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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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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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추재 永追齋
    주의 서쪽 40리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서쪽 40리에 있다. 광산구 동곡동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화순군 동곡면 하산리 매상마을에 살던 김중배金重培가 이를 건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1893년 알성시 병과(丙科)에 등과한 오학선吳鶴善(1853~?)이 쓴 기문과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1855-1934)의 상량문이 남아 있어 한말이나 일제강점기 초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2020-03-13 | NO.105
  • 영취당 映翠堂
    주의 서쪽 40리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서쪽 40리에 있는 건물로 참봉을 지낸 서암 유상근이 건립했다. 후암後菴 송증헌宋曾憲(1878~1947)이 기문을 썼고 주인 유상근의 원운과 유병우柳秉禹의 차운, 면암 최익현의 아들인 월성 최영조崔永祚(1859~1927)의 시가 남아 있다.송증헌의 기문에는 그의 선조는 호가정浩歌亭을 지은 설강雪江 유사柳泗(1502~1571)이며 송암松庵 죽림竹林 등이 그의 뒤를 이었다고 했다.유사의 딸인 서산 유씨는 서하당 김성원의 부인이다. 김성원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복가관同福假官으로서 군량을 조달하여 의병들을 도왔고 이듬해에 종질從姪 김덕령金德齡 장군에게 병기와 군량을 많이 조달해 주었다.
    2020-03-13 | NO.104
  • 영풍정 迎風亭
    북구 운암동 (서영대) 북구 운암동 대내(안몰)마을 출신인 난곡蘭谷 이연관李淵觀(1857∼1935)은 1898년 운암산에 영풍정을 짓고 이곳에서 지냈다. 이연관의 자는 성보成甫 또는 형국炯國이요,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일곡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삼우당 이제백의 6대손으로 부친은 이인석李麟錫, 모친은 노씨盧氏이다. 유복자로 태어나 일곡동 외가에서 어머니의 엄한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을사조약에 반대한 송사 기우만이 광주감옥에 구금되었을 때 안규용安圭容(1878~1959) 등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구출에 힘썼다.이민영李民永의 난곡기蘭谷記에는 난곡이라는 호가 이연관의 절제된 생활태도를 알게 해준다면서 젊어서부터 글을 읽어 실용에 바탕을 두고 한 치의 법도도 벗어남이 없이 몸을 단속했다고 적고 있다.문집으로 <난곡유고蘭谷遺稿> 2권이 전한다. 권1에는 시와 서, 권2는 부록으로 행장 및 제문 등이 실려 있다.윤기섭尹基燮의 영풍정기에는 영풍의 뜻을 바람에는 소리 나는 바람과 소리 없는 바람이 있지만 영풍정은 ‘소리 없는 바람을 맞이한다’고 설명했다. 무등산과 금당산이 한눈에 보이는 운암산에 있는 정자 영풍정에서 한송(寒松) 이응상(李應相, 1883~1937)이 읊은 원운이다.   운암산의 맑은 기운 동서를 짓누르고극락강의 찬 물소리 글제를 다듬는 듯서석산 새벽 종은 속세 꿈을 깨우는데경호의 어적소리 한가히 깃들었다.   저자의 아침 연기 검고 푸른 빛을 띠어 있고버들 숲의 밤 비에 새가 낮게 날아 든다.칠성산의 개인 달은 바깥세상 밝히는데삼각산에 내린 노을 십리둑을 이루었다.영풍정은 황계마을 서편이나 지금의 서영대학으로 여겨지는 데 아쉽게도 일제 말기 무렵 없어져 불과 50년 남짓 짧은 기간 존재했다. 이곳은 서당골이라 부른다. 