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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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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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학정 駕鶴亭
    광산구 원사호길 55-43용진산聳珍山 북서쪽 기슭 광산구 임곡동 사호리에 황룡강을 바라보며 400여년의 사연을 품은 정자가 있다. 조선 중기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진 가학정이다. 정자 오른쪽에는 학문을 위한 성성재惺惺齋가 있었으나 지금은 보살이 운영하는 작은 암자가 되었다.용진산은 동굴과 폭포가 있고 어등산과 같이 한말의병들의 전적지로 손꼽힌다. 조선의 설계자였던 삼봉 정도전이 전남 나주 회진현 거평부옥에서 3년간의 유배생활을 끝내고 어느 날 올랐다는 산이다.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53대손인 죽산 박씨의 중시조인 죽림 박경이 임진왜란 때 백의종군하여 선조를 피난 북행하는 공훈을 세운다. 선조가 그 공을 인정해 벼슬을 하사하려 했다. 박경이 남은 여생을 고향에서 야인으로 지내고 싶다 하여 선조는 특별히 궤장과 죽림처사竹林處士라는 시호를 내리고 1601년 국고를 보내 가학정을 건립하도록 했다. 박경은 동방 18현 중의 한 사람인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임진왜란 때 고봉 기대승의 장자인 함재 기효증의 종사관이 되어 의곡을 모아 운반하였다. 병자호란 때도 동생과 함께 의병을 창의하는 등 천성적으로 의리에 강한 인물이었다.가학정은 1935년에 그의 후손 박동춘에 의해 이루어졌고 1979년에 박규환朴規煥 박규수朴圭洙 등이 재중수를 했다. 가학정 북쪽엔 황룡강 맑은 물이 사시사철 흐른다. 그 길목에는 노송과 비자나무, 싸리나무, 상수리나무, 산비장이 등 갖가지 잡목이 우거져 푸른 숲을 이루며 곳곳에 단애를 이룬 암벽이 솟아있어 소금강을 방불케 한다. 2007년에 폭우로 무너져 내리면서 모두 멸실됐다. 2012년에 과거 사진 등을 참고하여 비슷한 형태로 재건한 육각 정자에는 아쉽게도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가학정은 황룡강黃龍江을 바라보는 높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육각정으로 골기와 육모지붕을 취하고 있다.  '신선이 학을 타고 노닌다'는 뜻을 지닌 정자이다.가학정 현판은 1935년 중건 때 고창 오산고보를 설립,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하고 한말 마지막 사절이라는 염재 송태회가 썼다. 노탄 송규헌과 박규환의 중건기와 박동춘의 시 등이 정자 내에 있었다. 현재는 현판 1점과 사진으로 전하는 <가학정중건기> 등 6점이 있다고 한다.가학정으로 가는 길에는 청룡사가 있고 용진산 북쪽 기슭을 100여m 오르면 길 왼편의 서쪽을 향한 암벽 중앙에 새겨진 용진마애여래좌상을 볼 수 있다. 정자에 오르는 길목에는 층암절벽이 솟아있어 소금강을 방불케 하고 수림이 울창하며 황룡강이 구비쳐 정자 밑을 흐르고 있어 학덕이 높은 선비가 시서를 벗삼고 살기에는 더 없이 좋은 곳이라 했다. 용진산의 풍취를 나타내는 광산구의 광산팔경光山八景은 용진층만聳珍層巒이라 했다. 용진산 정상을 한 바퀴 둘러보면 생각지도 않은 풍치와 사연을 접할 수 있다. 
    2020-03-11 | NO.285
  • 가헌정 稼軒亭
    남구 주월동광주읍지와 조선환여승람에 이 정자에 대한 기록이 있다. 남구 주월동에 가헌稼軒 김판석金判錫이 창건했고 후석 오준선의 찬기가 있다[在州西 珠月里 金判錫所搆 有原韻 後石 吳駿善 撰記]고 하였다.김판석은 참봉, 도정 등의 벼슬에 재임했다고 하나 실직이 아닌 수직(추천)을 받은 명예직으로 보인다. 가헌은 오준선이 지어준 호다. 가헌은 그의 아호이면서 정자의 액명額明이 되었다.  稼軒가헌이란 자연을 이용하여 부지런히 갈고 심는 농토의 생산으로 부모와 자손을 봉양하고 손님의 침식을 제공하는 등의 봉친奉親, 접빈接賓을 가리켜 이른 말이다. 김판석은 평소 주경야독의 선비생활로 이러한 일들을 몸소 실천에 옮겨 향리, 사림 등의 많은 칭송을 받아왔다. 오준선은 일부러 이러한 아호를 지어 그의 행적을 찬미한 것으로 보인다. 오준선은 가헌정기稼軒亭記에서 “김판석은 그의 집이 가난하여 몸소 밭을 갈아 그의 어버이를 봉양하였고 또 그는 근검한 생활로 모범을 보여 가도家道를 떨치었다. 이로 인하여 생전에 부모를 모시고 사후에 장례를 받드는 모든 절차에 있어서 그의 예의를 다하였다. 한 고을의 사람들이 모두 그의 행동에 감복하고 모두 그의 효행을 칭찬하였다. 가난의 곤궁을 굳게 견디고 맑은 지조를 애써 가꾸며 힘을 다해 밭을 갈아 어버이의 맛 좋은 음식을 마련하였다. 또 씀씀이를 줄이고 재물을 아껴 모은 여유로움으로 많은 손님을 접대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 지역의 사림士林들로부터 효자의 공천公薦을 받았고 이웃마을의 여러 사람들까지 모두 그의 의로움을 칭송하였다.”라고 했다.김판석은 원운에서 귀거래사 같은 삶을 살았다고 알리고 있다.   官祿無功農有功 관록에는 공이 없고 농사에만 힘을 쓰니暮年生業自間躬 늙은 만년의 생업에도 이 한 몸이 한가하도다.四隣松竹靑山下 동서남북 푸른 송죽 청산 아래 가득하고五畝桑麻惠雨中 다섯이랑 뽕나무와 삼대는 단비 속에 자라나네. 荷鋤夜月尋陶逕 밝은 달밤 호미 메고 도연명 샛길 찾아가고夙駕星晨講威風 새벽 별을 바라보며 위엄있게 시를 외었도다. 稼亭移作軒之北 북쪽 마루 한가한 곳에 가헌 정자 지었더니呼我人間一野翁 사람마다 나를 보고 시골늙은이라 부르도다. 
