는 김용학가옥金容鶴家屋을 구성하는 건물 중 하나이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10리에 있다. 농와 김영덕이 평소 언덕 위에서 휴양의 시간을 보냈다. 1918년 하은(荷隱) 김희수(金喜洙)(1861∼1934)가 아버지 김영덕(金永德)을 기리기 위해 아호를 붙여 지었다. 1933년 김용학이 하은정荷隱亭을 지을 때 인부의 실수로 연파정에 불이 붙어 하은정과 함께 다시 지었다고 한다. 사랑채는 백암이다.앞면 3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처마의 곡선이 중앙으로부터 반전을 이루어 조로와 후림이 아주 자연스럽다. 정자의 4면에 오동나무 덧문을 달아 비가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고 바람을 막았다. 정자 옆에는 정원과 연못이 잘 가꾸어져 있어 풍치를 더해준다. 안채 마당에서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하은정이 나오고, 하은정 뒤편 언덕에 연파정이 있다. 두 정자 모두 100년 생 벚나무에 둘러싸여 있다.연파정이 마을 가장 높은 곳에 있어 무등산이 정면으로 가까이 보인다. 김영덕이 지은 연파정 팔경에도 잘 나타나 있다.   아름다운 서석산이 하늘높이 서 있으니높고 낮은 많은 봉만 그의 모습 기묘하네보기드문 좋은 선경 이 지역에 자리하니눈빛같은 하얀 구름 조석朝夕으로 오고가네   그의 아들이 김용학이 살고 있는 가옥은 4대가 살고 있는 살림집과 정자가 언덕 위에 조화롭게 세워져 있는 1900년대 초의 민간원림이다. 도심 속의 청량제 같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연파정 내부에는 시詩와 기문記文 등 미처 목판에 인쇄하지 않은 문서들이 남아 있다. 이 글들은 모두 광산김씨양산군수공파세적光山金氏梁山軍守公派世蹟이란 책에 수록되어 있다.1918년에 세운 연파정이나 1934년에 세운 하은정(荷隱亭)은 그 역사가 오랜 편은 아니나 여기에서도 많은 시문이 제작되어 누정사에 또 하나의 특이한 사례가 되고 있다. 연파정에서 지어진 제영은 400수가 넘는데 이는 짧은 기간에 많은 시인이 출입하였음을 뜻한다. 소은 김기환이 연파정에서 지은 시가 그 운치를 보태고 있다.   인가 있는 언덕위에 이 정자가 서 있으니그 모습이 고요하여 이 마을이 깨어나네하백이란 마을이름 그지없이 아름답고광산이란 이 지역이 유별하게 푸렀도다.   뜰을 두른 푸른 난초 맑은 향기 가득하고줄을 지어 피는 화수 그 모습이 병풍같네연운사조 그 광경을 뜻에 따라 즐기려고이곳 저곳 구경하며 맑은 술잔 멈췄도다.
    2020-03-13 | NO.115
  • 영귀정 永歸亭
    남구 사직동   <광주1백년>의 저자 박선홍은 남구 사직공원 정상 부근에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 정자는 사직단 옆에 있는  영귀정永歸亭을 말한다. 같은 이름의 영귀정이 가까운 곳에는 화순군 춘양면 회송리 칠성마을에 있고 옥과 영귀정은 송강 절철이 '玉果永歸亭題詠'이라는 시를 남겼다.영귀永歸는 영원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죽음을 뜻하는 말이다.  
    2020-03-13 | NO.114
  • 영락정
    서구 유덕로12번길 12유촌마을 북쪽에 1948년 정종태程宗太 김정곤金晶坤 정원채鄭元采 정찬규鄭燦奎 등이 선도적으로 노력하고 동민들의 협력으로 지은 영락정泳樂亭이 있었다. 원래 이 자리에 영풍정泳豊亭이라는 정자가 있었으나 허물어졌고 마을 사람들이 영락정을 세웠다고 한다. 앞면 2칸, 옆면 2칸 건물로 내부 전체가 벽이 없는 마루로 되어 있었다. 정내에는 영락정이라는 현판과 희사자의 명단이 판각으로 걸려 있었다. 영락泳樂이라는 하는 것은 최초 건립 당시만 해도 맑은 호수가 정자 아래에 넘쳐 많은 사람들이 물놀이를 즐겼다고 한다.정자 양쪽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수 백년 된 노거수가 있고 극락강의 맑은 흐름이 먼 빛으로 바라보인다. 2008년까지만 해도 한 마을답사팀의 기록에는 사면정자로 남아있었으나 이 정자는 다시 퇴락해 2014년께 8각 정자로 다시 지어졌다.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정자 형태이다. 바로 인근은 공장과 창고가 즐비해 조망은 좋지 않다. 현판은 보이지 않았다.
    2018-05-23 | NO.113
  • 영모재1
    서구 서쪽 30리영모재永慕齋는 『광주읍지』(1924)에 주의 서쪽 30리인 조교동造橋洞에 있다고 했다. 진사 둔암遯庵 김덕일金德鎰 및 참의 소천素泉 김성도金成道가 건립했다.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1836~1905)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1846~1916)의 기문을 비롯하여 교리 이병관李炳觀(1858~ ?), 진사 임원철林源喆의 차운 등이 있다고 했다.그러나 여러 문헌을 찾아도 ‘조교동’의 지명을 찾지 못했다.