운암동에서 태어난 한송(寒松) 이응상(李應相)의  ‘영풍정 8경’을 감상해 보면 운암산의 맑은 기운(雲巖淑氣)구름 사이 푸르름 아득히 펼쳐졌는데 / 수시로 비에 씻겨 그 기운 말고 맑도다.재덕이 응당 이 사이에 생겨남을 아나 / 그리워도 보지 못해 사람 마음 슬프게 한다.극락강의 찬 물소리(極樂寒聲)찬 강의 물소리 강변 집에 들려 와 / 한 줄기 물결의 참 근원 천지에 가득하다.쉬지 않고 공부함에 응당 진전이 있고 / 넓은 바다에 이르러도 나아갈 길을 아는구나.서석산의 새벽 종소리(瑞石曉鍾)사방이 고요한데 홀연 쇠북이 울어/겹겹의 구름 뚫고 푸른 솔을 스쳐간다..소리 여운 이어지며 긴 밤이 밝아오고/한 줄기 새벽 달빛 서쪽 산마루에 숨는다.경호의 어적소리(어적소리(鏡湖漁笛)한 줄기 흐르는 강 한 줄기 피리소리/강풍에 섞어드니 바람은 살랑살랑돌아오는 기러기 낮게 날고 잠깬 백로 솟구치니/하얀 물결 날리고 마른 억새 울어댄다저자의 아침 연기천 집 모인 산곽에 푸른 연기 두르자/붉은 해 빛나며 하늘 한 끝 물들인다이것이 곧 비단 등롱인가 은촉의 그림자인가/곁으로 비끼면서 어둡고 옅은 기운 연달아 퍼진다.버들 숲의 밤 비긴 둑 암담히 찬 안개 토하는데/가지 끝 적시며 밤 비가 내린다그 가운데 꾀꼬리 잠 이루지 못하고/가을 습기에 젖어 깃털을 씻는다.삼각산에 내리는 노을(三角落霞)구름 사이 붉게 타는 예쁜 노을 흩어지니/가벼이 바람에 날리며 낙화가 내리는 듯하늘 멀리 한 점 솔개가 맴도는데/기우는 햇빛 함께 받아 조각조각 비껴간다
    2020-03-13 | NO.103
  • 오로정
    서구 덕흥동 오로정五老亭은 조선환여승람(1938)에 노헌老軒 최성장崔性璋, 노암老菴 정재진鄭在鎭, 노와老窩 정인석程寅錫, 노재老齋 조정섭曺正燮, 노당老堂 유동석劉東錫 5인들의 소요처였다. 언제 지어진 것인지는 모르나 『조선환여승람』(1935)에 전하고 있다. 다섯 사람 호의 앞 글자를 다서 오로정이라 했다.오로정이 있었던 곳은 덕흥마을 곁을 흐르는 맑고 깊은 강물이 서구에서 아름다운 경치라는 의미로 덕흥홍등德興弘澄이라 하여 예전에는 서구5경西區五景 중 제1경으로 꼽았었다. 이런 경치를 보고 이들이 운을 맞춰 시 한 수씩을 읊었다.  노헌老軒 최성장崔性璋의 시는 강상고봉봉말정 江上孤峯峯末亭 오제노차총망형 吾儕老此摠㤀形 담농희청지시우 談農喜聽知時雨 기수동간비지성 祈壽同看比地星 초색청사인영도 草色晴沙人影渡 화음량석주흔성 花陰凉石酒痕醒 상산풍미유첨일 商山風味猶添一  각소요진타자청 却笑要津拖紫靑  노암老菴 정재진鄭在鎭의 시는강고야활전오정 岡高野闊寘吾亭 백리연운미엄형 百里煙雲未掩形 군국홍진미약해 郡國紅塵迷若海 왕인백장취경성 王人白髮聚經星 일장기국간승패 日長棋局看勝敗 화저곤상임취성 花底壼觴任醉醒 상망칠옹풍영처 相望柒翁風咏處 연강사백초청청 緣江沙白草靑靑 노와老窩 정인석程寅錫의 시는오가여력합위정 五家餘力合爲亭 휴수등임혼망형 携手登臨渾㤀形 기국수회소하일 棋局輸回消夏日 락전서리재신성 樂田鋤理載晨星 향산사업시성중 香山事業詩聲重 상락인연속기성 商雒因緣俗氣醒 승지우유인적호 勝地優遊人跡好 불착채팔간편청 不着採八簡編靑 노재老齋 조정섭曺正燮의 시는격강상대칠옹정 隔江相對柒翁亭 방초명사색색형 芳草明沙色色形 연영편동위필수 聯影騙同爲筆峀 조심병작취규성 照心倂作聚逵星 석두일탄조관장 石頭日綻朝觀壯 호선연명우수성 湖線烟鳴牛睡醒 기판오인어차로 器辦吾人於此老 세간무원안상청 世間無怨眼常靑 노당老堂 유동석劉東錫의 시는남국초생오로정 南國初生五老亭 연운초수화난형 烟雲草樹畵難形 장강여대귀황해 長江如帶歸黃海 서석당첨납서성 瑞石當簷納曙星 좌상일진난애착 座上一塵難礙着 세간숙양기소성 世間宿恙己蘇醒 고편불엄오인촉 孤扁不掩吾人躅 가여청산만절청 可與靑山萬劫靑
    2018-05-23 | NO.102
  • 오방정(五放亭) / 춘설헌
    광주광역시 동구 오방정(五放亭), 지금은 춘설헌으로 이름이 바뀐 집이다. 증심사와 약사사를 올라가는 길 등산로 산 기슭 오른편에 있는 건물이다. 기존의 정자와는 다른 방 두짜칸짜리 집과 같다.이곳은 독특한 사연이 있다. 기독교 목회자, 독립운동가, 교육가, 한센병환자 구호사업가였던 최흥종崔興琮(1880~1966)이 지냈던 곳이다. 정명 오방(五放)은 '다섯가지를 놓아버린다'는 의미로 집착을 떨어버린다는 뜻으로 그가 놓아버린 5가지는 집안의 일, 사회적 체면, 경제적 이익, 정치적 활동, 종파적 활동을 내포하고 있다. 최흥종은 "지상의 일에서 떠나 오직 하나님속에서 자유롭게 살겠다"며 1935년에 아호를 오방(五放)이라 정하고, 주위 지인들에게 자신의 사망통고서를 돌리면서 즉 죽은 사람으로 행세하며 한 목숨 희생정신의 각오로 살겠다며 오방정(五放亭)에서 은거했다. 