    2020-03-11 | NO.284
  • 강루 江樓
    광주 강루는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 1519 ∼1581)의 《송천유집(松川遺集)》 松川先生遺集卷之一에 시 "광주 임곡의 황룡강에  있는 박 거사 강루에서 쓰다.題朴居士江樓 光州林谷黃龍江上"이라는 글에서 찾을 수 있다. 결국 광주 강루(江樓)는 조선 중기에 박 거사(朴居士)라는 인물이 황룡강가에 지은 정자였으나 어떤 정자인지 그 실체를 알 수 없다. 황룡강 가에 박씨 성을 가진 주인의 정자라고 본다.조선 후기의 문인 여필용呂必容(1655 ~ ?)이 1795년에 장성현감으로 부임하고 그 이듬해 김언거의 풍영정에 들려 읊은 시 가운데에도 '강루(江樓)위로 올라가서 티끌 근심 씻었도다'라는 글도 있다.대부분의 시에 등장하는 '강루'는 광주 인근 영산강, 극락강, 황룡강 주변에 있는 정자로 해석된다. 따라서 특정한 정자를 지정하더라도 그 시와 관련된 정자 주인이나 주변환경을 이해야만 정자를 추정할 수 있다.
    2020-04-10 | NO.283
  • 강정 江亭
    남구 구소동 (지석천)송암松巖 최응룡崔應龍(1537~1592)의 본관은 삭녕朔寧이며 자는사서士瑞, 별호는 충절忠節이다.통덕랑 강정 최경립의 아들로 남평 출신이다. 형조참판에 올랐지만 온갖 사화로 세상이 어지러워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낙향했다. 지석천 강변 소나무숲에 정자를 짓고 은거하며 책을 읽고 자연을 즐기며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그 정자가 강정이다.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남평에 사는 주부 홍민언과 광주 대촌동 양과리 출신 야정 최후립과 최홍립 등이 장정들을 이끌고 500여명의 남평의병을 일으켰다. 남평의병의 수장이 되어 6월 3일에 월파 유팽로가 이끄는 옥과의병과 합류하여 전라좌의병에 합세한다. 7월 9일에 금산에 도착하여 고경명 의병과 합세하여 왜적과 싸워 수백 명을 무찌르는 전과를 올렸다. 다음날 왜적이 관군을 급습하여 관군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후퇴하자 아들 영수에게 선봉으로 나가 왜적을 대적하도록 하여 수많은 적을 참살하다가 온 몸에 상처를 입었고 삼대독자인 아들 영수와 같이 부자가 순절했다. 1605년 선조는 그에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했고 1789년 좌부승지左副承旨 이서구의 천거로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에, 아들 영수는 도승지都承旨를 받았고 시호는 충절忠節이다.많은 사람들은 2대 독자인 최응룡과 3대 독자 영수 부자의 숭고한 순절에 애도의 뜻을 표하고 충절과 무열의 공을 세운 부자라 하여 칭송이 높다.
    2020-03-11 | NO.282
  • 강호정 講好亭 척서정滌暑亭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 1038-4담양의 척서정은 2004년 지방유형문화재 제270호로 지정됐다. 척서정은 영천이씨대치문중종회에서 관리하는 데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마을 한가운데 넓은 대지에 있다. 정자나무와 함께 마을 광장 역할을 하는 장소에 세워져 있는 특이한 형태의 정자이다. 주민들의 휴식처뿐만 아니라 마을회의 장소로도 활용되고 있다. 옛 문헌에는 이 마을에 '강호정'이라는 정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척서정'이라는 이름은 후대에 바뀐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척서정에 대한 초창기 기록은 없으나 광주읍지에 척서정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광주읍지》(1879, 1924)에는 초명은 강호정이며 주의 북쪽 40리에 있으며 참의 조안정의 별장이었는데 지금은 척서정이 되었다. 강호정은 이후 폐허가 된 것을 영천이씨가 중수해 척서정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정자내부에 척서정 현판과 시를 적은 액자가 여러개 걸려 있다. 보통 정자는 경치좋은 강변이나 전망이 좋은 언덕에 세워지는 것이 일반적인 이 정자는 마을입구에 세워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아마도 집성촌이었던 이 마을에서 마을회의나 크고 작은 행사를 하기 위해 세운 정자라 할 수 있다.1931년에 발간된 대전면지에는 척서정 중수 때 상량문에 당 정관 원년(627년)에 중수한 사적이 명기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척서정은 1400년대 중반에 초창될 가능성이 높으며 이후 1827년 등 중수가 수차례 이루어졌으며 최근에 기와를 교체했다. 2000년대 초반에 기와를 교체했다. 정내에는 척서정의 중수기 등 현판이 걸려 있으며 특히 척서정에 관한 처음 기록인 야은野隱 이정태李鼎泰(1596~1669)의 시로 미루어 17세기 건립으로 보인다. 또 원운으로 전하는 이인李璘(1657~?)의 시, 1849년의 이동욱(1789-1849)의 기문, 1893년의 시와 기문 등이 기록되어 있는 편액도 있다. 주변에 향암 이정순을 기리는 비가 서 있다.  