    2018-05-24 | NO.112
  • 영보재 永補齋
    광산구 덕림동 (수성마을)   문화류씨 일당逸堂 류절柳節(1517~1580)이 강학했던 장소였으나 지금은 덕림사의 재각으로 사용하고 있다. 경내에는 16세기말에 건립되어 류절과 둘째 아들 농포弄圃 류희달柳希達(1571~1631), 농포의 아들 고암高巖 류시필柳時泌(1611~1643), 농포의 9세손 경은耕隱 류인옥柳寅玉(1850~1919) 등을 배향하는 사우 덕림사德林祠가 있다. 지금의 건물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868년에 훼철되었다가 1963년 9월 이 고장의 유림들에 의해 재건립된 건물이다. 건물은 시멘트로 기단을 조성한 후 그 위에 정평 주초를 놓고 원주의 기둥을 세워 정면 3칸 측면 1칸의 일식기와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주두위에는 굴도리를 올린 3량집이다. 창호는 분합문으로 되어 있고 띠살창이며 청판을 대고 있다. 류절은 양주에서 유순장의 아들로 태어나 1542년 삼사에 딸린 정4품의 벼슬인 자의諮議에 제수되었다. 그 후 지평을 거쳐 공조참의를 역임하였으나 을사사화로 윤임 등이 화를 입은 것을 보고 벼슬을 포기하고 양주로 내려와 모친과 함께 인천에서 해남으로 내려오는 도중 나주 구진포에서 은거했다.류희달과 류시필은 광산구 본량면 동호리 신촌마을에 거처했고 류인옥은 동호리 금호마을에 살았다.
    2020-03-13 | NO.111
  • 영사재1 永思齋 /오효석
    광산구 명곡길 170-30   영사재는 1673년 생로당 오효석(1620∼1697)이 정치적 뜻을 펼치지 못하는 한을 후학으로 가르쳤던 곳이다. 영사재는 장사재와 함께 광산구 대명동 명곡마을 뒤쪽 산기슭에 있다. 명곡마을 입구를 지나 크고 작은 제방 끝 산 아래에 대명사와 영사재가 있다. 이곳은 골짜기가 길어 장탄長灘이라고 부른다. 그는 양평공 오자치의 6세손이고, 부친은 좌승지 도림 오이구이다. 효종孝宗(재위 1649~1659)이 즉위하자 재야산림在野山林을 등용할 때 송시열과 함께 발탁되어 북벌계획에 참여했던 동국 18현의 한 명이였던 동춘당 송준길 등과 교제가 깊었다.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고 숭명배청崇明排淸을 다짐했던 효종의 서거로 북벌계획이 좌절되자 자신이 이루려 했던 모든 것이 무너졌다. 1673년 광산의 대명산으로 들어와 영사재를 짓고 은거하면서 후진들에게 주자학과 배청사상, 자주독립정신을 가르치며 외세배제의 강한 의지를 가졌다. 그의 저서로 시문집 대명처사유고大明處士遺稿 4권 1책이 전한다.지금은 재실로 사용되는 데 입구에 세워진 석문에는 숭정일월대명별崇禎日月大明別區라는 외세배제의 강한 의지가 엿보이기도 한다. 이 건물은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로 건물 정면에 영사재중수량문永思齋重修樑文, 대명사예성운大明祠禮成韻 등이 현액되어 있다. 영사재는 대명사보다는 건립연대가 훨씬 위로 올라간다. 영사재에는 우암 송시열이 친필로 쓴 현판과 오효석이 직접 쓴 자신의 호 '생로당'이라는 현판이 나란히 걸려있다. '영사'의 뜻은 숭명의리(崇明義理)를 길이 잊지 않겠다는 춘추대의의 표현이다. 많은 기록에 오효석이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에 참여한 것으로 나오는 데 나이로 볼 때 오류가 엿보인다.
    2020-03-13 | NO.110
  • 영사재2 永思齋- 이호헌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20리에 있고 초은 이호헌(1858~1919)이 건립했다. 주인 이호헌의 시가 남아 있다.   어렴풋한 마음으로 재실 안에 들어서니멀지 않은 우리 선롱先壟 아득하게 보였도다.아름다운 많은 송림 담장가에 가득하니서리 이슬 밟으면서 춘추제향 모셨도다.아침 연기 개인 곳에 맑은 강물 반짝이고푸른 대숲 깊은 곳에 저문 구름 흘렀도다.이 가운데 머무르며 그지없이 추모하니이를 보는 여러 후손 많은 감화 느꼈도다.  