함석헌도 그를 '무등산의 은자(隱者)'라 불렀다.   최흥종 목사는 광주의 큰장터(현재의 양동시장) 주변의 걸인들의 집단거주지였던 빈민촌을 철거해 버리자 당시 광주지역의 갑부였던 최선진(崔善鎭/현 유은학원 창업자), 최명구, 지응현(池應鉉/속칭 지참봉), 현준호(玄俊鎬/호남은행의 창업자/현대구룹 현정은회장의 조부) 등의 지원을 받아, 중앙교회에서 매일 점심때마다 걸인, 철거민들을 위한 무료급식을 행하였다. 또한 당시 농지였던 경양방죽(구 광주시청자리) 인근에 짚다발로 움막집을 짓고 걸인 수백명을 수용해 보살폈다.   또 최흥종 목사는 제중병원(Wilson 원장)과 선교사들의 지원과 교회 신도들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광주 봉선동에 나병환자 수용소를 지어 500여명을 수용하고, 치료했으나 포화상태가 되자 광주 양림동 미국인 선교사 묘지옆에 제2의 수용소인 양림동 수용소를 지었다.    그래서 남자 나환자들은 봉선리 수용소에 500명, 여자 나환자들은 양림동 수용소에 500명씩 분리수용하고 자신도 나환자 수용소안에서 기거하면서 나환자들은 최흥종 목사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소설가 문순태는 '성자의 지팡이'라는 소설을 써 그를 우리 시대 마지막 성자로 기렸다. 2009년 광주광역시는 남구 방림1동 주민센터에서 봉선2동 무등아파트단지 입구까지의 도로를 '오방로'라고 지정했다.원래 이곳은 2·8독립 선언의 주역인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 언론인이었던 최원순(崔元淳 동아일보 편집국장) 선생이 1930년대 일제의 탄압과 고문을 받으면서 은거한 별장 석아정(石啞亭)이었다. 최 국장이 같은 집안사람인 최흥종 목사에게 선물한 것이다. 해방 직후 김구는 오방정을 찾아 일주일을 함께 머물기도 했다. 이후 그의 말년 1956년에  연배가 서로 비슷하여 막역한 친구로 광주 무등산 자락에 위치한 증심사 곁에서 같이 교유하던  의재(毅齊) 허백련許百鍊(1891~1977) 화백이 인수했다. 의재는 일본에서 건축을 전공한 건축가이자 서예가인 남용 김용구의 설계로 방 두개에 마루가 있는 조그마한 집을 지었다.소암 현중화(素菴 玄中和, 1907~1997)가 쓴 ‘춘설헌(春雪軒 1986년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5호로 지정)’이라는 이름을 걸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봄눈이 내리는 자리'라는 의미의 춘설헌의 역사를 알려주는 것으로는 춘설헌 입구 반대편에 건립된 의재 미술관에 보관중인 ‘석아정’, ‘오방정’ 현판(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2호)과 2010년 춘설헌 입구에 세워진 ‘오방정 기념비’에서 알 수 있다. 현판(94×46㎝)의 한쪽 면은 ‘石啞亭 惺堂’의 글씨가, 다른 한쪽 면은 ‘五放亭 毅齋道人’이라는 글씨가 돋을새김 되어 있고, 글자 오방정 윗부분에는 매화가 그려져 있다. 한말에 법부 주사와 검사를 거쳐 중추원 촉탁을 지낸 관료 겸 일제 강점기의 서예가로 이름을 날린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 1871∼1937)이 쓰고, 오방정 글씨와 매화는 허백련이 그렸다. 그리고 2010년, 창립 90주년을 맞아 광주 YMCA는 창립자인 오방 최흥종의 흔적이 묻어 있는 이곳 춘설헌 입구에 오방정 기념비에 첫 출발이 된 석아정의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허백련은 1945년 광복 직후에는 무등산 다원(無等山茶園)을 인수하여 축산 농장을 경영하면서 춘설헌에서 한시(漢詩)와 고전 화론(古典畫論)에 통달하고 서법(書法)도 독특한 경지를 보인 시·서·화 겸전의 전형적 남종화가로서 호남 서화계의 상징적 거봉으로 추앙되는 근거지로 필 생활을 병행하였다.    의재(毅齋)를 만나기 위해 우리나라 차계(茶界)의 어른인 효당 스님, 함석헌도, 젊은 시절 시인 고은 등 전국에서 손님이 춘설헌을 찾아오자 건너편에 방을 두개 더 늘리고 관풍대(觀風臺)를 근처에 지었다. 춘설헌은 의제의 수제자인 이범재(李範載)와 구철우(具哲祐) 김옥진(金玉振) 등 많은 전통적 산수화가를 길러 낸 산실이되었다. 