    2020-03-11 | NO.281
  • 개산송당
    서구 매월동 회산마을43세 때 개산 남쪽의 물을 끌어들여 농사를 짓기 위해 방죽을 막았다. 방죽 위에 수월당水月堂을 짓고 이 정자에서 고봉 기대승과 같이 성리학을 논했다. 그는 당대를 함께 산 광주 출신의 고봉 기대승(1527~1572)과는 소년 시절부터 절친이었다. 고봉은 1년 아래였지만 젊은 시절부터 도의지교道義之交로 함께 학문을 절차탁마한다. 개산송당蓋山松堂은 명종 때 개금산 아래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1526~1593) 이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쳤던 집의 당호堂號이다. 오늘날 서구 매월동 회산마을이다. 30세 무렵인 1556년에 개산송당에 머물면서 제자를 기르고 도학道學(성리학)을 탐구하였다. 영의정을 지낸 사암 박순(1523~1589)과 제봉 고경명(1533~1592)과도 우의가 깊었으며, 23살이나 차이가 난 풍영정의 주인 김언거(1503~1584)와의 사이도 돈독했다. 극락강의 뱃길을 따라 풍영정을 자주 찾은 이유였다. 또 향약을 실시하고 이이李珥, 노사신盧思愼 등과 교유하였다. 1560년 목사 유경임柳景深을 도와 향교를 중수하고 학헌學憲 학규學規를 바로잡아 생도들이 공부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다음, 사전私田과 노비를 향교의 비용에 보탠다. 향교의 중수를 기념하여 흥학비興學碑를 세울 때 고봉은 비문을 짓고, 회재는 비석의 뒷면에 문장[碑陰記]을 새긴다. 이는 당시 고봉과 회재가 광주의 대표적인 학자였음을 알게 해준다.
    2018-05-24 | NO.280
  • 견훤대
    892년 무진주(지금의 광주)에서 거병한 후 900년 완산주(지금의 전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은 경상도 상주 가은현 출신인지, 광주 북촌 출신인지 궁금하다. 다소 뚱딴지같은 질문을 던진 것은 '삼국유사 권2', '후백제와 견훤조'에 실려 전하는 견훤의 출생 설화 때문이다."옛날 한 부자가 광주 북촌 마을에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딸 하나가 있었는데, 용모가 매우 단아했다. 어느 날 딸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매일 자주색 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로 와서 관계를 맺곤합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다. '네가 바늘에 실을 꿰어 그 사람의 옷에다 꽂아 놓아라' 딸이 그렇게 했다. 날이 밝자 북쪽 담장 아래에서 풀려나간 실을 찾았는데, 실은 큰 지렁이의 허리에 꿰어 있었다. 그 후 딸이 임신을 하여 사내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열다섯 살이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 일컬었다."일연의 '삼국유사'는 견훤이 광주 북촌에서 태어났다는 설화를 전하고 있다. 하지만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견훤이 경상북도 상주 가은현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고, 학계에서는 이를 정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견훤의 출신지가 오늘 어디인지를 묻는 이유는 상주 출신설이 갖는 논리적 허점이 너무 많아 보일 뿐더러 '지렁이 설화'의 땅 광주에 견훤 관련 흔적이 많이 남아 전하기 때문이다. 그가 상주 출신임을 의심하게 만드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첫째, 아자개가 견훤의 친아버지(生父)라면 그의 아들의 적수였던 고려의 왕건에게 귀부할 수 있겠는가?둘째, 918년에 일어난 아자개의 왕건에게 귀부(歸附ㆍ스스로 와서 복종함) 사건은 아자개가 견훤의 생부였다면 당시 최고의 빅뉴스였을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어디에도 그와 관련된 기록은 없다.셋째, 아자개가 왕건에게 귀부하기 10여 년 전인 906년, 견훤이 후백제의 왕이 되어 상주에 금의환향하지만 상주민들의 견훤에 대한 어떤 반응도 사서에는 보이질 않는다. 