    2020-03-13 | NO.109
  • 영사정 永思亭
    남구 지산재길 51(양과동)   고운 최치원을 배향한 지산재芝山齋 근처에 영사정이 있었다.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서남쪽 20리라 했다. 장령 영사정 최형한(1460?∼1504)이 정자를 지은 것은 학문이나 유희가 아니라 어버이의 무덤을 바라보며 그의 못다한 추모의 정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집으로부터 1리 정도에 불과한 선친의 묘소 옆에 정자를 지어 아침저녁으로 이곳에 올라 묘소를 살핀 것이다. 돌아가신 어버이를 길이 사모하여 잠깐이라도 잊지 않는다는 시전 ‘영언효사永言孝思’의 뜻을 취하여 그 이름을 영사정이라 했다.용재 성현의 영사정기에 ‘今則親亡而葬於乾芝山之麓하니 山이 去家纔一里許에 構亭而名曰永思亭’라는 기록이 있다. 최형한은 부모에 대한 효도뿐 아니라 나라를 위한 충성도 높았고 사림의 거두였던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으로 점필재 문하에서 일두 정여창, 한훤당 김굉필, 탁영 김일손, 허백당 성현 등과 함께 교류했다. 최형한은 조선의 문신으로 비운의 인물이나 극찬을 받은 절인이었다. 남구 양과동에서 생원 최영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480년에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고, 1483년 춘당대시春塘臺試 문과 을과에 1등으로 급제하여, 1484년 전교서 정자로 입직했다. 1485년 신병으로 고생하는 중에 양친이 연이어 돌아가시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양과동의 양과동향약에 참여하며 향리 발전에 참여했으며 양과동정에 ‘제간언대題諫言臺’의 시를 남겼다.
    2020-03-13 | NO.108
  • 영원정 永源亭
    북구 일곡동 산69-1   북구 일곡지구 모룡대길의 모룡대를 지나 광주교통문화연수원이 나오는데 입구에서 옆 산길로 50m 쯤 오르다 보면 처항處項골 아미산 서록에 정자라기보다는 모정 형태로 된 춘강 노문영(1896~ ?)의 영원정이 자리하고 있다. 1971년에 세워진 영원정은 모정 형태의 것이나 이곳의 많은 정자가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유추해 보면 이전에도 초당으로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정자내 남쪽 면에 정자 주인이 직접 쓴 영원정永源亭, 북쪽에는 독락헌獨樂軒, 동쪽 면에 망운대望雲臺, 서쪽면에 아산정사峨山精舍라는 현판이 있어 일대에 정자들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정자는 좌우 1칸에 마루가 깔려 있으며 사방 8작지붕 무실형 건물로 4곳에 목기둥에 오랜 보전을 위해 시멘트로 감싸져 있다. 주련은 안쪽 기둥에 걸었다. 정내 현판의 시에는 세한불변歲寒不變의 마음으로 학덕과 호연지기를 수양하기 위함의 의지가 내포된 장소라고 나타내고 있다.영원정에 관련된 글을 기록한 <영원정기>가 책으로 보전되어 있다. 여기에는 영원정의 최초 창건발기문과 창건 후의 관리규정까지 있다. 이밖에 노흠영의 영원정실기서, 종친회의 아미산영원정추모비, 노진영의 영원정실기를 비롯해 많은 후손들의 시가 남아 있다.
    2020-03-13 | NO.107
  • 영이정
    서구 세하동 (세동마을) 영이정咏而亭은 겸와謙窩 김재호金在護의 정자로 자신이 지은 영이정기와 원운시가 전하고 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광주읍지』(1924)와 광주향교의 『광주읍지』(1925)에는 서쪽 20리에 있다고 했다. 100여년 전에 지어진 정자였을 것으로 보인다.영이咏而는 논어 선진先進에 나오는데 처사들이 자연을 벗 삼아 인간사의 찌들게 하는 욕구를 욕기浴沂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로 “늦봄에 봄옷이 만들어지면,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浴乎沂] 무우舞雩에서 바람 쐰 뒤에 노래하며 돌아오겠다[詠而歸]”는 증점曾點의 말에서 정한 것으로 보인다.그는 시문에 능했으며 화순 동면東面 사평리沙坪里 상사마을 사평천변에 있는 임대정원림臨對亭園林에서 열린 임대정시회臨對亭詩會에 참여해 남긴 시가 전하고 있다. 임대정臨對亭은 좌승지를 지낸 사애 민주현이 관직을 그만두고 귀향하여 1862년에 지은 전통적 정원형식의 별서 정자다. 청○서도○렴구 淸○徐到○簾鉤 맑은 바람 불어오니 발이 흔들리네좌간서산상기부 坐看西山爽氣浮 서산을 바라보니 밝은 기운 떴구려자석오생소한일 自惜吾生少閒日 우리 인생 한가한 날 적음이 아쉬운데우의객지사량추 尤宜客至巳凉秋 때마침 손님 이르니 가을이 서늘하구나야형운창화등안 野形雲漲禾登岸 구름 거둔 들판에 벼가 익어가는데오영천함로백주 午影天涵鷺白洲 낮이 가까운 하늘에 백로가 나는구나전진다감남공사 前塵多感南公事 풍진을 겪었던 남공南公 일이 생각나는데차지하년기비루 此地何年起比樓 어느 해 이곳에다 이 누정을 일으켰던고
    2018-05-23 | NO.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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