    2020-03-13 | NO.101
  • 오산정1 梧山亭
    북구 서하로 243 (오치동)   한말에 좌승지를 지낸 오산 이용헌이 오치의 산수를 사랑하여 오치동의 산 정상에 작은 정자를 지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인 송천 이계익이 1911년 부친의 뜻을 이어 이 정자를 오치의 안산案山에 완성하고 아버지의 호를 따 오산정이라 이름했다. 《광주읍지(1924)》에 주의 북쪽 10리에 있다. 판서 윤용구의 제액 및 승지 동강 김영한의 기문이 있고 석담 이종문, 운재 최영조, 현와 고광선 등의 차운이 있다. 1971년 남해고속도로 공사를 할 때 산에 있던 정자를 북구 오치동 518번지로 옮겼고, 1987년에 현재의 위치인 북구 오치동 이재열(이용헌의 후손)의 가옥 안으로 이건하였다. 앞면 3칸 옆면 3칸 구조의 팔작지붕 정자이다. 다만 본래의 정자 규모를 줄여 지었다 한다.오산정기(梧山亭記)정(亭)의 이름은 오산(梧山)으로 불망(不忘)을 표현한 것이다. 26세 증좌승지공용헌(贈左承旨公龍憲)이 은거하여 오산(梧山)의 향리에서 의를 행하며 산천을 사랑하여 스스로 호를 오산(梧山)이라 하고 정자를 세우려 하였다. 정자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공이 졸(卒)하니 그의 아들인 재랑(齋郞)군이 유지(遺志)를 이어 정자를 완성하고 공의 호로서 이름을 붙이는 것에 대하여 나에게 상의하니 내가 무슨 말이 있겠는가.옛날 주자(朱子)는 위제구편(韋齊舊偏)을 취(取)하여 자양당(紫陽堂)이라 하였으니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 아들이 아버지를 효심에서 잊지 못하였다.정자에 오르니 산이 눈 아래에 보이고 그 어버이를 생각하는 점이 빛나며 암석(岩石)이 잘 조화를 이루었다. 고향의 초목이 울창하게 된 것은 그 선친이 감상하려고 재배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공의 척사설(斥邪說)과 십회잠(十悔箴)을 읽고 그 정대하고 강직한 품성을 알았다. 공은 참을 실천에 노력하여 유학을 가르치는데 보람을 가지고 그에 맞는 문필에 종사하였다. 공에게서 배움을 마치고 그를 이은 자는 응당 공이 배척함을 물리쳤다. 그의 바른 행동은 공이 스스로 뉘우쳐서 바로 함에 있어서도 한 치의 어그러짐이 없이 정대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공의 모든 행동을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며 오산공(梧山公)이야말로 유가(儒家)의 전형적인 인물이기에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글로 힘써 받는다.오산 용헌공 행장(梧山 龍憲公 行狀)공의 휘(諱)는 용헌(龍憲)이며 자는 운오(雲五)요 호는 오산(梧山)이다. 시조 언(彦)의 26세 25세손이며 기성군(箕城君) 휘 긍(兢)의 16세 15세손이요. 휘 경수(鯨壽)의 11세 10세손으로 철종 신해년(哲宗辛亥年 1851) 9월 6일 광주 오치(梧峙)에서 출생하였다. 공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에게 사사하여 학문을 연구하고 그의 손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과 함께 성리학(性理學)을 강론하였으며 문집을 간행하였다. 이 문집에 서암 송병제(緖菴 宋秉濟)가 서문을, 도사(都事) 연안 이석(延安李奭)이 발문(跋文)을 지었다. 고종 을미(高宗乙未)(1895)년 3월 11일에 졸(卒)하니 묘(墓)는 담양군(潭陽郡) 금성면(金城面) 외추리(外楸里) 회룡등계좌원(回龍嶝癸坐園)이다. 고종정미(高宗 丁未)(1907년)에 효우(孝友)와 덕행(德行)으로 통정대부좌승지(通政大夫左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송사 기우만이 찬갈명(撰碣銘)하고 황헌 박노준(皇軒 朴魯準)의 찬묘표(撰墓表)하다. 공의 후생(後生)들이 공의 유덕(遺德)을 흠모하여 비(碑)를 건립했는데 현와 고광선(弦窩 高光善)이 비문(碑文)을 찬(撰)하고 참판 이우명(參判李愚明)이 비문(碑文)을 썼다. 자(子) 계익(啓翼)이 공(公)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오치(梧峙)에 정자(亭子)를 세워 오산정(梧山亭)이라 이름하였다. 이 정자(亭子)에 석촌 윤용구(石邨 尹用求)는 서액(書額)을, 동강 김영한(東江 金寧漢)은 정기(亭記)를, 춘담 기동준(春潭奇東準)은 상량문(上樑文)을 각각썻다.배(配)는 숙부인 여흥 민씨(淑夫人驪興閔氏)로 철종 기유(哲宗己酉)에 출생하여 기미(己未) 11월 23일에 졸(卒)하였으며 묘는 광산구 임곡면(林谷面) 방혜촌후(芳蕙村後) 병좌원(丙坐原)이며 동강 김영한(東江金寗漢)이 찬묘표(撰墓表)하였다.1992년 광주광역시에서 발간한 《누정제영(樓亭題詠)》에 오산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광주광역시 북구 오치동 956의 8번지 이재열씨(李載烈氏)의 가내(家內)에 위치해 있다.