넷째, 견훤 정권에 참여한 인물 중 상주 출신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에 반해 광주 출신일 가능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광주에서 군사를 일으킨 견훤은 거병 한달 만에 5000의 무리를 모은다. 궁예가 3500의 무리를 모아 자립하는데 10년이 소요되었음과 비교하면 믿기 어려울 만큼의 놀라운 속도다.둘째, 지훤을 비롯한 박영규, 김총, 능창 등 견훤 정권의 주변 인물들은 모두 광주와 광주 주변 출신의 인물들이다. 견훤 정권의 중심 인물 중 상주 출신은 단 한명도 없다.위에서 살핀 것처럼 견훤은 상주 출신이 아닌 광주 출신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며, 출신지의 끈끈한 연고를 바탕으로 후백제를 건국할 수 있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맞아 보인다. 그 합리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많은 흔적들이 각종 '고지도'나 문헌 및 전설 등에 남아 있다.광주의 북쪽, 영산강 상류지역에는 삼국유사의 출생 설화 이외에도 견훤과 관련된 더 많은 자료가 남아 있다. 19세기에 제작된 각종 문헌에 남아 전하는 '견훤대(甄萱臺)'와 '방목평(放牧坪)'이 그것이다.현재까지 알려진 옛 문헌 가운데 견훤대와 방목평에 대해 처음 언급한 관찬 자료는 18세기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지도서'다. 여지도서 이후 간행된 '광주읍지'에도 견훤대와 방목평을 다루고 있고, 그 내용도 여지도서와 대동소이하다.광주읍지에 따르면 "견훤대는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甄萱臺 在北州十五里)"고 했고 "방목평은 견훤대 아래에 있으며 민간에 전하길 견훤이 군대를 주둔시키고 말을 기르던 곳이라고 한다(放牧坪 在甄萱臺下俗傳甄萱留陣牧馬之所)"고 적고 있다.견훤대와 방목평은 지금 어디일까? 광주읍지에 보이는 '견훤대'가 지금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생룡동 뒷산인 '대포리봉'(죽취봉으로도 불린다)과 동림동의 '대마산'으로 견해가 엇갈린다. 북구 생룡마을 뒤에서 대포리봉으로 가는 가파른 구릉을 따라 꼭대기까지 약 2.5㎞에 걸쳐 흙과 돌로 쌓은 성터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 성터 꼭대기를 견훤대라 부른다고 한다. 실제로 생룡마을 뒤에서 통일신라시대 토기와 기와 조각들이 출토되기도 했다. 대포리봉이 견훤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견훤이 광주 북촌에서 출생했다는 삼국유사의 설화나 생룡마을 등 '용(龍)'자 이름이 붙은 동네 이름이 유독 많은 것과 관련짓기도 한다. 그러나 대포리봉이 견훤대라는 설은 다음의 취약성을 안고 있다. 대포리봉이 있는 생룡동은 옛 거리상으로 북쪽 40리에 있던 동네다. 이는 당시 견훤대가 '북쪽 15리에 있다'는 기록과 맞지 않는다.이에 반해 동림동의 대마산(93.9m)이 견훤대라는 증거는 이렇다. 19세기에 제작된 '비변사인 방안지도(備變司印方眼地圖)'의 주기(註記)에 "견훤대는 황계면에 있다(甄萱臺在黃界面)"고 밝히고 있다. 황계면은 대마산이 있는 지금의 동림동 일대를 부르던 옛 지명이다. 또한 이 지도의 주기에 "황계면이 읍치로부터 10~15리에 있다"고 기록돼 있어 견훤대가 '북쪽 15리에 있다'고 했던 광주읍지의 기록과도 부합된다. 19세기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에도 견훤대가 황계면 남쪽에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더욱이 대마산은 왕조대로 추정되는 광ㆍ송간 도로변의 사월산(혹은 백마산으로도 추정함)과도 서로 마주보고 있어 "왕조대는 견훤대와 더불어 서로 마주보고 있다(王祖臺與甄萱臺相對)"는 여지도서의 기록과도 부합된다. 단원 김홍도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동국지도'는 황계산(지금의 운암산) 옆에 별도의 산을 그려놓고 이곳을 견훤대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런 자료들은, 조선시대 후기 사람들은 견훤대가 북구 생룡동이 아닌 동림동의 대마산을 견훤대로 믿었음을 보여준다.   광주 북구 생룡동 일대 '龍' 들어간 마을 이름 10여 곳   영산강 유역에서도 나주 이남의 중ㆍ하류 지역은 왕건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설화가 압도적이다. 