이 정자는 원래 이 마을의 함풍이씨(咸豊李氏)인 송천 이계익(松泉李啓翼)이 그의 부(父) 오산(梧山) 이용헌(李龍憲)의 유지를 기리기 위해 일부러 지은 한말의 건물이다.이 정자의 주인인 오산 이용헌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인(門人)으로 학행이 뛰어나 통정대부좌승지(通政大夫左承旨)의 증직(贈職)이 제수되고 그의 유고(遺稿)가 발간된 학문의 선비일 뿐아니라 전래(傳來)의 요족한 가산(家産)을 그대로 보전하여 많은 빈민을 구제한 당시의 토주(土主)이기도 하다.이러한 그가 특별히 오치(梧峙)의 맑은 산수(山水)를 사랑하여 오치의 오자(梧字)와 산수(山水)의 산자(山字)로 그의 아호(雅號)를 자칭하고 이어 이 지역의 한적한 한곳을 골라 그의 일신(一身)을 서식하는 아담한 한 정자를 지으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병환으로 세상을 뜨게 되었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그의 아들 송천 이계익(松泉 李啓翼)이 그의 뒤를 이어 이 정자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유지임을 나타내기 위해 일부러 그 이름을 오산(梧山)이라 한 것이다.이 때문에 이 정자의 이름이 비록 그의 아버지인 오산 이용헌의 아호로 되어 있다할지라도 실질적인 주인은 오산 이용헌이 아닌 그의 아들 송천 이계익의 정자이다.송천 이계익(松泉 李啓翼)은 고종 무인년(高宗 戊寅年)인 1878년에 태어나 일제침략기가 끝난 다음해인 1946 병술년에 졸(卒)한 당호의 선비로, 일찍 영릉참봉(英陵參奉), 승훈랑(承訓郞) 등의 관작이 제수되었다.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의 거의(擧義)와 동농 김가진(東農 金嘉鎭)의 독립운동 등에 많은 협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또 남달리 자선심이 뛰어나 자신의 회갑 비용을 아껴 빈민구제에 힘쓴 진실한 독지가이기도 하다.이러한 사실은 비단 함평이씨 기성군파보(箕城君派譜)나 《광주지》 그리고 그의 손자로 이 정자를 수호하고 있는 이재열의 증언뿐 아니라 당시 각 명사 2백명분의 육필원본(肉筆原本)을 모아 4권 일갑(一匣)의 고급장정으로 표구한 그의 회갑시첩(回甲詩帖)에서도 이의 사실을 엿볼 수 있다.이 시첩(詩帖)의 내용을 살펴보면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를 비롯한 백관수(白寬洙), 최두선(崔斗善), 오세창(吳世昌), 정인보(鄭寅普) 등의 뛰어난 필적(筆跡)이 그대로 남아 있어 보는 사람의 마음을 황홀케 하였다.이러한 점을 본다 하더라도 송천 이계익의 당시 사회적 위치가 어느 정도임을 느낄 수 있고 또 그의 효심에 의해 지어진 이 정자의 규모가 어떠함을 알 수 있다,이 정자의 창건 내력을 살펴보면, 1911년에 오치의 안산(案山)에 세워져 별다른 이상 없이 그대로 보존해 오다가 1971년도의 남해고속도로 공사로 인하여 부득이 오치동 518번지의 본가로 이건하였다가 1987년도에 다시 그의 위치를 바꿔 현재의 장소로 이건 오늘에 이르고 있다.도리 석초 도리 기둥의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4칸의 구조를 갖추고 있으나 실지에 있어서는 정측면 모두 2칸 정도의 규모에 불과하다.중앙의 옥실일간(屋室一間)을 제외한 좌우전면이 모두 툇마루로 연결되어 있고 사방의 주위가 시멘담장으로 둘러있어 매우 삭막한 느낌을 갖게 한다.이 정자를 관리하고 있는 주인 이재열씨의 말에 의하면 당초 이 정자를 이건할 당시 주변의 여러 사람으로부터 “필요없는 옛날의 정각을 무엇하러 많은 경비를 들여 옮겨 지으려 하느냐”는 많은 핀잔을 받기도 하였다는 것이다.그러나 자손의 도리로 선대(先代)의 유업(遺業)을 지켜야 한다는 굳은 신념으로 두 차례의 어려운 이건을 거쳐 오늘의 보전이 있게 된 그 이면에는 신병중(身病中)인 자신을 대리한 부인 고연(高涓) 여사의 숨은 공로가 컸다는 귀띔이다.그리고 오늘의 이 정자는 본래의 원형을 축소하여 현재의 지형에 알맞도록 다시 개조한 신규 건물로 그의 보전상태는 양호한 편이다.그러나 의당 정내(亭內)에 결려있어야 할 주인 이계익의 12(原韻), 원기(原記)를 비롯한 윤용구(尹用求), 김영한(金寗漢), 최영조(崔永祚), 고광조(高光祚) 등의 대서 현판 및 찬미 시문(詩文) 등 30여개의 판각(版刻)이 창고 및 뒤뜰에 방치되어 있어 정자로서의 품위를 잃고 있다.오산정 원운에서 이계익 선생의 효도의 심정을 읽을 수 있다.지난 옛날 부모 생각 때가 없이 간절하여동냥나무 다스려서 이 정자를 세웠도다.아름다운 서석의 영기 구름속에 묻혀있고바라보인 망봉 달빛 더딤없이 솟았도다.푸른 정자 그 유적이 한이 없이 아름답고전해오는 바른 이모 이내 사정 깊었도다.척강하는 그 영혼이 보일듯이 나타나니신비한 이 이치를 터득하기 어렵도다.
    2020-03-13 | NO.100
  • 오산정2 鰲山亭
    북구 태봉동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오산정이 있었다. 서방면 태봉리에 남평(南平) 문씨 진사(進士) 문상헌文象憲 (1832~?)이 일제강점기 때 태봉동의 천변 구릉에 지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문희탁의 아들로 증광시 진사 3등으로 합격했다. 형 문설헌文卨憲과 동생 문규헌文圭憲 문휴헌文休憲 문순헌文順憲이 있었다. 그의 부친 문희탁도 태봉동 일대에 야은정野隱亭을 짓고 유유자적했다. 그는 동중추同中樞를 지냈다.다행히 문상헌이 읊은 원운 시가 누정제영에 전하고 있다.   작은 소강小岡 의지하여 새 정자를 일으키니들을 향한 가시 문을 가을 빛을 당겼도다.밝은 달빛 먼저 보려 숲을 베어 짧게하고좋은 꽃을 심고 싶어 넓은 밭을 일궜다네태봉胎峯아래 있는 이 땅 맑은 숙기淑氣 가득하고연못위에 흐른 샘물 고운 향기 서려있네.십년간의 경영으로 소요처를 얻게되니들러있는 송죽松竹 빛에 집도 따라 푸러지네
    2020-03-13 | NO.99
  • 오월루
    서구 내방로 152(쌍촌동)   광주에는 5월과 관련된 장소가 꽤나 많다. 그중 아파트 밀집지역이면서 관공서가 가득 들어찬 상무지구 안에는 5·18민주공원, 5·18자유공원, 5·18기념공원 등 공원 이름만 붙은 곳도 3곳이나 된다. 이중 5·18기념공원은 자그마한 언덕에 이런저런 기념조형물과 잔디밭이 넓게 자리하고 있다. 약 20만㎡에 이르는 이 언덕을 가리켜 누군가 여의산如意山이라 했다. 운천저수지를 건너 상무지구로 들어서면 바로 오른편에 무각사無覺寺라는 절이 있다. 그 절을 안고 있는 산이 바로 여의산이다. 산이라 하기엔 너무 낮으면서도 재미있는 산책 코스가 있다. 이 산의 정상 부근에는 500평의 소공원에 연면적 85평, 3층으로 된 오월루五月樓라는 8각 누각이 하나 있다. 지난 2000년에 만들어졌다.누각 입구에는 “5·18 민중항쟁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5·18기념공원 정상에 세운 전망대”라는 안내 입석이 “오월루에 올라 80년 5월 그 역사의 현장에서 산화하신 영령들을 기리고” 기억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사업비는 8억원 넘게 들었다.오월루 입석 옆에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라는 시가 팻말로 남아있다.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오월루는 5월 영령들이 하늘로 돌아가는 누각인 듯하다. 3층 누각에서는 ‘무등의 푸른 날개 아래 민주의 도시 빛고을이 한 눈에 모여드는’ 것처럼 눈 아래에 펼쳐진다. 멀리 무등산이 어머니의 품처럼 자리한다. 뒤돌아보니 광주시청이 빌딩들 사이로 힐끗 보인다. 이처럼 산인 듯 아닌 듯 하는 여의산의 오월루에 오르니 광주를 즐길 수 있는 재미가 있다.
    2018-05-23 | NO.98
  • 오헌당 梧軒堂
    광산구 지정동 (봉정마을) 광산구 지정동 옛 오동촌마을 뒷편에 있는 오헌당은 은진송씨의 어느 처사가 일제강점기 초기에 학구당을 지어 후학을 가르치며 지내다가 그가 별세 후 재각으로 바뀌었을 것으로 보인다. 건물은 시멘트 기단 위에 정평주초를 놓고 원주 기둥을 세운 정면 3칸 측면 1칸의 평기와 팔작지붕으로되어 있다. 중앙은 대청과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하였고 좌우벽에 여닫이 창문을 달았다. 건물 내부에는 오헌당중건기梧軒堂重建記, 오헌당중건운梧軒堂重建韻, 오헌당중건차운梧軒堂重建次韻 등이 걸려 있다.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관동면 수각리水閣里 봉정리鳳亭里 평지리平地里 오동촌五洞村을 합하여 법정리인 나주군 평동면 지정리地亭里로 바뀌었다. 