왕건과 오다련의 딸이 처음 만난 나주 시청 앞의 완사천, 왕건이 견훤의 군대에 쫓기던 중 꿈의 계시를 받았던 나주시 동강면의 몽송마을, 그리고 왕건이 견훤의 추격을 피해 건넜다는 무안 몽탄면과 나주 동강면 사이의 몽탄나루(오늘의 몽탄대교), 왕건이 견훤의 군대를 크게 이겼다는 무안 몽탄면의 파군교 등이 그것이다. 반면, 영산강 상류 지역에는 견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광주 북촌의 지렁이 설화나 문헌에 등장하는 견훤대와 방목평이 그것이다. 견훤 설화는 나주 이남에 남아 전하는 왕건 설화에 비하면 매우 적다. 이는 왕건이 역사의 승자였던 반면, 견훤은 패자였던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영산강 상류, 그의 탄생지로 추정되는 북구 생룡동 일대에 남아 전하는 '용(龍)'자 마을의 집중도 흥미롭다. 고려 2대왕 혜종이 태어난 나주의 흥룡동처럼 '용'은 왕을 상징하는 지명으로 곧잘 등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산강 상류인 북구 생룡동과 담양군 대전면 일대에는 생룡ㆍ용전ㆍ용산ㆍ용강ㆍ용두ㆍ복룡ㆍ용동ㆍ청룡ㆍ신룡ㆍ용정 등 '용'자를 쓴 마을 이름만 줄잡아 10여 곳에 이른다. 영산강 유역에서 반경 5㎞ 안에 이처럼 '용'자 지명을 가진 마을이 밀집해 있는 것은 이 일대가 유일하다. 영산강 이북인 광주에 오면 견훤은 왕건의 주위를 맴도는 조연이 아니라 '견훤이 태어났다, 견훤이 머무르면 진을 쳤다, 견훤이 포위를 풀었다' 처럼 주어가 되고 주연이 된다. 역사적으로는 왕건에게 패했지만, 전설을 통해서나마 견훤을 역사의 승리자로 두고 싶어 하는 광주인들의 견훤 사랑 때문은 아닐까?   *노성태 빛고을역사교사모임 회장ㆍ국제고 교사
    2020-03-11 | NO.279
  • 경렴정
    문헌상 가장 이른 광주권 누정은 고려 말기인 14세기 후반의 경렴정景濂亭이다. 주인은 경렴 탁광무卓光茂(1330∼1410)로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1367)에게 배우고 이색, 정몽주, 문익점, 이숭인 등과 교류했다. 탁광무는 고려 공민왕 때 우사의右司儀로서 신돈에 아부하여 행패를 부리는 홍영통洪永通을 탄핵했다가 파직되었던 강직한 인물이었다. 이처럼 신돈 일파의 전횡에 맞서다가 모함당하고 낙향했다. 이때가 1370년대로 보인다. 문헌에 나타난 경렴정 역시 탁광무의 문집인 '경렴정집景濂亭集' 권1 경렴정 편액이라는 초계 정씨가 지은 시구에 ‘해동형승천호남海東形勝擅湖南 상유렴정하유담上有濂亭下有潭’이라는 내용에서 알 수 있다. 이는 광주 고문학의 시조격에 해당한다. 이 시는 조정의 기강을 바로 하려했던 답답한 마음[遣悶]을 표현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이 싯구에서 ‘호남’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다는 것이다.1478년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동문선 제97권 설편說遍에 ‘경렴정명후설景濂亭銘後說’에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1342~1398)의 이야기가 있다. 정도전은 1377년 가을 유배가 풀려 돌아가는 길에 전남 장성의 진원 불태산 취봉사鷲峯寺에서 “스님이 멀리 선생 댁을 가리키는데, 하얀 돌 맑은 샘 있는 골짜기가 그윽하군요.”라고 소식을 전했다. 탁광무가 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못 가운데에 작은 섬을 만들어 그 위에 정자를 짓고 생의 말년을 지냈다고 전한다. 하얀 돌[白石] 맑은 샘 골짜기[泉谷]를 놓고 여러 이야기가 있다. 어떤 이는 오늘날 광주시 북구 석곡동石谷洞 인근이라고 하고, 후손인 광주의 탁인석 박사는 운천호수 인근이라고 말한다. 정자 이름은 ‘염계濂溪를 경모景慕하라’는 뜻으로 익재 이제현이 지었다. 염계 주돈이는 ‘우주와 생명의 대서사’로 일컬어지는 ‘태극도설’로 성리학의 지평을 열었던 이다. 탁광무는 풍월을 벗 삼은 듯 우주에 안긴 듯, 홀가분하고 편안하였다.그의 아들인 문정공 죽정 탁신(1367∼1426)도 광산구 월계동 천곡에 정자를 지었다.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북쪽 35리에 있다. 기록에는 주춧돌만이 남아있는 데 노송이 있어 탁씨의 소나무가 있는 정자라는 뜻에서 탁송정卓松亭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탁신의 둘째부인은 광주 정씨로 이때 탁씨는 이미 광주 토반에 들었던 것 같다. 