    2020-03-13 | NO.97
  • 와송정 臥松亭
    북구 금곡동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동쪽 30리 금곡마을에 있다. 원래 광주군(光州郡) 석저면(石底面)에 속한 지역이다. 석곡면 금곡리는 북구 금곡동과 장운동이다. 계류가 흐르는 곳에 탐진최씨 석초(石樵) 최달석(崔達錫)이 와송정을 세웠으나 지금은 없다있는 소나무 아래에 지었다 하여 그 이름을 와송이라 했다. 그는 지역민들에게 신망이 두터워 일제 때 석곡면장을 지냈으며 퇴임 후 생활공간으로 정자를 지었다.이 밖에도 당시에 내로라하는 문인묵객인 운감 정풍현, 금소 이학재, 후석 오준선, 현와 고광선 등 한말의 유학자들의 기문과 조선호남지(1935)에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제강점기 초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최달석의 시로 당시 일대의 풍치를 감상한다.   特地溪傍竹小樓 푸른 녹죽 시냇가의 조그마한 이 다락을安排屈曲臥松頭 누워있는 와송위에 안배하여 지었다네.交錯吟邊三夏冷 교착하는 울음속에 삼복여름 서늘하고橫斜欄外一川流 비껴있는 난간밖에 한 개울이 흐르네自愛雲林超俗界 맑은 운림雲林 사랑하여 티끌 속계 멀리하고堪將杜若採芳州 옛날 두약杜若그리면서 참된 방주 찾았다네何年鶴背下仙侶 학을 타는 선여仙侶들과 그 어느때 짝을 지어共涉滄波蓮葉舟 푸른 창파 일엽주一葉舟를 함께 타고 즐겨볼까
    2020-03-13 | NO.96
  • 외성당 畏省堂
    광산구 안청동 495번지 외성당은 안촌安村 박광후朴光後(1637~1678)가 거처한 서실이다. 《광주읍지》(1879, 1924)에 따르면 주의 북쪽 30리에 있다. 박광후의 스승 우암 송시열이 쓴 ‘외성당’이라는 글씨가 현액되었으나 지금은 없다. 1930년대에 철거된 후 텃 자리에는 새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이곳은 후에 아들 소은素隱 박중회朴重繪가 거처했다. 박광후의 시문집으로 《안촌집(安村集)》이 전해진다. 말미에는 광주 安淸里에 있는 저자의 집 畏省堂에 대한 시문이 실려 있다. 〈畏省堂題詠〉 10수 및 1888년 崔益鉉과 奇宇萬이 지은 〈畏省堂記〉가 있다.안촌 박광후의 <안촌집>과 아들 박중회의 <소은집>을 묶은 <안촌세고安村世稿>에는 면암 최익현, 송사 기우만의 외성당기畏省堂記 등의 기문이 실려 있고 우암 송시열의 외성당 시 1수와 봉곡 송주석, 손재 박광일, 노사 기정진, 최승현, 최익현, 관어헌 박양동, 기우만, 난와 오계수 등의 외성당 차운시가 실려 있다. 
    2020-03-13 | NO.95
  • 용진정사 湧珍精舍
    광산구 본량동 서로 180-68   해발349m의 용진산 남쪽 깊숙한 골짜기에 자리한 용진정사는 한말의 대학자이며 우국지사이기도 한 후석 오준선(1851∼1931)이 국난과 세상의 티끌을 피해 숨어살면서 후진을 가르친 곳이다. 1985년 광주시 문화재 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원래 용진사(湧珍寺 상원사)가 자리 잡았던 절터인데 허물어진 뒤 청안 이씨들이 그 터를 가지고 있었다. 오준선이 정자를 짓는다는 말을 듣고 옛 절터의 상대와 중대를 희사함으로써 정사를 지을 수 있었다 한다.후석 오준선이 별세한 뒤 문인들이 정사 동쪽에 3칸의 용진영당을 세우고 1924년 석지 채용신이 그린 초상화를 모셨다. 영당의 좌우벽에는 큰아들 북파 오헌수와 둘째 아들 도호 오동수의 영정이 함께 걸려있다.오준선은 담양 명옥헌鳴玉軒의 주인 명곡 오희도의 후손으로 광산구 도덕동 도림마을에서 오하규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백부 오향규에게 입양되었다. 8세 때부터 이웃에 사는 친척 오태규로부터 사서와 근사록을 배웠다. 18세 때부터 노사 기정진에게 배웠으며, 이를 계기로 최익현, 송병선 등의 당대를 대표하는 유학자뿐만 아니라 오계수, 나도규, 기우만, 박노술, 정의림 등 호남지방 기정진의 문인을 비롯한 많은 인물들과 교유하며 그의 학문 체계를 다졌다.1910년 일제의 은사금을 거절하자 헌병대로 끌려 가 갖은 협박을 당했으나 끝내 받기를 거절하는 등 우국적 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1917년 나라가 완전히 일제강점기로 들어서자 용진산에 들어가 193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후학을 가르치며 민족정신을 함양시켰다. 문장에도 능하였고 양효묵梁孝默, 최윤로崔潤魯, 김요원金堯元, 양상하梁相賀 등 문하생이 600여명에 이르렀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문하생들과 용진정사 앞의 바위에서 통곡하였는데, 그뒤 이 바위를 읍궁암泣弓岩이라 불렀고, "원수를 갚기 전에는 상복을 벗을 수 없다."하여 일생동안 백립을 쓰고 지냈다. 명정에 조선유민이라 쓰도록 유언하였다. 정사의 기둥에 편액된 글씨는 석촌 윤용구의 서체와 후석 선생의 동문인 현와 고광선의 정사기문과 오준선의 친구인 식재 기재가 쓴 ‘용진정사기湧珍精舍記’가 있으며 영당의 영정은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의 작품이다.화원畵員으로 정산定山 군수에 종3품 벼슬까지 지낸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1848~1941)이 만년에 그렸다는 것으로 백립白笠을 쓰고 상복喪服을 입은 모습을 그렸는데 흰 수염과 움직이는 듯한 두 눈, 옷주름의 사실적인 선들이 살아 있는 후석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석지는 또 ‘湧珍精舍圖’(1924년작, 曾孫 吳重烈씨 소장) 한 폭을 그려 용진정사의 옛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놓은 것처럼 그대로 남겨 놓았다.