이제현이 탁광무의 정자에 경렴정이란 이름을 붙여준 사실은 탁광무의 문집 <경렴정집景濂亭集>에 올라 있다. 탁광무의 싯구를 보면 다음과 같다.경렴정익제소명 景濂亭益齊所名 라향인전강작안 懶向人前强作顔 사람들 앞에서 억지 웃음 짓기 싫어수정종일대청산 水亭終日對靑山 온종일 물위 정자에 앉아 청산만 바라보네오가기호여시이 吾家嗜好與時異 우리 집 기호는 시속과는 다르고차지청유비세한 此地淸幽非世閒 이 땅의 맑고 그윽함이 한가한 세상은 아닐세풍월무사수처족 風月無私隨處足 풍월은 누 구 것도 아니니 어디서나 마음 따라 만족하고건곤대도방여한 乾坤大度放予閑 천지는 도량이 커서 한가한 나를 놓아두네소요자적망기리 逍遙自適忘機裏 만사를 다 잊고서 멋대로 돌아다니다가와간장공권조환 臥看長空倦鳥還 누워 바라보는 먼 하늘에 게으른 새 돌아오네     景濂亭集跋少學於光山金文正先生之門矣 遂卜地於光州瑞石之陽。築一小室。與光山鄭先生文景公爲友作亭于光州別墅。鑿地種蓮。築島池中。一嘯一詠。自得逍遙焉。李益齋 齊賢 文忠公。題其扁曰景濂亭景濂亭銘後說 謙夫卓先生 光茂 於光州別墅。鑿池種蓮。築土池中爲小島。構亭其上。日登以樂。益齋李文忠公命其亭曰景濂。蓋取濂溪愛蓮之義。欲其景慕之也。未見其物則思其人。思其人則必於其物致意焉。感之深而厚之至也。嘗謂古人之於花草。各有所愛。屈平之蘭。陶潛之菊。濂溪之於蓮是也。各以其中之所存。而寓之於物。其意微矣。然蘭有馨香之德。菊有隱逸之高。則二子之意可見。且濂溪之言曰。蓮。花之君子也。又曰。蓮之愛。同予者何人。夫以其所樂。與人共之。聖賢之用心也。而嘆時人之莫己知。以俟後來於無窮。苟知蓮之爲君子。則濂溪之樂。庶乎得矣。然因物而得聖賢之樂。亦豈易言哉。黃魯直曰。周茂叔胸中灑落。如光風霽月。程子曰。自見周茂叔。每令尋仲尼顏子樂處所樂何事。自是唫風詠月。以歸有吾與點也之意。道傳私竊以爲景濂有道。須要識得灑落氣象。有與點之意。然後可以言至。文忠公之銘曰。鉤簾危坐。風月無邊一句。截斷古人公案。安得一登其亭。與謙夫同參。경렴정 명의 후설[景濂亭銘後說] 겸부謙夫 탁卓 선생 광무光茂께서 이 광주 별장에 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못 가운데에 흙을 쌓아 작은 섬을 만들어 그 위에 정자를 짓고 날마다 오르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익재益齋 이 문충공李文忠公(이제현을 말함)이 그 정자를 경렴景濂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대개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의 호에서 연꽃을 사랑하는 뜻을 취하여 그를 경앙하고 사모하고자 한 것이리라.대저 그 물건을 보면 그 사람을 생각하고, 그 사람을 생각하면 반드시 그 물건에 마음을 쓰게 된다. 이것은 느낌이 깊고 후하기가 지극한 것이다.일찍이 말하기를, 옛사람에게는 각기 사랑하는 화초가 있었다 한다. 굴원의 난초와, 도연명의 국화와 염계의 연꽃이 그것으로 각각 그 마음에 있는 것을 물건에 붙였으니, 그 뜻이 은미하다 하겠다. 그러나 난초에는 향기로운 덕이 있고, 국화에는 은일의 높은 것이 있으니 그 두 사람의 뜻을 볼 수가 있다. 또 염계의 말에 “연꽃은 꽃 중의 군자다고 하고 또 이르기를 연꽃을 나처럼 사랑하는 이가 어떤 사람인가?” 라고 했다. 대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남과 함께 하는 것은 성현의 용심이며, 당시 사람들이 알아주는 이가 없는 것을 탄식하고 뒤에 오는 무궁한 세상을 기다렸으니, 진실로 연꽃의 군자됨을 알면 염계의 즐거움을 거의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물건을 인하여 성현의 낙을 아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황노직黃魯直이 이르기를 “주무숙周茂叔(염계의 자)의 흉중은 쇄락灑落하여 맑은 바람과 갠 달 같다.”고 하였다.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주무숙을 본 뒤로, 매양 중니仲尼와 안자顔子의 즐거운 곳과 즐거워하는 것이 무슨 일인가를 찾게 되었다. 그 뒤로부터는 풍월을 읊으며 돌아오는 것이 ‘나는 증점曾點을 허여한다.’는 뜻이 있었다.”고 하였다.여기에서 정도전은 혼자 생각하건대, 염계를 경앙하는 방법이 있으니 모름지기 쇄락한 기상을 알아 얻고, ‘증점을 허여한다.’ 하는 뜻이 있은 연후에야 그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문충공文忠公이 명하기를 ‘발 걷고 꿇어앉으니[구렴위좌 鉤簾危坐] 풍월이 가이 없네[풍월무변 風月無邊]’라고 하였으니, 이 한 구절은 옛사람이 단정한 공적인 안문案文이다. 어떻게 해야 그 정자에 한 번 올라 겸부謙夫와 같이 참여할 것인지 모르겠다.