    2020-03-13 | NO.94
  • 우산정사 牛山精舍
    북구 효령동 산102   효령동 종방마을 입구 도로변을 따라 향리 송은松隱 기정륜奇梃崙(1663~1740)이 학문을 가르치던 우산정사가 있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30리에 있다. 이 정사는 뒷편에 존성재라는 별도의 재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정자로 여겨진다. 이곳은 강학이나 종친 모임 등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정사에는 우산정사牛山精舍, 송은松隱, 청백전가淸白傳家라는 액호가 나란히 걸려 있다. 정확한 건립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행주기씨 10세손 현암 기건이 생육신이자 청백리로 이름나 있어 여기에서 연원이 된 것으로 짐작된다. 오래동안 대를 이은 청백리 의 집을 청백전가라고 한다. 정자 이름인 우산牛山의 의미는 맹자가 “우산牛山의 나무가 일찍이 무성하여 아름다웠으나 큰 나라의 교외에 있는 탓에 도끼와 자귀로 베어 내니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밤낮으로 자라는 바와 우로雨露가 적셔 주는 바에 싹과 움이 나오는 것이 없지 않건만 소와 양이 또 따라서 뜯어 먹으니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하여, 사람의 성품이 본래 선하지만 물욕(物慾)에 침해당하는 것을 비유하였다. 왼쪽에 청백전가淸白傳家라는 현판은 한나라 양진楊震이 말하기를, “내가 자손에게 재물을 주지 않는 대신 청백리淸白吏의 자손이란 명예를 전하여 주리라”하여 유래되었다. 현판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써 주었다고 전하고 있어 건립 시기를 짐작하게 만든다.기정륜의 8대손 기세국奇世國이 남긴 우산정사 소기小記와 진사 춘담 기동준의 기문 및 후손들의 시詩가 적힌 현액이 8개가 걸려 있다. 후석 오준선의 상량문이 있다. 건물구조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골기와 팔작지붕이다. 우산정사를 중심으로 정면으로 오동나무 배롱나무에 왼편에 대나무 숲 오른편에 청솔나무가 둘러싸고 있어 선비가 좋아하는 초목이 다 갖춰져 있다.  
    2020-03-13 | NO.93
  • 운계정사 雲溪精舍
    북구 운암동 북구 운암동 황계에서 출생한 구한말 격동기를 살았던 광산이씨 이주상李周相(1840~1890)이 지냈던 터이다. 김영헌의 <광주운암(2010)>에 운암동 인물 12명의 행적으로 기록했는데 그 중 한 명이다. 그는 노사 기정진의 문인이고 송사 기우만과 교유하는 등 경사에 해박하고 예문에 통달했던 재야 지식인이었다. 기우만이 운계기雲溪記를 썼다. 雲溪記 溪從雲巖來 傍溪而堂 號雲溪 吾友李居士周相也 /  松沙先生文集卷之十八시문집으로 운계집雲溪集 1책이 있다. 운계집 서序 중 ‘훈몽계서訓蒙稧序’는 자손들을 가르치기 위한 계의 취지문이며,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 내용이다.그가 지은 시가 있다. 호반위에 꽃을 심고 대나무로 울음 둘러별난 땅에 깊이 살며 좋은 뜻을 찾았다네함께 앉은 옛친구와 바둑장기 즐겨하고책상위의 서적을 참 스승으로 삼았노라만고불변 푸른산은 눈 가운데 솟아있고춘삼월 나무가지 비온 뒤에 무성하네날마다 하는 공부 엄히 세워 정진하며가슴 속 쌓인 회포 이 시구에 담았도다.
    2020-03-13 | NO.92
  • 운림당 雲林堂
    동구 운림동 운림당은 조선대학교 뒷산 언저리, 지금의 운림동 부근에 있었던 정자이다. 정자 주인 가운 최석휴崔錫休(1894∼1946)는 지응현(池應鉉·1868∼1957), 정낙교(鄭洛敎·1863∼1938) 등과 같은 광주의 부호로 한말 참서參書를 지냈다. 정자는 1871년에 지어졌다.운림당은 그의 선대부터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부호답게 정자 주변에는 팔각의 담장을 쌓고 연못을 만들어 고기를 길렀다. 주변에 언덕을 쌓아 화초를 심고 샘물을 끌어 수천주의 과실수와 약초를 심어 울창한 숲을 이루는 전원을 꾸미기도 했다.시단 해양음사海陽吟社라는 모임을 통해 창작된 시는 1933년 펴낸 <운림당시문집雲林堂詩文集>에 남아 있다. 이 책에는 광주의 전경을 묘사한 남농南農 허건許楗의 그림이 권두화로 실려 있고 무정 정만조, 석촌 윤용구, 참판 권익상 등의 시문이 남아 있다. 민병승閔丙承이 쓴 운림당기에서 정자의 장소를 짐작할 수 있다. 기문에는 광주의 동남쪽 몇 리 떨어진 곳에 선원仙源마을에 운림당이 있고, 가운거사 최석휴가 세웠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운곡雲谷과 홍림洪林이 서로 비치고 어울려 있어 운림당이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운곡’과 ‘홍림’은 운림당을 기준으로 좌우에 있었던 광주군 지한면과 부동방면에 각각 속했던 마을 이름이다. 이곳이 지금의 동구 운림동이다.누정제영(1992)에는 조선대 좌측 능선의 평지 위에 이 당의 옛터가 있고 돌을 연이어 쌓아 조선지도의 모양을 만든 석축지도가 있다고 했다. 이곳은 고려 때의 절인 선원사 옛터라는 이야기도 있다.
    2020-03-13 | NO.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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