    2018-05-24 | NO.278
  • 경렴정 景濂亭
    문헌상 가장 이른 광주권 누정은 14세기 후반의 경렴정이다. 주인은 경렴 탁광무(1330∼1410)로 익재 이제현에게 배우고 이색, 정몽주, 문익점, 이숭인 등과 교류했다. 탁광무는 고려 공민왕 때 우사의右司儀로서 신돈에 아부하여 행패를 부리는 홍영통洪永通을 탄핵했다가 파직되었던 강직한 인물이었다. 이처럼 신돈 일파의 전횡에 맞서다가 모함당하고 낙향했다.문헌에 나타난 호남이란 말의 처음은 탁광무의 문집인 경렴정집景濂亭集 권1 경렴정 편액에 실린 ‘해동형승천호남海東形勝擅湖南 상유렴정하유담上有濂亭下有潭’이라는 시구이다. 그는 광주 고문학의 시조격에 해당한다. 이 시는 조정의 기강을 바로 하려했던 답답한 마음[遣悶]을 표현했다.1478년 서거정이 편찬한 동문선 제97권 설편說遍에 ‘경렴정명후설景濂亭銘後說’이라는 삼봉 정도전의 이야기가 있다. 정도전은 1377년 가을 유배가 풀려 돌아가는 길에 전남 장성의 진원 불태산 취봉사鷲峯寺에서 “스님이 멀리 선생 댁을 가리키는데, 하얀 돌 맑은 샘 있는 골짜기가 그윽하군요.”라고 소식을 전했다. 탁광무가 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못 가운데에 작은 섬을 만들어 그 위에 정자를 짓고 생의 말년을 지냈다고 전한다. 하얀 돌[白石] 맑은 샘 골짜기[泉谷]를 놓고 여러 이야기가 있다. 어떤 이는 오늘날 광주시 북구 석곡동石谷洞 인근이라고 하고, 후손인 광주의 탁인석 박사는 운천호수 인근이라고 말한다. 탁씨문중 선산이 가까운 마륵동으로 옮겼기 때문에 그들은 이곳에 경렴정이 있었다고 마음 속에 그리고 복원도 이곳에 할 예정으로 있다.정자 이름은 ‘염계濂溪를 경모景慕하라’는 뜻으로 익재(益齋) 우탁 이제현이 지었다. 염계 주돈이는 ‘우주와 생명의 대서사’로 일컬어지는 ‘태극도설’로 성리학의 지평을 열었던 이다. 탁광무는 풍월을 벗 삼은 듯 우주에 안긴 듯, 홀가분하고 편안하였다. 이제현이 탁광무의 정자에 경렴정이란 이름을 붙여주며 탁광무의 문집 <경렴정집景濂亭集>이 한국문집총간에 실려 한국고전번역원에 올라 있다.   景濂亭集跋少學於光山金文正先生之門矣 金文正 선생에게 소학을 배우고遂卜地於光州瑞石之陽。築一小室。與光山鄭先生文景公爲友作亭于光州別墅。鑿地種蓮。築島池中。一嘯一詠。自得逍遙焉。李益齋 齊賢 文忠公。題其扁曰景濂亭  
    2020-03-11 | NO.277
  • 경성재 警省齋
    광산구 선암동 황룡강변금호錦湖 최원택崔元澤(1862~1933)이 지어 지냈다는 경성재는 <조선환여승람>(1935)에 전하고 있어 그 이전에 지어진 정자로 보인다. 정자 이름인 경성警省은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깨우쳐 돌아보고 살핀다. 깨닫다. 경계(警戒)하며 조심하며 명심(銘心)하다'는 의미이다.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며 봉건사회의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했던 순암 안정복은 <위학잠爲學箴>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爲學之工 학문을 하는 공부는惟敬惟勤 오직 공경과 부지런함이니勝怠警惰 게으름을 이기고 나태함을 깨우쳐惕厲朝曛 아침저녁으로 가다듬으라一或不省 어쩌다 한번 살피지 못하면聖狂斯分 성인과 미치광이가 여기에서 나뉘나니老更篤信 늙어가며 더욱 돈독히 믿어事我天君 나의 천군을 섬길지어다   
    2020-03-11 | NO.276
  • 경암정 耕庵亭
    북구 석곡동경암정은 유학자이며 참봉을 지낸 경암(敬庵) 정민석(鄭珉錫, 1866~ ?)이 지었다. 《조선환여승람》(1935)에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교리였던 지고(止皐) 고의상(高儀相 1833 ~1906)이 지은 기문이 남아 있다고 전하고 있어 구한말에 지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정자 주인은 본관이 경주로 노사 기정진의 손자이며 항일 의병이었던 송사 기우만의 문인이었다. 석곡동은 무등산 자락 북쪽에 위치한 무등산수박이 유명하며 환벽당, 풍암정, 취가정 등 가사문화권에 인접한 산수가 수려한 자연마을로 문화유적지가 많이 산재하고 있다. 
    2020-03-11 | NO.275
  • 경암정사景岩精舍
      옛 하남면 경암리, 광산구 하남동 경암마을에 회사悔史 김기홍金基弘의 강학지소였다. 하남2지구에 현 하남초등학교 자리에 경암초등학교를 신설하려 하였으나 못했다. 인근에 경암근린공원이 있다.옛날 마을앞에 큰바위가 있었다 하여, 속칭 '빛바위'라 불렀다. 순천박씨가 개촌하였다 하나 분명하지 않으며 그후 경주김씨 김규환공이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2020-03-11 | NO.274
  • 경양모정 景陽茅亭
    동구 계림1동 (옛 경양방죽 인근)동구 계림동과 중흥동 일대에 있었다고 하는 경양방죽, 이 호수에 있었던 경호정景湖亭, 경호대景湖臺, 경호루景湖樓 등 세 정자를 가리켜 경양모정이라 한다.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북쪽 5리에 있다. 광주목사 김선(金銑, 1750~1837)이 경양호 풍치를 관망하기 위해 1804년 전후로 세웠던 개인 초당이었다.고을에서 이재섭(李載燮)이 재주와 명망이 있다 하여 주인으로 위촉하였고, 선비들의 제영이 있었다.특히 경호정은 1848년 광주목사 윤치용(尹致容, 1800~ ?)이 중건하면서 그 자리에 자신의 정자를 새로 지어 응향정凝香鼎으로 정명이 바뀐다. 이 응향정은 광주읍지(1879)에 멸실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바라본 경양방죽과 일대의 숲은 풍취가 그윽했다. 광주 평야의 젖줄이었던 경양방죽은 계림1~2동에 해당된다. 무등산에서 뻗어 내린 능선의 끝자리 ‘매머리봉’과 동계천 하류 ‘무드리’들이 만나는 곳이다. 2004년까지 광주광역시청이 있었다. 팽나무, 왕버들나무 숲을 이루던 여제단勵祭壇과 경양방죽 주위를 ‘서(새)벌’이라 부르다가 1946년부터 경호동과 계림동이라 했다. 조선시대 광주목 경양면景陽面에 속했으며, 저수지와 역둔수전驛屯水田지대였다. 경양방죽은 경호鏡湖라고도 불렀다. 김방이 1440년 세종의 중농정책을 받들어 2년여의 공사 끝에 완공한 호수이다. 광주고, 계림초, 옛 광주상고 등 세 학교의 정문 앞에서부터 부채꼴 모양으로 벌어진 남서쪽 일대에 펼쳐졌다. 면적이 4만6천여평, 수심이 10m에 달했다. 경양방죽은 5백여년 동안 광주 고을의 생명수였다.이곳은 담양 관방제림처럼 둑에는 제방을 막고 바람을 막기 위한 숲이 조성되었다. 경양지景陽池, 경호鏡湖, 연지蓮池, 영지影池 또는 경호영지鏡湖影池 등으로 불렀다.동구 계림동 옛 광주시청이 있던 자리에 야트막한 야산이 있었다. 이 야산은 조선시대 인조 때 왕자의 태를 묻었기에 태봉산胎峰山이라 했다. 풍수설에 따르면 무돌골[武珍州] 광주는 이무기가 용이 되어 하늘에 오르는 형국으로 상룡승천上龍昇天의 지형이다. 그중에서도 옛 시청 자리가 용의 여의주에 해당하는 명당이라는 것이다.광주시가 도시개발을 위해 천하명당이라 일컫던 태봉산을 허물어 산 아래에 있던 경양지景陽池를 메우는 데 사용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이를 애석해한다. 광주시 황토사료에 경양지에 얽힌 개미보은의 전설이 있다. 
    2020-03-11 | NO.273
  • 경연대 景筵臺
    남구 구만산길 34   조선 선조 때 남강정의 주인 양심당 이시원(1428~1488)과 동생 청심당 이조원(1433~1510)이 함께 그의 아버지 필문 이선제(1390~1453)를 위해 지었다. 문인들과 예를 익히고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을 연마한 곳이다. 1610년(만력38년 경술 2. 20) 포충사제위답여납명문에는 유등곡리(柳等谷里) 만산정(萬山亭)으로 기록되어 있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서쪽 20리에 있다. 이곳 만산마을은 큰 산아래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말+산+메>마살메>만산(萬山)으로 변천된 지명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 있어 만산(萬山)이라 한다고 전해온다. 이시원은 사후에 '정헌대부 예조판서'에 증직되었던 인물이지만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시대적 혼란 속에서 수많은 갈등의 정국 소용돌이에서 파란을 격어야 했다. 이선제의 오형제 중 삼남 이조원은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독학으로 학문이 대성하였고, 부친의 학통을 이어 문장과 도학이 당세의 종사宗師라 할 만큼 추앙되었다. 성종成宗이 여러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고 오로지 강학에만 열중했다. 1466년 전라도 어사가 되어 사천私賤 문적文籍과 감고監考 정이효鄭以孝 등을 서울로 압송하는 일을 하였다. 연산군의 폭정이 계속되자 바른 정사를 하도록 상소해도 듣지 않아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후진을 가르쳤다. 그 문하에서 박원형, 신승선, 이경균, 이원휘, 하숭, 고운 등과 같은 명신을 배출하였다.고향에 돌아와 살면서 우국충정을 읊은 ‘환향가’還鄕歌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 국한문을 혼용한 최고의 시조로서 귀중한 국문학 사료로 꼽힌다.   국은國恩이 망극罔極하샤 양도어사兩道御史육부제학六副提學 장자동長者洞 들려가니제자십이弟子十二 날 따르네언제야 강마도학講磨道學하야위국충신 하여 볼고 하노라 
    2020-03-11 | NO.272
  • 경운정 耕雲亭
    북구 문화동 두암마을장연섭張淵燮이 부친 경운거사耕雲居士을 기려 경운정耕雲亭을 지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정자 이름에서 나타나 있듯이 당시 정자가 있을 때 일대의 풍치를 노래한 8경이 전해오고 있다. 군왕봉의 왕봉명월王峯明月, 마산낙조馬山落照, 부평초적富平草笛, 구야농가九野農歌, 석계표오石溪漂o, 송림청풍松林淸風, 원촌취연遠村炊煙, 고사종성古寺鐘聲을 들 수 있다. 문흥동文興洞의 '문'자와 각화동角化洞의 '화'를 따서 1957년 문화동으로 바뀐 이곳은 각화마을 주변에 백제시대 석실분石室墳과 봉토분封土墳의 유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역사와 전통이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지금은 문화동 일대가 詩畵文化마을을 형성하고 2010년 이후 ‘도시에서 숲을 꾸다’라는 주제로 시화환경예술제를 갖기도 했다. 저탄소 녹색성장 테마와 문화, 자치의 명소 시화문화마을을 중심으로 지역민의 문화 수요에 부응하는 마을 축제로 시화환경예술제를 개최하여 전국에 관심을 끌고 있다.북구 문화동은 각화동과 문흥동(일부)이었다. 동광주 나들목과 농수산물시장이 있는 광주의 동쪽 관문에 있는 두암마을은 각화저수지 아래마을은 자연마을로 남아 있다. 마을 위에는 수락골과 북당골에서 흘러내린 물을 모이게 하는 각화제가 있다.
    2020-03-11 | NO.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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